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깨칠 뻔하였다_김영민 31

친구, 그 따스한 혼동

내갠 친구라는 게 없다. 3부작의 저자로 알려진 내겐 친구라는 게 없다. 친구....개 나 소나 김영삼들이나 전두환들이 가진 바로 그 (남이 아닌) '친구' 말이다. 이따금 나는 이게 대체 누구의 잘못인지 캐려고 지난 일들을 차근히 되짚거나 홀로 따져보기도 한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떠오르 긴 하지만, 이내 내 심리의 자장 속으로 회수할 수 없는 어떤 이치의 흐름과 힘에 휩쓸려 그 얼굴들은 멀어져간다. 주변의 타인들이 다 그르고 나만 옳다는 생각은 민주스럽고, 내 윤리를 꺾고 새삼스레 낡은 추억에 배인 정서를 반성적으로 헤집는 일은 허탈하다. 친구가 없다는 사실은 세속의 따가운 시선에서 자신의 정서와 허영을 보호할 추억의 그늘이 없다는 사실과도 같다. 친구가 그늘을 지닌 나무와 같다는 비유는, 사실 겹으로..

자유, 혹은 현명한 복종과 자아의 죽음

살아가면서 죽은듯할 수 있어야 진정 살아 있는 것이다. 이는 자유를 복종에 일치시키는 이치와 다르지 않는다. 물론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이며, 사람이이라는 (무수한) 개입에 의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이처럼 간단하다. 사람들은 한시도 죽으려하지 않으면서 살려고 하고, 복종하지 않으려 하면서 자유를 구하며, 틀을 제대로 입어보지도 않으면서 제 꼴에 대해서 지절거린다. 부활은 살아 있는 중에 이루어져야 하며, 자유도 삶이라는 굴레 속에서 열려야 한다. 공부의 길이 곧 자유의 길이라면, 현명한 복종과 자아의 죽음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자식사랑, 세계사랑

자기이해가 세계이해라는 우회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자식에 대한 사랑도 필경, '세계에 대한 사랑'으로 되돌려져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일반적인 회향의 형식일 것이다. 자신의 일로써 하늘과 땅 사이에서 부리는 그 성실과 열심을 자식에게 보일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자 자식에 대한 사랑일 것. 107

보상과 환상

증여와 이바지에 주력하는 관계일수록 외려 보상체계의 작동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노동의 영역에서 보상에 유의하라니! 요점은,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노동은 없다는 것이고, 실상 더 중요한 사실은 지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도 감히(!)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노동을 욕심내지 말라는 윤리적 언명에 놓인다. 왜 그런가? 죄 중에서도 '깊은' 죄가 바로 그 같은 오만에서 나오기 때문인데, 다시 요점은, 신의 영역을 범하지 말하는 것이며, 우리 모두는 그저 한 순간 지상을 스쳐지나가면서 어울리며 어긋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물론 '동무공동체'와 같은 증여의 관계에서는 보상체계가 부실하긴 하다. 이런 점에서, 동무는 구청직원이나 삼성전자의 사무원이나 한나라당의 당직자나 서울대학교의 대학원생에 비하면..

사람은 왜 바뀌지 않는가 - 자의식의 함정

1. 사람이 쉬 바뀌지 않는 것은 실은 이미 그가 지구상의 그 어떤 생물종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겪어왔기 때문이다. 우선 인간이 언제나 '변화의 도상에 있는 존재(being-in-the-making)'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며, 그 존재론적 변화의 내력 위에서 가능한 변 화를 구상해야 한다. 초등학생이 진흙으로 빚어, 가까스로 물에 뜨게 만든 배는 완성된 이후에도 겉모양은 물론 그 구조까지 어렵지 않게 바꿀 수 있다. 이른바 가소성(可塑性)이 높은 유아의 뇌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첨단의 기술자들이 건조한 이지스함(Aegis Cruiser)이라면 이제 구조변동은 물 건너간 것이다. 정교함의 역설이다. 초월의식이나 영혼을 말해온 지 오래된 사람의 존재는 토선(土船)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지스함 정도로도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