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프로그램에는 보통 애도의 절차가 포함된다.
"얘도는 외상 피해자들의 상실에 경의를 표시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허먼, <트라우마>
복수의 환상이나 보상의 환상을 털어내고 애도를 통해 피해자의 내면성을 회복하라는 허먼의 진단과 조언은 진보적 페미니스트로서는 다소 의외읭 보수적 이데올로기성을 내비친다. 이 의외의 보수성은 아무래도 개인의 상처에 주목하고 그의 회복을 우선시해야 하는 치료자가 처해있는 처지, 그 개인(주의)적 여건에 의해서 해명되어야 할 것.
우리 개인의 마음자리에 체계의 일반명령이 스치고 겹치는 방식에 주목하는 일은 극히 중요한 대로 아직은 극히 어려운 는 데 과업이다.
그러나 외상의 체험 속에 상실한 것들을 깊이, 완전히 느끼려는 애도가 상처입은 자아를 재구성하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네트워크를 재구축하는데 필요한 동기와 동력을 준다는 지적에는 폭넓은 생산적 함의가 번득인다.
허먼에 따르면 정서를 완전히 느끼는 일은 오히려 가해자와 그 체계에 대한 저항의 행동이며, 이를 느끼지 못하거나 은폐한다면 자기 안의 일부를 잘려나가도록 방치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외상의 경험을 자신의 생애-서사 속에 성공적으로 편입시키고 그 전체를 재구성, 통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억 상실의 장벽 너머에 있는 공포에 직접 대면"하고 느끼는 일이 필요하다.
진실한 감정은 늘 이유를 지닌 채 제자리를 지키며, 몸은 그 감정을 결코 배반하지 않(못)한다. 이것은 결국 "진실을 말할 때 회복의 힘이 생긴다"는 준관념론적 신념과 이어져있다.
그러나 느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초보적인 지적 이외에도, 우선, 느낌은 믿을 만할까? 체계의 욕망 속으로 호락호락 호출당하는 개인의 느낌은 결국 이데올로기이 구취에도 못미치는 민망한 수준의 것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피로에 떠밀려 부박하고 일시적으로, 그러나 과정되게 재구성되는 현대인의 여가문화는 필경 '느낌'으로 쏠리고 있다.
번지점프의 느낌, 산사의 범종의 느낌.. 그 느낌은 다른 관계, 다른 생산성, 다른 삶의 양식과 접속하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체계 속에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피로가 '다른' 느낌으로 삭제될 수 있는 성격과 기원이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 피로는 체계적이며, 그 느낌조차 체계의 일부라면?
애도의 치유력은 종교적인 지평에 닿아 있다. 애동의 종교는 인류의 정신적 살림살이를 위해서 언제까지나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야스쿠니신사 문제에서 보듯이 애도의 종교는 체계 이데올로기를 완결짓는 신화적 아우라의 공장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허먼의 치유적 여성주의는 정치적 연대를 강하게 주장하면서도 결국 체계의 '외부'를 사유하지 못한다.)
느낌의 경우에서 처럼, 애도가 체계에 어떻게 복무하는가? 바로 이것이 문제다.
애도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은 상처나 그 애도를 체계 그 자체와 맞대면시키는 일에서부터 생성된다.
의사와 성직자와 같은 치유자들은 대게 체계의 일꾼인지라 체계 그 자체를 문제시하는 게 쉽지 않다. '체계'일 수밖에 없는 현대 사회 속의 상처는 응당 '체계적'이지만, 정착 그 상처를 보살피는 이들은 이미 체계 속으로 너무 깊이 안착해 있어 그 상처의 체계적 뿌리를 헤아리지 못한다. 이들의 선량한 호의조차 그 상처의 기원을 특정한 사건이나 사고, 우연이나 인관관계로 소급시키곤 한다. 그들은 자아와 체계가 뒤썩인 지점, 그러니까 좌우의 이념적 논쟁을 넘어선 현대적 일상성의 지평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각주: 이 지평은 일찍이 보드리야르가 말한 바, "진정으로 당신 자신이 됨으로써 당신은 집단의 명령에 가장 출실하게 따르며 또한 '강요된' 모델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다고 지적할 떼에 개시되는 곳이다.)
애도 : 자기 상처와 상실에 대한 일종의 의식적 공대, 특화된 시간과 장소 속에서 카타르시스아 갱신, 나르시시즘과 화해를 도모하는 그 모든 의식적 행위 일체. 이것은 국가-이데올로기적 장치일 수도 있겠지만, 체계 속의 개인들에게는 새로운 자기치유책으로 변주될 수도 있다.
사적 종교의 형식을 갖춘 자기-애도 : 아로마 목욕, 시-쓰기, 차마시기 , 하루분의 존재의 감가상각을 애도하는 가장 탁월한 형식이 아닐까?
요가, 명상, 재즈댄스, 식도록, 연극사랑, 연애, 템플스테이 등 모두 자본주의적 체계와 빚는 마찰과 소모, 피로와 허무를 애도하는 사사회된 종교의 형식들이다. 체계 위에 얹혀서만 유지되는 생활 없는 제스처들이다.
피곤한 현대인들은 갖은 형식이 '느낌'으로 체계의 상처를 잊거나 그 보상을 얻고자 하지만 느낌은 종종 체계가 코 푼 휴지만도 못한 게 사실.
논의의 벼리는 이 형식들이 체계의 현상적 다양성에 이바지하는 게 아니라 '외부성'을 발굴해갈 수 있는가 하는 데에 있다.
애도에 대한 새로운 인문학적 상상은 체계의 알리바이로 변한 갖은 애도의 형식에 대한 발본적 비판에서부터 출발한다.
상처가 체계적이라면 그 애도 역시 체계 그 자체를 지목할 수 있도록 발본적이어야 한다.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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