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지구 끝의 온실

백_일홍 2022. 9. 8. 11:23

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83

세계 곳곳에 더스트를 피하기 위한 거대 돔이 세워졌을 대 사람들은 숲이나 들판의 생물들을 위한 돔은 만들지 않았다. 많은 종이 멸종을 향해 갔지만, 빠르게 더스트에 적응해 변이한 식물들도 있었다. 학자들은 더스트 자체가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유도해 빠른 변이를 촉진했을 것이고 추정했다. 어떤 식물들은 펄럭이는 넓은 잎 대신 더스트를 걸러내는 길고 자글자글하 잎으로 변이했고, 높게 자라던 어떤 나무들은 키를 낮추었다. 더스트로 죽은 숲 위에 새로운 생물종이 숲을 꾸리는 덧생태계도 나타났다. 그렇게 생겨난 변형종들은 더스트가 사라진 이후에도 한동안 자연을 지배하면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러다 21세기 후반부터는 더스트 적응종들이 더스트가 없는 환경에 맞추어 다시 변하며 생태게의 풍경을 바꾸고 있었다. 

 

행성은 너무나 빠그레 변화했고, 생물들은 부지런히 그것을 따라잡았다. 아영은 그 과감함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새 식물 표본들을 관찰하는 날이면 아영은 이 식물들이 얼마나 긴 역사를,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상상했다. 

 

226

"제 생각은 분명해요. 우린 프림 빌리지를 지켜야 해요. 이 마을 밖은 아주 끔직해요. 전 돔 시티의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 봤어요. 그들은 약한 사람들을 위해 절대 자리를 내어주지 않아요. 인류를 구하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더스트에 버티는 식물을 가져가면, 그들은 횡재를 해거니 생각하며 뺏어가겠죠. 그러고는 우리를 죽일 거예요."(나오미)

 

"돔 안의 사람들은 결코 인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던 사람들만이 돔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 오직 그런 이들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았지. 우린 정해진 멸종의 길을 걷고 있어. 설령 돔 안의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더라도, 그런 인류가 만들 세계라곤 보지 않아도 뻔하지. 오래가진 못할 거야"(지수)

 

"그래도 우린 식물들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야 해"(지수)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많은 대안 공동체들을 봤어. 모두 같은 패턴이었지. 처음에는 거창한 기치를 걸고 모여. 유토피아 공동체를 표방하거나, 종교를 중심에 두기도 하고, 사냥꾼들이 모일 집단일 때도 있고, 그도 아니면 평화로운 생존을 바라는 사람들이 모이기도 해. 모두 돔 시티 안에서는 답을 찾지 못해서, 돔 시티 밖에서 대안을 꿈꾸는 거야. 하지만 그게 뭐가 됐든 결국 무너져. 돔 밖에는 대안이 없지. 그렇다고 돔 안에는 대안이 있을까? 그것도 아니야. 돔 안은 더 끔직해. 다들 살겠다고 돔을 봉쇄하고, 한줌 자원을 놓다 다른 사람들을 학살하지. 그럼 이젠느 어떻게 해야 할까?"(지수)

 

227

"돔을 없애는 거야. 그냥 모두가 밖에서 살아가게 하는 거지. 불완전한 채로, 그럼 그게 진짜 대안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 똑같은 문제가 다시 생길 거야.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해서 벌이는 것 자체가 우리를 그나마 나은 곳으로 이동시키는 거야"(지수)

 

364-366

"추측하신 대로 업로드된 모스바나의 데이터는 제가 전 세계에서 수집한 것들이 맞습니다. 

 

당신은 재건의 역사를 식물들의 관점에서 재구성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아직도 그 작업이 수행되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인류는 그간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역사만을 써온 것일까요. 식물 인지 편향은 동물로서의 인간이 가진 오래된 습성입니다. 우리는 동물을 과대평가하고 식물을 과소평가합니다. 동물들의 개별성에 비해 식물들의 집단적 고유성을 폄하합니다. 식물들의 삶에 가득한 경쟁과 분투를 보지 않습니다. 문질러 지운 듯 흐릿한 식물 풍경을 바라볼 뿐입니다. 우리는 피라미드형 생물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식물과 미생물, 곤충들은 피라미드를 떠받치는 바닥일 뿐이고, 비인간 동물들이 그 위에 있고, 인간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는 셈이죠.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식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식물들은 동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언제나 지구라는 생태에 잠시 초대된 손님에 불과했습니다. 그마저도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위태로운 지위였지요. 

 

목격자로서 한 가지 단서를 드리지요. 재건의 역사를 식물 중심으로 구성한다면, 모스바나는 더스트 시대의 천이를 이끄는 개척자 식물이었습니다. 본래 생물이 없는 땅에 새롭게 진입하는 개척자들은 이끼류와 지의류, 한해살이풀들이지만, 모스바나는 드물게 다년생 목본 단일종으로 개척자 식물이 되었지요. 하나의 식물종이 번영한다는 것이 그 종의 터전을 넗혀가는 일이라면, 모스바나는 한때 지구상의 생물로는 유레없는 번영을 누렸습니다. 인간들이 돔 안에 갇혀 죽어갈 때 모스바나는 인간이 가본 적 없는 지역까지 번성한 우점종이었지요. 그리고 그 영광의 시대가 끝났을 때, 모스바나는 기꺼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인간이 우점종으로서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당신이 지적한 대로, 모스바나의 모순은 그 자신의 경쟁력을 만드는 더스트라는 환경 자체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식물이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더스트라는 극한 환경이 환화되면서 다시 새로운 식물 생태계가 생겨났고 모스바나는 우점종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모순이 모수바나에게 시간을 벌어주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모스바나는 인간에게 적응해서 그 자신의 독성을 점점 낮추어왔고, 염증을 일으키는 가시의 크기를 작게 만들었고, 눈에 띄는 발광성 돌연변이를 상실했고, 더스트 이전부터 존재했던 잡초들처럼 스스로를 풍경 속으로 희미하게 감추었습니다. 

 

.....모스바나는 원래 그 자체로 더스트를 닮은 생물로, 끊임없이 증식하고 공격하고 침투하는 성질을 가졌습니다. ... 그러나 모스바나는 공존과 유전적 다양성을 습득하고 더스트 시태의 흔적을 잔신에게서 지우는 것으로 살아남았지요. (레이첼)

 

375

"플림 빌리지가 해체된 이후, 그리고 지수가 떠난 이후로 나에게는 식물들밖에 남지 않았죠. 식물들이 나의 전부였어요. 그것들이 아주 멀리 퍼져 나가기를 바랐고, 지구를 뒤어덮어버리기를 바랐죠. 인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더군요"(레이첼)

 

388-389

<작가의 말>

처음 <지구 끝의 온실>을 구상하기 시작했을 때 나에게는 막연한 이야기의 씨앗만이 있었다.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는 이 씨앗을 소설로 완겅하기 위해서는 아주 느리지만 끈질기게 퍼져나가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결국은 지구를 뒤덮어버릴 생물체가 필요했다. 박테리아, 바이러스, 곰팡이, 버섯, 심지어 곤충까지 진지하게 검토해봤지만 구상 과정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모두 탈락하고 내가 도닥한 답은 하나, 식물, 오직 식물만이 내 소설을 구원해줄 생물이라는 거였다. 

 

식물의 세계에 어설프게 발을 들이고 보니, 조금은 알 것 같다. 정말로 식물은 뭐든 될 수 있다는 것을, 지구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말 외계 생성 같다는 것도. 

 

온실의 모순성을 좋아한다. 자연이자 인공인 온실. 구획되고 통제된 자연. 멀리 갈 수 없는 식물들이 머나먼 지구 반대편의 풍경을 재현하는 공간. 이 소설을 쓰며 우리가 이미 깊이 개입해 버린, 되돌릴 수 없는,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곳 지구를 생각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참고문헌> 중 식물_책

그림과 사진으로 풀어보는 마녀의 약초상자

식물학자의 정원산책

정원사를 위한 라틴어 수업

욕망하는 식물

식물, 세계를 모험하다

매혹하는 식물의 뇌

식물산책

식물학 수업

싸우는 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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