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백_일홍 2022. 11. 2. 20:34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최유미



서문

심포이에시스,
모든 생명은 그렇게 다른 무언가와 함께하는 공~산의 체계 속에서 생산된다. 5

오토포이에시스,
하나의 막을 가지며 그 안에서 여러 성분들이 하나의 계를 이룬다. 

생명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법은 개체성을 중심에 둔다. 사회에 대한 전통적 접근법은 개인을 중심에 둔다. 

인간예외주의, 
서구의 인간학이 규정하는 인간은 만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이지만 다른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예외적인 존재이다. 

인류세라 불리는 생태위기와 기후위기, 이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가장 시급히 폐기되어야 할 것은 인간예외주의의 인간학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인간학에 기반을 둔, 정치와 윤리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6

해러웨이의 물음은 우리가 더 이상 개체가 아니라 공-산의 존재라면, 우리의 윤리와 정치는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에 관한 것이다. 7


공-산의 의미
현실적 공산주의가 합의하는 모든 소유관계가 철폐된 그날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개체는 중-생이고 모는 생명체는 공동체다. 이 때 중-생은 평등하지 않고 공동체는 어떤 합일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있기 때문이다. 상생이란 상호 의존적 관계에 충실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7

유한한 생명은 반드시 '무엇'을 필요로 하고, 누구인자와 무엇이 된 자의 권력 관계는 당연히 불평등하다. 하지만 누구와 무엇이 항상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폭력이 없고 이용이 없는 무구한 위치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일방적인 폭력도 일방적인 이용도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성이 공-산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한번도 공-산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적인 지배를 반대하기 위해서 무구함에 기대는 것은 현실적인 대처 능력을 잠식하고, 논쟁을 불가능하게 하고, 특권적인 위치를 만든다. 

문제는 어떻게 권력을 다르게 작동시킬 것인가에 있다. 현실은 타자와 하나로 합일되는 행복한 파라다이스가 아니다. 그렇다고 적과 동지의 경계가 뚜렷한 전쟁터도 아니다. 관건은 하나와 둘 사이의 어떤 지점을 상황 속에서 발견하는 것인데, 그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11

삶은 철학이다. 하지만 삶의 이야기는 하나가 아니고 일상은 일반화하는 이론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다른 삶을 원한다면 이야기를 바꾸어야 한다. 11

우리는 정치적으로 생태적으로 심한 파괴와 폭력의 세기를 살고 있다. 우리에게는 한정된 풍요와 제한된 자유를 누리는 삶, 공-산의 세계에서 더 잘 살고 더 잘 죽기 위한 끌없는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1장. 개와 인간, 기묘한 친척

페미니스트인 해러웨이는 정체성에 근거한 정치를 반대하는 글을 써왔다. 그의 문제의식은 정체성에 근거하지 않고 어떻게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정치를 기획할 것인가에 있다. 

해러웨이가 정체성을 문제시하는 이유는 정체성의 정치는 필연적으로 정체성 바깥의 존재들에 대한 배제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체성으로는 현실을 잘 설명할 수 없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다. 현실에서 정체성을 가르는 기준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21

어질리티 경기에서, 
만약 인간 쪽이 엄마가 되어버리면 경기의 흐름을 망친다. 그것은 상대를 신뢰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불안하고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의 신뢰를 저버리는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자신들이 동물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일 게다. 23

자연문화

페미니즘이 기대고 있는 이분법 두 가지.
. 젠더-섹스 구도, 시몬느 보바르, 생물학적 결정론을 논파하기 위한. 
. 여성의 몸을 자연과 동일시하면서 긍정하는 것. 
자연성은 극복되어야 할 수동적 성질이 아니고, 찬양되고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 된다. 반면 남성 주도의 문명은 자연성에 반대되는 인공적인 것으로 자연성의 결핍 혹은 자연성의 훼손으로 간주되었다. 29

<반려종 선언>
자연의 내파, 
자연은 문명의 자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호되어야 할 고귀한 무엇도 아니다. 처음부터 자연문화였다. 자연과 문화는 분리된 채로 서로 교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 불가능한 자연문화임. 

개왜 사람은 그들 사이의 현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으며, 그것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관계였다. 자연문화는 종과 종의 상호 의존성을 말하는 용어이다. 30

인간만이 진정한 행위주체라는 깊은 신앙심을 가진 우리 근대인들이 자연문화의 실상을 다시 배우기 위해서, 개는 아주 적절한 형상이다. 그래서 개와 인간의 역사를 주인과 노예 이야기로 환원하지 않고 다시 이야기하기에 익숙해진다면, 다른 관계들, 가령 성적 차이의 관계, 가축과 인간의 관계, 기계와 인간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도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과 개는 세 가지 층위의 자연문화의 시간들을 함께 살아온 반려종이다. 
진화적인 시간들
개체와 개체의 생존 시간
역사적인 시간들

반려
중요한 타자
가장 소중한 자가 동종이나 동류일 필요는 없다.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는 현저한 타자성에 대한 인정이 내포되어 있다. 상대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전제되지 않으면 진실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해러웨이가 말하는 반려종이라는 용어는 생물학적이고, 철학적이고, 물질과 기호가 함께하고, 정신분석학적이자 정치경제학적이라는 4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 

1)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개와 인간은 반려종이다. 
진화생물학
세포내 공생, 발달생물학
후성유전학
ㅡ 세포를 나누는 친척이 되는 것이지만 부계와는 무관하다. 

2) 철학적인 것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은 차이를 정의하는 방법이다. 
반려종은 차이에 관한 말이다.

3) 물질-기호론적인 것
반려종이라는 말은 임의적인 기표가 아니라, 밥을 나누고 몸을 나누는 관계를 뜻하는 말의 물질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4) 돈이 결부되어 있다. 

진화 이야기

개와 인간의 공진화
발생생물학, 에코-에보-데보 이론
진화는 유전자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태학적-진화론적-발생학적인 것이 공통으로 영향을 주는 것임.
비고. 신다윈주의 

동물이 돌아보았을 때, 철학자는 응답했는가?

데리다는 인간에게 한정되어 있던 타자성에 대한 논의를 동물로 확장하는 중요한 일을 완수했다. 그는 동물들을 반응기계가 아니라 나에게 시선을 보내는 절대적인 타자로 보았다. 하지만 상대의 얼굴에서 고통만을 보려 한다면 오히려 다른 많은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일이 아닐까? 그것은 그날 아침에 그 공야이가 기대한 적절한 응답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함께 일하고 함께 노는 것은 상대에게 호기심과 경의를 가지고 상대를 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고, 상대의 고통에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53

놀이 혹은 깊은 대화

통상 동물의 성욕은 생식본능에 따르는 것이지만 인간의 성욕은 생식과 무관한 것이라고 여긴다. 생식과 무관하게 성을 욕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는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중요한 척도다. .. 하지만 욕망할 수 있는 능력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성욕의 경우가 그렇다. 강한 성룍은 대단한 능력이지만 여성과 남성이 동일하게 대접을 받지 않는다. 여성의 성욕은 병적인 것이고, 위험한 것이고, 심지어 무서운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의 비댕칭적인 성적 규범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은 대개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첫 번재 방식은 남성에게도 여성만큼의 규범을 요구하는 것으로 포르노 금지 투쟁, 성매매 퇴출 운동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저항은 이성애 규범을 오히려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또 하나의 방식은 억압된 성적 욕망의 전면적인 해방을 위한 정치투쟁이다. 퀴어 축제, 동성결혼의 합법화 투쟁 등, 다양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긍정을 요구하는 투쟁들이 그것이다. 이들은 생식과 무관한 성욕을 그 자체로 긍정한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 해방적이라면, 부정된 성욕을 되찾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성욕이 모든 욕망의 왕좌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욕은 여러 욕망 중에 하나이고, 각각의 욕망들은 각기 다른 색깔, 다른 질을 가지고 있기에 성욕만 유별난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60

카이엔과 웰렘의 성적인 놀이는 해러웨이와의 키스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을까? 이들의 행위는 잉태와는 처음부터 거리가 멀고 그렇다고 원초적인 성욕의 분출과도 거리가 멀다. 

존 발리의 SF 단편 소설, <시력의 지속>
맹인이자 동시에 농아인 사람들이 건설한 공동체, 그들은 오직 촉감에 의지해서만 대화를 한다. 이들의 대화는 섹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생식으로부터의 용감한 이탈이 아니라 아예 그 전제마저 던져버린 몸들의 깊은 대화, 그들은 접촉을 통해 먹고, 접촉을 통해 상대를 알고, 접촉을 통해 자신을 알린다. 

카이엔과 웰렘 역시 깊은 대화를 나누는 중이고 서로를 훈련하는 중이자, 서로를 아는 중이자, 서로의 몸에 각자의 이름을 만드는 중이다. 61


2장 심포이에시스, 혹은 공-산의 사유

공-산은 모두 힘을 합쳐서 무언가(대상)을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상대가 나의 몸을 만들고, 나는 상대의 몸을 만든다. 상대가 만들어준 나의 몸으로 다시 상대를 만들기에 참여한다. 그래서 사실상 나는 상대와 함께 그의 몸을 만드는 셈이다. 이는 상대가 나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곧 기계적인 평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분성이라 할지라도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모두 갖지는 않고, 능동과 수동의 양도 같지 않다. 그러므로 공-산의 또 다른 함의는 만들기에 개입되는 모든 주체들의 권력이 동등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70

박테리아와 세균의 공-산

생물은 기본적으로 공-산의 존재임을 가르쳐준 사람은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다. 마굴리스는 세포, 조직, 기관, 그리고 종들은 박테리아와 고세균의 공생을 통해 진화해왔다고 주장했다. 

전통적인 진화론자들은 세대를 거듭하는 차이의 누적이 계통수의 분기를 가져온다는 점진적인 변이설을 주장한다. 한마디로, 개별종의 개체군에서 무작위적인 유전적 변이가 발생하여 진화하고, 이는 계통수의 분기로 표현된다. 

새로운 형태의 생명은 거미줄같이 복잡한 종 간의 관계들 속에서 은밀한 썩임을 통해서 출현하고 그 주된 역할을 박테리아가 했다. 

"움직이고, 접합하고, 유전자를 교환하고, 우위를 차지하면서, 원생대 동안 긴밀하게 연합했던 박테리아는 무수한 키메라를 만들어냈다. 이종 세포 간의 신체적인 합병을 통해 유성생식의 감수분열, 예정된 죽음, 복잡한 다세포성이 고안되었다" 73

세포 내 공생 가설. 

"상실된 변이"
마굴리스 가설처럼, 진화가 서로 다른 가지의 이종횬효적인 결합에 의한 새로운 종의 탄생 사건이라면 진화론의 가장 큰 도전 중의 하나인 "샹실된 변이" 문제는 저절로 해소되게 된다. 중간적인 행태의 변이가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75

해러웨이가 마굴리스의 공생에서 포착하는 것도 바로 이런 실패다. 독식은 불가능하고, 100%의 지배도 불가능하다. 그 실패가 만들어내는 틈은 결말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가는 문이다. 생명은 기회를 잘 잡아채는 데 능하다. 새로운 관계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토록 많은 종류의 생명체들이 존재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먹기를 포함한 많은 관계에서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100%는 아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존재할 수 있고, 함께 일하고, 놀고, 사랑할 수 있다. 79

오토포이에시스, 
환경과의 긴밀한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경계를 재구성하는 능력. 자신의 동일성을 낳는 자율 시스템이고, 그 자신을 환경과 구분해내는 시스템이다. 

스콧 길버트, 생물 세계에서 스스로 자신을 형성하는 존재 따위는 없고, 생명체의 상호적이고 내부적인 유도가 폭포수처럼 크고 작은 규모로 복잡하게 퍼져나간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종간후성설'ㅇ이라 부른다. 
"생명에 대한 공생의 관점: 우리는 개체였던 적이 없다"라는 논문. 공생체로서의 생명 개념을 발전시킴. 

오토포이에시스 이론은 유전자의 자기복제를 강조하는 진화론적 설명과는 달리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이론이다. 그러나 환경과 자기를 구별하는 자기 고유성의 유지를 강조하기 때문에, 이 이론으로는 박테리아를 집어삼켰으나 소화를 못 시킨 고세균의 상태를 새로운 존재의 탄생으로 이어가기는 어렵다. 그것은 '자기'라는 시스템의 교란과 벌충으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81

고세균이 박테리아오 공생이 가능하게 된 것은 소화의 어이없는 실패때문에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가 전혀 다른 관계로 변했기 때문이지 포식자인 고세균이 자기 동일성을 잃지 않고 참고 견딜 수 있는 변형의 극한, 즉 견딜 만한 실패였기 때문이 아니다. 공생은 스스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것, 즉 공-산이다. 82

공-산의 생물학: 인볼류션

이볼류션, 진화: 계통수의 분기, 동일성을 기준으로 그 치이가 갈라져 나가는 것. 
인볼류션 : 서로 다른 계통수가 가지들의 이존혼합적인 결합. 새로운 존재자로 거듭다는 것. 

칼라 허스탁과 나스타샤 마이어스, "인볼류션의 힘: 감응적인 생태학과 식물과 곤충의 조우에 관한 과학" 꿀벌난초와 꿀벌의 공생 꿀벌난초는 꿀벌의 생식기와 흡사하게 생겼다. 꿀벌은 꿀벌난초의 모습에 홀려서 식물과의 섹스에 탐닉하고, 그 덕분에 난초는 수분이 된다. 식물이 꿀벌과의 공생에 적합하게 자신의 신첼르 번형시켜온 공진화의 훌륭한 사레. 

"우리는 난초들과, 곤충들 그리고 과학자들 사이의 조우속에서 종 간의 친밀성과 미묘한 유혹들의 생태학에 대한 개방성을 발견한다. 이 인볼류션의 접근법에서 중요한 것은, 종과 종 사이의 생명들과 세계들을 만드는 유기체들의 실천들, 그들의 발명들, 그리고 실험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생태적 관계성의 이론이다. 이것은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이라는 페미니스트 윤리에 의해 영감을 받은 생태학이다. 그 소고에서 종차에 관한 물음들은 언제나, 감응, 얽힘, 그리고 파열에 대한 관심들과 짝이 된다. 감응의 생태학, 그 속에서는 창의성과 호기심이 인간들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실천자들의 실험적인 모양들을 특징 짓는다" 85

허스탁과 마이어스는 생명이 자연선택과 최소에너지 투입의 경제 이외에도 "놀이, 즐거움, 실험적인 제안과 같은 감응의 생태학"에 의해서도 조절된다면 어떨까를 묻는다. 꿀벌과 난초가 서로의 신체에 의해 촉발되고, 그들의 과학자도 촉발되어 상대의 신체에 단단히 얽혀 들어가는 상호 포획적인 과정, 그것은 인볼류션, 공-산의 생물학이다. 86


공-산의 예술: 크로셰 산호와 AKO

세계만들기 worlding, 위기에 처한 크리터들에 대한 응답의 연결. 
비고, 글로벌리제이션 

공-산의 기하학: 쌍곡선의 공간

자본주의가 문제이고, 인간의 탐욕이 문제라는 진단들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그 포괄적인 말로는 산호들과 여우원숭이들을ㄹ 위한 즉각적인 응답을 불러내기는 어렵다. 위기에 처한 자에게 중요한 것은 즉각적인 응답이다. 응답은 또 다른 응답을 불러일으킨다. 

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요술지팡이는 어디에도 없다. 쌍곡선 공간의 수많은 표면들은 요술지팡이라는 구원을 기다리지 않고 응답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다. 공-산의 상대에게 책임을 다하기 위해선 응답-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쌍곡선 공간은 응답-능력을 가를 수 잇는 많은 표면을 제공한다. 

공-산의 인식론: 열린 질문

통념에 갇히기 쉬운 일장적인 관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응답-능력을 기를 수 있을까? 익숙한 관계가 주는 편안함이 다른 실험적인 제안들을 방해한다. 길들임이 부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 관계를 문제시하지 못하는 고착성 때문이다. 

정중함의  미덕
인식에 있어서 정중함이란 무엇보다 상대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통념적인 믿음을 뒤로하고, 흥미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상대를 흥미롭게 할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능력과 태도를 요구한다. 호기심이 요구되는 것은 물론이고, 쉽게 할아챌 수 없는 답을 감지하고 그것에 응답할 수 잇는 능력 또한 요구된다. 94

가축과 인간, 
권력의 비동등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그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도 그 자신이 함께 길들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97

이것이 공-산의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의미들이다. 


해러웨이의 기본적인 생각은 누구도 죽이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기에, 이 문제를 동물권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그는 레비나스 윤리학의 제1 계율인 "죽이지 말라"에 반대하면서, 생명-우선pro-Life은 박멸주의에 다름 아니라고까지 강하게 비판한다. 생명-우선주의는 어떤 것도 죽이지 않는 삶이 가능하기라도 한 거서인 양, 누군가의 생명에 빚져서 살아야 하는 유한한 생의 조건을 은폐한다. 그래서 '죽이지 말라'는 계율은 인간이라는 특정 생명만을 위해서 죽여도 되는 생명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살해되는 일은 있어도 죽임을 당해서는 않 되는 존재이고, 동물은 사라해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죽임을 당하는 것일 뿐이라는 희생제의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죽이지 말라"는 계율의 깨뜻한 영역에 인간이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 대가를 동물이 고스란히 치르기 때문이다. '죽어도 되는'이라는 범주에 속하게 된 생명에게 그것은 무지막지한 일이다. 

공-산의 윤리: "죽어도 되는 걸로 만들지 말라"

<양들의 침묵>에서 렉터가 조롱한 것으 죄를 회피할 공간을 따로 마련해 놓은 위선적인 도덕률이다. 하지만 "죽어도 되는 걸로 만들지 마라"는 윤리의 불가능성으로 직행하게 하지 않는다. 

생명에 대한 무비판적인 찬사는 죽기와 죽이기에 관한 사유를 막는다. 그래서 죽이기에 관해서는 단조로운 금지만있고, 죽기에 관해서는 존엄사에 관한 논의가 그 최대치다. 존엄사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존엄한 삶이지, 함께-사는 집합적 존재들의 죽이기와 죽기의 문제는 아니다. 

죽기와 죽이기의 무구하지 않은 책임. 영화 <나랴야마 부시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야생고양이이 개체 수가 급격히 늘어나서 작은 동물들의 계속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현재의 삶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에 놓인 자들은 누구/무엇을 죽이고 누구/무엇을 살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때 해러웨이는 그 지역의 계속성을 보호하기 위해 죽이기를 지지한다. 

박멸은 종종 생태계 침해종 제거 혹은 종의 재배치라는 용어로 불리지만, 해러웨이는 이런 식의 명명법에 대해서 반대한다. 생태계 침해종 제거라는 말은 고양이를 죽어 마땅한 것으로 만드는 용어이고, 종의 재배치라는 말은 죽이기를 상당히 유화시킨 말이다. 이런 식으로 죽이기를 정당화하거나 감추는 용어를 써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낙태 논쟁도 마찬가지다. 임신중단이라느 순화된 말에는 위하감을 가진다. 임신의 지속이 어려운 성인 여성의 삶과 태아의 삶 중에서 성인 여성의 삶을 선택한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좋았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임신중단은 몇 개월 이하의 태아는 언제든 생이 중단 당해도 좋다는 의미가 되고, 임신을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해서 생각하게 된다. 

낙태에 대한 법적인 규정은 태아의 삶과 임신한 여성의 삶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무구하지 않은 규약이고, 살아 있는 것을 죽여야만 하는 일에 대한 사회와 공동체의 책임에 관한 귱약이다. 103

함께-살기를 위한 죽기와 죽이기는 이것과의 상호적 길들이기를 위해 저것과의 관계는 끊는 것이고, 이 삶을 위해 저 삶을 죽이기는 것이지 그 생물종이 죽어 마땅하거나 죽어도 되기 때문에 그런 거서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떤 다른 마라로 유화시키지 않고 죽이기라고 말해야 그것의 책임을 함께 불러올 수 있다. 

'그래봤자 죽이기"라는 냉소적인 비판은 죽이기에 처해진 존재들에 대한 응답 가능성을 닫아버리고 책임잇는 죽이기를 위해 헌신하는 많은 노력들을 맥 빠지게 한다. 104


고통을 나눈다는 것

조셉 노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고통을 알고자 했고, 그것을 나누고자 했다. 고통을 나누는 건 그의 고통을 대신하는 구원자가 되는 게 아니라, 그의 고통을 알고 최선을 다해 그 고통에 대처하고자 하는 것이다. 107

동물 실험에 원천적인 반대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러웨이의 논의가 공리주의자들의 그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둘의 차이는 중요하다. 세속적인 이유는 정당성과는 무관한 일이고, 무구함과도 무관한 일이고, 바뀔 수도 있는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안도감을 주는 어떤 정당성의 기준이 아니라 죽이기의 책임과 윤리다. 그것은 해결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복잡한 상황을 마주하고,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기억하고 감지할 근본적인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인식론적이고 감정적이고 기술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109

3장. 인류세의 그늘 속에서: "트러불과 함께하기"

해러웨이는 인류세라는 용어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 용어는 정치적으로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을 지극히 단순화하기 때문이다. 호모사피엔스종 일반의 행위로 이 원인을 돌려버리면 실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이 쉽게 감추어진다. 에너지 기업들과 국가자본의 행위가 인간의 이름 뒤에 숨는다. .. 인류세는 호모사피엔스의 행위라는 일반화된 이름으로 이 불평등을 숨긴다. ... 수압파쇄fracking.  이러한 파괴를 지징할 수 있는 말은 인류세가 아니라 당연히 자본세여야 한다고 해러웨이는 주장한다. 115

자본주의가 야기한 변화 중 주목할만한 것은 무역을 통한 미생물, 식물, 동물, 광물, 인간들의 광범위한 재배치다. 이와 더불어 대규모의 플렌데이션 농업이 야기한 변화 또한 주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이런 파괴의 시대를 지칭하는 이름은 플랜테이션세여야 할 것이다. 116

복수종의 살기와 죽기의 결과가 지구 시스템의 변화로 나타난 것이다. 인류세 담론을 이끌고 있는 지구 온난화, 기후 급변과 같은 지구 시스템의 현상들은 복수종들의 관계 변화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인류세라는 용어만으로는 자본주의가 만든 인간과 식물, 동물 미생물들의 이동과 재배치가 무엇을 야기했는지를 물을 수 없다. 이 용어만으로는 복수종의 무엇이 죽고 무엇이 살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야기했는지를 묻지 못한다. 그러므로 복수종의 관계가 바뀌지 않고 인간만의 노력, 가령 과학적인 해법으로 이 위기를 빠져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118

인류세라는 용어의 또 다른 문제는, 이 용어가 우리로 하려금 꼭 필요한 복구를 위해 힘을 쓰게 하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결말을 위해 힘을 허비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 용어가 지나치게 종말론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지구의 암이라는 종말론적 구도는 심각한 냉소주의를 불러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냉소나 비난이 아니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가능할지 모르는 부활을 위해 복수종들의 협력적인 실천을 육성해야 한다. 

트러불과 함께하기

해러웨이가 이야기하려는 트러블의 의미는, 문제를 쉽게 해소해버리기보다는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고, 문제 해결을 위해 상황을 잘 정리하기보다는 더욱 뒤썩어버리는 것이고,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트러불과 함께 한다는 의미는 쉬운 해결책을 찾고 그것을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 트러블과 마주하면서 지금 당장 가능한 응답을 모색하는 것이다. 복잡하고 해결이 어렵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더욱 해로운 일이다. 트러블과 함께하기는 '근본적인 해결'이라는 결코 실현되지 않을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가능한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응답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121

그레타 툰베리의 학교 결석투쟁 

촉수적인 사유

트러블과 함께하기는 현재에 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것이다. 

현재에 임한다. '땅에 붙박인 자' 
자신이 놓인 무구하지 않은 상황을 감추거나 정당화하지 않으면서,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그 행위에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우리에게 트러블과 함께하기 위해 사유할 것을 촉구한다. 지금 우리가 아이히만과 같은 사유의 무능력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를 묻는다. 아렌트가 '사유의 무능력'이라고 아이히만을 분석했던 것을 해러웨이는 '감각의 무능력'과 연결한다. 감각적 무능력이 아이히만의 사유를 막은 것이다. 아이히만은 느끼기를 거부한 자다. 

우리 역시 이익을 계산하느라 바쁘고, 넘쳐나는 정보를 해독하느라 바쁘다. 그래서 해마다 어마무시한 규모로 살처분을 당하는 가축들에 대해 무감각하고,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하는 피난선의 난민들에게 무감각하고, 뱃속에 플라스틱이 가득 차 있는 고래에게 무감각하다. 

해러웨이기 주목하는 감각기관은 촉수다. 눈은 대상과 신체적으로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 감각기관인 반면, 촉수는 신체와 직접 연결되는 감각기관이다. 해러웨이기 말하는 촉수는 합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피모아 쏠루라는 이름을 가진 한 마리의 거미. 8개의 긴 다리를 촉수로 가지고 있다. 

촉수적인 인식은 저 하늘에서 굽어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이고, 총체적이고, 중립적인 인식을 주장할 수 없다. 누구도 모든 곳에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땅에 붙박인자'들의 인식은 언제나 특정한 상황 속의 인식이다. 

가장 객관적인 인식은 중립성을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식이 처한 특정한 상황을 드러내는 것임을 주장한다. 촉수적인 사유는 이를 위한 형상이다. 125

직접적인 연결 관계의 수는 촉수의 수만틈 한정적이다. 그래서 한정된 촉수로 다른 연결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연결을 반드시 끊어야 한다. 그러므로 촉수적인 사유는 무엇과 연결하고 무엇과 단절할 것인가를 사유하게 해준다. 

과학소설, 과학 판타지 소설은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는 면에서 촉수적 사유의 글쓰기다. 
. 마지 피어시 Marge Piercy
. 어슐러 K. 르 귄 Ursula Kroeber le Guin
. 옥타비아 버틀러 Octavia Estelle Butler 

피어시의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매터포이세트 마을, 여성들은 출산을 하지 않기로, 출산과는 무관한 세 사람의 남녀 엄마가 속박이 아닌 사랑으로 아이를 친밀하게 양육한다. 촉수적 사유는 이처럼 있을 법하지 않은 연결을 과감하게 시도하게 한다. 127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위급한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현재를 외삽하는 예측이 아니라 과감한 촉수적인 사유로 있을 법하지 않은 연결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자식 대신 창의적인 방식으로 친척을 만들자고 촉구한다. 해러웨이가 말하는 친척은 혈연과는 무관하고 "최선을 다해 길들이려는 대략적인 범주"다.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 레즈비어니즘을 전경화시켰던 결혼중단이라는 정치운동. 남성 중심의 가족 체계를 재생산하는 행위와 절연할 것.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라"는 슬로건은 인종, 민족, 계급을 뛰어넘는 자매의 연대를 구축하자고 했던 페미니즘 운동의 창의적인 계승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인간 여성들만 자매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해러웨이는 여성들만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생명/비생명들과 친척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는 자식을 낳는 결혼제도에 트러불을 불러일으킨다. 129

친척, 정성을 다해 직접적으로 돌보는 관계

해러웨이가 보기에, 인류세라 불리는 이 거친 파도를 헤쳐나가는 것은 인간 혼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우리는 모래알 같은 개인들이 되어서는 안 되고, 창의적인 친척 관계를 다시 복구해야 한다. 

솔루세: 피난처를 회복하기 

애나 창 Anna Tsing은 오늘날의 생태적 위기를 레퓨지아refugia의 붕괴로 진단한다. 

피난처를 복구하는 것은 복수종의 상호의존적인 연결 관계들을 회복하는 일이지, 무턱대고 자연보호구역을 설정하는 일이 아니다. 

기후문제는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지금의 파괴적 사태는 너무 많은 인간의 수와 생물종의 재배치, 그리고 자본의 탐욕적인 활동들이 복수종 생물들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들을 체계적으로 파괴한 결과다. 따라서 파괴된 관계를 복원하려는 노력 없이 기술적인 해법이나 시장 기반의 정책들로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해러웨이를 비롯한 일군의 학자들은 인류세라 부르는 지금의 파괴적인 시대를 새로운 지질학적인 시대가 아니라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경계적 사태로 보고 있다. 

우리의 시급한 과제는 파난처를 복원하는 일이다. 이 멸종의 시기가 끝나면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그 새로운 시대에는 복수종의 생물들이 다시 공-산의 작업들을 시작할 것이고, 생물종들의 창의적인 연결들이 번창할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인간들과 우리와 연계된 포유류 생물들이 이 공-산의 연결망에서 끼일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우리가 피난처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전망이 그리 밝지는 않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자식 대신 친척을 만들자고, 포유류 친척으로서 우리의 할 일을 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쏠루세, 촉수적인 연결성을 회복하는 것만이 공-산의 존재들이 다시 번성할 희망이라고 믿는다. 

쏠루세의 시간, 예측의 시간이 아니라 과거의 많은 이야기들을 현재 속으로 불러들여서 기억하고 배우는 두꺼운 현존의 시간이다. 우리는 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두꺼운 현재'를 산다. 두꺼운 현재는, 그러므로, 에측의 시간이 아니라 촉수적인 사유의 시간이다. 예측은 논리적인 틀 속에서 그것을 확장하는 것이지만, 촉수적인 사유는 이 연결이 아니라 저 연결이라면 하고 생각하는 사고 실험이다. 그 사고실험에 자양분을 주는 것이 도처에 있는 살고, 죽기, 협력하기에 관한 과거의 이야기들이다. 135

기억

비둘기와 인간의 공-산 
선택을 위한 죽이기가 있고, 훈련의 고된 노동이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놀이의 기쁨과 성취의 기쁨이 있고, 배움이 있었다. 137

코드리 공원의 비둘기 집은 우리가 공-산의 존재임을 기억하도록 요청한다.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시작을 여는 것이다. 

애도

서로의 삶에 결정적으로 뛰어들었던 파트너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xkcd 웹툰, 
꿀벌난초  Bee Orchid 
꿀벌의 성기를 꼭 닮은 오프리스 아피페라Ophrys apifera라는 난초의 꿀벌 파트너들은 오래 전에 멸종했다. 파트너 없이 지금은 자가수분을 하는 이 난초들 역시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꿀벌 난초는 그 자신의 모습으로 자신들의 파트너였던 그 꿀벌이 존재했음을 기억한다. 꿀벌난초는 멸종해버린 꿀벌의 살아 잇는 화석이고, 멸종한 꿀벌에 관한 유일한 기억이다. 139

애도는 이렇게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고, 죽인 자의 존재를 지금 여기로 가져오는 것이고, 죽은 자의 존재가 삭제되지 않도록 저지하는 것이고, 죽음 또한 존재의 일부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난초가, 내가 너의 꿀벌을 기억할게, 내가 너를 기억할게"

생태철학자, Thom van Dooren
멸종언저리에 있는 하와이언 까마귀의 애도
애도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애도란 상실과 함께 사는 것이고, 상실이 의미하는 것과 세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이 지점으로부터 앞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면, 어떻게 우리 자신이 변해야 하고, 우리의 관계들을 새롭게 해야 하는지를 잘 인식하게 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볼때, 진실한 애도는 멸종의 가장자리로 내몰린 저 무수히 많은 존재자들에 대한 우리의 의존과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자각 속으로 우리를 향하게 해야 한다" 

애도는 상실을 슬퍼하는 것이고, 산 자들의 존재가 죽은 자들의 존재에 빚지고 있음을 배우는 것이다. 

애도는 어떤 것의 생을 위해 비명에 가는 많은 생명들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를 배우는 것이다. 상실이 삶과 함께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상실가 함께 산다는 것은 생이 의존하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고, 그 죽음에서 인간도 예외가 아님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애도를 위해서 죽이기의 책임과 죽음의 책임을 배워야 한다. 

복구를 우이한 SF-카밀 이야기

창의적인 과학소설로부터 응답-능력을 배양하는 실천을 배울 수 있다. 

"퇴비 공동체"
주인공인 카밀은 왕나비의 유전자가 이식된 공생체다. 
카밀공동체는 이성애적인 생식보다 위기에 처한 동물들의 유전자를 이식하는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동물과의 공생체. 

카밀1,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오무에 대한 나우시카의 사랑

카밀5는 파트너의 상실을 슬퍼하고 그들에 대한 애도를 통해, 그들과 자신들의 협동의 실천들을 기억해야만 한다. 자신들의 파트너가 사라져버렸기에 카밀들이 더 이상 왕나비들과의 협동의 실천을 이어가지 못할지라도 그들이 했던 종 간의 의존과 상호협동적인 일과 놀이, 그리고 살기와 죽기를 기억하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협동의 "세계에 씨를 뿌리는 일"이 될 것이다. 

종 간의 상호 의존적이고 생성적인 관계를 회복하지 않는다면 재생성의 벡터를 만들어내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 여긴다. 인류세를 벗어나기 위해 혼종적인 결합을 통해 자식이 아니라 창의적인 친척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이라는 관념을 퇴비 속에 던져 넣는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 해러웨이는 친구이자 에코섹슈얼 아티스트인 베스 스테판Beth Stephens과 애니 스프링클Annie Sprinkle은 "퇴비 만들기는 끝내줘요"Composting is so hot"라는 범퍼 스티커를 만들어주었다. 


8장 글쓰기와 이야기하기

여성적 글쓰기

엘렌 식수는 서양철학의 이러한 이항대립의 근저에는 남근을 가진 남성과 그것의 결여(거세)로서 여성이라는 상징체계가 잇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많은 이항대립의 첫 번째 항은 언제나 남성으로 두 번째 항은 언제나 여성으로 환원된다. 

여성들에게 글쓰기는 "변화의 가능성 자체이다. 사회 그리고 문화적인 구조들의 변형을 예고하는 움직임, 전복적인 사상의 도약대가 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것이 식수가 "여성적 글쓰기'를 주창한 이유다. 

식수가 보기에 가장 심각한 의미화의 문제 중 하나는 여성의 성이 남성의 상징체계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식수는 글쓰기에서 여성의 성적 욕망을 긍정하는 것 외에도 '타자에 대한 수용성'과 '법에 대한 거부'를 여성적 글쓰기의 중용한 요소로 포착한다. 타자에 대한 수용성은 타자를 자신 속에 품고 있는 모성에 대한 은유이다. '법에 대한 거부'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로부터 연원한다. 

의미화의 권력 

흑인 페미니스트 오드리 로드Audre Lorde, "시는 사치가 아니다" 시는 우리가 존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우리의 생명줄이다. 

해러웨이는 여성적 글쓰기엥 대한 문제의식에는 공감하지만 '여성'의 정체성을 다시 불러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가 '여성'대신 불러들이는 형상은 사이보그다. 사이보그는 남성 중심의 설화와도 무관하고, 타자를 내 속에 품은 모성이나 자연과 문화가 나뉘기 이전의 전체성과도 무관하기 때문이다. 

SF
해러웨이가 말하는 사변적인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기대기를 거부하면서도 치열한 페미니스트 정치운동을 전개하기를 멈추지 않는 '다른' 페미니즘을 의미한다. 290

페미니즘 혹은 '여성적 글쓰기'는 종종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기 이전의 조화로운 합일을 의구하곤 했다. 하지만 주체와 대상의 분리는 학문에서도 삶에서도 피할 수 없다. 유한한 생을 사는 자들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체가 되는 자와 대상이 되는 자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남의 목숨에 기대어 사는 자들은 누구든 주체이자 대상이다. 

<반려종 선언>에서부터 해러웨이의 글쓰기는 말씀을 부수는 사이보그 글쓰기에서 실뜨기 같은 이야기로 바뀐다. 사이보그 글쓰기가 주류적인 의미를 재의미화하고 다시 쓰는 것이라면, 이야기하기는 주류적인 의미가 저들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야기하기는 그 의미들이 고정적인 것이 아니고, 예측 불가능하게 바뀐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해러웨이는 이야기하기를 통해 일상은 불평등한 권력이 공간이고 누구도 권력적인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인다. 그럼에도 삶이 무간지옥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은 그 권력 관계를 출렁이게 하는 치열한 정치와 더 나은 관계를 만들려는 윤리적인 실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292

종결되지 않은 이야기

죽이기가 없고, 파괴하기가 없고, 지배하기가 없는 세상은 불행히도 없지만 그것들 일변도의 세상은 지속이 불가능하다. 
서로의 목숨에 기대어 사는 필멸의 존재들은 상대를 돌보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모순적인 상황을 살기 때문이다. 

호모사피엔스가 시작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비인간들과 그럭저럭 살아 올 수 있엇던 것은 죽이기와 돌보기의 모순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상황을 잘 살아낸 이야기들이 곳곳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 삶이 지속 가능성이 의문에 붙여진 이때,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반려종의 이야기들이다. 그것은 우리 앞에 살다간 자들이 비인간들과 맺었던 반려 관계의 창의적인 실천들에 관한 이야기들이고, 아직도 세계 곳곳에 남아 있는 반려 친척 만들기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이 무구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할지, 그리고 어떻게 이어받을지를 배워야 할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전해줄 이야기가 될 것이다. 세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끝나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우리가 배우고 이어갈 이야기들은 아직 많이 있다.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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