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짐을 끄는 짐승들

백_일홍 2022. 7. 29. 21:22

짐을 끄는 짐승들 _ 동물해방과 장애해방

 

수나우라 테일러

 

 

프롤로그

 

나는 1년간 커다란 캔버스에 닭을 실은 트럭을 그렸다.31

 

내가 지난 1년간 쳐다보고 생각해온 그 100여 마리의 닭들이, 이 책을 구성하는 물음들을 던질 수 있게 해주었다. 

. 동물은 어떻게 하나의 대상이 되는가?

. 우리는 어떻게 이런 대상화를 정상적인 일로 배우게 되는가? 

. 장애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우리가 동물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가? 

 

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동물산업 곳곳에 장애를 가진 몸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또한 동물의 몸이 오늘날 미국에서 장애를 가진 몸과 마음이 억압당하는 방식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33

 

1부. 몇가지의 깨달음

 

1.이상하지만 진실인

 

4살때쯤 고기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됨. 강렬한 감각. 나는 이 잊기 힘든 감각으로 인해 항상 잔인성에대해 자각하게 됨. 세계에 대한 이해가 급작스레 바뀌었을 때 느껴졌던 위력과 트라우마가 떠오는다. 39

 

내가 8살이던 1990년, 미국 장애인차별금지법이 통과됨.

여섯살 때, 사람들이 동물들을 학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게 됨. 동물들이 억압당하는 방식들을 바꾸는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장애인들에 관해서도 동일한 것을 깨달은 건 20살이 되고 나서였다. 42

 

 

2. 장애란 무엇인가?

 

세계인구의 15~20 퍼센트, 세계 최대의 소수자 집단. 

 

장애인이 마주하는 사회정치적 난제들은 흔히 불행과 분투라는 개인화된 서사가 되고 만다. 

 

낙인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비장애인으로 패싱되기를 선택함. 

 

미국에서 차이의 범주로서 장애가 견고해진 것은 19세가 중반부터. 병리화되고 고용 불가능하다고 간주되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부적합하고 의존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범주화하고 분리하기 위한 다양한 자선단체,시설, 우생학적 관행, 복지 규정이 등장함. 44

 

장애라는 범주는 사회적 구성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비장애성을 상정한다. 

 

서구에서 차이와 능력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구축되는데 장애가 일부분 중대한 역할을 수행함. 장애는 사람들이 실제로 사는 현실임과 동시에 멸쩡함이라는 부서지기 쉬운 의미에 윤곽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적 틀이기도 하다. 46

 

2003년 21살때, 2주간 장애인들과 거리 시위에 참가. 이때의 경험은 내 삶을 놀라운 방식으로 바꿈. 

 

언론의 장애인에 대한 이미지. 감동 실화,슈퍼불구 서사. 

장애는 항상 개인적 비극. 장애인들은 차별과 억압을 극복하기 보다는 강인한 의지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용기를 찾아야, 

이러한 사사는 장애인들이 커뮤니티에 참여하고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도록 고무하는 대신, 비장애인 청중들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자신의 처지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50

 

말이란 정치적인 것이다.

언어든 이미지든 가장 통상적인 장애 은유들은 장애인의 경험에 대한 고정관념과 인식 결핍에 근거해 있음. 

. 절름발이 혹은 불구가 되다. 고장나고 결함이 있고 수리되어야 함을 의미함. 

 

불구crip 라는 말, 장애운동가와 연구가들이 재점유함. 퀴어와 유사. 

장애의 역사, 정치, 자부심을 가지고 장애에 창조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며, 동시에 자립, 정상, 의료화의 패러다임을 문제로 삼는 행위이기도 함. 51

 

시간이 흐르면서 불구라는 것은 점차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갔다. 장애를 가진 연구가, 운동가, 그리고 예술가에게 불구라는 것은 하나의 행동이 되었고, 급진적인 의미 변화를 이루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우리는 불구의 시간, 불구의 공간, 불구의 문화, 불구의 이론에 대해 이야기했다. 52

 

장애인들에 대한 말, 재현, 서사들. 

 

장애에 대한 재현은 의료화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의료화란 장애를 의료나 재활분야에서 다뤼야 할 주제로 보는 관점이다. 장애를 신의 개입이나 업보로 이해하던 한 때가 있었다면, 지금은 장애를 의료적 이상 상태 medical deviance로 본다. 

장애가 있는 몸을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몸, 건강하지 않으며 비정상적인 몸, 따라서 치료가 필요한 몸으로 바라본다. 53

 

이 의료적 모델은 장애인의 싸움을 순전히 그틀의 몸에 국한시킨다. 

 

장애의 사회적 모델. 

장애는 손상이 아니라 사회가 구성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손상과 장애는 구분되어야. 손상이 장애가 되는 것은 특정한 사회안에서이다. 

 

접근성 또한 어떤 인지적 특징들이 특권을 부여받고 지지받는가와 관련된 문제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특정한 몸을 상정하고 조성되었다는 것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사회가 역사적으로 누구에게 특권을 부여했으며 어떤 종류의 몸에 초점을 두고 구축되었는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 성중립적 화장실. 

 

교차성 개념. 

. 흑인여성의 딜레마, 교차성 개념은 연대를 구성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이론적 도구다. 

각주 56페이지

 

접근성. 물리적 공간 뿐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시스템과도 관계됨. 장애+빈곤+폭력의 희생자(구금, 증오범죄의 대상)

 

장애인인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거는 대신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특히 비언어사용자인 장애인이나 중증 지적장애인의 경우, 당사자 대신 그들을 잘 알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을 합당하게 여긴다. 59

 

장애의 종류+ 지역+인종+성별+계급

 

저자의 특권, 백인, 중산층, 소통에 문제가 없는 지체장애, 미국여성, 직접 고용한 활동보조인과 나의 집에서 같이 산다. 

 

장애 이데올로기가 근대 세계의 발전에 핵심이었음. 자본주의와 노동관계가 탄생하는데 장애가 수행한 역할. 특히 장애 개념은 자립, 효율, 생산성 같은 개념의 정의 수립은 물론 수요기반과 노동기반으로 대립되는 분배 체계를 정의하는데에도 기여함. 

 

장애 개념이 역사적으로 수행한 가장 강력한 역할은 차이의 범주를 정의하고 강화해온 데 있음. 장애개념은 다양한 인구집단들을 유아화함으로써, 그리고 약하고 취약하며, 지능이 떨어지고, 병에 걸리기 쉬우며, 뒤떨어지고, 돌봄이 요구된다는 식으로 규정함으로써 이들을 병리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병리화는 비장애중심주의와 긴밀히 연관된다. 

 

비장애중심주의는 약함, 신체적 정신적 비정상성, 의존 등 장애를 나타내는 징표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상태를 연상시키는 신체적 정신적 특징들은 규제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는 생물학적 자연적 결함들로 간주된다

  

이러한 장애 이데올로기는 혹인, 원주민 공동체,상류 계급의 백인 여성 등에 대한 편견에서 드러나듯, 지적 신체적 열등성을 근거로 특정 집단 전체를 장애화하는데 일조 했다. 

 

동물이라는 범주 또한 우리를 정의해온 역사와 틀을 이해하데 핵심적이다. 예전에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짐승으로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이라는 식으로 혹은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로 간주됨. 이러한 분류법은 열성, 야만성, 섹슈얼리티, 의존, 능력/장애, 신체적 정신적 차이에 대한 정의와 긴밀하게 얽혀있다. 

예, 미국원주민, 지적장애인(백치나 저능아),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이전단계에 위치한다는 주장. 

비인간화와 동물화 

 

1700년대, 린네의 종분류. 

인종적, 젠더적으로 편향된 인간 범주화와 연관됨. 

종분류 체계는 인간을 동물보다 상위에 두는 위계제에 크게 의존했고 이런 위계는 언제나 인간들 사이의 차이를 구축하는 일과 엮여 있었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동물과 인간은 오로지 생물학적이라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복잡한 범주임을 밝히는데 있다. 64

 

서구적 인식 아래에서 동물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열등한 피조물로 간주된다. 이런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세계는 인간man(즉 일부 남성들)을 위해 존재하고, 동물은 이 창조의 정점인 인간과는 완전히 별개인 모자란 존재로 정립된다. 

 

많은 사람들이 장애와 동물 모두로 부터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 거리두기를 향한 충동과 욕구에 도전해보고 싶다. 

 

비인간화된 사람들(장애인듵을 포함해)에게는 동물화에 맞서면서 자신들이 인간임을 주장해야 하는 절박한 욕구가 있다.  그 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1) 어떻게 하면 1)인간의 동물화라는 잔인한 현실과 2)동물 멸시라는 두 가지에 맞설 필요성이 양립할 수 있는지 묻는 것, 

 

(2)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의 동물성을 자각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1)  장애와 동물성은, 차이에 기반한 다른 범주들과 수많은 사회정의 문제들(빈곤, 감금, 전쟁뮨제부터 환경문제에 이르기까지)에 깊이 연루 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후순위로 치워둘 수 없으며, 장애와 동물의 문제가 다른 해방운동과 궤를 같이하지 않는다면, 비장애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는 영영 도전받지 않은 채 지속될 것이고, 지배와 억압의 체계 속에 계속 이용될 것이다. 65

 

장애학 연구자들과 운동가들, 교차적 접근에 너무 소홀했다. 

주류 동물 권리운동에서도 백인 특권과 가부장제가 유지 되는 가운데 인종, 성별, 계급문제가 소홀히 다뤼짐. 

 

트럭에 실렸던 수십 마리의 닭들을 그리면서, 나는 동물을 이용하는 산업과 특히 내 그림 속 암탉들은 사실상 모두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비장애중심주의가 장애인들을 비롯해 훨씬 많은 이들을 포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몸은 비장애중심주의 억압에 노출되어 있다. 비장애중심주의는 우리의 문화적 견해와 기치관이 구축되는데 영향을 끼친다. 

. 자립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 생산성이나 효율성을 어떻게 측정하는지

. 무엇이 정상적이고 무엇이 자연스러운지 등에 대한 통념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조사하면서 이런 가치관들이 장애인들과 비장애 신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물론, 우리와 이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는 비인간 동물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67

 

 

3.동물불구들

 

우리가 장애가 있는 몸에 대해 갖는 전제와 선입견의 뿌리는 매우 깊어. 이 인간의 비장애중심주의를 비인간 동물에게까지 투사할 정도. 

. 관절굽음증의 여우를 사살함. "죽느니만 못하다"라는 가치판단. 

. 장애동물 이야기. 감동을 주는. 

 

정애라는 말의 의미는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말을 비인간동물들 사이의 차이를 논할 때도 사용하기로 했다. 비인간 동물들은 신체적 인지적 차이를 어떻게 자기 자신과 관계 지을까? 장애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우리가 다른 동물들이 경험하는 것을 해석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리의 인간적 시각은 모즈(장애를 갖고 태어난 원숭이)의 경험을 해석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 

 

동물에 대한 우리의 많은 관념은 최적의 동물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전제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취약성이나 약함, 상호의존 같은 경험들의 가치나 자연스러움을 부정한다. 

 

동물행동학의 기존 연구들은 장애를 가진 동물들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동물 행동에 대한 통찰보다, 그 동물들이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비장애 신체를 가진 동물 개체군에 미친 영향에 주로 초점을 맞쳤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장애를 갖지 않은 개체군이 장애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야말로 비판적 검토에 가장 적합하다고 상정하는, 인간의 비장애 중심주의적 경향에 주의해야 한다. 장애를 가진 동물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커뮤니티에 기여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제시되었다. 79

 

단순히 장애에 대한 인간의 고정관념을 동물에게서 읽어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장애를 가진 동물은 적응, 창조성, 그리고 자기 성찰에 대한 중요한 물음들을 제기한다. 

 

기들여진 동물, 가축화된 동물에게 장애는 만연하다. 지독한 사육환경에서 비롯된 장애는 그들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장애에 비하면 부차적이다. 축산 동물은 신체적 극한에 이를 때까지 품종 개변을 당한다. 

 

축산 동물들을 향한 공감은 인간의 필요, 대체로 금전적인 필요에 비하면 부차적이다. ...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인간의 상황과 비슷한 것을 본다. 이를테면 공중보건에서 장애를 산업이나 사회의 비용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다. 

 

미디어는 이들 동물에게 가해지는 잔인한 조치들을 종종 다룬다. 그러나 관심의 주된 동기는 인간의 건강에 미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이다. 90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수백만 마리의 동물을 도살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 해결책은 바로 이런 밀집사육 시설들을 페쇄하는 데 있다는 점이다. 

 

동물을 이용하는 산업이 만들어낸 장애들,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우월하다고 믿는) 종차별주의와 잔인성이 낳은 장애들은 장애에 대한 나의 이해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내게 고통이라는 문제가 남았다. 

 

장애운동가와 연구자들은 장애는 고통과 다름없다는 등식에 맞서 수십 년을 싸워왔다. 많은 이들이 장애를 둘러싼 고통 대부분이 비장애중심주의, 이를 테면 장애인들이 마주하는 차별과 소외 같은 것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했다. 

 

장애운동가들이 고통의 서사를 밀어내려 했던 것과 달리 동물윤리 연구 영역에서 고통의 서사는 도처에 널려 있다. 동물운동가들은 동물도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일을 했고, 인간이 왜 이 이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역설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일을 했다. 

 

동물들은 너무 자주 목소리 없이 고통받는 존재로만 표상되었다. 장애에 대한 비판적 견지에서 이 동물들의 삶을 살펴본다면, 이 동물들을 고통 받는 존재 그 이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은 이 동물들이 지닌 취약성이나 차이가 새로운 앎과 삶의 길을 구축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더 나아가 이런 주제를 통한 사유는 장애학 연구자나 운동가들을 촉발할 수도 있다. 지금껏 그들이 소홀히 다룬 고통이라는 불편한 질문에 대해 답하고 또 그것을 진지하게 탐구하도록 말이다. 101

 

동물을 불구하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투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투사는 비인간 동물들을 비장애중심주의에 똑같이 억압받다온 주체로 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결국 장애동물만 불구로 불릴 수 있는 건 아니다. 모든 동물들은 장애인들이 당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이유로 폄하되고 학대당한다. 비장애중심주의가 영속화하고 특권을 부여한 멀정한 몸 able body이란 항상 비장애 신체 able-bodied, 또한 인간의 몸이었던 것이다. 102

 

 

2부. 동물윤리를 불구화하기

 

1. 말하는 침팬지

 

LEMSIP의 앨리와 님에 대한 대중의 항의는 침팬지 자체보다는 "인간적" 특징을 지닌 존재를 감금하는 것에 대한 항의였다. 사람들은 언어나 이성 같은 인간적 능력을 우리에서 꺼내기 위해 집회를 연 것이다. 엘리와 님은 단지 그런 능력에 수반된 존재에 불과했다. 109

 

20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 언어가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 짓는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농인들에게 사고와 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러 유산은 농인들을 동물과 유사한 존재 혹은 인간 이하의존재로 작인찍곤 했다. 109

 

19세기 진화론이 부상하자 수어는 뒤떨어진 원시언어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몸짓 언어는 당시 진화론적 관점에서 퇴행적이라고 간주되었던 '발달도가 낮은 부족', 남북 아메리카 인디언, 아프리카인 그리고 기타 인종화된 집단들과 결부되었다. 

 

미국과 유럽의 농아학교에서는 100년이 넘게 수어를 가르쳐왔지만, 1880년대에 이르자 교육현장에서 "구어주의'가 수어를 대체했다. 이런 주장에는 구어가 더 우월하고 문명화된 언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수어는 흔히 동물, 특히 원숭이나 유인원을 가리키는 은유로 묘사됨.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어떤 동물의 언어나 소통 능력이 어째서 그 동물을 대하는 방식을 바꾸게 디는가? 미국 수어를 모르는 침팬지는 외롭게 감금되고 실험당하는 삶을 선고 받는 반면, 수어를 스는 칠팬지는 어째서 해방을 촉구하는 대중적 항의를 불러일응킬 수 있는 걸까? 

 

의심의 여지 없이 부이는 수어를 배우기 이전부터 감정을 지닌 존재였다. 부이가 미국 수어를 습득한 것의 특별함은 그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갑자기 감정을 가진 지적 존재로 거듭났다는 데 있지 않다. 그건 그의 언어 사용이 인간인 우리를 그의 지적 역량 그리고 정서적 삶과 비로소 대면시켰다는 데 있다. 

 

우리는 어떻게 언어에 이렇게 높은 위상이 부여되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비인간 동물들이 소통하는 방식을 폄하한다. 인간이 정보를 공유하는 방식과, 인간과는 다른 동무를의 수많은 정보 공유 방식들 사이에 뚜렷하게 그어진 위계를 전제할 뿐 아니라, 이런 위계에 윤리적으로 중대한 의미가 있다고 여기면서. 117

 

 

5. 비장애중심주의와 동물들

 

우리는 동물윤리를 불구화해야 한다. 

동물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 장애 정치학을 적용하면서 말이다. 정말 중요한 일은 장애인과 비인간 동물 모두를 억압하는 공통의 체계와 이데올로기를 검토하는 것인데, 비장애중심주의가 언어 외의 다른 영역에서도 동물 억압을 영구적으로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장애중심주의는 종차별주의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 또한 비인간 동물들이 판단되고, 분류되고 착취되는 방식에 대해 숙고해볼 때, 비장애중심주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118

 

장애학, 장애운동은 삶의 가치를 논하는데 특정한 신체적, 정신적 역량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다. 장애 이론에 내재되어 있는 관점 중 하나는 우리에게 존엄과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지능, 이성, 민첩성, 신체적 자립, 이족보행 등과 같은 특정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장애인들이 사회에 제공할 수 잇는 대부분의 것들이, 특정한 신체들과 특정한 행동 방식을 우선하는 문화 아래에서 가치절하되거나 해로운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인간의 동물 지배에 대한 정당화는 거의 항상 인간과 동물이 가진 능력과 특징에 관한 비교에 의존했다. 우리 인간은 언어, 이성, 복합적 감정, 두 개의 다리 그리고 다른 네 손가락과 마주 볼 수 있는 엄지 손가락을 가진 종이다. 동물들은 이런 특징 및 능력을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도덕적 책임 바깥에 존재하는 셈이다. 

 

그러나 동물을 어떤 능력을 갖거나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폄하하는 것은 비장애중심주이적이지 않는가? 이런 논의는 비장애 인간 신체뿐 아니라 신경전형적 인간 지능이라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다. 

. 신경전형적 : 자폐와 신경다양성 커뮤니티에서 나온 용어로, 규범화된 인지 능력을 갖고, 종 전형적이라 간주되는 개인이나 특질을 가리킴. 신경전형주의는 전형적인 신경을 가진(자폐증이 아닌) 뇌 구조를 가진 사람들에게 특징적인 인지 과정을 특권화하는 반면, 자페 성향이 있는 인간이나 비인간 동물들에게 자연스러운 다른 형태의 인지 과정은 최소한 암묵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간주한다. 

 

신경전형주의는 일종의 비장애중심주의로, 이 개념에 대한 인식은 동물을 판단하는 우리의 방식이 얼마나 편견에 치우쳐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정당화의 논리는 동물에게는 인간이 지닌 여러 인지 능력이 부재한다는 것. 종차별주의가 얼마나 비장애중심주의적 논리를 경유해 작동하는지 여설히 드러나는 지점. 

 

인간은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신앙부터 인간이 진화의 정점이라는 믿음까지, 비장애중심주의는 우리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떠받치고 있다. 

 

열등한 야만 상태에 있는 동물은 별다른 윤리적 고려 없이 이용될 수 있따. 동물을 연상시키는 인간들(유색인종, 여성, 퀴어, 빈민 그리고 장애인 등) 또한 지적으로 모자라고, 가치가 적은 존재로, 때로는 심지어 인간 이하의 존재나 비인간으로 간주된다. 121

 

장애운동가들은 장애인이 장애에도 불구하고 가치가 잇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장애가 아루르는 체현, 인지, 경험의 다양성 자체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장애에는 결핍, 무능의 요소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다르게 알고, 존재하고, 경험하는 방식들을 양성하는 일이기도 한다. 다름에 대한,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러한 가치 부여는 장애문화를 동물 정의 관련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동물은 우리가 믿고 샆은 것보다 훨씬 더 우리와 닮았으면서도 동시에 극도로 다르기 때문이다. 

 

동물 윤리를 불구화하는 기획은, 비장애중심주의가 어느 정도로 종차별주의에 기여하는지를 밝히는 것에 더해, 비장애줌심주의가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거뮤니티에 어떤 방식으로 스려들어 있는지 검토하는 일도 수반하다. 

 

예. PETA 당신의 아이가 자폐증인가요? 캠페인. 

비건이라는 의제를 띄우기 위해 대중들이 자폐증에 대해 품고 있는 공포와 오해를 활용함. 

 

, 자기 체형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을 비건으로 만들고자 함. 

 

동물 옹호가들의 시위 구호, "목소리 없는 자들을 위한 목소리" 

부이의 예, 누가 목소리를 가졌고 가지지 못했는지를 정의하는 일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님. 

 

. 아룬 다티 로이, "목소리 없는 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침묵을 강요받았거나, 듣지 않으려 하기에 들리지 않게 된 자들이 있을 뿐이다." 

 

장애에 관한 적선의 모델에서 나타나듯, 의존적이고 취약한 자들에게도 행위 능력이나 의견이 있음을 인정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없는 타자를 돕는다는 생각이 많은 이들에게 더 매력적이므로. 의사결정 과정에서 단 한명의 장애인 대표도 포함하지 않은 장애인 지원 조직이나 자선 단체들. 

 

우리는 고의적으로 듣지 않는 선택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동물들이 자신의 해방을 구하는 운동에 참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했음을 보여주는 놀랄 만한 양의 증거가 있따. 

 

제인슨 발이벌 

 

비장애중심주의는 동물 옹호 운동에서 더 지독한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가장 일반적인 주장 중 하나는 인지 능력에 대한 비장애중심주의적 전제들로 구축되어 있다. 이 전제들은 장애인들을 수사학적으로 도구화하는 것과 짝을 이룬다. 

.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담론의 신경전형적 편견. 이성적 사고를 특권화함으로써 인간을 비인간보다 높은 지위에 놓는 것이다. 철학에서 극한의 경우를 예시하는 논증으로 알려진 것. 동물들의 정신적 역량을 특정한 인간들의 역량과 비교함으로써 동물의 권리를 용호하려고 시도함. (인간 유아나 치매환자,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 지적 장애인 등 이른바 극한의 경우로 간주되는 이들이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면 비인간 동물 또한 같은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함. 높은 지능이 비인간 동물을 차별하는 적당한 이유가 되지 못함을 밝힘) 

. 다양한 집단들을 일부 고정관념으로 환원함으로써 그들 간의 차이점들을 뭉개버리고 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문제적임. 

. 또한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도덕적 판단과 직결되어 있다'고 여긴 (이성 같은) 역량들에 대한 특권화를 내포한다. 

. 추론 역량 즉 자기의식, 언어,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 그리고 죽음을 이해하는 능력 들이 도덕적 판단과 직결되어 있다는 전제를 문제삼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탓에 이성을 가치의 척도로 옹호한다. 누가 도덕적으로 더 가치가 잇는 존재인지 밝힐 수 있음을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것. 더 가치 있는 존재란 바로 도덕적 판단과 직결되어 있는 능력을 가진 이성적인 인간일 것. 

. 논쟁에서 거의 항상 배제된 동물에게는 약간의 이점을 주지만(최소한 고려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지적 장애인의 입장에서는 그저 위험에 노출될 뿐이다. 

. 이 주장은 지적 장애인을 동물과 대립하게 만드는, 불행한 효과를 낳는다. 동물들의 지위가 격하된다면 지적 장애인의 지위 역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하기 때문. 장애인들의 삶의 가치가 의문에 붙여지기 때문. 

. 종차별에 반대하고 비인간 동물의 도덕적 지위를 정의하기 위해 지적 장애인의 사례를 굳이 언급해야 하는가? 

 

동물과 지적장애인을 비교하는 주장들은 특정한 '도덕적 판단과 직결된" 신경전형적인 인간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두 집단 모두에게 해롭다는 더욱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모든 종들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지적 장애인을 돌보기 때문에 동물도 돌봐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해선 안된다. 이런 사고 노선은 비장애중심주의적이고 인간중심적이다. 그것은 도덕 가치의 척도로 인간을 중심에 놓은 일이며 암묵적으로 지적 장애의 가치를 폄하하고 그 다양성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신경전형적인 인간 역량을 지닌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본질적으로 더 가치 있는 존재들이라는 견해를 반박해야 한다. 139

 

대안적 논의들, 

페미니스트 동물 연구자들. 캐서린 베일리

" 이성이 먼저 생겨나 자신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철학에서 정의된 이성은 오히려 여성적이거나 신체적이라고 간주된 속성들을 부정하고 파기한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141

 

이성의 결여 되어 있다는 이유로 동물들의 인격, 즉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죽임당하지 않을 권리와 공감받을 필요성까지 부인하는 행위들이 정당화된다. 

 

문제는 이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감정, 감각 그리고 인식하고 존재하는 다른 방식들과 분리된 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격상되는 데 있다. 이성에 대한 이런 정의는 가부장제, 제국주의, 인종주의, 계급주의, 비장애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의 역사에서 비롯되며, 이러한 형태의 억압들을 내포하고 있다. 

 

피터 싱어, 다운증후군 아이에게 "우리가 기대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의 단언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없는지를 선언해온 과학, 의학, 철학 전문가들의 오랜 전통의 뒤를 잇는다. 이런 낮은 기대치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의미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주로 평생에 걸친 시설 감금과 차별이었다. ... 아무런 자극도 없고 대로는 학대하기까지하는 시설 환경이야말로 이들에 대한 기대치와 아이들의 아이큐를 낮쳤으며 기대 수명 또한 단축시켰다. 

 

지적 능력에 기반한 차별의 예들. 

인지 능력을 인간 존재 가치의 지표롤 삼는 데서 비롯함. 

 

지적 열등함은 항상 동물화되고 비인간화되었다. 

 

지적 장애가 이렇게 쉽게 동물화된 이유는 오랫동안 동물들 자체를 지적으로 뒤떨어진 존재로 간주해온 데 있다. 

 

인지 능력은 비인간 동물의 가치를 나타내는 지표로 널리 수용되었다. 돼지가 적어도 개만큼 '지적'이라는 이유로 먹지 않는 사람들도 닭이나 생선은 죄책감 없이 먹는다. 

 

신경전형적 인간에 가치를 부여한 지능 측정법들은 다른 종류의 동물 지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인간과 다른 동물 종 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내는 일이 매우 가치 잇는 일이라고 해도,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이 유사성들(우리가 어떻게 동일한 일반 유형의 지능이나 인지적 기술, 동일한 민감성과 취약성, 동일한 정서적 반응들을 공유하는지)일 때, 우리는 타자의 삶에서 명백히 가치 있는 면모들을 모호하게 만들거나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로리 그루엔)

 

유사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가 여전히 가치관의 위계도 즉 인간 능력이야말로 가치를 부여할 만한 유일한 것이라는 생각을 조장하고 있는 것. "타자를 끌어안는 관대한 포용이라는 우리의 사유는 결국 배제시킬 또 다른 타자'를 불가피하게 찾아내는 식으로 이분법을 재구축하게 될 것이다" (로리 그루엔)

 

세계를 냄새를 통해 지각하거나 몸에서 빛을 발하며 소통하는 생물체는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할까? 극도로 복잡한 이주를 하거나 바다 깊숙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지능이 필요할까? 우리는 지구상에서 발견된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능력을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한 셈이고, 인간의 능력은 그 다양한 능력들 중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있지만 우리는 갖지 못한 지능과 역량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인간중심적인 세계관 탓에 우리로서는 우리 자신의 것 너머에 있는 지능과 경험을 상상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타자의 삶을 이해하고 그 삶에서 무언가 배우려는 시도를 멈춰선 안된다. 155

 

우리에게 그 능력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생명체들, 이를 테면 곤충, 식물, 연체동물, 미생물들은 어떨까?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네트워크에 대해서는? 그들도 이해관게를 가질까? 강이나 산에 대해서도 정의를 주장할 수 있을까? 

 

동물 옹호가들은 괘고감수능력을 이해관계를 가진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를 나누는 경계선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유기체들이 반드시 도달해야 할 또 다른 골대 즉 위계와 비장애중심주의적 시험대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고통받는 개별 동물을 윤리적으로 대하는 것은 강의 오염이나 미생물의 다양성 상실에 윤리적으로 대처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정의의 형태는 각양각색의 존재 만큼이나 모두 다른 듯하다. 155

 

실제로 그 어떤 존재에게도 아직 최종 선고가 내려지지 않았을 수 있다. 언제나 새로운 과학적 사실이 발견되어왔고, 지식은 증가하며, 이해는 깊어지기 때문. 

 

과학자들은 식물이 감정을 느낀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식물의 지능에 관심을 가지고 식물이 전지적, 화학적 신호를 통해 소통하는 방식들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어쩌면 중추신경계에 의거한 감각은 의식의 한 종류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런 주제들이 이미 삶을 경험하고 느끼는 존재들에 대해 우리가 가하는 착취, 상품화, 살해를 변명하기 위해 제기되지는 않을지 우려한다. 특히 그런 주제가 지금 동물들의 삶에서 이윤을 취하고 있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산업들이 초래한 윤리적 문제의 본질을 흐리지는 않을지 더욱 염려하게 된다. 

 

우리는 식물이나 굴이 고통을 느끼거나 정서적 삶을 사는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개, 소, 물고기, 닭이 고통을 느끼고 정서적 삶을 산다는 것은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인간 동물을 포함해) 동물들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환경도 번성해야 하며, 이는 동물들을 위한 투쟁이 더 넗게는 환경을 위한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임을 잘 알고 있다. 

 

쾌고감수능력 그리고 지구상에 매우 다양하고 신비한 생명체 및 비생명체들은 다양한 능력과 그 능력에서 비롯된 다양한 종류의 책임들을 섬세하게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인간의 분석과 필요에 맞게 손쉽게 범주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산산조각 내는 질문들, 

이 책에서 '동물'에 대해 논할 때, 여기서 말하는 동물이란 무엇이고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이에 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다. '동물'에 대한 나의 정의를 넗게 열어두고자 한다. 우리의 환경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은 우리가 수립한 제한적인 정의를 완고하게 거부하기 때문이다.



6. 동물이란 무엇인가?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되풀이하자면,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제게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들을 모방한 것은 출구를 찾고자 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종차별주의란 160

인간이 다른 모든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신념. 

 

서구 전통에서 종차별주의는 우리의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가치 그리고 인간성에 관한 우리 자신이 서사 안에 침투해 있다. 이뿐만 아니라 종차별주의는 우리 인간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대하는 방식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빨간 페터 혹은 실제로 존재했던 부이는 복잡하고, 감정이 있고 지능을 가지 존재였지만, 그럼에도 종차별주의는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가 그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동물인가? 아니, 그 전에 동물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동물이지만 동물이 아니다라고, 양쪽 모두는 원하는 것 같다. 

 

플라톤 이래로 직립 자세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특성으로 간주됨. 우리의 불멸의 영혼이 천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신체는 위쪽으로 하늘을 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164

 

찰스 다윈도 자세를 인간의 표지로 사용했다. '백치'가 본질적으로 동물 같은 진화적 유물임을 증명하기 위해 다윈이 제시한 특징들 중 하나는 백치가 네발로 걷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따. 

 

이족보행에 대해 다윈이 가졋던 관심은 20세기 중반 인류학자들이 화석의 기록에서 초기 인류의 모습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증거로 커다란 뇌를 비롯해 높이 평가받는 다른 인간적 특징들 대신 직립 자세를 택했을 때 되살아났다. 직립자세는 일간의 도구 사용 및 문화가 발전을 이룩할 수 있도록 했다. 

 

 

진화의 정점은 단지 인간이 아니라 비장애 신체를 가진 백인 남성인 것. 167

 

유인원과 혜택받지 못한 인구 집단을 어떻게 범주화할지를 둘러싸고 300년 가까이 지속된 논쟁이 보여주듯, 동물을 어떤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특징들과 연결 짓는 것은 불가피하게 인종이나 장애 같은 인간 내부의 차이를 가리키는 범주들과 연결된다. 즉 '동물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성해온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둘러싸고 항상 바뀌어온 관졈들이며, 이러한 관념들을 구축해온 것은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과학적, 경제적 요인들 그리고 뼛속 깊은 편견들이다. 

 

자크 데리다, "동물이란 하나의 말이다. 그것은 인간/남성이 만들어낸 호명이고, 그는 다른 생명에게 이름을 부여할 권리와 권위를 스스로에게 준 것이다." 

 

창세기, 명명과 지배가 같은 순간에 발생하는 양상. 

 

동물을 명명하는 일은 '인간/남성'이 계속 해나갈 일이된다. 동물 특히 동물 범주를 명명하는 일은 서구 사상에서 계속 진행되었다. 

 

자연이란 과연 질서가 있는지라는 물음과, 이와 연관된 또 다른 물음, 즉 이 질서에 어떻게 인간을 위치시킬 것인가라는 물음을 불러 일으켰다. 

 

신기한 생명체를 전시하는 일. 

인종과 성, 장애, 종이라는 범주들은 명명과 전시를 통해 관리되고 확보되었다. 이 "신기한 생명체들"이 인간과 동물이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범주로 나눠진 것은 과학과 철학 담론 그리고 분류학의 도움을 받아 수백 년에 걸쳐 매우 천천히 일어난 일이다. 

 

서구 사상의 중심으로 간주된 교회는 지식생산에 대한 권위를 행사했고, 자연에 대한 이해와 자연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조장했다. 이를테면 인간은 짐승보다 천사에 더 가깝다는 식이다. 교회 권력은 새로 등장한 자연철학과 과학에 길을 내주게 된다. 

 

아프리카 신계계 탐험, 기괴한 인종과 태생이 가장 많이 발견된다고, 그런 인종들이나 생리적 특징들이 악마, 괴물, 동물로 분류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 많은 논쟁들의 주제였다. 

 

수백년이 지난 후에는 이 기형의 존재들을 새로운 곳에서 찾아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사이드 쇼에서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태어난 지적장애인들을 비서구 혈통을 가진 이들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위계적 분류체계

중세의 자연체계, 존재의 대사슬

린네의 , 인간은 천사와 동물 사이에 위치하는데, 천사와는 이성과 지성을 나눠 갖고, 동물과는 몸과 감각을 나눠 갖는다. 이성은 신이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기 위해 인간에게 부여한 선물로 간주됨. 

 

17세기 데카르트, 이성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 

 

18세기 린네, 에서 새로이 고안해낸 포유류라는 분류에 인간을 포함시킴으로써 인간을 동물계에 확고하게 위치시킴. 이는 자연학자들을 분노하게 만듬. 게다가 인간을 자신이 고안한 또 하나의 범주인 영장류에 넣었는데, 여기에는 유인원, 원숭이, 나무늘보도 포함됨. 

 

린네의 체계는 인간적 차이의 분류를 둘러싼 인종화되고 성별화된 논쟁들을 기저에 깔고 있다. 포유류라는 용어는 분명 여성적 특징인 젓가슴을 통해 인간을 동물과 연결한 것으로, 여기서 젓가슴은 고도로 인종화된 것이엇다. 반면 린네의 용어 호모 사피엔스는 "지혜로운 인간/남자"를 뜻하는데, 이는 거의 전적으로 백인 남성에 귀속되는 특징인 이성을 통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설령 인간이 천사에서 끌어내려져 짐승과 함께하게 되더라도, 인간적 차이를 구성하는 일은 인간의 어떤 측면이 동물과 비슷하고(여성적인 것과 비백인적인 것), 어떤 것이 여전히 확고하게 인간에게 고유하고 인간의 우월함을 부여주는지(백인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를 묘사하는데 필수였다. 

 

자연의 질서에서 인간의 자리는 19세기 다윈의 사상과 진화론이 대두하며 더둑더 공고해진다. 종이란 똑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 지금껏 존재한 모든 식물과 동물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선언함. 

 

존재의 대사슬은 다윈과 함께 살아진 것이 아니었따. 마찬가지로 분류학적 진리를 찾으려는 욕망(종들 사이의 뚜렷한 경계를 찾기 위해 유전학에 주목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이성에 대한 숭배, 존재들 사이의 위계를 만들어 내려는 충동, 직립 이족보행에 대한 집착 등도 사라지지 않았다. 

 

장애운동가 안나 스토늄이 <진화의 행진>을 변형해 만든 이미지. 

 

스토늄의 그림은 인간중심적이며, 결코 동물을 복원하지는 않는다. 마지막 형상은 분명 인간이다. 인간은 직립할 수는 없지만 유인원 같은 자세에서는 벗어낫다. 

 

만약 마지막 형상이 동물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구부정한 자세로 휠체어에 앉아 있다면?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 흐려졌다면? 인간과 동물 모두를 해방하는 길이 있을까? 

 

지금까지 보아온 하나의 계보(연결된 역사)를 공유하며, 이 계보는 정체성과 종을 뛰어넘어 새로운 연대의 공간을 열 것이다. 위계적 분류와 그런 분류가 정당화한 억압적 역사에 저항하는 연대 말이다. 

 

인간 또한 동물임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고, 인간을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로 제시하는 종차별주의와 위계적 분류라는 유산이 인간을 향한 극심한 편견을 일부 만들어냈음을 상기한다면 어떨까? 이 다양한 피조물들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때는 우리 모두를 위한 더 정확한 이름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178

 

 

7장. 침팬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부이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빨간 페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이가 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했을 가능성 말이다. 우리가 그 만남에서 부이가 느꼈을 수 있었을 어떤 것과 시도하려 했을 어떤 것의 가능성을 더 확장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따. ... 인간을 모방하는 게 부이에게 기쁜일이 아니었다면 어떨까? 그가 그렇게 한 이유가 탈출을 위해서였을 뿐이라면? 182

 

 

3부. 나는 동물이다

 

8장. 원숭이처럼 걷는 아이

 

9장. 동물 모욕

 

장애인을 동물과 비교하고 동물처럼 다룬 역사적 사례 중 19-20세기 초반 미국과 유럽의 사이드 쇼처럼 염치 없고 뻔뻔하고 노골적인 예는 어디에도 없을 것. 궁정의 기형쇼를 대중화한 것.

 

과학적 인종주의, 제국주의적 팽창, 식민지화 그리고 장애에 대한 공포를 정당화하기도 함. 

 

"세계에서 가장 못생긴 여성" 줄리아 파스트라나, 

 

소비되기 위한 스텍터클과 유사과학적 "교육용" 전시의 결합이 어떻게 유색인종 착취와 동물화를 통한 이상 신체 deviant bodies의 의료화를 영구적으로 지속시키는 데 기여하는지는 보여주는 가장 끔직한 사례. 

. 그녀는 곰과 오랑우탄에 가까운 특징들을 가졌다는 이유로 '준인간으로서' 전시되었다고 함.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모두 동등하게 그리고 동일한 방식으로 동물화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동물과의 비교는 모욕 그 이상이다. 이때 이들은 인격 상실의 위험에 처한다. 

 

피터싱어의 논증이 있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은 지적장애를 동물성의 패러다임에서 바라보았다. "정신지체를 가진 사람들은 더위나 추위에 둔감하고 그렇기 때문에 겨울에도 난방할 필요가 없다는 역사 속 믿음. 불과 수십년 전가지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인간 이하 sub-humans라고 할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살았다. 

 

동물화는 장애인을 분리하고 감독하기 위한 도구로도 쓰였다. 1860년 ~1970년 "보기 안 좋거나, 흉한 사람들이 특정한 공공장소에 있는 것 자체를 불법화했던 공공미화법.ugly laws

. 빈곤, 계급, 인종, 민족성, 동물성 뿐 아니라 장애에 대한 불안.

"질병을 퍼뜨릴 수도 있고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의 손을 깨물 수도 있는 보기 흉한 거지들의 위험은 동물 관리의 문제로 묘사되곤 했다" 

 

장애인이 기거나 네발로 걸으며 움직이는 방식.

거칠고 새된 소리를 내거나 이상한 소음을 내거나 울부짓듯 하며 목소리를 내는 방식

아무 때나 긴장이 풀리면서 몸에 대한 통제를 잃는 방식

개처럼 먹음으로써 사회적 예의 범절에서 벗어나는 방식

두 발로 곳곳이 서지 못하는 방식 등

이 모든 것들이 장애란 '다루기 힘들고' '짐승 같고' 동물같은' 존재 상태라는 인식을 확인하는 데 사용되었다. 

 

질문: 

. 과연 자기 자신이 동물임을 자처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동물화라는 잔혹한 현실을 비판할 수 있을까? 

. 이런 역사를 알고 난후에도 내가 동물임을 자처할 수 있을까?

. 동물화가 사람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폭력을 가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도 종차별주의가 다른 종들에게 가한 폭력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동물과 비교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강도 놓은 모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가 동물들에게는 주체적이며 정서적인 삶, 즉 우리로 하여금 책임감을 갖고 대하게 만드는 종류의 삶이 결여되어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사이드쇼와 근대의 동물원은 모두 인간과 동물을 전시하는 다양한 스펙터클을 위한 수단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던 19세기에 등장했다. 이동식 동물원, 서커스, 박물관, 만국박람회, 놀이공원, 민족지적 전시와 인간 동물원 등. 196

 

Eric Baratay and Elisabeth Hardouin-Fugier <동물원: 서구의 동물학적 정원사>

 

동물들이 인간의 손에 끔직한 폭력을 당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폭력은 흔히 인간들이 서로에게 휘둘러 온 폭력과 같은 계보를 공유한다. 

 

동물임을 자체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동물화와 종차별주의의 폭력에 저항하는 방식일수도 있다면 어떨가? 즉 동물해방이 우리 자신의 해방과 얽혀 있음을 인식하는 방식이라면? 

 

 

동물성 주장에 대한 칼슨의 경고, 

어떤 사람들의 동물성이 강조되고 착취되었는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그저 개략적인 수준에서 '동물성'을 다시 주장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동물성이 아니라 인간성 자체가 다시 주장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동물성을 다시 주장할 수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과 동물성 모두를 어떻게 긍정할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비 인간 동물과 부정적인 방식으로 비교당한 우리가 어떻게 인간의 우월성을 암시하거나 우리 자신의 동물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확고히 할 수 있을까? 

 

 

10장. 동물임을 주장하기

 

확실히 억압과 강제가 다양한 형태(그중 하나는 장애인들에게 이를 대체할 만한 다른 직업을 가질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를 취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프릭(185)이 착취당했다고 상정하는 것은 너무 단순화된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동물과의 비교가 모두 모욕적이었다거나 모욕적이라고 상정하는 것에도 문제가 잇지 않을까? 어떤 공연가들은 자신에게 붙은 동물 이름을 즐겼을 수도 있지 않을까? 

 

동물은 장애 문화에서 새로운 자리를 획득하고 있는 듯하다.

장애문화에 동물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듯. 

 

장애학자들은 동물성 문제를 에세이와 책, 학회에서 다루기 시작하고 있다. 특히 에코-어빌리티 운동의 사례는 흥미로운데, 동물과 장애인 그리고 환경에 가해지는 억압들 사이의 연관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신경다양성 커뮤니티의 연구자들 또한 길을 개척하는 중이다. 그들은 동물과 신경다양성을 가진 정신 간의 관계에 대한 논쟁적인 문제와 적극적으로 씨름하고 있는 동시에, 우리가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동물"이라는 단어를 주장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동물이 불구일 수 있다면 불구는 동물일 수 있을까? 

 

공적인 장소에서 손 대신 입을 쓸 때 나는 내가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비장애 신체의 에티켓뿐 아니라 사람이 몸에 어떤 방식으로 깃들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우리는 말하기 위해 먹기 위해 입을 쓴다. 하지만 입은 세균과 입깁, 침이 있는 구멍이며, 매우 개인적인 곳이다. 입은 성적이다. 입은 동물적이다. 

 

그러나 손은 인간적이다. 인간의 손은 우리의 뇌가 크다는 증거로 언급된다. 손으로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게 되면서 인간 문화가 탄생할 수 있는 문이 열리기도 했다. 손은 우리 신체의 민첩성을 대표하고, 다른 종과의 분리를 나타내는 징표이다. 

 

나는 내 형상 속에서 동물을 느낀다. 이 느낌은 교감의 일종이지 수치심이 아니다. 나의 동물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내 몸이나 다른 비규범적이고 상처 입기 쉬운 몸들이 자신의 주변 세계를 움직이고, 보고, 경험하는 방식으로 존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동물화된 부위와 움직임에 대한 주장이고, 내 동물성이 내 인간성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동물성이 인간성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209

 

나는 나의 뿌리, 나의 유산 그리고 내가 집이라고 부르는 불구 커뮤니티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동물을 생각한다. 

코로 탐색하는 돼지들, 부리로 둥지를 만드는 새들, 다른 동물들처럼 잠자리를 만드는 걸 좋아하는 내 강아지 베일리를. ... 베일리가 이렇게 하는 걸 보면서 나는 내가 그의 움직임을 온몸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우리가 비슷한 몸짓을 공유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며, 어쩌면 미각, 시각, 후각 등의 비슷한 감각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종이 다름으로 인해 생기는 감각기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모두 동물이다. 210

 

 

4부. 자연 그대로

 

11장. 천생 프릭

 

선천적 다발성 관절굽음증 

신생아 3,000명 중 한명 꼴로.

매일 관절굽음증을 갖고 태어나는 염소, 개, 소, 쥐, 두꺼비, 여우 등,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흔히 발견됨. 

 

수술을 받지 않았다면 내 몸은 더 자연스러웠을까? 애초에 자연스럽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내 장애의 원인은 내가 태어난 마을의 미군기지가 유발한 오염이었다. 내 몸은 독성 화학물질, 중금속, 비행기 탈지제, 다시 말해 군대의 일상적 폐기물의 도움을 받아 말들어진 것이다. 

 

나는 태아일 때 이미 사회, 문화 그리고 "인공적" 산물들에 의해 변형되었다. 이것들이 나를 부자연스럽게 만들 걸까? 

 

나는 내 몸이 인간의 개입과 불가분하다고 본다. 그렇지않은 몸이 과연 있을까? 나는 우리가 자연을 결코 우리 자신의 관점을 초월해서 볼 수 없다는 점을 좀더 중요하게 언급하고 싶다. 

 

우리는 "자연"이라고 불리는 것과 그것을 인지하는 인간의 감각을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다. 내가 상상하는 수술 이전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수술 이후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혹독했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조차, 어떻게 해야 몸이 더 자연스러워보이고, 어떻게 몸을 움직여야 하고, 몸이 어떤 식으로 공간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제에 단단히 매어 있다. 내 판단의 근거로 작용하는 이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 상태"라는 관념, 즉 인간의 문화가 존재하기 전의 자연 혹은 인간의 문화가 부재하는 자연이라는 관념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개념은 우리가 어떤 몸을 살기 적합한 것 livable 혹은 즐길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지, 또한 어떤 몸들을 착취하고 소비하고 먹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관해 논하는 우리의 철학이론, 정치체계 그리고 견해들을 구축했다. 216

 

 

 

12장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몇몇 동물은 더 평등하다

 

1975년 피터 싱어, <동물해방>

 

장애 거뮤니티 사람들 대부분이 이 남자를 혐오한다는 사실을 알게됨. 

 

Not Dead Yet(조력자살을 장애 차별의 한 형태로 보고 반대하는 장애 권리 운동 단체)

 

싱어, 어떤 장애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해야 하며, 인지 능력을 결여한 일부 중증 지적장애인이 완전한 인격체 full person가 아니라고 주장함.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것과 관련해, 자주 그 삶의 질을 문제적인 방식으로 판단했다. 그가 말하려는 바는 장애인들의 삶의 질이 낮다는 것, 즉 장애를 가진 삶은 비장애 신체를 가진 삶 만큼 만족스럽고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싱어의 작업은 수많은 장애운동가들에게 싱어뿐 아니라 동물 권리 운동 일반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동물의 권리와 장애에 대한 권리가 거의 항상 대립한 것은 분명 싱어 때문이다. 장애해방과 동물해방의 교차점을 다루는 모든 책은 싱어의 작업과 씨름해야만 한다. 동물의 권리와 장애에 대한 권리라는 두 영역이 양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장애를 둘러싼 싱어의 관점에 관한 실마리는 공리주의에 대한 그의 헌신에서 찾을 수 있다. 

* 공리주의 : 어떻게 하면 "고통"을 최소화하고 "고통없음"을 최대화할 수 있는지 혹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관심을 둠. 

 

장애가 부정적인 것으로, 비극으로 결여로 비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왜 장애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기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되는지 이해할 수 있어. 

 

"고통" 혹은 "고통없음"이라는 공리주의의 이분법은 장애학과 장애운동에서 싱어(공리주의)가 수용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싱어의 "평등한 고려" 

평등한 고려란 동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릴 때 우리가 동물의 감정(그들의 이해관계)을 고려해야 한다는 요구다. 

 

평등한 고려가 쾌고감수능력에 근거한다고 주장함. 왜냐하면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능력은 이해관계를 갖기 위한 선결조건, 즉 우리가 의미 있는 방식으로 이해관계를 말하기 전에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기 때문이다. 쾌고감수능력이 있는 동물들의 이해관계를 인정해야 하며 인간의 이익때문에 동물이 겪는 고통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결론내림. 

 

그러나 싱어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가 동물을 죽이는 것이 항상 나쁘다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동물에게 가해지는 고통인 것. 

 

싱어는 쾌고감수능력에서 논의를 끝내지 않는다. 그럴 경우 닭을 죽이는 것은 인간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나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싱어에 따르면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해관계의 위계가 도입된다. 

 

싱어는 생명의 서로 다른 두 종류 즉 인격체person와 비인격체nonperson(인간과 비인간이 아니라)로 구분한다. 싱어는 느끼고 추론하는 능력, 자기의식과 자율성,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으로 인격을 정의하고서, 이 정의상 인격이 아닌 인간(예.혼수상태에 있는 사람)과 인격인 비인간(양장류, 잠재적으로 모든 포유류)의 경우를 찾아냄. 어떤 존재가 인지적으로 복잡하면 복잡할수록(이러한 복잡성은 죽음을 이해하는지, 시간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는지를 통해 측정됨), 자신의 생명을 지켜나가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할 것이라고 주장함. 

 

이 틀 안에서 신경전형적 인간을 죽이는 것은 닭을 죽이는 것보다 나쁜 일이 되는데, 이는 인간이 죽음에 대해 알고 시간을 통해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이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단지 다음번 식사나 성적 상대를 찾는 것을 넘어, 미래의 목표와 계획을 갖는다. 인간의 죽음은, 그녀/그가 자신의 미완의 꿈을 상실했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부당한 것이 된다. 

 

인지적 능력은 쾌고감수능력 보다 고통과 관련한 평등한 고려라는 원칙에서는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하지만, 죽임에 관해서는 확실히 한몫을 한다. 

 

결국, 인지적 능력을 갖지 못한 존재를 고통없이 죽일 수만 있다면 그것이 인지적 능력을 가진 존재를 죽이는 것만큼 나쁘지  않다는 결론으로 이어짐. 그렇게 함으로써 초래되는 행복이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초래되는 불행을 능가하는 한에서 말이다. 

 

어떤 존재의 신체가 고기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다면 혹은 어떤 존재가 계속 살아가는 것보다는 평화롭게 죽는 것이 그이 가족을 더 행복하게 한다면, 이런 요인들은 그 존재를 죽이는 것이 초래할 해로움과 견주어 고려되어야 한다. 

 

해당 존재에게 쾌고감수능력은 있지만 자신이 묘사하는 인격의 속성들이 전혀 없을 경우, 그를 고통없이 단번에 죽이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 존재가 비인간 동물인 경우, 이런 주장들은 널리 수용된다. 

 

완전한 인격체가 아닌 동물들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동일한 것을 완전한 인격체라고 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도 기꺼이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싱어가 비인격체를 죽이는 것이 언제나 괜찮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다만 비인격체를 죽이는 것이 인격체를 죽이는 것보다 "덜 나쁘다"고 말함. 그것이 고통없이 행해지며, 불행보다는 행복을 더 많이 가져오는 한에서 말이다. 226

 

(비판)

그는 쾌고감수능력에 초점을 맞췄지만 결국 그는 인격의 판단 기준으로서 이성을 왕좌에 앉혔다. 완전한 인격을 가진 삶이 비인격적 삶보다 가치 있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비인격적 삶은 죽으면 좌절될 욕망이나 이해관계 자체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특정 역량을 갖지 못한 동물에게 분명 부정적 귀결을 초해함. 또한 지적장애인게도 명백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침. 

 

물음: 

1) 싱어가 콕 짚어 말하는 역량들은 계속 살아가고자 하는 어떤 존재의 이해관계를 판단하기에 적절한가? 

2) 누가 특정역량을 가졌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분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2) 

싱어가 장애를 다루는데 있어 시급한 문제는, 장애를 의료모델에 입각해서만 이해한다는 점. 

의료모델에서 장애는 부정적인 것, 개입이 필요하고 피해야할 생물학적 결점으로 간주됨. 

 

싱어가 자신이 논하는 장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 의료적 진단만으로

어떤 장애인이 갖고 있거나 갖게 될 능력과 삶의 질을 예측할 수 있다고 매번 상정함. 위에 열거된 장애들은 각기 매우 다르며, 같은 장애라도 그 편차가 매우 크다. 

일부 제한된 사례들에서 유아 살해를 지지하기도 했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나 경험 대신 가설적 상황이나 "다른 조건이 모두 같다는 가정 아래"라는 구절도 이용함. 싱어의 수사가 우리를 현실의 삶에서 빼낸다는 점이다. 싱어가 가정하는 절대성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 

"중증" 같은 말의 사용법. 여기서 무엇이 "중증"이라는 범주를 정의하는 것이낙? 중증으로 간주되는 것을 정하는 이는 누구인가? 철학적이고 의학적인 틀에서 '중증 장애"에 관해 전제되는 것은 발람직하지 않음, 자명한 비극, 잠재적 인격 결여 등이다. 

 

1) 싱어의 가치 체계 바깥에 있는 존재 방식이나 경험 방식 또한 인격을 부여받을 만하다고 본다면 어떨까? 싱어에 따르면, 인격체의 핵심 요소인 미래에 대한 시간 감각이라는 것은 바로 다음 식사나 성적 대상을 찾을 수 있을 정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인가? 

 

월동을 준비하는 동물들은 어떤가? 출산을 앞두고 집을 짓거나 음식물을 모으는 동물들은? 아니면 "중증" 지적장애가 있는 사람이 즐거음을 선사하는 감각을 기대하는 것은 어떤가? 

 

지성과 감성의 복잡성은 무수히 많은 형태를 취한다. 미래와 죽음에 관한 특정 개념만이 그 개체에게 삶의 가치를 부여하는 역량이 될 수 잇다는 생각은 매우 주제넘은 것. 쾌고감수능력을 가진 피조물이 살아 있음과 죽어감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나? 우리는 다양한 동물들이 죽지 않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다는 것을 안다. 거기에는 스스로에게 극도의 통증을 유발하는 행동도 포함된다. 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게 분명하다. 231

 

"불구의 시간crip time" 

 우리가 서로 다른 속도로 살고 있고 우리의 시간 감각이 경험과 능력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 시간은 상대적이다. "나는 삶을 슬로우 모션으로 살고 있다. ... 장애는 속도 조절 그리고 진전에 대한 다른 감각을 조성하며, 때로는 수명에 대해서도 다른 감각을 조성한다.... 극심한 지적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나 매우 다양한 동물들의 시간은 어떻게 다시 개념화될 수 있을까?

 

불구의 시간에서 우리가 동물의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도약하기는 쉽다. 

 

싱어의 시간 개념은 진보와 미래 지향적인 목적이라는 서구적 통념에 기초하는 반면, 불구의 시간이라는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이란 가변적이며 실제로 우리의 신체 형태와 함께 바뀌고 있다고 문제제기 하도록 함. 

 

싱어와 다른 철학자들이 인격의 한 선결조건으로 믿는 역량들은 주관적이며 비장애중심주의적이고, 신경전형적이고, 종차별적인 틀에 박혀 있다. 

 

인격에 대한 제한된 정의를 벗어나면 우리는 어디에 이르게 될까? 나는 인간예외주의의 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지적장애인과 비인간 동물이 가치를 떨어뜨리는 인격 이론을 받아들이기 보다 이런 불편한 질문들을 답하지 않은 채 남겨두겠다. 

 

서로 다른 삶들의 가치를 대립시키도록 강요당하는 것은, 위계의 철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다. 이에 맞서, 나는 동물의 삶과 인간(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의 삶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잘못된 이분법임을 이해하는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창조해나갈 수 있을지 묻고 싶다. 233

 

왜 알약을 쓰지 않겠다는 것인지 좀 더 이야기 해주세요(피너 싱어가 저자에게 묻다.)

 

장애는 이 세계와 소통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알려줍니다. 몸의 모든 측면이 미리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아주 해방적인 일이예요.

 

우리가 장애와 함게 살아가고 있다는 뜻. 

 

"장애는 용감한 고투나 역경과 마주하는 용기 같은 것이 아니다.... 장애는 예술이다. 그것은 삶을 사는 독창적인 방식이다"(닐 마커스) 

 

마커스의 말은 장애가 단순히 결핍이라는 생각에 저항한다. 게다가 그의 말은 우리가 효율성, 진보, 자립, 이성을 받드시 중심에 두지 않는 삶의 방식들에서 가치를 찾도록 촉구한다. 

 

"자신이 겪는 장애를 환영하고 그것을 욕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 수 있는가?"(로버트 맥루어)

이러한 정서는 우리가 공간 안에서 움직이고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대안적인 방식들에 깃든 관능성, 예측불가능성, 그리고 아름다운 잠재력을 보도록 자극한다. 장애는 해방적일 수도 있고, 신나는 일일 수도 있으며, 우리에게 정상적이기를 요구하는 사회의 지속적인 공세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유의 장소일 수도 있다. 

 

* 삶의 질과 고통이란 주제

. 이에 관한 생각들은 사람들이 장애를 이해하는 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싱어, 장애=고통 

싱어, 의학 전문가들이 장애에 관해 가질 수 있는 편견을 간과함. 

어느 정도 괜찮은 수준의 삶의 질이란 정확히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결정하는가? (지적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신장이식을 거부당한 아이) 

의사와 신학자 그리고 장애아 부모들은 종종 삶의 질에 관한 문제에 대해 장애인들 본인과는 매우 다른 답변을 한다. 

 

싱어가 주장을 펼치는 방식을 문제삼는 것. 

. 장애에 관한 고정관념을 수사적으로 이용하는 것

. 고통에 관해 추정하는 것

. 인격을 정의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이성을 떠받다는 것. 

 

삶의 질이라는 표현, 이것이 장애인들의 죽음을 너무나 자주 비장애중심주의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와 연결된다. 비장애인들이 휠체어, 배뇨관, 용변보조, 감소된 지적 능력, 일반적인 자립성 결핍 등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의 말은 상상에 기초한 것이지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다. 

 

돌봄을 제공할 사람을 선택할 수 있고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잇다면 그런 내밀한 돌봄은 삶의 질에 훨씬 더 다채로운 영향을 미칠 것이다. 244

 

삶의 질을 말할 때 중요한 점은 이 주제들을 충분히 신중하게, 개개인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싱어가 동물의 고통을 묘사하면서 동물들의 안락사가 아닌 해방을 호소한다면, 왜 그는 유아들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사회적 변화를 주장하지 않고 유아들이 삶에서 겪을 고통을 확신하며 유아들을 죽이는 일을 옹호하는가?"

 

* 강제적 비장애 신체성 체계.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비장애 신체에 들어맞지 않는 신체를 모두 '장애'로 낙인찍는 시스템. (비고. 강제적 이성애) 진정한 이성애 혹은 비장애 신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라도 추구되어야 할 이상으로 제시되는 이성애 혹은 비장애 신체가 끊임없이 '퀴어' 나 '장애'라 불리는 신체를 만들어낼 따름이다. 

 

장애의 부정성은 집단적 주체성으로 깊숙히 침투했다. 

 

고통, 슬픔, 상실

장애학 연구자와 운동가들은 비극이나 고통에 관한 고정관념들을 떨치기 위해 적잖은 힘을 쏟았다. 이러한 단순화된  비유들이 장애인의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 

지금 우리가 왜 이런 식으로 느끼는지 질문하고 고통과 슬픔이 장애에 고유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슬픔과 상실의 사적인 순간들 조차 사회적 환경과 떼어놓을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직면한 과제들 중 내 몸에서 비롯된 것은 결코 없다고 상상하는 것 역시 부인의 한 형태일 것이다. 이러한 부인은 내 신체성이 함의하는 바에 대해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제한한다. 

 

장애는 나의 정체성에 필수적인 부분이며, 따라서 나의 창조성과 내가 겪은 어려움 모두 장애와 분리될 수 없다. 내 몸의 장애를 인정함으로써 나는 내 한계를 인식할 뿐 아니라 장애를 가진 나의 신체를 창의적인 장으로,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잠재력을 가진 창의적인 장으로 알아갈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된다. 

 

장애인들이 자신의 고통과 "원치 않는" 순간들에 대한 소유권을 쥐고 스스로의 서사를 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내하면 비장애신체의 세계가 우리 삶을 틀 짓고 전형화하는 방식을 통하지 않고서 고통을 겪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이 고통은 우리 자신의 다른 경험들에 대한 부정을 뜻하지 않는다. 

 

고통에 대한 지차닌 강조도 부인도 문제적이다. 고통을 느끼는 역량은 인간들 사이의 차이와 종들 간의 차이를 막론하고 공유되는 것이다. 고통은 공감의 장소이자 타자의 고투를 인식하는 장소다. 

 

장애 커뮤니티가 고통이라는 것을 다시 가져와 점유한다면 어떻게 될까? 고통을 차이를 관통할 수 있는 잠재적인 공감의 장소로 인식한다면 어떻게 될까? 

 

고통의 강조는 연민과 고정관념을 영속시킬 수도 잇지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이런 종류의 연대를 향한 열정에 불을 지필 수도 있다. 

 

장애의 가치들.

자급자족 능력이 아닌 자기결정

자립이 아닌 상호의존

기능적 분리가 아닌 개개인의 연결

신체적 자율성이 아닌 인간 커뮤니티를 존중한다. 

 

나는 이런 가치들이 인간을 넘어 확장되는 것을 그려본다. 단지 인간의 상호의존, 행위 능력, 커뮤니티만이 아닌 인간, 동물 , 환경 모두의 그것까지 추구하는 해방의 길을 창조하면서 말이다. 

 

남아 있는 질문: 

. 장애운동과 동물권리 운동 사이에 어떻게 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 

 

. 페미니스트들이 제시한 대안적인 동물정의 개념들

. 장애운동 스스로가 갖고 있는 차이에 대한 두려움 

 

장애운동 자체가 갖고 있는 종차별주의. 

자신의 휠체어에 걸쳐 있는 양가죽이 잘 보이게 해달라고 요청함. 저는 인간임을 인정받기 위해 여전히 싸우고 있기 때문에 종들을 넘어서라는 싱어의 호소는 제게 꿈도 꿀 수 없는 사치처럼 보입니다.라고. 

 

고통과 관련한 싱어의 이론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 동물복지적 관점. 동물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그들이 책임감 있게 다뤄줘야 한다고 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인간의 이익을 위해 동물들을 사용할 수 있다고 여긴다. 256

 

 

14장. 고기의 낭만화

 

템플 그랜딘

슬로푸드USA

 

가축화된 동물을 인간의 착취에 의존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로 제시함. 인간이 먹지 않는다면 이 동물들은 존재할 수 없을 것. 즉 멸종할 것이다. 

 

양심적 잡식가로 옮겨가는 움직임. 

인도적 고기

동물 이용을 정당화하는 근거들은 자연 곳곳에 존재한다.

. "자연"(본성)은 동물 착취 및 상품화를 정당화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가장 흔하고 강력한 수사학적 도구중 하나. 

. 지속가능한 농업

.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으며 자연은 피로물든 이빨과 발톱일 뿐이다. 

,"동물들이 다른 동물을 먹는 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예요.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니까 인간이 동물을 먹는 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죠" 

. 비건과 베지테리언들이 "자연의 섭리에 대한  깊은 무지를 드러내고" 

. "당신의 삶은 죽음없이 불가능하다는게 심오한 정신적 진리입니다. 당신이 당근을 입 안에 넣어 우적우적 씹어 먹을 때, 당신은 살기 위해 당근은 희생시키는 겁니다."

 

양심적 잡식가는 농부와 동물이 공생관계에 있으며, 그 관계는 결코 중단될 수 없는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우리 인간의 종적 정체성을 살피는데 핵심이 된다. 

"가축화는 노예제나 착취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은 전체 관계를 왜곡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권력에 대한 인간의 관념을 종들 사이의 상호관계나 공생의 사례들에 투사하는 일일 것이다" 

 

가축화된 동물들은 우리와 함께 진화하면서 우리가 하나의 종으로서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기여햇고, 우리 또한 그들에게 같은 영향을 끼쳤다. 이 진화적 관계는 결코 페기될 수 없다. 비거니즘이나 베지테리어니즘을 통해이런 현실을 회피하려 한다면 그건 더 큰 생태계의 일부가 되는 것의 복잡성, 그리고 다른 동물과 관계맺는 한 동물이 갖는 복잡성을 사실상 부인하는 것이다. 275

 

나는 비건과 잡식가의 논쟁에 몰두했다. 

 

나는 양심적 잡식가들이 농부와 동물의 특정한 관계를 자연화하여 제시하는 것에 문제가 많다고 느꼈다. 즉 그 관계를 생물학, 종, 진화 등의 불가피한 결과로 제시하는 것 말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그런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나의 믿음은 더욱 공고해졌다. 

 

양심적 잡식가들은 "여러 종들의 공생"을 순수하게 생물학적이고 탈정치화된 무엇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런 관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방식 그리고 그 방식을 통해 우리가 얻는 가치가 의심의 여지 없이 정치적이며 권력의 역학을 전제한다는 사실을 방기한다. 276

 

우리가 자신만의 가치 체계와 권력 구조 안에서 자연을 바라봤다는 사실은 매우 분명하다. 

 

비장애중심주의는 동물을 무능한 존재로 제시함으로써 동물착취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지만, 수년간의 연구를 통해 나는 그런 정당화가 인도적 고기 운동에서도 작동한다는 것을 깨달았따. 인도주의적 고기 운동에서는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고 상품화하는 것, 동물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정치적인 것이나 착취로 그리지 않고 그저 "세상의 이치"로 그린다. 

. 대중적 논의 : 생물학적으로 고기를 필요로 한다

. 세련된 이론: 진화와 공생

을 통해 이들은 계속해서 "자연"을 동물 도살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윤리적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연에 호소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인간의 문화, 편견과 분리될 수 없다. 무엇보다 우리가 불가피하게도 인간의 동물지배라는 흔하고 뿌리 깊은 역사적 패러다임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물을 보는 방식은 결코 "자연스롭지" 않다. 동물이라는 범주가 자연스럽지 않은 것 처럼. 

 

우리는 다른 존재의 주체성을 인식하고, 공감을 경험하며, 윤리적 선택을 하도록 진화해온 동물이다. 만약 고기에 대한 욕망이 "인간 본성"의 일부라면 우리가 사는 방식을 질문하고, 정의에 대해 생각하고, 도덕적 삶의 진전을 반영하기 위해 우리의 습관을 바꾸는 것 또한 "인간 본성"을 구성한다는 점. 

 

자연은 협력적이고, 자비로우며, 정의롭다. 자연이 잔혹할지라고, 서로 먹고 먹히는 세계보다는 훨씬 복잡하다. 

포식 패러다임이 독점함. 지금은 야생의 정의와 균형을 이루는 패러다임으로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주류매체의 서사들

목초지에서 기른 스테이크를 먹고 자신이 직접 기른 닭이나 토끼를 먹는 사람들, 이런 서사들은 우리가 동물들에 대한 순진하고 감상적인 공감을 극복하고 무언가 더 위해한 것을 파악해야 한다고 시사한다. 바로 삶과 죽음의 순환 말이다. 

 

물론 우리는 똑같이 "자연스럽게" 공감력을 가진 우리 내면의 초식동물과 접촉할 수도 있다. 우리가 여전히 죽음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당근을 씹으면서), 비건이 애초 죽음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의 쾌락과 이익을 위한 동물들의 부적절한 죽음과 상품화에 반대한다. 

 

자연산 버터가 탄생하기까지

. 젓소는 인간의 개입을 통해 임신하고, 송아지를 빼앗기며 단 몇년을 산 뒤 살해당한다. 한 존재의 재생산 체계를 이토록 심각하게 착취하는 공정을 정당화하는 것도 모자라 어떻게 "자연스럽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가? 

 

2012년 그린마운틴대학에서 일하던 두 마리의 황소 루와 빌 이야기 

. 루의 삶의 질이 급속히 나빠지고 있었고, 이제 루를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할 절적한 시기가 된 것

. 삶의 질이라는 비장애중심주의적 수사학을 동원하여 자신들이 연민을 품은 기관인 듯 행세하면서도 루의 노동가치와 생산성을 강조함. 

. 장애는 물론 "자연" 이데올로기 역시 루의 살해를 정당화하는 데 한몫했따. 

 

마티 킬, 환경주의자들은 종종 개체보다 전체 즉 생물군집에 대한 선호를 드러내며, 이것이 자연의 서로 다른 부분들에 크고 작은 중요성을 부여하는 가치 위계를 만들어낸다. 종과 생태계에는 가치가 부여되지만 개체에게는 부여되지 않는다. 야생동물은 가축화된 동물보다 더 큰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런 경향은 지속가능한 축산에 관한 최근 논쟁들에도 침투해 있다. 예. 농장시스템 전체에 대한 존중은 사람들에게 루와 빌에 대한 사랑을 거두고 그 둘의 도살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함. 

 

개별 동물들의 삶을 가치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종들이 더 큰 생태계의 번영에 기여하는 방식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킬은 가능하다고 답한다. 

 

킬, 자연의 이런 위계는 돌봄이나 관계보다 추상적 사고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 가부장적 관점이 수백 년에 걸쳐 지속시켜온 것. 이런 위계에서 개별 동물과의 관계가 평가절하되고, 더 포괄적인 "생물군집"이 숭배된다. 이 위계를 영속화하는것은 비장애줌심주의로, 루와 빌의 이야기는 물론 의존적이고 자유롭지 못한 동물보다 자율적인 야생동물을 더 중시하는 경향에서 그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 

 

의존적 개체들은 사회 일반에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떨어지고, 마땅히 착취될 만하다는 관념은 역사적으로 장애인들에게도 활용되었다. 

 

사회계약의 철학적 전통은 인간에게서든 동물에게서든 왜 의존이 폄하되었는지를 밝히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 철학적 전통이 비교적 분명하지 않은 다른 형태의 도움 관계보다 상호이익에 특권을 부여하면서 돌봄과 공헌에 관한 서구적 개념이 구축되도록 촉발했기 때문

 

마사 누스바움, <정의의 최전선>

사회계약 전통이 어떤 식으로 장애인과 비인간동물, 상대적으로 특권을 덜 가진 나라의 사람들에게 정의를 분배하는 데 실패했는지를 검토함. 

 

더욱더 완전한 정의 이론은 이 전통(사회계약)에 저항해야 하고, 이익보다 더 복잡한 협력의 이유들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랑, 연민, 존중 같은 이유들 말이다. 285

 

육식을 정당화하는 공진화이론에서도 사회계약 관념과 매우 유사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폴란이 "상호주의 혹은 여러 종들의 공생"이라고 부르는 것. 인간과 동물이 서로 어떤 계약을 맺었다는 것, 사회계약처럼 상호 이익에 바탕을 둔다. 인간이 동물 종들을 돌볼 책임을 지는 대신 동물들이 그들의 노동과 살을 인간에게 제공한다. 

 

이 거래는 "대체로 평등한 정신적, 신체적 역량"을 지닌 존재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강력한 인간 그리고 그 보다 취약한 동물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동물보다 강한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 분명하다. 

 

인간의 지배란 가축화된 동물들이 그 이외의 선택지를 갖지 못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일 뿐이다.(유사, 가부장제)

 

동물들은 우리에게 고기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제공한다. 

 

의존 개념은 이런 주장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축화된 동물들이 항상 우리에게 의존적일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들을 죽이는 것이 우리 책임이라고 시사함. 가축화된 동물들이 인간의 돌봄에 의존하는 것을 그 동물들에 대한 사육, 도살, 소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봄. 

 

의존이라는 말은 노예제, 가부장제, 제국주의, 식민지화 그리고 장애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 의존이라는 언어는 교묘한 수사학적 독로,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을 마치 공감할 줄 알고 보살피는 마음이 깊은 사람처럼 보이게 하며, 동시에 그들이 그렇게 관심을 두는 이들이 계속해서 착취될 수 있도록 함. 

 

의존적인 것을 희생시켜 독립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취약한 것을 희생시켜 더 강한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장애 커뮤니티는 상호의존이 상호 이익에 대한 계산이 아니라, 우리 모두 취약한 존재다 즉 우리 모두 삶의 과정에서 의존적일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있고 돌봄을 주기도하고 받기도 하는 그런 존재로 인식된다. 장애는 취약한 존재들을 책임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분석을 제공한다. 

 

인도적 고기를 위한 주장들은 장애가 있는 신체를 포함한 특정 신테와 역사가 생략된, 사물의 자연 상태라는 낭만적인 관점을 드러낸다. 이렇듯 자연에 대한 본질화된 시각에서 비롯된 서사들은 힘, 자율성, 생산성, 자립 등에 가치를 부여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더 취약한 신체들에 대한 억압을 가속화한 가부장적 가치들과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그랫는데"라는 향수와 "자연적인 것"에 대한 찬양은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에 비해 얼마나 혹독한 삶을 살아왔는지 간과한다. 

 

산업화 이전의 농업이라는 이상화된 환상

. 인종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 비장애중심주의, 종차별주의

 

음식의 퀴어 크립 페미니스트 정치학을 향하여

 

 

우리는 지속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불구화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신체와 더 급진적인 가치 체계가 포함되도록 지속 가능성 운동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지 질문하는 게 중요하다. 

 

지속 가능한 미래에 관한 더 급진적인 통찰은 단순히 환경이나 소비자 개인의 건강에만 이로운 것이 아닌, 비장애중심주의와 종차별주의를 포함한 위계와 억압의 역사적 패러다임에 저항하는 다양한 가치들을 아울러야 한다. 

 

곤혹스럽게도, 동물 옹호 관련 논의를 주도하는 이들 중에는 이 지속적인 억압체계에서 이익을 얻는 부류도 있다. 템플 그랜딘이 가장 명징한 사례다. 

 

그녀는 맥도날드나 버거킹 같은 거대 회사의 자문을 맡으면서 도살장을 설계한다. 그녀는 사랑때문에 그 일을 한다고 했다. 그랜딘은 궁극적으로 장애를 가진 인간 존재와 비인간 동물이 신경전형적이고 비장애중심주의적인 패러다임 속에서 어떻게 억압닫고 착취당했는지 문제제기하는 데까지 나가지 못함. 

 

우리에게는 더 나은 인도적인 길이 있다. 302

 

 

15장. 고기:자연재해

 

2006년 유엔의 <가축의 오랜 영향> 보고서,(18%)

2009년 월드 워치 연구소 (51%)

 

식육산업이 이 행성의 땅 1/3을 차지함. 

지금까지 어획해온 어류종들은 50년 이내에 모두 잃어버릴 위기.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고, 기아를 양산(곡물의 50%가 가축의 사료)

 

산업적 축산과 그것이 배출하는 유독성 물질이 질병, 장애, 건강상의 여러 문제를 유발하는 주요 요인이고 이런 문제들이 저소득층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칠 것임. 

 

산업화된 농장과 도살장의 노동자들 

감금과 과도한 우유 생산으로 절름발이가 된 젓소부터 반복적 스트레스로 부상을 입은 노동자, 오염되고 파괴된 환경에 이르기까지, 동물을 이용하는 산업들은 장애를 양산한다. 

 

오염은 장애와 관련된 주제다. 산업화된 농업, 공장식 축산, 도축공장은 장애와 관련된 주제다. 유독성 페기물, 경제적 불평등, 기후 변화 미 모든 것이 장애와 관련된 사안이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이 장애를 만들어낼 수 있고 장애를 가진 인가과 비인간의 삶을 더 혹독하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불의가 생산되고 표상되고 다뤄지는 방식에 장애 이데올로기가 핵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장애와 질병을 종종 환경 파괴를 경호하는 신호가 된다. 

 

에르벨스가 묻듯, 장애가 고통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창조적이고 가치 있는 것으로 축복할 수 있겠는가? 

 

빈곤과 억압의 결과로 생겨난 장애를 축복하는 것의 어려움.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우리는 장애가 생기는 것을 환영하고 욕망할 수 있는가?" (에르벨스)

이 질문은 내가 삶에서 오랫동안 싸워온 것과 공명한다. 어떻게 우리는 장애를 유발하는 시스템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장애인들이 스스로 힘을 북돋는 방식으로 자기 몸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최소한 억압과 차별, 비장애 신체의 세계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 몸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할 수는 없을까? 

 

일라이 클레어, "우리는 어떻게 온갖 종류의 신첻ㄹ, 즉 식물과 동물, 유기물과 비유기물, 비인간과 인간의 몸들을 개조하고, 훼손하는 불의를 목격하고 명명하고 저항할 수 있을까? 장애를 불의와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공장식 축산 농장과 도살장처럼 전쟁은 외상후스트레스 장애의 형태로, 부상을 입은 군인과 민간인의 형태로, 또한 오랫동안 남게 되는 전쟁 독극물의 영향이란느 형태로 장애를 만들어낸다. 

 

장애는 흔히 끔찍한 불의가 가져온 결과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을 인정하는 것이 장애를 경험하는 데서 비롯되는 가치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가 있는 내 친구들이 스스로를 불의를 나타내는 표상으로밖에 여기지 못한다면 이 세계는 더욱 공허해질 것이다. 

 

대안적인 존재 방식 

소통하고 공간을 이동하는 대안적인 방식

서로를 사랑하고 돌보는 거뮤니티를 구축하는 대안적인 방식

우리에게 영향을 미쳤거나 지금도 미치고 있는 그런 불의에 저항하는 대안적인 방식들의 가능성이 더욱 사라져 버린 그런 공허한 세계 말이다. 321

 

 

5부 상호의존

 

16장 필요의 충돌

 

동물실험의 대안을 지지하는 장애인과 불치병 환자들 DIIAAR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정체화하면서 장애라는 렌즈를 통해 동물 문제를 탐구했던 유일한 동물운동가 단체.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동물 이용을 둘러싼 윤리적 문제들을 어떻게 양립시킬 것인가? 

 

"장애인은 장애인 대신 동물이 실험 대상이 되거나 학대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는 것을 표명하고 단체를 만듬.

 

도나 스프링, 

"제 자신이 장애를 가졌고 동물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약물 치료를 받고 잇어서, 이 제품들으르 만드는 데 동물실험이 정말 필요한지 조사해야 할 책임을 느겼어요. ... 동물의 고통이라는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러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다는 생각에는 무언가 정말 모순적인 지점이 있어요" 

 

"우리 자신의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 과거에는 비록 동물에게 기댔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이 단체가 설립됐다. 

 

도나 스프링, 그녀가 해온 일들을 보면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윤리적 삶을 사는 방법을 찾는 데 관심을 두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마주하는 불가피한 모순을 어떻게 탐구와 활동이라는 생산적인 장으로 포용할 수 있을까? 336

 

해가 지날 수록 비거니즘은 내게 다른 것을 의미하기 시작했고, 이제 나는 비거니즘을 개인적인 건강과 체형, 구매력을 강조하는  "식생활"이나 "생활양식"으로 틀 짓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동물의 상품화와 도살이 비장애중심주의의 입장에서 정당화된다고 할때, 비거니즘은 비장애중심주의에 반대하는 급진적인 입장이 된다. 

 

비거니즘은 우리가 사회적, 정치적, 환경적으로 그리고 우리가 소비하는 것 안에서 우리의 신체성을 유지하는 방식에 깔려 있는 비장애중심주의를 진지하게 마주하는 급진적인 입장이다. 달리 말해 비거니즘은 단지 음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먹고 입고 쓰는 것을 통애 비장애중심주의에 저항하는 체화된 실천이자, 동물을 위한 정의가 장애인을 위한 정의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 정치적 입장이다. 337

 

비거니즘은 각종 차이들을 억압하는 대상화와 착취에 맞서 몸을 통해 저항하는 행위, 즉 일상에서 한 사람의 정치적, 윤리적 신념들을 정립하는 육체적인 방식이다. 339

 

 

17장 종과 능력을 넘어서는 돌봄에 관하여

 

페미니스트들은 인간(그리고 종종 비인간)을 서로에게 기대는 상호의존적인 존재로 이해해온 긴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이론은 돌본다는 것의 의미에 심혈을 기울인 데 비해, 돌봄받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다루지 않았다. 

 

장애인으로서 나는 돌봄을 핵심 요소로 하는 상호의존 철학을 지지한다. 그와 동시에 돌봄이 나에게 더 자유로운 삶을 가능케 할 거라고 생각하는 관점에 저항한다. 역사적으로 장애에 대한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은 돌보받는 것을 워하지 않으며, 그 대신 권리와 서비스, 나아가 장애인들의 참여와 기여를 제한하지 않는 접근성이 확보된 사회를 원한다고 선언해왔따. 

 

수년간 페미니스트 장애학 연구자들, 

돌봄받을 필요가 있다고 역사적으로 간주된 사람들이 사실은 자신이 맺는 관계, 사회 그리고 더 넗은 세계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동물에 대한 페미니즘적 돌봄 윤리, 

캐럴 애덤스와 조지핀 도노판 <동물윤리에서의 페미니즘 돌봄 전통>

 

동물과 인간이 상호의존의 관계 안에서 서로 얽혀 잇다고 생각한다. 동물들은 종종 취약하고 의존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 이익이나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님을 인식하는 것. 

 

"특정 상황이나 사안의 특수함에 대한 서사적 이해를 허용하는 , 상황적이고 맥락 중심적인 윤리"라고 부른 것을 선호한다. 또한 이성, 자율성, 자립 같은 특징에 특권을 부여하기를 꺼린다. 역사적으로 이런 특징들이 존중받을 만한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를 갈라 그들을 억압하는 데 쓰였기 때문이다. 

 

동물들과 더 정의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중요한 요소로 "주의 기울이기"를 지적한다.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의 핵심적인 참여자이자 공헌자로서 가축화된 동물의 행위 능력에 주목함으로써 해방적 틀을 제공한다. 이 틀은 의존 개념을 다층화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갖는다. 

 

"다른 인간들이 동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동물들이 이야기하는 것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동물들은 정말로 우리에게 의사표현을 한다. 자신들이 선호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돌봄의 윤리는 우리가 어떻게 동물들의 말을 듣는 법을 배울 수 있는지, 그들을 목소리 없는 존재로 보게 하는 온정주의와 (일종의) 아이 취급 없이 어떻게 동물들을 돕고 돌볼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철학자 로리 그루엔, 

우리에게 종의 경계를 넘어서는 공감에 관한 작업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비인간 동물들에게 공감하는 방식이 단지 동물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개별 동물이 원하고 필요로 하고 의사소통하고자 하는 바를 고려하는 데까지 나아가도로고 촉발한다. 

 

" 타자와 윤리적 관계를 맺는다는 건 부분적으로 타자의 필요, 이해관계, 욕망, 취약성, 희망, 관점을 이해하고 그애 응답할 수 있는 것과 관계된다. 이때 이해와 응답이란 단순히 자기 관점에서 그것들에 대해 추측하거나 확신하는 바를 정립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해와 응답은 타자의 관점에서 그것들을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일이다" 347

 

언어를 쓰지 않는 지적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것과 그들의 욕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개인에게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진단에 기초한 일반화 대신 그들의 소리, 몸짓, 패턴을 인식해야 한다. 

 

개인에게 다가가 그 사람의 고유한 소리와 몸짓에 주목하는 일은 동물해방과 장애해방에 관한 논의를 진전시키는 결정적안 한 걸음이 된다. 고통과 의존이라느 제한된 서사를 넘어서 더 급진적인 논의로 나아가는 한 걸음 말이다. 

 

장애인과 가축화된 동물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짐승이자 짐으로 제시되었다. 

 

의존은 종종 착취의 구실이 되는데, 이는 의존이 극히 부정저거인 함의를 갖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의존적인 존재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모두는 의존적이다. 

 

인간은 타인에게 의존하면서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이 타인에게 의존하면서 삶을 끝낼 것이다. 의식주, 반려생활 모두 타인에게 의존한다.

 

의존의 부정적인 귀결 대부분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경제권 박탈, 사회적 소외, 시설 감금, 사회적 문화적 건축학적 장벽이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자립과 의존의 이분법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는 의존의 스펙트럼을 따라 존재한다. 의존을 결코 부정적이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 오히려 우리 세계와 관계에 꼭 필요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동물착취 철폐론자, 

쾌고감수능력을 지닌 동물들이 인간의 목적 아래 소유되거나 착취당하거나 살해 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 "더 큰 우리가 아니라 텅빈 우리를 원한다" 

우리가 가축화된 동물들을 존재하지 못하게 하면, 인간들이 그들을 착취하지도, 그들에게 고통을 가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논리. 템플 그랜딘의 주장과 정반대의 논리다. 

 

가축화된 동물들이 겪는 고통과 착취가 그들을 멸종시키는 것을 충분히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현존하는 동물들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주장함. 

 

멸종론에는 문제가 너무나 많다. 특히 그런 주장이 의존, 자연스러움, 그리고 삶의 질에 대한 전제들에 얼마나 깊이 근거하는지를 깨닫게 되면 더욱더 그렇다. 

 

이런 서사들에서 야생동물들은 서구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찬미해온 자율적이고 자립적이며 자연적인 주체로 낭만화된다. 반면 가축화된 동물들은 가련하게 여겨진다. 장애를 갖는 것보다 "죽는 편이 낫다"는 서사 처럼, 가축화된 동물들은 "멸종되는 편이 낫다"고 간주되는 것이다. 

 

장애 논의에서 삶의 질 문제.

중요한 것은 어떤 삶이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추정 자체를 의문에 붙이는 것이다. 

 

우생학의 역사오 유산을 떠올리지 않고 멸종에 대해 생각한다는 건 내게 불가능한 일이다. 

 

초기 우생학자들은 '더 나은' 특질을 갖도록 동물의 품종을 조작할 수 있는 방식에서 영감을 받았다. 

 

미국 우생학 운동은 유전자 풀에서 바람직하지 않는 특질을 제거

함으로써 인구의 유전자 구성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그 특질이란 언제나 장애, 인종, 계급과 연결되어 있었따. 

 

가축화된 동물들이 여기 우리와 함께 있는 지금, 정말로 그들을 절멸시켜 그 개체의 생명과 종 전체에게 또 다른 강제력을 행사하려 하는가? 이런 판단은 그들의 삶이 야생동물의 삶보다 살 가치가 적다는 전제에 입각한다. 

 

나는 가축화라는 잘못에 대한 해결책이 곧 우리가 해를 끼쳐온 바로 그 개체군을 없애는 것이라는 생각에 거북함을 느낀다. 우선은 이런 잘못을 만들어낸 착취 시스템을 어떻게 하면 해체할 수 있는지를 묻고 싶다. 그 방법 중 하나는 어떤 삶이 취약하고 의존적일 대 그 삶은 덜 소중하고, 덜 가치가 있고, 덜 즐겁다는 생각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머니가 아기를 돌보듯 동물들을 돌보는 문제가 아니라 동물들의 말을 듣는 것, 정서적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를 관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문제"다. 

 

가축화된 동물, 장애인

이 취약성이 강제력을 정당화하는 소름 끼치는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취약성에는 새로운 존재 방식과 지원 및 소통의 방식, 즉 능력과 종의 차이를 관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새로운 방식 또한 잠재되어 있다. 

 

가축화된 동물의 멸종 혹은 그들에 대한 지속적인 착취가 모두 부적절하다고 할때, 우리에게는 어떤 방향이 남아 있을까? 가축화된 동물의 의존을 장애해방이라는 틀로 바라본다면, 제3의 길을 열 수도 있을지 모른다. 가축화된 동물들이 우리 삶과 세계에 기여하는 방식에 더이상 도살을 포함하지 않도록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을 것, 공동의 의존, 공동의 취약성, 공동의 생존 욕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동물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바로 잡는다는 건 그들의 의존과 상호의존을 존중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자연스러움을 존중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와 함께 이 행성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로서 갖는 자연스러움 말이다. 364

 

 

18장 보조견

 

처음에 나는 내 삶을 더 편하게 해줄 개를 원했는데, 결국에는 장애견고 함께 있게 된 것이다. 데이비드와 나는 의심의 여지 없이 베일리의 보조 인간인 셈이다. 

 

베일리는 여전히 내 보조견이다. 베일리는 나의 감정과 나에게 필요한 것 그리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에 주의를 기울여주고, 매일 함께 산책할 때 마다 내가 마주하는 비장애중심주의를 자신의 존재 자체로 매개해준다. 나는 가능한 한 내 자신이 베일리의 보조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불구이고 의존적이고 비효율적이고 능력 없는 인간이 비효율적이고 의존적이고 불구인 개를 돕고 또 그의 도움을 받는 것에는 무언가 적절하다는 느낌, 아니 사실 무언가 아름답다는 느낌이 있다. 종이 다른, 취약하고 상호의존적인 두 존재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일 말이다. 서툴고 불완전하게, 우리는 서로를 돌본다. 372 

 

 

 

'2022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0) 2022.08.08
절멸  (0) 2022.08.01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0) 2022.07.29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0) 2022.07.29
단 하나뿐인 우리의 집  (0) 2022.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