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물의 소멸: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한병철
서문
소설 <<은밀한 결정>>에서 일본 작가 오가와 요코는 이름 없는 섬에서 벌어지는 일을 서술한다. 기이한 사건들이 섬 주민을 불안하게 한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물들이 사라진다. 그것도 되찿을 길 없이. 좋은 향기를 내는 사물들, 반짝이는, 가물거리는 묘한 사물들, 머리띠, 모자, 향수, 작은 종, 에메랄드, 우표, 또 장미와 새, 이 모든 사물이 어떤 좋은 점을 가졌었는지 사람들은 이제 더는 모른다. 사물과 함께 기억도 사라진다. 7
오가와 요코는 소설에서 어느 전체주의 체제를 묘사하는데, 그 체제는 오웰의 사상 경찰과 유사한 기억 경찰의 도움으로 사물과 기억을 사회에서 추방한다. 사람들은 망각과 상실이 지배하는 영원한 겨울을 살아간다.8
은밀히 기억을 되집는 사람은 체포된다. 위험에 처한 사물들을 비밀스런 서랍장에 넣어 사라지지 않게 보호하는, 여주인공의 어머니도 기억 경찰에게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 8
<<은밀한 결정>>은 우리의 현재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오늘도 계속해서 사물들이 사라진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사물 인플레이션은 정반대가 사실인 양 우리를 속인다. 오가와 요코의 디스토피아와 달리, 우리는 사상 경찰을 거느리고 사람들에게서 사물과 기억을 야만적으로 빼앗는 전체주의 체제 안에서 살지 않는다. 사물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소통 도취와 정보 도취다. 정보 곧 반사물이 사물의 앞을 가로막고 사물을 완전히 밫바래게 한다. 우리는 폭력의 지배가 아니라 정보의 지배 아래 산다. 정보의 지배는 자유로 가장된다. 8
오가와의 디스토피아에서 세계는 점진적으로 비어가고 결국 사라진다. 사라짐이, 소멸의 진행이 모든 것을 장악한다. 몸의 부분들도 사라진다. 결국 몸 없는 목소리들만 남아 부질없이 공중을 떠돈다. 사물과 기억이 사리진 이름 없는 섬은 여러모로 우리의 현재를 닮았다. 오늘날 세계는 비워지며 정보에게 자리를 내준다. 정보는 저 몸없는 목소리들과 마찬가지로 유령 같다. 디지털화는 세계를 탈사물화하고 탈신체화한다. 또한 기억을 없앤다. 기억을 되짚는 대신에 우리는 엄청난 데이터를 저장한다. 요켠대 디지털 매체들이 기억 경찰을 대체한다. 디지털 매체들은 전혀 폭력없이, 또 큰 비용 없이 임무를 완수한다. 9
오가와의 디스토피아와 달리 우리의 정보사회는 그리 단조롭지 않다. 정보는 사건인 척한다. 정보는 놀라운 일이 주는 흥분을 먹고 산다. 그러나 흥분은 오래가지 않는다. 금세 새로운 흥분을 향한 욕구가 생긴다. 우리는 흥분을, 놀람을 목적으로 실재를 지각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정보 사냥꾼으로서 우리는 고요하고 수수한 사물들을, 곧 평범한 것들, 부수적인 것들, 혹은 통상적인 것들을 못 보게 된다. 자극성이 없지만 우리를 존재에 정박하는 것들을. 9
사물에서 반사물로
땅의 질서는, 지속하는 형태를 띠고 삶을 위한 안정적 환경을 형성하는 사물들로 이루어졌다. 그 사물들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세계사물"이다. 세계사물에게 부여된 과제는 "인간의 삶을 안정화"하는 것이다. 세계사물들은 인간의 삶에 멈춤을 준다. 오늘날 땅의 질서는 디지털 질서에 의해 제거되고 있다. 디지털 질서는 세계를 정보화함으로써 탈사물화한다. 10
우리가 사는 현재는 사물의 시대에서 반사물의 시대로 넘어가는 이행기다. 10
우리는 이제 땅과 하늘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구글 어스와 구글 클라우드에 거주한다. 11
사물은 인간 삶에 연속성을 제공하는 한에서 삶을 안정화한다. 그 연속성은 "같은 의자와 같은 탁자가 매일 변화하는 사람 앞에 같게 머무르는 친숙함을 띠고 놓여 있다는 것에서 나온다" 사물들은 삶의 안식처들이다. 정보 곁에 하염없이 머물기는 불가능하다. 정보가 현재성을 띠는 기간은 아주 짧다. 정보는 놀람을 먹고 산다. 정보의 덧없음이 벌써 삶을 불안정화한다. 오늘날 정보는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를 요구한다. 11
사물의 폭증을 가져오는 현재의 극심한 사물 인플레이션이 시사하는 바는 다름 아니라 사물에 대한 무관심의 증가다. 우리의 강박은 이제 사물이 아니라 정보와 테이터를 향한다. 어느새 우리는 사물보다 정보를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한다. 우리는 소통에 제대로 도취한다. 그 결과는 정보 광증이다. 어느새 "데이터성애자"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12
3D 프린터는 사물이 존재의 차원에서 지닌 가치를 없앤다. 사물은 정보에서 파생된 물질적인 것으로 격하된다. 정보가 사물에 속속들이 침투하면 사물은 어떻게 될까? 세계의 정보화는 사물을 정보기계로, 곧 정보 처리 행위자로 만든다. 12
하이데거가《존재와 시간》에서 펼친 헌존재 분석은 세계의 정보화를 고려하여 개정될 필요가 있다. 그의 세계는 사물권이다. 반면에 우리는 오늘날 정보권 안에서 산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앞에 놓인 사물들을 다루지 않고, 정보기계와 소통하고 상호작용한다. 이제 인간은 현존재가 아니라 "인포그"이다.13
현존재는 염려다. 오늘날 인공지능은 삶의 최적화를 도모하고 염려의 원천으로서 미래를 없앰으로써 바꿔 말해 미래의 우연성을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실존을 완전히 탈염려화 중이다. 14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에서 사용하는 범주들, 예컨대 "이야기(역사)" "던져져 있음", "사실성"은 모두 땅의 질서에 속해 있다. 정보는 서사적이지 않고 가산적이다. 더하기와 축적이 이야기를 밀어낸다. 이야기와 기억의 핵심 특징은 긴 시간에 걸친 서사적 연속성이다. 14
디지털 질서, 곧 숫자의 질서는 이야기와 기억이 없다. 그리하여 디지털 질서는 삶을 파편화한다. 15
하이데거의 "사실성" 개념의 핵심은, 인간의 실존이 "처분 불가능한 것"에 기반을 둔다는 것이다. 디지털 질서는 처분 불가능한 존재 기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디지털 질서의 표어는 이것이다. '존재는 정보다'. 그렇다면 존재는 전적으로 처분 가능하고 조종 가능하다. 15
알고리즘이 조종하는 세계 안에서 인간은 행위 능력을, 자율성을 점점 더 잃는다.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세계를 마주한다. 16
진실과 거짓의 구별은 사라진다. 이제 정보는 현실과 전혀 상관없이 과도현실적 공간에서 유통된다. 가짜뉴스도 엄연히 정보다. 그 정보는 사실보다 더 큰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단기적 효과다. 효과가 진실을 대체한다. 17
세계사물들뿐 아니라 진실도 인간의 삶을 안정화해야 한다. 정보와 달리 진실은 존재의 굳건함을 지녔다. 지속과 불변은 진실의 학심 특징이다. 진실은 모든 변화와 조작에 저항한다. 그렇게 진실은 인간 실존의 토대를 이룬다. 17
디지털 질서는 진실의 시대를 종료하고 탈사실적 정보사회를 개시한다. 탈사실적 정보 체제가 사실과 진실 위로 솟아오른다. 17
한나 아렌트, 진실은 인간의 삶에 멈춤을 준다. 17
아무것도 확고하지 않은 곳에서는 모든 멈춤이 사라진다. 18
시간 집약적 실행들은 오늘날 사라지고 있다. 진실도 시간 집약적이다. 쉴새 없이 한 정보에 이어 다른 정보가 밀려드는 곳에서 우리는 진실을 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 우리의 탈사실적 자극 문화에서 소통을 지배하는 것은 흥분과 감정이다. 시간을 기준으로 보면, 합리성과 달리 흥분과 감정은 매우 불안정하다. 따라서 이것들은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18
신뢰하기, 맹세하기, 책임지기도 시간 집약적 실행이다. 이 행위들은 현재를 넘어 미래로 뻗어나간다. 인간의 삶을 안정화하는 모든 것은 시간 집약적이다. 충실, 결속, 의무도 마찬가지다.18
삶을 안정화하려면 다른 시간 정치가 필요하다. 18
또 하나의 시간 집약적 실행은 '하염없이 머무르기(거주하기)'다. 18
오늘날 우리는 정보를 쫓아 질주하지만 앎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아두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는 차를 타고 온갖 곳을 달려가지만 단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다. 우리는 엄청난 데이터를 저장하지만 기억을 되짚지 않는다. 우리는 친구와 팔로워를 쌓아가지만 타자와 마주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정보는 존속과 지속이 없는 삶꼴을 발전이킨다. 19
정보권은 의심할 바 없이 해방적 효과를 지녔다. 정보권은 사물권보다 더 효과적으로 우리를 노동의 고됨으로부터 해방한다. 인류 문명은 실재의 정신화가 점점 더 성취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 능력들을 차례로 사물에게 넘겨준다. 이는 사물이 인간 대신 노동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주관적 정신이 객관적 정신으로 탈바꿈한다. 사물은 기계로서 문명의 진보를 표현한다. 19
헤겔, 도구는 게르은 사물이다.
도구를 다루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물로 만든다. 손에 굳은살이 박이는 것이다. 손은 사물처럼 마모된다. 자발적 기계를 다루는 손은 더는 굳은 살이 박이지 않지만, 노동에서 환전히 해방되지 못한다. 도리어 기계가 비로소 공장과 노동자를 만들어낸다. 20
문명의 다음 단계에서는 사물에 충동만 이식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더 높은 형태인 지능도 이식된다. 인공지능은 사물을 정보기계로 변신시킨다. 인간이 사물을 자기 대신 노동하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생각까지 하게 하는 것이다. 기계가 아니라 정보기계가 비로소 손은 노동으로부터 해방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헤겔이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의 범위 바깥에 있다. 게다가 헤겔은 너무 심하게 노동의 이념에 붙박여 있어서 노동이 아닌 삶꼴에 접근하지 못한다. 헤겔에게 정신은 노동이다. 정신은 손이다. 해방 작용의 측면에서 디지털화는 놀이를 닮은 삶꼴을 내다보게 한다. 디지털화는 경기와 무관한 디지털 실업을 만들어낸다. 21
사물에 관심이 없는 미래의 인간은 노동자(호모 파베르)가 아니라 놀이꾼(호모 루텐스)이다. 그는 물질적 실재의 저항을 힘겨운 노동으로 극복할 필요가 없다. 미래의 인간은 손이 없다. 21
손은 노동과 행위의 기관이다. 반면에 손가락은 손택의 기관이다. 손이 없는 미래의 인간은 오직 손가락들만 사용한다. 그는 행위하는 대신에 선택한다. 그의 삶은 그에게 행위들을 강요하는 드라마가 아니라 한판의 놀이다. 그는 또한 아무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체험하고 누리려 한다. 22
오직 체험하고 누리고 놀이라혀 하는 포노 사피엔스는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자유와 작별한다. 그 자유는 행위와 결합되어 있다. 행위하는 자는 기존의 것과 결별하고 새로운 것, 전혀 다른 것을 세계 안에 들여앉힌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저항을 극복해야 한다. 반면에 놀이는 실재에 개입하지 않는다. 23
손가락 끝의 자유는 알고 보면 환상이다. 자유로우 선택은 실은 소비를 위해 고르기다. 손 없는 미래 인간은 진정으로 다른 선택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행위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는 손이 없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비판 능력을 지녔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손이 있기때문이다. 바꿔 말해 행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4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는 정치 행위가 더는 가능하지 않은 로마 사회를 "페냄 엣 키르켄세스(빵과 경기들)"라는 문구로 묘사한다. 무료 양식과 대단한 구경거리인 경기들이 사람들을 가만히 있게 민든다. 기본소득과 컴퓨터게임은 페넴 엣 키르켄세스의 근대적 버전이라고 할 만하다. 24
소유에서 체험으로
소유는 사물 패러다임을 지배한다. 정보로 이루어진 세계는 소유가 아니라 접속을 통해 통제된다. 사물이나 장소와 결속하는 것이 네트워크와 플랫폼에 잠시 접속하는 것으로 대체된다. 공유경제도 사물과의 동일시를 약화한다. 27
벤야민, "책들은 고유의 운명을 가졌다".
그의 핵석에 따르면, 책은 사물로서, 소유물로서 존재하는 한에서 운명을 가진다. 그런 책은 역사가 남긴 물질적 흔적들을 보유하고 있다. 전자책은 사물이 아니라 정보다. 전자책은 전혀 다른 존재 지위를 지녔다. 전자책은 소유물이 아니라 통로다. 전자책은 책을 정보가치로 환원한 결돠다. 전자책은 나이, 장소, 수작업, 소유자 없이 존재한다. 정보는 관상도 없고 운명도 없다. 집약적 셜속도 허용하지 않는다. 책에 뚜렷이 구별되는 얼굴을, 관상을 부여하는 것은 소유자의 손이다. 사람들은 손을 제쳐놓고 전자책을 읽는다. 책장 넘기기에는 촉감이 깃들어 있다. 촉감은 모든 관계의 본질적 요소다. 신체적 접촉이 없으면 결속이 발생하지 않는다. 31
정보자본주의는 첨예화된 자본주의다. 비물질적인 것마저도 상품으로 만든다. 삶 자체가 상품의 형태를 띠게 된다. 모든 인간관계가 상업화된다. 소셜미디어는 소통을 깡그리 착취한다. 친구는 무엇보다도 먼저 개수를 세어야 할 대상이다. 장소의 역사마저도 부가가치의 원천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알뜰하게 도살된다. 문화와 상업의 차이는 현저히 사라진다. 32
문화의 원천은 공동체다. 문화는 공동체를 창출하는 상징적 가치드를 매개한다. 문화가 더 많이 상품으로 될 수록, 문화는 자신의 원천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문화의 전면적 상업화와 상품화에 따른 귀결은 공동체의 파괴다. 32
스마트폰
매체는 매시지다. 34
운명은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낯선 권능이다. 운명의 목소리로서의 메시지도 우리에게 자유 공간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반면에 스마트폰의 이동성은 벌써 우리에게 자유의 느낌을 준다. 이동전화에는 우리에게 무력한 수동성을 강제하는 구성이 없다. 아무도 타자의 목소리에 내맡겨지지 않는다. 34
나는 세계를 완전히 손아귀에 쥐고 있다. 세계는 전적으로 나를 따라야 한다. 그렇게 스마트폰은 자기관련을 강화한다. 사마트폰 화면의 여기저기를 건드리면서 나는 세계를 나의 욕구에 종속시킨다. 세계는 총체적 처분가능성이라는 디지털 가상을 띠고 나에게 나타난다. 35
터치스크린은 타자의 부정성을, 처분 불가능한 놈의 부정성을 없앤다. 터치스크린은 모든 것을 처분 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촉각 강박을 보편화한다. 35
그 엄지손가락이 건드리는 모든 것으 상품의 형태를 띠게 된다. '틴더'(데이팅 앱)에서 엄지 손가락은 타인을 성적 대상으로 격하한다. 타인의 다름은 강탈되고, 타인조차도 소비 가능하게 된다. 36
우리는 전화보다 문자를 더 선호한다. 왜냐하면 문자를 보낼 때 우리가 타인에게 덜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목소리로서의 타인이 사라진다. 36
스마트폰을 통한 소통은 탈신체화된, 바라봄이 없는 소통이다. 공동체는 신체적 차원을 지녔다. 신체성이 빠져 있다는 점만으로도 디지털 소통은 공동체를 약화한다. 바라봄도 공동체를 굳건히 다진다. 디지털화는 바람봄으로서의 타인을 소멸시킨다. 바라봄의 부재는 디지털 시대에 공감의 상실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다. 37
스마트폰은 단지 전화기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그림과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재래식 핸드폰과 구별된다. 세계는 그림으로 대상화되는 순간에 비로소 전적으로 처분 가능하고 소비가능하게 된다. 37
문명의 다음 단계는 세계의 그림 되기를 넘어설 것이다. 그 단계는 그림들을 가지고 세계를 제작하기, 바꿔 말해 과도현실적 실재를 제작하기다. 38
세계는 대상들로서의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따. '대상'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맞세우기, 맞은 편으로 던지기, 반대하기를 뜻한다. 이 단어에는 저항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원래 대상이란 나에게 저항하는 놈, 나에게 맞서고 반발하는 놈이다. 그런데 디지털 대상들은 부저성을 지니지 않았다. 39
디지털 미디어들이 시간.공간적 저항을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저항의 부정성이야말로 경험을 위해 필수적이다. 디지털 무저항, 스마트한 환경은 세계 결핍, 경험 결핍을 유발한다. 39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나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우리의 지각을 그 장치에 위힘한다. 우리는 그 화면을 통해 실재를 지각한다. 그 디지털 창은 실재를 정보로 희석하고, 우리는 그 정보를 등록한다. 실재와의 사물적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실재는 '지금 여기에 있음'을 박탈당한다. 우리는 실재의 물질적 울림을 더는 지각하지 않는다. 지각은 탈신체회된다. 수마트폰은 세계를 탈실재화한다. 41
스마트폰은 해방적 면모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항시적 도달 가능성은 노예 신세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알고 보면 스마트폰은 움직이는 강제노동수용소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거기에 갇힌다. 더 나아가 스마트폰은 포르노폰이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발가벗는다. 그렇게 스마트폰은 움직이는 고해소의 기능을 한다. 42
성물을 뜻하는 독일어 'Devotionalien'에서 'Devot'의 의미는 복종이다. 스마트폰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성물로 자리 잡는 중이다. '좋아요'는 디지털 '아멘'이다. '좋아요' 버튼을 클릭할 때 우리는 신자유주의 지배맥락에 굴복하는 것이다. 42
지배가 자유와 합쳐지는 순간, 지배는 완성된다. 43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줘" 제니 홀저.
신자유주의 체제는 그 자체로 스마트하다. 스마트한 권력은 명령과 금지를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그 권력은 우리를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존하고 갈망하게 만든다. 43
종속된 주체는 자신의 종속을 의식하지조차 못한다. 그 주체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공상한다. 44
우리가 스마트폰과 맺는 관계는 나르시시즘적이다. 스마트폰은 이른바 "자페적 대상들"과 여러모로 닮았다. 자폐적 대상에는 타자의 차원이 없다. 그 대상은 상상을 촉진하지도 않는다. 자폐적 대상과의 관계는 창조적이지 않고 반복적이다. 반복성과 강제성은 우리가 스마트폰과 맺는 관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47
자폐적 대상은 모범 인물에게서 다름을 제거한다. 47
사람들은 스마트폰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느낀다. 그리하여 스마트폰은 또한 공감을 파괴한다. 스마트폰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는 타자의 가늠할 수 없음을 막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나르시시즘적 영역 안으로 움츠러든다. 스마트폰은 타자를 대상화함으로써 처분 가능하게 만든다. 스마트폰이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존재론적 이유는 다름 아니라 타자의 사라짐 때문이다. 48
인공지능
빅데이터는 초보적인 앎을 제공한다. 그 앎은 상관관계와 패턴 인식에 국한된 채로 머물며 아우것도 개념화하지 못한다. 개념은 전체이며, 그 전체는 자신의 계기들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포괄한다. 전체는 맺음의 형식이다. 개념은 맺음이다. 이성도 맺음이다. 빅테이더는 가산적이다. 가산적인 것은 전체를, 맺음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것에게는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인공니증은 개념 수준의 앎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66
인공지능은 과거로부터 배운다. 인공지능이 예측하는 미래는 진정한 의미의 미래가 아니다. 인공지능은 사건맹이다. 반면에 생각하기는 사건의 성격을 띤다. 생각하기는 전혀 다른 무엇간를 세계 안에 놓는다. 인공지능에서 결여된 것은 아름 아니라 확실한 의미의 새로움이 시자가되게 하는 단절의 부정성이다. 인공지능은 궁극적으로 같음을 이어간다. '지능'은 여러 선택지 중에서 선택하기를 뜻한다. 인공지능은 미리 주어진 선택지들 중에서 선택하되, 단 하나의 선택만 한다. 그 선택은 궁극적으로 1과 0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미리 주어진 것에서 벗어나 다녀보지 않은 곳으로 가지 못한다. 67
진정한 의미의 생각하기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 생각하기는 전혀 다른 것을 향해, 어딘가 다른 곳을 향해 이동 중이다. 68
기계 지능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위험을 초래한다. 즉, 인간의 생각하기가 기계 지능에 동화되어 그 자신고 기계적으로 될 위험이 있다. 68
사물의 면모들
타자가 사라지는 것은 실은 극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워낙 은밀하게 일어나서, 우리는 이 사건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다. 비밀로서의 타자, 바라봄으로써의 타자, 목소리로서의 타자가 사라진다. 다름을 배았긴 타자는 처분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객체로 전략한다. 타자의 사라짐은 사물 세계에서도 일어난다. 사물들은 고유한 무게, 고유의 삶, 고유의 의미를 상실한다. 81
세계가 처분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객체들로만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세계와 관계 맺을 수 없다. 정보와 관계 맺는 것도 불가능하다. 관계는 독립적인 상대를, 맞은편(상호성)을, '너'를 전제한다. 81
관계와 셜속의 결여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세계의 빈곤으로 이어진다. 다른 아니라 디지털 객체들의 홍수가 세계 상실을 가져온다. 우울증이란 다름 아니라 병적으로 심화된 세계 결핍을 뜻한다. 디지털화는 우울증을 확산시키는 한 요인이다. 정보권은 우리의 자기관계를 심화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의 욕구에 종속시킨다. 오로지 타자의 부활만이 우리를 세계 결핍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다. 81
디지털 소통은 모든 것을 거리 없게 만듬으로써 가까움과 멀리 있음을 모두 파괴한다. 타자와 관계 맺기는 거리를 전제한다. 거리는 '너'가 '그것'으로 전락하지 않게 해준다. 거리 없음의 시대인 오늘날 관계는 거리 없는 접촉에 밀려난다. 85
사물의 마법
오늘날 우리는 실재를 지각할 때 무엇보다도 정보를 얻으려고 한다. 마치 빈틈없는 막처럼 사물을 감싼 정보층은 집약성에 대한 지각을 차단한다. 정보는 실재를 대표한다. 그러나 정보가 우위를 점하면, 여기 있음을 경험하기 어려워진다. 지각은 깊이와 집약성을, 몸과 부피를 잃는다. 지각은 실재의 여기 있음 층에 진입하여 깊어지지 못한다. 지각은 단지 실재의 정보 표면만 스친다. 86
실재 앞을 슬며시 가로막는 다량의 정보는 실재의 사물적인 층을 침식한다. 86
대표, 곧 표상과 의미가 아니라 단박에 맞닿음과 여기 있음이 특징적인 마법적 세계 관계가 발생한다. 87
사물에 대한 주의 향상은 자기 망각 및 상실과 짝을 이룬다. 내가 약화되면, 나는 저 고요한 살물 언어를 수용하게 된다. 여기 있음 경험은 바깥에 놓여 있음을, 상처받을 수 있음을 전제한다. 상처가 없으면 나는 궁극적으로 오직 나 자신의 메아리만 듣는다. 상처는 구멍, 곧 타자를 향해 열린 귀다. 오늘날 저 현현적 순간은, 자아가 점점 더 강해진다는 이유만으로도 벌써 불가능하다. 사물들은 자아를 거의 건드리지 못한다. 87
하이데거의 손은 땅의 질서에 매여 있다. 따라서 그 손은 인간의 미래를 파악하지 못한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더는 "땅"과 "하늘"에 거주하지 않는다. 제약되지 않음을 향한 길 위에서 인간은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것들"과 "신적인 것들"도 뒤로 내던졌다. 최후의 사물들(기독교 종말론에 등장하는 네 가지 대상 곧 죽음, 심판, 천국, 지옥)도 마찬가지로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을 제약되지 않음을 향해 뛰어오른다. 우리는 초인간적이며 탈인간적인 시대로 나아가나다. 그 시대에 인간의 삶은 순수한 정보교환일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제약되어(사물화되어) 있음을, 자신의 사실성을 벗어던진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제약되어 있음, 그 사실성이다. 인간은 부식지리로 돌아간다. 바꿔 말해 땅으로 돌아간다. 디지털화는 인간적임을 제거하는 과정의 적절한 한 걸음이다. 인간의 미래는 필시 미리 정해진 것 같다. 인간은 자기를 절대화하기 위하여 자기를 없앤다. 107
충심의 사물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여우는 어린 왕자가 늘 같은 시간에 자신을 찾아오기를, 어린 왕자의 방문을 리추얼로 만들기를 바란다. 리추월은 "그것도 잊혔지... 그런 어떤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해주는 무언가,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과 구별해주는 무언가야" 리추얼은 시간을 다뤄 집안에 들이기를 이뤄내는 기술이야. 리추얼은 세계-안에-있음을 집안에-있음으로 만든다. 시간 안에서 리추얼은 공간 안에서 사물과 같다. 리추얼은 시간 건축물이다. 시간을 구조화함으로써 리추얼은 시간을 거주 가능하게 만든다. 즉, 집처럼 드나들 수 있게 만든다. 오늘날 시간은 견고한 짜임새가 없다. 시간은 집이 아니라 격류다. 아무것도 시간에 멈춤을 주지 못한다. 급격히 흘러가는 시간은 거주 가능하지 않다. 110
리추얼도 충심의 사물도 삶의 안식처다. 그 안식처들이 삶을 안정화한다. 그것들의 특징은 반복이다. 생산 및 소비의 강제는 반복을 없앤다. 그 강제는 새로움 강제를 발생시킨다. 정보도 반복 가능하지 않다. 정보가 현재성을 띠는 시간이 짧다는 것만으로도 정보는 지속을 허문다. 정보는 늘 새로운 자극을 향한 강박을 일으킨다. 충심의 사물은 자극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물은 반복 가능하다. 111
프랑스어 표현 "심장으로 배우기"(암기하기)는 반복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의미한다. 오로지 반복만이 심장에 도달한다. 심장의 리듬도 반복에 기반을 둔다. 모든 반복이 사라진 삶은 리듬이 없다. 박자가 없다. 리듬은 영혼도 안정화한다.반복 불가능한 감정, 흥분, 체험의 시대에 삶은 형태와 리듬을 상실한다. 삶은 철저하게 덧없어진다. 111
충심은 땅의 질서에 속한다. 하이데너의 집 현관문 위에는 이런 성결 구절이 적혀 있다. "온 정성으로 네 충심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이 나오기 때문이다" 111
고요
신성함의 고요의 시간이다. 그것은 우리를 귀 기울이기 한다113
오늘날 우리는 신성함이 없는 시대에 산다. 우리 시대의 근본 동사는 "닫다"가 아니라 "열다", "눈을 아니 무엇보다도 입을 열다"이다. 과도소통과 소통의 소음은 세계를 탈신성화하고 세속화한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를 생산한다.(내보인다), 고요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고요를 좋아하지 않는다. 113
정보자본주의는 소통 강제를 낳는다. 114
고요는 더 높은 질서에 대한 주의를 강화한다. 114
귀 기울이기는 더없이 종교적인 태도다. ... 우리는 저 신성한 침묵을, 우리를 신적인 삶으로, 인간의 천국으로 상승시키는 그 침묵을 이제 더는 모른다. 더없이 행복한 자기 망각은 자아의 과도한 자기 생산에 밀려난다. 디지털 과도소통, 한계없는 연결은 결속을, 세계를 산출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과도소통과 연결은 개별화를 일으키고 외로움을 심화한다. 115
우리는 고요를 명령할 만한 모든 초월을, 모든 수직적 질서를 없앴다. 수직은 수평에 밀려난다. 아무것도 우뚝 솟아 있지 않다. 아무것도 깊어지지 않는다. 실재는 평평해져서 정보와 데이터의 흐름이 되었다. 모든 것이 확산하고 번성한다. 고요는 부정성이 나타나는 한 방식이다. 고요는 배제적인 반면, 소음은 허용적이고 외연적이며 과도한 소통의 결과다. 116
고요는 처분 불가능성에서 나온다. 처분 불가능성은 주의를 지속시키고 심화하며 관조적인 바라봄을 산출한다. 그 바라봄은 길고 느린 것에 대한 인내력이 있다. 116
부록 2 인터뷰
오로지 무위의 천사만이 그 폭풍에 맞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위의 능력, 행위하지 않는 능력을 되찾아야 해요. 그래서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새 책의 제목은 <<관조하는 삶: 무위에 관하여>>입니다. 이 책은 인간의 행위를 찬양하는 한나 아렌트의 책 <<능동적인 삶: 행위하는 삶에 관하여>>의 맞수 혹은 해독제입니다. 174
철학이란 진실을 말하기예요. 최근 몇 년 동안 저는 정보의 현상학을 연구해왔어요. 오늘날의 세계를 개념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죠. <<사물의 소멸>>에서 제가 내놓은 주장들은 이러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실재를 지작할 대 무엇보다도 정보를 얻기 위해서 지각한다. 그리하여 실재와의 사물적 접촉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실재는 고유한 여기 있음을 박탈당한다. 우리는 실재의 물질적 울림들을 더는 지각하지 못한다. 빈틈없는 막처럼 사물을 감싼 정보층이 집약성에 대한 지각을 차단한다. 정보로 환원된 지각은 우리의 기분과 분위기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공간들은 고유한 시학을 상실한다. 그 안에서 정보가 분배되는, 공간 없는 연결망들이 공간들을 밀어낸다. 현재에, 순간에 초점을 맞추는 디지털 시대는 시간의 향기를 몰아낸다. 시간은 점들과 같은 현재들의 계열로 원자화된다. 원자들은 향기를 풍기지 않는다. 시간을 서사적으로 다루는 실행이 비로소 향기 나는 시간의 분자들을 만들어낸다. 요컨대 실재의 정보화는 공간 및 시간의 상실로 이어진다. 이 주장들은 어둡게 채색하기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건 현상학입니다. 176
'2023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치 (0) | 2023.07.27 |
---|---|
땅의 예찬 (0) | 2023.07.24 |
시간의 향기 (0) | 2023.07.24 |
이반 일리치의 죽음 (0) | 2023.07.23 |
과학자인 나는 왜 영성을 말하는가 (1) | 2023.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