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백_일홍 2022. 8. 8. 08:40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밑줄귿기 / 발제문

 

이딸리아에 내리는 눈

21 언제나 나를 이끈 것은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 세계대전...... 그 무자비했던 20세기의 역사에 내몰리고, 고향이나 가족과 강제로 헤어져야 했으며, 뿌리째 삶을 강탈당했던 죽은 자들의 묘다 온갖 무덤 앞에서 나는 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을까 하고 귀를 기울여본다. 

 

23 그러나 그는 아유슈비츠에서 생환한 지 40년도 더 지난 1987년 4월 11일에 또리노의 레 움베르또 거리에 있는 자택에서 자살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나는 언젠가 또리노를 방문해 그의 묘 앞에서 서보고 싶다고 계속 생각해왔다.

 

24 " 나는 수인 상태에서 벗어난 지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고, 괴로운 인생을 보내고 있다..... 살아 있다기보다도 죽은 것에 가깝고, 인간이라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아우슈비츠를 만든 것은 인간이며, 아우슈비츠가 몆백만 명이라는 사람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레비)

 

27 어느 봄날, 아유슈비츠의 생존자인 67세의 쁘리모 레비는 아파트 4층 난간을 넘어 아래층으로 몸을 던졌다. 나는 이제부터 그 장소를 보러 가려는 것이다. 

 

자기 본위의 죽음

40 쁘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세계에서도 인간이 여전히 살아갈 수 있음을 온몸으로 제시한 '척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는 죽음이 아니라 삶의, 또 인간성의 패배가 아니라 승리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생환하여 4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자살한 것이다. 이것이 진정 '일종의 자기 본위'가 아닐까? 

 

적의의 시대

61 '이해'에 대한 간절한 욕망, 그것은 소년 시절부터 변함없이 쁘리모 레비의 생애를 관통하고 있다. 과학정신은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였다. 그는 비합리적인 정신주의에 대한 경멸과 혐오감을 통해 파시즘에 의한 부식으로부터 자신의 혼을 지켰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아우슈비츠라는 이해할 수 없는 역유토피아의 세계에 던져졌을 때, 역유토피아를 지상에서 실현한 '독일인'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져갔다.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그 상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욕망은 생환 후에도 증폭되었다. 그것은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욕망이었다. 

 

뽀거리

69 중세 이후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가 바로 신의 아들 예수를 살해한 것은 '유대인'이라는 놀라울 정도의 단락적인 적의의 온상이 되었다. 다시 말할 것도 없지만, '유대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전체가 예수의 처형에 책임이 있다는 등의 사고는 이성적이라고 할 수 없다. 본래 예수도 당시의 '유대인'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종교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미신적인 적의가 나찌식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전통적인 종교 공동체의 성원을 가리키는 '유대인'이라는 말이 '인종'으로서의 '유대인'이라는 망상으로 바뀔 때, 유대인의 '절멸'이라는 프로젝트가 실행 가능하게 된 것이다. 

 

70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가종교가 되었을 때, 기독교도와 유대인의 통혼이나 성교를 금지하는 최초의 반유대정책이 채택되었다. 14세기 흑사병이 크게 유행했을 때는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유언비어가 돌아 유럽 각지에서 대학살이 전개되었다. 유대인은 기독교도 아이들을 유괴해서 살해하고 그 피를 의식에 사용한다는 미신이 대중 사이에 퍼져서, 허위 고발로 무수한 유대인들이 화형에 처해졌다.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영국, 프랑스, 보헤미아, 이딸리아 등의 유대인들은 개종이냐 추방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다. 1492년에는 국토 재정복을 완성한 에스빠냐에서 유대인은 이슬람교도와 함께 추방되어 북아프리카, 그리스, 네덜란드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에스빠냐에 남아 부득이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은 '마라노 Marrano'라고 불렸다. 이것은 에스파냐어 '돼지'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마라노' 중에는 유대교의 전통을 비밀리에 지키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의혹의 눈초리를 받으며 자주 이단 심문과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러시아와 동유럽에는 뽀 그롬(pogrom, 유대인에 대한 집단적 박해)이 빈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폴란드에서 뽀 그롬이 있었다. 

 

71 "나치 지배 12년간 일어난 일 중 대부분은 이미 과거에 발생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나치의 절멸 행위는 진공상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순환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의 정점에 있는 것이다"(역사학자라 라울 힐버그)

 

72 예수의 처형에 '유대인'이 책임이 있다는 견해를 가톨릭 교회가 공식적으로 개정한 것은 고작 1962년부터 1965년에 걸쳐서 열린 제2회 바띠깐 공의회에서였다. 

 

불순물

79 1939년에 무솔리니 정권은 반유대선언을 선포하고 나찌의 뉘른베르크법을 모방한 인권법을 제정했다. 그리고 의무교육 교과서에서 인종이라는 장을 설정했다. 

 

" 유대민족은 북방의 모든 민족에게 장사와 돈벌이만을 갈망하는 새로운 정신(지상의 부를 독점하는 것만을 지향하는 정신)을 심어 놓았다. 영광스러운 로마 문명의 후계자인 무쏠리니의 이딸리아는 이 투기가의 이해에 바탕을 둔 결사인 민족, 불화를 조장하는 민족, 모든 이상에 적대적인 민족을 방치해둘 수 없다. 유대 민족이나 그밖의 열등민족이 초래하는 모든 오염의 위기에서 고귀한 이딸리아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 로마는 바로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아프리카 민족의 혼교 금지... 고등 민족과 예속 민족 사이에 피의 결합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문명을 전한다는 높은 사명감을 등한시하지 않기 위해서도, 또 우리 민족의 위신 저하를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리고 민족의 순결을 잃지 않기 위해서도." 

 

81 무쏠리니 측에서도 독일과의 동맹관계를 강화할 방침을 정했고, 1937년 11월에 일본, 독일, 이딸리아는 삼국 방공협정을 채결했다. 이후 1938년 9월에 파시스트 정권은 인종법을 제정하여 일련의 반유대 조치를 선포했다.

 

저편

'아우슈비츠'라는 말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 마을과 그 주변 지역에 위치한 45개 강제수용소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아우슈비츠'는 수인의 수용, 노역, 절멸과 같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세 단계를 모두 대응할 수 있는 거대한 수용소복합체였다.

 

96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희생자 수는 110만명 내지 150만명. 그중 90퍼센트가 유대인이었다.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 그 시점에 살아남은 수인은 6만 5천여명, 그 대부분은 철수하는 나찌에 의해서 '죽음의 행진'에 연행되어갔기 때문에 해방된 수인은 약 7천명에 불과했다. 쁘리모 레비는 이 행운의 7천명 중 한 사람이었다. 

 

100 격리, 추방, 점령지에서의 대학살이라는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이라고 불리는 단계가 도래한다. 1942년 1월 20일, 베를린 교외의 반제 호반에서 회의가 열려, '최종적 해결'의 대상은 소련 영토에 있는 5백만 명을 필두로 31개 나라와 지역에 있는 약 1100만 명의 유대인이었다. 

 

107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찌 독일의 손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서 유대인 사회가 파괴되고, 그 파괴의 기억까지도 말살되었다. 약 9백만 명의 유럽인 중 3분의 2가 살해되었다. 특히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체코슬로바기아에서는 유대인 주민의 9할이 살해되었다. 

 

부나

124 I.G. 파르벤은 단순한 기업이 아니라 '관료제국이며, 유대인 절멸기관에서 주요 요소'였다. 부나의 수인들은 문자 그대로 죽일 때까지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총 약 3만 2천명의 수인이 부나로 보내졌는데, 적어도 그중 2만 5천명이 죽었다. 거기에서 평균 여명은 3-4개월, 야외의 탄광작업에서는 겨우 1개월이었다. 실로 '노동을 통한 절멸'이었다. 

 

126 두말할 것도 없이 '부나'는 독일만의 것이 아니다. 몇몇 일본 기업도 독일 기업과 마찬가지로 범죄를 저질러놓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에는 전혀 응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안개 속 아침

137 병실에서 어머니를 간병할 때, 그 시기에 나는 레비가 쓴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를 읽고 있었다. 한밤중에 어두운 병실에서 어머니의 거친 숨소리를 들어가면서, 나는 가슴속으로 몇 번인가 같은 물음을 되뇌었다.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잔혹할 수 있을까?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 같은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까? 

 

138 '아우슈비츠'가 비교 불가능한 '유일무비'의 사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아우슈비츠'는 비교 가능한 사건이다. 비교 후에 도출된 대답은 그것이 과거 인간 또는 인간사회의 제도가 보여줄 수 있었던 냉혹함과 잔인함의 극한적 사례 가는 것이다. 

 

147 그 참혹한 재앙 이전에 쁘리모 레비는 자신이 유대인 출신인지 아닌지가 '주근깨' 정도의 '사소한 차이'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다. 무솔리니의 반유대 조치가 '시약'이 되어 그는 이탈리아 사회에서 '불순물'로 분류되어갔다. 아우슈비츠로 이송될 때는 '토지 없는 민중의 오랜 옛날부터 겪어온 고뇌'를 맛보았다. 부나에서는 '노예 중 노예'로 취급되었다. 작업에 배치된 실험실의 민간인 여성에게서도 '냄새나는 유대인'이라고 멸시를 당했다. 그 모든 과정은 보편적 '인간'이라는 18세기 말 이래의 계몽주의적 이념에 대한 커다란 반동이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겪고 쁘리모 레비는 '유대인'이 되며, 묘비에 히브리어를 새겨놓은 것이 의미하는 것처럼 '유대인'으로 묻히게 된 것이다. 

'유대인'이란 무엇인가? 

쁘리모 레비의 묘 앞에 나는 서 있다. 

이것은 어떤 죽음일까? 

어떤 절망이 혹은 어떤 권태가 그에게 밀어닥친 것일까? 

죽은 자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단순 명쾌?

155 강제수용소에서 <신곡>을 암송하는 작업은 그에게 과거와의 관계를 그리고 자신을 키워준 문화와의 관계를 회복하게 해 주었다. 요컨대 자신을 재발견케 해주었던 것이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따라서 내일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얼굴을 씻고 이를 닦는다. 자기 자신에게 규율과 질서를 부과하고 자기 생활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때문에 노예보다 못한 신분으로 추락하더라도 '덕과 지'를 구하는 것이다. 단떼를 상기하고, 오디쎄우스처럼 끝없는 고난의 항해를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금 지옥에서 인간세상으로 생환하여 증언하기 위해서.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만한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남는 것일까. 그 대답이 여기에 있다.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의 지옥조차 소멸시킬 수 없었던 인간성"의 증인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아우슈비츠 이후'의 시대에서 '인간'의 척도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은 지상에서 현존하는 역유토피아의 사라 잇는 증인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나 '문명'과 같은 관념이 파괴된 후에 다시금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는 역할을 짊어진 사람들이기도 하다. 

 

173 장 아메리의 자실은 이와 같은 자신의 자살관을 신천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자살의 부조리성이 삶의 부조리성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소시킨다). 모든 존재 증명을 부정당한 그에게 스스로 죽음의 주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최후의, 또 가장 확실한 존재 증명이었던 것이다. 아메리의 아이덴터티의 분열이 그를 자살로 내몰았다는 레비의 분석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정확한 분석인 나머지, 그 분석의 화살이 레비 자신을 쏘았는지도 모른다. 

 

178 츠베땅 토드로프는 레비가 시달리던 수치의 감각을 '기억으로서의 수치', '살아남은 자의 수치', '인간이라는 수치' 등 3단계에 걸쳐 분석한다. 

 

180 쁘리모 레비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단순 명쾌했으리라.

인생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레비에 의해서 긍정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인생을 긍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금 뭔가를 고뇌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그런 그가 우리를 두고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181

'인간'

왜 아우슈비치의 생존자가 '인간이라는 수치'에 시달려야 했을까?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가해자의 수치까지도 피해자가 고스란히 받아서 시달려야 하는, 이 부조리한 전도가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에 희생된 까닭에, 그 사상을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대처해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독일인'도 물론 '인간'에서 예외는 아니다. 한번 파괴된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려고 하는 한, '인간'이 저지른 죄는 어김없이 그들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182 '인간 이하'라고 여겨진 것은 유대인뿐만이 아니다. 나찌 입장에서 보면 '집시'라고 멸시하여 부르던 진티-로마의 사람들과 아프리카인도 인간 이하였다. 동성애자나 심신장애자도 그러했다. 나찌에게는 폴란드인이나 러시아인 등 슬라브인도 장래 노예로 만들어야 할 '저급한 인간'이었다. 

 

183 그 각각의 장면에서 그들은(희생자) '같은 인간인데 왜?"라고 낮은 목소리로 신음했던 것이다. 근원적인 물음이다. 굴욕과 고통과 함께 몸 안에 새겨진 이 근원적인 물음이 그들을 움직였고, '같은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는 어려운 위치로 그들을 내몰았다. 차별받는 자에게는 '같은 인간'이라는 관념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지키는 투쟁의 근거이며 무기이기도 한다. 그 때문에 피해자 측은 언제나 가해자를 포함한 새로운 보편성의 틀을 재구축하는 역할을 짊어지게 된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변증법이다. 

 

184 1492년 유대인이 에스빠냐에서 추방을 당한 그해는 동시에 꼴룸부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해이기도 하다. 그것은 실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에게 오늘날까지 5백년 동안 지속된 대재앙의 시작이었다.

 

187 라스가 쓴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서>,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 40년 동안 1200만명 내지 1500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 또한 기독교화되지 않은 원주민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91 중세 이후 반유대주의, 히스테리컬한 패권욕과 식민지 획득욕, 약육강식.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과 우생사상, 인종주의 그리고 '효율'에 대한 물신숭배와 테크놀로지 신앙, 이 모든 요소가 복합적으로 상승작용을 하여 폭발한 것이 나찌 독일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사건이었다. 그것은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로 지탱되어온 유럽 근대문명의 자가중독이며 자기 파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2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우슈비츠'가 단순하게 우리에 대한 도덕적 경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근대에 기인하며, 지금도 현실 그 자체로 내재한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는 '일부 인간은 인간 이하'라고 하는 사상, '인간은 비인간이다'라는 원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는 한 '아우슈비치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옆 사람에게서 빵 4분의 1조각을 빼앗기 위해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죄가 아니더라도, 가장 야만적인 피그미나 가장 잔인한 새디스트보다도, 사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규범에서 벗어나 있다" (레비)

 

193 나찌 인종주의의 희생자였던 그의 입에서 "야만적인 피그미(아프리카 원주민의 한 종족)'라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복잡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쁘리모 레비에게 '인간'이란 무엇보다도 '사고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피그미'는 사고하지 않는 존재일까? 그런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피그미'는 수백만 명의 인간을 철저하게 절멸하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 그리고 일본이 '문명화'나 '근대화'라는 미명 하에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의 민족들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지배한 것이다. 나찌 독일은 '문명'의 이름하에 만행을 저질렀다. 나찌의 만행은 '문명'의 진보가 있고서야 가능했다. 그 사상이나 기술 모두가 유럽 근대문명이 만들어냈다. 나찌즘은 유럽문명의 외부에서 밀어닥친 '야만'이 아니라, 유럽문명 내부에서 배양된 '야만'이 분출할 것이었다. 

 

쁘리모 레비는 나찌즘과의 싸움을 '문명' 대 '야만'이라는 대립 구도로 파악했던 측면이 크다..... 물론 그가 그 후 유럽중심주의적 발상을 그대로 유지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나찌즘이라는 '야만'과 싸울 때 자신의 근거가 된 '문명'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위험한지 자각했는가는 심각하게 검토해야만 한다. 

 

194 다만 나는 레비에게 '문명'을 전적으로 부정하라거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등의 요구를 할 생각은 없다. 그에게서 이 '문명' 세계의 자기 모순을 짊어지고, 새로운 보편적 문명의 구축이라는 난제의 무게를 견뎌내어 일어서는 동시대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단절

197 레비는 부나에서 자신에게 화학 지식에 관한 시험문제는 낸 판비츠 박사라는 민간인의 시선을 해방 후에도 줄곧 잊을 수 없었다. 

" 저런 시선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생물이 수족간의 유리 너머로 건네는 듯한 시선이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저런 시선의 성격을 철저하게 규명할 수 있다면 제3제국에서 나타난 커다란 광기의 본질도 설명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203 뮐러는 이렇게도 쓰고 있었다. I.G. 파르벤이 수인을 고용한 것은 '보호'하기 위해서였으며, 부나의 공장 자체가 '유대인을 보호하고 그들의 생존을 돕기'위해 건설되었고, 유대인을 동정하지 말라는 명령은 '위장'하기 위해서였다고. 또한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체재하던 짧은 기간에 "유대인의 살육을 추측할 수 있는 요소도 전혀 보지 못했다"라고.... 

 

204 뮐러는 착하고 소심하며 정직하면서도 무기력했다. 대다수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당시 자신의 무관심이나 무기력을 무의식 속에서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나치의 범죄에 가담하거나 그것의 수혜를 받은 인물이 희생자에게 무건운 말투로 '원수에 대한 사랑'이나 '인간에 대한 신뢰'를 논하고 잇는 것이다. 그 안의 천박함, 아니 불쾌감.... 게다가 그가 완고한 나치였다면 이야기는 간단했을 테지만, 그는 당혹스럽게도 '과거의 극복'을 바란다고 말한다. 

 

독일인

210 독일인이란 누구인가? 근본적으로 '독일인의 죄'라는 것이 존재할까? 그렇지 않으면 뮐러가 암시하듯 아우슈비츠는 '인간'의 죄일까? 

 

213 자신들에게 친숙한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 중 무언인가가 나치즘의 기반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나 불안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치즘을 키우고 묵인하고 지지하며 그것에서 이익까지 얻은 독일 국민의 일원으로서 느끼는 치욕감, 그 감각에 가능한 한 민감할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자세야말로 "인간으로서의 원칙적인 수치심"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공유하고 그들과 정서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전제다. 

 

220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의 권말에 젊은 독자와의 문답이 실려 있다. 거기에서 "독일인은 몰랐나요?"라는 물음에 레비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 대다수의 독일인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알고 싶지 않았고 무지의 상태로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치즘에 동의한 것에 대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무지를 이용한 것이다. 눈, 귀, 입을 모두 닫고 눈앞에서 무엇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때문에 자신은 공범이 아니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나는 이 깊이 고려된 의도적인 태만이야말로 범죄행위라고 생각한다." 

 

226 '독일인'을 이해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인간'이라는 이념의 보편성을 구제해낼 수 있는지 없는지 또는 그 '척도'를 재건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열쇠다. 레비는 살아남은 이상 '독일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메리와 같이 '스스로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231 '이해'하고픈 강한 욕구와 초조함, 그리고 '이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 이런 균열은 이성적인 레비에게 죽음의 순간까지 고뇌를 제공했다. 레비에게 '독일인'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소통 불능의 깊은 균열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그야말로 심신을 갉아먹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잘 안다. 

 

레 움베르또 거리

247 20세기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그중에서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미증유한 정치 폭력의 시대였다. 희생자의 총수는 1억 7천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이와 같은 폭력의 기억 자체가 폭력으로 위협받고 있다. 레비와 같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도 김학순 할머니 같은 과거 '위안부'들도 모두 이 폭력의 세게에서 살아남은 귀중한 증인이다. 하지만 증인들은 자기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고 표현 가능성을 초월한 경험을 증언해야만 한다. 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부조리하게도 증인들에게 부과된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증인들은 부당한 의심과 무관심의 시선에 둘러싸여 고립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248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인간'이라는 이념이 보편적으로 공유된 단순 명쾌한 세계가 아니다. 단절되고 금이 간 세계다.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말은 단절을 숨기는 미사여구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단절 속에서 온몸으로 떨쳐 일어난 증인들이 '인간'의 재건을 위해서 증언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편'의 사람들은 보신이나 자기애 때문에, 천박함과 나약함 때문에, 상상력의 빈곤함과 공감대의 결여 때문에 증인들의 모습을 바로 보지 않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장 아메리도 쁘리모 레비도 자살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1997년 12월 16일에 이 세상을 떠났다. 폭력의 세기를 증언한 산증인들은 전 세계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오디쎄우스의 죽음

255 쁘리모 레비는 1947년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의 초판 서문에서 "라겔이란 어떤 세계관의 논리적 발전의 귀결이다. 때문에 그 세계관이 존재한다면 그것의 귀결로서의 라겔은 우리를 계속 위협할 것이다. 또 그 때문에 말살수용소의 역사는 위험할 알리는 불길한 경종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썼다. 

 

"젊은이들에게"라는 1972년의 글에서는 "안심하기에는 이르지 않는가"라고 밝히고, 그리스, 소련, 베트남, 브라질에 여전히 강제수용소가 존재하며, 모든 국가에 감옥, 소년원, 정신병원 같은 "인간에게서 이름, 존엄, 희망을 빼앗는 시설"이 존재한다고 지적한 후, 브레히트의 "이런 괴물을 낳은 자궁은 아직도 건재하다"는 말을 인용한다. 

 

1986년 출판된 마지막 저서 <익사한 자와 구제된 자>에서는 "나찌즘의 출현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라고 적고 있다. "하나의 민족과 문명을 파괴하는 것이 가능함은 증명되었다"라고, 베트남 전쟁, 캄보디아에서의 자민족 대학살, 포클랜드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내전.... 레비가 거기에서 예로 든 어리석은 행위와 유혈의 목록은, 그가 조그 더 오래 살았다면 구소련이나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걸프전쟁,.... 더울 장대한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258 1982년 6월에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군가 거점을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레바논을 침공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난민캠프에서 친이스라엘파 민명에 의한 무차별 대학살이 거듭 자행되었다. 희생자수는 3200명 이상에 이른다. 

 

261 1986년 초여름부터 서독에서는 훗날 '역사가 논쟁'이라고 불리게 되는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가스실은 없었다"라는 황당무계한 아우슈비츠 부정론은 전쟁 직후부터 유럽 사회 일각에서 끈질기게 이어져 왔다.. 이번에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학문적 태도를 취하면서 그 죄를 상대화하려는 수정주의 논의가 공공연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270 아니, 그의 자살은 원래 불안, 공포, 실의, 절망 혹은 권태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증인'으로서 마지막 일을 완수하기 위한 조용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271 냉혈이나 잔혹은 지금도 세계를 덥고 있다. '인간이라는 척도'는 파괴된 상태다. 아우슈비츠에 의해서 폭로된 '단절'을 우리는 넘어설 수 있을까.  

우슈비츠 이후 우리 '인간'은 생환을 기대하기 힘든 '오디쎄우스의 항해'에 내던져졌다. 드넓은 바다 속 항해는 어둡고 거칠며 뱃길 안내원도 없고 나침반도 없는 상태로 목표도 없이 계속된다. 

 


▶  발제

 

 

ㅇ 인종주의 

     . 민족 순결주의, 우등민족/열등민족

      + 동성애, 장애인, 집시

      + 기독교화 되지 않은 원주민

 

 

 

ㅇ 한번 피괴된 '인간이라는 척도'의 재건

 

      . 인간으로서의 수치심

      .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짊어져야 하는 짐

      . 인간이하의 취급

      . 보편적 인간이라는 관념

     

저자의 질문 :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만한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남는 것일까?

답 :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때문에 노예보다 못한 신분으로 추락하더라도 '덕과 지'를 구하는 것이다. 단떼를 상기하고, 오디쎄우스처럼 끝없는 고난의 항해를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금 지옥에서 인간세상으로 생환하여 증언하기 위해서.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만한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남는 것일까. 그 대답이 여기에 있다. " 

 

비판 지점 : 

나찌즘 더 나가 서구문명이 저질러온 학살의 가해자들이 갖고 있던 인간이라는 보편적 관념이란 짐승과 다른 이성을 가진 인간이 아닌가? 짐승-인간이하의 인간(유대인 등)-이성적 인간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위계를 문제삼지 않는 이상 "한번 피괴된 '인간이라는 척도'의 재건"은 요원할 것 아니 불가능할 것아닌가?  

 

저자는 원주민을 비하하는 레비를 비판한 점은 마땅한 지적이지만 저자 또한 이 부분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는 듯. 

"... 옆 사람에게서 빵 4분의 1조각을 빼앗기 위해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죄가 아니더라도, 가장 야만적인 피그미나 가장 잔인한 새디스트보다도, 사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규범에서 벗어나 있다" (레비) 

 

193 나찌 인종주의의 희생자였던 그의 입에서 "야만적인 피그미(아프리카 원주민의 한 종족)'라는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복잡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쁘리모 레비에게 '인간'이란 무엇보다도 '사고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피그미'는 사고하지 않는 존재일까? 그런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피그미'는 수백만 명의 인간을 철저하게 절멸하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저자가 레비를 비판한 지점:

"쁘리모 레비는 나찌즘과의 싸움을 '문명' 대 '야만'이라는 대립 구도로 파악했던 측면이 크다..... 물론 그가 그 후 유럽중심주의적 발상을 그대로 유지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나찌즘이라는 '야만'과 싸울 때 자신의 근거가 된 '문명'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위험한지 자각했는가는 심각하게 검토해야만 한다. "

 

 

ㅇ 장 아메리와 프리모 레비

    . 차이

    . 유사점. 자기본위의 자살 

    . 존재증명 (아메리)

    . 존엄을 지키기, 증인으로서 마지막 완수(레비)

 

'이해'에 대한 기대의 차이가 아닐까. 아메리는 독일인을 이해하는 것에 거의 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레비는 아직 절망할 수 없었다. 그는 이성을 믿고 서로 대화하는 것을 진보를 위한 최상의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226

 

"독일인'을 이해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인간'이라는 이념의 보편성을 구제해낼 수 있는지 없는지 또는 그 '척도'를 재건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열쇠다. 레비는 살아남은 이상 '독일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메리와 같이 '스스로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 

 

레비가 자살한 이유, 저자가 보는 :

아니, 그의 자살은 원래 불안, 공포, 실의, 절망 혹은 권태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증인'으로서 마지막 일을 완수하기 위한 조용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ㅇ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변증법 

 

그 각각의 장면에서 그들은(희생자) '같은 인간인데 왜?"라고 낮은 목소리로 신음했던 것이다. 근원적인 물음이다. 굴욕과 고통과 함께 몸 안에 새겨진 이 근원적인 물음이 그들을 움직였고, '같은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는 어려운 위치로 그들을 내몰았다. 차별받는 자에게는 '같은 인간'이라는 관념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지키는 투쟁의 근거이며 무기이기도 한다. 그 때문에 피해자 측은 언제나 가해자를 포함한 새로운 보편성의 틀을 재구축하는 역할을 짊어지게 된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변증법이다.

 

 

ㅇ 현재는 어떤 상황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인간'이라는 이념이 보편적으로 공유된 단순 명쾌한 세계가 아니다. 단절되고 금이 간 세계다.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말은 단절을 숨기는 미사여구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단절 속에서 온몸으로 떨쳐 일어난 증인들이 '인간'의 재건을 위해서 증언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편'의 사람들은 보신이나 자기애 때문에, 천박함과 나약함 때문에, 상상력의 빈곤함과 공감대의 결여 때문에 증인들의 모습을 바로 보지 않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장 아메리도 쁘리모 레비도 자살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1997년 12월 16일에 이 세상을 떠났다. 폭력의 세기를 증언한 산증인들은 전 세계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그리스, 소련, 베트남, 브라질에 여전히 강제수용소가 존재하며, 모든 국가에 감옥, 소년원, 정신병원 같은 "인간에게서 이름, 존엄, 희망을 빼앗는 시설"이 존재한다고 지적한 후, 브레히트의 "이런 괴물을 낳은 자궁은 아직도 건재하다"는 말을 인용한다. 

 

 

ㅇ 저자가 독자에게 하는 마지막 질문 

 

냉혈이나 잔혹은 지금도 세계를 덥고 있다. '인간이라는 척도'는 파괴된 상태다. 아우슈비츠에 의해서 폭로된 '단절'을 우리는 넘어설 수 있을까?

아우슈비츠 이후 우리 '인간'은 생환을 기대하기 힘든 '오디쎄우스의 항해'에 내던져졌다. 드넓은 바다 속 항해는 어둡고 거칠며 뱃길 안내원도 없고 나침반도 없는 상태로 목표도 없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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