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자본주의_김영민

산책과 자본주의 3장. 핸드폰, 거울사회의 페티쉬

백_일홍 2020. 2. 5. 17:16

핸드폰이라는 사이비 창/문은 조직적 나르시시즘, 체계적 자기증식의 사회인 우리의 거울사회가 '거울'이 아니라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허위의식을 뻔뻔스럽게 전시해 놓는 장치로 보인다. 이미 그것은 종교와 사랑만이 아니라 자본과 권력조차 흡수하는 나르시시즘의 표상으로 우리 사회를 종횡한다. 그것은 실로 이 거울사회의 패티쉬이자 토템이 되어가고 있다.

 

마음이 팽창 속에서 세사아을 주술적으로 소외시킨 원시인들, '유아'라는 이름의 환상의 소비자들, 그리고 세상의 문턱에 걸려 넘어진 뒤 나르시시즘과 사랑과 종교를 붙안고 되돌아오는 여자들, 사실 얼굴은 다르지만 이 모두는 비슷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상동적 현상이다. 이것은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문을 얻지 못한 채 기껏 세상을 구경하는 창에 만족하는 태도, 심지어 그 창을 아예 거울고 바꾼 채 나르시스 속에 자폐하는 현실을 가리킨다.

 

나는 이를 '거울현상'이라고 부르고, 이 거울현상으로 뒤범벅인 사회를 '거울사회'라고 한다.

 

거울사회는 다양한 형식의 각종 거울로 구성되어 있다. 가령 오락이나 코미디 혹은 드라마 일색인 티브 매체 역시 각 가정의 중심을 장악한 거울이다. 핸드폰, 이 거울사회의 표상적 장치. 흥미로운 사실은 핸드폰은 스스로를 문이나 창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핸드폰은 그 소지자의 생각과 태도와 동선을 상호 모방시키며 고착시키는 거울로 여겨진다.

 

핸드폰은 세상을 향해서 열려있는 이화의 창/문인양 행세하지만, 그 실질적 용도를 엄밀히 헤아려보면 오히려 사용자 그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동화의 거울이라는 것.

 

스펙타클은 기존질서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행하는 자신에 관하나 담화이며, 자신을 찬미하는 독백이다.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을 먹고 사는 상품기호의 사회

 

우리 모두는 핸드폰을 통해서 '자신의 참된 존재를 헛되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매체의 안팎 83

 

매체와의 싸움이 무매체를 향한 낭만적 직접성의 세계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현실적이며, 심지어 반자연적이다.

 

매체 인문학은 인간의 존재와 그 관계가 곧 갖은 매체의 네트워크 속에서 생성하는 일련의 결절이라는 사실을 정밀하게 제시한다. 기표의 연쇄 속에서 주체의 명멸을 애기하듯이, 매개와 상호조회망 속에서 우리의 존재는 그 무늬(인문)를 엮는다.

 

매체는 매체로 싸워햐 한다는 것, 현대가 구성한 새 현실의 자연사적 이치일 뿐.

 

기존의 권력이 언죽번죽 수행하는 자기 자신에 관한 거울상-담론인 대중매체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동의이 지배를 계속하고 있는 대중매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인문의 전술은 무엇일까? 대중매체의 강방적 자기동일화를 넘어 '숨어 들어가는 타자'들과 조우하는 외상적 진실의 체험은 어떻게 가능해지는 것일까?

 

TV가 당신을 본다 87

 

텔레비전 의식

텔레비전의 시야는 그 자체로 '풍경'으로서 생각 없는 시청자들이 시나브로 순치되어 가는 인식의 틀이다.

2002년 6월 한달 동안 전국을 붉은 용광로처럼 달구었던 축구열품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만들어 놓은 한 바탕의 '티브쇼'였다.

 

마치 이미지를 매개로 움직이는 자본제적 네트워크를 환상으로 진단한 기 드보르의 말처럼, 지난 6월의 현실은 일종의 '환상'이었다. 그것은 단지 '환상적인 현실'이 아니라, 이미 현실이 되어 버린 우리 현실을 움직이는 환상이었던 것.

 

우리들이 텔레비전을 흡수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텔레비전은 우리를 흡수하고 있다.

 

그 붉은 옷들은 애국심이라는 어느 마음의 중심을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델레비전이 확보하고 구성해주는 시선과 시야를 좇아 움직인다. 우리가 텔레비전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이제 텔레비전이 우리를 보고 있는 것이다.

 

'소리'를 위한 노력 91

 

전화걸기는 목'소리'를 통해서 관심과 애정을, 표정과 여백을 확인하는 하나의 행위였다. 말하자면 음성에는 얼굴처럼 '표정'과 의미가 있는 것. 전화기는 소리의 표정을 흩뿌리면서 공동체의 물적 토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대면 공동체'를 잃어버린 채 방상을 나누지 못하는 가족과 친구와 연인들 사이에서 '소리공동체'이 매체일 수 있었다.

 

소음이 소리를 잠식하는 과정. 소음의 공장으로 변신한 핸드폰과 컴퓨터.

 

연약한 몸의 소리와 인문의 소리들은 삼켜버리고 소음만을 토해내는 기계들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계몽은 늘 이중적. 이 이중성에 대한 성찰의 문화야말로 신매체 시대가 요구하는 시급한 과제다.

 

현대 사회의 소음은 기계적 계몽의 그늘이다. 그 계몽을 돌이킬 수 없다면, 그 계몽의 재계몽을 위한 메타성찰적 실천의 노력이라도 있어야 할 것. '소리'를 위한 노력 같은.


표현/전달 112


일상은 무엇보다 몸이고, 그 모든 고백과 의도는 잠시의 부유를 끝내면서 그 몸 속으로 가라앉는다. 결심은 잦고 의도는 선하지만, 그런 식으로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는 것이다. 


몸은 의도를 하염없이 비껴간다. 철학사에 등장한 그 모든 변증법은 이 이치를 유형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심정적 윤리학으로 낙착된 종교나 관념론 일반이 그 의도나 기대보다 세상의 변화에 무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의 인드라망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결심, 고백, 약속, 참회, 그리고 용서와 같은 심리적 결절로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은 안타깝지만 대체로 실패한다. 의도와 관념에서 출발하는 방식은 필경 자신이 만든 거울 속에 갇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성숙을 위해서든, 사회의 변화를 지향하든, 우선 완악하고 질긴 몸의 현실성에 주목해서 다스릴 필요가 있다. 

대략 나누자면, 몸은 표현의 장이고, 관념은 전달의 매체다. 예컨데 전달과 더불어 표현의 기능을 수행하는 언어 역시 일종의 몸인 셈. 모든 종류의 표현은 몸의 문제이고, 또 바로 그만큼 낡은 몸의 저항을 피할 수 없다. 


결국, 문화의 이상은 전달(관념)과 표현(몸)이 일치되는 어느 소실점에 놓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