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자본주의_김영민

산책과 자본주의 1장. 산책과 자본주의

백_일홍 2020. 2. 5. 15:13

자본주의가 이동이면서 동시에 '교환'이라면, 산책의 탈자본주의적 창의성은 무엇보다도 너와 나 사이의 관계를 자본제적 교환의 바깥으로 외출하도록 돕는 데 있다. 구름과 바람, 소리쟁이와 기생초, 다슬기와 꺾지, 금강승 너머의 황혼 등은 단지 완상의 대상이거나 레저의 환경만이 아니다. 그것은 단번에, 그리고 총체적으로 , 우리 삶의 원형적 모습이 등가적 교환의 외부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산책, 그것은 아직 아무껏도 아니지만 우선 자본제적 체계와 생산적으로 불화하는 삶이다.

 

산책은 문명과 인간관계의 상처로부터 도피해 숨을 수 있는 루소류의 자연을 향한 낭만주의, 원시주의가 아니다. 북친 등의 반론이 드러내듯 그같은 태도는 결국 무지와 정치적 방기에 이를 뿐이다.

 

근대화 일반이나 자본주의는 상처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회피하거나 억압한 자리를 가리킨다. 자본주의의 단말기로 혹은 그 배달부로 기능하며 쉼 없이 이동-하는/시키는 현대인들은 그 이동의 속도주의 속에서 상처를 외면하다.

 

상처는 모른 체하면서도, '건강(보신)'을 떠드는 꼴은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자신의 의도와 기능적 자기정체성이 일치하는 오만한 이데올로기적 순간에는 걷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격자판을 좇아 이동할 뿐, 존재의 상처와 함께 세속의 미로 속으로 이탈하지 못한다.

 

산책은 인간의 상처를 다독이며 리듬을 저절로 배우면서 자본제적 도시의 인력으로부터 몸을 끄-을-며 벗어난다. 물론 그곳은 청계천도, 청학동도 아니다. 그곳은 오직 없는 관게를 향한 부정적(부재적) 삶의 양식이 밝혀내는 새로운 가치들이 번득이는 결절점들일 뿐.

 

"청계천이여, 영원하라"

 

시골을 잡아먹은 도시라는 공룡들은 도시 속의 이곳저곳에 그 잠식의 결과로 배설물을 쏟아놓는데, 이른바 공원은 그 대표적 배설물들이다. 시골을 먹어치우는 도시, 그 도시 속에 역수입된 인공의 시골이 청계천 같은 공원.

 

내게 그곳은 마치 환상이 강립한 곳과 같다. 그 환상의 요체는 도시가 시골을 배설/배설할 수 있고 문화가 자연을 생산할 수 있으리라는 도착된 자신감인데, 환상으로서의 청계천은 자연의 총체적 위기라는 임박한 현실을 은폐한 채 임의로 자연을 급조해낼 수 있다는 도착된 도시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문제는 성공적/지속가능한 개발주의가 숨긴 역사성을 묻는 일. 그리고 어떻게 도시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장치와 성향에 순치된 채 그 당연한 역사성을 자연스러운 외관으로 덧씌우게 되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그리고 그 멋진 개발주의의 공시적 정합 뒤에서 누가 가장 크게 웃고 있는지를 아울러 묻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왜 '자연'을 이해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었는지를 심각히 되묻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