동무론_김영민

7장. 에고이즘과 나르시시즘

백_일홍 2020. 1. 30. 09:50

나르시시즘과 함께, 나르시시즘을 넘어가는 새로운 사이길

 

나르시시즘에 대한 가장 초보의 설명은 '자아의 증폭'임.

내가 내 자의로 띄운 자아의 애드벌룬을 나 혼자밖에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은 나르시시즘에 내재하는 원초적인 불행이다.

 

나의 에고이즘만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장소, 바로 그것이 바느시시즘이 끈질기게 서식하는 우물이다. 나르시시즘은 종종 미덕이나 영웅적 행위의 꼴을 취한다.

맹자의 측은지심은 아무래도 나르시시즘일 수밖에. 그것은 안전한 에고이즘도 아니거니와 실존적 도약으로나마 앞당기려는 '타자라는 아득한 불가능성'도 아니다.

제도 종교들의 사랑 혹은 자비의 제스처도 대체로 나르시시즘에 기반하는데, 그 나르시시즘은 자기만족에 따른 접근 불가능성의 매력을 띤다. "한 어린 아이의 매력은 크게는 그 아이의 나르시시즘, 자기만족, 접근 불가능성에 있다.

 

외투를 벗어 '사랑'하는 애인에게 걸쳐주는 행위만큼 나르시시즘의 일반적인 꼴을 잘 예시하는 사례도 드물다. 그녀를 내 외투 속에 집어넣고 전염주술적 잔상 속에 증폭된 나의 에고를 빤히 들여다보면서 한결 심해진 추위를 용기있게 참아내는 것, 그것은 나르시시즘이다. 마땅한 교환의 대상조차 교환의외부로 징발함으로써 얻는 환상의 가깝고도 먼 것, 그것은 나르시시즘이다.

 

나르시시즘은 무엇보다도 문학예술적 상상력인데 비해 자본주의는 특히 그 자본주의적 시간관에서 분명해지듯이 반서사적이며 상상적이라기보다는 공상적이다.

 

그래서 에고이즘이 비교적 합리적인데 비해 나르시시즘은 종종 비합리적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종교는 본질적으로 나르시시즘인 것이다.

 

종교적 엑스터시는 오히려 지극한 재부성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자체로 나르시시즘의 원형이다. 제도 종교의 에고이즘을 극력 부인하는 반구제기의 종교적 세력들이 결국 상도하는 곳이 고작 나르시시즘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각주: 가령 아웃사이더들 중의 적지 않은 수가 왜 나르시시즘에 빠지는지를 곰곰 생각해보아야 한다. 병자들이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오히려 병자들은 인사이더들의 체계내적 배제의 논리를 강화하는 기제일 뿐이다. 아웃사이더는 오히려 자발적 병자인셈인데, 그들이 견디지 못하는 것은 정상인들의 체계내적 에고이즘이며, 그 에고이즘과의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이 불우한 환자들이 결국 상도하는 최후의 도피처는 곧 나르시시즘이기 때문이다. 나스시시즘! 공들여 죽을 쑨 후에 개를 주다!)

 

따라서 에고이즘과 나르시시즘을 횡단한 후에 남는 곳은 (현실적으로) 죽음인 것이다. (물론 동무란 그 횡단의 방식을 '생활양식의 일관성에 근거한 연대'로 재구성해 근기, 슬기 있게 살아남으려는 것.)

 

종교는 아무래도 나르시시즘의 집성체에 가깝다.

신의 품 속에 있다는 것은, 곧 제도의 음영이 만든 깊이의 착각 탓에 소외와 나르시시즘의 환상적 효과다. 신자에게 신은 이미 타자가 아니며, 또 타자가 될 수도 없는데, 제도 종교 속에서 운신하는 것 자체가 교리와 전통 속에 내재화된 신 관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전을 독파한 다음의 혜안으로 신을 믿는 사람은 없고, 결국 그 신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상상에 얹혀 제도와 타협할 뿐이다.

 

종교는 맞교환의 형식적 대칭을 넘어선 증여의 근본적 비대칭 속에서 새로운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시공간이다. 은화 30닢에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의 행위는 극히 징후적이다. 유다의 종말은, 어떤 공동체의 가능성을 감시, 간섭하는 체계의 시선을, 그 다른 교환의 방식을 예리하게 증거한다.

 

내가 보기에 그이 종말은 나르시스트의 전말에 대한 한편의 보고서를 방불케 할 뿐. 절망은 도대체 합리적일 수가 없는 사태다. 대체로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 자살하는 게 아니다. 자살은, 오히려 그 절망의 잉여로 기생하는 나르시시즘 속에서 이루어진다. 자살 역시 모종의, 발설될 수 없는 쾌락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 정사는 나르시스의 정치.

 

종교의 증여주의적 미덕 조차 그 나르시시즘과 깊게 겹친다.

종교적 나르시시즘은 그 비용이 커서 간간이 안팎으로 치명상을 선사하기도 함. 종교전쟁, 순교.

'자본제적 순교' = 기부. 미담. 이것 역시 나르시스적이다.

모든 나르시시즘은 필경 에고 속으로 되돌아가는 구심력일 수밖에 없지만, 그 표현형은 에고이즘의 중력을 넘어서는 원심력의 모습을 띠는 것이 보통이다.

 

한마디로 나르시시즘은 '혼동'이면서 '혼란'이다. '나'를 규정하는 심리적 원근법을 허물어버리기 때문. 편의상, 에고이즘을 안에, 타인을 바깥에 배치한다고 할 경우, 나르시시즘은 안이면서 밖이고 밖이면서도 안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나르시시즘은 종종 이타주의, 혹은 영웅적 투신의 겉모습을 띤다.

 

문제는 에고이즘도 아니고 나르시시즘도 아닌 생활실천의 길 속에서 지속적으로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르시시즘의 쓰임새에 너무 인색할 필요가 없다. 종교나 문학예술적 활동에서처럼 실은 나르시스적 생산성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행태이기 때문이다. 가장 무서운 패악은 나치즘의 조직적 폭력이 보듯이, 오히려 나르시시즘없이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도구적 합리성이다. 나치는 이성을 잃은 인간이라기 보다는 이성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간의 군상이다.

 

인지가 생물학적 진화의 맥락에 닿아 있는 조심 혹은 경계를 가리킨다면, 자의식은 특별히 인간적인 것이며 엄밀히 말해서 나르시시즘과 구별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태다.

 

타자에게 말을 걸고 손을 내미는 방식이 소수의 수행자들이 기별하는 에고 없는 상태에까지 이를 필요가 없다.

 

지나치게 옹색한 에고이즘은 가끔 비합리적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모든 합리성의 토대일 수 밖에 없다. 물론 '타자의 철학'이 결코 합리주의로 종결될 수는 없다. 합리주의의 종말은 결국 허무주의이며, 합리주의만으로는 타자와 연대를 위한 그 생산적 환상을 제대로 키울 수 없기 때문. 그러나, 합리성이란 섬세하게 비판받아야 하면서도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는 사실에는 역시 변함이 없다.

 

한마디로, 나르시시즘은 에고이즘을 벗어나는 우도(오른쪽 길)인 것이다. 그 길은 때로 파행적이거나 자폐적이고 심지어 자기파괴적이지만, 어차피 인류의 문화는 바로 그 생산성에 기댈 수밖에 없다.

 

나르시시즘과 함께, 나르시시즘을 넘어'가는 새로운 사이길을 통해 타자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조형할 수는 없을까?

 

우선 나르시시즘의 생산성을 긍정하되, 그것을 내내 응연히 지목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메타적 비판의 층위가 생활양식이 구체성 속에 안착, 유지되어야 한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안이한 비판은 관념론으로 흐른다.

 

혹은 심하게는 신비주의적 수행도에 빠져 또 다른 형식의 나르시시즘을 반복할 뿐이다.

 

나르시시즘이 기도아고 생산하도록 내버려두되 마른 눈으로, 응연히, 이드거니 그 생산성의 성격과 행로를 주목해야 하며, 특히 생산양식의 충실성으로써 조절하고 유도해야 한다. 내가 '약속'이라는 개념으로써 조형하려던 태도가

이와 관련된다.

 

옷을 벗듯이, 나르시시즘을 벗고 타자를 만날 수는 없다. 깨친 나르시시즘, 혹은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굽어보는 마른 시선은 늘 불행하다. 그것은 자아도 타자도 아닌 그 '사이'의 혼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고이즘은 궁극적으로 행복한 짓이다. 그것은 무지와 합리성 사이를 왕복운동하는 '기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초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동무론>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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