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최전선 _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나는 왜 쓰는가.
누구나 사노라면 거대한 물살에 떠밀려 가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왜 내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을까,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이게 최선이고 전부일까. 그러한 물음에서 나의 글쓰기는 시작되었다.(5-6)
글로 정을 나누고 앎을 키우고 힘을 모으는 일의 재미를 온몸으로 체득한 셈이죠.(7)
글쓰기에는 문장을 바르게 쓰는 것과 글의 짜임을 배우고 주제를 담아내는 기술은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글을 쓸 것인가하는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밤이고 낮이고 온 국토를 삽질하는 게 발전이 아니듯 자신을 속이는 글. 본성을 억압하는 글. 약한 것을 무시하는 글. 진실한 가치를 낳지 못하는 글은 열심히 쓸 수록 위험하다.
우리 삶이 불안정해지고 세상이 더 큰 불행으로 나아갈 때 글쓰기는 자꾸만 달아나늗 나의 삶에 말을 걸고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고 살아 있는 것들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23)
중심잡기.
나의 행복은 시시때때 충돌했다. 아이를 집에 두고 내가 강의를 듣거나 영화를 보는게 못할 짓 같았으니 '나답게' 살기 위한 선택에는 묘한 죄의식이 따랐다. 이 감정의 정체가 뭘까. 지치고 복받치는 마음을 집중 탐문했다. 글을 쓰면서 여자, 엄마, 노동자라늗 집합명사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김지영이라는 고유명사로의 삶을 지켜내고자 버둥거렸다.(7-8)
[이 구절을 읽으면서 월차날 아무도 모르게 영화관과 거리에세 방황아닌 방황을 했던 제 예전의 모습이 떠 오르네요.
'복받치는 마음을 집중 탐문'하기 위해선 글을 써야 하는 군요. 다시 말하면 글을 쓰면 그 마음을 집중 탐문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네요.]
풀어내기.
삶이 굳고 말이 엉킬 때마다 글을 썼다....
어렴풋이 알아갔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이 견달만한 고통이 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일임을.(9)
물러앉기.
글쓰기는 '나'와 오롯이 대면하는 시간이다. ....일상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그런 기회는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글쓰기라는 장치를 통해서 나를 세속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늗 것들과 잠시나마 결별할 수 있으니, 관성적 생활 패턴에서 한 발 물러서는 기회만으로도 글 쓰늗 시간은 소중하다.(10)
발명하기.
살아갈 수 있는 말들이 부족했다....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서는 지금과는 다른 언어. 다른 지식, 다른 관점이 필요했다.
분노. 좌절, 실망, 고통 같은 내 몸을 밞고 지나가는 감정을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세상의 말들은 오염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 같이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삶, 경쟁과 출세와 소비를 촉구하고 재생산하는 집요한 언어였다. 삶의 가치라는 고귀한 물음을 봉쇄하고 주변에 있는 타인의 삶에 등 돌리게 하는 쓸쓸한 말들이었다. (14.15)
세상을 바꿔야 할 이유가 없는 자들의 언어로는 이 세상의 모순과 불행을 설명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이다. 생각을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깨달았다. 나는 이미 어떤 가치 체계에 휘말려 있었고 그것은 내 삶을 배려하지 않았음을 (16)
나만의 언어 발명하기, 이것이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까닭이다.......산다는 것은 언어를 갖는 일이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라는 하이더거의 말을 기억했다.(16)
감응하기.
나는 인터뷰만이 아니라 영화나 책에서 감동ㅈ을 받으면 잠이 잘 안 왔다. 가슴에서 퍼내야 홀가분했다. 이 주옥같은 이야기, 이 놓치기 쉬운 생의 진실을 한 사람잊라도 더 알아서 마음 편히 살고 긍정적 변화를 이루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18)
이걸 감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감동과 비슷한데 둘에는 차이가 있다. 감동은 깊이 느껴 마음이 움직임이란 뜻으로 움직임, 힘 그 자체를 뜻한다면 감응은 감동에 응함이다. 개방적 의미로는 태도나 윤리적인 것을 일컫는다. ,....가슴 밖으로 뛰쳐나가 다른 것과 만나서 다시 내 안으로 들어오는 변신의 과정까지 아우른다. 감동보다 휠씬 역동적인 개념이다. 또한 기역력 처럼 감응은 능력이다.
한평생 자식 농사에 손끝 발끝이 갈라진 부모에 대한 측은 지심이 솟구쳐야 그것이 시가 된다.
무엇에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자가 어디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법이다.(18)
...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뉘주는 아주머니의 거친 손에 감응한다. 그때마다 글로 쓰고 나면 신체가 새롭게 구성됨을 느깐다. 이는 아주 물질적인 감각이다. 주어진 상황에 물음을 던지고 때로 몸도 던진다. ...전단지를 더 적극적으로 받는다거나. ..
감응하면 행동하게 되고 행동하면 관계가 바뀐다. 내 안에 머무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언어를 통해 '함께-있음". 그리고 '나늠-변용'이다.(19)
함께하기.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요리실력이 는다. ..글쓰기도 요리와 다르지 않다. ...글쓰기는 글 보는 눈을 길러주며 글 보는 안목은 곧 세상을 보는 관점을 길러준다. 남의 말을 알아듣는 만큼 타인의 삶에 대해 구체적 감걱이 생긴다. 이 감각이, 마음 쏠림이 또 다른 글쓰기를 지극한다.(20)
좋은 글은 울림을 갖는다. 한 편의 글이 메아리처럼 또 다른 글을 불러온다. 글을 매개로 남의 의견을 듣고 삶을 관찰하다보면 세상에는 나와 무관한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된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이에 대한 균형 감각이 발달한다. 인간은 아는 만큼 덜 예속된다.(21)
...매 순간 모든 존재를 상식적으로 대하고 친절한 마음을 갖는 대인배로 살 수 있다.
세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작가이다. 작가는 행동하는 자, 느끼는 자, 쓰는 자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언어로 세공하고 두루 나누면서 세상과의 접점을 넓혀가는 사람이다. ...그렇게 글쓰기는 존재의 풍요에 기여한다.(22)
글쓰기의 최전선으로.
나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동안 우리가 지어온 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 조세희 -
글쓰기 강좌. 자기 삶의 방편이자 기예로서 글쓰기(자기 삶을 자기 시대 안에서 읽어내고 사유하려는 시도)
힐링과 치유의 글 쓰기와는 거리가 멀어. 사회구조적인 매트릭스에서 자신을 분리시킨 채 성급한 반성과 화해, 자기 정당성 확보의 글쓰기로 잠시 위안 받고 산뜻하게 일상으로 복귀하는 게 아니라 너 지신에 대해 삶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조금식 불편해지며 깨어 있는 것이 목표인 글쓰기 강좌.(31)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가장 많은 수강 동기는 나를 알고 싶어서 였다. ...사회적으로 주어진 노릇에 충실한 반복적 일상을 살면서 자기표현의 막막함이나 자기소외의 쓸쓸함일 자각한 이들이 그것을 극복하고자 작정하고 오는 것이다.(33)
삶의 옹호자 되기.
글쓰기는 '독립하되 고립되지 않는 삶'의 양식을 조형하려는 이들에게 주어진 생산적 삶의 가능성이다,
- 김영민 -(41)
글을 쓰면 무엇이 좋으냐?고 내게 묻는다....
생의 모든 계기가 그렇듯이 사실 글을 쓴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런데 전부 달라진다. 삶이 더 나빠지지는 않고 있다는 느낌에 빠지며 더 나빠져도 위엄을 잃지 않을 수 있게 되고 매 순간 마주하는 존재에 감응하려 애쓰는 '삶의 옹호자'가 된다는 면에서 그렇다. (42)
지기 이해를 전문가에게 의탁하기보다 스스로 성찰하고 풀어가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으며 그 중 가장 손쉬운 하나가 글쓰기다....더 망가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망가지지 않는다'는 말에는 무척 섬세한 감수성과 인지성이 들어있다. 산다고 살면서 한다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짓게 되는 죄가 있다. ...글쓰는 일은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이 선택하는 최소한의 권리이길 바란다.(43,44)
나와 삶의 한계를 흔드는 일.
키워드 글쓰기.
어떤 단어에서 경험을 떠올리고 흐르는 생각을 붙잡아서 글로 풀어내는 것부터가 글쓰기 훈련이다. 글쓰기는 삶의 지속적 흐름에서 절단면을 만들어 그 생의 장면을 글감으로 채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50)
삶에 기반한 관점, 사물을 보는 예민한 감각은 이런 외로움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떠들며 원하는 것들 사이에 둘러싸여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 그런 상황에서는 '왜'라는 질문이 필요없이 일상이 꽉 차 있으니까요. 한 걸음 멀리 떨어져서 나는 왜, 여기, 지금을 계속 묻고 물을 때 사물도 세상도 예민하게 볼 수 있늗 것이 아닐까.(51)
열 편 남짓 글을 쓰고 나서 예외없이 글감의 고갈에 직면하는 이유는 삶 혹은 나에 대한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어쩌면 글감의 빈곤은 존재의 빈곤이고, 존재의 빈곤은 존재의 외면일지 모른다.(52)
글쓰기는 나와 삶의 한계를 흔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삶은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의 지루한 반복이다. 기쁨과 슬픔을 자아냈던 대소사의 나열은 삶의 극히 일부분이다. 나의 범위 역시 피와 살이 도는 육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정신의 총체이기도 하며 관계의 총합이기도 하다. 나는 나 아닌 것들로 구성된다.(53)
....삶이란 "타자에게 빚진 삶'의 줄임말이다. 누구도 삶의 사적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과 경험의 고뮨적 구성원리를 인식한다면, 경험의 고갈이라는 난감한 사태는 해결할 수 있다.(54)
내가 쓴 글이 곧 나다.(55~)
글을 쓰고 싶은 것과 글을 쓰는 것은 쥐며느리와 며느리 차이다.
일단 쓸 것. 써야 쓴다.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문장을 쓰고 그걸 다듬어서 문단을 만들고 그 문단의 힘으로 한 페이지 글을 완성할 수 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껴져도 자기 능력에서 출발하기. 일단 써봐야 어디까지 표현이 가능한지 어디가 약한지 어디가 좋은지 볼 수 있다.
질보다는 양. 적어도 백지 공포는 사라지지 않을까?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고통 쓰기, 혼란과 초과의 자리(59~)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 이성복
작가는 가슴에 구멍이 난 사람이다. 그 구명을 언어로 메운다.
고통스러운 삶의 기억을 가진 이들이 문학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공적) 글쓰기와 일기의 차이
글쓰기는 남에게 보여지는 삶, 해석당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일이다.
고통이란 원래 사회적 의미망에서 생겨난다. 타인의 시선이 감옥이 되버린 상태인 것.
글쓰기의 본령. 먼저 느낀 대로 말하고 쓰고, 그 생각을 공적인 장에 내놓아 외부에서 검증받고 소통하면서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을 바꾸어가는 것. 그러니까 다른 내가 되어가는 과정의 기록이 글쓰기의 본령이다.
과도한 주인공 의식을 버려야 한다. 자기감정에 집중해야 한다. 자기검열 사회검열에 걸려 넘어지면 글 쓰기 어려워.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고 두루뭉수리해질 때는 내적 검열이 작동한다는 증거다.
글쓰기는 솔직할 수 있는 용기다. 아랫도리를 벗고 남들 앞에서 서는 것.
글쓰기는 상처를 드러내는 가장 저렴하고 접근하기 좋은 방편.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자는 누구나 약자다(66~)
자기 언어가 없으면 삶의 지분도 줄어든다.
피해자의 언어를 만들고 싶었다.
자기 고통을 자기 언어로 설명하는 일이 가능해질 때 고통으로 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혼자서는 불가능. 자신의 복받치는 이야기를 들어줄 이가 필요하다. 주관적이고 편파적으로 편들어주고 옹호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말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하기(70~)
ㅡ 성폭력 피해자와 글쓰기 수업
글쓰기 수업을 하고 나면 힘이 난다. 아마도 한 존재의 깊고 내밀한 느낌은 사적인 게 아닌 것 같다. 모든 존재가 깊은 심연에서는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치 개미동굴 같은 하부구조를 가진, 하나의 영혼으로 된 거대한 신체를 상상했다.
<이것이 인간인가>, 인간의 존엄
<소망없는 불행>, 엄마
<이 시대의 사랑>, 고통에 대한 아름다운 응시
<폐미니즘의 도전>, 일상의 성정치
니체, 고통은 해석이다.
우리는 고통 그 자체를 않는 게 아니라 해석된 고통을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이 고통이 어디서 오는지 왜 나를 아프게 하는지 더 침착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고통으로 뭉개졌던 시간은 가지런히 언어로 재배치되었다.
몸이 기억하는 말은 밖으로 나오려하고 고통은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남의 이야기는 자기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어 주었다.
자신의 피해경험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섡을 얻게 된 것. 자신의 아픔으로 꽉 찼던 자아에 타인의 아픔을 들여놓게 된 것은 덤으로 얻은 고마운 선물이다. 자아가 확장되면 상대적으로 고통은 줄어들게 마련.
내 몸이 여러 사람의 삶을 통과할 때(76~)
책 정희진 처럼 읽기의 부제가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때 란다.
글쓰기모임. 관계가 단절되고 영혼이 옥조이는 이 물신주의의 체제에서 가짜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그래도 제정신으로 살아보려는 몸부림으로 여기까지 와 닿은 이들과 어떻게 지속적으로 글쓰기를 해나갈 것인가?
꼭 대헝마트 계산대이거나 먼지 휘날리는 작업장이거나 밀양 송전탑 반대 현장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살아갈 것이가하는 존재 물음 과정에서 이른 곳이라면, 현실의 베일이 벗겨지는 곳이라면, 삶의 의미를 정의 내리게 되는 곳이라면, 거기가 바로 삶의 최전선이다.
불행처럼 우리를 자극하는 책들(81)
전태일평전
필경사 바틀비
이것이 인간인가
페미니즘의 도전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말
거대한 고독
소년이 온다
이번 생을 달리 살아보고 싶은 용기를 준 책들.
진실한 독해. 자기 삶의 구체적 정황을 떠올리고 접목시키면서 주관적으로 읽으라.
말들의 풍경 즐기기(88)
사록사록 눈이 쌓이듯 조용하면서도 급진적인 인식의 변화를 일으키는 책 앍기가 있다. 단연 시집이다.
김수영, 거대한 뿌리
문태준, 가재미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권혁웅, 마징가 계보학
조용미, 기억의 행성
쓸모-없음의 시적 체험(93)
아무짝에 쓸모없는 시 암송을 통해 안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한다. 그 동안 오직 쓸모를 챙기기 위해 이루어진 지식의 축적에 물음표를 남겻다.
문학을 함으로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 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여기서 쓸모는 곧 화폐이다. 한 개인이 자본주의 사회의 부품. 즉 쓸모 있는 인간으로 맞춰지면 본성은 찌그러지고 감각은 조야해진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쁘지 않은 상태로 일상이 굴러간다.
가장 간소한 물성을 가진 시를 통과하며 학인들은 자신에게 가해진 억압을 자각한다.
시 혹은 시적인 것은 왜 존재를 흔들고 지나가는 걸까? 쓸모와 무쓸모의 경계가 무너지는 거대한 혼란에 빠뜨리는 걸까?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책 읽기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편협함을 확인하고 어떤 존재이 풍부함을 깨닫는다.
느낌의 침몰을 막기 위해(98)
세월호 침몰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사건, 영화 <한공주>
조직에 매인 동안 이렇게 느낌을 봉인한다면 분노의 감각을 소거한다면 훗날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제 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없는가, 시인 김수영
세상이 이래도 되는 건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시인에게 묻고 싶었다. 나에게 시인은, 인간의 위엄을 지키는 보증인이다.
김수영 전집의 시편
김수영의 시어는 생활어이지만 의미를 흔들고 뒤집는다. 시의 난해함은 삶의 난폭함에서 유래한다. 삶이 종잡을 수 없다면 삶을 받아낸 시도 그럴 수밖에.
시의 본령은 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삶의 결을 무한히 펼치는 데 있어.
우리는 김수영이라는 시인 덕분에, 한 존재의 좌절과 모멸과 사유와 열정의 몸부림이 남긴 흔적인 시를 통해 느낌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우리는 저 마다 느낌의 발화를 참관하고 서로의 사유의 개화를 목도했다.
파트 3. 사유 연마하기
자명한 것에 물음 던지기 115
구조주의,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인 주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 자유와 자율성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이미 알고 있는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 어떻게 어느 만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 알려고 해야 한다.
니체, "동정은 이 세상의 고통을 증대시킨다."
" 우리가 보다 강력한 사람 돕는 사람으로 나타날 수 있을 때...불행에 빠진 사람들과는 반대로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느끼기를 원할 때 혹은 불행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권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때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보는 것을 피하지 않기로 결싱한다"
봉사. 봉사를 하고 오면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는 생각이든다. 크고 작은 불평불만이 싹 없어진다.
좋은 글은 질문한다.
도덕은 일상의 평균치만을 관성적으로 고집하며 살아가는 순치된 개인을 길러낸다.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차이를 보편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로 부터 기존의 보편을 귾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글이 생명력을 갖는다.
질문하는 글은 생성하는 삶을ᆞ 이어진다. 왜라고 묻는 글,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개방하도록 등 떠미는 글. 모든 글의 최종 목적은 감동이다. 진정한 감동은 신체가 바뀌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이다.
자기 입장 드러내기 120
첫번째 판단은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해 판단한 것이다. 니체.
살면서 이런 저런 지나침을 통과하다 보면 정서의 결이 생겨나고 그 결에서 글이 빛어진다. 어떤 글을 읽어보았을 때 필자가 무슨 일을 경험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있어야 좋은 글이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가 분명히 드러나야. 일종의 당파성.
내가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동조하는가가 당파성이다.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 126
김기덕, 영화 파란대문
디앤 아버스, 기형인들 사진.
예술가, 철학자.
지기 시대가 떠 받드는 가치 체계에 커다란 물음표를 던져서 자기 삶을 주변 사람을, 이 세계를 낮설게 바라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저절로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경험하느냐가 아니라 경험한 것을 통해 무엇을 느끼느냐이다. 어떤 각도에서 어떤 문제를 다루느냐 고유의 관점과 해석능력이 중요하다. 그래서 작가는 뛰어난 관찰자여야 한다.
문제의식이 있어야. 이글을 통해 니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쓰자 130
문학평론가 김훈,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쓸 수 있는 것을 삼갔을 뿐이다.
이미 훌륭한 글이 넘치므로 나는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내 삶과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 나와 또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나의 절실함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나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또 기운이 난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다.
모법답안의 글. 모난 돌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 더 섬세하고 고유하게 감각을 다듬어야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해묵은 것을 새롭게 보는 시각이 있을 뿐. 사실은 없다. 해석된 사실이 있을 뿐.
내가 어떤 과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괴롭히는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
사건이 지나간 자리 관찰 하기 134
글에는 적어도 세 가지중 하나는 담겨야 한다.
인식적 가치
정서적 가치
미적 가치
좋은 글에는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있다.문제의식. 우선은 나를 향해 왜라고 질문하는 것
살면서 무수히 겪게 되는 별의별 일들, 소소하든 대수롭든 그것을 통과한 신체는 변화를 겪는다.
일상의 풍경과 생각과 느낌이 별처럼 은은히 차오른 글은 구쳬적으로 한 사람을 선명히 보여준다. 그럴 때 그 글이 다른 이의 경험이나 감정과 겹치고 공감을 낳는다. 남의 글에서 억눌러놓은 나를 보았은 때 미처 몰랐던 자기 욕망을 안아차렸을 때 사람들은 그 글을 좋은 글이라 느낀다.
문제의식은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다. 의문이다.
가슴에 물음표가 많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이 많다. 작은 자극에도 촉발 받고 영감을 얻을 것이기 때문.
파트 4. 추상에서 구체로
짦은 푼장이 무조건 좋을까. 단문쓰기 149
단문쓰기는 글쓰기의 기본.
독자 뿐 아니라 필자에게도 이롭다. 글쓰기는 생각쓰기다. 문장이 길면 생각이 엉키고 문법이 틀리기 쉽다.
문장이 길든 짦든 나는 이런 글이 좋다. 사유가 촘촘해서 문장이 흐름을 타고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건드리며 인식의 틀을 흔들어 놓는 글. 하나의 메시지 하나의 문장 하나의 단어라도 남으면 그건 좋은 글.
글쓰는 신체로. 베껴 쓰기 154
베껴쓰기는 무엇보다 엉덩이의 힘을 기른다.
그렇게 모은 글, 금쌀처럼 귀한 나의 일용할 양식을 담은 노트. 짬짬히 틈나면 읽는다.
신체에 각인된 그 문장 단어 금언 감각 뉘앙스 느낌 향기 리듬 파장이 글을 쓸 때면 슬며시 되살아 남을 느낀다. 영감을 주고 논지를 잡아준다.
마음에 걸리는 일. 모디브 찾기157
왠지 지나쳐지지 않는 일. 나와 불화하는 감정이나 사건은 모두 좋은 글감이다.
이렇게 글을 쓰고 나면 막연한 불쾌감에서 이유있는 반발로 사람에 대한 이해로 관계에 대한 문제로 고민이 성숙해질 수 있다.
나에게 그 화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나의 경험의 의미는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 글 쓰는 과정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추상에서 구체로 160
설명하거나 강요하는 어조는 피하자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
내글이 누구에게 도움을 줄까.글의 위치성 164
내 글을 들려주고 싶은 구체적인 대상을 정하고 써야 한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말이 특정 개인에게 와 닿을리 앖다.
내 글이 누구에게 가닿길 바라는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먼저 걸어가고 느낀 자로서 무슨 이야기를 건넬까?
글쓰기는 나와 닮은 영혼에게 말걸고 위로를 건네는 일이다.
더 잘 쓸수도 더 못 쓸 수도 없다. 힘 빼기 170
글은 삶의 거울이다. 끝맺기 173
계몽 도덕적 마무리는 위험하다. 상황을 단순화시켜버린다. 감정을 평준화한다. 글이 식상해지는 지름길이다.
글을 보면 삶이 보인다. 글은 삶의 거울이다. 글은 삶을 배반하지 않는다. 글에도 인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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