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레프 톨스토이
▶ 톨스토이, <결혼>을 읽다.
원제는 Kreutzer Sonata.
중편정도의 소설이라 한 나절만에 통독했다. 이글은 독후감은 아니고 책 뒤편의 해제내용을 발췌해서 쓴다.
이 소설은 톨스토이의 후기작으로 1880년대들어 비판적으로 변화한 톨스토이의 인생관이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 시기에 톨스토이는 위선으로 가득찬 러시아 귀족사회, 러시아 정교에 회의를 갖고 러시아 농민, 초기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게 된다.
이 소설은 아내의 부정을 오해하고, 질투에 사로 잡혀 아내를 살인한 포즈드느셰프라는 남자의 독백에 가까운 자기고백의 이야기다. 소설에서 포즈드느셰프는 노년의 톨스토이의 견해를 대변하는데, 그는 남녀관계의 본질을 육체적인 욕구의 충족에서 찾고 있다. 때문에 남녀의 사랑의 완성형태인 결혼은 신성함과는 거리가 먼 동물적인 결합으로 이해되고 만다. 그는 사랑을 영속성을 가지 못한 가변적인 감정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부부는 정신적 교감을 나누지 못하고 사소한 일상사가 발단이 되어 끊임없는 언쟁을 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는 또한 부부간에 존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앙심과 악감정이며 이로부터 견해차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원한은 견해 차에서 비롯된다는 통설을 뒤집은 것이다. 결국 결혼생활은 그에게 자유를 구속하는 일종의 감옥일 수 밖에 없다. 그에게 탈출구는 없다. 그는 오로지 마음 속으로 탈출을 염원할 뿐이다. 이는 비단 포즈드느셰프뿐만 아니라 톨스토이 자신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그런맥락에서 아내 살해는 단순히 그녀의 부정(?)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그의 자유를 향한 염원의 발로로 풀이 될 수 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원했던 아내로부터의, 가정으로부터의 해방이었던 셈.
포즈드느셰프는 자녀를 더 이상 기쁨의 원천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당위성을 부여하는데 그치는, 또 하나의 고통의 원천으로 인식한다. 그럼에도 아내의 피임을 극구 반대한다. 피임은 여성을 쾌락의 도구로 완전히 전략시키기 때문. 여성은 항상 임신과 출산과 육아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사 이외의 일에 한눈을 파는 것은 곧 가정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여성을 한 인격체, 인간이 아니라 성욕의 충족 대상, 쾌락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다. 포즈드느셰프가 아내를 진정한 한 인간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내가 숨을 거두기 전과 사망한 후 관속에 누워있을 때이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속죄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음을 깨닫고 회환의 눈물을 흘린다.
포즈드느셰프의 의미심장한 말.
"그들은 내가 아내를 10월 5일 칼로 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내를 살해한 것은 그날이 아니예요. 훨씬 전입니다.(즉 아내를 미워하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죽이고 있지 않습니까?"
아내 살해 후 법정에서는 상처받은 명예를 지키고자 살인을 저질렀다고 결론을 내려 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하지만 그는 질투는 아내살인의 구실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모든 일은 우리 부부 사이에 구렁텅이가 존재했다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서로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되는 몸서리치는 긴장, 바로 이것이 조그만 구실만 있어도 곧장 위기로 치닫게 하곤 했으니까요. 우리의 언쟁은 마지막에 점차 무서운 양상을 띄었고 팽팡한 동물적 열정과 번갈아들면서 섬뜩해졌습니다.
나는 나처럼 살고 있는 모든 남편은 방탕한 생활을 하든가 아니면 이혼을 하든가 아니면 자살을 하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나처럼 아내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건 지극히 예외적인 일입니다. 나만 하더라도 끋장을 내기 전에 수차례에 걸쳐 자살을 하려고 맘먹었고 아내는 아내대로 독약을 먹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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