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깨칠 뻔하였다_김영민

어른, 어른이 되지 못하는 2

백_일홍 2020. 2. 16. 11:04

8. B는 젊은 엄마였고, 당시 강의의 외부 청강생 중 한사람. 벌이가 좋은 남편에 학력도 높아 유치원을 다니고 있는 외동딸의 교육에도 열심. 열심을 부리는 것은 여느 엄마와 대차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열성을 들씌우고 있는 게 웬만한 초조함이 아니라 '독단적 냉엄'이라는 점에서 유달랐다. 자신이 정한 원칙에 완벽주의적으로 집착해서, 다섯 살 먹은 딸아이를 매사에 잡도리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해도 별스러운 풍경은 아니었다. '모방적 경쟁관계' 속에서 집단적으로 쏠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체계가 우리들의 현실이기 때문. 흥미로웠던 점은 오히려 B가 딸을 기율하던 원칙이 꽤나 변덕스러웠다는 사실. 특히 그 '변덕'의 방식이 B 자신의 문제를 증상적으로 미봉하거나 호도하는데 동원되었으리라는 추정 때문이었다. .... 교실 내에서 겪은 B는 똑똑하고 합리적이었으며, 언사가 직설적인 편이었으나 거칠진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딸을 포함해 아이들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삼엄했으며, 신경질적으로 북뚝성을 내곤 했다. 대화가 이어지고 B의 이력이 드러남에 따라 B가 '마음속 과거의 아이'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길이 갔다. 주변에 있는 현실 속의 아이들은 죄다 이 과거의 아이와 비교당했고, 자신의 딸 조차 예외가 이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여전히 자라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자신의 어린 자아에게 과도한 연민을 배풀며 애착했다. 이 애착의 바깥은 또래의 아이들을 향한 삼엄한 기율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그 기율의 속내는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는 부끄러운 질투였다. 그녀가 유독 '아이'들에게 질투한다는 사실은 치료가 필요한 만치 증상적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그 질투의 주체는 그녀가 아니라, 성숙하고 변화하기를 거부한 채 아직도 억울해하고 있는 그 옛날의 아이였다.

 

9.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 마땅히 억울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가급적 객관적 사실에 터해서 해원을 모색해야 한다. 문제는 '증상화'라는 이름의 미봉이다. 잘 알여진 대로, 증상이란 대개 '억압된 것의 회기'(프로이트)라는 형식을 통해, 과거의 것이 변형-왜곡된 채 현실 속에서 '타협적 형성'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단순화해서 보자면,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은 제 속에 아이 한 사람을 품고 있는 셈이며, 늦게사 회귀한 이 아이는 증상이라는 타협을 통해 제 이야기를 풀어내게 된다. 증상이라는 타협, 혹은 보충은 인간이라는 정신의 중층성에 비춰볼 때 차라리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증상의 복합성은 외려 인간의 복합성을 잘 드러내는 자리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증상적 타협이 부정적으로 흐를 때다.

 

10. '증상의 부정적 타협'에 대처하는 노력과 지혜는 인간의 성숙을 도모하려는 인문학적 실천에서 중요한 과제다. 자아는 무엇보다도 증상의 덩어리이기 때문이며, 증상은 어떤 식이든 현실과의 타협에 의해 발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협 그 자체는 인간됨의 조건-한계일 뿐으로 별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살이의 지혜란 타협의 기술이기도 하다. 문제는, '증상적 타협이 부정적으로 흐를 때'에 생긴다. 이 부정성이란, 거칠게 말해 스스로 어리석어 가면서 이웃을 해코지하는 것이다. 증상의 부정적 타협 중에서도 '자라지 않는 어른'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주목을 끄는 것은 '질투'다. 질투는 앞서 지목한 인색함, 쾌락에의 과소(과다)노출, 그리고 억울함 등의 문제와 빠짐없이 관련될 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인 아이(미성숙)의 표징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11. 쾌락의 과소에 대한 비교적 판단과 이에 따른 감정적 몰입(질투)은 이미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어른스러운 아이가 있다거나 특별히 아이 같은 어른이 있다거나 하는 지적으로 끝낼 일도 아니다. '공부'하고 이해하며 도우려고 하기보다 현상태를 고집하면서 사랑받고 이해를 구하려 하는 태도에, 그리고 여기에 스며들 수밖에 없는 정서의 울체에 주목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현실적으로 아이가 아니면서도 아이의 상태로 미끌어져 내리게 되는 '구조와 개인의 합체'를 살필 필요가 있다.

 

12. 질투는 전형적인 양가감정이다. 애증이라는 정서의 초보에서부터 내적으로 어긋나고 있는 꼴이다. 이것은 유아기적 정서의 반복이라는 점에서는 전이와 닮았다. 전이는 대개의 경우 전이-저항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를 죽일 때에 돌보지 못한 정서인 '전이'와 이오카스테와 혼일할 때 제대로 챙기지 못한 정서인 '저항' 사이의 모순을 한 품에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양가 감정과 같이 중층결정된 (불안정한) 정서를 안정적으로_ 내재화한 것은 일면 인간 정신이 이룩한 성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화약을 안고 부엌에 들어가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노릇이기도 하다. 우선 질투의 매커니즘을 진화론적으로 전제해서 관련 논의의 배경으로 삼아 불필요한 '몰역사적 풍경화'를 배제할 필요가 있다. 물론 질투가 오로지 인간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인간에게 특유한 현상으로 특칭해도 좋을 만치 널리 퍼져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현상은 인간의 생활세계가 복잡해짐에 따라 인간의 심리도 더불어 번요해진 것에 일부 빚지고 있다. 잘라 말하자면 문명화된 인간의 심리는 이른바 '범신경증화'에 상시 노출되어 있는데, 질투가 특히 취약해 보인다. 재가 긴 세월 '질투 없이'라는 화두를 공부자리에 시금석처럼 놓아두고 경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13. 질투라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현상의 분기점이 된 것은 교미의 단순행동으로부터 어긋나며 연정이 생성되기 시작한 사건일 것이다. 발정에 의해 교미가 이루어지고 이로써 종의 번식과 유전자의 전달이 계속되는 일은 무릇 모든 생명체 개체의 존재근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사람은 늘 '잉여와 초월의 실존'의 길을 걸어왔다. 연정의 기초 형식인 그리움, 기다림, 연기, 그리고 과잉의 제스처는 일견 낭비이자 생물학적 순리를 거스르는 도착이지만, 인간은 진보인 듯 혹은 운명인 듯 오이디푸스처럼 모순된 길을 걸어왔다. 잉여와 초월의 실존적 삶을 좇아 교미라는 단순편리한 골목길을 연정이라는 복잡번요한 미로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발정-교미-생식이라는 짧고 확실한 과정을 대신한 연정과 동거라는 길고 불확실한 길은, 한편 인간의 문명문화적 성취가 온새미로 들어선 역사를 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교미/성행위의 앞뒤에서 불안정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정서적 진폭에 어렵사리 대처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말하자면 질투, 혹은 이와 유사한 양가감정에 상시로 노출되게 된 것이다.

 

리비도의 고착에 물린 채로 질투를 반복하는 연인들의 유치한 행태는 비유하자면 '문인상경'의 악습을 방불케 한다. 글과 말로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 어울리고 경쟁하는 꼴이란 게 대체로 언거번거한 변명과 두루뭉술한 비평 일변도로 흘러, 가령 진검승부의 무사들이라면 열 번 스무 번이나 죽어 마땅할 자리에서도 이 문사들은 좀비처럼 되살아나서 또 입을 벌리고 또 글을 쓴다. 나는 이런 좀비스러운 문사의 꼴이 묘하게 연인상경의 대표적 행태인 질투를 빠닮았다고 생각해왔다.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은 채 스스로 어리석어가며 남을 해꼬지하는 글/말'은 역시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은 채 스스로 어리석어가면 남을 해꼬지하는 질투'와 쌍생아의 관계처럼 보이는 것이다.

 

질투는 그저 아이처럼 유치한 행동을 널어놓거나 개인들 사이의 몰풍경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모르는 게 부처(약)'라고들 속없이 말하지만, 속의 억울함과 밖을 향한 질투를 방치한 채로는 도통 부처의 길을 상상할 수조차도 없다. 다시, 문제는 '쾌락의 지점'이 희소성의 원리에 휘말려들어 분쟁을 낳게 될 때다. 질투가 생성되는 지점은 다름 아니라 쾌락이 생성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속적 쾌락의 양과 기회, 그리고 순도에서의 불공평은 이미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슬금하게 어울리면서 배분적 중도에 접근하려는 실천적 노력조차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에 대한 극명한 사례가 이른바 '희생양 논리'일 것이다. 쾌락의 지점에 근접해 있는 주체(쾌락소비자)들은 응당 쾌락의 대상을 놓고 경쟁 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이 경쟁의 구조에는 개인의 선호나 판단마저 넘어서는 면이 있다. 다만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대목은, 이들이 반드시 대상의 쾌락가치를 손에 잡을 듯 '의식'하고 있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쾌락의 희소함이 경쟁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실은 경쟁의 상태 그 자체가 쾌락의 매커니즘을 가속시킨다. 쾌락의 대상을 앞두고 있는 군중은 대체로 그 쾌락의 분배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토론하거나 민주적으로 결정하지 못한다. 쾌락은 그 쾌락도가 높을수록 독점에 의해서 그 쾌락의 질을 유지하거나 보증받기 때문이다. 희생양의 논리에 따르면, 개인이 독점할 수 없는 쾌락의 대상은 전체의 희생양으로 일거에 변성한다. '욕망의 대상에 대해서는 합의하기가 불가능하지만 희생양에 대해서는 그 증오의 합의가 쉽'기 때문이다.

 

이 증오의 합의가 향하는 희생양은 대체로 '(남몰래) 즐긴다고 가정된 주체'가 된다. 예를들어 한국사회에서 지역감정의 대명사처럼 오용/과용되었던 '전라도'는 단지 정치이데올로기적 편견의 산물만이 아니다. 명백히 전라도는 흑인이나 마녀의 경우와 같이 '(남몰래) 즐긴다고 가정된 주체'로 기능(당)해 왔다. 이 지적은 문벌주의 가부장제의 아성으로 군림해온 경상도와 비교할 때 특별히 적절한 비평으로 여겨진다. 음식은 맛이 없고, 말은 어늘하며, 소리문화의 전통마저 빈약한ㄱ ㅕㅇ상도이지만, 문자적-항문애적 계몽주의의 전통으로는 언제나 수위권을 놓지 않았다. '조선 선비의 반 이상은 영남출신'이라던 자존심은 과거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뒤에도 이러저러하게 변형된 채 연면하게 이어져온 것이다. 이와 대비해서 볼 때 '맛인ㅆ는 전라도' 혹은 '소리 잘하고 잘 노는 전라도'의 이면에 놓인 정서는 '음탕한 전라도'라는 관료주의적 색안경이다.

 

'남몰개 즐긴다고 가정된 주체'의 종류는 많다. 그중에서도 역시 대표적인 게 여자와 유태인일 것이다. 역사 이래로 여자와 유태인의 음탕함에 대한 소문은 끝이 없었다. 이런 식의 비난어린 소문은 대개 질투의 쏠림 현상과 맞물려 생성, 유포되는 법이다. 그리고 질투가 전염되기 위해서라도 '남몰래 즐간다'는 의혹이 여기저기 저녁 연무처럼 흘러 다니는 게 중요하다. 흥미로운 타자의 우선적인 조건이란, '그(녀)는 남모르는 쾌락의 지점에 근접해있다'느 ㄴ소문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의혹이 생성되는 바탕은, 사회적으로 소외당한 자-여자ㅡ 흑인, 유태인, 중세의 마녀, 과거의 독신자 등등 - 들이 목락하기는 커넝 자기 나름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남모르는 공동체'를 검질기게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질투는 산드러지게, 혹은 당당히 살아가는 타인들의 모습에 부정적으로 개입하려는 매우 유치한 욕망이므로, 그 뿌리가 일상 속에 만연해있을 수밖에 없다.

 

14. C는 과년한 나이의 아가씨로 내 강의의 수강생이었는데, 학우 D한 사람에 집착하고 있었다. 스토킹이랄 만치 일방적인 구애였다. C는 이미 비슷한 전력이 몇 차례 있었느며, 실은 D를 쫓아다니다가 대학까지 바꾸어 내 세미나에 들어왔을 정도로 막무가내였다. 그러나 C의 막무가내 공세는 그 성격이 묘했다. C가 D를 향해 수년 간 일관되게 취한 태도는 '너, 나를 사라아해야만 해! 아니면 죽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 너를 사랑해, 받아줘!'는 더울 아니었다. C의 운신은 '너, 이미/늘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혹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어...어떻게 그게 가능하지?'와 같은 쪽이었다. C는 반응이 없는 D를 향해 구애하려고 노력하는 타입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인 D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적 믿음을 확신했고, 이를 '확인'하려는 식으로만 움직였다. C는 일방적으로 구애하던 주제인데도 무슨 계기나 절기 때마다 D에게 선물을 요구하곤 했다는 것이다. D가 어떠허게 반응하든 C의 환상은 붙박이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이 환상은 비현실적 자기표상에 의해 생성된 것으로 필경 자기변화의 고통이 없이는 부서지지 않을 성질의 것이었다. 기실 환상이 현실을 체계적으로 밀어내거나 사실이 반증가능성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는 일련의 현상은 종교와 사랑의 영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광신이 신에 의해서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환상적 주체의 이데올로기인 것처럼, 광애 역시 너에 의해서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환상적 주체에 의해서 유지된다. 여기에서의 공통분모도 역시 일종의 유치증이다. 나는 여전히 사랑과 돌봄과 이해를 받아야(만) 하는 아이로, 관계와 성숙의 세속적 비용을 면제받는 아이로 남아 있게 된다. 고치 속의 삶은 순간-순간-순간 아늑하고 편안하다. 그러나 스스로 고린 내가 나고 이웃에게 쉼 없이 폐를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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