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식물의 시간

백_일홍 2022. 7. 29. 17:15

식물의 시간 _ 서로 책임지는 느린 존재들의 이야기

안희제

 

어쩌다 보니 하나 둘 늘어가는 집안의 화분들, 만일

 일주일 이상 집을 비운다면 이것들을 어떻게 하나? 아이들은 제 몸과 주변 정리도 깨끗이 하지 못하는 데, 필시 말라 죽일꺼야라는 생각에 미치자 비로소 생명 하나를 집에 들이는 의미가 무겁게 느껴졌다. 태반은 내가 돈 주고 사온게 아니라 사정에 따라 받아들인 것이지만, 집에 들어온 식물이 비실 비실 시들어 갈 때, 급기야 죽어버려 버려야 할 때 마음이 정말 편치 않다. 죄책감까지는 아니지만 매번 내 무지와 게으름을 탓하게 된다. 지금 눈 앞에 있는 로즈마리는 반쯤 시들어 검게 변했다. 이번에 죽이면 두 번째다.

 

매년 베란다에서 겨울을 보내던 군자란을 올해는 무슨 생각으로 거실로 들여 놓았는지, 몆일 전 보니 잎 두개가 누렇게 변해버렸다. 이 군자란은 나와 함께 산지가 삼십년쯤 된, 둘째 아들 보다 더 오랜 인연을 갖고 있는 식물인데, 무슨 변덕이 나서 실내로 들여 놓았을까...후회를 하며 급히 베란다로 내 놓았다. 별탈 없기를 올해 삼월쯤 꽃이 피면 그 무탈함이 증명될터. 

 

그리고 다짐을 해본다. 이제부터 내 욕심에 돈주고 식물을 사들여 오지 않겠다고. 지금 있는 것들을 잘 키우는데 집중하리라. 

 

내 집에 온 화초는 인연을 넘어 생연으로 만난 식물, 세칭 반려식물과 함께 하며, 여러 시행착오를 겪고, 식물이라는 생경한 생명을 돌보며 깨달은 바를 차분이 써내려간 책이 있어 읽었다. 그러면서 정작 알게 된 것은 식물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라 인간인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였다고. 반려동물에 관한 티브 프로그램에서 강형욱님이 말하듯, 반려동물이 문제가 아니라 그 주인이 문제이듯이. 저자 안희제님은 크롬병이라는 자가면역질환을 앓는 사람으로 식물에 대한 남다른 관점을 보이고 있다. 마음에 닿는 구절을 옮겨본다. 

 

 

▶ 발췌

 

프롤로그, 한 서투른 반려인간의 이야기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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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픈 사람이다. 크론병이라는 자가면역질환때문에 다소 성가신 몸으로 살고 있고, 그 성가신 몸은 매일같이 먹는 면역억제제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약하다. 아프고 약한 몸으로 살다보면 조금씩 몸의 속도가 느려지는 걸 느끼게 된다. 식물과의 일상이 특별한 건 그 때문이다. 내 몸 하나 책임지지 못하는 내가 나 아닌 여러 생명과 삶을 책임질 수 있다는 것(또한 그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 작고 사소하다고 치부되는 삶이 사실은 아주 복잡하다는 것을 나의 반려식물들 덕분에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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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과 함께 하는 시간이 사람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성찰하여고 노력한다. 

 

이 책은 식물에 관한 글이기 이전에 태도에 관한 글이다. 내가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워온 방식으로 식물들에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관계라는 것 자체가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내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해보려 했다. 반려인간과 반려식물이 어떻게 서로 돕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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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대할 때 요구되는 섬세한 태도를 떠올리며 식물과 관계 맺고 싶었다. 그게 내가 식물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방식이다. 그 관계를 통해 '관계'라는 것 자체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EBS 다큐멘터리, <녹색동물>

 

나는 조금 다르게 접근하고 싶었다. 식물에게서 '동물적인' 특징을 찾아 '식물도 동물'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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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동물>에서는 식물을 '자연의 신비'같은 것으로 그리기도 한다. 말하자면 식물을 동물과 구분지으면서도, 그 자체로 자연과 동일시하며 인간 문명에 대립되는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식물은 우리의 일상 아주 가까이에 있다. 

 

'식물의 시간'을 고민하며 나는 보편타당하고 당연한 것으로 전제된 '인간의 시간'부터 의심하기로 했다. 같은 인간조차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각자 가진 신체적, 계급적 조건도 천차만별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서로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셈이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자본주의와 생산성의 논리는 균질한 시간을 요구하고, 시계는 점점 더 빨라진다. 더 잽싸게 몸을 움직이라고, 조금이라도 더 짧은 시간 안에 최대치의 효율을 끌어올리라고 강제한다. 내 몸이 과연 이 세계가 종용하는 시간을 결딜 수 있는지 의심하고 또 의심하게 되는 순간들이 수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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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인간과 식물의 관계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생산성의 시계에 맞춰 살아가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반려식물의 관계에서 말이다. 

 

이 책의 주된 소재는 서울이라는 도시에 있는 남동향의 낡은 빌라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이다. 이 식물들은 아침잠이 많은 게으른 인간 탓에 늘 점심 즈음이 되어서야 첫 물을 마신다. 이들은 깊은 숩속이나 정글에 살지도 않고, 빛과 습도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거대 농장에서처럼 빠르게 자라나고 가공되지 않는다. 완전히 '자연적'이라고 할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인공화'되었다고 할 수도 없는 조건에서 살아가는 셈이다. 

 

'애매하고 어중강한' 그 식물들과 한 명의 아픈 인간이 하루하루 어떤 관계를 맺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몸이 아파 온갖 고민에 관심을 뻗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식물과 함께하며 이 세상을 어떻게 다르게 보게 되었는지, 그럼에도 여전히 얼마나 서툴게 살아가는지 털어놓고 싶었다. 식물을 통해 정말이지 별의별 생각을 다 펼칠 수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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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새로운 일상을 경험하며 식물과 나의 관계에 대해 부쩍 더 많이 고민하게 되었다. 식물과의 일상은 삶에 즐거움 하나를 더 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식물과 함께 한다는 건 나 역시 식물에게 '반려인간'이 되는 일이자, 때로는 내가 식물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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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플 때면 나는 식물들을 보며 위안을 얻곤한다. 식물이 잘 자라는 걸 보는 게 좋기도 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는 나 역시 저렇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분주히 움직이고 여기저기 나다니기보다 꼭 필요한 양분만 섭취하며 한 자리에서 고개를 돌리며 사는 삶 말이다. 

 

하지만 언제가부터 식물에 대한 감정이 복잡해졌다. 잘 자라는 모습이 뿌듯하면서도 질투가 난다. 그 질투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인간은 동물"이며, "움직여야"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의 한 구절을 심심찮게 떠 올린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식물과 같은 일상도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면 어떨까.(안희제 저, 난치의 상상력, 274페이지) 세상에는 사회적 조건이 갖춰지더라도 움직이거나 이동하기 힘든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삶을 온전히 지속할 권리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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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와 넷플릭스, 방치형 모바일 게임 같은 것들로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는 나와 달리 식물들은 생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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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음' 자체를 의미하는 '생명'과 생명을 가진 존재가 하루하루 지속해나가야 하는 '삶'이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존엄한 건 '생명'이 아니라 '삶'일 것이다. '(인간이) 살아 있기에 존엄하다'라는 얼핏 명료해 보이는 좋은 말은 정작 사람들이 어덯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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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인권은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갖는 천부적인 권리'로 정의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인권은 '사치'로 여겨진다. 나는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인권이 꼭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존엄하다'는 말에 좀 더 구체적인 맥락을 덧붙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태어났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진정 '존엄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 인간답다는 말, 존엄하다는 말은 생존 그 이상의 무엇을 암시한다. 내게 존엄이나 인간다움이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과 실천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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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도 마찬가지 아닐까. 식물을 그저 살려두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식물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조력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품이 필요하다. 식물을 기른다는 것은 결국 단순히 생명이 아니라 삶을 돌보는 일이다. 인간에게 더 나은 삶이 필요하듯, 식물에게도 더 나은 삶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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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의 여파로 식물은 우리의 일상에 더욱 깊숙히 들어와 있다. 나 역시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의 삶에 개입하고 일종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지 체험하는 중이다. 요즘은 그 체험이 점차 나의 삶이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디보티  devotee, 장애인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을 의미함.

"우리는 한 인간의 신체를 그저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보거나 거기서 어떤 숭고한 감동을 받는 데서 그칠 수도 있지만, 그 신체를 통해 한 사람의 복잡 다다난 역사를 읽어내고 그 사람의 고유한 개별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시작이 어떻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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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말을 식물에게 적용해 이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우리는 한 식물을 그저 인테리어로만 바라보거나 거기서 어떤 감동을 받는 데서 그칠 수도 있지만, 그 식물과의 경험을 통해 나와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와의 함께함을 고민하고, 각 식물의 고유한 개별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시작이 어떻든 말이다. 

 

86

(홀대 받는 가로수)

갈가에 늘어선 가로수를 마주할 때면 이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동시에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분재'를 문제 삼는 일부 사람들이 정작 이런 실상은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인간이 점유한 공간에서 식물은 언제나 부차적인 대상일 뿐이며, 이때 식물의 삶, 식물과 우리의 관계는 애초 존재하지도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함께 살며 인간과 식물 모두에게 좋은 삶을 모색한다는 건 정말 불가능한 일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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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가 생동하는 관계

호혜적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 고민하는 내게 길잡이가 되어준 개념이 있다. ...'대상화'란 우리가 피해야만 하는 악이다. 나는 이와 조금 다른 관점에서 '대상화'의 문제에 접근하는 논의를 접했다. 한 페미니즘 강연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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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체화 derivatization'라는 개념.

원래 화합물의 구조를 조금씩 바꿔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만드는 화학적 과정이라고 한다. 앤 카힐이라는 학자는 이 개념을 사람 사이의 관계에 적용하여 상대를 자신의 욕망을 담아내는 그릇으로만 취급하는 경향으로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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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념을 내게 처음 알려준 책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권김현영 저)에서는 능동적인 존재만이 주체성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수동적인 존재도 존엄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주체성이란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살아갈때 " '나'라는  실존적 감각을 가지고 자유로운 존재로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대사아이 되는지 아닌지 혹은 그가 수동적인지 능동적인지가 아니다. 대상이 될 때, 즉 수동적으로 반응할 때도 우리는 존엄할 수 있다. 관계 안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존중된다면 말이다. 

 

식물과 인간의 호혜적 관계를 고민하면서 나는 내내 이 개념을 떠올렸다. '식물도 알고 보면 능동적'이라는 식의 발견에서 좀 더 나아가, 설령 식물이 수동적일지라고 식물을 존중할 수 있다고, 존중하는 방법을 궁리해보자고 말해야 하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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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간을 산다는 것

 

깁초엽 소설, <캐빈 방정식>

주인공 현지의 언니인 현화에겐 '시간지각 지연 증후군'이 있다. 사람의 뇌는 감긱신경들이 감각을 통합한 결과를 통해 시간을 인지한다. 즉 시간은 주어진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고, 우리의 몸이 느낀 것을 뇌가 해석한 결과다. 

 

세상의 시간이 자신의 시간보다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탓에 "내적 시계는 망가졌다" 하지만 의사소통 보조 장치를 통해 두 자매는 대화할 수 있게 된다. 메시지를 주고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아주 느린 대화가 이어지다가, 나중에는 한 시간 간격을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서로 다른 시간을 사는 두 사람이 포기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간 끝에 조금씩 서로의 시간에 가까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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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병과 함께하는 삶을 쓰는 바디 에세이스트 홍수영은 자신의 책 <몸과 말>에 "남들과 똑같은 시간 속에 흘러가고 싶다"고 적는다. 모두가 같은 시간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 세상에서 남들과 다른 시간을 산다는 건 감당하기 벅찬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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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일정 수준을 넘기면 성장 속도도 아주 느려지고, 겨울이 되어 잎이 다 떨어지기라고 하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느림을 인정하고 그것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겉으로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어 보여도 나름대로 관찰하며 기다리고 물을 주는 것이 식물의 시간을 경험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섣불리 판단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면서 식물의 시간에 적응해가고 싶다. 

 

의식 불명 상태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고 대사 기능만 하는 사람을 흔히 '식물인간'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나는'식물'을 오직 대사만 하는 존재에 대한 비유로 사용하는 방식 자체가 편협하다고 느낀다. 이것이야 말로 식물에 대한 무지가 아닐까. 만일 우리가 '식물'을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로 인식한다면 지금과 같은 '식물인간' 개념은 결코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다른 가능성을 모색해 '식물인간'의 함의를 존재론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중환자실의 할아버지와 현화(뇌를 다쳐 시간지각 지연 증후군을 앓는)는 의학적 의미가 아닌 존재론적 의미에서 '식물인간'일 것이다. 

 

109

세상엔 수많은 종류의 시간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인간 조차 서로 각기 다른 시간을 산다. 결국 어떤 존재를 이해한다는 건 곧 그의 시간을 인정하는 일이 아닐까.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경험해보고 또 그 시간과 나의 시간을 조율해가려고 노력하면서. 그렇게 나는 식물의 꿈을 꾸며 '식물인간'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09

다른 삶에 대한 책임

나는 식물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나 아닌) 다른 삶에 대해 책임의식을 갖는 일이라고 느낀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내겐 무척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다육이를 추천하며] "그냥 들이기만 하면 돼. 물도 거의 줄 필요 없고 엄청 편해. 너도 한번 길러봐" 

 

111

인간이 '시행착오'라고 부르는 것이 식물에겐 곧 '죽음'임을 기억해야 한다. 

 

112

인간의 좁은 앎에서 비롯된 오해처럼 식물에겐 필요한 건 그저 물이나 흙, 햇빛 따위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일 '반려인간'이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나는 생각보다 많은 식물들을 떠나보냈고, 내 무지에 대한 책임을 식물들은 언제나 '죽음'이라는 형태로 떠맡아야 했다. 

 

인테리어 소품처럼 두고 가끔 한번 훑어보는 것이 전부라면, 그 대상이 굳이 생명이 있는 식물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 인간뿐 아니라 식물 역시 그 나름의 방식으로 쾌적하고 즐거운 삶을 누려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풍요로운 삶이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니까. 그러려면 내가 먼저 식물에게 '반려인간'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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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 아닌 땅

문득 내가 먹을 식물을 기르겠단 이유로 원래 살던 식물을 뽑아내는 일이 낮설어졌다. ... 왜 어떤 식물은 이름이 있고, 어떤 식물은 없을까. 나는 왜 향나무와 라일락나무는 알면서 줄기에 가시가 조금씩 돋힌 이 나무의 이름은 모르는 걸까. 왜 나는 이름도 모르는 나무를 죽이고 그의 땅을 빼앗고 있을까. 집에 있는 나무는 애지중지하면서 왜 이 나무는 그렇게 쉽게 제거해도 된다고 생각했을까. 그 나무는 그곳에서 나보다 훨신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산 존재가 아닌가. 땅도 나무도 애초 내 것이 아닌데...

 

125

깊고 너른 세상

그 땅에는 나의 소유가 아닌 수많은 존재들이 살고 있었다. 화단에서 내가 마주한 건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였다. 

 

126

집에서 식물들을 돌볼 땐 화분에서 벌레가 나올까봐 늘 전전긍긍했었다....식물이 죽게 될까봐 무섭기도 했지만 사실 벌레 자체를 없애고 싶은 마음이 컷다. 인간 세계에서 벌레란 언제나 죽여 마땅한 존재댜. 혐오 대상이 되는 존재가 늘상 '충'으로 소환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 '벌레'로 지칭되면 그는 언제든 손쉽게 죽여도 되는 존재가 된다. 

 

150

노르웨이 가수의 영상

오로라AURORA라는 가수가 부른 <Running with The Wolves>, 디스토피아 소설을 연상시키는 황량한 사막과 고층 빌딩 건물이 빽빽이 들어선 도시 풍경. 도시 전체를 휘감은 듯한 수 겹의 철사가 오로라의 몸 또한 옥죄고 있다. 철사를 몸에 감은 채 걷던 오로라가 돌연 철사를 모두 뜯어내고 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강가로 뛰어든다.

 

 <Runaway>

<I Went Too Far>

<Thr Secret Garden>

https://youtu.be/Jc1EOTFT1zU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The Seed>와 <The River>였다. 특히 <The Seed>는 '크리 인디언 격언'의 일부인 "We cannot eat money"를 가사 전반에 활용하여 생태주의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여기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오로라가 식물을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그의 뮤비를 보며 품게 된 궁금증이 지금까지도 나를 붙들고 있다고 고백할수밖에 없을 것 같다. 

 

<The Seed>

https://youtu.be/_Mc_OM5oNA8

 

<The River>

https://youtu.be/P7lE-G1oC34

 

<The Seed>가 환경 위기를 극복할 희망 혹은 환경 위기 이후에 찾아올 싱그러운 초록의 세상으로 식물의 생명력을 표현한다면, 그보다 한 달쯤 뒤에 발표된 <The River>의 뮤비는 약간의 변화를 꾀해 사람의 눈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연출한다. 싹을 자르던 오로라는 자신이 잘라도 싹은 계속 자라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숲으로 들어가서 꽃잎을 이불 삼아 눕는다. ... 그의 음악은 자본주의에 제동을 걸고, 사람도 결국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 같다. 

 

153

하지만 뭔가 찜찜했다. 음악과 영상, 메시지 모두 좋은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할까. 아무래도 그의 뮤비가 식물을 지속적으로 낭망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쩌면 자연을 인간 혹은 문명의 대립항으로 세우는 뿌리 깊은 이분법이 그런 낭만화를 초래한 건 아닐까? 

 

자연과 인간 혹은 자연과 자본주의를 대립쌍으로 묶는 일은 위험할 수 있다. 인간 혹은 인간이 만들어낸 자본주의가 자연의 외부에 있다고 전제하기 때무이다. ... 자연은 이미 산업 사회 혹은 문명의 내부로 포섭되었으며, 그 복잡다단한 관계를 세밀히 탐구하지 않으면 근대화의 위험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오로라의 뮤비가 줄곧 채택하는 낡고 거친 이분법이 과연 지금의 현실을 제대로 간파할 수 있을까. 

 

155

"인간 사회를 벗어나 태초의 세계를 통경하는 콘셉트"가 산업사회와 산업화 이전의 토착문화를 단순히 대립시키는 방식으로 구현된다는 점에서" 이 뮤비(유아의 <숲의 아이>) 또한 오로라의 사례와 맥을 같이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히려 적극적인 의심이 아닐까? 식물을 인간과 뚝 떼어놓고 마치 순수한 자연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듯 그려내는 태도야말로 세상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근대화의 논리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영화, <모노노케 히메>와 <겨울왕국2>의 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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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루되기

나는 <겨울왕국 2>의 결말에 불만이 많다. 갈등이 해결되고 모든 이들이 화합을 도모하게 되는 해피엔딩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사실상 영화가 책임의 문제를 지우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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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의 결만은 평화롭지 않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윤리적이다. 자연이 파괴될 때 인간의 삶 또한 붕괴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 아닌가. 사건에 연루된 모든 이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쪽을 선택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공동체가 무엇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지를 곱씹게 하기 때문이다. 한 명의 영웅이 뿌리 깊은 갈등을 일거에 해소하고 빚어낸 '아름답고 깔끔한' 결말보다, 실패를 안고 페허가 된 당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찜찜한' 결말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서서가 아닐까.

 

영화는 결말에서 식물을 낭만화하지 않으면서 식물의 생명력을 존중하고 그것과 관계 맺을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는 듯하다. 사슴신의 죽음으로 마을이 파괴되고 나무와 풀도 생을 다하지만, 그 자리에 곧 작은 새싹들이 가득 돋아난다. 그건 신과 숲이 준 마지막 기회다. 

 

생명의 아름다움, 강인한 생명력, 미래의 희망 따위가 아니라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 이것은 생명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토대라는 깨달음이기도 하다. 인간은 언제나 자연을 통제하고 정복할 수 있다고 믿지만 우리의 터전은 실상 얼마나 취약한가. 작고 여린 푸른 잎들의 의미를 나는 그렇게 해석한다. 

 

나 역시 먼발치에서 식물을 감상하기만 할 때는 꽃과 풀, 새싹을 그저 아름답다고만 여겼다. 그러나 식물과 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일종의 책임감이다. 그 생명의 아름다움보다,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 내가 져야 하는 책임에 어떤 것들이 있을지 종종 생각한다.  

어떤 존재와 함게 한다는 건 결국 '책임에 연루되는 일'일 테니. 지금처럼 식물과 살지 않았다면 나 역시 <모노노케 히메>의 그 새싹들을 그저 '신이 남겨준 선물'쯤으로 가벼이 여기고 지나쳤을지 모든다.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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