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살아있다는 건

백_일홍 2022. 7. 29. 13:46

살아있다는 건:

내게 살아있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야생에 대해여

 

김산하

어제 모밈에서 사회역학이란 틀에 따라 우리가 사는 사회 속 인간들과 인간들이 모인 사회를 유지하는 여러 체계들이 우리 몸과 마음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른 한편으론 ㅇㅇ님이 듣고 있는 강의 이야기, 우리의 몸 나아가 운명이 우리를 둘러싼 우주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사주, 명리학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내가 요즘 관심을 두는 건, 내 몸과 마음의 건강과 안위, 행복, 궁극적으로는 나에 대한 이해의 문제에서 위 두 가지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인데, 그것은 이 지구와 우주를 나와 같은 인간과 공유하고 살아가고 있는 다른 생명체에 대한 것이고, 그러므로 인간인 나 또한 한 생명체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추상적으로 유추하는 우주의 원리, 음양오행과는 달리 눈을 돌려보면 쉽게 수많은 식물들과 동물들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들과 같은 생명체라는 수준에서의 나에 대해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지금 여기를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어떤 느낌인지를 알고 느껴보고 싶다. 산다는 것, 살아있다는 건 책상 위의 컵이나 돌멩이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무생물과 달리 생명체는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고 유지하고 있는데 그 세계의 수와 다양성이 생명체의 수 많큼 많다는 것이 놀랍다. 인간이란 종은 영장류, 포유류에 속하는 한가지 종일뿐 아니라, 지금의 인간인 호모사피엔스는 14가지 호모군중 하나에 불과하단다.

무생물과 달리 자기 고유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생명체라면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공통의 그 무언가를 나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걸 알 수는 없지만 살아있다는 느낌으로 느낄 수는 있지 않을까? 그 느낌은 내가 인간세계에만 갇혀있지 않고 내 주변의 다른 생명체로 눈을 돌려 그것들을 알아보려할 때 비로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새삼, "생명의 느낌"이란 게 어떤건지 물어본다.

* * *

원숭이 연구를 한 김산하라는 과학자이자 작가가 있는데, 이 사람이 쓴, 《살아있다는 건》라는 책이 있어요. 이 책의 초입을 읽으며, 어제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 생각이 나서 몆자 적었네요.

"살아있다는 건"

김산하

들어가며
......
과학은 살아있는 생물을 관찰하면서도 '살아있음'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다. 살아있다는 건 연구 대상의 기본 조건이요, 보고자 하는 건 그 다음에 벌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

이 책은 살아있는 것들을 보며 든 생각을 담은 책이다. 살아 있다는 것이 무언인지 규정하거나 정의하려 하지는 않았다. 다양한 생물이 다채로이 사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가장 살아있어 보일 때를 포착하려 했다. 때로는 그 생물의 생물학적, 생태학적 특성에 착안하기도 했고, 때로는 생명의 힘이 빛을 발하는 장면을 그저 직관적으로 거머쥐려고 했다. 책을 쓴 이유는 간단하다. 살아 있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이 그윽한 감동을 타인과 나누고 이를 통해 다시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함께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살아있다는 건 그것으로부터 배울 게 있다는 의미다.

매일 화면에 눈과 코를 박고,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마스크로 입을 틀어막은 생활 속에서 정말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뭔지 모를 답답함, 거기에 오히려 해답이 있다. 몸과 마음이 말하는 것이다. 이건 사는 게 아니라고. 아니 살아있는 게 아니라고. 그럴 때 잠시 멈춘 채 살아있다는 게 어떤 것인지 해아려보면 어떨까. 그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많은 생명을 바라보는 것이 어쩌면 하나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7-18

1장. 변하하는 계절의 일부가 되기

생명이란 본래 의존이 그 정체성의 핵심이다. 외부 물질 또는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비로소 살 수 있는 것이 생명체다. 의존할 외부가 존재하지 않으면, 나도 없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건 외부에 기대어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즉 세상과 나 , 둘의 존속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때로 마치 완전한 단독자로서 진공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처럼 군다. 자연의 힘을 늘 거스르려고만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한 발짝씩 멀어진다. 22

인간은 변하는 주위 온도에 맞춰 체온을 변화시킬 수 없는 정온동물이므로 환경에 맞서야 하는 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눈을 들어 비스한 처지에 놓인 다른 포유류나 조류를 보라. 적정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을 반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소박한 보금자리 하나, 매일 걸치고 다니는 외투 하나. 그 정도가 전부다. 평생 단벌 신사로 살아가는 그들이 맵시는 오리혀 우리보다 훨씬 뛰어나다. 23

계절의 일부가 된다는 것, 그것은 생명의 특권이자 의무, 그리고 행복이다. 생태계를 관장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대자연의 순환원리에 일상생활로서 동참한다는 것이다. 뛰어오르면 곧 다시 내려오리라는 중력의 법칙에 굳건히 의지하며 살 듯, 계절의 변화가 선사하는 다양한 색채의 분위기의 날씨에도 기분 좋게 파묻혀 살아갈 수 있다. 공기, 빛, 물 등 얼마 안되는 재료를 버무려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하게 색다른 나날을 만들어내는 자연은 아무리 음미하고 감동해도 지루해지지 않는다. 그것을 넋 놓고 바라볼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모두 살아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24

삶의 현장은 야외다. 아니, 어차피 그들에겐(야생동물) 실내가 없으므로 야외가 아닌 그낭 '세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삶의 현장은 한두 군데가 아니라 사방이 탁 트인 열린 시스템이다. 물질과 생명이 마구 왕래하고 어디든 만물 공통의 공간인 그 세상에서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나만의 보금자리'라는 것은 없다. 있다 하더라도 잠시 머물 수 있을 뿐. 언제든지 예고도 없이 쫒겨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불확정적이고 모진 자연의 장에서 살기 위해서는 한 가지 기본자세가 요구된다. 씩씩하게 사는 것.

'씩씩하다'는 말 앞에는 '주어진 조건과 상관없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되어 있다. 상황이 유리할 때만 씩씩하다면 씩씩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비바람이 불건, 눈보라가 몰아치건, 뙤약볕이 내리쬐건 늘 해오던 대로 서슴없이 사는 것. 아마 이것이 씩씩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계통과 생태가 다른 이 세상 모든 생물이 공유하는 단 하나의 기본 생활 자세다. 자연은 씩씩한 삶 외에는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33

매전 어김없이 무에서 유가 탄생하는 이 주기적 현상이야말로 생의 진면목이다. 그져 보기 좋다는, 뒷짐 진 채 내뱉는 감상평이 아니다. 하나의 생명으로서 봄을 완전히 알아보고 이해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존재는 단순히 구경꾼으로 머물 수가 없다. 사방에서 터지는 꽃망물의 생기는 사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서도 똑같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 나비와 개나리 못지않게 나도 봄으로 차오르는 생기의 현현이다.

아, 살뜰한 봄은 나조차 빼놓지 않고 챙기는 구나. 우울하든, 준비가 안되어있든 상관없다. 봄의 햇살과 온기가 닿는 순간 나는 일어난다. 그 어떤 어려운 형편에 처한 벌리도 공평하고 온전하게 봄의 부름을 받는다. ....

살아있다는 건, 너나 할 것 없이 봄에 동참하는 일이다. 모두가 한꺼번에 뛰어들어도 전혀 갑갑하지 않은, 참여하는 이가 늘수록 더울 빛을 발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축제. 그것은 봄이다.

봄은 만물의, 만물에 의한, 만물을 위한 시간이다.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깨알 같은 의미에서 말이다.

전혀 다른 종이 수많은 생물이 집단으로 기지개를 켜는 이 현상으로부터 나는 다른 맥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질감과 유대감을 느낀다. 서로 먹고 먹히고, 쫓고 쫓기지만 이렇게 봄이라는 출발선에 함께 선 것이 한없이 신비롭고 유쾌하기만 하다. 우리 각자의 조그마한 육신에 똑같이 싱그로운 기운이 퍼지고, 근원적인 생의 희망에 마음이 한결같이 부풀어 오르고 있다는 사실이 감동적이다.

갓 핀 개나리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건 단순히 노란 꽃이 예쁘기 때문이 아니다. 그 꽃이 세상과 나의 봄으로 당장 뛰어들고 싶게 하기 때문이다. 봄이 오면 그 봄을 사는 방법은 단 한가지. 그에 동참하는 길 뿐이다. 43

추울 땐 그저 평화롭게 잠들고 싶을 뿐.
잠의 가장 아름다운 속성은 세상에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은 약간의 공기를 제외하면 그 어떤 자원을 요구하지도 소모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생명체가 가장 무해한 존재일 때는, 그러니까 세상과 조금의 대결구도도 없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때는 잠들었을 때뿐이다. 47

잠이란 건 특별하다. 살고 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것만 같다. 그래서 죽음을 영원한 잠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48

세상이라는 전체집합의 부분집합, 또 그것의 부분집합..... 이것을 수십 차례 반복하면 나만의 작은 세계, 나만의 시공간에 도달한다. 그리고 살아가는 모든 세세한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살아있다는 건 무척이나 고유한 일이다. 아무거나 다 먹고, 아무 곳에서나 살고, 아무렇게나 생긴 생물이란 없다.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녀석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생물은 반드시 특정한 양식을 가진다. 땅에 붙어 다니든가 훨훨 하늘로 날아오른다. 낮에 활동하거나 밤에 배회한다. 물론 두 양식을 모두 가질 수도 있다....결과적으로 제각기 고유하고 개성 넘치는 생명이 되어 지구를 누비게 된다.

지구상에 왜 이토록 다양한 생물이 존재하는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제멋대로 생기고 살아가는 이들이 모이면 그 군상은 다양하기 마련이다. 서로 너무 다르다는 것, 그것 자체가 그들이 갖는 특성이 된다. 자연에서 거의 무조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다양성이라면 거기엔 분명히 깊은 의미가 있다. 생태계의 작동원리, 진화의 전개 방식 모두 다양성을 핵심으로 발휘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생명의 가장 일관된 특징, 그것이 곧 다양성이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특별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그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특징의 총체이며, 그것은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다시 나올 수 없는 고유한 조합이다.

이 고유함이 가지는 힘과 의미는 실로 엄청나다. 우리가 숭상하는 거의 모든 가치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생태계가 내놓은 무수한 작품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더욱 그렇다. 우리가 속한 포유류와 영장류 안에서는 물론, 심지어 호모 속 안에도 14종이나 되는 다른 '인간' 종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또한, 언제나 전혀 다른 개성적인 생물을 내놓는 생태계의 작동 원리를 더욱 경이롭게 바라보게 해준다.

산다는 것은 그래서 본질적으로 외롭다. 모든 존재의 기본 전제가 '다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바로 그 덕분에 우리에게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와 마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얽히고설킨 채 살아가는 이 에상에서 살아 있다는 건, 나만의 고유의 시공간을 누린다는 것이다. 내가 그러한 만큼 남들도 그럴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존재 그 전부가. 73

꽃가루의 가능성.
꽃가루와 매연이 우리의 호흡기엔 썩반갑지 않은 요소라 하더라도 허공에 떠돌아다니는 식물의 씨앗이나 가루는 기계가 배설한 오염물질과는 너무도 다른 존재다. 평생 한곳에 뿌리내린 채 살아가는 식물이 이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놀라운 동적인 해결책, 그것은 공기의 움직임을 활용해 자신의 종자 혹은 유전자를 퍼드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공기에 실린 식물 가루는 생명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조건만 맞으면, 공기 중의 분말이 거기에 안착해 발아와 생장을 시도할 것이다. 이미 다른 식물이 차지한 곳이 많아 대부분은 실패하고 만다. 바람 속에서 여행만 하다 영원히 떠돌이로 남는 이도 있다. 바로 그러므로 가능성이라 부를 수 있다. 대다수 실패하지만 그중 일부는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일부가 다시 살아남기의 바통을 이어받고 또 건네준다. 떠돌던 씨앗이 촉촉한 흙과 만나기만 하면된다. 이 얼마나 손쉬운 조합인가?

실상은 그렇게 쉽지 않다. 사방을 둘러보라, 흙은 무슨, 시멘트로 포장되지 않은 곳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왜 그리 땅을 덮어야 하나? 캄캄하게 가려져 햇빛을 볼 수 없는 토양과, 단단한 시멘트와 아스팔트 아래서 애타게 흙을 찾는 식물에게는 아주 아리송한 일이다. 그냥 나두면 뭐가 이때서?

건물을 세우고 도로를 만들기 위해서란다.

길거리에 난 어느 이름 모를 식물 덕에 우리는 그곳에 미세한 빈틈이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물론 식물에겐 이름이 있지만, 우리가 모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본의대로 붙여놓은 별칭도 그에겐 필요하지 않다. 그에겐 그 좁은 틈새, 그 얼마되지 않은 가능성을 묵묵히 살렸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나였다면 주어진 조건만으로 저만큼 할 수 있었을까. 모진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남는 데 성공한 그들을 두고 그저 잡초라는 이름밖에 생각할 수 없다면 그건 우리 상상력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다.

숲과 들판은 주변에 흔하지 않고 대신 화분이 그 자리를 대체한 세상에 살기에 우리는 식물을 오해하기 쉽다. 물을 줘도 죽고 안줘도 죽고, 조금만 신경을 덜 쓰면 시드는 나약한 존재. 인간이 돌보지 안으면 안되는, 지극히 의존적인 생물로 보기 쉽다. 그러나 화분에 식물을 심은 건 인간이지 그 식물의 선택이 아니었다. 스스로 선택한 곳에서 자란 식물은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피어난 식물의 존재 자체는 발아와 성장의 조건이 이미 딱 들어맞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80

생명은 유한하므로 살아있는 생물끼리의 사랑은 언젠가 끝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슬픔을 저축하는 행위다. 언젠가 그동안 차곡차곡 모았던 것을 한꺼번에 인출해야 한다. 그러나 사랑에 수반되는 슬픔과 고통이 두려워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는 건 생명이 할 수 있는 가장 비겁한 행위다.

사랑을 위한 마음의 자리를 만든다는 건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다. 살아있기에 무언가를 선택해서 집중하고 결국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자기 자신이라는 우주에서 우리는 모두 창조주다. 마음만 먹으면 나라는 우주 또한 바깥세상만큼 방대하고 풍부하게 채울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느 한 존재를 위한 아주 특별하고도 고유한 자리 하나를 만들 수 있는 건, 그것이 살아있음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103

고유하고 다양한 삶들의 공존.
자연은 일찌감치 이런 우매한 길을 벗어나 지구를 더 다양하고 결과적으로 더 풍요롭게 꾸미는 데 열중했고, 대지와 바다를 오만 가지 스타일로 수놓았다.

이 시스템은 여러 종류의 생물이 함게 자라지 않고서는 유지되지 않는다. 또한 , 경쟁은 거의 언제나 분화로 이어진다. 끝까지 경쟁에 골몰하는 대신 누군가는 반드시 다른 갈림길로 방향을 튼다. 결과적으로 경쟁은 차이를 만들어낸다. 자기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갖지 못하는 생물은 살아남지 못하는 체계라 해도 과연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생태계에 어떤 기여라도 하면서 저렇게 떵떵거리고 사는가? 그러나 기여도 역시 생명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다. 자기가 속한 생태계의 일원으로 잘 살기만 하면 그것으로 이미 세상에 기여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생태계의 일원이 된다는 바로 그 점이다. 생물이 생태계의 어엿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 그것은 각자 고유한 삶의 방식이 있는 생물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다른 여러 삶과 잘 맞물려 돌아갈 때 가능하다.

살아있는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같아지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어색한 정도가 아니가 생명의 본질에 배치되는 억지다. 물론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엄청난 공통분모가 있다. 그러나 이를 훌쩍 뛰어넘는 다름 역시 가지고 있다. 개개인은 매일 각기 다른 세상을 겪고 통과하면서 만들어지므로 그럴 수밖에 없다. 118

생물은 특정한 관점이나 방법론을 통해 탐구하거나 심화할 '대상'이 아닌지도 모른다. 생물과 나를 동일 선상에 놓고 마주하며 온전한 생명체로 여기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가진 몇가지 형식으로만 그들을 접하지 않아도 된다. 정신적, 물질적 소유관계로부터 탈피한 '마주함'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생명에 대한 자세가 아닐까. 162

사람은 새를 부러워한다. 새들처럼 훨훨 날아 창공을 가를 수 있다면! 평생을 땅에 달라붙어 지내야 하는 인간의 신세와 비교하면 정말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다. 비상을 향한 부러움은 좀 더 빠르고 편하게 출근하는 방법에 대한 동경이 아니다. 높은 곳에서 보는 멋진 경치에 집착해서도 아니다. 세상 어디든 누빌 수 있는 그들의 자유와 능력에의 갈망이다. 평면적 세상에 나를 복속시키는 중력의 압제에서 벗어나 입체적 우주를 유영하고 픈 분더러스트를 마음껏 발산하고 싶은 것이다. 178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
휴식과 자유.

오감은 모두 열어두었지만, 특별히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없이 그저 존재함을 음미하면서 나의 이런저런 부속 장치들이 회복되어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가장 중요한 걸 한다. 살아있음을 행하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이런 게 가능이나 하냐고? 맞는 말이다. 저런 완벽한 휴식은 호사다. 그러나 궁극의 휴식이 어려운 것은 소음이나 연락 같은 방해 요인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원인은 모든 공간이 반드시 특정한 쓰임을 위해 존재한다는 데 있다. 우리에게 어떠한 경험이나 행동도 요구하지 않는 공간은 드물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요구되는 행동이나 경험은 단연 소비다. 그래서 세상은 뭔가를 사는 행동 외에는 아무것도 할게 없는 공간으로 가득 차있다. 무엇도 구매할 능력 없이 이 도시를 거닐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발 들일 수 있는 곳은 전체의 1퍼센트도 되지 않을 것이다.

소비는 우선 거시적인 시선이 아닌 미시적 시선을 요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디에 가든 경관이나 건축물을 보는 대신 곧바로 진열된 물건에 시선을 빼앗긴다. 빼앗긴다는 표현이 옳다. 소비의 감각 패러다임이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능력 자체를 앗아갔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공간은 자유가 허락되는 곳이다. 감각과 인지와 행동과 경험의 자유, 특정한 상태에 몰입하지 않더라고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 그 어느 것보다도 자연이 필요한 것이다. 자연과 어우러져야 비로소 궁극의 자유가 깃들 수 있다. 자연이 정착할 자유가 주어진 곳이라면 분명 그곳에서 인간도 자유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바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일이다. 또 무언가를 사서, 쓰고, 버리고, 에너지를 낭비하고, 쓰레기를 유발하는 그런 행위가 아니라 죽치고 앉아 몸을 좌우로 천천히 흔들면서 공기와 햇빛 속에 있는 일. 쉼이 필요할 땐 그저 아무것도 하지말자. 가장 간단하고 무해하게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196

우리가 야생동물을 미학적으로 경험하는 이유를 환경 윤리학자이자 철학자인 홈스 롤스톤 3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넷째. 야생동물은 나와 동등한 또 하나의 관점이다. 자연을 거니는 나는 나의 시점만을 경험한다. 모든 대상이 나의 피사체다. 그러나 동물이 등장하는 순간, 나와 동등한 관점 하나가 추가된다. 똑같이 보고 느끼는 주관성이 나를 응시한다. 211

생명에게 그냥 마음을 열 수 있다면
감응 능력.

사람들을 반응하게 만드는 것은 생명이다. 살아 있는 것에 눈이 가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한결같다. 그런데 생명이기 때문에 이 자연스러운 반응은 그 동안 매우 편협하게 활용되거나 다분히 잘못 해석되어왔다. 사람을 유인하는 용도로, 자극하기 위한 도구로만 쓰여왔다. 살아있는 동물을 전시하고, 만지고, 잡고, 먹는 일차적으고 즉물적인 행위에 착안한 프로그램과 상품을 판매하는 무수히 많은 비니지스가 바로 그 사례다. 생명인 우리가 다른 생명에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자비하게 이용함으로써 해당 동식물을 무한히 괴롭힌 것은 물론, 우리의 가장 표피적인 반응 기전만 자극하며 본질을 소외시키고 있다. 그것은 마치 가장 날것의 성욕에만 집중하며 사랑의 마음이나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강가에서 만난 물고기의 신비로움이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해도, 반드시 그것을 낚시의 형태로 표출할 필요는 없다. 낚시는 물속의 생명에게 반응하는 겨우 한 가지 방식, 그것도 대상 생물에게 고통을 주는 가장 유해한 방식이다. 똑같은 마음으로 물고기를 보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물고기에 관한 책을 읽을 수도 있고, 그저 관찰할 수도 있다.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행위가 인간 본성에 가까운 것도 결코 아니다. 그 어떤 낚시 도구도 존재하지 않을 때부터 우리는 물고기를 관찰하고 공부해왔다. 그리고 언제나 신기하게 생각해왔다. 물고기라는 생명에 반응하는 우리의 능력은 생각보다 깊고 풍부하다.

무겁기만 하던 마음이 살랑대는 꽃나무와 새소리에 마법처럼 풀리고, 나를 향해 달려오는 우리 강아지의 힘찬 뜀박질에 고단한 하루의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경험, 그게 어떤 기분인지 우리는 잘 안다. 오리 식구가 뛰뚱뒤뚱 위험천만한 차도를 건럴 때 이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며 마음이 조마조마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고래를 실제로 마주했을 때 감동하지 않고, 바다거북의 콧구멍에서 빨대를 빼는 걸 보았을 때 보람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없다. 생명으로서 생명에게 감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우리다. 생명이 또 다른 생명에게 열리는 숱한 장면들이 우리 곁에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평범하고,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살아있다는 건 생명에게 그냥 마음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 단순한 사실이 참으로 좋다. 234

별 볼일 없는 사이라도 마주치면 응시하기
우연한 만남.

먹지도 먹히지도 않고, 딱히 공생도 경쟁도 아닌 관계, 한마디로 별 볼일 덦는 사이끼리의 만남이 숲에서는 매일 일어난다. 마주치면 응시한다.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새처럼 옆으로 보든, 삵처럼 앞으로 보든. 눈이 코보다 뒷적인 애들은 중둥이 끝을 실룩실룩.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 아닌 생연인 두 개체가 잠시 서로에게 집중한다. 아무런 해프닝도 일어나지 않고 생태계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 이 신비로운 몇 초는 그들이 서로를 같은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인지하는 순간이다. 숲 생활의 멋과 여유다.

의사소통을 되지 않더라도 딱 한 가지만은 분명히 통한다. 서로를 살아 있는 존재로 본다는 사실이다. 별 볼일 없는 사이라도 마주치면 응시하는 행위 속에서 서로에게 전하는 '너도 살아있구나'라는 메시지가 신비하고도 소중하다. 243

"언젠가 죽는다는 건"

나오며(맺는 말)중에서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그것이 어떤 맥락이든 결국 슬픔으로 귀결된다는 것이 내 경험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연을 목도할 때도 훙분과 신비함과 기쁨이 찾아왔다가 가신 뒤에 가슴에 차오르는 것은 슬픔이었다. 어쩌면 이 감정에 붙일만한 마땅한 이름이 없어 슬픔이라 부르는지도 모른다. ...

동물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감각과 지각이 살아 있는 이상 그들도 뭔가를 오롯이 진하게 느끼며 살고 있을 것이다. 해류를 타고 유영하는 거북이도, 이글거리는 노을을 바라보는 원숭이도, 세찬 바람에 들판과 함께 나부끼는 사슴도. 생존을 위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와중에도 그윽한 눈빛으로 세상을 관조하며 삶을 생각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마 죽음과 닿아있을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생명은 알고 있다.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아니 끝나리라는 것을.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살이 있다는 건 언제나 죽는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처럼 전혀 다른 두 가지가 함게 성립해야만 모든 게 가능하다는 사실은 참으로 신비롭다. 생 자체가 어떤 한정됨을 바탕으로 가능하다는 사실도 오묘하다. 아름다우면서 슬프다.

가장 아름다우면서 슬픈 건 그 모든 것으로부터 빗겨 있는 이 세상 대부분의 생명체들이다. 언제 살았는지 죽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않는 무수한 생명들. 혼자 고독하게 병치레를 하다 죽음이 가까운 걸 직감하고 어두운 굴속에 제 발로 걸어가 마지막 순간을 조용히 맞이한 동물. 평생 한자리에 박혀 모든 계절의 변화와 사람의 손길을 맞다가 조금씩 시들시들해진 많은 식물. 그리고 이들보다도 더 무명으로 살다 간 곰팡이와 조류와 미생물 들. 눈물 흘리는 이 하나 없이 멋지게 살다 돌아간 생명의 장구한 행렬에 귀를 기울여본다. 나의 때는 언제인지.

그때가 오기 전까지 살아있음에 집중하련다. 생명을 살리고, 음미하고, 칭송하고, 보호하는 일에.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시간도 너무나 짦으니까.

살아있다는 건, 이 다음에 무엇을 붙여도 좋다. 웬만한 일은 다 살아있기에 그러한 것이니까.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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