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시간의 향기

백_일홍 2023. 7. 24. 10:40

시간의 향기: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서문

 

오늘날 닥쳐온 시간의 위기는 가속화로 규정할 수 없다. 가속화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우리가 현재 가속화라고 느끼는 것은 시간 분산의 징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시대가 겪는 시간의 위기는 다양한 시간적 혼란과 착오를 초래하는 반시간성Dyschronie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간에는 질서를 부여하는 리듬이 없다. 그래서 시간은 혼란에 빠진다. 반시간성으로 인해 시간은 어지럽게 날아가 버린다. 삶이 기속화된다는 느낌은 실제로는 방향 없이 날아가 버리는 시간에서 오는 감정이다.13

 

반시간성은 더 강화된 가속화의 결과가 아니다. 반시간성을 가져온 것은 무엇보다도 시간의 원자화다. 시간이 예전보다 훨씬 더 빨리 지나간다는 느낌도 시간의 원자화에 기인한 것이다. 시간의 분산은 지속의 경험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어던 것도 시간을 늦추지 못한다. 삶은 더 이상 지속을 수립하는 질서의 구조나 좌표 속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동일시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물들도 금세 사라져버리는 덧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인간 자신이 극단적으로 무상해진다. 삶의 원자화는 원자적 정체성으로 귀착한다. 사람들에겐 자기 자신, 즉 작은 자아밖에 없다. 인간은 급격하게 공간과 시간을, 세계를, 공동의 삶을 상실해간다. 체계의 결핍은 반시간적 현상이다. 그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작은 육체로 쪼그라들며, 그 작은 육체를 건강하게 지키려고 악착같이 애쓰게 된다. 그것밖에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육체의 건강이 세계와 신을 대신한다. 죽음을 넘어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오늘의 인간은 그토록 죽기 힘들어하는 것이다. 인간은 나이만 먹을 뿐 늙지 않는다. 16

 

이 책은 반시간성의 원인과 징후를 역사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추적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질병의 치유 가능성에 대해서도 숙고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종시간성이나 무시간성처럼 비범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지속의 장소들을 탐색할 터이지만, 이 연구는 그러한 것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역사적 회고를 통해, 시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삶이 일상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다른 형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미래의 전망을 부각시킬 것이다. 이야기의 시간이 사라진 것을 애석해할 이유는 없다. 이야기의 종언, 역사의 종언이 꼭 시간의 공허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야기의 종언은 신학과 목적론이 없는, 그러면서도 자기만의 고유한 향기가 있는 삶의 시간을 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이 실현되려면 먼저 비타 콘템플라티바 vita contemplativa, 즉 사색적 삶을 되살려야 한다. 오늘날 닥친 시간의 위기는 무엇보다도 활동적 삶의 절대화와 관계가 있다. 활동적 삶이 절대화되면서 노동은 절대적 명령이 되고 인간은 '일하는 동물'로 전락하고 만다. 활동의 과잉이 일상을 지배하면서 인간의 삶에서 사색적 요소, 머무름의 능력은 완전히 실종되고 만다. 그 결과는 세계의 상실, 시간의 상실이다. 이른바 느리게 살기 전략으로는 이러한 시간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그런 전략은 심지어 본질적인 문제를 은폐하기까지 한다. 17

 

필요한 것은 사색적 삶을 되살리는 일이다. 시간 위기는 위기에 봉착한 활동적 삶이 사색적 삶을 다시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순간에 비로소 극복될 것이다. 17

 

 

볼-시Un-Zeit

 

니체의 "최후의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오늘날 절대적인 가치로, 심지어 일종의 종교로까지 격상된 "건강"을 최후의 인간은 이미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쾌락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에게는 "낮에는 즐길 거리와 함께 밤에 즐길 거리"가 있다. 의미와 동경은 쾌락과 유흥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난다. '사랑이 무어냐? 창조가 무어냐? 동경이 무어냐? 별이 무어냐" -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묻고 눈을 깜빡거린다" 길고 건강한 삶, 하지만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삶은 결국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는 먀약을 먹고 끝내 약물로 죽고 만다. "때떄로 약간의 독을: 그러면 기분 좋은 꿈을 꾼다. 그러다가 결국 많은 독을 먹는다. 기분 좋게 죽기 위해서" 역설적이게도 그는 건강을 위한 엄격한 방침으로 끝없이 삶을 연장하려 하지만, 결국 조기에 삶을 마치게 된다. 그는 죽지 않고, 불시에 끝장난다.20

 

제때 죽을 수 없는 사람은 불시에 끝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삶이 고유하게 종결될 것을 전제한다. 죽음이란 종결의 형식인 것이다. 의미 있는 종결의 형식을 빼앗긴 삶은 불시에 중단될 수 있을 뿐이다. 종결 내지 완결이 불가능해지고 방향도 끝도 없는 전진, 영구적인 미완성과 새로운 시작만이 남아 있는 세계, 즉 삶이 하나의 형태로, 하나의 전체로 마무리되지 못하는 세계에서는 죽는 것이 쉽지 않게 된다. 그래서 삶의 과정은 불시에 끊어지고 만다. 20

 

오늘날의 가속화 역시 끝을 맺고 마무리하는 능력의 전반적인 소멸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시간은 그 어디에서도 종결과 완결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시간을 붙들어주는 아무런 시간적 중력도 없기 때문에, 그저 마구 돌진할 뿐이다. 그러니까 가속화는 시간의 댐이 무너진 상황의 가시적 결과인 것이다. 시간의 강물을 조절하고 분절하고 그것에 리듬을 부여하는 댐, 즉 그 멋진 이중의 의미에서 할트Halt가 됨으로써(Halt는 받침대와 정지, 멈춤의 의미를 함께 사지고 있다) 시간을 붙들고 지체시켜온 시간의 댐은 사라져버렸다. 시간이 리듬을 잃어버린 채 받침대도 방향도 없이 막막한 곳으로 흘러가버린다면, 어떤 적절한 시간도, 어떤 좋은 시간도 있을 수 없다. 21

 

차라투스트라는 불시에 끝나버리는 삶에 맞서서 완전히 다른 방식의 죽음을 요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늦게 죽고 몇몇 사람들은 너무 빨리 죽는다. '재때 죽어라!'라는 교훈은 여전히 낮설게 들린다. 제때 죽어라. 이것이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다. 물론, 재때 산 적이 없는 사람이 어찌 제때 죽을 수 있으라?" 인간은 적절한 시간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적시의 자리를 불시가 대신하기에 이른다. 죽음도 도둑처럼 불시에 온다. "싸우는 자에게나 승리자에게나 똑같이 미움받는 것, 너희의 히죽거리는 죽음은 도둑처러머 살금살금 다가온다 - 하지만 주인으로서 오는 것이다" 죽음을 향한 자유, 죽음마저 삶 속에 포섭해들일 수 있는 자유는 전혀 불가능하다. 니체는 불시에 끝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적극적으로 구성해가는 죽음, "완성하는 죽음"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장수의 밧줄울 꼬는 자들에 맞서 자유로운 죽음에 관한 가르침을 설파한다. "나는 너희들에게 완성하는 죽음을 보여줄 것이다. 산 자들에게 가시이자 서약이 될 죽음을"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을 향한 자유" 역시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은 형성하고 완성해내는 힘으로서, 현재 속으로, 삶 속으로 끌어들여짐으로써 불시성에서 벗어난다. 니체의 완성하는 자유로운 죽음도, 하이데거의 죽음을 향한 자유도 과거와 미래로 하여금 현재를 끌어당기고 포괄할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의 중력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시간적 긴장은 현재를 끝도 없고 방향도 없는 진행과정에서 해방시켜 중대한 의미로 채워준다. 적절한 시간 또는 적절한 시점이란 오직 방향성 있는 시간이 낳는 시간적 긴장관계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원자화된 시간 속에서 여러 시점들은 다들 비슷비슷해진다. 그 무엇도 하나의 시점을 다른 시점에 비해 두드러지게 만드어주지 않는다. 시간의 붕괴는 죽음을 흩뜨려서 끝장으로 만들어버린다. 죽음은 방향 없이 흘러가는 현재로서의 삶을 끝장낸다. 그것도 불시에.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인간은 죽기를 특히 어려워하게 된다. 니체도, 하이데거도, 이처럼 죽음을 탈시간화하여 불시에 닥치는 끝장으로 만들어버리는 시간의 붕괴에 저항한다. "목표와 상속자를 가진 인간은 목표와 상속자를 위해 적시에 죽기를 원한다. 그리고 목표와 상속자에 대한 경외감 때문에 더 이상 삶의 성소에다 말라빠진 화환을 걸어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 나는 밧줄 꼬는 자들과 같아지지 않으련다. 그들은 실을 길게 늘이면서 스스로는 계속 뒤로 간다."

 

니체는 "상속자"와 "목표"에 강하게 호소한다. 분명 그는 신의 죽음이 미친 영향의 전모를 완전히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따지고 보면 역사의 종언, "상속자"와 "목표"의 종언도 신의 죽음이 초래한 결과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신은 마치 시간 안정화 장치처럼 작용한다. 신은 지속적인, 영원한 현재를 가능하게 한다. 그 때문에 신의 죽음은 시간 자체를 점점이 흩어버리고 시간에서 모든 신학적, 목적론적, 역사적 긴장력을 빼앗아간다. 현재는 덧없이 사라져가는 시-점으로 쪼그라든다. 상속자와 목표는 현재에서 사라저벼렸다. 현재에는 더 이상 과거와 미래의 긴 꼬리가 달려 있지 않다. 신이 죽은 뒤, 역사의 종언이 임박한 상황에서 니체는 시간적 긴장을 복원한다는 어려운 과업에 도전한다.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라는 이념은 운명에 대한 사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바로 운명, 운명의 시간을 복원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24

 

하이데거의 "세인Man"은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을 계승한다. 하이데거가 "세인"에 부여하는 속성은 최후의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니체는 최후의 인간을 다음과 같이 성격 짓는다. "모두가 같은 것을 원하고, 모두가 동일하다. 다르게 느끼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정신병자 수용소에 들어간다." 하이데거의 "세인"은 시간적 현상이기도 하다. 시간의 붕괴는 점증하는 대중화 및 획일화 경향과 궤를 같이 한다. 고유한 실존, 본질적 의미의 개인은 "세인," 즉 대중이 고장 없이 작동하는 데 결림돌이 된다. 삶의 과정이 점점 더 빠르게 전개되면서, 이질적인 형식이 발생하거나 다양한 분화가 일어나 저마다 독자적 형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져간다. 그러기에는 성숙의 사긴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니체의 "최후의 인간"은 하이데거의 "세인"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24

 

하이데거 역시 시간이 점과 같은 현재의 단순한 연속으로 허물어지는 데 맞서 "유산"과 "전승"에 강력히 호소한다. 모든 "좋은 것"은 "유산"이다. "고유한 실존"은 "유산의 전승"을 전제한다. 고유한 실존은 "예전에 있었던 실존의 가능성에 [....] 응답하는" "반복"이라는 것이다. "유산"과 "전승"은 역사적 연속성을 수립해야 한다. "새로운 것"이 빠르게 교체되어가는 사태에 직면하여 하이데거는 "옛 것"에 호소한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역사의 종언이 임박한 가운데 역사를 복원하려는 시도이다. 이때 역사란 비어 있는 형식으로서의 역사, 즉 아무 내용 없이 다만 시간적 형식의 힘만을 앞세우는 역사이다. 25

 

오늘날 시간을 타는 사물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빨리 낡아버린다. 이들은 순식간에 과거의 것으로 전락하고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현재는 현재적인 것의 끝 부분으로 축소되어버린다. 현재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이미 하이데거는 점점이 흩어져버린 무역사적 현재에 직면하여 "오늘의 탈현재화"를 요구한 바 있다. 현재가 축소되고 지속이 사라져가는 것은 흔히 착각하듯이 가속화 때문이 아니다. 지속의 소멸과 가속화 사이의 관계는 훨씬 더 복합적이다. 시간은 마치 산사태처럼 마구 무너져 내리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이 자기 안에 아무런 받침대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를 이루는 점 들 사이에 아무런 중력도 작용하지 못한다면, 시간은 휩쓸려가고 방향 없는 과정이 가속화가 촉발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방향이 없는 까닭에 가속화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본래 가속화란 방향성 있는 궤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26

 

진리는 그 자체로 이미 시간 현상이다. 진리는 지속적인 영원한 현재의 반영인 것이다. 휩쓸려가는 시간, 쪼그라드는 덧없는 현재는 진리의 알맹이를 갉아먹는다. 경험 또한 시간적 확장, 여러 시간 지평의 착종을 바탕으로 한다. 경험의 주체에게 과거는 단순히 사라지거나 버려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의 현재, 그의 자기 이해를 형성하는 요소로서 남아 있다. 작별은 한때 있었던 자의 현존을 희석시키지 않는다. 그의 현존은 작별을 통해 오히려 더욱 깊어질 수 있다. 떠나간 것은 경험의 현재와 완전히 단절되지 않으며, 오히려 경험의 현재와 뒤얽힌 채로 남아 있다. 또한 경험의 주체는 앞으로 올 것에 대해, 예측불허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스스로를 열어두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그저 일해서 시간을 조금씩 갚아가는 노동자로 굳어져버릴 것이다. 그는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변화는 노동과정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반면 경험의 주체는 결코 자기 자신과 동일한 상태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거처는 지나간 것과 앞으로 올 것 사이에 있다. 경험은 넓은 시공간을 포괄한다. 경험은 매우 강렬한 시간적 성격을 지니며, 이 점에서 순간적이고 시간적으로 빈약한 체험과 대비된다. 인식 역시 경험만큼이나 강렬한 시간적 성격을 지닌다. 인식의 힘은 지나간 것과 앞으로 올 것 모두에서 나온다. 이러한 여러 시간 층위의 착종을 통해 비로소 지식은 인식으로 응축된다. 이러한 시간적 응축은 인식과 정보를 가르는 변별점이기도 한다. 정보는 시간적으로 공허하며, 결여적 의미에서 무시간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간적 중립성 때문에 정보는 저장해두었다가 임의로 호출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에서 기억을 제거하면 정보가 되고 더 나아가 상품이 된다. 그리고 시간이 없는 비역사적 공간으로 옮겨진다. 정보의 저장은 기억의 삭제, 역사적 시간의 삭제를 전제한다. 시간이 붕괴하여 그저 점점이 분산된 현재의 연쇄로 전락한다면, 시간이 지닌 모든 변증법적 긴장도 소멸할 것이다. 변증법은 그 자체가 이미 강렬한 시간적 사건이다. 변증법적 운동은 시간 지평들의 복합적 착종, 즉 이미 일어난 것의 아직 일어나지 않음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각각의 현재 속에 함축되어 현존하는 것을 해방시키고, 이로써 현재를 운동 속에 던져넣는다. 변증법적 추동력은 이미 일어난 것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과거와 미래 사이의 시간적 긴장에서 생겨난다.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 현재는 긴장이 넘친다. 반면 오늘의 현재에는 아무런 긴장도 없다. 27

 

현재적인 것의 끝 부분으로 축소된 현재는 행위의 층위에서도 불시성을 증가시킨다. 약속, 의무, 신의 같은 것은 진정으로 시간적인 실천 양식이다. 그것들은 현재가 미래 속으로 이어지게 함으로서 미래를 묶어두고 현재와 미래를 뒤얽는다. 이로써 안정화 작용을 하는 시간적 연속성이 생겨난다. 이러한 연속성은 미래를 불시의 폭력에서 지켜준다. 스스로를 장기적으로 묶어두는 실천 양식 역시 종결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이 점점 단기적 가변성으로 대체되면서 불시성 역시 강화된다. 그리고 이는 심리학적 층위에서 불안과 초조로 나타난다. 점증하는 불연속성과 시간의 원자화는 연속성의 경험을 파괴한다. 이로써 세계는 불시적으로 된다. 28

 

충만한 시간의 반대상은 시작도 끝도 없이 공허한 지속으로 늘어진 시간이다. 공허한 지속은 휩쓸려가는 시간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이웃하고 있다. 공허한 지속은, 이를테면 가속회된 행위의 음화 도는 거기서 소리를 뺀 형식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면 남겨지게 될 시간, 텅 빈 행위의 시간 형식인 것이다. 공허한 지속이나 휩쓸려가는 시간이나 모두 탈시간화의 결과다. 가속화된 행위의 불안은 잠 속에까지 연장된다. 밤이 오면 그러한 불안은 불면의 공허한 지속으로 이어진다. "불면의 밤: 그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공식이 있다. 새벽이 찾아와 끝날 가망도 없이 공허한 지속을 잊으려는 허망한 노력 속에서 늘어지는 고통스러운 시간들..  ...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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