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론_김영민

15장.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거울사회와 핸드폰 인간

백_일홍 2020. 1. 31. 09:55

2.세상의 문-턱에서 빛나는 거울(들)

 

".... 그래서 여자들은 나르시시즘, 사랑, 그리고 종교를 통해서 그녀의 참된 존재를 헛되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제2의 성> 679

 

나르시시즘, 사랑, 그리고 종교는 <제2의 성>의 유명한 한 구문에서 보부아르가 열거한 바, 사회적 영역을 박탈당한 여자들이 거듭 회귀하는 우거, 그 아지트다. 당대의 여자들은 이 우거 속에서 '내재'하는 존재로 그려지며, 사회적 활동을 통해서 생산적인 때에만 그녀들은 그들의 '초월'을 달성할 수 있다. 이것들은 자신과 여인과 신을 향해 움직이는 서로 상이한 벡터이지만, 열정의 사유화라는 점, 결국은 자기애적/근친상간적 동화의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유사하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세상을 향한 전문성/생산성의 창을 얻지 못한 채 공적 성취의 마당에서 축출당한 여자들이 놀아야 하는 인위의 새 마당이요 전래의 낡은 거처인 셈이다.

 

다시 보부아르의 표편을 빌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자신을 정당화하기보다 신(/애인)에 의해 정당화되는 편이 더 쉬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환상을 불식시키느라 이미 탈진해버리고, 세상의 문턱에서 겁에 질린 채 멈춰선다"

<동무론> 415

7.핸드폰 : 문/창인가, 거울인가?

 

맥루한은 나르시스 신화의 요점을, "인간은 자신 이외의 물건 속으로 확장된 자아에 즉각적으로 매혹된다."고 요약한다. 이 매혹은 '몰입', 혹은 '함몰'을 통해서 곧 지각의 마비로 이어진다. 모든 매체의 속성 속에 나릐스-나르코시스(자기중독)의 구조가 잠복하고 있다. 거울로 인해 확장된 자아는 그 자신의 지각을 마비시킨다.

 

이 마비현상은 매체의 편재성이라는 환경 속에서 정보의 과잉에 시달리는 근현대인들의 자기방어기제와 같은 것이다. 즉 마비는 매체와 정보의 과도한 부하로부터 중추신경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셈. 이것은 기계 문명 일반을 대하는 현대인들의 딜레마, 그 자가당착을 여실히 보여준다. 말하자면, 인간은 기계라는 덫에 물린 채 함몰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조는 모든 권력의 체계가 매체와 접붙어야 하는 현실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이후의 모든 권력은 말할 나위도 없이 우선적으로 매체권력일 것이다.

 

물신은 바로 이 '나르시스-나르코시스'의 구조 속에서 탄생한다.

물신숭배 fetishism

기술과 인간의 관계가 도착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확장물이 우상화되는 과정.

 

핸드폰, 전자정보 사회의 페티쉬로 둔갑함. 핸드폰은 외부와의 소통을 위한 첨단의 기계적 장치를 구비한 창-문인 듯하지만, 실은 그 용례의 적지 않은 부분에서 확장된 나르시시즘의 페티쉬 역할을 하고 있다.

 

넓게 보자면 이미 이 물건은 참다운 개성의 지표도, 지위나 정체성의 지표도 아니며, 전자정보사회의 체계적 총체성에 내재한 음울한 나르시시즘의 묵시록 정도로 보아야 한다.

 

페티쉬나 주물, 혹은 신체의 일부로 의미매김된다거나, 소비사회의 유형화된 개성이나 표준화된 사이비 정체성을 표현하는 물건으로 자리매김되어가는 추세는 핸드폰이 문이나 창이 아니라 거울이라는 내 판다과 부합한다. 핸드폰이라는 사이비 문-창은 조직적 자르시시즘의 사회인 우리의 거울사회가 '거울'이 아니라 '창'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허의의식을 뻔쩐스럽게 전시해 놓은 알리바이의 장치인 것.

 

핸드폰은 손거울의 전자적 변형일 뿐이며, 거울사회의 소통성/개방성을 강변하는 먹먹한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다.

 

교통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자폐의 벽에 가깝다.

 

누군가와 끊임없이 접속되어 있으려는 욕망이 열린 소통의 문/창을 계발함으로써 해소되지 못한 채 페티쉬즘이나 나르시시즘의 전자적 장치로 귀결되는 현상을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탈종교시대의 '기계-종교'의 아우라를 담뿍 흩뿌린다.

도그마화된 제도종교 - 시민 종교 - 기계 종교로 이어지는 행정의 마지막 단계.

핸드폰은 문-창이 아니다. 종교역시 적어도 세상을 향한 창-문은 아니기 때문.

 

핸드폰은 자신이 다른 어떤 것을 복제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을 복제하고 있을 뿐. 왜냐하면 팬드폰이라는 전자 단말기를 통해 사용자 자신이 곧 세상이 될 수 있다는, 유아론적 환상 속에 쉽게 빠지기 때문이다.

 

문과 창은 낯선 세계의 입구이며, 타자들이 우글대는 실전에의 초대이고, 거울상에 의해서 유지, 복제되어오던 나르시시즘이 가차없이 감가상각에 노출되는 마당이다. 문-창은 자기동일성의 인력에 의해 자아의 구심을 확인, 보강, 재생산하는 장치가 아니라, 그 동일성의 토대를 타자들의 바람에 거침없이 내놓아 성쇠와 영고의 우연성과 그 역사를 배제하지 않는 열린 결기다.

 

그것은 보부아르가 재촉한 바, 사회적 약자들이 내재의 질곡에서 벗어나 개성과 초월을 얻는 마당이며, 테크놀로지의 얼룩에서 벗어나 인문의 인문이 다시 열리는 현장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거울과 문/창의 균형, 그 안팎의 조화.

'거울'로서의 핸드폰 문화는 병인이 아니라 징후, 특히 징조이며, 아울러 이 징후와 징조는 보다 거대한 체계 속에서 연동하는 연쇄연상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

 

8.지는 싸움 : 체계의 타성과 인문의 기동

 

내가 '거울사회'라고 별칭해서 그 한 측면을 단층적으로 포착하려는 우리 시대는, 애초 '문-창의 사회', 발견과 정복과 합병의 사회를 지향했던 서양 근대주의이 최종 산물이라는 점에서 극히 역설적이다.

 

내 관심은 핸드폰 문화로 대변되는 전자적 나르시시즘의 보편화 추세를 거스르면서 인문학도들의 구체적인 언술과 일상적 동선의 통해 새롭게 건축할 창-문의 인문적 소통의 문화에 있다.

 

거울사회의 접면에 틈과 균열을 내면서 조금씩 문/창을 열어가야 하며, 인문적 사귐과 만남의 가능성을 모색해가야 한다.

 

일반체계이론의 창시자인 버틀란피는 체계가 중요한 시기에 행동을 일으켜, 일단 행동이 수행되면 그들 본래의 유형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고 경고하 바 있다. 그러므로 인문이 기둥이 체계의 타성보다 빠르고 지속적이어야 한다.

 

거울-사회의 전자정보적 동화를 문/창-사회의 인문적 이화의 에너지로 전환, 대체해 나가는 점진적 노력이 있어야만 인문학적 공동화 현상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을 것. 그리고 우리의 '지는 싸움'도 우리가 믿고 살아온 가치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종말을 고할 수 있을 것이다. 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