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백_일홍 2022. 7. 29. 21:06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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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_잘못된 삶과 좋은 만남

 

앞으로 내가 어떤 길을 가든, '잘못된 삶'에 대해 한번은 제대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어떤 인간 집단, 특정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잘못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관념은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만난 친구, 옆집에 사는 아저씨, 친절하게 말을 걸던 교사, 정의 구현자를 자처하는 종교인과 정치인, 법률가의 말 들 속에서 구축된 것이다. 나아가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했던 생각들, 세상과 맞서며 형성한 삶의 스타일이 다른 이들을 '잘못된 삶'으로 내몬다. 12

 

존엄과 매력

 

'잘못된 삶'이란 착하지 않거나 나쁜 짓을 저지른 삶이 아니라 존중받지 못하는 삶, 하나의 개별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격당한 삶이다. ..

 

 아무리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하고, 장애나 질병이 심하고, 다수가 혐오하는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잘못된 삶'이 되기 쉽다. 이들은 자기 삶의 이야기를 최선을 다해 작성해가는 '삶의 저자'들이지만, 이들을 배제하고 밀어내고 낙인찍는 사회적 관행과 정치적 힘, 그리고 자기 존재를 발전, 확장, 농축할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 정치경제적 구조 때문에 '잘못된 삶'이라는 낙인을 안은 채 사회 밖으로 밀려난다. 

 

다른 한편, '매력 자원'이 크게 부족한 경우에도 우리는 잘못된 삶으로 향하기 쉽다... 매력이 없는 구성원은 비공식적인 사적 네트워크 안에서 타인과 교감하고, 성적 관계를 맺고, 진지하고 장기적인 우정을 나누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다. 

 

결국 우리에게는 각자가 가진 생생한 고유성과 숨겨진 '아름다움'을 전개할 무대와 관객이 필요하다. ... 이를 위해 주요한 사례로 언급하는 이들은 장애나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다.  인종적.성적 소수자, 나이가 많은 사람들, 장애는 없지만 배제되고 소외되기 쉬운 외모를 가진 사람들의 경험을 장애인들은 얼마간 다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장애인들이 존중받고 매력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표현해낸 역사와 이론적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 중 누구도 '잘못된 삶'이라고 규정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16

 

독자들이 자기 자신과 가족과 연인과 친구에게 "너(나)를 만나서 참 잘된 것 같아"라고 말하는 순간에 이 책이 약간이라도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 나는 장애와 질병, 그리고 각종 소외의 이유들을 뚫고 나가 언젠가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전망과 가능성이 아주 조금은 이 책에 담겨 있다고 말하고 싶다. 17 

 

 

1장. 노련한 장애인

 

핵토: 극도로 혐오스럽다. 구토가 난다는 뜻.

 

수치스러운 상황을 맞았을 때 눈물을 흘리거나 흥분한 나머지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행동한다면 수치심은 더 커질뿐이다. 그러니 '바라보는 나'를 안전한 곳에 모셔두고, '보여지는 나'를 지켜보며 냉정을 찾는 것이다. 자아를 둘로 분리하면 '보여지는 나'를 상황에 맞게 적절히 행동하게 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서 나의 자존감을 보호하는 전략을 취할 수 있다. 34

 

배역의 수행 능력이 탁월해질수록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상처를 피할 수 있다. ... 물론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탁월한 공연자가 되는 데는 대가가 따른다. 

 

퍼포먼스로서의 삶: 기호화된 인간

 

2016년 일본 사가미하라시에 위치한 장애인복지시설 쓰구이야마유리엔, 우에마쓰 사토시라는 자, 장애인 살인사건 

 

서울 지하철 강남역 화장실 여성 살해사건

 

두 사건은 특정 사회집단에 혐오감을 품고, 그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혐오 범죄라는 공통점이 있다. 사건 발생 이후 그것을 '정신질환자의 묻지 마 살인'으로 해석하려는 당국의 시도도 닮았다. 

 

주)12. 일본장애인연맹은 장애인에 대한 혐오범죄에 대하여 또 다른 혐오(정신장애인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당국과 언론의 설명과 대처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37

 

두 사건의 결정적 차이. 우에마쓰 사토시는 단지 장애인을 혐오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장애인을 죽이면서 자신이 그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했다. 더 중요하게는 자신이 장애인을 구원했다는 그 사실을 전 세계에 공표하기를 원했다. 그는 단지 장애인이 혐오스러워서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구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공연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특정 욕망을 가진 개인이 장애인들을 자신의 퍼포먼스로 동원했다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우리는 유사한 맥락을 가진 다른 사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 2011년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나경원 의원, 장애인복지시설에 찾아가 장애 아동 목욕 봉사를 함. 장애 남자 청소년은 벌것벗은 채 욕실 바닥에 누워 있었음. 

. 정치인들의 진부한 공연

 

저자의 경험, 

"저는 그저 '전시'되었다. 그들의 모임에서 나는 일종의 간판이었다. 그들의 모임을 유지하면서 가꿔온 화초 같은 존재였다.... 나의 존재는 하나의 위안이요. 뿌듯함이요. 그들의 삶을 정화시켜주는 화초였을 것이다" 40

 

자신의 그 공연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아무런 역할도 없이, 개성이나 존재감도 없이 특정 집단(장애인, 노인, 환자, 빈자, 노숙인 등)이 특정한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만 도구처럼 활용된다. 이런 종류의 공연에서 이 집단은 철저하게 추상화, 익명화, 기호화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쌍함'을 전달하는 요소들, 즉 빈곤함의 정도, 장애의 심각성,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사연으로만 존재가 설명된다. 41

 

쓰구이야마유리엔의 장애인들은 일본의 한 교수가 지적했듯이 그저 '기호화'되었다. 주14) 중요한 것은 피해자 개개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사회가 슬픔과 분노를 공유하는 것이다. 43

 

인간은 신체를 훼손당할 때 인격체로서의 존엄성에 큰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개인이 가진 고유한 이야기, 특유의 욕망과 선호, 희망, 자율성으로 구성되는 개별적 인격성을 인정받지 못할 때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크게 훼손당한다. 

 

장애, 질병, 빈곤 등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수단으로 삼아 철저히 익명화(기호화)하는 방식으로 연출하는 공연은 결국 이들을 실격당한 존재로 만든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나와 당신이 그 '(쓰구이야마유리엔의) 피해자'의 삶에만 연결되어 있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가해자 우에마쓰 사토시와도 연결되어 있다. 44

 

노련함의 딜레마

 

세상을 사심없이 관조할 수 있는 성찰 능력을 일상의 모욕, 배제, 차별에 대항하는 노련함의 전제이자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역설적으로 이 능력은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세상을 자신과 완전히 분리된 관조의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에 삶을 실존으로 받아들이는 일도 방해한다. 고도의 성찰 속에서 세상은 가상현실 기기를 쓰고 바라보는 생생한 게임과도 같다. 

 

사토시의 기질을 정신질환으로 돌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는 누구보다 명징하게 자신이 하는 일을 알았고, 그 일을 계획했다. 그는 '성찰적인 인간'이었다. 45

 

자아를 지키고 자신을 연출하는데 골몰하는 고도의 노련함은 결국 삶 자체를 퍼포먼스로 만든다. 노련한 사람들은 삶의 모든 순간을 연극적 수행으로 채우고, 타인의 행위도 연극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24시간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관찰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위도 진심으로 믿지 못한다. 

 

2017 서울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 문제를 둘러싸고 지역 주민과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장애 학생의 부모, 서울시 교육청이 격렬하게 대립한 사건. 

 

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지역주민의 한 마디, "쇼하지 마!" 

이들은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는 생각할 여유도 없는, 즉 성찰이 불가능한 상황을 경험한 적이 없다. 

 

자식을 벌레 같이 보는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 행위는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들의 의식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자녀만을 향했을 것이고, 자녀가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목표에만 정향되었을 것이다. 

 

상호작용에 '노련한' 인간들에게는 이런 경험이 부재하다. 이들은 언제나 자기를 관찰하고 통제하고 연기해왔기 때문에, 무릎을 끓은 부모들처럼 자신을 관찰하는 시야가 사라지고 다른 존재, 대상, 목표를 위해서만 의식이 정향된 몰입의 순간을 경험한 적이 없다. 48

 

모욕의 순간을 자주 경험해야 했던 사람은 그런 상황에 노련해 질수록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가 일치하는 경험에서 멀어진다.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쌓는 일이 잦아질수록 우리는 어떤 '타자'에게 온전히 몰입하거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분노 혹은 감동하거나, 특정한 현실에 완벽하게 실재하는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다. 

 

아름다운 음악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듣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관찰하고, 섹스를 하는 순간에도 굽어진 내 다리가 추하게 보이지 않을지 의식하며, 아름다운 뮤지컬을 보면서는 의자에 푹 파듣힌 내 어깨가 굽어 보일까 염려한다. 

 

나는 내 퍼포먼스를 위해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다. 내 퍼먼스를 위해 누군가를 모욕한 일도 없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우아함'을 위해 그 순간 나와 함께했던 많은 이들과 나 자신을 게임의 일부로 만든 것은 아닌가. 이들을 현실에서 배제하여 내 삶을 가상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삶이 일종의 연극이라는 사실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더 큰 진실을 위해 거짓을 연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로지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빛내는 데만 몰입하는 사람들은 작은 진실을 위해 큰 거짓을 연기한다. 나는 이를 '품격주의적 태도'라고 부르고자 한다. 50

 

 

2장. 품격과 존엄의 퍼포먼스

 

품격을 만드는 퍼포먼스

 

'품격'이란 사회적 지위, 위계, 권위의 정도에 따라 충실히 그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 누리는 가치. 

 

품격있는 사람, 품격있는 행동들

 

반면 '실격당한' 사람들은 정반대로 행동한다고 여겨진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고,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사람들, 신체적 장애와 질병 등을 이유로 사회에서 배척당한 사람들이 품격 있는 삶을 달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품격이 개인의 성찰 능력만으로 오롯이 달성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사회적 위계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품격을 위해 봉사하는 다수의 지원자들이 있다. 

 

'의전' 

 

타인을 향해 자신의 모습을 꾸미는 가장 노련한 존재로는 속물이 있다. 속물은 언제나 타인을 의식한다. 속물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끔씩은 자신의 품격까지 짓밟는다는 것이다. "쇼하지 마!"라고 외치던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 토론회의 참가자가 그렇다. 

 

'너저분한 것들'과 대변하지 않은 채 토론회 자리를 떠나는 국회의원, 그는 자신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자리를 뜬다. 하지만 속물은 대결을 회피하지 않는다. 위계서열(vip와 그렇지 않은 사람간의 위계,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위계)를 강조하고, 타인의 복종 혹은 철저한 굴종, 잘 짜인 완벽한 무대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둘은 닮아 있지만 목표 달성을 위해 투박하고 노골적인 퍼포먼스를 과감히 펼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척 점잔을 떠는 자의 차이가 '품격주의 세계관' 주변에서 아슬아슬하게 갈린다. 

 

품격주의자, 황교안 전 국무총리, 의전왕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에서는 그에 참여하는 모든 행위자가 실재(진실)을 공유한다. 그 공유하는 실재 위에서 서로가 서로의 연기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 대등한 퍼포먼스에 참여한다. 

 

예.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만 아이가 없는 대학 동기 앞에서 육아가 화제가 되었을 때 신속하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친구. 이들은 모두 서로의 연기가 품고 있는 의도를 공유한다. 친구가 나를 배려해서 화제를 돌리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어떤 종류의 선의의 거짓말은 상대방을 기만하지 않고도 그를 배려한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극명하게 빛나는 순간은 서로가 서로의 연기를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때이다.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 그렇게 서로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존엄이 상호작용을 통해 촉발되고 구현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주변에서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과의 순간순간이 그 계기가 된다. 이런 순간들에 참여하기 위해 위리는 품격만을 위한 퍼포먼스를 거부하고, 스스로가 그 노예가 되지 않도록 저항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속물성, 품격주의자로서의 본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핵토' 얼굴, 뒤틀린 장애인의 몸, 가난하고 절박한 표정, 노쇠한 팔 다리로는 어지간한 권력이 없다면 품격주의자의 삶을 유지하기 어렵다. 

 

 

3장.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부정한다.

 

미시마 유키오(1970년 당대 일본에서 가장 유명했고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던 작가. 자신이 만든 민병대인 방패회 회원 네 명과 함께 일본 육군 자위대 총감을 방문하여 자위대 궐기를 외치고, 그 자리에서 할복자살함. 그는 극도의 나르시시스트로 스스로를 성적 충동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함, 자신의 몸이 나이가 들면 부패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함)나 정세연 같은 이들은 뛰어난 자기의식과 통제력을 갖춘 고도의 성찰적 인물이자 탁월한 자기 연출가이다. 이들은 타인의 시선 앞에 자신의 품위, 지위, 우아함을 뽑내는 수준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신의 관점에서) 가장 성적으로 충만한 대상으로, 완전하게 표백된 세상에 색을 입히는 혁명가로 창조하기 위해 목숨을 끊는다.  이들에게는 예술가이자 혁명가로서의 자기 자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점에서 미시마 유키오와 정세연은 사랑하는 타인이나 특정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일하고 불가피한 수단으로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 이를테면 전태일과는 다르다. 

 

전태일에게 죽음은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에게 죽음은 그 이상의 목표를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미시마와 정세연에게 죽음의 순간은 가장 극적인 '자아의 연출', 공연/퍼포먼스로서 중요할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죽을 수는 있어도 장애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장애인이 되는 대가로 평하시장 여공들의 근로 조건이 개선된다면 전태일은 죽음 대신 그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세연과 미시마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의 거의 모든 장애는 자기 연출이라는 측면에서 아름다운 공연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실존이란 넘어지거나 뒤틀리고, 용변을 참느라 고생하고, 허리 통증이나 방광염에 시달리고, 어색한 시선을 받고,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는 일이다. 자신의 삶을 가장 미적으로 마감하고 싶은 공연자들에게 이는 죽음보다 못한 삶일 것이다. 

 

죽음까지도 퍼포먼스로 삼는 인간과, 가장 열악한 실존을 감내하면서도(수치심을 견더내면서도) 살기를 선택하는 자들의 차이. 

. 뇌성마비 장애인들의 모임인 푸른잔디회는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도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 

. 전자는 미를 위해, 좀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품격을 위해 삶을 존중하지 않는다. 

. 후자는 삶을 존중하기 위해 품격에 부여된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가치의 부재를 감내한다. 나는 전자를 품격주의자, 즉 품격의 인간이요, 후자를 존엄의 인간이라 말하고 싶다. 

 

피해자 되기를 멈추고

 

정세연, 미시마 유키오, 사토시... 자신의 고매한 품격을 높이기 위해 주변 사람을 이용하는 인물들은 모두 같은 선상에 있는 일종의 나르시시스트일까? 그 반대쪽에 있는 나를 비롯하여 장애, 질병, 빈곤 등을 이유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의 공연에 동원되는 순수한 피해자인가? 

 

노련한 삶을 살기 위해 애썻던 나는 이들에게 이용당하는 일을 끔찍이도 경계했다. 그 노련함의 핵심은 나의 자존감을 지키고, 나를 수단으로 삼아 자신을 빛내는 자들로부터 나의 '결핍'을 착취당하지 않는 전략이었다. 

 

잔혹한 살인자, 위선적으로 보이는 정치인, 일상에서 만나는 품격주의자들은 나에게, 그리고 아마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당신에게 무수한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도 발견하지 않았을까? 

 

나의 결핍, 나의 소수성을 무심히 대상화하고, 그저 자기 삶을 꾸며주는 연극적 요소로만 남기를 바란 사람은 위선적인 정치인뿐만 아니었다. 결연한 피해자, 순수하고 윤리적이면서도 노련하게 품격을 수호하는 피해자이고자 했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우리가 노련미를 발휘해 방어하고자 했던 저 품격주의자들, 속물들, 공감 능력 없이 자기를 꾸미는 데만 능한 나르시시스트들의 모습은 바로 '바라보는 나'가 '보여지는 나'에게 존재해온 방식은 아니었을까? 

 

푸른 잔디회, 사랑과 정의를 부정하겠다는 선언은.... 

능청스럽고, 유머러스하고, 지적이고, 신체적 결함을 보완하는 정신적 매력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압박. 사무실의 생수통을 갈지 못하는 대신 인사성 바르고 동료들의 생일이라도 잘 챙겨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 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일이다. 

 

완벽할 정도로 발달한 성찰적 자아를 통해 자기 신체를 스스로 파괴하는, 연못에 빠져 익사할 때까지 일어나지 않고, 스스로 배를 가르는 고도의 성찰능력이 보여주는 역설적인 타인 지향적 연극을 극복하는 힘. 때로 무력하고 별 볼 일 없음에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힘. 아뭣도 할 수 없고 가진 것이 없다는 부정을 선언하는 힘. 거기서 우리는 타인 지향성을 넘어선 진성성의 한 형태를 본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시선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 그 가능성은 이제 '수용'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나의 몸, 운명, 삶, 실존에 대한 수용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완전한 부정 이후에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어떤 긍정, 즉 우리가 어떤 위기, 불완전, 불편, 고통을 살고 있더라도 우리의 삶이 '잘못된 삶'은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정신승리'에 불과한 것 아닌가? 

 

내 존재의 중대한 결핍이라 생각되는 속성과 경험을 진정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다음 장에서

 

 

4장. 잘못된 삶

 

장애아를 출산해야 하는 순간을 맞을 때 부모인 나는 그 아이를 적극적으로 환대할 자신이 있는가? 

 

부모가 자기 아이의 '잘못된' 부분까지 환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그 아이와 동일하게 '잘못된' 요소를 가진 사람들의 삶이 존엄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 아닐까? 어떤 면에서 보면 이는 우리가 자신의 혹은 가족의, 연인의, 친구의, 공동체 구성원의 바로 그 '잘못된' 점을 진정으로 환대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최종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관문인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는 질문들: 

. 당신은 장애인을(그리고 이 책이 말하는 '잘못된 삶'의 어느 경우에 해당하든)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에 대한 어떠한 차별에도 반대하며, 그들의 삶이 어려움이 따르기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불행하거나 가치 없는 건 아니라고 믿는가? 

. 그런 당신은 장애아가 태어나는 순간도 비장애아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축복과 기대, 희망과 사랑으로 가득한 경이로운 시간으로 기억할 자신이 있는가? 

. '잘못된 삶'도 존엄하고 매력적이고 풍성한 삶이라는 것을 '변론'하려는 나는, 간단한 시술로 내 장애를 고칠 수 잇고 나와 같은 장애아를 출산하지 않을 수 있는 경우에도 거리낌 없이 그 시술을 거부할 자신이 있는가? 

 

청각장애가 있는 아이 선택하기

 

청각장애인 레즈비언커플이 청각장애아를 낳기 원하여, 청각장애를 가진 아들 고뱅을 낳음.

 

더 큰 키의 자녀를 원하는 것처럼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를 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청력을 사용하지 못하고 수어와 시각에 의지하는 삶의 존재 방식이 언제나 '결핍'은 아니라는 점. 청각장애를 가진 삶이 더 위대하다거나 더 가치 있다거나, 불편한 점은 거의 없다는 과장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소리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자의식을 전개하는 사람들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의 존재방식과 언어적 풍성함을 간과하는 일임을 말하고 싶다.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를 선택한 커플은 과연 고뱅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109

 

어떤 장애인들은, 특히 자신의 장애를 단지 극복해야 하고 없애야 할 요소가 아니라 삶의 한 부분으로 진지하게 숙고하고자 하는 이들은 장애에 대한 전적인 부정의 언어와 태도를 만날 때 매우 심란해진다. 113

 

유전자진단기술을 통해 장애아를 '걸러낼' 수 있는 사회는 해당 장애에 대한 의료, 사회복지 지출에 둔감해지기 쉽다. 그냥 '걸러내면'될 것을 굳이 낳아서 치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기술을 사용하지 않은 개인은 사회에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죄책감은 타당할까? 위 프로그램의 의미를 소개하면서 연구자 황지성은 첨단기술을 활용할지 말지는 개인의 선택이라고 하지만, 그 기술을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은 사회적 차별과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모순을 지적한다. 유전자진단이나 임신중절은 일정 범위 안에서는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다만 그 자유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장애아가 태어나면, 그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 결국 모든 기술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116

 

박현미씨가 장훈이에게, 청각장애인 레즈비언 커플이 고뱅에게 피해를 입협다는 생각에는 커다란 오류가 있다. 만약 박현미 씨가 착상전유전자진단기술로 골형성부전증을 유발할 수 있는 유전자가 포함된 수정란이 아닌 다른 수정란.을 몸에 착생했고, 레즈비언 커플은 청각장애 유전자가 없는 남성에게 정자를 기증받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장훈이나 고뱅이 아닌 아예 다른 존재가 태어났을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대신에 장애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 장훈이와 고뱅이 과연 어떤 피해를 입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존재하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피해'를 입은 상태라고 말하기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118

 

우리의 부모는 우리의 존재에 죄책감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 우리는 우리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 '잘못된' 상태가 아니라면 우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119

 

"그럼 너도 다리를 잘라"

 

이 모습 그대로 태어나는 것 이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면, 결국 우리의 장애나 질병은 그것이 설령 '잘못된' 것이라 평가받더라도 우리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나를 표현하고 다른 이들과 일체감을 느끼는 몸의 재현 방식을 배우며 나는 스스로가 '별종'이 아니라 공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을 경험했다. 이런 소속감, 즉 어떤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느낌 속에서 비로소 나는 휠체어를 밀고 세상으로 나갔고, ... 우리는 그저 당당한 척하는 정신승리법을 익힌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정신의 스타일'을 만들었던 것이다. 

 

스타일의 추구는 자신을 '무엇이 아님'이라는 결여가 아니라 '무엇임'이라는 적극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유사한 예는 많다. 미혼은 결혼의 결여를 표현하지만 비혼은 적극적으로 규정된 삶의 스타일이 될 수 있다. '청각장애'는 청력의 부재를 의미하지만 '농'은 농문화의 존재를 전제한다. 

 

이처럼 과거에는 결여나 결핍, 부족함, 기껏해야 '괴물freak'로 여겨졌던 존재들이 자신의 그러한 속성을 적극적인 정체성으로 규정하는 흐름은 최근 수십 년간 급격히 확산되었다. 

 

'수평적 정체성' 

부모나 윗세대의 민족, 인종집단으로부터는 이어받을 수 없는 고유한 경험과 관점을 상호 공유한다는 의미. 

청각장애, 저신장장애, 다운증후군, 조현병 등. 

 

매드 프라이드 운동, 

정신장애인들의 정체성 운동이다. 정신장애가 그저 범죄의 원인이나 인격성이 박탈된 비정상적 상태라는 통념에 맞서 이 역시 하나의 인간적 특질일 수 있고, 적절한 약물 치료와 사회적 지원, 편견없는 문화적 태도가 뒷받침된다면 풍요로운 삶의 일부일 수 있다고 주장함.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존 내쉬의 천재성. 반 고흐, 자폐성 장애를 가진 템플 그랜딘(자페인의 독특한 사고방식이 동물의 행동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가장 편리한 디자인을 창조해내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가를 보여줌) 

 

유전질환과 질병을 완전히 없앤 사회가 더 풍요롭고 흥미로운 세계일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부모나 사회의 선배 새대에게 넘겨받은 관점이란 포기하지 말고 장애를 극복하거나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너도 다리를 잘라"와 같은 태도는 건강한 두 다리를 가진 나의 어머니는 나를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전해줄 수 없는 정신 스타일이다. 

 

우리를 사랑하는 할머니와 어머니, 우리를 보호하는 국가와 공동체, 우리를 구원하려는 종교 지도자들과 성서의 가르침은 결코 '너의 욕망대로 살아라. 만약 남들이 그것을 문제 삼는다면 '그럼 너도 다리를 잘라'라고 말하라"하고 가르치지 못한다. 우리는 수평적 정체성을 가진 다른 존재들과 연결될 때에만 정상성의 결여로서의 내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인 자신을 인식하는 정신의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다. 128

 

나는 장애를 정체성으로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선택이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과 역사를 내 자아의 중대한 부분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129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직면한다. '잘못된 삶'이라고 규정된 자기 조건의 일부를 '스타일'의 토대로 삼거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시도는 결국 '정신승리'가 아닐까? 장애인이 아니라면 태어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혹은 장애인으로 평생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사람들이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처럼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대상을 단념한 채 살기 위해 펴는 전략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잘못된 삶을 정체성의 일부로 '수용'하는 일과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정신승리'가 구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삶을 잘못되었다고 규정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 사람들이야말로 어쩌면 이런 '정신승리'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129

 

 

5장. 기꺼운 책임

 

선유와 현오는 아이를 무척이나 사랑했고, 연골무형성증을 가진 모든 사람이 결코 덜 가치 있는 삶을 살거나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출산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이 아이를 낳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136

 

믿음과 수용

 

우리는 종종 하루에도 몇 번씩 장애가 '손해'라는 생각과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이는 우리가 장애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장애를 수용한다는 말은 장애를 문화적 다양성이자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이라고 '믿는' 것과는 구별된다. 

 

'믿는다'

. 객관적 근거가 있을 때, 우리는 믿는다라고 말한다. 

.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유리하거나 필요한 이유가 있을 때 믿는다. 종교(사후세계, 신의 존재 등)

. 내 마음대로 믿거나 믿지 않기가 어렵다. 

 

수용한다.

. 철저히 자발적인 선택을 의미한다. 믿음은 나의 의지에 따라 믿거나 믿지 않기가 대단히 어렵지만, 수용은 오로지 나의 의지에 달려 있다. 근거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  

 

침대 위에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의 엄마, 루스.

" 내 아이들 같은 장애아는 애초에 부모에게 선물이 될 운명으로 태어나지 않아요. 그럼에도 그 아이들이 우리에게 선물인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선택했기 때문이죠" 

 

도덕적, 법적 판단, 이성적 자율적 행위자로 '수용'한다.

뇌과학자의 연구, 자연적/과학적 인과 관계, 자연적 존재로 수용한다. 

 

수용은 나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삶의 전체적인 기획 및 그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수용은 우리 삶의 전반적인 방향과 연결된 윤리적 결단이므로,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유리한 이유가 있어서 믿는 일종의 '전략(정신승리적)적 믿음'과 구별된다. 

 

루스의 예. 

 

아Q정전의 '정신승리'와의 차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장애가 있는 몸, 미적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신체를 수용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혐오나 피해의식에 기초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이 세상이 구축해놓은 외모의 위계질서에 종속되지 않으며, 앞으로의 삶을 외모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 혹은 피억압자로서의 의식과 트라우마에 짓눌리지 않은 채 살아가겠다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입장)을 수용한 것이다.

 

장애를 수용한다는 것

 

장애의 수용은 실천적 선택이라는 맥락에 국한되며, 어떤 상황에서든 장애는 고정된 정체성의 일부라 고집하는 '믿음'과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정체성 정치에 깊이 심취한 나머지, 어마어마한 고통을 유발하는 유전 질환을 판별하기 위해 유전진단을 시행한 예비부모에게 그것은 '장애인을 학살하는 것과 동일한 행위'라며 비판을 가한다. 하지만 어떤 장애나 질병은 분명 한 인간에게 깊은 고통을 유발한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아이를 키우지 않기로 선택하는 부모가 그런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골형성부전증이란 병을 사전에 예방하거나 이 병을 가진 태아를 임신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쁜 일이라과만 주장할 수는 없다. 나는 부모님이 짊어진 짐의 크기가 결코 적지 않았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정체성이란 객관적인 대상처럼 존재하는 어떤 산물이 아니다. 정체성이 귀중한 이유는 우리가 각자의 인간적 상황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수행적 가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수행적 가치가 무엇인지는 예술품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위대한 예술품에 가치를 두는 궁극적인 이유는 예술품이 우리의 삶을 증진시켜서가 아니라 예술적 도전에 맞선 수행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골형성부전증이나 암 또는 청각장애가 가치 있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산물로서의 가치보다는 수행으로서의 가치를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수평적 정체성으로서 옹호하고자 하는 장애나 질병, 너무 크거나 작은 키, 인종, 특정한 정신질환, 성적 지향 등은 한 사람이 어떤 경험과 도전에 맞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역사가 체화된 인간적 속성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온 맥락에서 무엇을 '수용'한다는 것은 그럴만한 충분한 (과학적) 이유가 있거나,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하기에 선택하는 일과는 무관했다. 수용은 그러만한 이유도 별로 없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유리하지 않을 때조차 삶의 전반적인 기획의 일부로서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기꺼이 감당하는 결단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정체성을 수용한다는 말은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가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감당하고 책임지겠다는 적극적인 선택이다. 

 

골형성부전증, 연골무형성증, 다운증후군, 혹은 그러한 질병을 가진 아이의 부모가 되는 일, 성적 지향, 인종, 성별 등을 자신의 정체성의 한 요소로 수용하고자 하는 사람도 인디아와 비슷하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 나는 걸을 수 없고, 키가 작으며, 휠체어를 탔고, 뼈가 자주 부러지지, 이것이 나다" 하지만 그는 인디아와 다르게, 자신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거쳐 실천적 책임으로 나아갈 것이다. ... 그럼에도 나는 내 몸이 자유롭고, 존엄하고, 가치 있어야 한다는 책임을 지기로 '결단'한다. 

 

여기서 책임이란 걷지 못하는데도 억지로 걸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걸을 수 없다고 해서 자신의 부자유하고, 가치 없고, 존엄하지 않은 존재로 여겨지는 상황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투쟁한다. 자기 몸과 정신이 부여한 자연적 경향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책임은 버리지 않는다. 154

 

 

나에 대한 그런 손가락질의 원인은 세상의 잘못된 평가와 위계 질서이지만, 그에 맞서 내 존재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선언할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이것이 '정체성을 수용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실천적 태도이다. 

 

 

6장. 법 앞에서 

 

자기 서사에 위계가 있을까

 

발달장애인이 자율적으로 자기 삶의 서사를 창조하지 못한다는 생각도 '발달장애가 없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오해일 수 있다. ... 자기만의 인생 이야기는 꼭 긴 시간의 축에서 추상적이고 복잡한 의미들로 구성되어할까? 

 

창조된 각자의 서사는 위계 관계에 놓이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서사는 잘 쓰인 놀라운 문학작품이 아니라 자신에게 찾아온 어떤 상황을 자기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자기 삶에 결부시켜 구체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다. 자가 서사를 존중하고 고려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각 개인의 고유성을 보여주기 때문이지, 개개인의 뛰어난 예술성을 드러내는 지표라서가 아니다. 196

 

유선씨와 혜정 씨의 저자성이 '법 앞에서' 철저히 무시된다면 이를 개선할 방법은 무엇일까?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 소수 인종, 성적 소수자 등을 대놓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은 많이 없어졌지만, 이 사람들에게 주류 집단에 동화되기를 요구하는 이른바 커버링 압력이 존재한다. 커버링은 자신이 가진 비주류인 특성을 '티 내지 말라'는 요구다. 여성을 차별하지 않지만 여성의 몸이 가진 특별한 상황을 티내지 말 것을 암묵적으로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조직문화, 

 

커버링에 대한 법적 대응은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다. "네가 가진 장애, 성별 등을 티 내지 말라"고 커버링을 요구하는 쪽에서, 왜 그것을 티 내면 안되는지 엄밀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 

 

공동 저자가 될 가능성

자극-반사 작용만 가능한 중증 장애아를 둔 부모가 그들과 함게 어떤 삶의 이야기를 써나가는지 알고 있다. 그들의 부모, 형제, 이웃, 사회복지사, 학교 친구들, 선생님들, 법의 집행자들이 그들과 함께 공동 저자가 된다면 고유한 삶의 서사를 작성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 205

 

이 '공동의 서사 쓰기'를 위해서 우리는 중증 장애를 가진 사람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삶을 같이 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장애아를 키운 부모의 이야기, 형제자매의 경험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회에서 소외된 채 돌봄 노동을 전담한 가족들의 이야기가 공유되지 않는 이상 장애인은 그저 사회아 가족의 짐으로만 여겨지고, 그 가족들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사람들로만 인식될 것이다. 이들이 경험한 공생을 위한 갈등과 협력, 때때로 찾아오는 경이로운 순간들, 장애인을 한 사람의 자녀로, 또래로 온전히 받아들인 시간은 그 자체로 고유할 뿐 아니라, 중증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개별자로서의 이야기를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드러내줄 것이다. 204

 

나의 어머니, 친구들, 연인, 선생님, 그리고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법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내가 스스로 삶의 저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따. 205

 

7장. 권리를 발명하다. 

 

오줌권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나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를 그다지 원망하지는 않았다. 학교와 버스 회사, 화장실이 없는 건물의 주인을 원망한 적은 없다. 내가 원망한 대상은 실체가 불분명하고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어떤 '원리'였다. 우주의 어떤 원리에 따라 나는 출생의 제비뽑기에 참여했고, 거기서 불운하게도 지금의 내 몸을 인생 게임의 기본 캐릭터로 떠맡게 된 것이다. 

 

선생님의 한 마디.

"너희가 버스를 못 타는 게 너희 잘못은 아니야" 

 

장애인의 이동권을 자유권(신체의 자유 도는 일반적인 행동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등)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장애인이 자신의 이동할 권리를 발명하고, 이를 법제도에 진입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 이동해서 거리로 나와야 했던 것이다. 이는 권리가 법제도 안에서 국가권력의 힘을 통해 인정되어야만 실질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권리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 자신의 신체나 정신 혹은 처한 사회적 상황의 문제를 권리의 언어로 표현하고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법제도 안으로 진입시켜 실질적 힘을 갖도록 정치적, 도덕적, 헌법적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 자체가 '잘못된 삶'들의 존엄성이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과정이다. 231

 

당신의 고유함은 정당하고 정당하다

 

2007년 <장애인차별금지법>

'합리적 편의 제공' '정당한 편의 제공"

 

모든 사람이 과도한 부담이나 현저히 곤란한 사정이 없는 이상 제공할 의무가 있음을 뜻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성립할 수 있다. 아주 부담이 크거나 곤란한 사정이 있어 편의 제공이 어렵다는 사실은 이 의무를 이행해야 할 국가, 고용주, 대학총장이 입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존중하는 사람들의 일상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각자가 가진 결핍을 '수용'하는 윤리적 결단을 바탕으로, 권리의 발명과 법제도의 변화를 달성하면서 우리의 존엄을 서서히 확고하게 각인시켜왔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도 여던히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하고, 다독이고, 자랑스럽게 여기기 힘든 이유를 살펴보려 한다. 그것은 권리를 발명하고, 차별을 금지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결코 해결되지 않은 '매력 불평등'의 문제다.

 

 

8장.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랑? 

 

매력차별금지법

 

우리의 노력으로 평등을 위한 법과 윤리,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상의 규범을 구축해나가더라도, 매력 자원이 부족한 사람들이 소외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거의 없다. 말하자면 완전한 '매력차별금지법(도덕)'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이 '매력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상대방의 호의와 자신이 가진 권리에 의해 일정한 삶은 보장받을지언정 내밀하고 사적인 친목 모임, 성적인 결합, 사회적 비공식적인 네트워킁 깊이 진입하기는 여전히 불리하다. 255

 

절단된 당신의 몸에 끌여요.

 

디포티 devotee, 디보티즘 devoteeism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들, 이들이 장애에 대해 보이는 태도와 욕망. 

 

학자들은 디보티즘을 장애에 대한 일종의 페티시즘(신체의 특정 부위나 물건 등에 욕망을 느끼는 성적 취향)으로 분류하며, 

. 디보티: 장애가 있는 사람을 욕망하는

. 사칭가: 장애가 있는 척하는 사람

. 워너비: 장애인이 되고 싶은

세 범주로 나뉜다.

 

검은색 스타킹을 보고 흥분하거나 팔뚤에 드러난 힘줄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 그들을 정신질환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장애가 있는 신체에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은 질환으로 분류되어야 할까? 259

 

디보티즘은 어색함과 혐오감을 걷어내고 바라본다면 디보티즘에는 어떤 '에로틱한 열정'이 있다. 디보티들은 장애가 있는 몸을 욕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을 위해 법적 의무를 지거나 착하게 살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어요. 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게 뭔지 그런 건 알지도 못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몸에 자구 끌려요" 260

 

 

'잘못된 몸'과 아름다움

 

종종 장애인에게 어떤 '미적인 것(아름다움)'을 발견하고는 한다. 이때의 미적인 것은 욕망 혹은 열망을 촉발시키는 그런 아름다움(나는 이를 '에로스적인 것'이라고 부르고 싶다)이 아니다. 오체 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의 신체를 볼 때의 감상 등, 이는 어떤 숭고함 같은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들이 위대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의 삶을 이런 의미에서만 '미적으로'이해하는 접근은 장애인의 신체가 가진 다른 실존적 의미와 사회적 맥락을 차단해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장애인의 신체에 부여된 아름다움, 즉 일종의 '숭고미'에 대한 관심은 '타자'의 숭고함에 대한 관조와 사색의 과정이다. 관조가 가능하려면, 그 대상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된다. 닉 부이치지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아이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마치 위인전을 읽히듯 전하는 사람들도 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 선립에는 반대한다. 교회에서 단체로 봉사활동을 가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후원금을 내는 사람들도 자기 윗집에 장애인이 이사 오는 것을 반대한다. 

 

이들이 장애인의 신체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런 종류의 미적 경험은 그 대상이 전적으로 '타자'일 때에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나의 삶과 무관한 장애인의 신체, 주름지고 지혜가 가득한 노인의 얼굴, 아침 일찍 출근해 거리를 청소하는 노동자의 땀방울 같은 것, 타자를 미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는 자기기만을 불러온다.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내 삶으로 들어올 때면, 그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충동이 우리를 괴롭힌다.

 

각주)12. 에드워드 사이드, 비서양인을 확실히 지적, 도덕적으로 열등한 자로 간주하고 있으면서 지적, 도덕적으로 열등한 바로 그 타자를 미적으로 숭배하는 태도, 오리엔탈리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은 비서양인을 대등 이상의 존재로 다루고 있다고 믿는다.  

 

관조와 아닌 소유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

신체를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우리 몸을 욕망의 수단으로 만들기 때문에 인간 존엄성의 제1원칙에 반하는 듯 보임. 한 사람의 세계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의 신체를 소유할 생각만 한다. 

 

하지만 이런 소유하고 싶은 성적 욕망보다 위에서 언급한 '미적 숭배'가 딱히 더 나은 점이 있는가? 중요한 것은 신체에서 출발한 그 관심이 어디로 향하는가가 아닐까? 우리는 한 인간의 신체를 그저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보거나 거기서 어떤 숭고한 감동을 받는 데서 그칠 수도 있지만, 그 신체를 통해 한 사람의 복잡다단한 역사를 읽어내고 그 사람의 고유한 개별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시작이 어떻든 말이다. 

 

나는 우리가 인간의 몸에서 아주 다양한 맥락의 의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편이다. .. 이동권 투쟁에 같이 참여하며... 내 앞을 기어가던 장애인의 몸을 나 역시 (기어서) 따라가며 상세히 관찰했다...그들 중 몇몇은 눈믈을 글썽거리며 장애인들의 그토록 처절한 거리 투쟁을 해야 하는 사회에 분노했겟지만, 나는 그 신체의 생생한 현존 앞에서 분노보다는 힘과 아름다움을 경험했다. 

 

우리의 몸은 그몸이 가지는 의미와 그 의미에서 비롯한 정서에 앞서 복합적인 '현실'로 눈앞에 나타났다. 

 

실재reality는 신체에 부여된 각종 관념들보다 신체 자체에 더 가깝다. 

 

사람들은 자주 '장애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장애가 현실이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의 몸이 현실이다. 장애를 둘러싼 현실이라는 '관념'은 너무나 많은 입장, 태도, 관행, 오래된 습속, 누적된 혐오, 부족한 상호작용의 경험, 변화가능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몰이해, 의료적으로 재단되고 분류된 병명으로 가득 차 있다. 꼽슬은 하나의 신체로서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며 존재한다. 그의 신체는 행성의 중력이 공간을 휘어놓듯 공기도 없는 진공의 관념으로 제멋대로 상상한 현실을 휘젓고 구부러트리고 펼쳐놓는다. 

 

신체를 혐오하거나 피하고, 그에 무심하거나 편견을 갖고, 그것을 욕망하는 모든 일은 단순하고 1차원적인 반응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신체에 대한 혐오야말로 그 존재에 대한 진정한 부정이고, 그에 대한 무관심이야말로 그 존재에 대한 완전한 무시가 아닐까? 

 

장애인이나 병에 걸린 사람들이 우리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며 성금을 보내고, 구세군에 거금을 쾌척하면서도 막상 그 신체와 5분도 같이 앉아 밥을 먹지 못하고, 그 신체.가 버스에 올라타는 잠깐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 신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를 짓는 일에 반대한다면 그 자체로 혐오이며 다른 해명이 필요하지 않다. 267

 

근육병과 골형성부전증에 따라 붙는 거창하고 낭만적인 운명 '서사시'에 매혹되어 종교적 감수성을 느낀다고 한들 이는 그 존재에 대한 사랑과는 관련이 없다. 몸을 욕망해야 한다. 종교나 도덕, 정치가 뭐라고 하든 너의 '신체'와 함게하고 싶다는 선언이야말로 타인을 향한 욕망이고, 곧 사랑이다. 

 

디보티즘은 오로지 신체를 향한 욕망이라는 점에서 그 어떤 고상한 정치적 수사나 종교적 말잔치보다 더 매혹적으로 장애를 가진 몸을 각성시킨다. 그러나 단지 페티시즘에 그친다면 그 욕망은 꽤나 자극적일지언정 우리를 개별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김원영의 다리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나와 비슷한 다리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저 욕망의 대상을 교체하면 그만이다. 267

 

몸에서 시작해서 그 몸을 가진 개별자에 대한 사랑으로 에로스가 확장될 때 그것은 우리가 닿고자 하는 '사랑'의 이상에 가까워질 것이다. 268

 

디보티들, 이들의 문제는 신체에 대한 욕망에서 그 사람의 개별적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지 않고, 결국 '예외적으로 장애인을 사랑해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 그친다는 것. 이들은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 있는 타자를 사랑하는 자신'에게 도취된다. 과연 디보티들만 그럴까?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에게서도 이런 그림자를 가진 사랑을 확인한다. 

 

미의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뇌는 사진기가 아니라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의 눈이라는 점. 

 

초상화 그리기

 

'초상화'로 한 사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는 긴 시간에 걸쳐 세부적인 이야기를 폭넓게 담아내는 드라마 시리즈가 효과적. 

 

인간 신체의 두 가지 아름다움, 즉 얼굴의 주름이나 절달된 팔다리처럼 인생역정을 드러내는 숭고미와 성적으로 이끌리고 소유하고 싶게 하는 아름다움이 사실은 이 '초상화 그리기' 안에서 하나로 수렴한다. 

 

한 사람이 자기 인생에서 써나가는 자기 서사는 우리가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신체'에 통합되고, 농축되고, 종합되어 구현된다. 근육병이  있어 삐쩍 마른 남자의 '몸'을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면 아마도 종교적인 감상이나 도착적인 취향때문이 아니라, 긴 시간 속에서 구현된 그 남자의 몸이 진짜 매력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뇌성마비 장애 여성의 힘이 잔뜩 들어간 목선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남자가 있다면, 정치적 올바름을 구현하려 애쓰거나 어떤 숭고한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 시간 지켜본 상대의 행동 하나하나가 누적되어 구현된 그 움직임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277

 

특정한 누군가에게 (그가 디보티가 아니더라도) 몸 그 자체로 에로스적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은 당신과 내 몸에서도 구현된다는 것. 278

 

아름다울 기회를 분배하기

. 연극 

 

연극은 내가 경험한 세계에서 제시할 수 있는 작은 예에 불과하다. 장애인들은 많은 경우 사진 속에 (정치인들과 함께) 등장하지만 '초상화'를 만날 기회는 거의 없다. 장애를 가진 신체는 물리적으로 집 밖으로 나오기 힘들고, 직장이나 학교에서 오래 누군가와 교류하기도 어렵다. 편견이나 차별 의식 등 오래되고 누적된 강력한 고정관념의 지배도 받는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힘을 모은다면 이런 조건을 바꿔낼 수 있다. 일상을 기획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법과 제도는? '매력차별금지법'은 불가능하지만 '아름다울 기회 평등법'은 가능하다. 

 

아름다울 기회 평등법 : 

.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한 학교에서 오랜 시간 함께하기, 

. 어떤 중증의 장애인이라도 거리에 나오기 편한 환경 만들기

. 이들이 자기 서사를 충분히 말할 수 있게 하고 그말을 듣는 시간을 배정하기

. TV 프로그램에서 구체적이고 섬세한 감정과 표정을 드러내는 장애인 캐릭터를 만날 기회를 제공하기(조인성 보다는 정말로 장애가 있는 사람이 연기해야 할 것)

. 공식적인 회합 뿐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서도 가급적 모든 사람이 소외되지 않고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상호작용의 기술을 공유하고 의사소통 규범을 준수하기

. 장애아의 부모, 형제자매, 연인, 친구, 이웃이 쓴 글을 진지하게 읽고 정치적 목소리에 힘을 싣기

 

이 모든 실천은 자기를 표현하는 데 제약이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화가'들 앞에 자기 초상화를 맡길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아름다울 기회의 평등이 있다면 적어도 당신과 나의 신체도 얼마간 아름다울 수 있다. 285

 

 

9장. 괴물이 될 필요는 없다.

 

온전한 사랑

 

'잘못된 삶' 소송에 대한 우리 부모들의 입장이 얼마간 문제적이라면, 이는 그들이 우리의 경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서 비롯한다. 즉 부모는 우리를 깊이 사랑하지만 우리를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데는 실패할 수도 잇는 것. 장애가 없는 부모들은 장애가 잇는 자녀와 국적, 언어, 성격이나 외모의 유전적 특질 등 많은 부분을 공유하겠지만 장애를 공유하지는 않는다. 이성애자 부모와 동성애자 자녀, 기독교인 부모와 무교인 자녀도 마찬가지. 

 

우리는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만나 서로의 존재가 비정상이 아님을 확인하고, 우리 존재의 정상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과정 한가운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데 제법 성공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데도 성공하고 있을까? 스스로가 이 세상에서 실격당한 인간이 아니라는 확신이 곧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일까? 

 

'잘못된 삶'을 변론하고자 하는 소수자정치 운동은 이 '어려운' 길을 택한 후, 우리가 온전한 자신의 모습 그대로 공동체에 통합될 수 있도록 사회제도를 변화시키고, 재화의 분배 구조를 재선하며, 모두가 동등한 시민적 주체임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충분히 돌보고 아껴왔는가? 

 

우리는 부모를 비롯해 우리를 깊이 아끼는 이들이 그랫듯이 스스로를 돌보고 보듬으면서도 우리가 가진 장애와 질병이 잘못된 것이 아니며, 우리 인격의 고유한 일부이자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만드는 다양성의 한 축이라고 주장할 수는 엇는 걸까? 반대로 우리 부모들은 우리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는걸까? 

 

소수자 정치운동

정체성 정치 

 

우리가 가진 결함이나 결핍, '잘못되고' '실격된' 인간적 요소들이 정체성으로 선언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해방감을 맛볼 수 있따. 더 이상 동굴에 혼자 있지 않다는 믿음, 개인적 체험이 아니라 정체성 집단의 체험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외로움을 덜어준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에는 명백한 함정이 있다. 오로지 그 정체성을 가진 집단만이 자신들의 존엄과 아름다움에 대해 발언하고, 법적 사회적으로 정당하게 인정받는 방법을 말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는 것.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정체성과 상호교차한다는 점을 무시. 집단의 정체성을 이루는 구분선들이 현대 사회에 들어 해체되고 있다는 점도 반영하지 못함. 

 

집단에 기초한 투쟁의 정치는 통괘해 보이지만 장애나 성별, 인종, 성적 소수성이 우리를 설명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장애를 수용하고, 지인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존중받고, 법의 영역에 침투해 들어가 고유한 권리와 제도를 발명하더라도 여전히 스스로를 혐오스럽고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는 장애가, 혹은 '잘못된 삶'이라고 평가된 바로 그 속성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므로 당연한 일이다. 장애를 가진 내가 잘못된 삶이 아니라는 사실. 실격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쓴 우리는 바로 그 장애를 가진 자신을 보듬고 돌보는 일에, 사랑하는 일에 종종 실패한다. 305

 

설령 이러한 질병과 장애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부정적인 경험에 불과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수용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애쓰는 모습이야말로 나 자신에게, 나의 부모에게(연인, 친구), 이 사회에게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보이는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받기 위해 강인한 존재가 되어 '장애 정체성의 수용'을 위해 달려갔던 삶은 한편에서 우리를 '괴물'로 만든 것은 아닌가? 내가 장애를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고자 애쓰는이유는 다른 사람의 염렴에도 불구하고 내가 더 통합되고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나 자신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두려워서인지도 모른다. 

 

키 작은 딸이 엄마 앞에서 "나는 내몸이 좋아요"라고 선언할 때, 이는 엄마의 걱정과 사회의 편견에 맞서 독립적이고 당당한 자신을 구축하려는 실천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계속 받고 싶어 하는 아이의 발버둥은 아니었을까? 

 

장애를 예쁘지 않은 얼굴을, 가난을, 차별받는 인종, 성별, 성적 지향을 지닌 채 살아가면서도 모든 것을 당당히 부정하고, 자신의 '결핍'을 실천적으로 수용하고, 법 앞에서 권리를 발명하는 인간으로 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게 서야만 우리가 존엄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수용하고 돌보려 노력하지만 결코 완전하지 못할 이 '취약함'이야말로, 각자의 개별적 상황과 다른 정체성 집단에 속해 있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 분모일 것이다. 310

 

오에 겐자부로, 소설 <개인적 체험>

마지막 장을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기를 느닷없이 그치고, 병원으로 달려가 아이를 구하드 버드의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결국 아이는 수술을 잘 마치고, 중증의 장애가 있기는 하지만 예상보다는 건강한 모습으로 버드에게 안긴다.

 

오에가 자신과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 소설가로서의 자신을 엄격하게 '수용'하는 일을 잠시 멈췄다고 생각한다. 그는 역경을 초극하는 '괴물' 같은 예술가가 되기보다는 다소 어설프지만 나약한 존재로서,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인간이 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존엄의 순환 

당신이 버스에서 만난 한 장애인에게 보인 작은 존중의 표현은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나아가 그가 자신의 장애를 수용하는 믿거름이 된다. 

 

예의바른 무관심, 섬세한 도움의 손길, 무시와 냉대 속에 혼자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 숙여 말을 거는 순간, 조금 더 긴 시간을 들여 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려보는 미적, 정치적 실천, 그런 것들이 모여 자기 삶의 조건을 수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하고 탁월한 자아를 구축하게 된다. 그러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을 언어화하고, 법적인 권리로 만들고, 품위와 겉모양만 중시하는 품격주의자들의 세계에 구멍을 낸다. 모든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은 이제 법률이 되고, 헌법이 되어 우리 공동체의 최고 규범이 된다. 그런 규범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다시 자신의 친구에게 "피부 관리해야 돼"라는 탁월한 상호작용 기술을 발휘해 인간의 존엄성이 모든 이념의 중심에 오는 세상을 향한 긴 순환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더 깊이 사랑하고 관용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고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313

 

각주10) 나는 오에의 '문학적 후퇴'를 비판했던 미시마 유키오가 형식적 미를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초극적이니 결단으로 나아간 반면,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가 있는 아들과 함께 살아가며, 반전, 평화의 문제를 고민하고 인간의 실존적 고통을 묘사하는 삶으로 나아갔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그는 예술적 탁월성을 위해 자기를 초월하는 괴물과도 같은 예술가가 되기를 멈췄을지 모르지만, 누구보다 아름답고 존중받는 인간으로 살아남아 있다. 312

 


 

▶ ▷ 발제문

 

 

발제문

ㅇ 사회의 소수자들, 잘못된 삶, 실격당한 자의 의미
존중받지 못함, 낙인과 배제

저자는 소수자들중 장애를 예로들어, 실격의 반대 편 즉 자기 삶의 저자로서 그의 고유성과 숨겨진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발견하는 길을 모색한다. 두 단어로 말하면 존중과 매력. 마지막장에 이르면 사랑받고 사랑하려는 우리의 실존적 조건 즉  궁극적 취약함을 말하며, 존중과 매력에 사랑을 보탠다.


ㅇ 품격주의적 태도

. 속물

. 강서구 특수학고 설립관련, 지역주민과 장애아 학부모 차이
   . 관조, 자아의 분열, 외부 투사/ 실존하기, 몰입하기

. 내 안의 품격주의적 태도는?
1) 차별받는 자로서 나를 보호하고 상처를 덜 받기 위한, 노련함을 기르기 위한 방편
2) 나르시시스트적 동기에서 나를 빛내기 위한 태도.
.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차별받는 피해 당사자의 경우)
자기를 보호기제로서 발달시키는 자기 분열과 퍼포먼스

세상을 사심없이 관조할 수 있는 성찰 능력을 일상의 모욕, 배제, 차별에 대항하는 노련함의 전제이자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역설적으로 이 능력은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세상을 자신과 완전히 분리된 관조의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에 삶을 실존으로 받아들이는 일도 방해한다.

모욕의 순간을 자주 경험해야 했던 사람은 그런 상황에 노련해 질수록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가 일치하는 경험에서 멀어진다.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쌓는 일이 잦아질수록 우리는 어떤 '타자'에게 온전히 몰입하거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분노 혹은 감동하거나, 특정한 현실에 완벽하게 실재하는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다.

나의 결핍, 나의 소수성을 무심히 대상화하고, 그저 자기 삶을 꾸며주는 연극적 요소로만 남기를 바란 사람은 위선적인 정치인뿐만 아니었다. 결연한 피해자, 순수하고 윤리적이면서도 노련하게 품격을 수호하는 피해자이고자 했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우리가 노련미를 발휘해 방어하고자 했던 저 품격주의자들, 속물들, 공감 능력 없이 자기를 꾸미는 데만 능한 나르시시스트들의 모습은 바로 '바라보는 나'가 '보여지는 나'에게 존재해온 방식은 아니었을까?


ㅇ 품격과 존엄
품격의 퍼포먼스, 접대, 의전  / 존엄의 퍼포먼스, 환대
존엄은 존엄한 대우의 상호작용 속에서 비로소 구성되는 것이다.

품격의 인간(속물 등)과 존엄의 인간

. 미시마와 정세연, (박원순 전시장) vs 전태일, 푸른 잔디회

이들은 죽을 수는 있어도 장애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장애인이 되는 대가로 평하시장 여공들의 근로 조건이 개선된다면 전태일은 죽음 대신 그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세연과 미시마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의 거의 모든 장애는 자기 연출이라는 측면에서 아름다운 공연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실존이란 넘어지거나 뒤틀리고, 용변을 참느라 고생하고, 허리 통증이나 방광염에 시달리고, 어색한 시선을 받고,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는 일이다. 자신의 삶을 가장 미적으로 마감하고 싶은 공연자들에게 이는 죽음보다 못한 삶일 것이다.

죽음까지도 퍼포먼스로 삼는 인간과, 가장 열악한 실존을 감내하면서도(수치심을 견더내면서도) 살기를 선택하는 자들의 차이.
. 뇌성마비 장애인들의 모임인 푸른잔디회는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도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
. 전자는 미를 위해, 좀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품격을 위해 삶을 존중하지 않는다.
. 후자는 삶을 존중하기 위해 품격에 부여된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가치의 부재를 감내한다. 나는 전자를 품격주의자, 즉 품격의 인간이요, 후자를 존엄의 인간이라 말하고 싶다.


ㅇ 내 존재를 진정으로 수용한다는 것

=> 피해자 되기를 멈추고, 피해의식을 넘어서

때로 무력하고 별 볼 일 없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힘.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진 것이 없다는 부정을 선언하는 힘. 거기서 우리는 타인 지향성을 넘어선 진성성의 한 형태를 본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시선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 그 가능성은 이제 '수용'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나의 몸, 운명, 삶, 실존에 대한 수용을 전제로 한다.

장애아를 출산해야 하는 순간을 맞을 때 부모인 나는 그 아이를 적극적으로 환대할 자신이 있는가?

부모가 자기 아이의 '잘못된' 부분까지 환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그 아이와 동일하게 '잘못된' 요소를 가진 사람들의 삶이 존엄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 아닐까? 어떤 면에서 보면 이는 우리가 자신의 혹은 가족의, 연인의, 친구의, 공동체 구성원의 바로 그 '잘못된' 점을 진정으로 환대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최종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관문인지도 모른다.

.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대신에 장애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 장훈이와 고뱅이 과연 어떤 피해를 입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죽음보다 못한 삶이 있는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있겠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 '잘못된' 상태가 아니라면 우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습 그대로 태어나는 것 이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면, 결국 우리의 장애나 질병은 그것이 설령 '잘못된' 것이라 평가받더라도 우리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ㅇ 수평적 정체성
비고. 수직적 관계.
결핍이 아니라 긍정, 고유성. 미혼이 아니라 비혼, 폐경이 아니라 완경, 미망인이 아니라..청각장애인이 아니라 농인
매드 프라이드 운동

우리가 부모나 사회의 선배 새대에게 넘겨받은 관점이란 포기하지 말고 장애를 극복하거나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너도 다리를 잘라"와 같은 태도는 건강한 두 다리를 가진 나의 어머니는 나를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전해줄 수 없는 정신 스타일이다.

우리를 사랑하는 할머니와 어머니, 우리를 보호하는 국가와 공동체, 우리를 구원하려는 종교 지도자들과 성서의 가르침은 결코 '너의 욕망대로 살아라. 만약 남들이 그것을 문제 삼는다면 '그럼 너도 다리를 잘라'라고 말하라"하고 가르치지 못한다. 우리는 수평적 정체성을 가진 다른 존재들과 연결될 때에만 정상성의 결여로서의 내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인 자신을 인식하는 정신의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다. 128


ㅇ 믿음과 수용의 차이

수용은 우리 삶의 전반적인 방향과 연결된 윤리적 결단이므로,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유리한 이유가 있어서 믿는 일종의 '전략(정신승리적)적 믿음'과 구별된다.

. 장애를 수용한다는 것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온 맥락에서 무엇을 '수용'한다는 것은 그럴만한 충분한 (과학적) 이유가 있거나,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하기에 선택하는 일과는 무관했다. 수용은 그러만한 이유도 별로 없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유리하지 않을 때조차 삶의 전반적인 기획의 일부로서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기꺼이 감당하는 결단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정체성을 수용한다는 말은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가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감당하고 책임지겠다는 적극적인 선택이다.

골형성부전증, 연골무형성증, 다운증후군, 혹은 그러한 질병을 가진 아이의 부모가 되는 일, 성적 지향, 인종, 성별 등을 자신의 정체성의 한 요소로 수용하고자 하는 사람도 인디아와 비슷하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 나는 걸을 수 없고, 키가 작으며, 휠체어를 탔고, 뼈가 자주 부러지지, 이것이 나다" 하지만 그는 인디아와 다르게, 자신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거쳐 실천적 책임으로 나아갈 것이다. ... 그럼에도 나는 내 몸이 자유롭고, 존엄하고, 가치 있어야 한다는 책임을 지기로 '결단'한다.

여기서 책임이란 걷지 못하는데도 억지로 걸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걸을 수 없다고 해서 자신의 부자유하고, 가치 없고, 존엄하지 않은 존재로 여겨지는 상황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투쟁한다. 자기 몸과 정신이 부여한 자연적 경향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책임은 버리지 않는다. 154

나에 대한 그런 손가락질의 원인은 세상의 잘못된 평가와 위계 질서이지만, 그에 맞서 내 존재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선언할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이것이 '정체성을 수용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실천적 태도이다.


ㅇ 정치적 올바름과 끌림(에로틱한 열정)


ㅇ 잘옷된 몸과 아름다움, 혐오
장애인이나 병에 걸린 사람들이 우리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며 성금을 보내고, 구세군에 거금을 쾌척하면서도 막상 그 신체와 5분도 같이 앉아 밥을 먹지 못하고, 그 신체가 버스에 올라타는 잠깐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 신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를 짓는 일에 반대한다면 그 자체로 혐오이며 다른 해명이 필요하지 않다.


ㅇ 아름다울 기회 분배
아름다울 기회 평등법 :
.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한 학교에서 오랜 시간 함께하기,
. 어떤 중증의 장애인이라도 거리에 나오기 편한 환경 만들기
. 이들이 자기 서사를 충분히 말할 수 있게 하고 그말을 듣는 시간을 배정하기
. TV 프로그램에서 구체적이고 섬세한 감정과 표정을 드러내는 장애인 캐릭터를 만날 기회를 제공하기(조인성 보다는 정말로 장애가 있는 사람이 연기해야 할 것)
. 공식적인 회합 뿐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서도 가급적 모든 사람이 소외되지 않고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상호작용의 기술을 공유하고 의사소통 규범을 준수하기
. 장애아의 부모, 형제자매, 연인, 친구, 이웃이 쓴 글을 진지하게 읽고 정치적 목소리에 힘을 싣기


ㅇ 정체성 정치의 한계와 우리의 취약함


ㅇ 존엄의 순환


ㅇ 오에와 미시마
9장 각주 10



용어들.

* 커버링 압력

커버링에 대한 법적 대응은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다. "네가 가진 장애, 성별 등을 티 내지 말라"고 커버링을 요구하는 쪽에서, 왜 그것을 티 내면 안되는지 엄밀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

* 합리적 편의 제공 의무 혹은 정당한 편의제공 의무

* 비장애중심주의 ableism :
장애차별주의로도 번역됨.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구조, 문화적 관행, 도시의 각종 인프라, 사람들의 상호작용 형식 등이 장애가 있는 다양한 몸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표준적인 (젊고 걸을 수 있으며 듣고 말하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일정수준 이상의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구축되는 정치적 힘이자 태도의 총체를 말함.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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