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절멸

백_일홍 2022. 8. 1. 14:18

절멸

이동시 엮음


이동시 첫 번째 출판물 <절멸> 서문


처음부터 없던 것이 있고,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있다. 처음부터 없던 것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사실 없음을 논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의미는 있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데도 우리는 그것을 쉽게 잊는 정도가 아니라 매일 잊는다. 그래서 정작 그것이 있을 당시에는 웬만해서는 자각이나 환기도 되지 않는다. 언제나 있음이 끝나고 없음밖에 남지 않았을 때, 그때서야 우리는 겨우 부리나케 의미를 떠올리고 곱씹는다. 물론 그마저도 늦게나마 하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무뎌지는 것이 대세인 세상에서.

한 번쯤은 누구든지 상상해본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물론 여기서 궁금한 것은 내 죽음의 효과이다. 과연 빈자리라는 것이 정말로 생기는지, 내 죽음이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의 사라짐 자체보단 사람들이 슬퍼하는지 아닌지가 관건인 것이다. 그래서 몸은 죽었어도 영혼은 몰래 세상을 떠돌면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싶은 상상이 발동한다. 가끔은 꿈이라는 극장에 상상한 장면들을 상영하기도 한다. 마치 사라져 가지만 비로소 존재의 베일이 벗겨지면서 가려졌던 의미가 드러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없어져 봐야지만 소중함을 깨닫는 게 가장 바보라고 했다. 바꿔말하면 있을 때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하다. 특히 있고 없고 간의 차이가 큰 생명일 경우 더욱 그렇다. 생명의 가장 핵심적은 특징은 고유하다는 것이다. 지구 상에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을 유전형과 표현형의 조합이기에, 그 개성의 총체는 죽었다 깨어나도 다시 창조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체 불가능하다. 이 유일무이한 톡특함이 죽음의 비가역성이 갖는 실질적인 의미이다.

그런데 그러한 고유함이 하나, 둘도 아니고 집단적으로 한꺼번에 없어진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갑작스런 정전으로 삽시간에 주위가 어두워지듯, 세상에 둘도 없는 존재들의 등불이 사방에서 꺼지는 것을 보면서 추스르는 시늉이라도 내는 것이 가능할까? 전쟁이나 재해가 그토록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이런 존재의 꺼짐이 너무 많이, 너무 한꺼번에 벌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명실공히 절멸의 시대인 오늘날처럼.

멸종의 소식이 매일 들리는 시대에 산다고 해서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말라, 왜냐하면 지구 역사상 그 어느 때에도 이 정도였던 적은 없었으니까. 이것의 의미와 중요성이 잘 와닿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인지 능력과 감각 기관의 한계와 무능 덕분이지 결코 사태의 심각성이 낮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자연스럽게 되지 않으면 의식적으로라도 되새겨야 하는 이유가 또 한 가지 있다. 바로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지구 역사상 일어났던 대멸종 중 어느 한 종이 그것을 일으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연의 구성원 중 하나가 생명계 전체를 뒤집어놓는다는 건 상상조차 불가능한 것이었다. 한때 우점하고 창궐한 생물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고삐 풀린 채로 증식하지도 않았고, 다른 모든 생물이 살 공간과 가능성마저 말살하거나 자신의 독점적 체제 내로 복속시키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하나의 생물이 전 지구적 재앙이 된 적은 없었던 것이다. 한편으론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리는 이 사실을 곱씹어보면, 우리가 맞이한 '인류세적' 현실이 새삼 충격적이다.

이 모든 것을 일으킨 주역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멸종이 무엇인지 아무런 감이 없다. 어느날 내 집은 물론, 동네 아니 도시 전체가 홀라당 날아가 버린 경험을 과연 우리 중 몇이나 했겠는가? 아직 생존한 전쟁 세대 몇 분 정도나 있을까. 사실 그조차 딱 맞는 경험도 아니다. 세상이 파괴도는 것도 모자라, 아무리 다니고 다녀도 사람 한 명 보지 못한다는 것. 아무리 목이 터져라 불러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지독하게 절대적인 고독함에 치를 떨다 쓸쓸히 마감하는 것. 이것이 멸종이다.

인터넷 잠깐 잠깐 끊기는 것도 못 견디는 현대인에게 이런 장엄한 비극이 와닿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하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벌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먹구름 낀 하늘에서 우수수 쏟아지는 우박처럼, 수백만 년 이상의 기나긴 세월을 거쳐온 여행자들이 거의 한날한시에 모두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이다.

사라지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바로 시이다. 살아 있는 움직이는 시, 파고 파내고 끝이 없는 이야기. 이야기와 동물과 시이다. 세 가지 단어이지만,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동물이야말로 가장 생태적으로 함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일 분, 일 초마다 이야기가 피어 나오기 때문이다.

동물은 생태적 시

넓은 바다와 대지를 누비며
널린 세상의 것들 중 극히 일부를
선택적으로 골라, 먹어, 자기 자신으로 체화하는 존재
그렇기 때문에 동물은 그 한 몸으로 그 서식지를 함축한다.
동물은 그 서식지에 대한 시적 표현이다.
쓰레기로 가득 한 서식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동물은 시
한 몸으로 보여주는
생태적 시.

절멸. 그보다 더 참담한 현상은 없다. 세상의 모든 가치와 소중함을 대신하여 절멸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 첫 번째 이동시 총서 <절멸>은 그것을 위한 몇 가지 노력의 기록이다. 이로 인해 보다 많은 사람들과 동지가 되기를 희망한다.

ㅇ ㅇ ㅇ


대지 X 이슬아


나 이슬아는 오늘 이 순간 돼지로서 말한다.

나에게서 새로운 병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병은 나를 통해 왔지만 내가 만든 병이 아니며 나에게서 시작된 병도 아니다.

아주 여러 명의 당신이 힘을 모아 만든 병이다.

당신들이 구축한 세계에서 수천만 마리의 내가 산다.

병들지 않을 수 없는 곳에, 병들지 않을 수 없는 방식으로.

내가 태어난다. 꼬리가 잘린다. 이빨이 뽑힌다.
나는 갇힌다. 먹는다. 자란다. 빨리빨리 자란다. 다 자라고 나면, 뒤돌아볼 수조차 엇다. 이곳은 딱 나만한 크기의 감옥이다. 그곳에 오물이 쌓인다. 나는 더러워진다. 수없이 주사를 맞는다. 그리하여 나는 항생제로 이루어진다. 부작용투성이가된다.쇠로 된 창살을 물어뜯는다.

나는 멍해진다. 나는 옮겨진다. 나는 실려간다.
나는 놀란다. 나는 운다. 나는 죽임을 당한다. 내 몸은 분리된다. 썰린다. 비닐에 담긴다. 냉동된다. 먹힌다. 온갖 방식으로 먹혀서, 당신들의 신체로 간다.

간혹 나는 산 채로 묻힌다. 나는 수만 마리의 나와 함께 땅속에 있다. 나는 썩는다. 나는 아주 천천히 병든 땅이 된다.

내가 묻힌 땅, 내 피로 물든 강. 나를 스친 사람들. 나를 먹는 당신들.

모두 아프게 될 것이다. 내가 이렇게나, 아프기 때문이다. 나는 고통의 조각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돌고 돈다. 당신에게서 나에게로. 나에게서 당신에게로.


ㅇ ㅇ ㅇ

낙타 X 김탁환

...

고향은 실크로드에 놓인 타클라마칸 사막이다. 3년동안 실컷 사막을 누볐다. 한국에 와서 동물원에 갇히고 나니, 야생 낙타 시절이 확실히 좋았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면 사막을 끝없이 옮겨 다녀야 했지만, 그때는 자유가 있었다. 동물원에선 꼬박꼬박 먹이를 주지만, 갇혀 살아야 한다.

...

닭 X 최용석

....

산 생명 그만 먹고, 화석 연료 그만 때고, 원자력 발전소 그만 짓고, 엔간히 처먹고, 엔간히 돌아댕기고, 엔간히 싸고, 엔간히 버리고, 엔간히 부시고, 엔간히 쳐들어와 제발 제발 우리 같이 살자

닭들의 말을 닭 치고 잘 새겨들을 것이니 시간이 얼마 없다.

지금 당장 닭 치고 모든 것들 바꾸지 않으면 더 무서운 물난리,, 불바다, 병 창궐, 지진에 방사능 유출, 나는 이제 죽을 라네, 이리 말해도 변하지 않을 느그들 인간과는 더는 살 수 없으니. 나 용석이 나 닭은 이제 가네 영 가네. 67


ㅇ ㅇ ㅇ

비둘기 X 이내

....

나, 비둘기는 부와 욕망을 과시하는 용도로 야생에서 납치되어 당신 곁으로 왔습니다. 그때의 나는 귀족들에게 지금의 외제 차, 명품 백과 같았습니다. 당시 최신 기술을 도입해 나의 가슴 근육을 키우고 꼬리 깃털 모양을 바꾸더니, 급기야 당신들 세계관의 기반이 된 진화 생물학의 근거로 삼더군요.(다윈의 종의 기원 1장의 주인공이 저라는 걸 알고 계시나요?)

터전이 강제로 옮겨진 나는 삶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밝힐 수 없었던 귀소 능력으로 우체부가 되고, 전쟁 영웅도 되었습니다. 당신의 유흥을 위한 경주에 나가기도, 이름 긴 고급 요리의 재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희소성과 이용 가치를 잃은 나는 버려졌고, 잊혔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내가 더러워 병을 옮길 것 같고, 잘린 내발이 징그럽습니까? 당신이 버린 쓰레기가 원인입니다. 나를 자세히, 오래 바라볼 수가 없습니까? 그것은 내가 외면하고픈 당신의 결점을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추신. 버려지고 쫓겨난 경험을 먼저 한 지구 위 생명으로서, 갑작스럽게 삶의 터전을 잃은 기후 난민의 마음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들에게 평화가 함께하기를. 87


ㅇ ㅇ ㅇ

절멸 선언문

현대 인류의 구성원 한 명 한 명은 절멸의 재료이고
현대 인류의 운영 체제는 절멸의 레시피다.

지구의 동물 열 중 넷이 당신들, 징글징글한 인간이다.
열 중 여섯은 당신들이 키우는, 항생제/똥 범벅 살코기-수용소의 포로들, 사는게 사는 게 아닌, 당신들에게 영혼을 탈탈 털린 좀비 가축들, 나머지 쥐꼬리만큼의 야생 동물들은 불가촉천민처럼 쫓겨 다닌다.

.....

펜데믹 ? 인간 씨, 농담도 잘하시네!
1760년부터 당신들이 펜데믹이었다.

인간들..... 코로나 때문에 한 명만 죽어도 호들갑을 떨면서, 우린 수천만 마리 땅에 묻고 손을 탁탁 털더라!

은명!
우리의 갈 길은 정해졌다.
절멸의 절벽을 향한 고속 질주다.

...

절멸의 그날까지 탈주하고 투쟁할 것이다.

가는 마당에 유언을 남기겠다. 잘 새겨들어라.
하나
..



선언문 해설

동물과 시국
. 시국 : 코로나 19 사태, 펜데믹의 근본 원인에 대한 이야기는 소외됨. 원인보다 증상에 기울임.

코로나 19의 근본원인을 직시하는 것은 곧 동물에 주목하는 것이다. 코로나 19는 물론, 앞으로 다가올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질병 X 역시 동물에게서 나오고, 인간과 동물의 늘어난 접점에 의해 확대 전파될 확률 또한 매우 높습니다. 126

우리 인간은 지금까지 한 번도 동물을 주체로 상정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자는 주장,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 중심적인 학문, 인류학에서 나왔습니다.

브라질 인류학자,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하나의 특징:: 원주민들의 사고 체계에서 신화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신화를 ''인간과 동물이 서로 구분하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로 여긴다는 점.

생물학이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공통점을 동물성(생물성)으로 간주한다면, 아마존 원주민의 세계관에서 인간과 동물의 공통분모는 인간성이었습니다. 그들은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마존 원주민들은 인간 중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현란하게 넘나들며, 타자의 관점을 취하는데 익숙함. 종을 넘나드는 관점 이동에 유난히 능수능란한 자가 샤먼이었습니다. 샤먼은 동물과 인간의 소통을 도울 수 있는 신화적 사고의 전문가였던 셈.

<식인의 형이상학>
서구 철학이 주체에게만 관점을 부여한다면, 원주민 사상에선 관점이 있는 모든 것이 곧 주체였습니다. "관점주의"
견고한 인간 중심주의에 균열을 냄. 인간이라고 반드시 인간 중심에 머물 필요가 없다는 것, 오히려 전혀 다른 삶, 전혀 다른 인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획이죠.
가장 미래적인 사고의 원형을 재발견함.
인간이 동물과 그들의 서식지를 다루는 방식, 즉 동물의 거래/집단 사육 및 서식지 파괴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아마존 원주민들처럼 동물과 인간을 매개해 줄 샤먼을 불러야 햇습니다.
. 현대 사회의 샤머니즘 - 작가들
경계를 모르는 존재, 타자 되기를 일삼는 족속들, 상상하고 이입하는 존재.

1.교차주의적 연대
2.서식지 본존, 공장식 축산 폐지 및 인수 접촉 기회 제한
3.성장과 개발에 의존하지 않는 저탄소 경제 모델
4.국가차원의 기후 위기 선포 및 모든 목표일을 앞당겨 대책 재수립
5.자본 회수를 통한 화석 연료 산업의 단계적 폐지
6. 인구 제한 정책
7.자연물 재취 산업의 사회적 비용 환원 의무(임업, 목축업, 광산업, 에너지 산업 등)
8.자본의 외부 창조
9.석유 화학에 의존하지 않는 자원 순환 시스템
10.동물권에 대한 보편적 존중

* 동물심 번역기


2부 쓰레기와 동물과 시

빨대 / 유경근

빨대 박힌 그 코는
내 딸의 코였어.
빨대가 막아버린 그 숨은
내 딸의 숨이었어.
한순간 멋과 편리를 위해 잠깐 쓰고 버린 것들이
내 딸의 숨을 막고
내 딸의 삶을 후벼 판 거지.

내가 그런 거지.
내가 쓰레기인 거지.
거북아, 미안해.
딸들아, 미안해.


ㅇ ㅇ ㅇ

동물을 위한 나라는 있다,
한 인간동물의 동물주의자 선언


동물당 강령

1. 새로운 우리의 발명
- 우리는 모두 동물이고, 모든 동물은 정치적 주체이다.
우리가 정치적 주체가 되는 순간 모든 인류 역사와 철학은 허구로 돌아가며, 존재, 인식, 윤리는 다시 쓰일 것이다. '우리'에는 동물당 강령에 동의하는 인간동물도 포함되지만, 인간예외주의자는 제외된다.

2. 차별과 차등 거부
- 우리 모두 존엄하고 평등한 존재이며, 차별과 차등을 거부한다.
동물 각각의 종, 지능, 수용 가능 감각, 감정의 풍부도, 평균 수명, 사회성, 영혼.영성의 유무 등은 차별과 차등의 척도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동물의 경우, 동물당 강령에 동의하는 휴머니멀과 아닌 자들과 구분해 차별, 차등 대우하기로 한다.

4. 정상 동물 - 이데올로기 NO!
우리는 동물을 멋대로 규정하고 분류한 근대적 계급적 사고를 거부한다. ... 동물은 노예, 음식, 상품, 기계, 장난감이 아니다...

ㅇ ㅇ ㅇ

용어

동물/동물주의

인간동물/휴머니멀 Humanimal

사람/사람됨
인류학자 며설 살린스의 말처럼 "모든 인간이 깊은 곳에서 동물인 것이 아니라 모든 동물이 깊은 곳에서 인간이다" 동물은 인간이 아니지만, 동물과 인간은 모두 사람(person)이다. 통상적으로 인격체라고 번역하는 이 말에 사실 '인'을 굳이 붙일 필요는 없다. 동물에게서 '사람'을 보는 세계관. 재규어에게는 인간도 패커리이며, 피는 적포도주이다.


번역
모든 동물당원은 동물심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원뜻에 가장 가깝게 번역할 의무가 있다. 인간 당원은 '동물심' 번역가 역할을 담당함.

개체와 생명 다양성:
기회가 될 때마다 종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개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종의 경계에 있는 동물들이 이런 접근의 중요성을 종종 환기시킨다.

다양성 역시 종 중심적 사고를 벗어난다. 즉, 종 다양성이 아니라 생명 다양성이다. 가령 한 종의 멸종을 생물학적으로 막았다고 대수가 아니다. 살아남은 개체의 삶의 질과 결이 중요하다. 202

인간해방 :
"동물을 위해 인간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죽어 사라지는 것 이외예?"라는 질문에 충실히 답하며 산다면,... 그런 고통스러운 '동물 되기'를 통해 어쩌면 해탈도 가능할 것이다.

무정상:
동물당은 동물 정상성 개념을 해체하고자 한다. 가령 해충과 익충, 숙주와 기생. 더불어 모든 종류의 '~중심주의' 자체를 반대한다. 생태주의의 본래 뜻을 따라가다 보면 중심이 해체되므로, '주의'를 붙이는 것부터가 모순이다.

인도적 도살:
타자의 욕구를 위해 고통 없이 편안하게 맞이하는 죽음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인도적 죽음이나 동물 복지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확장:
우리는 윤리적 고려 대상 영역의 무한한 확장을 지향한다. 여기에는 모든 동물은 물론 버섯류, 균류, 포자까지 포함될 수 있다. .... 단 식물은 제외된다. 동물당은 식물당의 창당에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동물당 창당을 탄압했던 인간동물당의 행태를 고스란히 되풀이한다는 비판을 면키는 어려워 보인다. 2040년에 총투표로 이 공식 입장의 철회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206

무축적:
생명의 근원인 태양 에너지의 과잉 공급 문제를 '낭비'의 개념을 풀어내려 했던 조르주 바타유의 시각을 잘 이해한다면 동물당의 축적 지양을 설명하기 유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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