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백_일홍 2022. 7. 29. 20:57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들어가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다. 생산성이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는 세계에서 우리의 1분 1초는 매일 사용하는 기술에 의해 포획되거나 최적화되어 경제 자원으로 활용된다. 15

 

소설미디어상의 우리는 기꺼이 자유시간을 수치화하고 알고리즘 형태로 상호작용하며 퍼스널브랜드를 구축한다. 15

 

이 책은,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를 빼앗으려 하는 관심경제에 맞서는 정치적 저항 행위의 일환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제안하는 현장 가이드다. 

 

* 관심경제 : attention economy 인간의 관심을 희소자원으로 규정하고, 이윤창출에 활용하는 경제. 소셜미디어가 관심경제의 대표적 사례. 소셜미디어는 중독을 일으키는 각종 기술을 사용해 최대한의 관심을 끌어내고자 한다. 

 

이 책은 예술가와 작가뿐 아니라 삶을 한낱 도구 이상으로, 다시 말해 최적화할 수 없는 무언가로 여기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내 주장의 바탕에는 명료한 거부가 있다. 현재의 시간과 공간,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로는 어쩐지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에 대한 거부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은 타인을 향한 관심과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를 활용하는 댐과 같아서,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욕망을 장악하고 방해하며 그로부터 이득을 취한다. 고독과 관찰, 사람들고 함께할 때 느끼는 단순한 즐거움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일 뿐아니라 삶이라는 행운을 얻은 모든 사람이 가진 양도 불가능한 권리로 여겨져야 한다. 18

 

일종의 행동계획, 

. 1960년대의 '이탈'을 닮은 이탈운동

. 우리 주위의 것들을 향해 나아가는 횡적 운동

. 땅을 향해 나아가는 하강 운동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대다수 기술이 우리의 자아 성찰과 호기심, 소속의 욕구를 이용해 가짜 목표물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적 결정론이라는 불모지에서 모호함과 비효율이라는 숨어 있는 샘을 찾으려 한다. 

 

내가 말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요점은 상쾌한 기분으로 일터에 복귀하거나 더욱 생산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생산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나의 주장은 명백히 반자본주의적이며, 시간과 장소, 자기 자신, 공동체에 대한 자본주의적 인식을 부추기는 기술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렇다. 

 

나의 주장은 환경과 역사에 관한 것. 나는 기술에 침잠된 관심의 경로를 바꿔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에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자신이 역사의 일부이자 인간과 비인간이 모인 공동체의 일부라는 의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의 초점을 관심경제에서 거두어 공적이고 물리적인 영역에 옮겨 심는 것이다. 19

 

나는 기술에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재에 온전히 머물도록 도와주는 기술(자연 관찰 도구나 탈중앙적이고 비상업적인 소설 네트워크 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기술이 아니라 플랫폼 기업이 우리의 관심을 사고파는 방식에 반대한다. 좁은 의미의 생산성만을 떠받들며 지역적인 것, 육체적인 것, 시적인 것을 무시하는 기술 사용법에 반대한다. 나는 현재의 소셜미디어가 (자신을 표현하지 않을 권리를 포함한) 표현 방식에 미치는 영향에 부정적이며, 소셜미디어의 의도적인 중독성을 우려한다. 악당은 상업적 소셜미디어의 침략적 논리이며, 이득을 취하려고 우리를 불안과 질투, 산만한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소셜미디어의 금전적 동기다. 더 나아가 악당은 이러한 플랫폼에서 자라나 오프라인의 자기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개인주의와 퍼스널브랜드 숭배다. 20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작가이자 예술가

'아트 앤드 테크놀로지' 

물리적 현실과 접촉하는 데 기술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고도로 발달한 기업 문화와 광활한 산맥 사이에 사는 나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눈앞에서 실제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디지털 세게를 구축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22

 

나는 학생들과 내가 아는 많은 사람에게서 엄청난 에너지와 치열함, 가늠할 수 없는 불안을 본다. 휴대폰 알람과 생산성, 발전이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쉬지도 못하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본다. 이 책을 쓴 여름에도 사그라들지 않는 끔찍한 들불을 보았다. 이 장소도, 지금 당신이 있는 장소도 우리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우리는 그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22

 

장자, '쓸모 없는 나무' 

나무를 오로지 목재로만 바라보는 인간이 만든 쓸모와 가치의 구분을, 이 나무는 완강히 거부한다. 

위선과 무지, 비논리로 정의되는 모순 그 자체인 사회를 관찰한 것일 뿐. 이러한 사회에서 겸허하고 윤리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분명 '퇴보'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나이 많은 생존자(살아 남은 삼나무)는 내게 '그 자리에서의 저항'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 자리에서의 저항은 스스로를 자본주의적 가치 체게에 쉽사리 이용당하지 않는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이용당하지 않는 다는 것은,

1) 곧 준거 기준을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즉 생산성과 탄탄한 커리어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2) 다소 애매모호한 생각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 머물고자 애쓰는 것을 의미한다. 그 애매모호한 생각은 바로 유지와 보존을 위한 작업이 곧 생산성으로 연결된다는 것, 비언어적 의사소통이 중요하다는 것, 그저 인생을 경험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는 것이다. 

 

3)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알고리즘의 표현을 넘어서며, 정체성이 개인의 경계에 갇히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기념하는 것을 의미한다. 25

 

나이 많은 생존자가 우리에 주는 또 다른 교훈은 목격자나 기념비로서의 역할과 관련있다. 이 나무는 올론 원주민이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던 때부터 스페인인고 멕스코인인 도착하고 백인이 부당한 이득을 취하기까지 모든 역사를 지켜본 목격자로 표현한다. ..이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지금과는 맹 다른, 너무 달라서 알아볼 수 조차 없는 세계의 한복판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그 세게에서는 인간 거주자들이 지역 생태계와 삶의 균형을 파괴하는 대신 보존했고, 해안선의 모양이 아직 바꾸지 않았으며, 회색곰과 캘리포니아콘도르, 은연어가 살아 있었다. 나이 많은 생존자의 잎이 아주 오래된 뿌리와 분명히 연결되어 있듯이, 현재도 과거에서 나온다. 이러한 뿌리 깊음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한 현 사회와 가상 세계의 미감에 파묻힌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27 

 

'아무것도 아지 않음'의 절반은 우리의 관심을 도구화하는 디지털 세계의 관심경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나머지 절반은 다른 무언가에 다시 연결되는 것이다. 그 '다른 무언가'는 다름 아닌 실제 세계의 시간과 공간이며, 시공간에 다시 연결되는 것은 우리가 그곳에서 서로 관심을 가지고 만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온라인상의 최적화된 삶이라는 장소 상실에 반대하며, 역사적인 곳(이곳에서 있었던 일)과 생태적인 것(이곳에서 살고 있거나 살았던 것)에 대한 감수성과 책임성을 낳는 새로운 '장소인식'placefulness를 주장하고 싶다. 28

 

이 책은 다시 장소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의 훌륭한 사례로 생태지역주의bioregionalism를 제시한다. 

. 각 장소에 뿌리내린 여러 삶의 형태뿐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가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을 인식한다. 

. 서식지 복원과 지속 가능한 농업 등의 실천을 아우른다. 

. 여기에는 문화적 요소도 있는데, 스스로를 국가만큼이나 중요한 생태지역의 시민으로 여길 것을 요구하기 때문. 생태지역에서 우리의 '시민의식'은 단지 그 지역의 생태에 친숙한 것을 넘어서 함께 생태를 헌신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과 관심경제가 우리의 관심에 미치는 영향이 유사하다. 

. 두가지 모두 공격적인 단일 문화로 나아가는 경향이, 이러한 문화에서는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활용할 수 없는 요소들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 이러한 쓸모의 관점은 삶을 원자화, 최적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잘못된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생태계를 모든 요소가 있어야 제 기능을 하는 살아 있는 전체로 인식하지 못한다. 

 

장자의 이야기는 다른 무엇보다 '쓸모'를 규정짓는 개념의 편협성을 비꼬는 농담이다. 자본주의적 논리, 무엇을 낳는 생산성인가? 어떤 방식의 누구를 위한 성공인가? 

 

쓸모없는 나무의 형태는 목수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데에만 유용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돌봄의 형태이기도 했다. 쉴 곳을 찾는 수천 마리 동물들 위로 가지를 뻗음으로써 다른 생명체를 돌보고 그들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 어느날 쓸모만을 따지는 땅에서온 지친 여행자가 이 너그럽고 시원하며 쓸모없는 환경에 도착할지 모른다. 그는 땅에 짐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채 잠시 돌아다니다 동물을 따라서 나무 아래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달콤한 낮잠을 잘 것이다. 30 

 

나는 처음 이 책에 들어갈 대와 다른 모습으로 이 책에서 나왔다. 그러니 이 책을 에세이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여정, 시도)에 가까운 열리고 확장된 에세이로 여겨주길 바란다. 

 

1장은 2016년 미국 대선이후 봄에 쓴 에세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필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된 개인적 위기를 다루었다. 우리 자신과 다른 생명체가 좋은 삶을 살게 해주는 유지 노동과 보존 작업 보다, 파괴가 더 생산적이라고 보는 관심경제의 부수적 논리를 파악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던 온라인 환경의 한복판에서 쓴 이 에세이는 공간과 시간에 깊이 박혀 있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대표해서 쓴 청원의 글이다. 나는 '인간이 되는 데 전념'하고자 했다. 31

 

2장, 대안으로서의 도피, 이 세계(또는 타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과 그 자리에 계속 머물면서 관심 경제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계속 구분할 것이다. 

 

3장. ' 그 자리에서의 거부'라는 개념에 토대룰 두고. 

. 나는 "안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라고 대압하는 허번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서 힌트를 얻어, 거부의 역사를 살피며, 질문의 전제 자체를 거부하는 대응을 탐색할 것. 

. 이러한 창의적 거부의 공간이 어떻게 위협받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 거부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본 뒤, 관심의 방향을 바꾸고 관심을 확장하는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겁먹은채로 사로잡힌 관심과 경제적 불안정 사이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다. 

 

4장. 예술을 통해 새로운 성격의 관심을 학습하는 방법. 예술사와 시각 연구를 살피며 관심과 자유의지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하면 관심 경제에서 우리 자신을 떼어내어 좀 더 주도적인 방식으로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4장은 내가 속한 생태지역을 처음으로 인식한 뒤 내가 평생 살아온 지역에 새로운 패턴의 관심을 기울인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5장. '필터버블filte bubble'이 주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에 부여한 한계를 검토하고 그것을 무너뜨릴 것이다. 더 나아가 관심을 인간 이상의 세계로 확장하라고 요청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퍼스널블랜드의 정반대에 있는 자아와 정체성의 관점을  주장한다. 이 자아는 다른 사람이나 장소와의 상호작용에 따라 형태가 바뀌는 불안정한 자아다. 

. 필터 버블 :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인테넷 정보 제공자가 이용자에 맞게 필터링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이용자가 특정 정보만을 접하게 되는 현상.

 

6장. 이 모든 것을 갖춘 이상적인 소셜 네트워크를 상상하고자 한다. 여기서 나는 인간의 신체가 필요로 하는 시공간적 맥락을 렌즈 삼아 '맥락 붕괴'라는 온라인의 폭력을 들여다보고, 그곳에서의 '맥락 수거'를 제안한다. 사적인 의사소통과 대면 모임이 여전히 중요한 이유와 비상업적인 탈중앙 네트워크를 살핀다. 그리고 온리안에 기울이는 관심을 거두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유의미한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생물학적, 문화적 생태계를 회복하는 일에 그 관심을 쏟자고 제안한다. 33

 

예술가로서 언제나 '관심'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왔지만, 이제야 비로소 관심을 지속하는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관심을 지속하는 삶은 자각하는 삶이다.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에 대한 자각이자, 주위의 문화와 생태계가 파괴되는 현재의 패턴에 대한 자각, 그리고 스스로 인정하든 하지 않든, 그 안에서 내가 맡은 불가피한 역할에 대한 자각이다. 자각은 곧 책임의 씨앗이 된다. 

 

이 책을 자기계발서로 위장한 정치운동 도서로 여기기 시작했다. 생산성에 집착하는 환경에 맞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물이 여러 개인의 회복에 도움을 주고, 이 개인들이 인간을 넘어서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실질적이고 지속적이며 기업에 그 어떤 이득을 안기지 않는 연결 방식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특정 형태의 관심에는 전염성이 있다. 또한 나의 관심의 패턴(내가 알아차리기로 선택한 것과 그러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 곧 자신에게 현실을 제시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면들은 나에게 관심의 주권을 되찾는 행위의 혁명적 잠재력을 시사한다. 

 

... 어쩌면 우리가 원한 모든 것이 이미 이곳에 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34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발췌_1장.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대한 변론

 

그 후에 연설의 토대가 될 구체적 장소를 정했다. 주로 장미 정원이라 불리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모로콤 장미 극장이었다. 

내가 연설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시작한 곳이 장미 정원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정원이 내가 다루려는 내용, 즉 아무것도 하지 않기,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구조, 공공장소의 중요성, 돌봄과 유지의 윤리를 전부 아우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38

 

나는 장미 정원에서 5분 거리에 산다... 선거 이후로는 거의 매일 장미 정원에 갔다. 본능적인 움직임에 가까웠다. 그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질 들리즈의 <대담>

"..... 우리를 억압하는 세력은 자기표현을 막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표현하라고 강요합니다. 할 말이 없다는 것,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입니까. 오로지 그때에만 말할 가치가 있는 극히 드문 것들을 만들어낼 기회가 있습니다. "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사치도, 시간 낭비도 아니다. 오히려 의미 있는 생각과 발화의 필수요소다. 39

 

나는 시각 예술가다. <유예된 물건들의 부서 The Bureau of Suspended Objects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것의 진가를 알았다. ... 내가 이런 방식으로 작업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만들 수 있는 것 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이 훨씬 흥미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찰의 에로스'

어떤 대상에 거의 마비에 가까울 만큼 매료되는 현상. 

 

1973년 Elenor Coppola <Windows> 

코폴라는 그 대신 도시 전체에 절묘한 프레임을 씌운다. 이미 그 자리에 존재하는 예술을 인식한, 가볍지만 유의미한 방식이다.

 

2015년 Scott Polach, <Applause Encouraged>

노을이 내리기 45분 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가장자리에 붉은색 로프를 두르고 접이식 의자를 펼쳐놓은 공간에서 안내원이 관객을 맞이했다. 안내원은 관객들을 좌석으로 안내하며 사진 촬영이 불가하다고 알렸다. 관객들은 노을을 감상했고, 해가 다 지자 박수갈채를 보냈다. 41

 

 

이 프로젝트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각 작품에서 에술가가 만들어 낸 구조는 사색의 공간을 열어젖히고, 끊임없이 그 공간을 닫으려 위협하는 습관과 익숙함, 산만함에 맞선다. 

 

관심을 붙드는 구조. 

사색적 걷기를 위해 설계된 원형 미로 

도서관, 작은 미술관, 정원, 납골당

 

청각적 사례, 폴린 올리베로스 Pauline Oliveros '딥리스닝' 

실험음악, 집단 참여 기법, 다른 사람이 내는 소리와 주변 음향을 듣고 그에 반응해 즉흥 연주를 하는 방식으로, 베트남 전쟁이 야기한 폭력과 불안의 한가운데에서 소리를 이용해 내면의 평화를 찾기 위해 고안됨. 

 

딥리스닝: "지금 무엇을 하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듣는 것. 이렇게 주의를 기울여서 듣는 대상에는 음악뿐 아니라 일상생활과 자연, 자기 생각의 소리도 포함된다."

 

듣는 것과 들리는 것을 구분함. 들리는 것은 신체적인 의미의 인식이다. 듣는 것은 자신이 청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인식하는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딥 리스닝의 목표이자 보상은 고조된 수용감각과, 관찰하기보다는 순식간에 분석하고 판단하라고 가르치는 평소의 문화적 훈련을 뒤집는 것이다. 

 

새 관찰.

 

 

새 관찰은 꽤나 '저해상도'였던 내 인식의 입자감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 내게 새소리는 마치 사람의 언어처럼 입력된다. 성인이 된 후 외국어를 배워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가 낮설지 않을 것이다. 한때는 그저 '새소리'였던 것이 내게 의미 있는 별개의 소리로 분화된 과정은 나의 어머니가 두 가지 언어가 아니라 세 가지 언어를 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과 매우 유사하다. 44

 

하나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두 가지이고, 그 두 가지도 실상은 열가지였던 이런 당황스러운 발견은 관심의 질이나 지속 시간과 관련이 있다. 노력을 기울이면 대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많은 것을 알아차리고, 매번 더욱 미세한 주파수를 구분할 수 있다. 45

 

관심을 붙드는 구조의 미로 같은 특성과 듣기 위해 멈춰 서는 순간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이 각각의 순간이 고유한 방식으로 일종이 중단을, 익숙한 영역에서의 퇴거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시간이 멈춘 듯하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곤 한다. 이러한 장소와 순간은 진정한 휴식을 선사하며, 아무리 짦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놓는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관찰자, 존 뮤어 John Muir 

사고를 당해 6주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방 안에 갇혔고, 자신이 다시 앞을 볼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 시력이 돌아온다면 신이 이 세상을 만든 과정을 연구하는 데 남은 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개인적인 퇴거의 시간. 

 

창조성의 필수 요소 5가지. 

공간, 시간, 시간, 자신감, 유머

 

아버지는 일이라는 한정된 맥락을 벗어나자 일이 아닌 세상 자체를 배경으로 자신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드이 훨씬 커다란 것의 일부로 보였다. 

 

들뢰즈의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하루 8시간의 노동을 쟁취하기 위한 노동조합의 투쟁.

이 노동운동은 시간의 경계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힘을 잃은 지난 수십 년간 시간의 경계 뿐 아니라 장소의 경계도 함께 사라졌다. 공원이나 도서관 같은 공공장소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한 장소이자 공간적 토대다. 비사업적인 공공장소는 입장하거나 머무르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공공장소가 그 외 장소와 가장 명맥하게 구분되는 점은 그곳에 머물기 위해 무언가를 살 필요도, 사고 싶은 척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51

 

진짜 공공장소에서 우리는 행위 주체성이 있는 시민이다. 그러나 가짜 공공장소에서 우리는 소비자이거나 공간의 디자인을 위협하는 존재다. 

 

시간을 두고 이루어지는 싸움. 

80년대 노동운동의 패배로 우리 모두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 

퍼스널브랜드를 신경 쓰는 사람들. 

 

8시간의 노동, 8시간의 휴식, 8시간의 자유시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우리에게는 시간대나 수면 주기와 상관없이 언제나 현금화할 수 있는 24시간만이 남았다. 

 

깨어 잇는 내내 생계를 위해 일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여가  시간까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좋아요' 숫자로 수치화된다. 재고를 확인 하듯 수시로 자신의 성과를 확인하고 퍼스널블랜드의 발전 과정을 감시할 때, 시간은 경제적 자원이 된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에 쓰는 시간을 정당화할 수 없다. 

 

비영리 공간이 사라지듯 우리도 자신의 모든 시간과 행동을 잠재적 돈벌이 수단으로 여긴다. 손상된 여가 개념을 주입받는다. 54

 

베라르디, 현재 정권은 "반대 의견을 억압하거나 침묵을 강요하는 방법에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정권은 잡담의 확산, 부적절한 방식으로 형성된 담론과 의견에 의지하며 개인의 생각과 반대의견, 비판을 시시하고 터무니 없는 것으로 만드는데 몰두한다" "막대한 정보의 과부하나 관심의 포위 문제와 비교하면 정부 검열은 오히려 미미한 문제"다. 58

 

파자케이트(민주당원들이 워싱턴의 피자 가게에 있는 본부에서 대규모 아동학대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다른 음모론)와 온리인 저널리스트들을 대상으로한 신상 털기, 거짓 신고 등에서 나타나듯이 완전한 가상과 완전한 현실의 연결은 인간의 인식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준다. 58

 

대선 이후 참기 힘들 만큼 비통하고 불안한 와중에도 나는 계속 새들을 관찰했다. .. 해오라기를 볼 때처럼 이번에도 나는 까마귀들의 존재에 위로를 받았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그 위로는 지극히 컸다. 야생동물인 까마귀가 나를 알아본다는것, 둘의 우주에 나의 자리가 있다는 것, 매일 나의 공간에 들러준다는 것, 가끔은 저 멀리 나무 위의 까마귀들에게 손을 흔들어줄 수도 있다는 것이 내게는 큰 위안이었다. 62

 

나를 바라보는 낯선 동물적 관점과 우리가 공유하는 세상은 현시대의 불안에서 탈출할 수 있는 도피처가 되어주었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의 동물성과 내가 사는 세계의 활기를 상기시켜주었다. 새들의 비행은 말 그대로 나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데이비드 어브램이 <동물되기>에서 제기한 질문이 떠오른다. "인간의 상상력이 다른 형태의 감각에 자극받지 않고도 저절로 유지될 것이라고 믿는가?" 

 

이 일화는 내가 트럼프 당선 이후 장미정원에 가야 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진짜와 가짜가 뒤썩인 정보가 마구 쏟아지는 초현실적이고 섬뜩한 가상의 공간에는 결핍된 것이 있었다. 바로 인간과 비인간 독립체와 더불어 시간과 물리적 환경에 놓인 인간 동물을 위한 배려의 장소였다. 현실에 두 발을 딛기 위해서는 실제 땅이 필요했던 것이다. 63

 

어브램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을 넘어서는 신비한 자연 속에서 직접 느낄 수 있는 감각적 현실만이 전자장치로 생성된 풍경과 조작된 즐거움으로 가득한 오늘날의 경험적 세계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시금석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오로지 분명히 실재하는 땅이나 하늘과 주기적으로 접촉함으로써 우리를 차지한 다차원 세계에서 현재 위치를 파악하고 방향을 찾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63

 

나는 아바타가 아니고, 취향의 조합도 아니고, 매끈한 인지적 작용도 아니다. 나는 울툴불퉁하고 구멍이 많다. 나는 동물이다. 가끔 다치고, 하루하루 달라진다. 다른 생명체가 나를 듣고 보고 냄새 맡는 세계에서 다른 존재들을 듣고 보고 냄새 맡는다. 이 사실을 기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 그저 귀 기울일 시간, 가장 깊은 감각으로 현재 우리의 모습과 시간, 장소를 기억할 시간 말이다. 63

 

생산성을 거부하고 멈춰 서서 귀 기울인다는 의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인종적, 환경적, 경제적 불평등을 찾아내고 실질적 변화를 불러오는 적극적 듣기를 수반한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일종의 재교육 장치로 본다. 흩어질 대로 흩어져 의미 있는 행동에 나설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자양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차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는 우리에게 관심경제에 저항할 수 있는 여러 무기를 제공한다. 

 

1) 첫 번째 무기는 회복의 시공간이다. 이러한 장소가 없으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생각하고, 성찰하고, 치유하고, 자신을 지탱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과도한 자극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된 지금, 나는 #기회를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기회를 놓쳐야 할 필요성으로, 마음이 영 불편하다면 #가끔은 기회를 놓쳐야 할 필요성으로 다시 상상할 것을 제안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는 전략적 기능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돌봄으로 분류할 수 있어, 오드리 로드의 자기돌봄으로 이해해야. 

"자신을 돌보는 것은 방종이 아니라 자기보호이며, 자기 보호는 정치적인 전쟁 행위다" 

 

2) 두번째 무기는 깊이 있게 듣는 능력이다. 여기서 듣기란 서로를 이해한다는 의미의 더욱 포괄적인 듣기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실제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인식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무는 것이다. 

 

"정적은 무언가의 부재가 아니라 모든 것의 존재다" 

 

우리가 서로 의사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플랫폼들은 듣기를 장려하지 않는다. 그 대신 고함과 지나치게 단순한 반응, 제목 한 줄을 읽고 판단하는 행위를 장려한다. 65

 

듣기의 문제이자 신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베라르디, 연결성과 민감성의 차이. 

. 연결성: 양립 가능한 여러 개체 사이에서 정보가 빠르게 순환하는 것. 페이스북에서 정보순환과 공유, 받아들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빨간색과 파랑색 중 하나를 선택하시오). 이러한 정보전달 과정에서 여러 개체는 변화하지 않으며, 정보 또한 변화하지 않는다. 

. 민감성 : 서로 다른 형태를 가진 두 신체의 어렵고, 불편하고, 모호한 만남을 수반한다. 이러한 만남과 감지는 시간을 필요로 하고, 또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서로를 감지하려는 노력으로 인해 두 독립체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른 모습이 되어 헤어질 수 있다. 66

 

온라인 플랫폼은 확실히 연결성을 선호한다. 온라인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수익 때문이기도 하다. 연결성과 민감성의 차이는 시간이며, 시간은 곧 돈이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신체가 사라지면 우리의 공감 능력도 함께 사라진다. 베라르디, "인포스피어(정보환경)의 확장과, 말로 표현하거나 성문화한 부호로 축소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감각 막의 붕괴 사이의 관련성을 가정'하라고 말한다. 온라인 플랫폼 환경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과잉이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모든 대면 만남이 눈앞에 있는 엄연한 신체의 존재는 물론이고, 비언어적 신체 표현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데도 말이다. 67

[참조, 한병철의 <투명사회>]

 

3)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는 세 번째로 더욱 강력한 무기를 제공한다. 그것은 바로 성장의 수사학에 취하지 않도록 하는 해독제다. 

 

건강과 생태의 관점에서 갇잡을 수 없이 자라는 것은 보통 기생충이나 암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는 순환과 재생보다 새로움과 성장에 더 큰 특혜를 주는 사회에 산다. 우리의 생산성 개념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전제로 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유지와 돌봄이 생산적이지 않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 장미정원의 자원봉사자들.

. 예술가 미얼래더맨 유켈리스 Mierle Laderman Ukeles의 워즈워스 애서니엄 미술관의 계단을 청소하는 퍼포먼스 <Washing/Tracks/Maintenance:Outside>와, 11개월 동안 뉴욕시 환경미화원 8,500명과 악수를 나누며 감사를 전하고 인터뷰를 한 <Touch Sanitation Performance>

"누군가의 엄마로 사는 데에는 엄청난 양의 반복 작업이 수반된다. 나는 유지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내각 속한 문화권에서 완전히 버려졌다고 느꼈다. 우리 문화에는 유지 노동을 인정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1969년 유켈리스는 자신의 유지 노동을 예술로 간주하는 전시 계획인 "유지 예술 선언문"을 썼다. "나는 전시 기간 동안 미술관에 머물며 내가 집에서 남편과 아기를 위해 늘 하는 일을 할 것이다. ... 나의 노동이 곧 작품이 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자기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이타적 돌봄을 직접 경험한다. 여기서 예외란 없다. 이 현상은 우리가 인간 경험이라고 정의하는 것의 핵심이다. 

 

동족을 위한 돌봄과 유지 작업, 

리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암울한 환경에서 피어난 놀라운 기지와 공감 능력, 심지어 유머 감각. 솔닛은 우리를 서로와, 또 우리 안의 보호 본능과 갈라놓는 일상생활이야말로 진정한 재난임을 보여준다. 

 

수년간 까마귀를 향한 애정을 키우면서 동족 간의 유대감을 꼭 인간에게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나 해러웨이, <인류세, 자본세, 대농장세, 툴루세: 동족 만들기> 

해러웨이는 개인이나 계보학적 가족보다는 돌봄의 실천을 통해 유지되는, 다양한 존재로 구성된 공생 형태에 관심이 더 많았다.

"아기가 아니라 동족을 만들라"고 요청한다. "나는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가장 깊은 의미에서 모두 동족이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동족이 확장되고 재구성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집합으로서의 동류를 더욱 잘 돌보았어야 했다. 동족은  집합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나는 제안한다 : 

. 언제나 우리를 지탱하고 놀라게 하는 연대라는 능력을 비롯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특성 중 아직 남아 있는 모든 것을 보호하는 자세를 갖자. 

. 비도구적이고 비상업적인 활동과 생각을 위해, 유지와 보존을 위해, 돌봄을 위해, 함께 하는 기쁨을 위해 우리의 공간과 시간을 보호하자.  

. 우리의 신체를, 다른 존재의 신체를, 우리가 살아가는 풍경의 신체를 적극적으로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모든 기술에 맞서 우리 인간의 동물성을 치열하게 보호하자.

 

기술적 유토피아,

 

먹는 것에서 탈출하기/지구에서 탈출하기

escaping the need to eat / escaping the planet

 

어브램, <동물되기>, "우리의 모든 기술적 유토피아와 기계를 매개로 한 불멸의 꿈은 우리의 정신을 불타오르게 할 진 몰라도 우리의 신체를 먹여 살리진 못한다. 실제로 이 시대의 탁월한 기술적 비전은 대부분 무수한 질병에 민감한 신체에 대한 두려움, 결국은 통제 밖에 있는 세계에 우리 몸이 깊이 박혀 있다는 두려움, 우리를 지탱하고 영양을 공급하는 바로 그 야생에 대한 공포에서 줄곧 동기를 얻는다" 

 

장미 정원의 우묵한 자리에 앉자 인간과 비인간의 다양한 신체에 둘러싸여 나의 것을 비롯한 수많은 신체적 민감성이 뒤썩인 현실에 머무는 긴 시간 동안(실제로 재스민과 적당히 잘 익은 블랙베리의 향기가 내 신체의 경계를 침범한다), 나는 내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이것은 어쩌면 감각 박탈의 공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환하게 빛나는 자그마한 성과 지표의 세계는 산들바람, 빛과 그림자, 통제할 수 없고 형언할 수도 없는 구체적 현실로 내게 말을 거는 내 눈앞의 세계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73

 

 

2장. 단순한 세계의 유령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생산성만을 중시하는 열악한 풍경에서 멀리 떨어진 시공간이 필요하다면, 일시적으로나 영속적으로나 세상을 등지는 것이 답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쉽다. 그러나 이는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 모든 것에 영원히 안녕을 고하고 싶은 충동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책임을 방치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이러한 충동은 대개 실행이 불가능하며, 여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77

 

에피크로스학파는 학생들을 본인의 욕망뿐 아니라 미신이나 신화와 관련된 두려움에서도 해방하고자 했다. 정원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 중에는 경험과학도 있었는데, 날씨 같은 것을(나아가 개인의 운명까지) 통제한다고 여겨진 신화 속 신들과 괴물에 대한 불안을 떨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에피쿠로스학파의 프로그램은 캠프 그라운디드뿐 아니라 모든 중독 재활센터의 목표와 유사했을지 모른다. 에피쿠루스학파의 학생들은 고삐 풀린 욕망과 불필요한 걱정, 비이성적 믿음을 '치료'받았다. ... 에피쿠로스학파는 도시공동체를 피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다른 종류의 공동체를 세웠다. 정원학교는 당시 비그리스인과 노예, 여성(성노동자 포함)의 입학을 허락한 유일한 학교였다. 교육비는 무료였다. 

 

정원학교의 학생들이 그저 각자 고립된 상태로 학문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욱 큰 의미가 있다. 학생들은 도시를 벗어났을지는 몰라도 타인에게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우정은 학습의 주제이자 에피쿠로스학파가 가르치는 행복의 필수 조건이었다. 87

 

에피쿠로스식 프로그램은 인류 역사 내내 이와 유사한 실험이 반복되었다. 1960년대 코뮌들의 다양한 운명에서 얻은 몇 가지 교훈을 떠올린다.

1) 비교적 최근에 시도한 실험으로서 1960년대 코뮌은 미디어와 자본주의 사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력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를 보여준다. 

 

2) 코뮌은 사람들이 꿈꾼 비정치적인 '빈 서판'이 얼마나 쉽게 기술 관료적 해결책으로 빠지는지를 보여준다. 이곳에서 정치를 대체하는 것은 디자인이다. 이런 해결책은 자유의지론자인 실리콘벨리 테크 업계 거물들이 현재 펼치고 있는 꿈을 미리 보여준다. 

 

3) 사회나 미디어와 단절되고 싶은 마음에는 공감하지만, 코뮌의 실험은 결국 완전한 단절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뿐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바로 그 사회에 대한 나의 책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교훈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 속에서 물러나는 형태의 정치적 거부의 토대가 된다. 

 

코뮌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거부한 경쟁적이고 착취적인 체제와 대척점에 있는 대안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좋은 삶'을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말처럼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코뮌은 바깥의 자본주의 세계와 골치 아픈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와의 끈을 끊고 싶어 했지만, 뿌리 뽑을 수 없는 병폐처럼 자본주의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금전적 위기는 결국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부유한 구성원 한 명이 60달러짜리 코트를 입고 집에 돌아 왔을 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상해서 발생했다. 이 코트는 계급의식에 관한 긴 회의로 이어졌고, 결국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못했다. 

 

'단순한' 세계의 다른 유형들도 코뮌의 급진적 꿈을 방해했다. 코뮌운동을 낳은 히피 운동과 마찬가지로 코뮌의 구성원들은 주로 대학 교육을 받은 중산층이었다.(급진적으로 재구성한 에피쿠로스의 학생 집단과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코뮌에는 백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남자 중 그 누구도 설거지를 하지 않았고 요리도 거의 하지 않았다" 시골이나 외딴 공동주택으로 장소를 옮긴다고 해서 몸에 밴 이념을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코뮌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아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개념이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비록 작은 규모일지언정 통치 체제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케케묵은 싸움을 처음부터 반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 온 불청객처럼 정치적 문제는 어쩔 수 없이 늘 표면 위로 떠올랐다. ... 실재로 떠나는 것은 흔한 해결책이었다. 이미 한 번 떠나본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 이번에는 코뮌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코뮌은 내부 정치 뿐 아니라 자국의 정치와 미디어에서도 도망쳤다. 

 

당시에는 워낙 어려서 지적이고 도덕적이던 1960년대 말의 아수라장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태도는 쉬이 무책임한 현실도피로 보일 수 있다. 실제로 4세기의 그리스에서도 공직을 피하고 은둔의 삶을 선택한 에피쿠로스학파의 학생들에게 같은 평가를 내렸다. ...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자신부터 먼저 변화하고 있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릴 만큼의 이타주의를 가르치는 학파를 어떻게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가? 현실적으로 보아도 에피쿠로스는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나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정원 학교의 학생들은 서로 큰 책임감을 느꼈지만, 이 세상을 위한 책임은 논외로 남았다. 이들은 세상을 포기했다. 97

 

코뮌 발전의 두 단계: 

분열과 좌절에 직면하자 순진무구한 낙관주의는 결국 더 엄격하고 덜 이상주의적인 접근법에 자리를 내주었다. 

1948년 출간된 유토피아 소설, <스키너의 월든 투>는 두 번재 단계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97

 

이 소설에서 정치가 남긴 공백을 채우는 것은 미학이다. 프레이저는 부리스에게 부지를 안내하면서 디자인도 훌륭하고 기능은 더울 뛰어난 공동체의 찻잔을 극찬한다. 심지어 공동체의  구성원도 장식적 요소로 축소된다. 

 

프레이저가 더 생산적인 인간의 사례를 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업을 대상으로 디지털 디톡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람처럼 생산성에 사로잡힌 프레이저는 인류가 자기 생산성의 경우 1퍼센트만 발휘하고 있다는 대단한 주장을 펼친다. 

 

기억과 수평적 연대는 개체성의 두 가지 뚜렷한 특징이다. <웨스트 월드>에서 인간은 주기적으로 호스트의 기억을 삭제해 사실상 현재에 묶어놓는 방식으로 호스트가 온순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실제로 이 드라마의 극적인 사건은 특히 호스트들이 과거의 기억에 접속하면서 생긴다.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이용되고 있다고 결론에 이를 뿐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서사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호스트와의 오래된 관계까지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시스테딩 연구소, 공해에 자율적인 섬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함. 이 프로젝트를 지원한 실리콘벨리 투자가이자 자유의지론자인 피터 틸은 법의 테두리 바깥에 새로운 집단 거주지를 만든다는 생각을 무척 흥미로워했다. 그가 쓴 에세이에서 미래에는 정치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는 스키너의 결론을 되풀이한다. 

 

틸에게 바다와 우주 공간, 사이버 공간만이 '새로운 장소'를 제공할 수 있다. 틸의 언어에서 권력의 위치는 수동태 속으로 사라지거나 디자인이나 기술 같은 관념과 결부되어 신중하게 감춰진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시스테딩 연구소의 기술관료적 독재를 낳을 것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틸의 에세이와 <스키너의 월든 투>에 묘사된 도피는 1958년 출간된 해나 아렌트의 고전 <인간의 조건>을 거의 역으로 설계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정치 과정을 디자인으로 대체하고 싶은 유구한 유혹을 분석한다. 아렌트는 역사 내내 인간이 "행위자가 여러 명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우연성과 도덕적 무책임"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움직여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도피의 특징은 지배다. 즉 인간은 누군가가 명령할 권리를 갖고 다른 사람은 그 명령에 순종할 때에만 법적이고 정치적으로 함께 살 수 있다" 라는 결론을 내린다. 아렌트는 이러한 유혹의 기원을 플라톤의 철인왕에서 찾는다. 플라톤이 생각한 이상적인 국가에서 철인왕은 프레이저처럼 하나의 상을 가지고 자신의 도시를 세운다. 104

 

아렌트의 말처럼 정치에서의 도피가 구체적으로 피하고자 하는 것은 '행위자의 다원성'에서 비롯되는 '예측불가능성"이다. 플라톤의 도시를 몰락하게 하는 것 또한 실재하는 사람들에게서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다원성이다. 아렌트는 통찰력 있는 계획도 현실의 무게를 견더내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현실이란 '외부 환경이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107

 

프레이저가 파시즘이라는 비난에 대한 무언의 항변으로 제시한 목가적인 장면처럼, 틸의 '정치에서의 도피'는 시간과 현실 바깥에 존재하는 이미지 이상이 될 수 없다. 이 계획을 '평화로운 프로젝트'라 칭한다면 '평화는 누군가가 조작할 수 없는 자유의지를 가진 행위자들 간의 끝없는 협상의 결과라는 사실을 회피하는 것이다.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이 단 두명만 있어도 정치행위는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정치를 디자인으로 대체하려는 모든 시도는 사람들을 기계 또는 기계적 존재로 축소한다. 그러므로 틸이 '자유를 위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할 수 있는 신기술'을 말할 때, 내 귀에는 프레이저의 말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사람들의 행동은 미리 결정되어 있지만, 그래도 저들은 자유롭습니다" 

 

유토피아는 말 드대로 '없는 장소'라는 뜻이다. 깔끔한 단절이나 빈 서판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눈앞에 무너져 내린 잔해의 틈에서 도피라는 선택지가 우리를 향해 손짓한다. 적어도 내게는, 특히 지금은, 1960년대의 코뮌 이야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유혹적이다. 109

 

사람들은 절망 뿐 아니라 희망과 영감을 동력으로 코뮌으로 향했다. 이러한 희망과 영감의 전류는 코뮌에 수많은 이야기와 건축물, 예술, 아이디어를 남겼다. 이러한 전류는 역사 내내 흐르며 매번 새로운 형식을 드러낸다. 

 

예술과 삶 사이의 공간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전류는 코뮌의 가장 중요하고 선명한 유산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짦은 시간이었으나 코뮌은 자신들이 떠나온 사회에 새로운 시작을 열어주었다. 111

 

모든 도피 서사의 중요한 지점들.

모든 짐을 승합차에 싣고 다 꺼지라고 말한 뒤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것인가? 버리고 온 세상에 대한 책임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곳을 떠나 무엇을 할 것인가?  60년대 코뮌들은 이것이 결코 답하기 쉬운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작은 같지만 끝은 또 다른 한 은둔자 이야기가 있다. 

토머스 머튼. 

1948년 자서전 <칠충산> 출간. 그가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된 과정을 담은 책. 이 책은 세상에 대한 혐오와 영적 거부를 뜻하는 '콘템프투스 문디Contemptus Mundi)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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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네... <칠충산>은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의 작품이야" 

그는 이러한 변화가 동료 성직자와 함께 루이빌에 갔을 때 경험한 깨달음과 관련있다고 말함.

 

"사람들로 북적대는 루이빌의 4번가와 월넛가가 만나는 모퉁이, 상점가 한가운데였어, 그때 갑자기 내가 이 사람들을 전부 사랑하고 있고, 그들은 나의 것이고 나는 그들의 것이며,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이라 하더라도 관계가 있다는 깨달음이 밀려온 걸세. 개별성이라는 꿈, 금욕적이고 거룩한 특별한 세상에 스스로 고립되는 거짓된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네" 59

 

이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튼은 수많은 책과 에세이, 논평을 발표해 사회문제(특히 베트남전쟁, 인종차별, 제국적 자본주의)를 비판했을 뿐 아니라 세상을 포기하고 추상 뒤로 도망친 가톨릭교회를 꾸짖었다. 요컨데 머튼은 세상에 참여했다. 

 

머튼의 책, <행동하는 세계에서의 사색>에서, 영적인 사색과 세속적 참여의 관계를 고찰한다. 그는 이 두 가지가 결코 상호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물러남과 사색은 지금 일어나는 일을 파악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 시간은 언제나 이 세상에 대한 책임, 이 에상에서 져야 할 나의 책임을 상기시킨다. 머튼에게 중요한 것은 참여 여부가 아니라 참여 방식이었다. 

 

이 (참여 여부냐 참여 방식이냐의) 문제는 관심 경제가 작동하는 배경인 절망을 대하는 유용한 태도를 제시한다. 이 문제는 내가 진짜 도망치고 싶어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분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내가 제안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주말 동안 휴식 이상의 것이라고 앞에서 언급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영원한 도피를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에서 완전히 퇴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사실은 다음 장에서 다른 종류의 피난, 즉 '그 자리에서의 거부' 개념의 토대가 된다. 

 

내가 도망치고 싶은 것은 이런 것들이다. 

최근 몇 년간 가장 우려되는 소셜미디어의 사용방식 중 하나는 뉴스 미디어와 사용자들이 피드에서 히스테리와 두려움의 파도를 일으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끝없는 광란의 상태에 빠져 뉴스 사이클을 만들어내고 자발적으로 그 사이클의 지배를 받는다. 불안을 호소하고,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발 빠르게 뉴스를 확인한다. 광고와 클릭의 논리에 따라 미디어 경험이 ㅇ결정되고, 플랫폼 디자인이 이 경험을 착취한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미디어 기업들은 일종의 '속보 경쟁'을 벌이고, 이 경쟁이 우리의 관심을 악용해 생각할 시간을 모조리 빼앗아간다. 

 

이처럼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글들은 딱히 유익하지 않다. 이는 반성과 사유에서 나온 의사소통읭 형태라기보다는 두려움과 분노가 일으킨 순간적인 반응이다. ... 미디어 기업들은 일부러 끊임없이 자극적인 미끼를 던지고, 우리는 그 헤드라인을 보고 즉각적으로 본노한 나머지 그 기사를 읽지 않거나 공유하지 않는 선택지는 고려조차 하지 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기적으로 한 걸음 물러날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우리가 무분별하게 복종하는 메커니즘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거리와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행동이나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거리와 시간이 필요하다. 

 

소셜미디어에서 과도하게 많은 시간을 보내고 뉴스 사이클에 얽매이는 것을 두고 이렇게 경고한다. "스스로 통념에 파묻어버리는 일입니다. 통념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 이렇게 만들어진 불협화음 속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내게 거리 두기란 보통 산책이나 짦은 여행을 떠나 잠시 인터넷을 멀리하거나 뉴스를 읽지 않으려 애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원히 바깥에 머물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평생 감자에 대해 사색하고 싶을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은 실수다. 1960년대 코뮌의 이야기는 이 세계의 정치적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지금 이 세상은 우리의 참여가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역시 문제는 참여 여부가 아니라 참여 방식이다. 120

 

하이브리드적 대응이 필요하다. 우리는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색하는 것과 참여하는 것, 떠나는 것과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언제나 다시 돌아오는 것, <행동하는 세계에서의 사색>에서 머튼은 우리가 마음속에서 이 두 가지 움직임을 동시에 실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나는 그 가능성을 따라 도피나 망명의 언어 대신 다른 것을 제시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한 발짝 떨어지기'라고 명명한 단순한 분리 상태다. 

 

한 발짝 떨어지는 것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외부자의 관점을 갖는 것.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도 떠나갔을 곳을 흔들임 없이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적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적을 아는 것을 의미하며, 여기서 적은 이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이 세계를 접하는 채널이다. 이는 또한 미디어의 사이클과 서사가 허락하지 않는 중요한 휴식을 자신에게 제공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121

 

우주에 호소하는 자유의지론자의 빈 서판이나 역사와 단절되고자 했던 코뮌과 달리, 이 '다른 세상'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지금 이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함께 정의를 실현한 이 세상의 완벽한 이상향에 가깝다. 한 발짝 떨어지는 것은 여기에 수반되는 모든 희망과 슬픈 사색을 품고 현재의 세계를 미래에 가능한 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121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현재에 책임을 느낌으로써 우리는 에피쿠로스학파가 말하는 좋은 삶의 희미한 윤곽을 감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삶은 '신화와 미신' 즉 인종차별과 성차별, 동성애 혐오, 트랜스젠더 혐오, 외국인 혐오, 기후변화 부정, 그 밖에 현실에 기반이 없는 다른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삶이다. 이는 하찮은 일이 아니다. 관심경제는 우리를 참담한 현실에 계속 붙잡아두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우리가 겪는 고층이 과거에 어떤 형태였는지 인식하는 것뿐 아니라, 어떻게든 실망하거나 타격받지 않고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 갈수록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 발짝 떨어지는 순간에 영원히 떠나고 싶은 절발한 욕망을 '지금 이곳에서 거부'라는 선택지를 가지고 살아가겠다는 다짐, 거부라는 공동의 장소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겠다는 다짐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저항은 참여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이 참여는 새로운 방식, 즉 패권 경쟁의 권위를 훼손하고 그 바깥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방식의 참여다. 121

 

 

6장. 생각의 토대 복원하기 + 나오며: 명백한 해체

 

폴린 올리베로스, <딥 리스닝>

"새와 곤충, 동물이 있는 환경에 들어서면 그 생명체들은 당신의 소리를 듣는다. 당신은 수신되고 있다. 그 환경에 있는 생명체들에게 당신의 존재는 삶과 죽음의 차이를 의미할지 모른다. 듣기는 곧 생존이다" 262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나와 새들 사이에 맥락이 생긴 과정이 공간이나 시간과 관련이 있었다는 것이다. 감각이 있는 존재인 내게 새들의 서식지와 계절 같은 요소는 내가 보는 새가 어떤 종류인지, 왜 내가 그 새를 보고 있는지, 그 새는 무엇을 하고 왜 그 행동을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소셜미디어에서 만나는 정보는 공간적으로나 시긴적으로나 맥락이 없었다.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정보들이 낳은 것은 이해가 아니라 사람을 마비시키는 묵직한 두려움이다. 

 

이러한 맥락의 결핍은 페이스부과 트위터 같은 플랫폼에서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는 혐오와 모욕, 보복적 여론의 파도에서 통감할 수 잇다. 피자게이트 음모론을 퍼뜨리는데 일조한 인물 마이크 서노비치같은 극우 선동가들이 가장 선초하는 방법. 내 마음을 가장 불편하게 하는 점은 서노비치 같은 사람들의 음해가 아니라 모두가 빠르게 순종적으로 이에 동참한다는 사실이다. 

 

'맥락의 붕괴'

맥락 붕괴가 "그 누가 읽어도 안전한 주제 내로 유저를 제한하는, 공통분모 없는 공유 철학을 만들어낸다" 

 

조슈아 메이로위츠의 책, <장소감 상실> 

독자 집단에 따른 3가지 버전의 여행기

독자가 한 곳에 모여 있게 되면서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선택지: 

. 하나 이상의 집단을 불쾌하게 만들거나

. 아니면 아무도 불쾌하지 않을 만큼 단조로운 이야기를 종합해서 여행기를 다시 만들어 냄. 

 

트위커 유저와 퍼스널브랜드의 양상과 유사, 첫 번째 선택지는 과거에 쓴 트윗이 폭로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며, 두번째 선택지는 프로페셔널한 소셜미디어 스타의 경우로, 이들은 항상 모든 사람의 구미에 맞는 공식을 따른다. 2번의 선택지는 결국 담론의 하향 평준화를 일으킨다. 

 

'대규모로 통합된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상황'에서는 특정 행동이 불가능하다. 

1. 특정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그들에게 맞서는 전략을 짤 수 없다. 페이스북에서 펼쳐지는 저항 운동의 한계. 

2. 맥락이 붕괴된 장소에서 불가능해지는 두 번재 행동은 자신 안의 다원성과 관련이 있다. 공개적으로 마음을 바꿀 수 없는 어려움,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 그러나 온라인에서 사과하고 마음을 바꾸는 것은 나약한 태도로 치부되기에 우리는 생각이 바뀌어돋 입을 다물곤 한다. 친구와 가족, 지인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성장하는 사람을 볼 수 있지만, 군중은 하나의 브랜드처럼 획일적이고 변함없을 것으로 기대되는 인물만을 본다. 

 

시간의 붕괴.

즉강성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납작하게 펴서 끝없는 현재를 만든다. 소셜미디어는 의사소통이 워낙 빠르고 신속하며 짧기 때문에 정치적 논의와 정교화에 적합한 공간이 아니다. 활동가들이 만드는 잡지나 대면 집단토론 같은 덜 즉각적인 채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맥락이 드러난다. 

 

즉각성이 만들어내는 '느슨한 유대'가 정치활동을 위협한다. 소셜미디어에서 구축된 네트워크가 함께 공유하는 정치적 목표나 사회적 갈등에 대한 이해가 아닌, 공통의 반응이나 감정에 기초'한다. 강력한 연대와 정교하게 다듬는 정치적 목표는 여전히 현장에서의 행동, 대면한 상태에서의 상호작용과 토론, 숙고, 대립에서 나온다. 

 

작은 조각으로 항목화된 정보와 선정적인 헤드라인을 볼 때 우리는 그 정보에 시간적 공간적으로 인접했던 것을 놓쳐버린다.  관심경제는 우리를 끔찍한 현재에 붙들어놓는 데서 이윤을 얻기 때문에, 우리는 주변의 물리적 현실에 관심을 기울일 기회를 박탈당하는 동시에 역사적 맥락을 보지 못하게 될 위험에 처한다. 

 

맥락을 찾고 이해하는 능력은 다름 아닌 집단의 생존 기술일 것. 우리에게는 새로운 종류의 연대가 필요하며, 더 나아가 이 새로운 연대를 위해서는 고독과 연결, 치열한 의사소통이 모두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연결과 표현을 위한 플랫폼이 필요하다. 

 

나는 종종 시공간에서 사물을 배우도록 진화한 동물인 우리가 인간 경험의 시공간적 특성을 고려하는 온리인 네트워크가 어떤 모습일지 생각한다. 메이로위츠의 사고 실험을 거꾸로 돌료 무너진 벽을 다시 세운다. 시공간에 완전히 뿌리를 박고, 사용하려면 그곳으로 직접 가야하며, 느린 속도록 작동하는 소셜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경험은 과연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자폐증과 신경다양성을 탐구한 책 <뉴로트라이브>에서 스티브 실버먼이 말한 것 처럼 커뮤니티 메모리는 예상치 못한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이 네트워크는 그저 단순히 컴퓨터화된 게시판에 머물지 않고 순식간에 '커뮤니티 전체의 스냅사진'이 되었다" 277

 

오늘날 페이스북과 커뮤니티 메모리 키오스트의 차인.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이 어떤 내용을 당신에게는 보여주지만 나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데, 이러한 개인 맞춤형 서비스의 동기는 광고와 우리의 참여도를 늘리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온다. 반면 커뮤니티 메모리 키오스트 간의 차이는 전적으로 지리적 위치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정보가 지리적 매락에 둘러싸여 있으며, 장소와 관계를 맺고 잇다는 점. 페이스북과 트위터와 같은 종류의 기술은 우리의 상호작용은 회사에서 수집하는 데이터가 되며, 사용자를 끌어들이는 목적은 광고다. 기술을 지역내 상호작용을 용이하게 하는 데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내 상호작용을 이윤을 내는 데 이용하고 있는 것. 사용자 참여의 규칙은 협상이 불가능하고 소프트웨어 내부 알고리즘을 알 수 없는 블랙박스이며, 모든 것이 기업 소유의 중앙 서버에 의지하고, 이 서버의 서비스 조건은 장소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탈중앙화 네트워크의 분산적 연결. 

 

맥락이 붕괴된 군중이 받아들일 만한 말들을 생각하느라,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확인하느라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는지 종종 생각해본다. 그 에너지를 적절한 때에 적절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말을 하는데 사용하면 어떨까? 

 

해나 아렌트, "현상의 공간" 아렌트에게 현상의 공간은 민주주의의 씨앗이었고, 함께 유의미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정의되었다. 권력은 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함게 행동할 대 발생하는 공동의 힘이라고 정의한 아렌트는 "권력이 나타나는 데 있어서 유일한 필수조건은 사람들의 공생이다. 인간이 서로 가까이 살아서 행동의 가능성을 늘 있는 곳에서만 인간은 권력을 가질 수 있다" 

 

기본적으로 현상의 공간은 행위자의 다원성이 붕괴되지 않을 만큼의 작고 집중된 만남이다. 다수의 만남에 있는 역동성이 권력의 가능성을 담보하며, 우리는 두 주장의 상호작용이 새로운 것을 낳는 대화의 형식을 통해 이 사실을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집단의 모든 부분이 명백해 보이고, 명령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 있고 그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현상의 공간은 나와 똑같이 그 공간에 투자한 다른 사람들과 내가 서로 바라보고 목소리를 들을 권한을 부여받은 공간이다. 내가 말하고 듣는 것에 모두가 아는 맥락이 제공된다는 점에서, 이곳에는 트위터 속 관념적인 대중과 다른 '이상적인 청중'이 있다. 이러한 형태의 만남에서는 맥락을 두고 언쟁을 벌이거나 공통분모가 전혀 없는 여론에 맞춰 자신의 메시지를 포장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한자리에 모이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며 행동에 나선다. 290 

 

우리가 함께 만나 현실적인 사회적, 환경적 불의 등의 문제들을 논하는 바로 그 플랫폼이 우리의 논리적 사고를 방해하는 맥락의 붕괴에서 이윤을 얻는다는 사실은 잔인한 아이러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가장 도움이 될 수 잇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고 다른 체제에서 다른 무언가를 도모하기 위해 현재의 체제(관심경제)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상상하는 건전한 소셜 네트워크는 현상의 공간이다. 이곳은 오랜 시간 친구와 함게한 산책, 전화 통화, 비밀 채팅방에서의 대화, 동네 주민 모임 등 매개체를 경유한 만남과 대면 만남이 결합한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게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을 공감과 책임, 정치 혁신을 배양하는 공간으로 제시할 것이며, 이렇게 얻은 것들은 지금 이곳뿐 아니라 다른 모든 곳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장소감을 기르는 것은 관심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관심을 필요로 한다. 즉 서로를 돌보는 방법을 다시 배우고 싶다면 장소를 돌보는 방법 또한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종류의 돌봄은 키머러가 <향모를 땋으며>에서 보여준 책임감 있는 관심에서 나온다. 관심은 우리가 보는 것을 결정함으로써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 향하는 대상에 실질적 영향을 미친다. 

 

인류세라 일컬어지는 이 시대에, 나는 이 시기를 지칭하는 도나 헤러웨이의 용어가 훨씬 더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해러웨이는 이 시기를 툴루세라고 칭하는데, '지구가 인간과 비인간 난민으로 가득하지만 피난처는 없는' 시기를 뜻한다. "툴루세를 살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될 생명으로서 잘 살고 잘 죽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모두와 협력해 피난처를 복원하고, 불완전하지만 굳건한 생물학적, 문화적, 정치적, 기술적 회복과 재구성을 이뤄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대한 애도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트러블과 함께하기>)

 

 

나오며 : 명백한 행테

 

명백한 운명, 미국이 북미 전역을 개발하고 지배할 운명이라는 주장. 

 

명백한 운명의 반대는 무엇일까? 이 개념을 나는 명백한 해체라고 부른다. 맹벽한 해체는 명백한 운명이 초래한 모든 피해를 복구하고 난장판을 정리하느라 바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다. 

 

2015년 캘리포니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탬 해체 작업. 

 

19세기의 진보와 생산, 혁신 개념은 빈 서판과 같은 땅의 이미지에서 나왔다. 그러한 

땅에 이미 존재하던 시스템과 거주민은 미국 잔디가 되어야 할 곳에 핀 수많은 잡초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문화적으로나 생태학적으로나 이미 이곳에 잇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인식한다면, 건설로 간주되는 것이 사실은 파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명백한 해체의 렌즈를 통해 보면 댐 철거는 원래 상태로 되돌려놓으면서도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을 내어 놓는, 실지로 창의적인 행위다. 309

 

명백한 해체는 인간이 만물의 중심이라는 생각의 전환을 요구한다. "우리는 토지 공동체의 정복자에서 평범한 구성원이지 시민으로' 변화해야만 한다. 

 

후쿠오카 마사노부,<짚 한오라기의 혁명> 

무위농법

궁극의 겸허함

"인간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 무엇에돋 내재적 가치가 없으며, 모든 행동이 무용하고 무의미한 노력이다" 

땅에 자연의 지혜가 작동하고 있으므로 농부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일은 가능한 한 간헙하지 않는 것임. 

지나친 조작과 유기(방기) 사이의 적절한 지점. 

후쿠오카의 기술은 자신이 돌보는 생태계의 고요하고 인내심 있는 협력자가 되는 것임. 

 

제데디아 퍼디 Jedediah Purdy <자연이후>

"자연의 일을 바라보는 환경정치는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통찰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사회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노동이 뒤늦게 덧붙여진 젠더화된 개념인 '돌봄'으로 부시되거나 평가절하되고 있지만, 현실에서 돌봄 없이는 그 어떤 삶도 없다는 통찰이다" 

 

돌봄(노동) 

유켈리스, '유지 예술 선언문' 

 

관심경제의 위험성 + 공공장소, 환경정치, 계급, 인종문제가 교차하는 지점들. 

 

부유한 동네는 자연환경이 좋은 곳에 있다. 도시공원이 있는 곳에. 

빌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는 집에서 자녀들의 디지털 기기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다. 

 

관심의 빗장 공동체, gated community

모두가 아닌 소수만이 다양한 관심과 사색에서 나오는 결실을 누리는 특권적 장소다. 기술정치가 공공장소나 환경의 정치와 단단히 얽혀있음을 의미한다. 관심 경제의 영향 뿐 아니라 이러한 영향이 다른 불평등의 현장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까지 고려할 때에야 비로소 이 매듭을 풀 수 있다. 

 

다양한 장소에서 명매한 해체를 실행할 수 있다. 

. 그저 관심을 철회함으로써 관심경제를 보이콧 하기.

. 환경정치, 노동권, 여성권, 원주민 권리, 인종차별 금지 계획, 공원과 열린 공간을 위한 대책, 서식지 복원 같은 것들에 영향을 미칠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을 수 있따. 

 

명백한 해체가 생산성이라는 북극성 대신 어떤 목표를 좇아야 하는가? 

목적론의 포기 

비목적론적 윤리

 

제멋대로이지만 제대로 기능하는 후코오카 마사노부의 농장과 비슷. 

" 윤리적 행위자는 미리 결정된 조화의 상태나 정적 평형, 또는 그 어떤 궁극적 상태에 다다를 희망 없이 세상과 어떻게 협상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목적론의 포기는 우리의 결정과 행동이 완벽한 조화나 질서를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의 포기를 수반한다. 이러한 비목적론적 윤리는 미리 정해진 목적을 실현하거나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동기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불가피하게 살게 된, 질서와 혼란이 공존하는 우주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동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역시나 불가피해 보이는 주체적 선택을 통해 이 우주의 소중한 다른 구성원이 심각하게 파괴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크리스 J.쿠오모, <페미니즘과 생태 공동체>) 

 

목적 없는 목표, 목표 없는 계획. 

쓸모 없는 나무 이야기

 

 

해제, 돌봄과 유지의 윤리(최태윤)

 

온화한 영혼과 유연한 시각을 지닌 제니와의 대화는 즐겁다. 그는 유머와 상상력이라는 도구로 세상을 바라보는 예리한 관찰자다.

 

제니가 사용한 비관습적인 용어사용. 

.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지역을 중심으로 지속가능한 정치.경제.문화 시스템의 철학을 만들어가는 생태지역주의를 통해 자연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고, 자신이 위치한 시공각에 더욱 충실하게 존재하려는 한 시각 예술가의 시도다. 

 

. 관심경제

관심경제는 인간의 관심을 희소한 재화로 취급한다. 

인스타그램과 트윗터의 타임라인은 알고리즘이 나를 위해 선별한 정보와 선정적 자극으로 넘침. 

소셜미디어의 이중성. 소셜미디어에 대한 우리의 양가감정과 방어적 태도가 바로 관심경제의 화폐다. 

 

. 새 알아차리기

일종의 훈련, 새가 아니라 식물일 수도. 시공간, 공생관계를 알아차려. 

 

.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생산성의 틀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압박을 넘어서겠다는 적극적 결정이다.  그 자리에서의 저항이며, 이는 곧 스스로를 자본주의적 가치 체계에 쉽사리 이용당하지 않는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다. 

 

.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생산성이 아닌 유지와 회복, 돌봄을 우주의 중심에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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