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론_김영민

13장. 연대의 사이길, 보편-개체의 계선을 넘어

백_일홍 2020. 1. 30. 12:36

1.보편과 개체 (1)


진리는, 보통명사이면서 동시에 고유명사일 수 있다는 욕심이다. 그러므로 진리라는 이름은 역사를 망각하고 (특히) 상처를 외면한 욕심 그 자체가 놓은 착시 효과인 것. 


무릇 보편성은 스스로의 출처와 그 일상적 내력을 망각하면서 기억되고자 한다. 


보편성이 특수자, 혹은 유력자의 이름으로, 알리바이로, 권력의지로, 그리고 이데올로기로 굳어간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미 상식이 되었다. 

카톨릭의 교황무오설이나 개신교의 성서무오설 역시, 유일무이하되 보편적이며, 역사적으로 생성되었건만 초월적이고, 고유명사이면서 동시에 보통명사라는 권력의지요, 착각이며, 체계의 맹점이다. 


삼촌을 애칭으로 삼치라고 부름. 

그는 삼촌이라는 말을 친족관계의 기술로 이해한 게아니라 나만을 고정적으로 지시하는 고유명사의 일종으로 여겼던 셈. 이는 

역사사회적 대상을 자연적인 대상으로 착각/학습하는 자연화(신화화)의 이데올로기적 효과인 셈. 

이같이 역사(삶충동)과 자연(죽음충동)을 혼동하는 이데올로기의 원형적 모습은,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상물 자체의 대상적 성격으로 대체하는 상품형식으로 소급된다. 


대의적, 역사적 주체로서 대통령 - 자연적, 혈통적 실체

정치적 환유의 한 고리 - 모종의 정치적, 형이상학적 실재의 은유적 재현 

기표의 연쇄 속에서 명멸할 수밖에 없는 일개 고유명사 - 한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로, 그 은유적 실체로서 우리들의 아비투스화한 신체 속에 인간된 것. 

박정희라는 고유명사의 주인은, 보편-개체(특수)의 역설적, 이데올로기적 사통을 통해 국민이라는 보통명사의 주인이 된다. 


대개 진리라는 고집, 혹은 환상은 선험화의 전략과 이데올로기론을 통해 재생산되는 법인데, 특히 후자의 경우들을 두루 살펴보면, 보편성이란 결국 개체와 사통하는 자기차이화의 체계라는 사실. 


보편과 개체, 보통명사와 고유명사이 사통과정에서 삭제되는 것은 이른바 '타자'다. 


체계의 (다양성이 아닌) 외부성을 확보하는 고리인 단독자의 문제는 곧 고유명사의 문제다. 이 고유명사는 그 누구와도 질적으로 구별되는 '바로 이 나'의 지평이다. (고유명사는 특수성-일반성이 아니라 '단독성-보편성'의 계선을 흐른다.)

'바로 이 나'의 '이것'은 타자의 환원불가능한 비대칭성을 가리키며, 궁극적으로 고유명을 제거할 수 없다. 


결국 개체는 단독자성의 (개체의 심중에 이미 들어와 있는) 상처와 아우라를 지닌 한, 사이비 보편성과 자기체계화의 일반성으로 포획될 수 없는 타자성과 비대칭성의 지평을 지닌다는 것. 


진리는 특권적 개체의 눈으로 독점한 보편성의 고집이다. 그것은 타인들의 집단적, 모방적 환상이 부재 속에 심어놓은 허상이요 맹점이다. 

"나의 진리, 나의 성격, 그리고 나의 이름은 어른들의 손에 달렸었다. 나는 그들의 눈을 통해서 나 자신을 볼 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린이였고, 어른들이 자기네의 갖가지 미련으로 빚어놓은 괴물이었다" 샤르트르, <말>


개체가 단독자적 자율성과 그 타자적 지평을 얻지 못할 때, 그리고 그 자율적 지평을 생산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는 연대에 실패할 때, 필경 개체는 보편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단말기어거나 통계치에 머문다. 


이데올로기 담론의 요체는 개체와 보편, 개인과 체계이 사통이다. 즉 개체는 보편의 이데올로기가 전파되는 단자적 매체일 뿐이고, 보편은 특권적 개체(들)의 알리바이이거나 이념적 소실점에 불과한 것이다. 


보편의 체계를 개체의 원시반본적 태도로 허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해방된 개체는 진정 보편의 체계와 질적으로 다른 생활방식과 동선을 얻을 수 있으며, 또 정치적인 결정과 대응에서 현명할 수 있는가? 그 차이는 유지가능한 '습관'과 '생활양식'을 통해 스스로의 혁명성을 이드거니 증명할 수 있는가? 


약소자와 권력자의 차이가 단지 권력의 총량과 그 재생산 방식에 있을 뿐이라면 약소자라나 약한 어른으로서의 아이, 약한 유력자일 뿐. 동종의 권력의지를 그 이기적으로 수동적인 일상 속에 한시적으로 숨기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요컨데, 다중과 권력, 욕망과 스펙터클, 개체와 보편을 잇는 계선 자체를 내파하거나 지며리 가로질러 버리는 새로운 삶의 양식의 관계, 그 연대적 주체(동무)는 긴요하다. 관료주의적, 자본주의적 욕망에 저항하며 '변화되어 표류하는 욕망의 향배'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넘어 '오직 삶의 양식을 통해 구원받는 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보편과 개체, 체계와 공동체, 형식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 사이의 일방적 식민화/이데올로기화의 논리를 철폐하거나 무력화시키는 새로운 삶의 양식, 주체화, 그리고 연대의 길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국민의 계선, 기업-사원의 계선, 종교-교인의 계선, 가족-연인의 계선, 공동체-친구의 계선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인문적 연대의 가능성으로 드러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보편을 말할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은 시장/자본 보편주의일 것이다. 그리고 무룻 보편주의가 그러하듯이, 세계화된 자본주의 역시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통합적 실재로서 그 외부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래의 좌파들은 사민주의의 미봉으로 귀착하거나, 울리히 벡이나 가라타니 고진처럼 기껏(!) 소비자 운동으로서의 대항을 말하는 것이다. 


정작 보편주의가 위험한 것은 지레 실천을 저지하거나 규제하는 그 반상상력이다. 즉 범지구적 경제의 통합과 그 보편적 외관의 역사사회적 유래를 망각한 채 마치 그 자체가 자연적인 여건인 양 믿고 살아가는 타성이 문제다. 아울러 그 타성에 얹혀 구성된 삶의 조직과 향배를 이탈하느느 상상력 자체를 스스로 차단하거나 거세하려는 반상상력이 문제다. 


인문주의적 삶의 미래는 오연하고 나태한, 획일화된 보편주의에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개체의 개성과 순발력 자체가, 차이와 이탈 자체가 목적으로 둔갑하는 도착적 반응 양식도 아니다. 그 개인주의는 더 이상 계몽주의 시대의 것이 아니다, 모방적 욕망의 매커니즘을 벗어나려는 절망적 허영의 무능을 표시하거나, 혹은 새로운 형태의 시장주의적 단일화와 표준화에 빠지는 방식일 뿐이다. 


이성과 이성의 타자, 보편과 개체, 체계와 공동체 사이의 사통, 혹은 절망적, 비생산적 대치 상황을 뚫어낼 수 있는 역사화와 주체화와 연대, 그리고 삶의 양식이 약소자의 일상을 통해 이드거니 실천되어야 한다. 


급진적 생태주의자나 종교적 출세간주의들의 제스처 역시 근현대적 합리성 일반을 적대시하는 도착된 관념론이다. 


현명한 개인의 제1의적 관점은, 그 개인의 길이 타인들의 관계 속에서만 열린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배신당한 혁명, 이데올로기로 떨어진 계몽주의에는 보편과 개체 사이의 사통이 자리한다. 보편-개체라는 계선 위의 진자운동만으로는 체계의 외부를 확보할 수 없다. <동물농장>의 나폴레옹 처럼 개체가 혁명에 투신하는 것만으로 그 억압적 보편의 바깥에 설 수 있는 게 아니다. 일상이 혁명의 걸림돌이 되는 한편 혁명은 영영 생활이 아니며, 물론 '영구혁명론' 역시 생활의 낮은 자리와는 거리가 있다. 


역사적으로 혁명을 말하는 개체들이 한 짓은, 비록 그것이 아무리 무의식적, 체질적인 물매의 효과일 뿐이라도 대개 억압적, 자익적 보편의 재생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것이었다. 문제는 보편-개체라는 적대적 공생의 계선을 끊어내면서, 지며리 이루어내는 생활 양식의 정치적 현명함이다. 367


3. 보편이라는 이름이 권력에 맞서는 약소자들의 연대 양식


증상이 없는 보편성은 모든 유토피아의 환상이며, 그 환상이 두께없는 일차원성이 군중들을 호명하는 방식이다.


증상은 문명화된 인간관계를 부지하는 최소한의 비용이다. 그 비용을 치르지 않는 성취란 신기루이거나 심리적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하다. 비용을 방법의 일환으로 여기고 그 이후에 도래할 성취만을 진리로 내세우는 '방법-진리'의 근대과학적 방법주의는, 인문이 곡절과 그 상처를 제대로 돌볼 수 없다는 점에서 아직 인문학이 아니다. 


오히려 진리는 비용이거나, 그 비용을 지르는 과정 속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ㅇㅇ을 믿고 천당에 갑시다"라고 선전할 때 그 종교의 진리는 천당이라는 탈세간적 풍경의 내용에 잇는 게 아니라 그 종교가 내세우는 보상이나 성취의이면에 은폐되어 있는 갖은 종류의 비용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쾌락)을 위해 대체 누가 무슨 비용을 어떻게 치르고 있는가, 라는 게 이데올로기 비판의 핵심이다. (물론 이 '그것'은 대개의 경우 허상, 허초점, 허족, 헛발질의 감각일 뿐)

예. 박정희식 조국근대화 기획의 진리 - 근대화된 조국의 풍경이 아니라 인혁당 사건이나 실미도 사건으로 치른 상처와 빼앗긴 목숨에 있다.


인문의 역사에서 상처와 희생을 지울 수 없으며, 어쩌면 그 진리의 최소치가 곧 증상인 것이다. 


지옥이나 연옥과 같은 협박의 장치를 갖춘 종교적 세계관 역시 유토피아-증상의 변증법을 독특하고 뻔뻔스레 증명한다. 

천국이 그 체계의 풍경이자 선전용 첨탑이라면 지옥은 그 기원이며, 또 그 증상을 배설하는 유리 지하실이기도 하다. 그 종교의 진실은 천국을 향한 집단적 열망의 벡터 속에 있는 게 아니다. 열정의 세기(강도)가 증명하는 것은 그 열정의 지향성이나 성격이 아니라 오직 그 세기일 뿐이다. 


무릇 보편성의 실제는 정치적이며, 그것은 상처와 욕망이라는 증상을 숨기는 방식에 다름아닌 것. 


보편성은 인식론, 혹은 방법론적인 문제가 아니다. 억압적 단일 보편성의 경험으로부터 아프게 배울 수 있는 것은, 보편성의 문제가 인식의 잣대와 진리의 기치를 내세우곤 하지만, 그 내용은 억압과 상처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당대적 약소자의 정치(지역주의 정치, 젠더의 정치학, 여성주의 정치학, 소수자 정치학, 민조성의 정치학, 정체성의 정치학, 생태정치학...)는 보편적 일치에서부터 상처를 연역하는 하향식이 아니라, 억압과 상처의 문제에 세심하고 결기 있게 응대하는 실천적 지혜에 바탕해야 한다. 


소수자/약소자, 혹은 '남은 자'가 유력자의 권력의지를 답습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데, 우리 모두는 약소자와 유력자의 차이가 결국 권력의 양적 차이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양화, 물화의 세속 속에 살고 있기 때문. 


예쁜 여자들과 추한 여자들이 경쟁적으로 움직이는 동선의 어느 소실점에서 여성미에 대한 보편주의적 이데아가 번쩍임. 그들의 일상을 자본주의적 욕망과 상처의 문제로 재배치, 재해석, 재구성하지 못한다면, 추하기에 사회적 약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단지 성형 같은 도구적 합리성의 테마로 전락할 뿐. 그것은 약소자들을 위한 새로운 생활정치의 장으로 수렴될 수 없을 것. 


젊어 진보적이던 인사들이 권력의 자장 속에 편입되는 대로 볼꼴사나운 짓을 서슴지 않는 일도 지극히 정상적인 결말로 보인다. 그들은 애초 '보편'이라는 이름의 '권력'을 욕망했던 것이며, 그 보편은 바로 그 권력의지를 매개로 그 스스로의 실존적 개체와 사통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욕망과 권력의지를 건너뛸 수 있는 방식은 체계로부터 구할 수 없다. 그 체계의 동건과 코드는 그 속에서 운신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의 자기표현과 저항, 그리고 초월이 도약까지 내재화할 수 있는 '자기차이화'의 포괄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개체의 급진성이 결국 보편을 지향하는 은폐된 권력의지라면, 약소자의 연대가 단지 대항적 공세나 도피적 이탈에 그친다면 그 무슨 특이한 보편을 내세운들 그것은 결국 유력자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데로 귀착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생활양식의 현명한 근기를 통해, 개체-보편의 계선 그 자체를 넘어서야 하는 것!


20:80의 사회 -> 잉여인간의 탄생


추상적 교환매체의 네트워크로 작동하는 체계 속의 개인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개인들의 연대마저도 그 체계의 체질과 동선을 공유하는 한 필경 체계의 알리바이로 역이용당하기 십상이다. 그 사이, 인간 상호간의 인문적, 의사소통적 관계는 급속히 도구화, 물화되고 개인은 체계 속으로 소외된다. 


그 속에서, 아이는 어른의 잘못을, 여자는 남자의 패악을, 좌는 우의 타락을, 개체는 보편의 함정을 피할 수 없다. 하나의 동질적 체계가 일상의 체질과 동선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식민화했을 때, 사회적 약자는 강자가 운신하는 계선 속으로 구조적, 무의식적으로 떠밀려가게 되고, 따라서 그 약자의 운신과 동선 속에서는 인문적/정치적 진보성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아이의 해맑은 미소가, 이성의 매력이, 개체의 스타일이, 그리고 약자의 고통과 소심이 체계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아니다. 그것은 문제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약소자라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연대하려는 것은 유력자의 사회구성체 형식과 그 매커니즘을 답습하려는 권력의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는 다른 생활의 동선과 체질, 대화와 교환(공여)의 문화가 지며리 살아있을 수 있는 삶의 양식과 인간관계 속에 있다. 의사소통적 합리성만으로는 여전히 불합리하게 되밀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결국 체계 속의 '현장에서 싸울(on and against)'수 밖에 없는 약소자들의 연대는 그 '다른' 양식과 관계에 터를 잡아야 한다. 일상이야말로 그 모든 혁명이 실패하는 원인이자 바로 그 결과물이기때문이다. 


유력자들의 체계에 균열과 섭동의 외상을 줄 수 있는가, 고착을 피하는 탈주적 순발력을 체질화할 수 있는가, 나아가 그 체계를 전복시킬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은 아직 정곡을 찌른 게 아니다. 출구는, 체계의 곳곳에 하리가 들어 그 강제력이 어긋나거나 뒤틀리게 만들 수 있도록 하는 다른 삶의 양식이며, 그 양식을 이드거니 유지할 수 있는 연대와 그 실천적 현명함이다.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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