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_ 인생의 중간항로에서 만나는 융 심리학
제임스 홀리스
얼마전 읽은 책인데요. 사실은 중년의 남자, 남편을 이해하기 위해, 찾아 읽었는데, 나에게도, 도반님들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이라 여기에 공유해요. 중년은 참 애매한 시기인 것 같아요. 청춘과 장년처럼 모험적으로 적극적으로 일을 벌이고 위험을 감수하기엔 아는 것이 너무 많고, 인생의 막바지, 죽음을 생각하며 차분히 성찰하기에는 아직 이르고 무엇보다 내 인생의 의미와 소명에 대한 모색 없이 삶을 정리하기에는 너무 억울한 시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 책의 원제는 중간항로인데요. 중년은 가족, 사회가 부여한 가치의 추구와 그로 부터 얻은 정체성을 벗어버리고 본격적으로 어떻게 자기면목데로 살아갈 것인가를 모색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라고 하네요. 발췌한 내용을 연속적으로 올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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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문과 1장.
그리고 나는 또 다른 거대하고도 영원한 삶의 공간이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내 존재의 어두운 시간을 사랑하네>중에서
서문: 나는 누구인가
흔히들 '중년의 위기'라고 하는 이 시기를 나는 '중간항로'라 부르고 싶다.
이 시기에 우리는 삶을 재평가하고, 때로는 무섭지만 언제나 해방감을 주는 한 가지 질문 앞에 설 기회를 갖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과 맡아온 역할들을 빼고 나면, 나는 대체 누군인가? 거짓된 자기self *를 쌓으며 살아왔다고,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며 잠정적인 성인기를 보내왔을 뿐이라고 깨닫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진짜 존재를 만날 수 있는 2차 성인기에 들어설 수 있다.
중간항로는 1차 성인기라는 확장된 사춘기와, 피할 수 없는 노년과 죽음 사이에서 한 인격을 재정의하고 전환할 수 있는 기회이자 통과의례이다. 이 길을 의식적으로 여행하는 사람은 삶을 더 의미있게 구축할 수 있다. 그러지 못한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삶은 화려할지라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갇힌 채 살수밖에 없다.
(*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란 의식의 중심으로서의 '나' 즉 '자아ego'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융은 우리 마음 속에 인간을 완성된 전체로서 살게하는 창조적 원동력인 '자기원형archetype of self'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포괄하는 전체 정신을 '자기'라고 불렀다)
이 책은 다음 주제를 다룬다. 우리는 원래의 자기감을 어떻게 습득했을까? 중간항로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삶의 변화들은 무엇일까? 자기감을 어떻게 재정립할 수 있을까? 융의 개성화individuation* 개념과 우리의 타인을 향한 헌신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개성화를 이루고 중간항로를 지나 어두운 숲에서 의미 있는 삶으로 이동하려면 어떤 태도와 행동변화가 필요할까?
많은 이들이 인생을 마치 소설처럼 대한다. 마지막장에서 작가가 전부 설명해줄 거라 짐작하며 책장을 수동적으로 넘긴다. ... 소설 내용을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마지막 페이지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중간항로로의 초대에 응한다는 것은 남아 있는 삶의 페이지를 인식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며, 우리 스스로 불러낸 삶의 거대함을 감당하겠다는 뜻이다.
1장. 잠정 인격이 만들어지다: 부모, 사회, 문화가 물려준 성격
중간항로를 의미 있게 만드는 첫 번째 단계는 가족과 문화로부터 얻은 렌즈가 실은 완전하지 않으며 세상의 일부만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그리고 불완전한 렌즈를 통해 결정을 내려왔고 그 결과 때문에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일지도 모른다. ... 물려받은 렌즈로부터 나오는 것은 조건부 삶,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 삶을 이렇게 보아야 하며 선택은 저렇게 해야 한다고 키워진 결과로서의 삶이다. 자기중심주의라는 유혹에 빠져 자신의 세계관이 다른 세계관에 비해 우월하다고 여기며 이를 지키려는 경향은 모든 세대에 걸쳐 나타난다.
유년기를 아무리 풍요롭게 보냈다 하더라도 트라우마를 경험할 수 있다. ... 성인기의 성격은 유년기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태도, 행동, 정신적 반사작용으로 이루어지고, 자신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어린 시절의 유기적 기억을 되도록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유년기의 유기적 기억을 우리는 '내면아이inner child'라고 부른다.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신경증*(본성과 사회화 사이의 균열을 가리킴)은 내면아이를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진화한 전략들이다.
유년기에 겪는 상처의 본질은 크게 두 가지 기본범주로 일반화할 수 있다.
1) 무시당하거나 버림받은 경험, 2) 삶의 무게에 짓눌린 경험이다.
'잠정인격provisional personality' 란 연약한 아이가 존재의 불안을 관리하기 위해 취하는 연속적인 전략이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행동과 태도는 5세 이전에 형성되며, '자기보호'라는 공통된 동기를 가지고 놀랄 만큼 다양하게 전략적으로 변화하며 정교해진다. 자기 및 세계 인식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자식 관계의 특징이다.
부모-자식의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 아이는 세 가지 기본방식으로 경험을 해석한다.
1) 촉각과 감정의 유대감 또는 부족함을 삶 자체에 대한 것으로 현상학적으로 해석한다.
2) 부모의 특정 행동을 자신을 향한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 속에 간직한다.
3) 삶과 씨름하는 부모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아이는 행동 그 자체뿐 아니라 그 안에 감춰진 개인과 세계에 대한 태도까지 내면화한다.
.... 우리는 처음부터 이렇게 편견에 사로잡혀 좁고 불완전한 시각으로 인식, 행동, 반응양식을 쌓아간다. 불환전한 자기감과 일찌감치 성격으로 자리잡은 전략들은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유년기 상처의 두 가지 범주인 '버림받은 경험'과 '짓눌린 경험' 각각에서 비롯한 일련의 복합적 행동들은 무의식적이고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으로 발전한다.
현실에 짓눌리는 아이는 방어적이며 환경에 지나치게 민감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약한 정신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수동성, 상호의존, 강박적 성향을 '선택'한다.
버림받은 경험이 있고 제대로 된 양육을 받지 못한 아이는 의존적 방식을 '선택'하여 평생 동안 더 나은 타자를 중독된 것 처럼 찾아 헤맬 수 있다.
이런 상처와 내면 아이를 비롯된 다양한 무의식적 반응들은 성인기의 성격을 결정하는 강력한 요소이다. 성인기의 성격은 어린 시절 상처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일련의 선택이라기 보다는 초기 경험과 트라우마에 대한 반사 반응에 가깝다.
융의 모델에서는 감정으로 채워진 이러한 반사적 반응을 개인의 콤플렉스가 가진 본질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콤플렉스는 중립적이지만, 그 안에는 경험을 통해 내면화된 정서가 담겨있다. 초기 경험이 강렬할 수록, 그리고 오랜 기간에 걸쳐 되풀이될수록 콤플렉스는 개인의 삶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콤플렉스는 항상 어느 정도 무의식적이다. 알아서 에너지를 받아 작동한다.
콤플렉스 중에서도 부모와 관련된 경험이 가장 강력하다. 일반적으로 삶에서 만나는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이 부모 아니겠는가. 우리는 부모가 우리를 대하는 방식과 삶을 살아가기 위해 취하는 전략을 가까이하며 성장한다. 예. 헤밍웨이, 카프카(이들이 지닌 창조력의 주요 모티프와 형태가 바로 뿌리 깊이 박혔 있는 부모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보상하며 이를 초월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됨)
타고난 본성과 사회화된 자신 사이의 간극은 유년기부터 갈라져 점점 벌어진다. ....우리의 삶은 콤플렉스가 하는 일에 무지한 만큼, 그리고 본성과 실제 선택들 사이의 점점 벌어지는 간격을 깨닫지 못하는 만큼 비극(예. 그리스 비극)이 된다.
마흔의 위기감은 대부분 그 간격에서 나오는 아픔에서 비롯한다. 내면의 자기감과 후천적으로 획득한 성격 사이의 불균형이 너무 커진 탓에 더는 그 고통을 억누르거나 보상으로 달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보상상실'이라고 한다. 예전에 사용하던 태도와 전략을 계속 써보지만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이다. 마흔의 스트레스 증상은 후천적 성격 아래 숨어 있던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며, 다시 태어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환영할 일이다.
중간항로는 후천적으로 만들어낸 성격과 '자기'의 욕구 사이에 무시무시한 충돌이 벌어지면서 시작된다. 인간은 낡은 자신을 소환해서 죽여야만 비로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이와 같은 죽음과 재생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하나의 길이다. 자신의 잠재력을 깨우고 나이 듦에서 나오는 생명의 힘과 현명함을 얻어내려면 중간항로를 지나야 한다. 따라서 중간항로란 잠정 인격에서 진정한 성인기로, 거짓된 자기에서 올바른 자기로 옮겨가기 위해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소환행위라고 할 수 있다.
2.중간항로에 들어서다: 의미 있는 삶으로 가는 여정의 시작
후천적 자기감은 내면아이를 지키기 위해 지각 및 컴플렉스와 결합하며, 스스로를 실현하려 애쓰는 더 큰 '자기'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위기를 자각하기 한참 전 부터 징후와 증상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우울증, 알코올 탐닉, 성적 흥분을 위한 대마초 흡연, 혼외정사, 걸핏하면 직장을 갈아치우는 일 등은 모두 우리가 마음 속 지각변동을 넘어서거나 무시하거나 피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러한 증상은 상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화살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정신이 자율적으로 건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이기에 환영할 만하다.
융은 신경증을 "궁극적으로 자신의 의미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영혼의 고통으로 이해애햐 한다"고 말했다. 이는 우리가 고통없는 삶을 이룩할 수 있다는 암시가 아니다. 그보다는 고통이 이미 우리에게 지워져 있으며 그 고통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는 뜻에 가깝다. . . . 우리는 중간항로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자기'의 충돌이 빚어내는 갈등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이 운명적인 충돌과 죽음-재생 과정을 겪어야 새로운 삶이 등장한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거나 배우자를 잃고 나서 중간항로에 들어선다. 이런 충격을 겪기 전까지는 5,60대가 되더라도 콤플렉스나 집단의 가치에 지배당한 채 중간항로가 내놓는 삶의 의문을 포착하지 못한다.
중간항도를 연대기적 사건이라기 보다는 심리적 경험이다. 이 두 가지 차이는 '시간'을 뜻하는 그리스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보면알 수 있다. 크로노스는 순차적으며 일직선상의 시간인 반면, 카이로스는 깊이를 지닌 3차원 시간이다. 개인이 자신의 삶을 단순히 한쪽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연속이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로 봐야 할 때, 비로소 중간항로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는 시간이 길수록, 우리는 삶이 어렴풋한 결말로 향해 가는 연속된 순간에 불과하며 언젠가 적당한 때가 되면 그 목적이 분명해질 것이라고 여길 확률이 커진다. 현재 우리 문화에서는 삶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기 쉽다. 의식의 충격을 경험해 수직 차원인 카이로스가 인생의 수평면과 교차하면, 개인은 삶을 3차원으로 조망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이며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중간항로는 개인의 삶의 의미라는 질문을 새로이 던질 수밖에 없을 때 일어난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려져 있던 문제를 직면해야 할 때도 그렇다. 정체성에 관한 의문이 다시 떠오르면 그 책임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중간항로는 우리가 '지금까지의 내 삶과 역할을 빼고 나면, 나는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비로소 시작된다.
이런 거대 질문은 삶에 가치와 존엄을 부여한다. 이를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사회의 길들임과 진부함, 그리고 끝내는 절망에 자신을 맡기게 된다. 운이 좋아 살면서 충분한 아픔을 겪는다면, 주저할 수 있을 지언정 결국엔 의식적으로 그 질문들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용기 있고 자신의 삶을 돌볼 수 있다면, 고통을 겪으면서 진정한 삶을 되찾을 수 있다.
인생의 후반전에 접어들어 자신의 삶을 되될아보면서는 무의식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죄를 이해하고 용서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도 의식적으로 살지 못한다면,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중간항로가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몇가지 중요한 증상과 경험을 소개하려 한다. 이 모두는 자아의 의지 밖에서 자율적으로 일어난다. 미지의 성취를 향한 삶의 불가항력적인 움직임이며, 불안한 자아가 소망하는 바 따위는 거의 신경 쓰지 않은 채 타고난 본성과 그 신비를 따라 움직이는 목적론적 과정이다.
1) 사고방식이 바뀐다.
주술적 사고,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은 유아적 자기애적 사고방식.
사춘기의 고통과 혼란을 거치는 동안 아이의 주술적 사고는 거센 역풍을 맞는다. 그러나 검증되지 않은 자아는 여전히 남아 '영웅적 사고'를 보여준다. 영웅적 사고는 주술적 사고에 비해 현실적이나 여전히 희망하는 수준이 높으며, 우리는 거창한 미지의 목표를 성취할 것이라 상상하고 추정한다.
유년기의 주술적 사고와 사춘기의 영웅적 사고가 우리가 경험한 삶과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중간항로에 들어온 것이다. 미래에 대한 전망과 희망, 기대가 무너지는 일을 겪어 보았고 자신의 재능, 지성, 용기의 한계 역시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중간항로의 특징은 '현실적 사고'이다. 현실적 사고는 우리에게 '관점'을 선사한다. 섹스피어의 리어왕은 악인이 아니라 사랑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이였을 뿐이다. 삶은 우리에게 희망, 지식, 지혜가 어떻게 다른지를 가르쳐준다.
중년의 현실적 사고에 필요한 목표는 삶의 균형을 맞추는 동시에 겸손하면서도 고귀한 우주와의 관계를 획복하는 것이다. "내 삶은 절대로 전체가 아닌 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젊은 시절의 자만심 가득한 기대는 절대 이뤄지지 않는다. 겸손.
2) 거짓된 자기를 죽이다.
우리 모두 각자의 삶의 연속선을 이어나가지만 공통으로 거치는 길도 있다. 반복되는 죽음과 재생을 이끌어내는 자율의 과정 다시 말해 피할 수 없는 변증법적 과정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를 크게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유년기. 자아가 부모의 실재 세계에 의존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2.사춘기. 12~40세. 1차 성인기
우리 대부분은 마음 속에 숨어 있던 유년기의 의존성을 성인기 역할에 투사하고 있을 뿐이다. ... 부모 콤플렉스와 사회적 역할이 갖는 권위는 여전히 세계를 탐색 중인 사람에게서 강한 힘으로 투사를 이끌어낸다. 우리를 진정한 자신으로 소환하는 수수께끼의 내면과정인 '자기'는 때로 무력감, 우울증, 감작스로운 분노 폭발, 과소비 등의 증상으로 존재를 드러내지만, 투사의 힘이 너무 강력한 나머지 우리는 인생이라는 여정에 관한 거대 질문을 스스로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투사의 효력이 다 사라지고 불거져나오는 '자기'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마면, 개인은 완전히 무력해지면서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자아는 애초에 제대로 통제받은 적 조차 없다. 부모 컴플렉스와 집단콤플렉스가 자아를 조정하고, 성인이 되기 위해 사회가 제시한 역할에 투사하는 힘이 자아를 지탱해왔을 뿐이다. 이러한 역할이 규범으로 힘을 지니는 동안에는, 그리고 투사가 아직 영향력을 발휘하는 동안에는, 개인은 내재된 '자기'와의 약속을 일단 눈가림으로 막고 있는 것이다.
3. 2차 성인기
개인의 투사가 사라졌을 때 시작된다.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았다는 배신감과 투사가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공허함이 중년의 위기를 만든다. 그러나 이런 위기 속에서만 우리는 부모의 결정, 부모 컴플렉스, 문화적 조건을 넘어 진정한 개인으로 거듭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이 2차 성인기는 '잠정 정체성을 버리고 거짓된 자기를 죽이고 나서야' 얻을 수 있다. 중간항로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은 죽어간다는 느낌만을 경험할 지도 모른다.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죽음과 직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좋은 점은 우리의 선택이 중요하며 자신의 존엄과 깊이를 바로 하이데거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라고 명명한 인간 실존의 상태를 통해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자연이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낸 '탄생-죽음의 변증법'을 깨닫고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4.유한성의 정체성:
죽음의 수수께끼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일이 포함된다.
정체성의 변동을 바라보는 또 한가지 방법은 각 정체성이 갖는 다양한 중심축을 분류하는 것이다.
유년기의 축은 부모-자식관계,
1차 성인기는 자아와 세계(의식적 존재인 자아는 자신을 세계에 투사하여 그 안에 자신의 공간을 만들려 함. 유년기의 의존성은 무의식으로 밀려나거나 다양한 사회적 역할로 투사되며, 개인은 주로 자신의 방향을 외부세계로 설정한다.)
중간항로와 2차 성인기 : 자아-자기를 연결함. 우리는 의식적으로 자신이 충분한 지식을 지녔고 인생이라는 쇼를 스스로 지휘하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믿는다. 그러다 자아가 주도권을 잃으면 그제야 자기와의 대화가 시작된다. 자기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합목적성'으로 정의될 수 있다. 우리는 '자기'를 밝힘으로써 인간의 짦은 삶 동안 구현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경이로움을 얻을 수있다.
유한성의 중심축은 '자기-신', '자기-우주'
개인을 초월하는 우주의 신비로 구성됨. 우주의 드라마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을 맺지 않으면 인간은 덧없고 피상적이며 무미건조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중심축의 변화는 영혼이 인생에서 두드러지게 변하는 모습을 설명해준다. 스스로의 의지 없이 한 축에서 다른 축으로 옮겨간다면 혼란과 두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지만, 이 거대한 우주의 드라마 안에서 점점 커다란 역할을 맡아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3) 투사를 거둬들이다.
투사는 정신이 가지는 기본 기제이며, 무의식적인 것은 늘 의식에 투사된다는 사실에서 나온 전략이다. "투사가 일어나는 일반적인 심리학적 이유는 무의식이 언제나 자신을 표현할 방식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융) "투사는 절대 만들어지지 않는다.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다. 나에게 벌어지는 외부의 모든 어두운 것에서 나는 내 안의 정신적 삶을 본다. 비록 항상 뚜렷이 인식하지는 못하다러도"(융)
전지전능하다고 믿는 부모에게 자신의 불안을 투사함->
지식과 권력을 사회제도와 권위자, 사회화된 역할에 투사함 (거물이 되려면 거물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가정, 자신의 역할이 곧 자신이라고 믿음.)->
가장 일반적인 투사의 형태는 결혼, 부모되기, 직업적 경력이라는 사회제도로 나타난다.
. 결혼, 그 무엇보다도 많은 무의식의 짐이 얹힌 부분. 결혼생활이 실패로 끝나는 이유는 대부분 이런 기대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 그럼에도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로 인해 심하게 상처를 입는다.
내가 영혼을 바쳣던, 기꺼이 내 마음을 열고 맞아들인 사람도 알고 보면 결국 나처럼 두려움과 욕구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게 그랫듯 자신의 무거운 기대를 내게 투사하는, 나와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어떤 결혼생활이든 무거운 짐이 따른다. 한때 부모가 맡았던 친숙한 타자에 가장 가까운 복제품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 컴플렉스가 내내 관여하고 있다.
. 부모역할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살지 못한 삶을 자식에게 투사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아이는 부모의 분노와 상처를 짊어지고 부모의 조작과 강요를 꼼짝없이 견뎌내야 한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길, 자신의 삶을 충족시켜주고 자신의 상황을 더 낫게 만들어주기를 무의식적으로 기대한다는 사실이다.
결혼생활이 전통적일 수록 성 역할은 고정되며, 배우자가 서로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낄 확률이 크다. . . 투사된 정체성대로 사느라 에너지를 대부분 소모하고 나서야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안타깝다. 만약 남편이나 아내가 변화를 위협적으로 느끼고 저항한다면, 우리는 분노에 차거나 우울해하는 배우자와 함께 생활해야 한다. 결혼생활이 서로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면 변화는 더더욱 필요하다.
중년이 되어 사려져야 할 투사가 한 가지 더 있다. 이는 '상징적 보호자'라는 부모 역할과 관련이 있다. 부모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부모와의 관계가 냉담하거나 문제가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부모라는 싱징적 존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정신적 기둥이다. 부모가 살아 있다면, 위험한 미지의 우주에 맞서는 정신적 완충지대 역시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러다 이 장벽이 사라지면 우리는 존재의 불안이 확 다가오는 걸 느낀다.
투사의 다섯 단계중 마지막 단계, 자신의 내면에서 투사된 에너지의 기원을 찾는다. 투사가 의미하는 내용을 탐색하는 이 마지막 단계에는 자기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투사된 이미지가 닳아 없어지는 일, 그리고 자신 속에 늘 존재하던 기대와 희망을 버리는 일은 언제나 고통스럽지만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 전제 조건이다. 외부세계가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버려야 나는 나 스스로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생긴다.
4) 끝없을 것 같았던 여름이 지나가다
예전 같지 않은 몸.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었던 시간 역시 한계가 있음을 알아.
5) 희망을 줄이다.
자아가 초기에 갖는 불멸과 명성에의 희망은 유년기의 두려움과 세계에 대한 무지함에 정비례한다. 마찬가지로 중념의 쓰라림과 우울은 유년기의 비현실적 소망을 이루기 위해 쓴 에너지의 양과 비례한다.. . . 권력과 특권으로 자시을 휘감아 평화와 의미를 얻어 오랫동안 만족할 수 있다 해도, 그 본질은 우리가 투사한 유년기의 소망일 뿐이다.
자아와 관련한 젊음의 또 다른 소망은 완벽한 애정관계를 향한 욕구이다. 중년에 들어 일어나는 두 번째로 큰 기대의 쇠락은 '관계의 한계에 직면하는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며 우리를 돌봐주고 항상 옆에 있어주는 완벽한 배우자는, 사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욕구로 꽉 차있으며 우리에게 똑같은 기대를 투사하는 사람이다. 결혼이 중년에 파탄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결혼한 두 사람을 엮고 있는 구조물은 불안한 반면 거기에 지나치게 큰 유년기의 희망을 얹어놓기 때문이다.
인생에는 이러한 투사를 지워 없애는 방식이 존재하며, 우리는 실망하고 고독한 와중에도 자신의 만족감에 책임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른 어느 누구도 대신 우리를 구원해주고 돌봐주며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주지 못한다. 영원한 동반자를 되기를 자처하며 그럴 준비가 되었다는 사람은, 우리는 잘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사실 우리 마음 안에 있다.
6) 우울, 불안, 신경증을 겪다.
지금껏 믿고 살아온 갖가지 전제와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고, 잠정 인격이 끌어모은 여러 가지 전략이 아무 보상 효과를 만들지 못한다고, 결국 자신의 세계관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의 몸부림이라면 여러번의 정시적 발작, 타인으로부터의 격리 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여성이 우울증에 시달린다면, 이는 달갑지 않은 내면의 분노를 마음 놓고 공격해도 되는 유일한 인물일 자기 자신에게 투사한 결과다. 다른 사람들은 미쳣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들 모두는 혀실을 그린 지도가 더 이상 실제 지형과 맞지 않게 된 그 시점에 자신을 괴롭히는 거대한 욕구와 감정에 반응했을 뿐이다.
전략과 투사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후천적 자기감과 개인의 생애 이력 깊숙이 숨어 있는 자기의 진정한 요구 사이가 점점 크게 벌어질 때, 사람들은 자신으로부터 무언가가 떨어져나가는 기분이라고 표현한다. 신경증.
신경증은 정신 내부의 분열과 그 이후에 발생하는 저항을 설명하기 위한 말. 우리 모두는 신경증적이다. 현실의 자신과 스스로 원하는 자신 사이의 괴리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우울증, 약물남용, 자기파괴적 행동은 신경증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저항 현상이다. 신경증 증상은 상처받거나 방치된 곳이 어디인지 가리켜 주는 동시에 이후 치료 방향까지 알려주는 유용한 단서이다.
신경증은 "아직 그 의미를 찾지 못한 고통"이다.(융)
3.온전한 인간이고 싶다.: 이제, 내면을 바라볼 시간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대화
자신이 누구인지 충분히 알고 있으며,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이 무너지고 자아가 지녔던 주도권이 붕괴하면, 필연적으로 페르소나와 그림자*가 충돌한다.
(*그림자: 개인이 숨기고 싶어하는 내면의 모든 부정적인 부분. 융은 모든 사람에게 그림자가 있으며, 이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여 완성된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봄)
페르소나 ; 가면. 자아가 사회적 삶의 조건에 의식적으로 적응하는 것을 가리킴. 페스로나는 "진실이 아니며, 개인과 사회 사이의 타협일 뿐이다"(융)
인생전반기에는 대부부 페르소나를 만들고 유지하느라 내면의 현실에 쉽게 소홀해진다. 그러고나서 등장하는 것이 그림자로, 이는 인식하지 못하거나 억압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 그림자는 집단 및 사회의 가치가 갖는 이해관계 때문에 개인의 본성이 얻는 상처다. 따라서 그림자를 직면하고 이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면 신경증적 분열을 치유할 뿐 더러 성장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
중년에 이른 개인은 이미 적잖은 개성을 억누르고 있는 상태. 지금까지 억제하며 살았던 분노가 중간항로를 거치는 동안 끊임없이 폭발한다. 이러한 충동적 본성과 연결되어 있던 에너지는 어디로 갔을까? 이 에너지 때문에 우리는 맹목적인 야망을 불태우거나 마약을 복용하거나 자신과 타인을 학대한다. 분노를 인정하고 제대로 다루면 분노는 변화를 이끄는 거대한 자극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중년에 들어서면 자신을 그렇게 속이는 능력이 바닥난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다름 아진 자기 자신이 적으로 보인다. 우리가 세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자신의 그림자를 타인에게 투사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융). 이 세계의 문제가 실은 우리 자신의 문제이며, 결혼생활의 문제도 우리 자신의 문제라고 말하는 데는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렇게 작아지는 순간에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바꿀 수 있으며, 자신과 관계 모두를 치유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
자신과의 약속은 우리가 남기고 떠나온 삶의 기쁨이나 써보지 못한 재능, 아이 때 가졌던 희망등을 다시 돌아가 줘워 모은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간항로를 거치는 동안 그림자가 출현하는 일은 '자기'가 인격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수정하려는 노력의 일부이다. 지금껏 살지 못했던 삶인 그림자를 내 안에 통합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자의 요구 또한 자기로부터 나오며 자기는 더 이상의 억압도 막무가내식 표출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혼생활에 위기가 오다.
중간항로 동안 결혼생활의 중요성과 역할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친밀성의 본성을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낭만적 기대와 서로에 대한 투사 위에 자리잡은 결혼보다는 현실적 필요에 따른 결혼이 더 오래갈 확률이 높다.
아니마와 아니무스 : 정신 내부에 어느 정도 무의식적 상태로 자리잡은 반대편 성의 요소.
. 아니마 : 남성 속에 자리잡은 여성적 경험. 어머니와 다른 여성들에게서 최초의 영향을 받는데, 남성 개인의 특수성 또한 가미된다. 남성의 아니마는 자신의 몸, 본능, 감정적 삶, 그리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능력을 구현한다.
. 아니무스 : 여성 속에 자리잡은 남성적 경험. 아버지와 문화의 영향을 받으나 개인마다 특징이 다르다. 이성적 감각, 기능적 능력 외에도 에너지를 집중하여 이 세계에서 자신의 욕구를 달성하는 능력을 구현한다.
관계에서의 기본적인 진실은 개인이 의식적으로 경험하지 않는 모든 것을 상대에게 투사한다는 것.
중년에 이르면 ''당신은 내가 결혼한 그 사람이 아니야'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 사실 한순간도 배우자가 다른 사람이었던 적은 없다. 배우자는 언제나 타인이었으며, 그전까지는 잘 몰랐다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조금 더 알게된 낯선이일 뿐이다. 아니마나 아니무스가 그 사람에게 투사된 탓에 우리는 말 그대로 자신이 읽어버렸던 부분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친밀한 애정관계의 진실은, 내가 나와 맺는 관계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마법처럼 우리를 구원해줄 타인'에서 '인생의 더 큰 의미를 찾는 데서 애정관계가 하는 역할'로 옮겨간다.
중년이 된 우리는 융합모델을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 융합모델은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각자가 자신의 정신적 안녕을 책임진다는 전제하에, 인생 후반기의 모델은 다음과 같다. . . . 배우자는 내가 정신의 가능성을 넗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릴케, 애정관계는 "서로의 고독을 나누는 것"이다.
진정한 애정관계는 결국 삶의 여정을 다른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다는, 또는 대화, 성, 연민을 통해 삶의 수수께끼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의식적인 욕망에서 비롯된다. 니체, 결혼은 거대한 대화이다.
노년부부가 상당수 이미 오랜전에 대화가 단절된 이유는 개인으로 성장하기를 스스로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상대를 위해서라고 잘못 생각한 경우라 해도 우리가 배우자의 성장을 가로막는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분노와 우울에 가득한 사람과 살게 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자신의 성장을 막는 일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상대에게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결혼의 존재 이유가 사라질 것이다.
인형의 집. 노라
한쪽 배우자가 변화를 계속 거부한다면, 그는 분명 불안의 통제를 받고 있으며 1차 성인기의 투사에 덮여 있는 것이다. 이런 완강한 배우자는 앞으로도 계속 필요한 책임을 지려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삶에 거부권을 행사할 자격이 없다. 타인의 성장을 방해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으며, 이는 명백히 영혼의 범죄이다.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쌍방이 자각하고 서로에게 솔직하게 도움을 청한다면, 결혼생활을 새롭게 되살릴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과거에 자신들을 힘 빠지게 했던 패턴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한 희망과 계획까지 다뤄보는 동반 치료와 더불어 자신의 발전을 위해 각자가 개인 치료까지 받는 것이 이상적인 부부 치료모델이다.
내담자에게 던지는 질문, "당신의 과거 이력이나 습관적인 행동에서 결혼생활을 해치거나 갈등에 빠뜨릴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요?" "자신을 위해 어떤 꿈을 가져봤으며, 어떤 두려움이 그 꿈을 막았습니까?"
개인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타인에게도 똑같은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여기에는 힘이 두배로 든다. 자신을 책임지는 능력과 더불어 자신의 상상력으로 타인의 현실을 확인하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년기의 애착욕구는 자연스럽고 일반적이라고까지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인이 되어서도 아주 강하게 남아 있다. 애착갈망.
많은 남성이 겪는 커다란 문제는 마음이 굳어버렸다는 점이다. 감정과 본능적 지혜를 회피하고 내면의 진실을 무시하도록 길들여진 보통 남성은 자신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낯선 사람이며, 돈 권력 지위의 노예다.
현재 서구 문화에는 남성이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도록 이끌거나 허락하는 모범적 방식이 거의 없다. 남성에게 지금 기분이 어떠냐 물어보면 자기의 생각과 외부 문제에 대해 답하기 일쑤다.
남성에게 술은 자신 안에 자리잡은 여성적 측면에 맞선 방어적 구속을 누그러뜨림으로서, 의식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면을 활성화해준다.
남성이 자신 안의 여성적 영혼과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여성이 남성과 좋은 관계를 맺으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여성은 그 내면 연결역할을 할 수 없다. 단지 남성이 투사하는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중 일부만 만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고대이집트의 이야기, <영혼을 찾다가 세상에 지친 남자>
홉키, 남성이 치료세션에서 자신을 내재화하고 실재 감정을 직면하는데 약 1년이 걸린다.<남성의 꿈, 남성의 치료>
남성들 역시 가부장제의 희생자일 뿐이다. 권력이 있느냐 없느냐 만이 자신의 남성성을 보여주는 표시라 보기때문이다. 따라서 중간항로를 지나는 남성은 또다시 아이처럼 권력이 은폐하는 공포에 직면하여 해묵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내 기분은 지금 어떤지 기분이 좋아지려면 나 자신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대부분의 여성 역시 그럴 힘이 없다. 원래 자신이 지녔던 힘을 내면의 부정적 목소리가 모두 갉아 먹었기 때문. 부정적인 아니무스가 목덜미를 쥐고는 음침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넌 못해. 아니무스는 여성의 창조적 능력과 스스로의 삶을 살고 스스로의 욕구를 달성할 자율권을 상징하며, 어머니의 역할 속 그림자에, 아버지의 격려 또는 방해속에, 그리고 사회가 주는 숨 막히는 역할 아래 숨어 있다.
여성은 전통적으로 남편과 자식의 업적을 통해 성취감을 느껴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다. ...결국 여성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격은 신이 내려주는 게 아니라 우울과 쇠락을 낳는 의심과 부정이라는 악마와 매일 투쟁해서 얻는 것이다.
중년의 여성이라면, 아이들은 이미 자신의 삶을 살고 있으며 남편은 일에 묶여 있거나 자신의 아니마가 투사된 여성과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배신당하고 버림받았다고 충분히 느낄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의식적으로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준비했다면 오히려 새롭게 찾아온 자유를 환영할지도 모를 일이다.
중간항로에 들어선 많은 여성에게 지금은 자신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켜야 할 때이다. 키워준 부모가 만들어준 외피가 떨어져내리고 나면 여성은 자신이 누구인지,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새로이 자문해야 한다.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으려면 자신을 가로막는 복잡한 내면의 힘, 다시말해 부모와 문화로부터 얻은 각족 콤플렉스를 더 자세히 인식해야 한다. 아니무스가 지닌 부정적 에너지는 의지력, 자신감, 믿음을 좀 먹는다. 아니무스는 자율권,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싸움에 뛰어드는 능력, 삶의 동력에 대한 자기주장 같은 긍정적 에너지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 에너지를 아니무스가 알아서 전해주지는 않는다. 쟁취해야 한다.
중년의 바람기는 왜 문제인가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갖는 일이 실제로 어떤 이점이 있든 간에, 그 대상은 분명 투사된 이미지를 지닌 사람이다. 배우자가 완벽한 소울메이트가 아니라 나와 다른 평범한 사람임을 알게 되면 새로운 아니마/아니무스 투사는 바람피우는 행위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중년기 바람기가 강력학 힘을 갖는 이유는 개인이 마치 자석에 달라붓듯 1차 성인기로 끌려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아니마를 부적절하게 형성한 남성은 그와 비슷한 수준의 여성에게 끌린다. 마찬가지로 아니무스를 부적절하게 형성한 여성은 세속적 힘을 가진 나이 많은 남성에게 매력을 느낀다. ....남성이 젊은 여성을 원하는 것은 자신의 미성숙한 아니마를 반영하며, 여성이 지위나 나이가 있는 남성에게 끌리는 것은 자신의 불충분한 아니무스 발달을 보상하기 위해서다.
바람 피워본 사람이 그렇게나 많다는 것은 그런 행동양식에 중대한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중년의 바람기가 의미하는 것은 삶을 되짚어가서 발달과정에서 놓고 온 무언가를 다시 붙잡아야 한다는 명령이다. 발달 과정에서 놓친 것들은 의식 저 아래에서 마음을 뒤흔들기 때문에 아직 찾아낼 수 없다. 무의식 상태로 남아 있는 부분은 무의식의 불가사의한 스캔 과정을 거쳐 자신의 미발달 영역과 딱 들어맞는 타인에게 투사된다. 이 과정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완벽한 전체'다.
결혼생활에서의 대화가 억압, 반복, 실망으로 뒤덮여버린 이유는 배우자의 평범한 모습에서 신비한 타자를 발견할 수 있다는 기대를 접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람피우는 상대는 신비한 타자로, 의심이ㅡ 여지 없이 매력적이며 자신의 다면체적 자기에서 덜 발달된 부분이 투사한 의미지를 담고 있다.
부부가 감정, 열망, 지나간 상처를 진정으로 공유하는 모습을 나는 주로 치료과정 또는 이혼법정에서 목격한다.
결혼생활 역시 중간항로라는 격랑에 들어서면 해체하고 재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 두 사람은 서로가 완벽하게 독립적인 상태로 결혼생활에 관해 대화할 각오를 해야 한다. 이는 매우 부담스러운 조건이다. 결혼생활을 함께하기 위해서 우선 더 큰 이별을 겪어야 한다니, 얼마나 역설적인가. 결혼관계를 전환시키려면 우선 각자가 완전히 독립적인 개인이 되어야 한다. 중년의 결혼생활을 변화시키려면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
1) 부부는 자신의 심리적 행복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2) 부부는 각자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공유해야 하며, 과거의 상처나 미래의 기대를 이유로 상대를 바난해서는 안된다. 타자로서 적극적인 자세로 서로의 경험에 귀 기울여야 한다.
3) 이러한 대화를 적극적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부모 콤플렉스를 넘어서
중간항로의 특징 중 하나는 부모와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권력이라는 새로운 맥락에서 부모를 대할 뿐만 아니라, 부모가 노쇠해지는 모습을 지켜보기 때문이다. 그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시기에 우리는 '독립하는' 법을 배운다. 중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마도 부모 콤플렉스에서 자신을 떼어놓는 일이 아닐까 싶다.
1차 성인기는 우리가 내면과 외부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해서가 아니라, 부모와 사회제도가 정해준 모델과 지침에 의존하면서도 혼란을 느낌으로써 찾아온다.
부모 콤플렉스에는 중년에 들어선 우리가 거쳐가야 할 몆가지 측면이 있다. 가장 본능적인 수준에서 보면, 부모와 관련한 경험은 삶 자차에 대한 원초적인 메시지를 던진다(의지, 고통, 환영, 냉담, 핵심공포) 그 다음으로 권력과 권위를 접하는 주요 상황 또한 부모-자식 간의 경험 속에서 벌어진다.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찾아내는 일은 중년기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를 성공적으로 해내지 못하면 유년기의 경험이 인생 후반부마저 지배한다. 우리는 어떤 권위, 즉 어떤 규범적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며, 누가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는가? 성인 대부분은 적잖은 시간을 '자기검열'을 하느라 써버린다. 내면의 권위는 부모 또는 부모를 대신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자기검열이 은밀하고도 위험한 이유는 우리가 과거에 갇혀 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에 자신을 집한 권위에 맞춰 반사적으로 스스로를 검열한다. 아이는 부모의 허락과 보호로부터 외면당하는 일을 견디지 못하며, 그 때문에 반사적으로 자연스러운 충동을 억누르는 법을 익힌다. 외면당할 까 봐 두려워 생기는 자기방어가 바로 죄책감이다.
현재를 사는 능력과 자신을 정의하는 성인으로 살아가는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본성과 성인기에서 떨어져 과거에 갇혀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배우자, 직장상사, 교회, 국가에 투사된 외부 권위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얼마나 의존하는지 깨달으면 스스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부모 콤플렉스를 대하는 일, 그리고 스스로에게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애쓰는 일은 겉으로 보면 부모가 자신의 정체성을 자식의 유년기에 얼마나 쏟았는지와 관련된다. 부모들 대부분이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삶을 자식에게 투사한다.
부모가 자식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는 경향은 대체로 어머니가 딸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더 강하게 보이지만, 아니마나 아니무스가 자신과 성별이 다른 자식에게 무의식적으로 새어나가는 경우도 많다. 남자아이도 종종 어머니의 야망을 짊어진다. 부모의 투사를 보여주는 극단적 예가 성적학대로, 이는 부모의 아니마나 아니무스가 아이 수준에서 작용하는 경우이다.
부모가 이루지 못한 삶이야말로 자식이 짊어져야 하는 가장 큰 짐이다. 부모가 스스로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다면 무의식적으로 자식을 질투하지 않으며, 기대와 한계를 투사하지도 않는다. 부모가 개성화를 성취할 수록 자식 또한 더 자유로워진다.
자식은 부모와 다르며 부모에게 어떤 의무도 지지 않는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 자식은 부모를 돌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부모가 자식을 돌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과 같지 않은 타자다움을 사랑하는 게 과제라는 점에서 이는 결혼생활과 마찬가지다. 자식이 개성화를 스스로 이루는 것만 해도 충분히 여려운데 왜 부모의 욕구까지 짊어져야 하는가? 미처 못했다면 중간항로 동안 자식을 놓아주는 일은 자식에게 도움이 되며 우리 스스로에게도 필요하다. 이로 인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에너질를 발산하기 때문이다.
중년에 접하는 부모컴플렉스의 또 다른 측면은 부모와의 관계 경험이 타인과의 우호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아이가 접한 '친밀함'의 유형이 이후의 발달과정을 규정한다. 부모 컴플렉스가 계속되는 한, 자식은 결국 부모와 똑같은 짝을 선택하거나 정반대 유형을 선택해 과잉보상할 공산이 크다.
따라서 중년에 들어 자신을 바꾸려면 배우자와의 애정관계 또한 세세하게 짚어봐야 한다. 내면이 바뀌려면 결혼생활에 변화를 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부모 컴플렉스가 결혼생활을 돌이킬 수 없이 요염시키기도 한다.
컴플렉스란 정신 내부의 감정으로 꽉차있는 에너지 덩어리를 말하며, 자아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 콤플렉스는 본질적으로 감정적 반사작용으로 그 강도는 콤플렉스의 기원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얼마나 오래 지속됐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부모 컴플렉스는 유년기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걸로 보아 분명 강력하다.
우리는 부모가 이루지 못한 삶, 부모의 슬픔과 분노를 계속 짊어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들이 무의식의 영역에 남아있는 한 그렇다. 살아온 역사를 피할 수 없기에 콤플렉스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과거에 의식하지 않았던 부분이 현재에 파고들어 미래를 결정한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은 부모에게서 얼마나 힘을 얻었다고 느끼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아픔이 아니라 지지라 생각하고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은, 부모 콤플렉스와 의식적 대화를 어느 정도록 나눌 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 대부분은 부모가 자신의 상처 때문에 양육과 힘을 얻길 원하는 우리의 원형적 욕구를 제대로 충족해주지 못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중간항로 중에는 이런 개인사를 세밀하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심리치료라 해봤자 현재의 고통을 전부 부모 탓으로 돌리는 것밖에 없지 않느냐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사실 그 반대다.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민감하게 이해할 수록 부모가 우리에게 준 상처를 용서할 가능성이 커진다. 가장 나쁜일은 이 모두가 계속 무의식 속에 묻어놓는 것으로, 그랬다가는 치러야 할 대가가 크다. 자신이 과거 어디에서 상처나 결함을 발견하든 간에 우리는 스스로 이를 감싸안는 부모 역할을 해야 한다.
타인(부모)의 삶에서 파생한 이러한 원초적 메시지의 기원을 밝혀내지 못하면 어떤 일도 성취할 수 없다. 융에 따르면 우리는 부모를 그저 나와 다른 성인으로 볼 수 있게 된 후에야 진짜로 성장할 수 있다.
일, 직업인가 소명인가
프로이트, 건강하려면 일이 필수 요소라고 했는데, 과연 어떤 종류의 일을 말하는 것일까? 직업은 돈을 벌어 경제적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반면 소명은 삶의 에너지를 실현하도록 요청받는 것이다. 스스로 충분히 생산적이라고 느껴야 개성화를 이룰 수 있으며, 자신의 소명에 응답하지 않으면 영혼에 상처를 입는다.
소명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소명이 우리를 선택한다. 우리는 거기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도의 마직막 유혹>
사도 바울,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다"
우리의 소명은 일직선이 아니라 이리저리 휜 구불 부불한 길이다. 어떤 지인은 철학 석사학위, 새벽 신문 돌리기 그는 일이 끝나면 이후의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일과 소명 사이의 균형.
삶의 의미 중 상당부분은 소명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자아는 삶을 이끌지 않는다.실제로 자아는 삶에 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전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수수께끼 존재인 '자기'이다.
돈과 권력이 표상하는 투사를 깨닫고 여기에서 물러서고 나면, 극단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한다. "나는 무엇을 하도록 부름받았는가?" 자아는 언제나 편안함과 안전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아를 희생하는 일에는 아픔이 따른다. 그러나 삶을 뒤돌아봤을 때 부름에 응답하지 못했다는 후회로 괴로워하는 일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간 분투해서 얻은 안전을 포기하는 일이 두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름대로 더 큰사람이 되지 못하는 일과는 비교할 수 없다.
열등 기능의 재발견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기능이나 적성 등으로 분류되어 더 넒은 전문화 과정을 밟는다. 전문화의 길을 따라갈 수록 개성이 상처를 입고 영혼이 무뎌질 위험도 커진다. "신경증은 자신과의 불일치다"(융) 이는 개성이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뜻이다. 후천적으로 획득한 인격은 반응적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만, 서구사회 교육과정이 갖는 본질 때문이기도 하다.
융, 1921년 현실을 처리하는 8가지 방법에 따른 성격유형론 -> MBTI
내향성과 외향성
사고, 감정, 감각, 직관 4가지 기능
성격유형은 기본적으로 유전되는 것으로 본다.
주요 기능은 보통 초기에 나타난다. 주요 기능을 되도록 많이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찍이 자신이 잘하는 분야로 묶여 좁은 전공 분야로 나아간다. 이런 식으로 더 많은 훈련을 성공적으로 받을수록 시각은 좁아지고 개성은 무뎌진다.
중간항로 중에는 그간 더디게 발달한 정신 부분이 더 많은 관심을 요구한다. 중년에 이르면 안팎으로 스트레스가 많아진다. 내면의 스트레스는 우리 자신이 사회와 결탁하여 총체적 개인을 무시한 데서 비롯한다. 우리를 쉬운 길을 선택했고, 전체적 완성도가 아닌 생산능력으로만 보상받았다.
융의 성격유형론은 두 가지 면에서 크게 도움이 된다. 첫째,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주로 서로 다른 성격유형에서 비롯된다는 것. 두번째로, 자신의 주요 기능 또는 우월 기능을 알고 있으면 자신의 현실에서 열등한 또는 부적절한 방향도 알 수 있다. 이는 외부세계에 더 잘 적응하고 정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성격에서 어떤 측면을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지 알려준다.
그림자를 끌어안다.
외부세계를 대하는 데 페르소나가 필요하지만 우리의 거대한 정신 속에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탐색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림자가 개인 내면의 억압된 모든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특정한 자기 이미지에 투자한 시간이 많을 수록 개인의 발달 역시 현실의 한쪽 면에만 적응하면서 이뤄진다. 그리고 중년이 된 현재 모습에서 안전감이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그림자의 공격으로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다. 아지만 이 과정은 중간항로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바람을 피우거나, 약물을 복용하거나, 자신을 믿었던 사람들을 배신하는 일, 이와 같이 우리가 저지르는 어처구니 없는 형동은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결과를 빛을지는 모르나, 실은 더 풍부하고 새로운 삶을 찾고자 하는 어둠 속의 탐색을 의미한다. 자신에게 솔직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이 이기심, 의존성향, 두려움, 질투, 파괴적인 능력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이는 무작정 밝기만한 페르소나보다 더 완성된 형태이며 더 인간적이다. "인간에 대한 어떤 것도 남의 일로 보지 않는다"
그림자는 억압된 삶일 뿐 악한 걸로 봐선 안된다. 우리는 그림자를 의식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더욱 흥미롭고 완성된 인간이 된다. 부정적 그림자 안에 들어있는 분노, 욕망, 화 등은 무의식 수준에서 발현하면 해로울 수 있으나, 의식 수준에서 받아들이면 새로운 방향과 에너지를 준다.
그림자는 어떤 형태로든, 그러니까 무의식적 행동이든, 타인에 대한 투사든 우울증이나 신체로 나타난 질병이든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림자는 표현을 허락받지 못한 모든 삶의 모습을 표상한다. 그림자는 의식 수준의 성격보다 훨씬 강력하지만 아직 써보지 못한 삶의 에너지이며, 이를 막아버리면 생기 또한 줄어든다.
그림자는 어떤 식으로든 비밀리에 작동하고 있을 것이므로 우리는 중간항로에서 반드시 내 안의 그림자를 의식수준에서 만냐야 한다. 다른 사람을 보고 내가 부러워하거나 싫어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자신 안에서 이 모두를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인생에서 아직까지 사용한 잠재력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자아가 지금껏 성취한 것들로 섣불리 자만하거나 안주하고 있을 때가 많음을 일깨어준다. 개인의 성장과 에너지, 창조성의 또 다른 원천이 무엇인지도 보여준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림자와 대화를 나눔으로써 우리는 타인에 대한 증오, 질투 등 수많은 투사를 없앨 수 있다. 내 삶을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지 않은가. 타인의 문제에 갇혀 신음하기보다 나의 개성화에 더욱 집중하자. 그러면 모든 사람이 조금은 더 행복해진다.
6.홀로서다: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내 삶을 책임져줄 수 없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태도와 습관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외로움에 가장 좋은 약은 고독이다"
고독은 외로움과 어떻게 다를까?
파스칼, 현대의 모든 문화는 우리가 외로움에 빠지거나 자신에 관해 생각하지 않기 위한 광대한 오락이다.
고독은 우리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정신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외로움에서 벗어나 고독을 맞이하기 위해 접해야 하는 문제들:
1) 분리 트라우마 받아들이기.
부모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많을 수록 타인과의 관계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 부모와 관련된 환경이 불안정할 수 록 자신을 타인에 비춰 정의하려 한다.
개성화를 진행하려면 고독해야 하고, 고독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날마다 '나는 어떤 식으로 두려움에 빠져 나 자신과 내 삶의 여정을 회피하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부모 또는 외부와 상호의존적 관계에 빠져 있느 ㄴ성인은 이미 자신의 존재를 회피하는 방법을 배운 상태이다. "내 감정에 접촉한다"
다른 사람에게 반응할 때면,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여기 어디에 내 부모의 존재가 숨어 있는 것일까?'라고 자문해야 한다. 외로움을 무릅쓰고 고독 속에서 ㅈ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은 중간항로를 무사히 거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2) 상실, 그리고 투사 거둬들이기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가 어떤 상황일지 생각해보라.
우리가 얼마나 자주 배우자, 자식, 페르소나 등 타인에게 자신을 투사함으로써 자신의 의미와 정체성을 얻는가. 상실을 인정하고 한때 외부 대상에 쏟았던 자신의 에너지를 회복할 수 있다면, 여정의 다음 단계에서 이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3) 두려움을 의식으로 만들기
우리는 외로움이 너무 두려워 차마 타인을 놓아 보내지 못하고 끔찍한 애정관계나 자신을 억누르는데 집착하기도 한다. 고독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내면의 소리를 결코 들을 수 없다. 명상.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다면, 비로소 고독을 달성한 것이다. 이런 의식을 수행하는 목적은 자신을 더 큰 인생의 리듬으로 연결하는 데 있다.
내 안의 잃어버린 아이를 만나다.
우리가 자신을 치유하려면 무엇보다도 자연스럽고 건강한 내면의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알아봐야 한다. 중간항로를 건널 때 융은 취리히 호숫가에 앉아 모래성을 쌓고 장남감 놀이를 하고 돌을 조각하면서 자신의 풍부한 지성과 직관을 사용해 스스로의 영혼에서 무시당한 부분과 접촉하려 했다. 삶의 여정이 장애물을 만날 때면 결국 내면이 나를 구해줄 것임을 융은 잘 알고 있었다.
마흔의 감정 흐름은 종종 지루함이나 우울함엥 막혀버린다. 우리의 본성이 몹시 좁은 통로로 갑갑하게 움직이다 결국은 독 안에 갇혀버린다는 뜻이다. 유희가 있어야 사는 데 힘도 생긴다.
중간항로는 '나의 내면아이는 뭘 좋아할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기회를 안겨준다. 음악, 미술수업, 연기하는 즐거움도 다시 느껴보라.
삶을 사랑하는 열쇠, 열정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영혼의 여정을 좇으십시요. 스스로의 열정을 좇으십시요.
열정은 소명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움직이는 동력이며, 선택이라기 보다는 우리에게 주어진 소환장 같은 것이다.
현재의 삶을 가장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과거에 대해 끝없이 불평만 하면서 망설임과 부끄러움 속에 말년의 허약함과 죽음을 맞아서는 안된다. 우리가 가장 온전하고 충실하게 살아야 할 시기는 분명 바로 지금이다.
영혼의 늪에서 의미를 찾다.
나와 나누는 대화
우리의 세계관이 다름 아닌 유년기와 문화라는 프리즘을 거쳐 바라보는 것과 같으며, 그 프리즘은 빛을 산란시켜 우리의 시각을 왜곡하는 렌즈와 같다. 살면서 겪는 경험 일부가 스스로의 내면어 자리잡아 강화되고 갈라지며, 콤플력스 같은 예어서 보듯 의식 속으로 밀고 들어와 의식을 짓누르며 현재에 더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한다.
내 자아도 내 콤플렉스도 내가 아니라면, 대체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인생 초반을 움직이고 지배하는 자아ㅡ세계의 축을 벗어났다면, 이제 자아와 자기 사이의 대화를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꿈은 내적 대화에 참여하는 가장 유용한 기술. 자기의 어너지와 목적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정신이 우리에게 건네는 말이다. 꿈은 우리 자신의 진실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우리는 왜 젊음을 유지하고 싶어할까? 삶을 발전하는 과정이 아니라 고착으로 보기 때문이다. 삶을 죽음과 재생을 반복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볼 준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여정을 온전하게 경험하기보다는 익히 알고 있는 편안함 속에 머무르려 하기 때문이다.
중년에 이르러 힘이 떨어지고 우리가 지키려 해왔던 모든 것이 영락하는 모습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이 스트레스 아래 새로운 무언가를 향한 초대장이 들어 있다. 이 초대장은 장비를 새로 챙겨 외면적 획득에서 내면적 발전으로 여정의 다음 편을 시작하도록 이끈다.
기껏해야 자아의 안정만을 상상할 수 있는 젊음의 관점에서 움직이기보다는 우리 생애 전체의 더 끈 리듬을 따를 수 있는 장력을 얻는 것이 더 큰 성취다.
중간항로에서 겪는 고통은 보상으로 바뀔 수 있다. 여기서 얻는 것은 손실을 다르게 보는 관점이다. 오래된 자아의 확실성을 포기하면 더 끈 현실로 가는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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