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나는 식물따라 걷기로 했다

백_일홍 2022. 7. 29. 09:10

나는 식물따라 걷기로 했다


한수정

머리말, 식물을 따라 걷는 길

처음엔 그저 식물이 좋았다. 아름다워서 좋았고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어 좋았다. 식물을 바라볼 때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 파도가 일렁였다. 그 일렁임은 언제나 충만함을 주었고 몽상가인 나를 일어서게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주저하고 방황하기도 했지만 식물이라는 나침반이 끝내 알려준 곳은 모든 생명이 어우려져 살아가는 거대한 지구라는 숲이었다.

두 아이의 손을 양손에 잡고 춘천을 찿았을 때 나의 두 눈은 초점이 없었고 가슴은 사막 같았다. 오늘 하루만 버티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아침을 시작해 무탈했던 날에 감사하며 하루를 마쳤다. 그런 나를 위로해준 유일한 존재는 식물들이어서 매일 식물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나무 아래 가만히 서서 그 세계를 들여다보면 나와 같지만 다른 생명의 오늘이 펼쳐졌다. 그런 생명을 마음을 다해 보고 만지며 관찰하니 죽은 것 같았던 나의 감각이 조금씩 활기를 띠었다.

같은 곳의 나무와 풀들의 변화를 꾸준히 지켜보며 지식이 아닌 나의 감각으로 생명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것은 내 삶의 전환점이었다.

식물은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네 눈으로 세상을 봐.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너의 감각과 너의 느낌으로. 그것을 믿고 따라가. 아무리 하찮은 들풀도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지. 모든 생명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니까."

*

춘천에서의 6년은 삶에 어수룩한 나를 한 사람으로 성장시킨 시간이었다. 허공에 떠 있던 두 발을 땅에 디디고 서서 따스한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어디를 바라보고 어디를 향할지 그 길을 선명하게 발견한 시간이었다. 식물을 관찰하여 그림으로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숲과 계곡에서 생명을 만나는 조용한 일상은 잔잔하게 혹은 강렬하게 생의 진리를 일러주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삶과 괴리되어 잊고 살아온 소중한 진리, 그것은 작은 풀꽃도, 나플거리는 나비도, 저 멀리에서 지저귀는 새도, 모두가 소중한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까지도.

생명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나무와 풀은 곤충과 새들에게 집과 먹이를 제공하고, 동물의 배설물과 사체가 썩어 만들어진 흙은 다시 식물들의 양분이 된다. 서로가 서로의 생의 기반이며 생존의 근원이다. 생명들 간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연결고리가 이어져 거대한 자연이 되고 그것이 질서를 이루어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된다. 과연 어떤 생명이 이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어떤 생명이 자연과 단절되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인간 또한 생명이며 그들의 일부라는 사실이 새삼 새롭게 다가와 네 마음에 깊은 안정감을 주었다. 자연은 내 생의 기반이자 근원이다.

나는 초록빛의 작은 풍뎅이 앞에 앉아 서로에게 연결된 끈을 감지했다. 반짝이듯 지나가는 나비와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풀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다.

*

여행을 하듯 자연 속을 탐험하고 돌아오면 인간 세상이 낮설게 느껴졌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니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전과 달랐다. 늘 익숙하게 보아온 풍경이 생경했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상황 앞에서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당황스럽고 놀라운 발견이었다.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과 이면의 욕망을 숨길 수 없이 마주한 순간이기도 했다.

자연을 착취하며 물질적 욕망을 채우는 인간의 모습 뒤로 그 행위의 결과들 또한 하나둘 시야에 들어왔다. 전에는 나와 상관없는 듯 흘려 들었던 지구촌 곳곳의 신음이 내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생명들의 연결점을 이해하고 감지하고자 하는 나로서는 환경 위기는 근원이 흔들리는 생존의 위험이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내 일상이 그런 위험의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진정한 변화를 요구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에게 고착되어버린 일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쓰레기를 줄이고 내손으로 수고로움을 늘리며 외면적 아름다움보다 가치를 위한 일상을 만들어나갔다. 이 시대에 몸을 담그고 살며 편리로부터 뒷걸음질 치는 역행이 힘겹고 외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멈출 수 없고 멈춰서는 안 되는 한 생명의 과제다. 무엇보다 내 아이들을 사랑하기에 부모로서 지켜줘야 할 행복이다.

*

식물을 따라 걸으며 나는 성장했다. 걷고 또 걸으며 묻고 또 물었다. 어떤 답은 눈앞에 있었고 어떤 답은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다. 예상치 못한 길이 나오기도 하고 한 발짝을 때기도 어려운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내 곁엔 식물이 있었다. 식물은 숲이 되고 자연이 되어 나에게 더 큰 의미의 행복과 충만함을 주었고 그에 따르는 책임과 역할도 일러주었다.......

아직 나에게 남아 있는 길에 식물은 또 무엇을 가르쳐줄까, 어쩌면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노년의 삶, 그리고 죽음이 아닐는지, 생명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마지막 길이다. 귀를 쫑긋 세워 바람결에 흩날리는 작은 속삭임을 들어봐야지, 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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