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깨칠 뻔하였다_김영민

친구, 그 따스한 혼동

백_일홍 2020. 2. 15. 23:28

내갠 친구라는 게 없다.


<동무론> 3부작의 저자로 알려진 내겐 친구라는 게 없다. 친구....개 나 소나 김영삼들이나 전두환들이 가진 바로 그 (남이 아닌) '친구' 말이다. 이따금 나는 이게 대체 누구의 잘못인지 캐려고 지난 일들을 차근히 되짚거나 홀로 따져보기도 한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떠오르 긴 하지만, 이내 내 심리의 자장 속으로 회수할 수 없는 어떤 이치의 흐름과 힘에 휩쓸려 그 얼굴들은 멀어져간다. 주변의 타인들이 다 그르고 나만 옳다는 생각은 민주스럽고, 내 윤리를 꺾고 새삼스레 낡은 추억에 배인 정서를 반성적으로 헤집는 일은 허탈하다.

 

친구가 없다는 사실은 세속의 따가운 시선에서 자신의 정서와 허영을 보호할 추억의 그늘이 없다는 사실과도 같다. 친구가 그늘을 지닌 나무와 같다는 비유는, 사실 겹으로 적실해 보인다. 그들은 오직 태양의 존재로 인해 가능해지지만, 외려 그 태양을 모른 체하는 허위의식이 곧 그늘의 존재방식이 된다. 그런 식으로, 그늘이나 친구는 둘다 상상적 태도에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친구는 우선 그늘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양식이므로 공론과 맺는 관계 역시 양가적 - 흔히 공론에 기생하면서도 통히 노출되면 죽는다 - 이다.

 

가가워진다는 게 흔히 의도나 결심의 몫이 아닌 것처럼, 멀어진다는 것도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관계 속의 오해나 수모는 더러 견딜만한 것이며, 때로는 창의적인 요인을 품고 있기도 하다. 물론, '오래 품을 오해와 급히 벗길 오해'의 구분이 중요한 것처럼, 친교(親交)를 구성하는 갖은 요인들의 장단을 살피고 섬세하게 포평(褒貶)하는 일은 사람이 이루어지는 내내 늦출 수 없는 현안이 된다. 그러므로, 비록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일이며, 마치 이해가 외려 오해의 품속에서만 작동하는 것처럼 사귐의 과정에서도 영영 풀 수 없는 의혹과 수모는 계속된다 하더라도, 마치 강섬을 사이에 둔 채 돌이킬 수 없이 갈라지는 물줄기들처럼, 가까워지는 것과 멀어지 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이치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참)나무를 심어 얼마 되지도 않은 터에 나무그늘 아래 쉬려는 게 실없듯이 [Il est vain, si l'on plante un chêne, d'abriter bientôt sous son feuillage], 친구(舊)는 그 시간의 자연스럽고 나태한 효용을 통해 세속의 시선을 피할 그늘을 준다. 이런 식으로, 무이념의 이념인 친구는 세속을 가르는 그 모든 진지한 차이들을 시간의 그늘 속에 묻어 버린다. 대의와 명분의 차이, 생활양식의 차이, 희망의 차이는 잊힌 채 오직 '친구는 남이 아니'라는 사실에 이들의 세속은 기생한다. 191~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