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론_김영민

14장.술: 매체와 동무

백_일홍 2020. 1. 30. 19:18

술에 대한 낭만적 자유주의를 넘어


김현, 어떤 독특한 인간미가 스며든 '삶의 양식'을 가리킨다는 점.


술과 술자리를 대하는 김현의 태도는 곧 그가 참여한 세계관의 체질적, 습관적, 생활양식적 연장으로 보인다. 술자리가 얹힌 '기운' 혹은 어떤 두께 속에서 해반주그레하게 피어오르는 낭만주의, 그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 올라오는 대화적 휴머니즘은 결국은 바로 그 기운 탓에 실없이 부풀어 오른 개인의 자잘한 자기도취에 기대고 있다. 


대중의 문학적 감성이란 곧 그같은 나르시시즘에 의탁하는 게 아닌가? 나르시시즘이 아닌, 에고의 제 부피만큼 졸아든 합리주의만으로는 종교도 문학도 사랑도 가능하지 않을 것은 너무나 뻔한 일. 


그러나 증푹된, 그래서 '말의 부피를 불리는' 자아감이 역사의 무게와 현실의 체계 속에서 겸허하고 속절없이 꺼지는 대신 일상의 잔여로서 계속 남아 개인의 시각과 담론에 재투입된다면 어떨까? 


나는 김현이라는 빼어난 자유주의자-술꾼을 통해, 개인의 자율성과 성찰성을 역사와 이치의 출발점으로 삼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세계관이 술자리 낭만주의와 관념적으로 접맥하는 한 전형을 본다. 


중요한 것은 일상적으로 계속되는 버릇, 혹은 그 버릇의 지향과 지형이 만들어낼 삶의 양식에 있다. 실로 삶의 양식 속에 스며들지 않는 확실성은 이미 삶의 것이 아니다. 언어는 수행이자 게임이며 생활의 양식과 연동한다는 사실. 그리고 생활양식에 간섭하지 않는 세계관이란 이미 그 세계관적 조형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식으로 한 사람의 일상을 지배하는 매체는 곧 그의 현존재 양식을 규정하게 마련이다. 존재는 또 다른 매체를 통해 닺을 내리려 할 것이다. 


김현의 오류는 술이 개인의 자율성이나 창의성, 그리고 대면적 대화 관계와 호의적으로 습합하는 부분에만 관심으르 집중한데 있다. 진보적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배수진이 대화저거 실천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술자리는 단지 이야기의 마당 속으로 환원할 수 없는 많은 이슈들이 넘실거린다. 


버릇이 되다시피한 그의 술자리-말자리 문화는 '언어적 보편주의'의 프리즘에 얹히면서 사회정치성의 매개들을 잃어버리고 어느덧 인문주의적 면죄부의 특권을 평가절하된 지폐처럼 뿌린다. 그는 술의 장에 안팎으로 스며든 제도와 사회정치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을 만큼의 꼭 그정도로 섬세한 개인주의자였던 것이다.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가히 절망적으로 자신의 바깥으로 외출하려다가 필경 실패하고 마는 일반적인 오류. 


술을 대하는 태도와 입장 : 

1) 술은 죄의 씨앗이며 악마의 덪이며 미끼, 혹은 유혹이다. 

2) 술은 그저 음식의 일종일 뿐이다. 사회적 관계나 제도적 계보의 일부를 놓친다. 술은 중성적, 즉자적으로 즐기게 만드는 그 무지탓에 역설적으로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셈. 잘먹으면 약 못먹으면 독, 약주, 반주 

3) 개인의 취미나 취향을 드러내는 기호의 기호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자들의 입장에 가장 근접함. 

관계와 체계를 오히려 개인의 내성에서 출발시키려는 관념적 도착이 이들이 고질이듯이, 이들은 술-문화마저 자의식이 그 출발점이다. 술과 술자리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며 심지어 개인의 자기표현이기도 하다. 

4) 친구가/를 좋아/찾아 술을 마신다. 

친구라는 공동체의 결속을 위한 시멘트

술이 종종 공동체 성원들 사이의 동일시/모방 폭력을 위한 매체로 쓰여왔다. 술은 상대를 '친구'라는 이름으로 자신과 낭만적으로 혼효하는 과정 혹은 자본과 체계를 환각적, 일시적으로 망각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는 점. 

5) 쳬계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 술은 무엇보다도 생활방식의 일종으로 여겨야 한다. 특정한 생활의 양식을 요구하는 계고장과 같다. 

술이 버릇이 되는 길, 그리고 그 버릇이 생활의 양식에 얹히는 길은, 자본제적 '체계'가 만든 여러 길들과 합류한다. 술은 체계와 공생한다. 

우리 사회가 술을 그처럼 관대한 이유는 남성주의적 향락과 놀이 문화에 지대하게 공헌해왔던 술에 대한 전래의 관념적 태도와 더불어, 술이 생활의 방식 속에 깊이 안착해서 자본제적 체계와 안정적으로 공생하기 때문이다. 


우리 중의 어느 누구에게는 혹시 술이 우리 생활의 매체기술적 결정인자가 아닌지, 그리고 그 결정성에 저항하고 초월할 수 있는 다른 생산적 생활방식은 어떻게 조형될 수 잇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 


술을 생활양식이 구성되는 층위에서 논의하려는 태도는 실은 전래의 좌파와 우파가 상상하지 못한 길을 뚫어내는 매우 구체적인 사례라는 뜻에서 그 의미가 자못 깊다. 


6) 술을 생활의 양식이라는 논의의 장 속에서 비판적으로 조명하려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제도와 체계의 문제를 불러온다. 반복되는 생활습관은 이미 개인의 것이 아니다. 개인들은 체계의 단말기로 변하면서 '개인화'하고, 그 개인화의 실제는 체계 속의 표준화에 다름 아니다. 술이 내 삶의 양식이 지닌 그 완강함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자본주의적 체계를 키우고 빛나게 한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의 술은 생활의 양식이며 문화이며, 산업이며 체계인 것이다. 


김현의 입장 = 3, 4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의 전형적 입장. 무입장에 다름 아니다. 한갖 통념일 뿐. 

술이 버릇을 통해서 자본제적 삶의 코드와 채널이 만들어 놓은 특정한 생활의 양식과 강박적으로, 부지불식간에 결합하는 '사이비-실재'이다. 


술의 자리는 '체계적으로 관리되면서 그 만족을 내내 저지당하는 인간이 슬픈 욕망'에 바치는 자본제적 일상의 제전과 같다. 


술-환경은 전 국민적 오입의 가장 확실하고 편이한 통로인데, 이 오입은 '체계적'이며, 따라서 이미 생활의 양식에 기입된 것이다. 


중요한 점은 매체-정치학적 실천으로 가능해지는 세속의 틈을 현실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식에 있다. 현대 사회 속의 매체는 실질적으로 그 사용자를 존재론적으로 묶어두는 '존재의 닻'과 유사한 무엇이다. 그러므로 매체를 두고 벌이는 선택과 결별, 교환과 재배치의 노력은 인문정치적 생활실천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몫일 수밖에 없다. 즉 매체가 그 정치학적 운신의 틈을 보이는 지점에서 동시에 사유하고 실천하는 게 훨씬 편리하고 생산적이다. 

마음의 중심을 붙안고 사물 속으로 곧장 내달을 수는 없다. 매체가 항용 존재일리 없지만 존재가 매체적이라는 사실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현대 사회 속의 인문학적 생활정치는 필연코 매체정치일 수밖에 없다. 정보시대, 신매체시대, 네트워크 시대에 매체는 그 자체로 가장 효율적이며 강력한 정치적 배치, 그 수렴과 배제다. 우리 각자의 생활은 그 배치에 의해서 쉼없이 인정받거나 규제받거나 탈락한다. 


지속적으로 매체에 노출되는 것은 사용자의 몸을 그 매체의 기술적 이치에 수렴, 순치시키는 노릇으로서 그것은 몸의 길을 기반으로 엮여지는 생활의 양식에 구성적, 규제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매체가 그 효과를 부리는 본령은 부지불식간에 '감각의 비율이나 지각의 패턴'을 바꾸는 데 있다. 


각종 매체 현실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살 수밖에 없고, 그 매체의 효과장 속에 삼투당한 채 우리의 몸과 그 생활양식이 생각이나 다짐과 무관학 하게 순치, 기계화된다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동무로서의 우리, 인문좌파로서의 우리는 '매체와 함께 매체를 넘어가는' 인문의 생활정치에 이드거니, 충실히 나설 필요가 있다. 


그래서 만남과 헤어짐, 주기와 받기, 그리고 쓰기와 버리기, 이 모든 행위들을 매체 정치학적 관점으로부터 재해석하면서 새롭고 현명한 실천의 현실성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