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녹색 계급의 출현
브뤼노 라투르, 니콜라이 슐츠
I. 계급투쟁과 분류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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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가 그저 운동에 그치지 않고 정치를 조직하는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자유주의 - 사회주의 - 신자유주의 - 반자유주의 혹은 네오파시즘 정당 - ?(생태주의)
[2]
정치생태학이 존재하고자 한다면 다른 것들에 의해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생태학은 자기주도적으로 새로운 불공정의 원천을 탐지 하고 새로운 투쟁 전선의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11
[3]
자연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평화협정에 서 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대륙과 온갖 총위에서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 많은 갈등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연은 통합을 고취하기는커녕 분열을 조장한다.
[4]
신기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생태주의에 관심을 보인다. 다른 것은 몰라도 기후와 에너지 그리고 생물다양성에 대한 관심은 도처에서 이야기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 세기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이끈 변화가 그랬던 것과 달리. 이런 이슈들을 둘러싼 갈등들은 아무튼 지금까지는 대중의 결집, 대중봉기라는 형태를 띠지 않았다. 이 점에서 생태주의는 어디에나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다. 지금으로서는 갈등의 엄청난 다양성이 이 투쟁들을 일관성 있게 규정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다 양성은 결함이 아니라 성공의 수단이다. 왜냐하면 생태학은 생산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파괴된 삶의 조건들을 전반적으로 탐구하기 때문이다. 생태 운동이 더 견실해지고 더 자율적이게 되려면, 그리하여 과거에 못지않은 역사적 도약으로 나타나려면 이 모두가 생태 운동을 모든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통일된 행동으로 모아냄으로써 자신의 기획을 인정하고 파악하고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재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생태주의가 분열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음으로 생태주의가 낳은 새로운 유형의 갈등들의 지도(地圖)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야 한다. 끝으로 단체행동을 위한 공동의 지평을 규정해야 한다.
II. 유물론의 경이로운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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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녹색 계급이 관계의 경제화에 저항하는 사회적 투쟁들을 역사적으로 이어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녹색 계급은 생산의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희생시켜 경제를 자율화하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거부를 증폭시킨다고 할 수 있다. 확실히 이 점에서 녹색 계급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좌파다.
[9]
녹색 계급이 그저 반자본주의 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서둘러 단언하지 말기로 하자. 우파도 좌파도 아닌 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에서 발견되는 핵심적인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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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계급이 이 전통을 이어받고자 한다면 녹색 계급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주는 교훈을 받아들여서 자기 존재의 물질적 조건과 관련하여 자기규정을 시도해야 한다. 새로운 계급투쟁은 옛 계급투쟁만큼 유물론적인 접근을 토대로 전개되어야 한다. 연속성은 바 로이 본질적인 점에서 존재한다. 23
[12]
그러나 정말이지 그것은 이제 동일한 물질성이 아니다! 여기에서 사회주의의 전통과 오늘날 떠오르게 하는 것이 문제인 관심의 대상 사이에 상대적 불연속성이 생겨난다. 분류에 관해 갈등이 있는 것처럼 생활 조건의 유물론적 분석을 구성하는 것에 관해서도 갈등이 있다. 마르크스에게는 인간의 생존과 생식이 모든 사회와 사회사의 기본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인간 사회와 사회사에 대한 모든 분석의 첫 단계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과정 과, 인간 사회 및 집단에 존속을 허용하는 물질적 조건 인간이 먹는 것, 마시는 물, 입는 옷, 거주하는 집 등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사회사의 토대로 간주한 것은 바로 이 물질적 재생산 조건의 생산이다. 그러나 무 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재생산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전혀 다른 역사의 지형 안에 놓여 있다. 이제 우리는 동일한 역사를 좇지 않는다. 생산은 이제 우리의 유일한 지평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특히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것은 이제 동일한 물질 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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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물질생활의 규정 자체가 변하고 있는 중일 때 무엇이 발생하는가? 사회주의의 나침반은 거의 배타적으로 생산과 재생산에 입각해서만 사유하기 때문에, 오늘날 계급의 풍경이 형태를 달리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 기계 문명이 생겨날 때 그랬듯이, 오늘날 신기후체제는 우리에게 사회가 재생되거나 존속하는 과정을 다시 그리도록 강제한다. 또다시 "견고성과 영속성을 지녔던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19세기에 그랬듯이 현재 우리는 사회의 하부구조가 엄청나게 변화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옛 묘사에만 의존해서는 어떻게 집단들이 계속 존속하는가, 어떻게 집단의 장기 존속을 위한 수단이 유지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집단의 역사가 기록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더 이상 대답할 수 없다. 녹색 계급에 입각한 분석은 여전히 유물론적이지만, 인간 만의 생산과 재생산 이외의 다른 현상 쪽으로 눈을 돌려 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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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이 생산체계가 몹시 거세게 가속화되어 지구와 기후의 체계를 불안정하게 했다. 이는 "인류세(人類世)”나 “대가속(大加速) 시대"라는 말로 아주 잘 요약된다. 지금 우리는 사회의 연속성과 존속을 보장하는 힘이 기후 변화에 의해 강화되고 극적으로 변모하는 방식을 지켜보고 있다. 생산체계는 파괴 체계와 동의어가 되었다. 인간이 아닌 것의 재생산에도 집중될 마르크스주 의적 분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유물론적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유리한 물질적 조건의 재생산 이외에도 지구라는 행성의 거주가능 조건을 고려하는 것이다. 후자의 조건은 전통적인 정당의 정치경제학이 자원의 이름으로 단순화하려고 애쓴 것뿐만 아니라 지구의 새로운 물질적 현실을 고려하도록 강제한다. 경제학은 생산을 위한 자원의 동원에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지구의 거주가능 조건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설 수 있는, 달리 말해서 생산에 대한 이 배타적 관심에 등을 돌려 거주가능 조건의 탐색이라는 더 큰 틀로 나아갈 수 있는 경제학은 존재하는가? 이것이 새로운 녹색 계급의 관건 전체이다. 이 점에서, 다들 이해하다시피, 전통적인 "계급투쟁"과의 불연속성이 크게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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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의 유물론적 분석에 관한 이 불일치는 결국 녹색 계급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분석이 어떤 점에서 좌파의 전통적인 투쟁을 - 하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 연장하고 갱신하는가를 이해하게 해준다. 생산만을 지향하는 이러한 관심에서 벗어나 경제화에 대한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표현을 빌리건대) 사회의 저항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20세기의 몇몇 투쟁은 명백히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의해 고취되었지만, 다른 많은 투쟁은 단순히 생산의 확대에 대한 거부를 명분으로, 그리고 생산이 나머지 사회생활의 틀 밖으로 벗어난다는 그 끔찍한 주장을 거슬러 수행되었다. 뤼카 샹셀(Lucas Chancel)이 말했듯이, "노예제의 폐지, 사회 보장, 모든 이에게 부여되는 투표권, 무상 교육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물질 생산의 조직화 문제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 사회가 경제화에의해서만 규정될 수 없다는 대단히 중요한 표현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적 발상의 유물론이 갖는 몇몇 한계를 비판하는 것은 또한 경제화에 대한 다양한 투쟁의 전통을 갱신할 수 있게도 해준다. 그러므로 사실 결정적이지만, 이 미묘한 차이를 제외하면, 녹색 계급은 해방을 주장하는 좌파의 역사를 이어받아 확대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되풀이가 정말 일어났다는 징후는 이제 환경운동가가 노동운동가보다 더 많이 살해당한다는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28
III. 대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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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상황을 요약하자면, 이제는 모두가 파국을 막기 위한 결정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지만, 행동을 가능하게 해줄 중계점, 동기, 지침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혁명"이나 "근본적인 변화" 또는 "무너져내림 (collapsus)"에 관해 물리도록 말하지만, 잘 알다시피 이 불안감은 이슈들의 규모에 맞는 결집된 활동 계획으로 전혀 표출되지 않는 실정이다. 이 점에서 행동에 대한 호소는 앞선 세대들이 전쟁이나 재건, 경제발전, 세계화 등등의 단계에서 앞선 세대들이 알았던 것들과 조금도 유사하 지 않다. 예전에는 이상(理想)이 정열을 끓어오르게 했고 상황의 이해가 동원을 충분히 가능하게 했다. 오늘날에는 파국의 확실성이 오히려 행동을 마비시키는 것 같다. 어쨌든 세계의 재현, 에너지의 용출, 가치의 수호 사이에 본능적인 동조는 없다. 반대로 모든 본능이 생산을 이해하는 옛 방식의 완전히 동일한 "되풀이" 쪽으로 향해 있다. 이러한 마비상태를 진단하고 불안, 집단행동, 이상과 역사의 방향 사이에 새로운 동조 관계를 찾아내는 것이 녹색 계급의 의무이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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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마비상태의 원인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은 행동의 방향 자체가 뒤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이다. 단순화하자면 두 세기 전부터 생산을 늘리고 얻은 부의 분배를 약간 덜 불공정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였을 때 쉽게 에너지가 동원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자유주의의 다양한 형태와 대다수 사회주의의 전통 사이에 수많은 알력이 있어 왔다. 하지만 생산량을 높이는 데에는 양쪽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다. 오히려 생산의 결실을 분배하는 올바른 방식에서 불일치가 생겨났다. 논쟁의 여지 없이 발전은 역사의 흐름이었다. 그리고 이 "돌격 앞으로!"라 는 구호가 촉발하는 활력을 늘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옛 모델과 비교하자면 오히려 “전속력으로 후퇴!"가 오늘 날의 구호인 것 같다. 갑자기 생산의 증대, 발전의 개념 자체, 진보의 개념이 고쳐야 할 착오로 나타난다. 생산이 지구에 거주할 수 있는 조건의 파괴와 연결되면서 동원의 역량은 위기에 처한다. 그러므로 전문가들이 경고하는 거대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동원 효과가 그토록 적 은 것은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아주 오랫동안 생산에 결부된 정신, 조직, 행정, 법의 장치는 막다른 길이 된 것 쪽으로 관심을 이끌게끔 되어 있었기 때문에 헛바퀴를 돌고 있다. 오늘날 관심의 방향이 바뀌었지만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줄 새로운 장치는 아직 고안되지 않았다. 누구나 불안, 죄의식,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장치를 제공하는 것이 녹색 계급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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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인 방향 전환은 생산의 확대가 아니라 거주할 수 있는 지구 환경의 유지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생산주의"를 제한하는 것뿐만 아니라 뒤장 카지크(Dusan Kazic)가 요구하듯이 생산의 지평으로부터 완전히 물러나서 생산을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익숙하게 의존해온 것들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는 원칙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생산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의 부정적인 측면은 생산 활동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단순한 자원의 역할로 축소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천년 동안 생명체들이 낳은 지구가 둘러싸고 감싸고 허용하고 용납하고 보장하는 것은 인간 활동을 위한 자원 이상의 것이다. 지구의 오랜 역사가 입증하듯이, 지구 생활의 연속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생명체들이다. 생명체들은 스스로 수십억 년의 세월 동안 기후, 대기, 토양, 대양을 포함하여 지구 생활을 만들어냈다. 생산체제는 일부분일 뿐인데다가 이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중심부에 제한되어 있다. 대신 주변부가 모든 자리를 차지했다. 사실 생산체계는 전혀 다른 조직에 박혀 있고 감싸여 있다. 그리고 이 조직은 생활조건을 파괴하는, 혹은 생활조건의 유지에 필요한 생성을 돕는 실천들에 주목하게 만든다. 생산한다는 것은 취합하고 조합한다는 것이다. 낳는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세계의 거주가능성을 좌우하는 존재물의 연속성을 염려하고 생겨나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반전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키우기의 이상한 은유 대신에 감싸기에 관해 말하 는 것이 더 유용할 것이다. 생산의 문제는 모두 생성의 실제에 둘러싸여 있고 꾸려져 있다. 생산의 문제는 생성의 실제에 달려 있다. 번영이 언제나 생성에 달려 있었는데도. 우리는 성장이 초래하는 파괴를 잊고서 으레 성장을 궁지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수단으로 이해한다. "마이너스 성장'이 아니라 최종적인 번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커다란 변화가 새로운 상식이 되는 것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어떤 조건반사, 어떤 본능, 어떤 경시도 이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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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갈등은 생산과 생산의 결실을 분배하는 문제만을 중심으로 지난 두 세기의 역사를 조직함으로써, 지구의 물질적 조건이 갖는 한계에 짐짓 철저하게 눈을 감았다. 그러므로 녹색 계급은 생산양식의 분석에 의해서만 스스로를 규정해서는 안 된다. 녹색 계급을 다른 모든 계급들과 대립시키는 요소는 녹색 계급이 생산관계'의 자리를 제한하고자 하는 반면에 다른 계급들은 확장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과도기"라는 매력적인 완곡어법으로는 녹색 계급이 꾀할 아주 격렬한 반전을 제대로 강조할 수 없다. 바로 이 긴장 위에 새로운 계급투쟁이 자리한다. 핵심 문제는 이전처럼 생산체계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계급 갈등만의 문제가 아니라, 거주가능 조건을 유지하는 것과 생산세계 사이에 맺어지는 불가피하게 논쟁적인 관계라는 문제이다. 이 제2열의 긴장에서 상황의 새로움 전체가 유래한다. 규범에 맞는 계급들, 마르크스와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계급들 - 경제화의 관점에서 역사를 읽는 방식에 의존하는 계급들 - 은 거주가능성의 문제를 생산관계로 돌려보낸다. 반면에 이 떠오르는 계급은 정반대로 한다. 자명한 근대적 질서 아래에서 진정한 대립을 드러낸다. 계급투쟁 아래에서 또 다른 계급투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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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생산과 단절하는 가운데 자기규정을 위해 투쟁하는 녹색 계급은 생산관계에 생성의 실제를 덧붙인다. 생성의 실제는 생산관계를 가능하게 하면서 생산관계를 언제나 둘러싸고 에워쌌다. 그렇기 때문에 늘 인간 활동의 외부를 규정했다. 피에르 샤르보니에(Pierre Charbonnier)에 의하면, 녹색 계급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장소로서의 세계와 사람들이 살아가는 수단으로서의 세계가 동일한 울타리로 접합되어 있다는 점에 의해 정의된다. 그러므로 녹색 계급은 생산에 거주가능 조건의 회귀를 덧붙인다. 생산의 의지는 언제나 이 조건에 끼워 넣어져 있었다. 사회 계급의 규정이 실제로 (마르크스에게서도 볼 수 있듯이) 재생산이라는 핵심 문제에 늘 달려 있었을지라도, 경제화의 비중 때문에 자유주의의 전통만큼 마르크스주의의 전통도 재생산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과소평가하는 방향으로 떠밀려갔다. 계급투쟁은 뒤얽힌 지구사회 갈등이 아닌 적이 없었다. 오늘날 계급투쟁이 이러한 지구사회 갈등이라는 것은 더욱 명백해지고 있다. 경제화에 의한 판짜기는 이제 인간을 포함하여 지구생활자에게 자리를 내줄 수 없으므로 이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 36
IV. 새삼 합법적인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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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녹색 계급은 지구 차원의 거주가능성 문제를 떠맡는 계급이다. 따라서 역사와 심지어 지구의 역사에 대한 더 넓고 더 길고 더 복잡한 시각을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후퇴, 뒤쪽으로의 움직임, 거의 “반동적인" 입장처럼 보였던 것이 이제는 생명에 필요한 조건에 대한 감수성의 막대한 확산으로 변한다. 그래서 녹색 계급은 무언가를 기획하면서도 그것의 실질적인 조건을 파악할 역량이 없었던 옛 계급들과 충돌한다. 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거주 가능 조건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신나치주의자들은 정도가 훨씬 더 심했다. 이 점에서 녹색 계급은 더 멀리 보고 더 많은 가치를 고려하고 더 많은 전선에서 이 가치 들을 지키기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계급들보다 더 노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가 부여하는 의미에서 합리적이라고 자임할 수 있다. 녹색 계급은 다른 계급들이 포기하거나 배반한 문명화 과정을 재개하려고 열망한다. 아무튼 문명을 이어가는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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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계를 우리를 먹여살리는 세계와 명시적으로 연결하면서 개별 주체, 개별 영토를 위해 우리가 사는 세계를 기꺼이 떠맡으려는 것은 행동의 지평을 확장한다. 이 지평의 확장 덕택에 녹색 계급은 자신에게 역사의 방향을 규정할 자격이 있다고 자임할 수 있다. 다른 계급들은 생산과 국민국가의 지평에 가로막혀 생성의 실제가 갖는 중요성을 계속해서 부인하고 있다. 엘리아스가 제시한 비교를 계속하자면, 부르주아 계급이 상승기 동안 귀족의 너무 편협한 가치관을 비난한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녹색 계급은 위기 때문에 마비되고 근대 정치의 모험에서 벗어날 믿을 만한 출구를 찾아낼 수 없는 옛 지도층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바로 이처럼 행동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에서 이 새로운 계급은 자신의 활력, 자신의 잠재적인 규합 역량, 요컨대 자신의 긍지를 끌어낸다.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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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계급은 현재의 지배계급이 브뤼노 카젠티(Bruic Karsenti)가 말하는 주축계급인지, 즉 정치적 입장들을 자신을 중심으로 조직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심한다. 녹색 계급은 합리적인 것의 재규정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그때 생태주의는 여명기에서 벗어나 우발적인 운동이기를 그치고 특히 생산관계에만 갇힌 옛 사회 계급들과의 관계에 입각하여 자기 위치를 가늠하기를 그만둔다. 녹색 계급은 지금까지 "지도적"이었던 계급 들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이 계급들은 경제화를 제한하면서 생산의 한계를 설정할 줄도, 생성의 실제 쪽으로 향하는 큰 변화를 준비할 줄도, 단순히 국가 차원의 것일 뿐만이 아닌 출구를 찾아낼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본래 녹색 계급은 국내 정치와 국외 정치 사이의 배분을 변화시킨다. 외부의 땅이 국내 정치 안으로 들어온다. 고전적인 용어로, 자유주의의 전통 - 많은 부분이 사회주의의 전통에 의해서도 공유되고 있는 - 은 역시 자체의 개발 및 발전 계획을 저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지도층은 파국을 전혀 예견할 줄 몰랐고 이제 파국의 폭넓음에 직면하여 그 어떤 합리성의 이름으로 행동한다고 주장할 아무런 권리도 없다. 따라서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고 지금까지 자기가 이끈다고 주장하는 다른 계급들의 존중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어떤 정당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로 말미암아 다른 계급들의 경멸을 산다. 생산의 외부로, 그리고 국민국가에 의해 정해진 테두리 밖으로 행동의 지평을 늘리는 것, 이제부터 바로 이것이 형성 중인 녹색 계급의 책무이다. 이러한 것을 시도하는 덕분으로 이번에는 녹색 계급이 또한 다른 계급들을 이끌 희망을 품을 수 있다.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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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로운 방향설정은 가능한 한 빨리 명확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지도층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반동의 움직임이 풀려났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땅과 죽은 사람들의 옛 본보기에 따라 다소간 좁은 경계 안에서 보호를 추구하면서 정체성에 대한 애착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편협하게 규정된 영토는 택해야 할 방향에서 훨씬 더 멀어져 있다. 왜냐하면 옛 지도층이 근대화를 수용한다고 주장한 글로벌화의 꿈보다 거주가능 조건이 이 방향에서는 훨씬 더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반동분자들의 땅은 글로벌화 주창자들의 땅보다 훨씬 더 추상적이고 척박하다. 그것은 정체성, 죽은 사람들에 의해서만 규정될 뿐이다. 그것에 응집성을 부여하는 무수히 많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아니다. 그러므로 녹색 계급은 적어도 두 전선에서 싸워야 한다. 허망한 글로벌화와 동시에 국경 안으로의 회귀에 맞서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두 가 지 동향은 거주가능성의 문제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녹색 계급은 이 두 가지 경우에서 영토의 본질을 재규정 해야만 한다. 생산을 둘러싸고 허용하고 제한하고 통제하는 모든 것이 재규정되어야 한다. 녹색 계급으로서는 이 근대화와 글로벌화를 주창한 옛 계급들의 내부와 외부를 다르게 나눔으로써 서로 동맹을 맺어 자기 이익의 증진을 위한 다른 방식을 발견하자고 설득하기를 희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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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옛 주축계급들과 싸우는 녹색 계급은 땅, 영토, 국가, 민족, 국민, 애착, 전통, 한계, 경계와 같은 용어를 고유한 언어와 방식으로 규정하고 "진보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자력으로 결정할 권리를 스스로 인정받는다. 녹색 계급은 영토와 땅이라는 용어를 쇄신하여 거기에 많은 생명체를 완전히 다시 거주하게 했다. 이를 구실로 녹색 계급은 녹색 계급에 대해 "반동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비난을 부정한다. 오히려 계획을 앞당기는 것이나 반대로 뒤처지게 하는 것을 규정하는 중심축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단순화하자면, 사람들이 사는 장소로서의 세계와 사람들이 살아가는 수단으로서의 세계를 동일한 법, 정서, 도덕, 제도, 물질의 총체 안에서 서로 겹치게 해주는 모든 것은 진보적이거나 더 낫게는 해방적이라고 일컬어질 것이고, 이 중첩 관계를 약화시키거나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모든 것은 반동적이라고 말해질 것이다. 결과적으로 근대화 추진 계급들 전체가 근본적으로 시대에 뒤진 것처럼 보인다. 43
V. 정서의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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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들은 오래전부터 파국의 위협도 확실성도 그 긴급성의 단계에 어울리는 수준으로 대중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다. 그렇지만 위험신호는 40년 전부터 울리고 있다. 20년 전부터는 모든 이의 귓전을 때리고 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은, 특히 지난해에는 수천만명의 경험에 위협이 생생하게 각인되고 있다. 그런데도 반응이 일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정보 조작 선전전, 로비의 힘, 무기력한 정신자세만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수백만 활동가가 활발하게 전투에 뛰어들고 있다. 이런 유형의 적에 맞서려면 모여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이해하고 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이 대립이 왜 대다수를 위축시켜 불편하게하고 망연자실하여 행동할 수 없다고 느끼도록 만들기에 이르는가이다. 이 한없이 길어지는 "가짜 전쟁"에는 명백한 위협에 대응할 통상적인 역량과 너무나 반대되는 어떤 것이 있다. 그래서 파국의 확실성, 불안, 죄의식, 그리고 어려운 총동원을 마침내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가 필요할지를 계속해서 모색할 필요가 있다.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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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에 호소력 있는 전형적인 가치는 번영, 해방, 자유였다. 이 깃발들을 흔들자마자, 이 목표들을 가리키자 마자, 아무리 비겁한 시민이라도 용맹스러운 장수를 자처 했다. 바로 이 강렬한 정서로 말미암아 옛 계급들은 생산의 발전에 나섰고 반짝이는 부와 자유의 약속을 내걸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옛 계급들에게 이 번영, 해방, 자유의 가치를 전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고백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열광에 휩싸일 수 있겠는가? 이 정동이 새로운 방향으로 접어들지 않는 한, 생태학은 지겹고, 한계가 있으며, 과거로 돌아간다는 비난 속에서 늘 전진을 방해받을 것이다. 생태학이 문제 삼는 것이 바로 진보인데 어떻게 생태학이 "진보주의"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면서 경종을 울리고 군중을 동원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주장할 수있겠는가? 생태학은 "처벌 생태학"의 꼬리표를 결코 떼낼 수 없을 것이다. 처벌 생태학은 어떻게든 거주가능 조건의 유지 쪽으로 향한다 할지라도 웬만한 열광을 촉발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번영의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해방을 계속하겠다는 약속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자유의 이상을 유지할 수 있는가? 어떻게 발전(développement)의 약속에서 아직은 흐릿한 감싸기(l'enveloppement)의 약속으로 갑자기 넘어갈 수 있는가? 실제로 이 문제들은 모든 동원의 의향에 찬물을 끼얹는다. 48
[28]
따라서 자유에 연결된 정서를 다르게 재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정서는 역사의 흐름에서 끊임없이 변해왔다. 자유의 소극적인 이해는 개인으로 하여금 통치자의 속박과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다. 자유의 적극적인 이해는 공동체로 하여금 자율적으로 함께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다. 어느 쪽으로 이해하건 자유는 개인이나 인간 공동체의 경계를 미리 확정하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살기 위해 의존하는 세계가 사람들이 사는 장소로서의 세계에 포함될 것을 요구할 때에는 더 이상 경계 설정에 어떤 의미도 없다. 해방의 의미가 바뀐다. 이제 해방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에 마침내 마음 편히 의존하는 것이 된다! 생태학은 경계들의 개념과 위치를 재설정한다. 생태학은 한편으로는 지구시스템을 감싸고 있는 것의 "한계 내에 머무르려"고 시도해야 하므로 장벽들을 계속해서 뛰어넘으려는 근대의 열정에 반대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이 동일한 지구시스템의 과학에 힘입어 얼마나 한계가 잘못 알려져 있고 어떻게 한계가 우회될 수 있는 지를 알아차린다. 모든 주제에 관해, 그리고 모든 층위에서, 인간 집단이나 생물체만큼 국민국가의 층위에서도 생태학은 바로 옛 한계 개념들의 한계에 조사와 변경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므로 생태학에서 "해방'은 인간을 위한 생산만의 틀 안에서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에 의해 탐색된 자유 관념의 좁은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49
[29]
이전의 계급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흔히 땅, 민족, 국가와 연결되는 귀속, 정체성, 애착, 지역성, 연대, 집단생활, 일반대중에 관한 언뜻 보아 상반되는 개념들도 사정은 마찬 가지이다. 그런데 옛 근대인들이 상륙하는 땅은 옛날식의 진보주의자들이 뒤에 남긴다고 주장한 땅과 동일한 속성, 동일한 구성요소, 동일한 "본질", 동일한 "정체성"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적극적으로 재부여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처럼 의존을 새롭게 배워나가는 것으로 해방과 자율성 추구를 재규정할 수 있다. 우리가 의존하면 할수록 더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해방하는 속박"의 이러한 탐색은 우리의 관습에 얼마나 어긋나는 것인지! 50
[30]
녹색 계급은 자유와 해방의 가치를 물려받고 떠맡는다. 하지만 생산 개념과 부의 다소간 공정한 분배 개념이 제처놓은 자신의 실제적인 조건과 마침내 양립 가능한 의미를 자유와 해방의 가치에 부여해야 한다. 칼 폴라니가 제시했듯이 대지, 노동, 화폐는 양도할 수 없고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녹색 계급이 거주 가능성의 유지를 중시함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소유자들을 새롭게 만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카르트는 이를 예상하지 못했다! 소유는 세계를 인간이 소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계가 인간을 소유한다는 의미이다. 개발에 힘입어 "자연의 지배자 겸 소유권자"가 되는 것은 바로 그들이다... 생명체들은 자기 자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지구라는 행성, 또는 적어도 지구 위의 거주 가능한 아주 작은 부분을 서서히 생성했다. 이는 라틴어로 '쉬 제네리스(sui generis)'라고 하는 과정, 즉 스스로를 생성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생명체의 소유자는 당연히 생명체 자신이다. 51
[31]
이리하여 갑자기 자연은 보호해야 할 피해자가 아니라 우리들 인간의 소유자로 나타난다. "우리는 자신을 지키는 자연이다"라는 자연보호주의자(zadistes) 3들의 이 당당한 구호는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우리는 가련한 피해자 앞에서 뉘우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의 참된 소유자에 의한 힘겨운 뒷수습을 감내해야 한다... 이 반전으로부터 한 무리의 법률가들이 입법에서까지 결과를 끌어내고 있 는 중이다. 생활조건의 거주가능성을 유지하고 확대하고 복원할 수 있게 해주는 생성의 실제는 다시 찾아내서 돌 봐야 제격인 것이 된다.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유명한 인클로저 국면의 정반대이다. 갑자기 인간이 유폐된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정말로 감싸이고 에둘리고 둘러싸인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다. 이러한 가치의 전복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만들 것인가? "나는 의존한다. 이것이 나를 해방하는 것이다. 나는 마침내 행동할 수 있다."라는 이 표현을 어떻게 상식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어떻게 이것을 연대와 해방을 폭넓게 이해하는 새로운 토대로 만들 것인가?
[32]
우리는 현재 그토록 기다려지는 대중의 움직임이 불가피 하면서도 동시에 계속 늦어진다는 것을 이해한다. 정서 들은 무의식적 자동성을 만들어낼 수 있게 정렬되어 있 지 않다. 그리고 끔찍한 것은 정동을 하나하나 올바른 방 향으로 정렬하기에는 우리에게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이 다. 발전을 위한 동원의 톱니바퀴 장치가 된 조건반사를 자유주의자들이, 그리고 이어서 사회주의자들이 창안하 기 위해서는 여러 세기가 필요했다. 공통 문화를 구성하 는 요소들의 이러한 갱신이 뒤처져서. 옛 사회 계급들에 결부된 가치와 녹색 계급이 촉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 치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생겨났다. 녹색 계급은 이 전투 에 충분히 참여하지 않은 탓으로 정치 문화를 감정, 예술. 작품, 주제, 이미지, 이야기의 너무 좁은 범위로부터 벗어 나게 하지 못했다. 그 바람에 녹색 계급에게는 자신이 맞서 싸우는 계급들에 의해 야기된 정치적 열정을 기를 수 있는 미학이 심하게 결여되어 있다. 아미타브 고시(Amitay Ghosh)가 말하는 '대혼란(Grand Dérangement)"은 아직 녹색 계급을 충분히 흐트러뜨리지 않은 듯하다! 지금으로서는 정치생태학이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겁에 질리게 하고 권태로 하품하게 하는 위업은 달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생태학은 행동의 마비를 너무 자주 야기한다. 54
130~142
[녹색 계급을 위한 가이드]
루투르의 정치생태학과 슐츠의 새로운 계급이론
김환석
브뤼노 라투르,
1999년 저서, <자연의 정치학>
오늘날 지구적 생태위기에 대한 자신의 진단과 처방, 독특한 정치생태학 소개 : 근대성의 존재론적 특징인 비인간/인간의 이원론적 질서가 생태위기를 낳은 근본적 원인이며 따라서 탈이원론에 기초한 "공동세계의 점진적 구성"을 뜻하는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를 처방으로 제시함. 근대화의 길이 아닌 코스모폴리틱스에 따른 새로운 '생태화'의 길을 어떻게 모색할 것인가.
2013년 강연, 제임스 러브록과 린 마굴리스의 '가이아' 가설을 자신의 정치생태학에 수용하면서 이를 인류세의 신기후체제를 바라보는 자신의 기본 관점으로 채택함.
여러 책에서, 가이아 정치생태학을 통해 인류세의 여러 양상을 분석하면서, 지구적 생태위기가 왜 가이아 내부 세계들의 전쟁 상태이며 이러한 위기의 궁극적 해결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꾸준히 모색해옴. 이러한 가이아 정치생태학 연구를 바탕으로 이제는 인류세의 불평등(즉 계급) 문제까지 본격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작업을 덴마크의 젊은 사회학자 니콜라이 슐츠와 더불어 착수했는데, 그것이 바로 <녹색 계급의 출현>이다.
이미 <Down to Earth>에서 그는 기존의 계급운동과 환경운동은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는 데 모두 실패했으며 그것은 양자가 함께 결합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양자의 진정한 결합을 위해서는 우리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오랜 이분법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특히 사회계급과 경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우리 유물론의 기초로서 삼는 것을 폐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함.
좌파 유물론의 정치는 혁명을 일으키는 데 실패했는데, 왜냐하면 물질세계 자체에 대한 그들의 정의가 추상적 관념적이어서 실재와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라투르는 "지구생활자로의 지향이 부여하는 신유물론을 옹호하면서, 구체적 물질성의 실재인 영토적 위치에 의해 정의되는 지구사회적(geo-social) 계급들은 결코 비인간들을 배제한 사회적 계급과 같은 방식으로 불평등을 개념화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
이런 지구사회적 계급을 사유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생산 시스템 분석을 통해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는 비인간 자연이 인간활동을 위한 '맥락'이자 '자원'일 뿐이라는 이원론적 관념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산 시스템 대신에 우리는 이원론을 벗어난 생성 시스템을 통해 사유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제시하면서,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서 생산 시스템과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1. 그것은 지향 원칙에서 다르다. 근대성은 다른 무엇보다 인간 자유를 중요시하지만, 우리는 이제 의존성의 원칙에서 새로운 권위를 추구해야 한다. 생성의 개념은 의도적으로 반작용의 역량을 지닌 수많은 행위자들 사이의 갈등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오직 인간이 사용하기 위해 상품을 생산하는 것을 포기하고, 애착을 배양함으로써 비인간들을 포함한 모든 지구족Terrestrial(지구생활자로 번역함)을 생성하는 것을 구추한다.
2. 생성 시스템은 인간에게 부여하는 역할이 다르다. 근대인에게 인간은 다른 모든 객체와 같은 '자연적' 존재이거나 또는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할 능력이 있는 주체 즉 '사회적' 존재였다. 기후변화는 이 양자의 정의를 모두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이란 용어를 모두 포기하고 스스로를 '지구족'의 일원이라 부를 수 있지 않느냐고 제안함.
3. 두 시스템은 책임지는 운동의 유형에서 차이가 있다. 근대인은 메켜니즘을 따르는 데 만족하지만, 지구족은 새로운 변화를 창출하는 발생(genesis)의 운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생성 시스템은 생산 시스템과는 달리 인간만이 저항할 능력이 있는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비인간들 역시 변화의 행위자로서 행동할 가능성을 창출하기 때문에, 이는 인류세에 "지구생활자를 위한 투쟁에 나설 잠재적 동맹자의 폭을 상당히 늘려줄 것이다" 지구생활자는 근대인이 '자연'에 부여한 정치적 역할과는 분명히 다른 역할을 하는 행위자이다.
니콜라이 슐츠, 라투르의 이러한 아이디어에 영감을 받아서 본격적으로 인류세의 새로운 계급이론을 정립하려 연구함.
라투르의 생성 시스템 안에서 계급들은 생산의 과정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경제적 위치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의 과정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영토적 위치에 의해 정의된다. 경제적 자원에 대한 접근에 의해 정의되는 사회적 계급들과는 달리, 지구사회적 계급들은 사회집단들이 번영하고 생존하도록 허용하는 보다 광범위한 존재의 물질적 조건들(땅, 식량, 물, 옷, 집 등)에 대한 의존과 접근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즉 사회적 계급들은 생산 수단에 대한 그들의 소유에 의해 정의되지만, 지구사회적 계급들은 재생산의 수단 또는 생존의 수단에 대한 그들의 접근에 의해 정의된다.
따라서 21세기 지구사회적 계급투쟁을 정의하고 '지구-역사'의 방향을 형성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존재의 그러한 수단과 조건에 대한 투쟁, 즉 거주가능한 땅, 흙, 영토 및 생존기회들에 대한 투쟁이다.
지구사회적 계급들의 상이한 위치를 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집단들을 정의하는 재생산의 연결망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상이한 사회집단들이 그들의 존재, 재생산, 생활양식에 속하도록 허용하는 물질적 조건들은 무엇인가?
상이한 사회집단들이 살고 재생산하기 위해 의존하는 물질적 조건들의 리스트를 작성함으로써 각 사회집단이 어떤 영토 또는 땅에 사는지 묘사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의 생계를 확립해주는 다소 거주가능한 연결망들은 무엇인가?
상이한 사회집단들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요인들 - 숨 쉴 공기, 교통, 에너지, 물, 식품, 봉급, 노동권, 정책 등-은 무엇이고 여기에 사회집단들이 접근하도록 허용하거나 불허하는 요인들은 무엇인가?
지구사회적 집단들을 확인하고, 재분류하며, 서로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누가 다른 누구의 영토를 점유하고 있는가를 즉 누가 누구를 착취하고 있는가를 그려낼 수 있다. 생성시스템에서 착취는 더 이상 생산수단의 소유로부터 취하는 잉여가치에 기초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제 착취는 어떤 집단의 생활양식이 다른 집단이 거주가능한 영토를 차지할 가능성을 빼앗음으로써 취하는 '잉여존재'에 기초한다. 즉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흙에 기생하고, 다른 사회집단들이 비옥한 영토를 차지하는 걸 불허하며, 타자들이 거주가능한 흙에 접근하는 걸 불허하는 생활양식이다.
오늘날 전지구적인 기후위기와 팬테믹에도 불구하고 아직 기존 '근대화'의 정치를 대체할 만한 '생태화'의 정치가 출현하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라투르와 슐츠는 생성시스템에 기초한 지구사회적 계급들의 하나로서 '녹색계급'이 출현하여 이러한 생태화의 정치를 주도할 수 있는 조건들을 76개항의 메모 형식으로 밝혀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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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을 위한 메모 3]
녹색계급이 온다 - 라투르 신작에 대한 몇 가지 상념들
김홍중
플라즈마plasma
라투르의 세계는 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부구조나 상부구조로 이원화되어 있지도 않고, 실재/상징/상상계로 나누어져 있지도 않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네트워크와 그 요소들 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 네트워크와 그 요소들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들은 단순히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작용한다. 즉 변화를 생산한다. 이처럼 새로운 상태를 생성시키며 다른 존재자들에게 영향을 행사하는 것을 그는 '행위자actor'라고 부른다. 네트워크도 행위자고,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도 행위자다. 행위자-네트워크다.
서구 철학의 역사에서 라투르보다 더 민주적으로 행위자 개념을 구상한 자는 거의 없다. 라투르에게는 인간만이 행위자인 것이 아니다. 세균도 과속 방지턱도 실험실의 측정 기구도, 허리케인도, 방사능물질도, 지구 즉 가이아도 행위자다.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은 라투르 철학 안에서는 본질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세계는 행위의 힘, 행위능력agency을 가진 무수한 존재들로 가득 차 있다.
라투르가 그려낸 이 네트워크 존재론의 핵심에는 사실 이 모든 생성된 존재자들이 순식간에 소멸하는 급작스런 계기에 대한 놀라운 인식이 숨어 있다.
플라즈마, 그것은 네트워크들이 그로부터 솟아나고 꺼지는 바다 같은 것이다. 그것은 현존하는 네트워크의 외부, 연결된 것들의 사이 실현된 것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방대한 원천이다.
플라즈마 개념은, 라투르 철학이 현실의 확장과 네트워킹만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것은 생성뿐 아니라 붕괴와 소멸, 즉 파국에 대한 철학적 사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연결을 통해 형성된 네트워크라면, 그 모든 것은 특정 조건이 만들어지면 플라즈마로 흩어져 사라질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은 임시로, 잠시,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의 일시성, 근본적 취약성, 붕괴 가능성에 대한 감수성. 하여, 근대 문명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트나 인류라는 생물학적 종도 소멸하고 멸종할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생성이 아닌 사라짐의 가능성을 더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라투르 철할도 예외는 아니다.
인류세
라투르는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생태학적 위기를 진단하고 이에 대한 대응을 제시하는 여러 작업을 수행했다. 2004년 <자연의 정치>, 2015년 <가이아와 마주하고> 2017년 <지구와 출동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2021년 <나는 어디에 있는가?> 2022년 <녹색계급의 출현>
이러한 흐름의 배경에는 폴 크루첸과 유진 스토머가 제안 한 '인류세'라는 용어가 가져온 충격파가 있다. 이들은 2000년 짧은 기고문에서 이렇게 쓴다. "인간 행위가 지구와 대기에 미친 중요하고 점증하는 영향을 고래보건대... 지질학과 환경학에서 인류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참으로 적절하게 보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재의 지질학적 시대를 '인류세'라 부를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인류는 수 천년 동안, 어쩌면 아마 다가올 몇백만 년 동안 주요한 지질학적 힘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시대'라는 의미를 지닌 '인류세'는 약1만 년동안 지속된 충적세 이후의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를 지칭한다. 인간 활동이 지구시스템을 변하시킬 정도로 강력한 '지질학적 힘'이 되었고, 이 시대가 몆백만 년 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이 말하는 변화는 왕조나 정권 교체 혹은 단지 수백 년 지속하는 역사적 시대의 교체와 비교할 수 없다. 그보다 훨씬 장구한 지구와 바다와 대기의 시간이 이야기 되고 있다. 매우 심원하고 근본적인 변화이며, 우리의 일상적 지각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스템 수준의 변화다.
그렇다면, 충적세에서 인류세로의 이 지질학적 전환은 인간과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 의미는 인간 행위에 의한 변화가 다시 인간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로 회귀하는 부메랑적 재난의 시대라는 점에 집약된다. 지구 온난화, 대양의 산성화, 거대 숲의 파괴, 생태계의 교란, 멸종 등과 같은 재앙적 현상들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인류세는 인류 전체와 다수 생명체의 "생태-존재론적 위급 상황"을 가장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강력한 기표이고, 근대적 사고와 감수성을 다시 사고하게 하는 (다음과 같은) 지적 충격을 야기했다.
1. 이제 인간을 '자연 앞의 연약한 피조물'로 표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근대인은 탄소 자본주의 문명의 진행 과정에서 지구시스템의 기상학적 조건, 바다, 토양, 숲, 그리고 다른 생물 종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변용을 가했다. 약 200여 년 동안 인간은 거의 그리스 신화의 여러 신들에 비견할 만한 유사-자연적 혹은 초-자연적 힘을 발휘해온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통치하느냐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물질적(지질학적) 조건 전체를 바꾸는 괴력을 가진 가장 강력한 집합 행위자인 인간의 힘이 어떻게 통제/통치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시급하게 제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구의 생태적 조건을 결정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이제 인간이며, 인간은 자기 자신의 멸종 가능성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2. 1945년 전후 인류세가 시작되었다는 진단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더 이상 사회적 시대 규정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20세기 후반에 사회학자들은 다양한 시대를 명명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시대를 이해할 것을 제안, 촉구했다. 포스트 포디즘, 포스트 모던, 후기 근대, 액체 근대, 위험사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류세라는 용어는 이런 사회적/역사적 시간보다 더 근원적인 수준에서, 특정 국가들이 아니라 지구라는 행성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지구생활자들terrestres'의 운명적 시간을 규정하는 '지질학적' 시대, 혹은 '지구의 시간'에 대한 인식과 관심을 구체화한다. 인류세는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지리-사회적 문제"를 전면화한다. 사회를 자연과 분리된 인간들의 활동 영역으로 보는 좁은 사회관은 이제 실효성을 상실한다.
파국주의 catastrophism
3. 인류세는 2-세기를 지도한 진보, 번영, 발전 같은 가치들을 지속 불가능하게 한다. 이 관념들은 기본적으로 과거보다 더 나아지는 상태로의 전진을 역사의 원리로 본다. 미발전된 현재와 더 발전된 미래 사이의 낙차가 인간을 움직이는 힘, 인간이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는 힘이다. 20세기의 인간은 생산자다. 그는 만들고, 생성시킨다. 생산하는 삶의 도덕적 우월성은 20세기를 관통하며 거의 지배적인 가치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인류세는 근대의 이 '생산주의' 혹은 '발전주의'가 실제로는 지구시스템의 평형을 교란시키는 '파괴'였다는 역설을 섬뜩하게 드러냈다. 생산할수록 파괴되었고 발전할수도록 파국 가능성이 짙어졌던 것이다. 창조와 생산과 번영이 있다고 생각한 모든 곳에서 실제로는 광범위한 파괴, 파괴적 해체 작용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다.
인류세는, 근대적 발전/진보 개념의 실천적 가능성이 소진되었음을 냉정하게 드러낸다. 발전주의는 '생산=파괴'의 이 역설을 해소하지 못한다. 생산이 감추고 있던 파괴의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지금, 우리는 오히려 파괴의 측면을 직시하면서 역사의 전개를 상상하고 서사해야 한다. 즉, 미래는 진보/발전이 아니라 임박한 파국으로 대표되는 시간이다.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얼마나 더 성장하고 개발하고 그래서 소비하고 향유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해체하고,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어떻게 파국을 막을 것인가? 어떻게 파국적 재난들이 연쇄적으로 쇄도하는, 점점 더 거주가능한 땅이 사라지고, 새로운 위협들이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생존'할 수 있는가? 고통의 불평등, 파국 속에서의 붕괴의 불평등을 어떻게 교정할 것인가? 이미 고갈된 듯이 보이는 우리 공통의 미래를 어떻게 창조해갈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헤러웨이가 말하듯이, 우리는 인류세를 최대한 단축시켜야 한다. 혹은 세르가 제안하듯이, 사회계약을 자연계약으로 확장시켜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시대적 과제다. 환언하면, 미래는 이제 파국이라는 관점을 통해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인류세는 '파국'의 시대가 아니라 '파국주의'의 시대다. 최종 파국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나, 그에 대한 예견과 고뇌가 그것을 막기 위한 실천과 제도가 사회를 구성하는 근본 원리가 되는 시대다. 이를 위해 우리는 파국이라는 음울한 개념을 회피해서도, 그것을 환상적으로 우회할 해도 안된다. 돌파해야 한다. 21세기에 파국은 상상도, 레토릭도, 도덕적 과장도 아닌 임박한 실재다. 파국을 언어화하는 사람들은 시인이나 철학자가 아니라 자연과학자들이다. 자연과학이 말하는 파국은 비명과 절규가 들려오는 유대-기독교의 종말론적 풍경이 아니라, 그래프로 표현되고 수식으로 계산할 수 있는 사실의 질서에 더 가깝다.
우리 시대의 정치가 환멸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위에서 제시한) 근본 질문들에 대한 응답을 제공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경제, 경영 담론이 공허한 것은 그 안에 기후변화나 멸종, 지구 생태계의 파국적 교란과 같은 현상에 대한 고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종교가 영성적 울림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저 공통의 문제 영역, 수많은 생명의 생사를 가르는 문제에 대하여 종교가 때로는 반동적이고 때로는 너무나 상투적인 대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파국을 사유하는 아무런 능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파국주의다. 그것은 파국을 사고하고, 그것과 교섭하고, 그것을 통치하려는 지식, 실천, 윤리, 미학의 앙상불이다. 파국주의는 단순한 비관이나 우울이 아니라, 파국을 넘어서려는 의지와 역량을 조직하는 정동을 요청한다. 그것은 희망이다. 희망은 낙관이 아니다. 낙관은 희망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희망이다. 그것은 자동적이고, 큰 노력이 요구되지 않으며, 자명하고 합리적이다. 희망은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것과 '다른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다. 희망은 언제나 희망조차 불가능한 것과 결합한다. 파국주의는 희망을 요청한다. 희망이 없는 파국주의는 그저 세련된 비관주의에 그칠 것이다.
파국주의를 조직하면서 인류세를 살아가는 존재들은 '서바이벌'을 사적이고 이기적인 과제가 아니라, 공적이고 공통적인 과제로 인식하게 된다. 인류세는 인간의 생존이 꿀벌의 생존이나 북극곰의 생존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보편화한다. 즉 복수의 생존들의 얽힘과 의존이 자명해진다. 이런 점에서 인류세적 주체가 꿈꾸는 생존은 언제나 '함께-생존하는 것'이다. 여기서 방점은 '함께'에 놓인다. 인간이 근대를 통틀어 다른 모든 생명체보다 우월한 존재이며, 특권적 존재로 스스로를 이해해 온 이상, 이 '함께'의 구성은 인간 스스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스스로를 '방법적으로', '이념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강등시켜야 한다. 인간이 무시했던 비인간 생명체들의 높이로 내려가야 한다.
녹색계급
문제는 '주체'다. 인류세의 최대 과제가 '함께-생존하기'라면, 이 과제를 수행할 주체는 누구인가? 라투르의 최근 논의는 이 지점을 향한다. 가령 70여 개의 단상 메모로 이루어진 신작 <녹색계급의 출현>에서 그가 제안하는 '녹색계급' 개념이 그것이다.
"(라투르) 사실상 근대 시기의 특이한 점 중의 하나는 전혀 물질적이지도 않고 영토적이지도 않은 물질의 정의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행성의 온도가 평균 3.5도 상승하도로 무심코 내버려 둘 수 있거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 동료 시민들에게 여섯 번째 멸종의 대리인 노릇을 떠맡길 수 있는 사람을 어떻게 유물론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 생태학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항상 이야기해왔다. "조금 더 노력하세요. 유물론자 여러분, 진실로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는 녹색계급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장소로서의 세계와 사람들이 살아가는 수단으로서의 세계"를 동일시하는 자들이자 "지구 차원의 거주가능성을 떠맡는 계급"이라고 정의한다. 녹색계급이 20세기의 성장 신화를 벗어난 주체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에게 쟁점이 되는 것은 생산이 아니라 거주 가능성이다. 삶이다. 생산의 확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주할 수 있는 지구환경의 유지를 우선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녹색계급이 어떤 존재들인지 우리는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실재로 우리 주변에는 이미 시대의 문제와 맞서 새로운 생각, 감각, 감정, 미학, 그리고 자연과학적 지식으로 주체화하여 점점 더 연결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왜 이들을 굳이 '계급'이라 불러야 하는가? 그것은 혹시 라투르가, 인류세의 위기와 맞서는 주체를 좀 더 전투적인 방식으로 호명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계급이란 용어에는 강력하고 노골적인 정치성이 장전되어 있다. ... 라투르는 계급 개념의 이 전투성과 절박성을 되살리고 싶은 듯이 보인다. 다만 라투르는 여기에 두 가지 유보조항을 건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이 말하는 계급 관념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 즉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계급 위치가 구조적으로 결정된다는관념이 철회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류세의 문제는 생산이 아니라 파괴를 중심으로 회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도 생산관계가 아닌 생명의 파괴 가능성의 차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요컨대, 녹색계급은 파국과의 거리에서 규정되는 계급이다. 둘째, 부르디외 사회학의 계급 개념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 부르디외는 마르크스의 '투쟁하는 계급'을 '구별짓기하는 계급'으로 전환시켰다. ... 계급은 상징적이기 이전에 물질적인 것이고, 샐재적인 것이다. 이를 회복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라투르가 구상하는 녹색계급은 상승하는 자본주의의 몫을 둘러싼 투쟁의 주체도 아니고, 문화적/상징적 재화를 통해 사회적 위치를 두고 경쟁하는 주체도아니다. 녹색 계급은 자본주의의 꿈이 파상된 폐허에서 생존을 욕망하는 자들의 연대이다. 이들은 더 많은 생산이라는 패러다임에 갇힌 자들과의 불가피한 적대를 구성한다. 이들은 또한 부르디외가 설정한 좁은 의미의 '사회' 내부에 머무는 자들이 아니라, 사회와 자연이 서로 구멍 뚫린 채 삼투하여 상호작용하는 바로 그런 고통의 지점들(피폭당한 신체들, 구멍뚫린 오존층,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침투한 노동자들의 호흡기, 환경 난민들)에서 형성되는 주체다. 이것이 바로 라투르가 말하는 21세기적 유물론적 주체가 아닐까 싶다.
아무개-되기
그렇다면, 녹색 계급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라투르는 자신의 신작에서 이 질문에 대해 구체적이고 충분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상해 보면, 그는 아마도 ANT이 원리에 기초하여 계급 형성의 과정을 생각할 것이다. 즉, 네트워킹을 통한 연결이 그것이다. 물론 그렇다. 연결만이 계급, 즉 집합적 주체를 만드는 유일한 원리다. 하지만 여기서 더 물어져야 할 것이 있다. 이 연결은 왜 일어나는가? 녹색 계급을 이루는 인간들은(혹은 비인간들은) 어떻게, 그리고 왜 서로 연결될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녹색 계급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의 방식으로 주체화된다. 내가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한 개념을 빌려 말하자면 '파상'이다.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많이 깨닫고,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은 정체성을 확보함으로써 녹색 계급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상실화 환멸을 통한 각성을 요청한다. 생각해보라. 인류세적 주체는 파국 앞에서 만들어지고, 파국 앞에서 서로 연결된다. 이들은 더 좋은 미래를 위해 함께 싸우고 전진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 좋은 미래를 박탈당했음을 통감하는 자들이다. 이 박탈감, 좌절감, 파국에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분노, 이런 강력한 정동은 이들에게 이미 부여된 사회적 정체성들을 벗겨낸다. 새로운 주체성은 과거의 정체성들에 부가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들이 깨져나간 자리에서 생성되는 희미한 주체성이다.
예를 들어, 기후 파국 앞에서 '교수'란 무엇인가? '기업가'란 무엇인가? '작가'란 '예술가'란 무엇인가? 교수, 기업가, 작가, 예술가라는 상, 더 나아가 인간이라는 상이 깨지고 파열될 때, 비로소 파국 앞의 '생명'이라는 공통 기반이 드러난다. 원전 참사 앞에서 나는 교수도 작가도 예술가도 아닌 인간이다. 더 나아가, 나는 고사리나 개, 물고기나 흙과 구별되지 않는 한 지구적 존재다. 뱃속에 플라스틱 쓰레기를 가득 채운 채 죽은 알바트로스 새들의 시체를 볼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아이들의 혈관, 장기, 뇌에 침전되는 미세 플라스틱의 힘을 느끼고 전율한다. 이 전율 속에서, 특권적 존재로서 인간이라는 상이 파괴되고, 우리는 알바트로스와 동일한 세계를 살아가는 생명체로 스스로를 인식한다. 즉, 우리가 알바트로스다. 내가 알바트로스다. 아니 저 알바트로스가 나다.
이 처럼 인간이라는 존재를 둘러싼 겹겹의 환상 구조를 파괴하고 헐벗고 가난해짐으로써 파국 앞의 생명적 평등성까지 내려온 존재들을 나는 <은둔 기계>에서 '아무개'라 불렀다. "진정으로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재난이다. 재난 속에서 우리는 모두 생명이 된다. 국적, 나이, 계급, 젠더, 종교, 인종과 같은 속성이 벗겨져나가는 그 궁극적 상황에서, 우리는 생존해야 하는 생명체 그 자체로 나타난다. 그 생명체의 이름이 '아무개'다. 21세기의 참된 주체는 자신의 살이 오염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 그것으로 아픈 자, 그것을 걱정하고, 그것이 문제적임을 느끼는 아무개다. 아무개들은 사태의 잠재적 피해자이며 행위자다. 아무개가 된다는 것은, 세계를 공유된 위험 공간으로 인지하는 것과 동시적이다. 아무개의 용기는 그의 두려움에서 나오고, 좌절감에서 나온다. 아무개는 선험적으로 규정된 주관이나 사회적 위치가 아니다. 선험적 주체성과 사회적 위치가 헐벗으면서 드러나는 생태적 감수성의 주체, 모두에게 열려 있는 잠재적 주체성이 아무개다"
아무개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실체적 주체성이 아니다. 아무개의 표지는 없다. 우리는 아무개를 외면으로부터 식별할 수 없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강도다. 누구나 약간씩은 아무개다. 더 아무개 쪽으로 변화된 주체들이 있고, 아무개의 세계에 발도 들여놓지 못한 주체들도 있다. 하지만 아무개-되기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환경 재앙의 충격 속에서, 지구라는 별의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 속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 속에서 우리는 아무개가 되어간다. 우리는 조금씩 20세기적 사유와 삶으로부터 멀어져가고, 미지의 21세기 속으로 헐벗어간다. 우리는 파국에 강박되어 있다. 파국은 우리를 멈추게 하고, 헐벗게 하고, 아무개가 되게 한다. 세계를 파괴의 관점에서 보게 한다. 녹색 계급은 이 헐벗음이라는 체험 속에서 형성되는 주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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