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자유죽음_삶의 존엄과 자살의 선택에 대하여

백_일홍 2022. 8. 17. 19:16

자유죽음_삶의 존엄과 자살의 선택에 대하여

 

장 아메리

 

목차

서문
1장 뛰어내리기 전에
2장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3장 손을 내려놓다
4장 나 자신에게 속하자
5장 자유에 이르는 길
옮긴이의 말
해제: 자유죽음론과 장 아메리 _김남시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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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심리학이나 사회과학과는 거리가 멀다. '자살학'이라는 과학이 끝나는 곳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 자유죽음을 밖에서 들여다 보려 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자 혹은 살아남은 자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자살을 선택한 사람 또는 자살을 감행한 사람의 내면에서 보려고 노력했다. 

나는 이 글을 쓰며 정신적인 곤궁을 느낄 때마다 샤르트르의 사상이 세운 크나큰 집에서 피난처를 찾곤 했다. ... 더 언급하고 싶은 책은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의 《죽음》이다. 마지막으로 장 배슐러의 《자살 》을 꼽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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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게는 죽음이라는 문제를 은밀하게 끌어안고 살아온 무척 길었던 내 인생 자체가, 좁게는 자유죽음이라는 화두, 박식한 친구들과의 대화 그리고 지금껏 살아오면서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준 개인적인 경험들이, 내가 이 책을 쓰는데 중요한 조건이랄 수 있는 자기 정당화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많은 대목에서 혹시 내가 여기서 자유죽음을 옹호하는 변론을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오해가 생겨날 수도 있다. 그 같은 오해는 단호히 말해두지만 삼가주기 바란다. 변론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은 자유죽음을 찾는 사람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살'이라는 현상만을 추적하는 과학적 연구에 보인 반작용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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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의 상황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역설적인지 아는가, 나는 다만 '자살 상황'이라는 쉽게 풀기 힘든 모순을 따라가 보고 그게 어떤 것인지 증언을 남기고 싶었을 뿐이다. 언어의 힘이 닿는 한 말이다. 

1976년 2월 브뤼셀에서 
장 아메리 


1장 뛰어내리기 전에

살아야만 한다면 그렇게 해. 나는 아니야! 나는 원치 않아 밖에서는 사회의 법으로, 안에서는 '자연법'으로 느끼도록 충동하는 강제 앞에 굴복하지 않을 거야. 사회의 법이든, 자연법이든 나는 더는 인정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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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나는 이 단어가 싫다. 차라리 나는 '자유죽음'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물론 자살이라는 행위가 참을 수 없이 강제된 상황 탓에 빚어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죽음의 한 방법으로서 자유죽음은 나사를 끼우듯 고정하려는 강제 안에서도 자유롭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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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곧 '자유죽음'을 바란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5 

자살을 이미 감행했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살학의 진단과 같은) 말은 공허할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일 따름이다. 너무도 완벽하게 유일해서 다른 것과는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 없는 자기만의 상황, 이른바 '인생 상황'이라는 것은 무어라 말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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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향해 마지못해 나아가는 인생과, 자유죽음이라는 자발적인 행위는 간단하게 비교될 수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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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을 찾는 사람은 벽을 깨고 나온다. 여기서 벽이란, 내가 이미 암시했듯, 생명의 논리를 말한다. 생명의 법칙이라고 해도 좋다. 어쟀거나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선택한 게 아니라, 그 어떤 높은 힘에 의해 우리에게 강제되어 있다는 말이다. 생물학자도 행태 연구가도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다. 물리학자조차 같은 소리를 한다. 이론물리학의 최신 연구는 전통의 생기론과는 다른 결론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크 모노는 생명체와 인간이 단순히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틀림없이 생명 법칙에 따라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리 정해져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 법칙'이 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일상생활의 우리 행동이 이 법칙에 의해 미리 '프로그래밍'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생각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속에도 녹아들어가 있다. 

"뭐 다 살려고 하는 일이죠" 자신이 저지른 추악한 일들을 두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자주 쓰는 말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묻자. 살아야만 한다고? 일단 태어난 이상 살아야만 한다고? 뛰어내리기 직전의 순간 자살하려는 사람은 자연의 법칙을 깨뜨린다. 

자유죽음을 찾는 이는 누가 묻기도 전에 먼저 목청껏 소리를 지른다. 아니야! 혹은 등중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한다. 살아야만 한다면 그렇게 대, 나는 아니야! 나는 원치 않아. 밖에서 사회의 법으로, 안에서는 '렉스 나투라에(자연법)"로 느끼도록 충동하는 강제 앞에 굴복하지 않을 거야, 사회의 법이든, 자연법이든 나는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어. 

이게 바로 뛰어내리기 직전의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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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이라는 문제는 심리학적 접근으로 풀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생명 법칙이라는 게 깨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생명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마당에 심리학이 다 무엇인가. 심리학의 상위 개념을 이루는 이 '생명 법칙'이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 이런 개념이 필요한 이유는, 자기 보존이나 번식 본능이라는 사실에만 의존해서는 생명 욕구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한 가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다름 아니라 법칙이라는 논리적 판단은 공허하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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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없으며, 죽음이 들어서자 마자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2장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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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고 병들어 죽는 자연적인 죽음이 반드시 '자연스로운 것'은 아니다. 순발을 묶어두고 자연적인 죽음만 기다리라고 하는 게 훨씬 반자연적일 수도 있다. 자유죽음을 택하려는 사람은 자연적인  죽음이 가지고 있는 반자연성을 미리 감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을 시도했거나 하려는 사람이 자유롭게 택한 죽음의 자연성을 더 이상 부정해서는 안된다. 이로써 세상이라는 전체 그름은 확 뒤바뀐다. 

이제는 죽음의 얼굴도 다른 용모를 띤다. 죽음은 일방적으로 몰아내고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방적인 몰아냄으로써 죽음이 왜곡되고 비틀려지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편견 없이 죽음을 바라볼 때 우리의 지평 앞에 새로운 휴머니즘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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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일로만 여겼던 자살이 내 인생 안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띠고 들어옴으로써 죽음을 자연적인 것으로만 보았던 생각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된다. 다시 말해서 '자연적'인 사건으로만 알았던 죽음이 돌연 주관의 선택 문제로 떠오르는 것이다. 

자유죽음을 알게 됨과 동시에 우리는 '에셰크(échec)'""라 는 것을 경험한다(이런 앞을 두고 깨달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죽음 이 무엇인지 하는 깨달음을 우리는 결코 얻을 수 없다. 혹 근접할 수 있 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느지막한 말년에나 가능한 일이다). 왜 독일어 텍스트에서 프랑스어 단어를 써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 겠다. 이 말은 실패한다. 좌절한다는 뜻을 가진다. 하지만 비슷 한 뜻을 가진 그 어떤 독일어 단어도 'échec'를 발음할 때의 독 특한 음색을 따라오지 못한다(묘하게 의미론상으로도 딱 맞아떨어 지는 독일어 단어를 찾기 어렵다). 그 '건조한 음색 (son ton sec)'으로 '레셰크(L'échec)'는 마치 도끼날을 맞은 것처럼 똑 부러지는 분 위기를 맛보게 한다. 되돌릴 수 없는 총체적인 실패의 안타까 움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낼 수 있을까. '에셰크'는 운명적인 단어다.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쏜 상인은 '에셰크'를 당했다. 바꿔 말하면 이는 다음과 같은 뜻이다. 죽음이 상인을 세상으로부터 몰아내기 전에 이미 세상이 그를 버렸다. 그가 세상을 버린 게 아니다. 원칙적으로 따지고 든다면 사람은 '에셰크' 속에서도 살 수 있다. 물론 아주 치욕적인, 말하자면 '비자연적'인 꼴을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남자는 '에셰크'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 법이 자유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는 두 가지 개념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앞장에서 이미 암시했던 것이지만, 지금껏 너무 큰 대가를 치러야 하기에 유보해왔던 것이다. 인간성과 존엄성, 이게 바로 그 두 개념이다. 자유죽음은 인간의 특권이다. 85

1975년에 발표된 기념비적인 책 《자살》, 내가 보기에는 지금까지 '자살학'의 총결산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장 배슐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자살은 개별적인 사례로 보나 보편적으로 보나 인간적이다. 동물 애호가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 각오를 하고 하는 말이지만, 동물은 분명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 물론 주인 의 무덤을 지키며 굶어 죽은 개나, 여주인보다 오래 살지 않으 려고 소동을 피웠다는 고양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은 것 은 아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감동적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검증이 가능한 경우, 그런 이야기들은 모두 상상력의 산물임 이 밝혀졌다.......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도 스스로 목숨을 끊 는 일이 없다. 일곱 살 이하의 어린아이가 자살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자살 미수자들 가운데 자신의 인간적인 성격을 말살할 정도 로까지 의식을 망가뜨린 사람은 없다."

두번째 개념을 살펴보자. 이 개념은 우리가 흔히 '존엄성' 혹은 '명예'라 부르는 것이다. 구스틀 소위가 소중히 여겼던 장교로서의 품격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명예 수칙을 어겼다고 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장교로서 삶을 지속할 수 없다고 본 이런 명예심은 특정 사회가 만드는 것이다. 부자로서 자신의 신분이 자랑스럽기만 했던 저 곡물 상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유층으로서의 신분을 잃고 살아갈 수 없었기에 그는 파산을 당하고 나서 치욕적인 삶보다는 죽음을 선택했다. 토마스 만이 그려낸 인물 민헤르 페퍼코튼(Mynheer Peeperkorn)15에게 있어 그의 명예는 남자였다. 그의 바짝 선 성기였다. 그러나 그의 자부심은 발기불능상 태에 빠지면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이런 치욕은 우리가 앞서도 다루었다시피 죽음으로써만 지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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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바로 인간성과 존엄성이라는 것을 가지고 '에세크'에 맞서는 것이다. 인간은 '에세크'를 참아낼 수 없다. '에셰크'로 추락하고 나서 반쯤 으깨진 몰골로 사람은 바로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떨쳐 일어나 죽음을 자신에게로 잡아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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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처한 상황이 어떤 조건 아래서 '에셰크'라고 규정되는지를 판가름하는 심판관은 곧 그 개인의 주관과 사회이다. 양쪽의 판단은 엇갈릴 수밖에 없다. 특히 자살의 경우에는 더 심하다. 우선, 사회는 종족 보존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살을 거부한다. 여기서 다시 문명이라는 것은 종교와 도덕을 덧붙인다. 이때 심리학자와 정신과 전문의는 문명에 봉사하는 충직한 하인이다. 

이와 반대로 주관은 자신의 권리를 고집한다. 주관은 '에셰크'를 당한 일개 부품으로 사회에 설치된 채 때만 되면 먹고 싸는 존재로 살아가기를 거부한다. 주관은 사회를 무시한다. 자신의 자유죽음으로 불행해진 가족도 무시하기 일쑤다. 주관은 자신의 존엄성만 더욱 강화할 따름이다. 홍수가 일어나든 말든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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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모르는 것은, 아니 사회의 계속된 존립을 필수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한, 알아서는 안되는 것읏, 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자살을 감행하는 사람에게 있어 자유죽음이란 모든 죽음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것이지만, 자유죽음은 지극히 자연적이다. 그것도 드높은, 유일하게 우리 손으로 설정한 기준, 즉 존엄성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 높은 곳에서 존재의 욕망 덩어리 즉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에 어디까지 저항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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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싸고, 죽이고, 쾌락에 몸을 떨며, 죽임을 당하는 존재, 그저 무서움에 부들 부들 떨 뿐이다. 도대체 왜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그저 아무것도 아닌 없음으로 돌아가면 왜 안 되는 것인가? 

'구토'는 인간이 가진 기본 상태 가운데 하나다. 구토는 에로스와 마찬가지로 숨긴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에로스는 사회로부터 인정받는다는 점이리라. 에로스는 살아 있는 자들의 논리, 즉 종족 보존이라는 논리와 맞아떨어지지만, 구토는 종족 보존 본능에 충실한 문명 패거리가 아우성을 치며 부정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지금 내가 확인하고자 하는 점은 다만 다음과 같은 것일 따름이다. 자유죽음으로 이끄는 '에셰크' 의식에는, 이 '에셰크'가 살아 가면서 겪는 것(수험생의 불합격)이든 인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에셰크'(결국 인생이라는 집은 무너지고 말리라는 바꿀 수 없는 사실) 든, 먼저 구토의 감정이 선행돼야만 한다. 평범하게 살라는 말 은 '에셰크'를 끌어안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리는 이야기나 다름 없다. 사회는 말 잘 듣는 온순한 사람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자살하기로 뜻을 굳힌 사람의 용기는 만용이 아니다. 정확하게 이해했다. 이 용기에는 언제나 일말의 부끄러움이 묻어 있다. 살아야만 한다는 인생 논리는 슬적 부끄러움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고 뛰어내리기 직전의 사람에게 묻는다. 왜 참아낼 수 없느냐고, 왜 끝까지 버티지 못하는 거냐고, 다른 사람들 좀 보라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견뎌 내고 있는데 어째서 너만 야단법석을 떠느냐고 찔러댄다.

동시에 자살자는 자신을 저주하는 사회 앞에서도 몸을 띤다(그는 소수파의 일원이 별을 따름이다. 말하자면 인생이라는 제국이 점령한 식민지의 노예였 올뿐이다). 이제 그는 안다. 사회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를 구출하려 들 것이라는 사실을! 요즘 표현으로 이야기하자면 다시 독점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행사할 게 틀림없다. 그러지 않아도 어려운 것을 왜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일까? 해결의 방향이 보이지 않는 모순을 끌어안고 존재를 향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자신의 존엄성으로 모순을 품어 안았으면 그만 아닌가? 마지막으로 자살하자 장 배슬러의 말을 들어보자. 다시금 이야기하지만 그는 인생 논리의 옹호자인 동시에 실존 염세주의자라불러 마땅한 인물이다.

'자살과 관련해볼 때 문명은 그 자살자가 받아 합당한 가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자유죽음을 부끄러운 짓으로 비난하 며, 심지어 이웃들은 자살자와 직접 살을 맞대고 산 주변 사람 들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흘겨본다. 교회나 국가와 같은 제도 권은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다그치기를 삼간다. 하지만 여 론은 자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간격을 좀체 좁히려 들지 않는다. 여론에는 낡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기독교 전통에서 비롯된 금령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역사를 일별하면 사회가 자유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경우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반대로 인생 논리는 승리에 승리를 구가해왔다. 논리적으로 맞는 방향이었다. 인생 논리는 본능일 뿐 아니라, 내가 앞장에서 보여줬듯, 논리라는 원칙에 들어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 곧 존재와 인생의 이성은 도무지 없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비교라는 것은 있는 것을 있는 것과 견줄 때 가능한 것일 따름이다. A=A라는 동일률은 있음의 근본 경험을 담아낸 논리다. '없음= 없음'이라는 등식은 아무것도 말해주는게 없는 반이성적인 표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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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존엄성으로 모순을 품어 안았으면 그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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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즉 존재와 인생의 이성은 도무지 없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비교란 있는 것을 있는 것과 견줄 때 가능한 것일 따름이다..... 결국 자유죽음은 자기부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긍정인 동시에 부정이다. 바로 그래서 어처구니없는 모순이다. 자유죽음을 이 모순으로 존재한다. 자유죽음을 행하는 자는 인생 논리를 긍정하는 인격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결과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인생 논리를 부정한다. 인생 논리라는 사슬을 박차고 나오면서도, 여전히 그 사슬에 묶여 있다. 그는 천수를 다하는 자연적인 죽음을 기다리려 하지 않는다. '에셰크'의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은 반자연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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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그림자가 우리를 덥칠 때마다 자연이 자연인 동시에 반자연이 되며, 있는 게 없어지는 저 모순의 등식이 고개를 든다. 결국 동일률은 해체된다. 아무것도 아니며, 있지도 않은 것이다. 그저 없는 게 아니라, 즉 사라진 게 아니라, 철저한 허무다. 차라리 허무라는 원칙이 희망이라는 원리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나 할까? 

나는 역사와 정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람직한 경우가, 드높은 용기로 성취해낸 정의가 희망에 매달려서 이뤄졌다고 결코 믿지 않는다. 자신을 없음에 던지는 행위, 이게 역사를 끌고 온 원동력이었다. 

지금 당장에 문제가되는 것은 자유죽음을 다른 모든 죽음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동시에 비자연적인 것으로 복권시켜주는 일이다. 특히 사회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만 한다. 개인과 지나친 간격을 두고 개인의 에셰크를 포용하지 않는 사회야말로 자살의 온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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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죽음을 택할 자유를 인간의 양보할 수 없는 권리로 인정받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작금의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으리라. 사회는,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거나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 시도 혹은 계획 자체로 이미 성체를 포기한 것이라는 음험한 구실을 내세우며 '파문'해 버릴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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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셰크'와 욕지기나는 세상, 이 두 개가 죽음이라는 토사물을 낳는 주범이다.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은 이 두 현상에서 존엄성을 박탈해버렸다.학문들은 이런 현상을 질병으로 간주하고 질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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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내가 선택한 죽음은 나에게 있어 자연적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내 존재와 행위를 두고 사회가 왈가왈부하며 판단하는 것에 따르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자연적인 죽음을 택한 것이다. 사회가 내리는 판단의 본질은 기능성에 있다. 자신의 직업활동을 마지못해 불충분하게 수행한다거나, 심지어 전혀 하지 않고 침대에서 뒹굴며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우울증 환자는 사회에서 불필요한 인간, 즉 기능하지 않는 인간이다. 이익을 추구하기에 바쁜 사회는 그래서 그런 인간을 '치료'하려 든다. 정신분석 상담을 통해 빙빙 돌려가며 하나마나한 소리를 일삼다가, 전기충격을 주거나 약물요법을 쓴다. 이런 모든 방법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면, 사회는 그를 격리해 어딘가에 가두어 버린다. 

사회적인 편견이 없이 죽음을 바라볼 때 우리의 지평 앞에 새로운 휴머니즘이 떠오른다. 희망이라는 원리를 놓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로 모순이지만 피할 길이 없는 허무라는 원칙도 함께 인정하는 게 우리의 새로운 휴머 니즘이다. 자살자는 영웅과 마찬가지로 모범적인 성격을 띤다. 세상의 피난민은 세계 정복자보다 못난 게 아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보면 더 낫기까지 하다. 기능성을 위주로 끊임없이 변하는 법칙을 제시하는 다수는 더 이상 최후의 발언권을 갖지 않는다. 통찰과 배려라는 관용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발언을 함께 저울대 위에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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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자살은 가난과 질병과 마찬가지로 치욕이 아니다. 자살은 더 이상 침울해진 정서를 가진 사람이 저지르는 비행이 아니다(중세에는 심지어 악마에게 사로잡힌 영혼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디까지나 자살은 존재를 몰아붙이는 도전에 맞서 그에 응전 하는 일종의 대답이다. 세월이라는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익사하기 직전, 지르는 단말마적 고통의 비명이 자살이다.

우리의 자아는 조각조각 끊어져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기억의 색은 누렇게 바래고, 우리의 현실은 저 끝모를 바닥으로 빠져 든다. 자연 죽음으로서의 자살이라는 게 정확하게 무엇일까? 존재를 강타하며 파괴하는 '에셰크'에 맞서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게 자살이다. 곡물 상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그저 치욕을 감수하고 사회가 그 변화무쌍한 변덕 속에서 그의 행위를 잊어주기를 바라는 게 낫지 않았느냐고? 아니다. 그가 택 한 방법은 자신의 '에셰크'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 것일 따름이다. 시험에 떨어진 수험생이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 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실패자가 될 위험을 예방한 것일 따름이 다. 우울증 환자가 자신의 메말라버린 세계관 때문에 자살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 세계관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적어도 그에게 인정을 해줘야 한다. 그의 선택은 이성적인 것이었다고!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그에 맞게 행동한 것일 뿐이라고! "그래도 끝까지 살아야만 해." 저잣거리를 떠도는 세속의 지혜는 이렇게 꾸짖는다. 아니다.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 어차피 반드시 찾아올 어느날 더는 살 수가 없어서, 아니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저 꾹 참고 그날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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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것만 못한 삶이라면, '에셰크'한 상태에서의 인생이 더욱 추한 것이라면, 존엄성과 자유를 가지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더 이상 인간답게 살 수 없는 경우, 존엄성과 자유는 곧 율법이 된다. 주체는 완전한 주권을 가지고 결정을 내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사회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선택과 결정은 오로지 당사자 개인의 문제다. 그는 자신의 독자성을 위해,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고유한 것이지 않았던 생명이라는 고유 재산을 파괴한다. 손을 내려 놓는다.


3장 손을 내려놓다

나와 내 몸을 똑 같은 나와 내 몸이 파괴한다. 대체 이를 어찌 이해해야 좋을까? 나는 앞서 나의 자아에 반해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 내 몸의 부분들, 즉 심장, 위장, 신장 등을 '외부 세계'라고 말했었다. 사실 이 말에는 보충해야 할 점이 많기만 하다. 실제로 외부와 내부,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지금 들여다보는 저 안이라고 하는 것 등은 서로 겹치고 맞물린다. 그러면서도 서로 멀리하며 피하려 든다. 그래서 서로 전혀 모르는 것처럼 낯설게만 느껴진다. 나와 내 몸의 관계는 아마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 가운데 가장 풀기 어려운 복잡한 신비리라. 우리의 주체라고 하는 것은 그 정확한 정체가 뭘까? 우리가 언제나 항상 모든 일의 중심에 세우고 싶어 하는 '나'라는 자아는 어떻게 이해해야 좋은 것 일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몸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몸은 우리의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에서, 사르트르가 표현했듯, "무시당하는 것(le négligé)", "침묵 아래 간과되는 것(le passé sous silence)"일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두고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몸은 나의 자아를 이루는 일부면서도 저 밖 어딘가에 있다. 세계라는 공간의 그 어딘가에 있으면서 자아의 투사(Pro-jekt)를 이루기 위해 “부정되는 것(se néantise)"이 우리의 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있으면서,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몸은, 내가 앞서 설명했듯, 다른 것, 외부 세계에 속하는 게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낮 설기만 한 몸을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볼 때야 비로소 의식한다 (이를테면 과학 공부를 통해 몸의 기능을 알게 되면 우리는 몸을 의식한 다). 혹은 몸이 우리에게 부담이 될 때 비로소 그 존재를 깨닫는다. 왜 흔히 고통 때문에 '껍데기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말을 쓰지 않던가. 건강할 때는 의식조차 하지 않던 몸이 조금만 아프면 거추장스럽고 빠져나가고 싶기만 한 것이다. 그만큼 몸은 적대적인 것인 동시에 내 것이다. 벗어던지고만 싶은 껍데기는 여전히 우리의 일부, 즉 나라는 '자아'를 이루는 한 부분이다. 몸으로 세상을 겪는 동안만큼은 몸은 "무시당하는 것'이다. 하늘을 향해 높이 뛰어오를 때, 몸은 공기이자 날아오름이다. 스키를 타고 신나게 활강할 때면, 몸은 휘날리는 눈보라며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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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손을 내려놓는 사람은 원칙적으로 타인의 의지에 자신을 맡겨버린 삶과 다르다. 타인의 의지에 따라 일어나는 죽음은 사건인 반면, 스스로 손을 내려놓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자유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인은 언제까지 살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한다. 남의 구원을 바라는 따위의 운명에 대한 기대를 전혀 갖지 않는다. 아마도 거울 앞에서 자기 자신과 나눈 대화, 남에게 이러쿵저러쿵 심판을 받은 나를 몰아내버리는 대화가 이뤄지고 난 다음, 드디어 자유롭게 선택한 순간이, 손을 내려놓을 냉엄한 순간이 찾아온다. 


4장 나 자신에게 속하자

이런 식으로는 안 된다. 내 말은, 한편으로는 사회가 냉혹 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자발적으로 인생의 고리를 끊고 나가겠다고 해서 필요 이상의 과열된 관심과 근심 으로 소동을 떠는 이중성으로는, 인간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는 것이다. 개인이 사회의 소유물인가? 개인으로서의 나는 이러저러한 때에 사회가 내세우는 요구를 거절할 뜻을 암시적으로나마 보여주지 않았던가. 개인적인 결단으로 이미 죽을 각오 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사회의 당위성만 요구한다는 것이 될 법이나 한소리인가? 그래서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의 답은 꼭 찾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에게 속하는 존재인가? (172)

아마도 가장 먼저 손을 들고 나설 사람은 독실한 신앙을 가진 기독교도리라. 그는 정확한 답을 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주님에게 속한 존재다. 주님 덕분에 생명을 허락받았으며, 언제 다시 생명을 거두어들일 것인지 하는 문제도 주님만이 아신다. 이것이 그 주장의 골자다.

"우리는 물론 죽고 싶을 때 죽게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릴 권리를 가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언제나 단서가 붙는다. '주여, 제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우리는 이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노예를 부리는 주인처럼 우리 위에 군림하시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곧 우리의 아버지시다.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사랑과 지혜로 우리를 돌보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고통받게 버려두시는 것은 우리의 죄를 씻어 하늘의 은총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단련하려는 뜻에서다."

나에게 허락된 모든 힘을 다해 격렬하게 항의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인용한 그 말을 한 이 불행한 남자가 자신의 결단으로 죽음을 택할 가능성이 열려 있었음에도 권력의 주구(走狗) 가 강제하는 죽음을 당했다면, 그것은 물론 그의 선택이다. 이런 죽음을 두고 순교자의 죽음이라고? 그렇게 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차라리 나는 자유죽음이라는 인간적인 존엄을 무시하고 그저 자신을 제물로 바친 헛된 죽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 한다. 우리더러 군홧발이나 불구덩이에 희생당하라고 하면서,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사랑과 지혜"라며 그리스도의 신을 들먹이는 그의 말이야말로 내가 보기에는 진짜 신성 모독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속한 자로서 신에게 자신을 제물로 드려야만 한다. 개인적인 결정, 다른 사람은 받아들이기 힘든 그만의 선택을 모두가 지켜야 할 신의 가르침으로 추켜세우는 것은 월권인 동시에 신을 모욕하는 일이다. 자신이 믿는 신에게 귀속함을 인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속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삶이냐 죽음이냐 하는 선택은 그의 자유에 맡겨진 것일 따름이다. 물론 이처럼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 역시 결국에는 허망한 환상일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가지고 어떻게 살고 어떤 때죽으며 무엇을 실현해야만 한다고 앞장서서 규정할 권리는 갖 고 있지 않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따위의 명령은 주제넘은 월권일 뿐이다. 그래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죽음과 관련해 종교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회의 요구와 똑같은 특성을 가졌다. 사회든 종교든 인간에게 자신의 소유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결정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사회와 종교는 인간에게 결정의 자유를 포기하도록 요구한다. 칸트도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의무라는 것을 범 주적으로 생각해본 끝에 조그만 시골 교회 목사나 위대한 신학 자들처럼 자유죽음을 비난했다. 말인즉 자유의지로 결정하지 말고, 신이 부여한 의무 또는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에 순종하 라고 칸트는 타일렀다. 의무? 종교가 인간에게 간섭하며 요구 하는 의무라는 것은 사회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전 에 교회는 자살한 사람한테는 교회 뜰에 기독교식 묘지를 마련 해주는 것을 거부했다. 교회의 이런 태도는 원시부족의 그것과 똑같다. 원시부족은 자살자의 시체를 무슨 불결한 것인 양악 령이라도 쫓아내듯 서둘러 부족 바깥으로 내몰지 않았던가. 하 지만 자살을 관용하고 묵인하는 사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심 지어 상황에 따라서는 자살을 일종의 의무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 좋은 예가 일본의 무사 계급이다. 이들은 자살을 사회적 현 상으로 이해했다. 이를테면 특정 계파의 존속을 위해 개인의 희 생을 요구하는 셈이다. 어떤 조직의 존립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경우, 개인은 할복자살을 피함으로써 조직을 구하기도 했다. 그 러나 이런 자살을 두고 자유죽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가 보 는 한, 몇몇 극소수의 예외, 이를테면 철학 학파라든지 철학자 개개인(에피쿠로스학파, 세네카, 디드로' 등)을 제외하면, 자유죽음 을 그 본연의 모습 그대로 인정한 경우를 찾기가 어렵다. 자신 의 자유의지로 택하는 죽음은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문 제일 따름이다. 물론 여기에 사회와 관련이 전혀 없다고 할수 는 없으나, 결국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 이를 두고 사회가 할 말은 없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아직 자살을 저주하는 비인간적인 정신발달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종교의 율법과 금령이 구속력을 갖던 시절처럼, 자유죽음을 범죄로 간주하고 있을 따름이다. 또는 어떤 사회의 규범이 뻔뻔하기 이를 데없 을 정도로 솔직한 경우, 아예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하기도 한 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물질로서의 인간, 노동력으로서의 인간일 뿐이야. 그래서 자살의 뜻을 품은 사람을 무슨 노예 취 급하듯 하면서 혹시라도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면 엄벌에 처하
겠노라 으름장을 놓곤 한다. 오늘날 공공질서의 수호자로 임명 받은 사회학, 정신분석학, 심리학 등의 행태를 보라, 자유죽음을 무슨 몹쓸 병처럼 취급하지 않는가. 자살을 다루는 사회의 모든 이론은 한결같은 목소리를 낸다. 이들은 잠재적인 '자살자'가 그 뜻을 자유죽음으로 실행에 옮기는 것을 막으려 혈안이 된다. 이들은 말한다. 생명은 유일한 자산이라고! 어떻게든 지켜야만 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내세워지는 이유는 아리송하기 만 하다. 신이 허락해준 생명이기에 지켜야만 하는 것일까? 인생이라는 사회적 현상에 무슨 대단한 형이상학적인 가치라도 부여했기 때문인가? 그러나 이런 물음에 돌아오는 답은 아무것 도 없다. 그 형이상학적인 가치라는 것도 알고 보면 생물학에 지나지 않는다. 매일같이 그리고 어디서나 늘 새롭게 생성(늘 태어난다)되며, 또 취소(죽어 없어진다)되는 게 생명일 따름이다. (178)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회 쪽에서 자살을 바라보는 폭압적인 적대감이다. 성공한 것이든, 구조라는 방해를 받아 실패한 것이든, 자살을 기존의 가치 체계 밖으로 한사코 몰아내려는 근원적인 반감을 어찌 이해해야 좋은가? 자살을 기도한 사람을 심폐소생술까지 써서 굳이 살려놓고 비난과 책망의 화살은 왜 날려대는가? 자 살은 죄악이라는 케케묵은 생각이 여전히 그 효력을 발휘하는 게 틀림없다.

물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심리학 이론이 잘못된 것 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기본적인 사실을 놓치고 스쳐 지나 갈 뿐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존재다. 사회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물망을 뒤집어씌우지 않고 생각해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생물학적인 숙명이라는 것과 따로 떼어 볼 때, 인간은 본질을 드러낸다. 살아야만 한다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고전적'인 정신분석 이론은 정통성에 얽매이지 않는 관찰자의 눈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전제에 서부터 자살을 배제하고 오로지 전체만을 구하려 진땀을 흘리 는 작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신분석이 말하는 타인을 겨눈 증오로서의 자기 파괴는 억지로 끌어다 붙인, 말이 안 되는 논리다. 자유죽음에 있어 가 장 먼저 살펴야 할 본질은,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결단으로 선택한다는 점이다. 정신분석 이론이 자꾸 자기 공격성이라는 쪽으로 논의를 몰아가는 이유는 이 본질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나는 앞 장에서 이미 죽음본능이라는 개념을 다루면서 그보다 훨씬 덜 도전적인 '죽음에 이끌리는 성향'이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한 바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추가할 점은 다음과 같은 것일 뿐이다.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직관으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점은, '타인을 향한 공격'과 '손을 스스로 내려놓는 행위'가 전혀 별개의 행동 방식이라는 사실이다. '자살'이라는 전적으로 잘못 된 표현으로 나타내진 행동이 살인 충동을 대체하고 보상하기 위한 행위라는 지적은 말도 되지 않는다. 또한 산 사람을 죽이는 일은 자신의 인생을 강화하려는 가장 극단적인 선택이다. 엘 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는 심리학과는 전혀 별개로, 타인을 살해하는 행위를 인류학에 기반을 둔 개념 "승리를 구가하는 생존자(Triumphierend Überlebender)"로 적절하게 해석했다. 나 는 그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죽음을 향해 손을 내려놓는다는 것, 혹은 그저 자기 파괴를 하는 행위는 자아라는 현상의 영역에서 보면 살인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심리학이나 뒤르켐과 같은 사회심리학적 접근으로는 자살자의 속내를 알아낼 수 없다. 스스로 자유죽음을 택하는 게 개인이 아니라, 사회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정신 상태가 몽롱한 게 틀림없다. 저항할 무기를 갖추지 못해 무방비로 사회의 요구를 따라야만 하는 개인을 자살로 내모는 것이 사회라는 지적은 문제의 본질을 잘못 파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나는 심리학이든 사회학이든 모든 자살 연구가 사회라는 이름으로 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자 한다. 기존사회질서를 아주 날카롭게 비판하는 연구들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자살자가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를 발견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를 외면하고 사회의 관점에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출발부터 잘못된 접근 방식이다. 개인의 고유한 내면, 좀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내면에서 우리는 자살자와 만나야 하는게 아닐까.

자유죽음을 일종의 호소로 해석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모든 자유죽음 계획은 그게 끝장을 본 것이든, 마 지막 순간 낚아챔을 당해 실패한 것이든, 도와달라는 외침이 아 니다. 그것은 일종의 메시지다. 이런 메시지는 누군가를 상대로 쓰는 게 아니다. 누구를 향해 외치는 비명도 아니다. 아무런 표시가 없이, 묵묵히 건네지는 메시지는 생명 논리와 존재 논리에 거절의 뜻을 분명히 하고 경계를 넘어서는 그 순간에서조차, 의식을 마지막으로 불사르는 그 순간에서조차, 우리가 타인과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이런 모든 것은 자신을 끝장내버린 사람에게 아무 관련이 없다. 다만, 쓸쓸하고 곤궁한 기분으로 자살자는 타인으로부터 눈길을 거둘 뿐이다. 이제는 하루라는 시간 안으로 걸어 들어가 아등바등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아듀' 하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제 다시 만나는 일은 없으리 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어깨너머로 돌아다보며 타인에게 한 마디 건넨다.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을! 그 말이 귀에 들어가리라 는 보장이 없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저만큼 떨어져 가고 있 는 타인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미 오래전에 폐기되었다고 믿었던 철학의 주관적 관념론이 새롭고도 다른 조명을 받는다. 세계는 곧 나의 생각이다. 타인이라는 존재도 내가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지워짐으로써 생각도 지워진다. 세계와 타인이 사라진다. 자살자는 곡예사처럼 아슬아슬하게 생각의 균형을 맞추려다가 추락한 사람 이다. 그러니까 그는 균형 동작을 완성하지 못했다. 자신의 행동으로 타인에게 말을 건다. 타인은 자살자와 함께 사라지면서도 계속 세상에 머물러 있으리라. 자살자는 '머릿속의 세계'가 사라짐과 동시에 계속 존재할 것이라 굳게 믿는 것처럼 호소한다. 자살자는 자신의 무덤 앞에서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그럼에도 이제 곧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임을 아는 톰 소여, 마크 트웨인의 주인공 소년 톰 소여다. 이런 모순 때문에 죽음은 실제로 사르트르가 이야기하는 "비틀어버림"이다. 왜곡된 것이며 전도된 것이다. 그렇지만 사라짐과 동시에 계속 존재한다는 것은 그 모순에도 유일한 진리다. 마치 신앙인의 신처럼 모든 모순을 끌어안음으로써 더는 모순이 아닌 것으로 끌어 올리는 진리다. 자살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타인에게 메시지를 전하려 말을 걸면서 타인도 자신의 죽음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소유물이었던 세상을 몰락하게 만든다. 모순은 자살자의 의식 속에서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자살자는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것인 동시에 자기 자신에 속함으로 세계에 속한다. 즉, 세계는 그에게 속하는 것인 동시에 그는 세계에 속한다.

죽음으로 세계가 멈추게 되면 자살자가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이 입증되는 셈이다. 세상으로 보낸 그의 메시지는 결국 죽음의 비(非)세계, 있지 않은 세계 속으로 허망하게 사라질 따름이다. 자신이 죽으면 없어질 세상이 그래도 남아 있으리라는 일말의 희망을 저버리지 못해 보냈던 메시지는 그저 허공에 흩어지고 만다. 에르빈 슈텡겔이 말했던 것처럼 자유죽음 이 "호소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심리학이라는 세계의 공간에 머무르는 셈이다. 호소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살자의 내면에 있는 모순, 그를 초월하는 모순, 아마도 안과 밖을 넘나들며 인간의 근본 조건으로서의 선험적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심리학의 영역을 벗어나야 한 다(심리학은 살아 있는 자의 학문이다. 실증은 아닐지라도 객관성을 요구하는 학문이다). 심리학을 버린 우리는 이제 서로 양립할 수 없 는 모순이 실재한다는 존재론의 어둑한 사변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함께 사라질 줄 알았으나 계속 존재하며, 존재하는 줄 알았더니 사라졌다. 이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풀 수 있을까?

벌써 우리의 정신은 주관적 관념론의 개념이 가진 공허함을 밝혀내고 말았다. 내가 없 으면 세상도 없으리라는 것은 고도의 기만이자 하나 마나한 진부한 소리였다. 우리는 주관적 관념론의 공허한 개념을 거부 해야만 한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죽음과 함께 세계는 멈춘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계가 계속 존재하리라는 것 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계는 계속 존재하면서 존 재하지 않기를 거듭할 뿐이다. 엔트로피가 인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종말을 세계에 안겨주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우리의 유해를 해부하고 화장하며 매장하리라. 전철과 비행기는 계속 그 소임을 다하리라. 인간은 계속 짝을 지으며 쾌락에 겨운 교 성을 지르거나 별 재미없이 심드렁하게 부부관계를 치르면서 차마 서로에게 요구할 수 없는 일들을 끊임없이 새롭게 저지 르리라. 자살자, 더 정확하게는 '자연적인 방식'으로 죽는 것처 럼 꾸미고 위로와 격려를 구하며, 죽음을 자기 자신에게서 자꾸 미루는 사람은 두 가지를 정확하게 안다. 세상은 몰락해 없어지리라는 것, 그래도 세상은 계속 존재하리라는 것, 이 두가 지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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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자는 천재만큼이나 들물다. 비록 불쌍한 개를 보듯 아무도 눈물을 흘려주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살자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공허함 속으로 메시지를 보내면서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든 학문에서든 현실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단호하게 경쟁하는 적수가 자살자이다. 그는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을 안다. 

어떤 남자가 퇴근하고 집에 가기 위해 어스름한 골목길을 지나며 이렇게 말했다. "다 쓸데없는 일이야, 이토록 수고를 들 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가 꿈꿔온 것은 모두 환상이었어. 아무리 실현하려 노력해도 초라해지기만 할 뿐이야, 이 허튼 일에 끝장을 맺고 말자." 다만, 집에서 누군가 기다리는 게 걸 릴 뿐이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빵을 달라고 울먹이는 아이들 의 얼굴이 밟힐 따름이다. 감기에 걸려 코를 훌쩍이며 내일 날 씨를 걱정하는 식구를 생각하는 발걸음은 이내 빨라진다. 이처 럼 자살을 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일지라도 일상에 휩쓸리기 마 런이다. 혼탁한 물속에서 빠지지 않으려 버둥거리며 헤엄을 친 다. 그는 자신의 고독조차 온전히 체험하지 못한다. 그저 나날 이 곤궁해지고 갈수록 처량해질 뿐이다. 같은 시간 같은 생각을 하며 발길을 재촉하고 있는 옆 사람보다 더 처참함을 느낀다. 서로 다를 게 조금도 없음에도 말이다. 그저 지치고 피곤해 모 든 것을 내려놓고 싶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한숨을 쉰다. 내일도 모레도 언제나 달라질 것은 전혀 없다고 절망한다. 끝장을 내기로 한다. 다음 날 아침 이웃은 그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속한 사람이었으며,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다. 명시적으로 말을 했든 아니든, 인생을 일종의 가치로 미리 전제 하고 들어가는 심리학의 사실에 맞서 그는 오직 자신에게 알맞은 결단을 내렸다. 물론 이로써 심리학의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 심리학의 사실을 새롭게 조명한 것이다. 그 의 행위는 사회라는 전제, 그 일반만을 주목하는 심리학에 메시지를 보낸 것이나 다름없다. 그저 인상에 휩쓸려 사는 비(非) 위에 자신의 뜻을 분명히 전했을 따름이다. 홀로 그리고 아마도 자유롭게 사는 사람일지라도 타인 없이는 지탱할 수 없기 때문 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고 그의 행위가 '나르시시스트의 위기' 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가? 세상이 그에게 알랑거리며 마음에 드는 모습을 되비쳐주지 않 는다는 게 그의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거꾸로 그는 거 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일 뿐이다. 친절하 든 아니든 그런 것은 상관이 없다. 그는 오직 거울에 비친 자신 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려 하지 않는다. 내가 볼 때 이런 사정은 보편적으로 들어맞는다. 물론 이를 '증명'할 수단은 가지고 있 지 않다. 인정한다(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이야기지만, '인간을 다루는 학문'은 그 주장을 결코 엄밀한 의미에서 입증할 수 없다).

발송한 메시지, 대개는 도와 달라는 외침이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기도 한 메시지로 자살자는 두 가지를 알려준다. 우선, 계약을 어긴 것은 아니라고 주장 한다(타인과 협의를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존재 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는 무조건적인 선언이다). 둘째, 자기 자신에게만 속하는 자아의 승리를 알리는 외침이다. 주관들의 공감으로 형성된 현실이 엄중하다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그래도 사회의 질서로부터 빠져나갈 탈출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온전히 자신의 소유인 자아의 뜻에 충실하게 따르겠노라. 자살자의 메시지를 일상 언어로 옮겨볼 시도를 해보자. 그의 행위는 이런 외침이다. 사회라는 네트워크의 한 부분인 너 타자는 나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 점은 인정하다. 그러나 똑바로 봐두렴. 나는 너희의 권력으로부터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다. 그것도 너희에게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고서.

자살자는 고집 센 토론자가 아니다. 그는 언제나 '예' 하는 말을 하며, '아멘' 할 따름이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지극한 존엄함에게, 종족 보존을 위해 필요한 풍문으로 자살자를 심판하는 세상에게! 평온한 바다와도 같은 감정으로? 시시각각 좁혀져 오는 사면의 벽들에 머리를 사정없이 부딪치면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 비유라고 하는 것은 겉보기에만 서로 배척할 뿐이다. 다만, 있지도 않은 저 하늘나라에 가지는 않을게 분명하다. (214)


5장 자유에 이르는 길

무엇으로부터 벗어날 자유를 약속해주는 자유죽음은 논리학이 요구하는 대로 무엇으로 나아갈 자유는 주지 못 할지라도, 인간성과 존엄성의 단순한 긍정 그 이상의 것으로 자연의 맹목적인 지배에 맞선다. 이것이 우리가 보는 자유죽음이다.

자유죽음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며 최후에 누릴 특권으로서의 자유(Libertät)다. "삶의 이야기는, 그 삶이 어떤 것이든 간에, 실패의 이야기다(L'histoire d'une vie, quelle qu'elle soit, est l'histoire d'un échec)." 사르트르가 한 말이다. 이 '에셰크', 이 치욕스러운 좌절과 실패는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모든 실존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냉혹한 존재다. '실존함(ex-sistere)' 의 자유를 좇는 사냥, 냉혹한 존재로부터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언제나 다시금 존재에게 뒷덜미를 사로잡히고 마는 이 자유 사냥은 그 끝장을 죽음에서 발견한다. "죽음은 삶을 뒤바꾸는 운명이다(C'est la mort qui change une vie en destin)."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가 한 말이다. 운명은 죽음으로, 우리의 부정으로 끝나기에 불행하다. 사냥을 포기한다. 아무런 포획물 없이 빈손으로 사냥꾼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향해 나아간다.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몰이사냥을 자신의 결단으로 끝내버리는 선택이 자유가 아닐 수 있을까? 존재 앞에서 터져 나오는 욕지기가 '실존함(ex-sistere)' 앞에서 느끼는 그것과 똑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자유죽음은 이중의 의미에서 나의 궁극적인 자유여야 하지 않을까?
208

자유죽음은 부조리하지만, 어리석은 짓은 아니다. 자유죽음이 갖는 부조리함은 인생의 부조리를 늘리는 게 아니라 줄여준다. 적어도 우리는 자유죽음이 인생과 관련한 모든 거짓말을 회수하게 만든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 오로지 그 거짓이라는 성격 때문에 괴롭게 만든 것을 자유죽음은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다. 나는 사람들이 흔히 일종의 통로, 절대자에 이르는 통과의례라고 생각하는 모든 죽음보다 자살이 훨씬 덜 부조리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하이네(Heinrich Heine)는 이런 말을 했다. "잠이 좋다. 더 나은 것은 죽음이다. 절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가장 좋았으리라."

자유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그가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정확히 안다. 오히려 모순은 끝까지 살아 파열을 일으킨다. 툭 끊어지는 단절, 모든 연속의 끝인 단절 현상으로 확인하는 사실들은 논리 따위 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인생, 여기서 '존재'로도 '실존함(ex- sistere)'으로도 이해된 인생은 무거운 짐이다. 인생에 들어서는 그날부터 묵직하게 찍어 누르는 압력이다. 우리를 떠받들어주고 있는 몸은 무겁다. 우리도 몸을 지탱해줘야 하니까. 나는 뚱뚱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감당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노동은 짐이다. 태평하게 빈둥거리는 것은 더욱 짐이다. 가구들을 갖춘 집은 무겁다. 거리의 소음,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는 견 뎌내고 참아내야만 할 부담이다. 일상의 언어는 얼마나 영리한가. 발기한 페니스는 묵직하지만, 축처져 있는 것은 더 무겁다. 아주 부드러운 젖가슴조차 무겁게 달고 다녀야만 한다. 사면의 벽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좁혀져 온다. 우리를 으깬 것처럼 압착하면서 묵직한 고통을 안기리라. 이런 것을 두고 뭐라고 하더라? 가슴이 무겁다. "내 마음이 무겁다(j'ai le coeur lourd)," 아직도 심리학의 동기가 필요한가? 물론이다. 하지만 심리학이 말하는 동기란 언제나 마스크일 따름이다. 그 뒤를 들여다봐야 존재가 가진 근본 사실들이 드러난다. 오토바이닝거는 욕지기나는 여인들과 더욱 형편없는 유대인들로 둘러싸인 돌아버릴 것만 같은 세상에서 살 수가 없다는 중압감을,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을 느꼈다. 구스틀 소위는 황제의 제복을 벗어 던지고 보잘것없는 사복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었다. 대중가수의 사랑 을 얻어내는 게 원천 봉쇄된 하녀에게 삶은 너무나 버거운 짐이 있다. (228)

모든 것을 인정한다. 무엇보다도 존재 앞에서 느끼는 구토와 죽음에 이끌리는 성향은 참으로 비참하고 우울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아주 적은 수의 사람만 그런 것을 느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겠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쓴소리를 해도 존재와 실존함(ex-sistere)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끄떡도 하지 않는다. 이런 집착이 생물적인 본능 탓인지, 아니면 무슨 환상이나 몽상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들은 결코 신처럼 사는 일이 없으리라. 그저 주어진 그대로에 만족할 뿐, 뭘 더 바 라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긍정과 부정의 균형을 맞추었다. 그저 주어진 삶을 긍정했으며, 터져 나오는 구토를 애써 부정했다. 이들의 균형은 사실 평형을 이룬 게 아니다. 생물로서의 본능과 사회의 요구에 따르며 자신에게 지워진 무게를 별거 아니라고 한사코 우기는 셈이다. 이들은 굴욕과 '에세크'를 손바닥 뒤집듯이겨낸다. 많은 경우 그것은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쌍한 녀석. 그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제 다 지나간 일이야. 그저 꾹 참고 흘려 보낸 것만으로도 나는 용감하다는 칭찬을 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결국 이 불쌍한 녀석은 비참하고 굴욕적인 존재를 그저 받아들인 것이다.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그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게 그에게는 도움이 된다. 그리고 끝장을 맞는다. 끝장, 해머가 내려치는 충격과 함께 머리는 마비된다. 그래도 아직 생각 을 할 수 있는 한, 불쌍한 녀석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했노라고 투덜대리라. 여서 그를 두고 시시비비를 따질 수는 없다. 또 어찌 그럴 수 있는가? 그저 삶의 의무에 충실한 그는, 이런 성격 탓에 생물의 본능과 사회의 의무에 충실한 인간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다수가 따르기에 지극히 평범한 그의 일, 즉 의무를 다하는 일을 죽음이 그에게서 앗아가 버린다. 죽음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의무의 허망함을 깨달은 그는 공포에 떨며 이를 간다. 그러나 이런 태도를 두고 짐짓 용감함이라 포장한다. 자살자는 죽음 앞에서 만용을 부리지 않는다. 한껏 작아진다. 마치 강력한 적군의 손에 사로잡힌 낙오병처럼.

이제 어떤 것(이를테면 존재라는 짐)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동시에 다른 어떤 것으로 나아가게 만들지 않는다면, 그래도 자유라고 불러야 하는가 하는 논리적인 문제는 더는 우리의 주제가 아니다. 아주 간단명료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자유 의지라는 개념 뒤에 찍히는 물음표 앞에 서 있다. 사실 이 물음표와 관련해 우리는 이미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감히 저 번뜩이는 두뇌들이 철학 힘이라는 안개 속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된통 다친 그런 영역에 나선 다는 게 겁모르는 아이들의 무모한 모험처럼 보일 뿐이다. 이야기를 잘 매듭짓기 위해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지금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새롭지도, 그다지 과감하지도 않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는 데는 틀림없이 도움을 줄 거라는 점이다. 내가 올바르게 보았다면  우리는 지금 결정론이나 비결정론이냐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그래서 말이지만 현대 물리학의 도움을 받아 자유의지를 설명하는 것은 그 시작부터 잘못된 오해다. 물론 현대 물리학은 기계적 결정론이라는 것을 이미 폐기 처분 한 지 오래지만, 그래도 현대 물리학은 지금 우리의 문제를 다루는 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소립자가 어떤 '행태'를 보이느냐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내리는 결단이 정말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냐 하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지적하자면, 소립자는 무슨 행태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 '행태'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응용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무의미한 것이다!). 인간의 결단은, 인간이 결단을 내리는 과정은, 자유라는 말을 '원인을 가지지 않음'이라고 번역하는 한, 전혀 자유 롭지 않다. 자살자가 자신의 실존을 지워버리기로 결정을 내렸다면, 똑같은 상황에서 계속 살아가기로 결심한 대다수의 사람
과 마찬가지로 거의 무한한 것처럼 보이는 무수한 원인을 가지고 있다. 유전적 요인, 환경의 영향,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운 특수 상황들, 정신이 성장해온 정황 등 온갖 '우연'과 '필연'이 서로 맞물리며 당사자를 결단할 수밖에 없는 꼭짓점으로 몰아붙인다. 우연과 필연은 인과적으로든, 통계적으로든 아니면 역학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접근이 가능하다. 이처럼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보이는 무한한 원인의 연쇄 고리는 서로 엇갈리며 족쇄 를 이뤄 마침내 당사자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이렇게 해서 원인의 연쇄 고리가 자아를 형성하며, 나로 하여금 이게 나의 자아로구나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마약 중독자는 스스로 유감이지만 중독에 걸려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하고 실토할 수 있다. 그래도 마약을 손에 넣으려는 결심은 의지에 따른 행위로 보아야 한다. 그는 처음부터 마약 중독자로 타고난 게 아니다. 얼마든지 마약에 손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반결정론적인 요소를 인정하면, 마약을 즐기는 데 방해가 될 따름이다. 그래서 아쉽게도 중독에 걸렸다는 사실을 자신이 인정하면서도, 또 마약에 손이 가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행위는 의지적이다.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다. 아무도 마약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삶이라는 공간에서 인간은 자신의 자아와 더불어 그리고 자신의 자아로서 자유롭다. 이 말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은 뜻이다.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며, 마치 자신이 자유로운 것처럼 행동한다. 아니, 자유로운 것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살아가는 매 순간 결심을 해야 하는 우리의 실존이 그렇게 가르친다. 다. 마치 우리가 자유로운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러나 모든 가르침은 공허하게 끝난다. 가르침 자체가 아무 내용 을 갖지 않는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과의 연쇄 고리가 어 다른가 우리를 끌고 가기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한순간 도 실존할 수 없다. 그만큼 우리는 구속을 받는다. 연쇄 고리에 꽁꽁 묶여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실존을 자연과학이 말하는 엄밀한 의미 에서 '인과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고 본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 는 말이다. 아니, 저 실체를 알 수 없으며, 경험 가능한 것의 영 역 밖에 있는 선험적 자유의지라는 것보다 훨씬 더 무의미하며 파괴적이다. 자연과학이 말하는 인과율은 인생의 숨통을 조인 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다룰 때는 서로 그 영역이 겹치지 않도 록 경계를 분명히 하면서 '이성의 합의'를 도출하는 게 중요하다. 선험적 자유의지는 우리가 볼 때, 말뿐인 것, 태생부터 말로 만 이루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선험적 자유의지라는 게 무엇인가? 마찬 가지로 인과의 연쇄 고리 그 마디마디를 총체적으로 볼 때우리의 자아, 즉 코기토(Cogito)'를 형성한다는 것도 맞는 이야기다. 이 코기토는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행동하며, 생각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자신이 자유롭다고 체험한다. 살아서 경험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매 순간 확장되거나 제한되는 등급을 갖는다는 점은 인정해야만 한다(10분 뒤에 다시 전화할게. 내일 난 보르도 로 갈 거야. 다음 달에는 내 새 책을 끝내야만 해). 사르트르는 포로를 예로 든다. 포로는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그는 탈옥을 할 것인 지 말 것인지 선택할 자유는 가진다. "인간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신을 가지고 무엇을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이 물음에 맞게 인간은 자신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벗 어날 수 없으며 지울 수 없는 진리와 원리를 중시하는 생각에서 보면 지나치게 치고 나간 것이 우리의 논의에 뒤섞여 있다. 뒤 섞여 있는 것을 가지런히 풀어내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다리를 다쳐 절뚝이는 포로는 건강한 사람에 비해 탈옥을 감행하겠 다는 결정을 내리기 어려우리라. 아니,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 다. 10분 뒤에 전화할게. 사장이 전화통을 붙들고 있지 않다면. 내가 그의 통화를 중간에 끊을 수야 없으니까. 내일 나는 보르 도로 간다. '마지막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신중한 성격의 사람은 이렇게 말하리라. 다음 달에는 책을 끝낼 수 있을 거야. 또 그래야만 하고! 늙은 작가는 이렇게 말하며 생각 하리라. '그 전에 내가 죽지 않는다면...... 원고가 내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다면.'

자유죽음은 정말로 자유에 따른 선택일까? 자유로운 선택이라면 자유죽음은 어느 정도 등 급을 가질까? 좁은 의미, 곧 전문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은 여기 서 건드리지 말자. 심리학으로는 우리의 문제를 풀 수 없다. 사 회학도 마찬가지다.

극한 상황에 처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택했다는 것에서 자살자와 자살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의 의지가 자유롭 지 못하다는 것이 여실히 확인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당사자 에게만 강제 상황인 극한 상황에서 '정신이 혼미한 나머지 자살을 범한 것이라면, 자살자가 온전한 자아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강변한다. 다시 말해 자살자는 자유의지로 죽음을 택 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굴복한 것일 뿐이라는 결론이다. 우 선, 이런 반론이 논리적인 오류로 도출된 것은 아닌지 물어야만 한다. 내가 보기에는 여기서 어떤 상황에서든 계속 사는 것만 이 옳은 것이라는 전제가 곧바로 결론으로 둔갑하고 있다. 다음으로 나는 다수의 행동이 그 어떤 고민도 필요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내 결론도 무너진다. 어떤 상황에서 X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Y와 Z 그리고 알파벳을 총동원한, 있을 수 있는 모든 기호를 총망라한 다수는 계속 살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여기서 X는 의지라고는 없는, 무기력하고 초라한 외톨 박이란 말인가? 오히려 그의 의지야말로 강하고 자유에 충실한 게 아닐까?

자살자의 결단은 어디 까지나 외부 조건에 구속됨이 없이 자신의 자유로 내린 것이다. 자유, 그리고 홀로, 물론 자유와 홀로 있었다는 것만으로 자살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가 알고 있듯, 자살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 순간, 자신의 행위로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 나 결심한 계획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만큼은 홀로 해야만 한다. 그에게 동반자는 없다. 흔히 이중 자살이라고 부르는 동반자살은 드물다. 그렇지만 이 드문 경우에서조차 각자는 홀로다. 자살을 획책한 사람이든 그에 동조해 같이 뛰어내리는 사람 이든 마지막 순간에는 혼자일 뿐이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자유를 행사한다. 물론 각자의 자유는 총체적으로 본 자유 일람표에서 그에 알맞은 등급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사르트르의 말이 맞다.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실제로 자유를 가졌다. 그러나 자유로워지고자 선택하지는 않는다." 자살자보다 더 지독하게 자유를 집중적으로 체험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자유로 죽음을 선택해 이 자유와 함께 모든 자유의 끝장으로 나아간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끝장은 더는 강제가 아니다. 자살자는 이 금기를 깨려는 프로젝트를 세웠다. 그가 실존으로 투기(投企)한 것은 자유죽음이다.

마치 여기서 생각의 자유만을 다루는 것 같은 인상이 자연스레 고개를 든다. “폐하,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는 대사는 사상의 자유를 베풀어달라는 간청이다. 민중은 사상의 자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중요한 것은 사상의 자유만을 꿈꾸는 게 아니라, 행동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상의 자유 만을 끌어안고 있다가는 '내면'이라는 미로에 빠지고 만다. 기독교인의 저 싸구려 자유처럼. 하나님과 이야기한다는 기독교도는, 그러나 군주 앞에서는 지극한 경의의 표시로 침묵하며, 폐하가 이렇게 하명하기를 기다린다. 말하라, 천한 것아. 물론 생각의 자유만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인상이 결코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유죽음의 결단을 내리는 순간, 완전한 자유를 경험하기는 한다.

자유죽음을 결정하는 자유는 기독교인의 수상쩍은 자유가 아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하나님에게 매달리지 않는다. 무기나 올가미를 마련하거나, 내 눈길을 받아주지 않는 검푸른 물살을 노려본다. 또는 고층빌딩의 16층 발코니에서 아 스팔트를 뚫어지라 내려다본다. 진지한 결심과 그에 따르는 결 과는 치명적이다. 그리고 해방의 몸짓 역시 치명적이다. 격렬하 게 억압을 깨고 나옴과 동시에 자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렇듯 자유죽음은 숨통을 틔워주는 자유에 이르는 산책길일 수는 있지만, 자유의 땅 그 자체는 아니다. 자유에 이르는 길은 꿈결처럼 아름답다. 비록 이별의 아픔을 상징하는 가시덩굴이 무성할지라도 홀로 걸었던 이 길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자유죽음은 이 아름다움에 손끝 한번 대지 못했다. 자기 자신 말고 파괴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보기에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부조리에 무방비 로 노출되어 있나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조리라 는 말은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12가 자의적이고도 임의적인 맥락에서 이끌어낸 그 부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 (L'Absurde)'의 진상은 시시포스 신화가 그려주는 그것보다 훨 씬 더 일상적이며, 더욱 섬뜩하다. 우리는 누구나 부조리를 체험하지만, 이 체험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끝까지 철저하게 파헤 치는 사람은 극소수다. 여기서 파헤친다고 하는 것은 부조리의 정체를 고민하면서 온몸으로 끌어안는다는 뜻이다. 생각과 행 동이 별개가 아닌, '사유 행동'으로 부조리에 맞선다고나 할까. 생각하는 동시에 행동한다는 '사유 행동'이라는 표현이 너무 고통스럽게 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프루스트 의 화자는 알베르틴(Albertine)이 그를 떠나간 것을 알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지만,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되는대 로 살아가기로 한다. 그냥 내버려 둔다. 그래서 알베르틴이 죽 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끊임 없이 자신을 갉아먹는 인생의 총체적인 부조리는 시대의 역사 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그 전모를 드러낸다. "어차피 지나갈 거 야. 나중에 보면 다 그게 그거지." 카를 크라우스(Karl Kraus)"가 제3제국의 출현을 두고 쓴 시에서 한 말이다. 한편에서는 그 혜안에 찬탄을 연발했고, 다른 편에서는 그 체념의 고약함에 치를 떨었다. 히틀러, 그는 우리였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우리 한 명, 한 명을 은근한 불에 볶아 먹었으리라. 내 말은 히틀러보다 더 철저한 악인이 또 있을까 하는 반문이다. 그러나 그 히틀러는 우리다. 오늘날 히틀러는 무엇인가? 아마도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등장한 폭군 네로? 호감이 가는 인물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를 두고 더 뭐라고 할 가치를 나는 느끼지 못한다. 늙은 세대에게는 틀림없는 악당이다. 그러나 그 정치적 범죄는 지겨울 정도로 추궁하지 않았느냐며 젊은 세대는 넌더리를 낸다. 피해당사자의 이야기도 들었는가? 그 가족에게도 직접? 솔직하자. 우리네 인생은 앞뒤가 맞지 않는 부조리일 뿐이라고, 시간이 지나고, 시간과 함께 소비되는 인생으로 히틀러의 끔찍했던 형상 조차 많이 지워졌다. 더는 인간의 적들을 생각하지 않겠노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나에게 감정이 무뎌졌냐고 묻는다. 그 끔찍했던 기억을 되살리라고 요구한다. 역사,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물론 의미를 부여하느라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는 한에서. 하지만 그 무의미함을 깨닫고 나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의미 부여라는 수고, 테오도어 레싱(Theodor Lessing)은 세간의 평판처럼 그렇게 불평불만을 일삼는 비뚤어진 성격 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시대의 여론이 마치 테러라도 벌 이듯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헤겔이 위대한 인물은 아니지 않을까. 인간이 월계관을 쓰고 자신을 한껏 뽐내는 곳에서조차 '에셰크'가 도사리고 있다는 인생 부조리의 깨달음은 곧바로 난 길을 따라 우리를 자유죽음을 다루는 생각으로 안내한다. 갈등 이라는 특수 상황이 구태여 만들어질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쪽과 저쪽에 양다리를 걸친 부조리라는 인생의 기본 구조에 특수한 갈등 상황이 곁들여지게 되면, 이제 우리는 경악하며 인생의 부조리를 분명히 깨닫는다. 그럼 이제껏 우리가 등에 지고 헤매고 다닌 짐을 견딜 수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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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너무 무거운 짐을 던져버리는 홀가분함도 언제나 맛본다. 남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몴일 따름이다. 나를 추억하든 망각하든, 그들 원하는 대로 하리라. 그런 것에 얽매이지도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에는 이미 부자유와 같은 게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주장하고 싶은 집착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발적인 사건이다(La mort est un fait contingent)." 사르트르가 한 말이다. 그렇다. 죽음은 확실히 우발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자유죽음이라는 특수 경우에도 그럴까? 자유죽음으로 나는 나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서 떼어낸다고 믿는다. 내 체혐의 공간 안에서 자유죽음은 우발적이지 않다. 이른바 '자연 죽음'이라는 것과는 정반대인 것이 자유죽음이다. 프로젝트로
서의 자유죽음은 분명 자유에 따른 선택이다. 그러나 자유죽음으로 자유에 이르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자유 죽음은 새로운 우발적 사건일 뿐이다. 의도된 것이었으나 우발적으로 끝나고 만다는 점에서 자유죽음은 완전히 앞뒤가 바뀐 것이다.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타이르던 거짓말에 비해 유일하게 진솔한 게 자유죽음이다. 다른 것처럼 주장했으나 결국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서.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최면을 거는 거짓말, 우리 가운데 누가 자신은 거짓말에 속아 살지 않았다고,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그대로 살아냈다고 과감히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근원적인 진정성을 온전히 살아내는 사람은 없다. 자기 자신으로 있기 위해 끊임없이 구축해야만 하는 진정성은 부단히 깨어지고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더 열심히 진정성을 따라가려고 하면 할수록, 그만큼 휘리릭 안 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마는 게 진정성이다.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 죽음 안에서만 자신의 자아에 완전히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다. 그런 사람만이 '진리의 순간(la minute de vérité)'을 겪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의 의미를 놓고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정말 그런지 충분히 의심을 가질 수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비트겐슈타인이라는 거인이 이 말을 비판 하지 않았던가. 나는 죽는다. 고로 나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조금도 흔들 수 없는 진리다. 바위처럼 버티고 서 있는 우리의 주관적 진실이다. 우리가 충돌과 함께 박살이 날 때, 이 주관적 진실은 객관적인 게 된다.

자유죽음이 그 모순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자유에 이르는, 우리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논증은 또 있다. 자유죽음은 부조리하지만,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자유죽음이 가진 부조리함은 인생의 부조리를 늘리는 게 아니라 줄여준다. 적어도 우리는 자유죽음이 인생과 관련한 모든 거짓말을 회수하게 만든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 오로지 그 거짓이라는 성격 때문에 괴롭게 만든 것을 자유죽음은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나는 사람들이 흔히 일종의 통로, 절대자에 이르는 통과의례라고 생각하는 모든 죽음보다 자살이 훨씬 덜 부조리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왜 저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조각상들이 형상화하고 있는 그런 통로 말이 다. 그 입구가 가로로만 찢어져 있는 좁직한 문을 지나면 정말 뭔가 있을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철저한 무(無)다. 그러니까 없음에서 없음으로 나아가는 통로다. 절대자를 갈구하는 절박한 욕구가 낳은 예술 작품이 그런 조각 상일 따름이다. 그런 욕구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끝 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고리를 계속 끌고 나간다면, 나는 '절대 자'란 그저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실재도 절대자와는 맞아떨어지지 않는 다. 절대자는 단지 비현실적인 욕구, 있지 않은 것에서 구원을 기대하는 욕구의 산물일 뿐이다. 절대자는 그 어떤 것으로도 과 시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갈망하는 게 절대자라고 말 한다. 그러나 그게 뭔지 그 자신이 모른다. 그가 말할 수 있는 것 은 오로지 어떤 무엇에 등을 돌리고 싶다는 의중일 따름이다. 현실의 척박함 같은 것에 넌더리가 났다는 말이다. 이처럼 경 험할 수 있는 물건과 같은 것으로 이야기할 때만 우리는 그사 람의 절박함을 이해할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은 우리에게 신에 게이끌림이라는 표현을 쓴다. 죽고 난 다음에 신에게 좀 더 가 까이 가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신이 어떤 특성 혹은 본질을 가졌느냐고 물으면, 그는 법정에서 자신에게 부담이 될 사안을 놓고 묵비권을 행사하는 피고처럼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으려 든다. 하지만 이로써 그는 자신을 불리하게만 만들 뿐이다. 판사가 진술을 거부하는 피고를 보며 심증을 굳히듯, 혹자는 신이라는 개념은 직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직관할 수 없는 것 이라면 공허한 것일 뿐이다. 그런 개념은 절대자를 말하는 것에 비해 조금도 낫지 않다. 자신의 말이 좋은 뜻에서 하는 것이라며 그 보증인으로 주님을 내세우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게 또 있을까? 그런 패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에 누구도 내지 않는 것이다. 경쟁자가 죽음을 향해 가는 인생으로서의 인생은 부조리할 뿐이며, 그 불투명한 거짓말에 구토가 난다고 말한다면, 죽음에 이끌리는 성향이야말로 존재라는 짐에 어울리는 유일 한 태도라고 말한다면, 그 경쟁자는 신과 절대자의 비호를 받는 사람보다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선다. 그는 상대방이 말하는 신이라는 게 데미우르고스(Demiourgos)'에 지나지 않는 것이 라고 주장하리라. 결정과 행동으로서의 자유죽음이, 물론 아무런 해결은 아닐지라도, 모든 풀 수 없는 물음에 대한 유일한 답 이라고 말하리라. 해답을 찾을 희망이 없이 던져진 모든 물음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유죽음뿐이다. 반면, 신과 절대자를 따르는 사람은 목만 축 늘어뜨리고 추수를 하는 손길이 다 가오기만 기다릴 것이다. 그 손길의 주인이 아무리 끔찍하고 감당하기 힘든 몰골을 하고 있든 그 사람은 개의치 않는다. 그게 어떤 것이든 절대자가 점지해준 것이니 말이다. 심장이 멎어 빠 르게 맞는 죽음이 가장 친절한 것이리라. 그러나 천천히 진행되어 결국 호흡중추가 마비되고 마는 뇌경색도 그럴까? 온몸으로 전이된 탓에 인생을 '존재의 종양 덩어리'로 만들어버리고 참혹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게 만드는 암도? 파업을 일으킨 신장도? 그래서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한 장비로 사람을 병상에 누워 숨만 그르렁대는 송장으로 만들어놓는 것도? 나는 개념적인 설명이 충분하지 않고 심지어 보잘것없을 정도로 빈약하기는 할지라도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라는 게 단순히 나를 지키고 종족을 보존하려는 본능을 가리킬 정도로 어리석은 게 아니 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주 불공평한, 애초부터 지는 게 정해진 싸움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을 의지라고 부를 정도로 쇼펜하 우어는 단순하지 않았다. 실존의 부조리함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면서, 오로지 참고 이겨내라고 하는 게 무슨 싸움인가. 물론 이런 의지조차 우리더러 존중해 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이런 요구에 순종하는 자는 자연을 완성하는 사람이리라. 최고 존재 법칙의 수호자리라. 이들은 말한다. 자유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나서자 하고 외치는 사람은 미쳤거나 무슨 음험한 의도를 가진 범죄자라고, "그래도 살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살고 싶다"고 외치라 한다. 이것만이 우리의 선택이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누구나 그런 외침의 주인공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 누려 마땅한 존엄과 자유의 이름으로 우리는 존재의 법칙에 항거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이 부조리 하기만 한 전체 체계 안에서 마찬가지로 부조리할 뿐일지라도 레지스탕스를 벌여야만 한다. 물론 저항 운동을 벌였다고 해서 우리가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지는 않으리라. 그랬다가는 비굴 하게 살아남아 자신의 영웅담이나 떠벌이는 저 노병들의 웃기는 자축 행사 꼴이 날 테니.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다만, 자유를 찾아 나서겠다고 길을 떠난 사람을 비웃고 헐뜯지는 말자는 다짐일 뿐이다. 이 길은 바로 자살자가 가기로 의지한 길이다. 그 길이 자유의 땅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라며 돈이 안든다고 비웃음이나 날려대지는 말자는 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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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대자'란 그저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깨닫는다. 절대자는 단지 비현실적인 욕구, 있지 않은 것에서 구원을 기대하는 욕구의 산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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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과 행동으로서의 자유죽음이, 물론 아무런 해결은 아닐지라고, 모든 풀 수 없는 물음에 대한 유일한 답이라고 말하리라. 해답을 찾을 희망 없이 던져진 모든 물음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자유죽음뿐이다. 반면, 신과 절대자를 따르는 남자는 목만 축 늘어뜨리고 추수를 하는 손길이 다가오기만 기다릴 것이다..... 이런 요구에 순종하는 자는 자연을 완성하는 자이리라. 최고 존재 법칙의 수호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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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서 누려야 마땅한 존엄과 자유의 이름으로 우리는 존재의 법칙에 항거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국가는 이 부조리하기만 한 전체 체계 안에서 마찬가지로 부조리할 뿐일지라도 저항 운동을 벌여야만 한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다만, 자유를 찾아 너서겠다고 길을 떠난 사람을 비웃고 헐뜯지는 말자는 것뿐이다. 이 길은 바로 자살자가 가기로 의지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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