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자본주의_김영민

산책과 자본주의 서문

백_일홍 2020. 2. 5. 14:38

산책과 자본주의 1

서문

비평의 조건, 혹은 산책

 

문화비평은 일상의 낮은 자리로 스며든다. 그런 점에서 비평은 그 자체로 공부다. 이론의 열정을 묵히고 그 모서리들이 숙진 다음에야 우리는 비평가의 눈으로 문화를 애기할 수완과 지혜를 얻는다.

 

더불어 문화비평은 일상의 정치성에 주목하다. 바로 거기서, 일상을 다루되 문학과 갈라지는 지평이 생긴다.

 

일상이 어떤 삶의 양식이라는 채널을 통해 진지화할지, 혹은 영원한 변화의 영도로 남을지는 바로 기기에서 결정된다. 그런 점에서, 문화비평은 삶의 조직 속으로 가장 깊이 들어가려는 감수성이다.

 

비평은 공부이면서 공부 이후의 글쓰기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비평이 이론 이후의 실천이라는 사실에서, 그리고 비평에서의 금기는 무엇보다도 이론들에 휘둘러 언거번거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비평은 곧 타자성의 실천이라는 점이다.

 

이론들이 흔히 해석의 틀로 기능하고, 해석이 자기차이화의 변증법이자 나르시시즘(동화)의 체계화로 굳어갈 때, 비평은 자신의 몸을 끄-을-며 나ㅏ가는 곧 해석 이후의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해석이 아니라 변화!'와 그리 멀지 않은 태도다. 비평은 해석과 함께 해석을 넘어서는 실천 속에 그 본령이 있다.

 

그러므로 비평적 진실은 지성과 생활의 지혜의 사잇길을 타는 노릇을 깨치며 그것을 부단히 실천하는 것과 같다.

 

개인을 체계 속에 완전히 함몰시키는 짓은 개인을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는 전통 부르주아 철학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실은, 차이성과 체계성이 서로 구조적으로 연동한다는 사실에 주목히야 하며, 따라서 차이-체계의 분법을 전제하는 논의의 근본적 한계, 나아가 그 자가당착을 따져야 한다. 오히려 문제는 체계 속의 차이들이 만드는 다양성의 허위의식이다. 말하자면, 차이들의 수렴처를 애초부터 식민화한 체계가 그 체계의 변명으로 내세우는 다양성은 적실한 변명이 아니라 결국 체계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다양성은 외부성의 환각을 안겨주며, 차이들은 결국 그 다양성의 나르시스로 기능할 뿐이다.

 

현단계의 비평은 차이-체계의 사이비분법이 전제하는 이데올로기적 환각에 복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비평은 차이가 체계의 알리바이가 되고 체계가 차이를 관용적으로 재생산하는 순환전 공모이 진실을 비판적으로 응시하고 대면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다양성이 아니라 외부성을 가리킨다.

 

비평은 쓴다기보다는 오히려 걷는 일이다. 비평은 제 나름의 세계관을 지닌 채 '세속'의 길을 거슬러 일관된 태도가 중요하다.

 

한국의 현대철학은 상처의 문제를 체계적을 회피하거나 억압한 자리이며 구미의 음성들을 청종하는 빙식의 아류들이었다. 그러나 제망이 무너지면 이미 물고기의 종류를 문제삼을 일이 아니다. 이제 모든 것은 자본주의다.

 

내가 말하는 '산책'은 이 전일화된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을 배경으로 해서만 성립하는 어떤 태도와 실천을 뜻한다. 그 '걷는 주체'는 자본제적 셈평의 교환 속에서 우선적으로 '상처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산책은, 내가 '세속'이라는 표현으로 표상한 자본주의적 체계와의 마찰로 인한 상처의 각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기능주의화한 요약과 통일화한 언어의 프리즘 속에서 체제와 일체화한 일차원적 존재는 이제 우리 모두의 환경이 되고 말았다. 원칙상 이들에게는 산책이 불가능한데, 산책은 무엇보다도 '자본제와의 창의적으로 불화하는 어떤 삶의 양식'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걷는 주체는 상처를 다독이는 리듬과 템포를 저절로 배우면서 자본제적 도시의 인력으로부터 몸을 끄-을-며 나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탈세간의 근본주의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산책은 현장을 지키며(on) 그 현장을 거슬러 걷는(against) 삶의 양식을 상징하며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

 

그러므로 산책은 단지 부재와 무욕의 소실점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종류의 창의성과 생산성을 가리킨다.

 

그렇기에 산책은 혼잣걸음이기 이전에 '동무'들과 더불어 연대하는 삶의 방식이며 그 메타포인 것이다. 세속이라는 상처를 깊이 각성한 이들, 그리고 그 상처보다 빠르게 운신하려는 지혜의 공부길에 나선 이들은 자본주의적 체계와 창의적으로 분화하는 방식으로 동무들과 나란히, 혹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몸을 끄-을-며 걸어 나간다.

 

산책이라는 어떤 삶의 양식을 통해 걷고, 연대하며, 배우며 바꾼다.

 

그 외에도, 산책은 의도, 혹은 자기-생각과 싸우는 실천의 방식으로 주목해야 한다.

자신의 의도 속으로 휘말려들어가는 짓에 이드거니 대항하는 삶의 방식을 통해서만 타자들의 세계는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마찬가지로 생각은 도무지 공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부가 에고적 관성과의 싸움이다는 여전히 유요한 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