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표'로서의 사치
2. 인문학,, 빈 곳을 향한 사치
인문학이 빈 곳을 향한 사치일진대, 사치는 인문학에서 본질적이다. 실은, 이로써 '부재(무능)의 급진성'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3. 사치와 자본주의
사치의 기조를 규정한 계층은 부루주아지가 아니라 궁정계급의 귀족이었다.
4. 사치와 존재
존재방식으로서의 사치는 그 논의이 출발은 자본제적 절제와 인색함이 숨기고 있는 종류의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사치와 잉여에 대한 검토다. 사치는 곧 세계-내-존재의 존재방식, 그 실존범주인 것이다.
5. 사치의 재해석
'철학적 사치론'이라는 기획은 '사치'를 재해석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시도일 것. 사치를 단지 양적 과잉으로 치부하는 통념 너머에는 어떤 성격의 ('결여'가 아닌) 부재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채, 그러나 극히 중요한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의 그 '벌거벗음'에 얹힌 그 (벌거벗은 '거지'에게는 없는) '무엇'처럼, 사치는 오히려 이 부재 속에 번득인다.
6. 내 삶의 부재표 : 쟁취한 부재로서의 사치
집, 자동차, 신용카드, 주민등록증, 아내, 자식, 핸드폰 내게 '없는' 것들 중의 일부다. '부재'의 목록, 그것은 내 삶의 '부재표'인 셈이다. (존재의증명은 때로 그 부재를 통해서 '비록 불완전하지만 가장 적절하게' 이루어지는 법이다.) 전자 주민증. 나는 역설적이지만 힘들여 '부재'를 얻어냈고, 그 부재는 내가 선택한 삶의 양식 속에서 알 듯 모를 듯한 '사치'(잉여)의 빛을 발한다. 핸드폰이나 아내의 부재는 바로 그들의 흔함을 뚫고 솟아나는 어떤 부재하는 잉여의 가치를 내 의도와 무관하게 되돌려준다.
7. 부재의 과잉에 잉태한 상징적 잉여가치
'부재라는 과잉'의 대표적인 사례는 선불교가 생산한 부정과 공의 이미지들 속에 넘쳐난다. 침묵은 부재가 아니고, 부재는 결락이 아니다. 실로 부재의 과잉에 잉태한 상징적 잉여가치는 그 모든 인문의 가치가 발원하는 우물과 같은 곳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체계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는 슬기와 근기로써 가능해진 다른 생활양식, 다른 관계, 다른 교환, 다른 생산성의 빛이다.
7-1. 공허하지만 빛나는 것
8. 부재의 가치를 부정하는 한국 현대 개신교
불교만이 아니라 무릇 종교 일반은 부재의 역설적 과잉 속에 잉태한 잉여(가치)라는 특이한 상징적 자본을 그 근거로 삼는다. 부정의 방식, 도가도비상도, 네티~네티, 공혜.
무릇 아우라는 주객 사이의 빈 곳에 의탁하고, 마음조차 오직 비었기에 민활하고 신묘한 법이다.
한국 개신교의 양적 팽창을 주도한 '기복적 성장주의'는 예수가 자신을 비움으로써 세운 영적 카리스마의 세계를 그 바닥에서부터 허물어버렸다.
8-1. 부재의 사치, 혹은 무능의 사치
사치를 인간현상의 종적 특징으로 자리매김함. 이들 사치학의 대가들이 놓친 개념을 나는 '부재의 사치' 혹은 '무능의 사치'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내내 불화해왔던 종교적 세계와 이문학적 가치가 가장 서늘하고 낮게 공영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부재의 사치가 모이는 지점과 그 방식을 고민하는 것은 종교와 인문학이 새로운 교환관계를 통해 자본과 기술의 전일적 물화를 현명하게 견제하고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로 걸어가는 길목이 될 수 있을 것.
일상은 늘 틈으로 부스럭거리는 법이고, 자본주의 속의 '공허'는 의외로 보편적이기 때문. 문제는 결락이 아닌 부재인데, 그모든 결락을 빠르고 실수없이 채울 뿐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결락(욕망)을 재생산하는 자본주의가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이 곧 사치가 부재 속에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부재의 사치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이미지의 하나가 선가의 공혜, 보다 가깝게는 무소유의 풍경과 같은 것이다. 수도자의 생활이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 그 알속이 있다는 것. 아울러 그 비움은 다만 결핍이 아니라 기묘하게 팽창하는 부재의 울림(사치)이라는 사실을 보시하듯 전파한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소비의 행위, 낭비, 증여의 행위
부재의 사치란 상품의 합리적 교환이 끊어진 자리에서 오히려 도도하게 피어오르는 인문의 울림과 떨림인 것이다.
물신을 죽인 자리에서 다시 피어오르는 인문의 샘과 같은 것.
꽉찬 침묵
부재의 사치란 비움의 지난한 노동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얻게 되는 꽉찬 상징적 권위의 아우라와 닮았다.
욕심은 아우라를 생성시키지 못하지만 의욕은 다른데, 의욕은 결국 부재를 향한 근기 있는 실존적 투기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가난(부재)를 새롭게 주제화, 정치화할 수 없는 이론적 무능력 속에서,
내게 '없는' 것 중에는 특히 주민등록증과 핸드폰이 '있다'. 이것을 결락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단지 가질 수 있지만 포기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포기가 내 관계의 양식과 생산의 양식과 삶의 양식에 얹힌 선택이며, 사회적 주류의 시선을 뿌리치고 이루어진 새로운 교환에 대한 실천적 재구성의 작은 징표이기 때문이다.
내가 뜻하는 '부재의 공동체'란 이 '부재의 사치'가 참으로 풍성한 교환을 이루는 그 짦은 순간 속에서만 점점이 이루어질 것이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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