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젠더:
성별과 과학에 대한 제 반성
이블린 폭스 켈러
목 차
1. 인간 정신과 자연의 역사적 결합
플라톤의 인식론에서의 사랑과 성
베이컨의 과학 : 지배와 복종의 기술
근대과학의 탄생 시기의 정신과 이성
2. 주체와 객체의 내부 세계
성별과 과학
역동적 자율 : 주체로서의 객체
역동적 객관성 : 사랑, 권력, 지식
3. 과학 형성의 이론, 실천, 이데올로기
현대 물리학에서의 인식의 억압
세포 변형균의 집합 이론에서의 페이스메이커 개념의 위력
차이의 세계
서론
세계의 재현은 마치 세계 그 자체처럼 인간의 작품이어서, 인간은 그들 나름의 관점대로 세계를 묘사하고서는, 그 관점을 절대진리와 혼동한다.
ㅡ시몬 드 보부아르
10년 전 나는 수리생물학자로서 나의 일에 깊이 빠져 있었다. 나는 가슴 깊이 물리학의 법칙을 신뢰하고 있었고, 그 법칙이 지식의 정점에 위치한다고 믿었다. 1970년대 중반 어느 때인가다 갑자기 또 다른 종류의 질문이 이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 질문은 나의 지적 우선순위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그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과학의 본질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남성성의 사상과 결합되어 있는가? 만약 남성성의 사상이 과학과 결합되어 있지 않다면 과연 그 사상이 과학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내가 평생 동안 받은 교육에 따르면 이런 질문은 분명히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되겠지만, 일단 그 질문을 들은 이상 나는 여성으로서나 과학자로서나 이 질문을 더이상 회피할 수 없었다. 나는 여러 에세이들을 연이어 쓰면서 점차적으로 성별과 과학간의 관계를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그 에세이 중 9편이 이 책에 수록되었다. 11
이보다 최근에 들어서, 전에 나의 교수님이셨던 한분이 내가 성별과 과학에 대해 연구한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동안 여성에 관해 배운 것을 당신께 설명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대해 나는 <제가 배우는 것은 여성에 관한 것도 남성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과학일 뿐입니다>라고 설명하려고 애썼다. 이 두 시각간의 차이점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오해는 그야말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12
성별과 과학에 대한 연구가 단지 여성에 관한 연구일 것이라고 사람들이 널리 믿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당황하게 된다. 만일 여성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면, 분명히 남성도 이와 똑같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은 성별과 과학이 모두 사회적으로 구성된 범주라는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과학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논리적 증거와 경험에 의한 입증이라는 필요조건에 의해 규정된 것이라기보다, 하나의 지역사회가 형성시킨 여러 관습과 지식 체계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마찬가지로 남성성과 여성성은 생물학적 필연성이 아닌 문화에 의해 규정된 범주이다. 여성, 남성, 과학은 모두, 서로 뒤엉켜 있는 인식적, 감정적, 사회적 힘의 복잡한 역동구조로부터 생겨났다. 이 책에 수독된 에세이들은 그 역동적 구조에 초점을 맞추며, 또한 이 역동적 구조가 어떻게 과학과 남성성간의 역사적 결합을 조장했으며, 어떻게 과학과 여성성간의 역사적 분리를 도모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므로 나의 주제는 본래 여성이 아니며, 여성과 과학도 아니다. 나는 이 책에서 남성과 여성과 과학의 형성에 대해 다루며,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성과 여성을 구성하는 일이 어떻게 과학의 형성에 영향을 끼쳐 왔는가라는 주제를 다룬다. 12
이런 모험은 최근의 학술계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한 두 개의 이론, 즉 페미니즘 이론과 과학의 사회적 연구를 조우시킨다. 후자는 과학과 사회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켰고(그렇지만 성별의 역할은 고려치 않았다), 전자는 성별과 사회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켰으나 단지 과학에 대해서는 주변만을 다루었다. 이 두 발전은 각각 그 나름대로 생산적이었고, 각각 상대방이 중촉되도록 도울 수 있는 중요한 틈을 우리의 오성 속에 남겨놓았다. 더욱이 이들의 결합은 우리에게 과학과 사회 형태를 중재시키는 성별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역할을 확인시켜 준다. 그러므로 우선 이 두 이론의 발전에 대해 간략하게 검토해 보겠다. 이 두 이론이 지금까지 이룩한 진보와 아울러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12
과학에 대한 사회적 연구는 과학의 발전을 사회적, 정치적 컨텍스트 내에 위치시키는 일을 말한다. 근래에 이런 노력을 자극시킨 중요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약 20년 전, 쿤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1982)가 출판된 일이었다. 13
과학에 대한 사회적 연구의 발전에 불을 당긴 1980년대의 정치적 격동기는 여성운동에도 자극이 되었고, 차례로 페미니즘 이론의 발전에도 자극이 되었다. 페미니즘 이론의 주요 임무는 사회적, 정치적 사상사 내에서의 여성의 부재를 바로잡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노력은 한 가지 형태의 관심을 낳았는데, 그 관심이란 다음과 같은 특정한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었다. 인간 경험의 한 측면을 남성적이라고 부르고 또 다른 측면을 여성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런 꼬리표들은 우리가 우리의 경험 세계를 조직하고, 가치를 여러 영역에 할당한 후, 실제의 남자와 여자를 적응시키고 평가하는 방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지난 10년에 걸쳐 이런 의문들은 전통적인 학문 분야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유도하였고, 그리하여 심리학, 경제학, 역사학, 문학, 즉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모든 분야에 널리 펴져 있던 많은 기본가설을 재조사하도록 요구하였다. 지난 수년간 과학사와 과학사회학에서 이루어진 최근의 발전에 고무되어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그들의 관심을 자연(혹은 <단단한>) 과학으로 돌리게 되었다. 15
자연과학에 대한 페미니즘 시각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객관성, 이성, 정신을 남성적인 것으로, 그리고 주관성, 감정, 자연을 여성적인 것으로 보는, 깊이 뿌리박힌 대중적 신화를 깨는 일이다. 감정적인 일과 지성적인 일을 분류할 때, 여성은 개인적인 것, 감정적인 것, 특별한 것을 책임지고 수호하는 사람이었고, 반면에 과학은 비개인적인 것, 이성적인 것, 보편적인 것을 담당하는 탁월한 영역으로 남성들이 독점하였다. 15
이런 분류는 여성을 단지 과학의 실천에서 배제해 버리는 것 이상의 결과를 낳았다. 이런 배제는 그 자체가 여성성과 남성성, 주관과 객관, 그리고 사랑과 권력 사이의 보다 넓고 깊은 간극의 징후이다. 이 배제는 여성과 남성으로서의 우리,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우리, 그리고 심지어 과학자로서의 우리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간 조직의 한 표현이다.
이와 같은 분류는 또한 과학이 비판받게 된 시각도 낳는다. 우리가 과학에 대한 대부분의 사회적 연구에서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소홀히 다룬 것도 바로 이 분류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 중요한 점들 중 하나는, 과학이 인류의 작은 특수 집합 - 즉, 거의 전적으로 중간 계층의 백인 -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뿐 아니라, 남성성의 특정한 이상의 영향력 아래에서 형성되어 진화되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근대과학의 창설자들이 성별을 나타내는 언어에 의존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이들 창설자들은 <남성적>이라고 불리울 만한철학을 추구하였다. 자신들을 무능했던 전임자들과 <남성적virile> 힘에서 구분되도록 하였는데, 이때 <남성적> 힘이란 자연을 인간에게 유용하도록 만들고 자신의 노예로 만드는 능력을 말한다(베이컨). 16
둘째로 중요한 점은 첫번째 것과 연관돤 것으로, 과학에 대한 사회적 연구가 과학 지식의 성장을 결정하는 과학 외적인 요인을 밝혀내려고 시도하면서, 대부분 개별적인 인간 심리에서 작용하는 힘들의 영향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개인 특유의 것으로 그리고 동시에 초사회적인 것으로 무시하였다). 과학은 우리가 과거에 생각했던 것처럼 순수한 인식적 노력도 아니며,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비개인적이지도 않다. 과학은 사회적인 활동일 뿐만 아니라 깊이 개인적인 활동이다. 16
달리 말하자면, 과학에 대한 사회적 연구는 <과학의 중립성>을 부인하면서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비개인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의 구분을 지지하는 견지에서 과학을 비판하였다. 이 구분은 과학의 자율성을 계속 보장하는 구분이다. 페미니즘 시각은 우리를 매우 다른 방법으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페미니즘 시각은 이런 구분이 근대과학과 사회의 기본구조의 중심에 위치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수많은 개념상의 이분법, 사회적인 이분법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즉, 서로 인정하며 서로 지지하고 서로 규정하는 이분법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공적이거나 사적인 것,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것,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것 등의 이분법이 그것이다. 따라서 객관적인 사실과 주관적인 감정 사이의 구분을 예로 들자면, 객관성은 권력 및 남성성과 결합하고 여성 및 사랑의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짐으로써 유지된다. 차례로 남성을 여성과 분리시키는 일은 남성성을 권력 및 객관성과는 결합시키고, 주관성 및 사랑과는 분리시키는 일에 의해 유지된다 등등. 17
페미니즘 시각으로 과학을 보면 우리는 이렇듯, 상호작용하는 여러 결합과 여러 구분으로 구성된 망조직의 근원, 역할, 결과를 조사하게 된다. 또한 소위 <과학-성별 체계>라는 것을 구성하게 된다. 페미니즘 시각은 우리에게 성별과 과학의 이데올로기가 서로를 구성하면서 어떻게 서로에게 정보를 주는지 조사하도록 요구한다. 또한 그 구성이 우리의 사회 배열 속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그것이 남성과 여성에게, 과학과 자연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주제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제를 탐구할 특별한 분석방법도 제공한다. 그 방법은 나의 연구과정에 너무나 깊은 정보를 주었기 때문에 나는 페미니즘 분석 논리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야겠다. 17
10년 전,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문구가 유행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현대의 페미니즘 운동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경구일 것이다. 오늘날의 페미니즘 사상가들은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결합을 경구 이상의 것으로 인식하여,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한다. 캐더린 맥기넌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표현은 직유도 은유도 아니며, 유추도 아니다.... 그것은 여성이 겪는 독자적인 경험이 개인적인 것으로 - 사적이고, 감정적이고, 내면화되고, 특별하고, 개별화되고, 친밀한 것 - 사회적으로 체험되어온 영역 내에서 발생하므로, 여성의 처해 있는 상황의 정치를 안다는 것이 곧 여성의 개인적인 삶을 아는 것이 됨을 의미한다."
이것을 역으로 바꾸어 보면, 남성이 처해 있는 상황의 정치를 아는 것은, 남성들의 개인과 무관한 삶을 아는 것이 된다. 그러나 남성들의 삶이 개인과 무관한 것은 여성들의 삶이 개인적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들의 삶은 여성들의 삶이 개인적인 한도 내에서면 개인과 무관하다. 공적인 남성의 개인과 무관한 정치는 여전히 가정적이고 사적인 여성과 맺는 결혼생활에 전면적으로 의존하다. 남성의 합리성은 이성이 깨끗이 씻어내버린 감정을 구체화하는 여성의 능력을 전제로 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정치적인 것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잘 짜여진 구분에 의존함으로써 개인적인 내용을 드러낸다. 이 경계 설정은 그 자체로 개인적인 의미를 가진 정치적 구성물이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구분은 정치적인 것의 경계를 규정하고 옹호할 뿐만 아니라, 내용과 스타일의 형성을 돕는다. 페미니즘 분석은, 공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적인 것이 어떻게 공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는지 증명함으로써 이런 구분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페미니즘 분석은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며, 정치적인 것은 개인적임을 밝혀냈다. 18
주관성과 객관성, 감정과 이성 사이의 상호 의존성까지 탐구하도록 하였다. 요컨대,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도식을 논리적으로 확장한 것이 바로 <과학적인 것은 개인적이다>라는 도식이다. 19
이런 논리를 체계적으로 추구하였을 때, 이 논리는 <꼭 여자 같다>고 흔히 언급되는 부류의 사고를 과학에 대한 우리의 비판적 시각에 덧붙이며, 동시에 그런 판단의 기반이 되는 성별에 따른 노동 분담을 근절시킨다. 페미니즘은 과학에 대한 보다 전통적인 연구에 독자적인 공헌을 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여성에 속했던 전문적 지식, 즉 한 여성의 관점으로서 뿐 아니라 여성의 관점을 소외시키고 그 정상성을 부정하는 그런 이분법의 근원을 조사하는 주요한 도구로서의 전문적 지식의 사용을 고무시키고 있다. 페미니즘은 역사, 철학, 과학사회학에 대한 이해를 증대시키며, 여성 및 여성의 실제 체험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귀속되었던 인간 경형 영역, 즉 개인적인 것, 감정적인 것, 성적인 것까지도 포함시켜 이해를 증신시킨다. 19
개인적인 것과 비개인적인 것을 이렇게 역전시키면, 근래의 과학사가들과 과학사회학자들이 시작한 도전보다 훨씬 더 급진적으로 그리고 훨씬 더 심각하게 전통적인 객관성의 개념에 도전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우리의 <자연법칙>이 객관적 조사의 결과나 정치, 사회 압력의 결과를 단순하게 표한한 것 이상의 것임을 암시한다. 즉, 자연법칙을 연구할 대에도 그 속에 포함된 개인적 내용, 전통적으로 남성적인 내용을 파악하여야 한다. 요컨대, 이것은 과학자들이 비개인적인 성질에 개인적인 것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묘사의 익명성을 그 자체가 일종의 서명임이 밝혀진다. 19
그러나 동시에 이 역전은 과학 공동체 내부의 주장과 외부의 비판자들 주장 사이의 간극을 - 과학에 대한 <내부인의> 담론과 <외부인의> 담론 사이의 간극을 - 이을 수 있는 한 방법을 시사한다. 개인의 마음 내부에서 발생하는 <이론 선택>의 역할에 주의를 기울이며, 과학자들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은밀하게 반영되는 여러 방법에 관해 알게 된다. 또한 대부분의 실무 과학자들이 작금의 비판 공세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는 시도의 객관성을 꾸준히 신뢰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비개인적인 성질을 지향하는 충동의 심리적 일관성은 이데올로기, 개인적 동기, 비개인적 산물 사이의 연속성을 암시한다. 이 연속성은, 첫째 특정한 개인들이 과학이 기획하는 이미지에 끌리는 이유를 설명하며, 둘째로 그 개인들이 자연과 과학 양자에 대한 특정한 해석에 끌리는(대개 무의식 중에) 이유를 설명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개인적인 존재로부터 객관적인 관찰과 이해의 세계로 도피하도록 몰린> 과학자들이 <산술법칙만큼 비개인적이며 인간의 가치관과 무관한 것>으로 표현된 실재의 묘사를 적극적으로 믿었으며, 선택하기조하 하였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즉, 인간적인 행위자인 과학자들이 어떤 묘사나 이론을 판단하면서 부분적으로 이것들이 자신들의 이전의 감정 개입, 기대 그리고 소원과 일치하므로, 다른 묘사나 이론들 보다 더 설득력 있고 자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20
그렇지만 보일의 법칙이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과학에 대해 효과적으로 비판하려면 부인할 수 없는 과학의 성과들 뿐만 아니라, 그런 성과들을 가능케 한 과학자들의 자기 몰입에 대해서도 공평하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 우리가 반드시 이해애야 할 점은 이런 의식적인 몰입이 어떻게 자극되고 다듬어지며, 때로는 특정한 개개인과 집단들의 보다 편협한 사회적, 정치적, 감정적 몰입에 의해 어떻게 전도되는가 하는 점이다. 21
보일의 법칙은 고온상태에 있는 저밀도 기체의 압력과 부피간의 관계에 대해 신빙성 있게 묘사하며, 경험적 반복 가능성과 논리적 일관성의 테스트에도 합격하였다. 그러나 이 법칙이 특정한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도록 지시되었고, 신빙성과 유용성이라는 인정된 판단기준에 일치하도록 묘사된, 특정한 현상에 대한 기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현상이 연구할 만한 현상인가를 판단하고, 그런 현상에 대한 어떤 묘사가 가장 적절하고 만족할 만하고 유용하고 믿을 만한가뿐만 아니라, 어떤 종료의 데이터가 중요한가를 판단하는 일은 그런 판단 문제를 제기하는 사회적, 언어적, 과학적 관습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 이런 의존성에 대해서는 이 책의 3부의 도입부분에서 상세히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보일의 법칙의 성과를 한정적인 것으로즉 그 법칙이 발생되는 컨텍스트에 의해 제한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단순히 강조하려 한다. 21
과학계 내에서의 이해관계의 우선순위와 성공 여부의 판단 기준을 결정하도록 돕는 사회적, 언어적 관습에는 감정적 몰입(사회적 , 정치적 개입뿐만 아니라) 때문에 생긴 여러 편애가 잘 표현되어 있다. 마음에 맞는 묘사를 뽑고 그보다 마음에 덜 드는 묘사를 버리는 일은 바로 이런 일상적인 관습을 통해서 일어나며, 바로 여기에서 이데올로기의 전보적 힘이 발휘된다. 21
객관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너무 조급하게 익명성, 공평무사, 비개인성을 주장하고 철저히 주관을 배제하면서 이런 관습에 베일을 씌우는데, 이 베일은 비밀의 베일이 아니라 동어반복의 베일이다. 겉으로는 자명해 보이므로 이 관습들은 보이지 않고, 그래서 비판받지 않는다. 보편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저절로 종결되고 편협성은 보호받는다. 이런 식으로 과학적 객관주의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목표를 저버리게 되고, 객관적 탐구의 의미와 잠재력은 모두 약화된다. 21
과학 지식의 추구를 보편적인 목표로 재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런 추구의 특정한 특징들을 변하지 않는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공동체가 진화되어 온 것으로 간주하는 다른 특징들은 보다 편협하다. 가령 무의시적으로 습득된 습관들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으로 내재화되어 당연시된 습관들이 그러하다. 따라서 모든 분야의 과학자들은 불변수처럼 느끼지만 실상은 변하기 쉬워 적당한 종류의 동요가 가해지면 쉽게 변하는 전제들과 함께 살아가며 일한다. 다른 모든 공공의 관습처럼 그런 편협성은 오직 차이의 렌즈를 통해서만 인지될 수 있으며,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공동체 밖으로 걸어나갈 때 이 편협성을 인지할 수 있다. 22
여성이자 과학자인 나에게 외부인의 지위는 쉽게 다가왔다. 페미니즘 덕분에 나는 그 지위를 한 특권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나는 과학의 특징적인 언어 내에 있는, 성별을 연상시키는 망조직에 대해, 자연스러운 것도 자명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우발적이고 당혹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나는 이런 연상들이 과학적 수사학의 표면에 있는 단지 장식적인 이미지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천을 위한 인지할만한 여러 함의와 함께 과학 이데올로기의 구조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각 에세이들은 이 연상조직을 조사하고 논의하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제1부에서는 역사적으로, 제2부에서는 정신분석학적으로 그리고 제3부에서는 과학,철학적으로 이 문제를 고찰하였다. 22
제1부
인간 정신과 자연의 역사적 결합
인간에게 자연은 인간이 자연에 붙이고 싶은 이름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자연에게 붙인 이름에 따라, 즉 자신이 선택하는 관계와 관점에 따라 자연을 지각한다.
- 어니스트 스켁텔
자연을 명명하는 일은 과학이 하는 특별한 임무이다. 이론들, 모델들, 그리고 묘사들은 정교한 이름들이다. 명명하는 행위를 하면서 과학자들은 <자신이 선택하는 관계와 관점에 따라> 자연을 구성하고 동시에 포용한다. 물론 개개의 과학자가 자신의 <관계와 관점>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맺는 관계와 관점은 과학 공동체 속으로, 그리고 그 공동체가 속해 있는 문화 속으로 사회화되어 들어가는 과정의 일부이다. 따라서 관계와 관점은 명명의 첫 단계, 즉 실제로 작업을 하는 과학자가 이용할 수 있는 언어학적 부분집합을 형성하는 단계를 구성한다.
그러나 자연을 명명하는 일이 과학의 특별한 임무라면, 과학을 명명하는 일은 사회의 책임이다. 도처에서 사람들은 자연 세계에 대한 어떤 믿을 만한 형태의 지식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과학을 정의하면서 현재 그 용어가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방법대로 규정한다면 - 우리가 소위 과학자들이라고 부르는 개개인들이 현재 하는 식대로 규정한다면 - 그때 우리는 서구사회에서 행해지는 이런 추구의 특정한 형태에 대해 말하는 셈이 된다. 즉 17세기 이후 발전해 온 한 가지 형태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런 형태를 정확하게 구분짓는 일은 과학이란 표제 아래 다양한 훈련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어려워졌지만, 기준이 되는 차원들 - 근대과학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가치관, 목표, 가설들은 - 비교적 분명하다. 이런 기준들이 과학 지식의 추구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유사한 야망이 과거에 취했던 대안적 형태로 되돌아가 조사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자연 세계에 대한 믿을 만한 지식을 추구하는 방법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여 왔을 뿐 아니라, 지식과 자연에 관한 우리의 정의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해 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28
이런 변화 밑에서 과학에 대한 모든 비전에게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두 개의 형태를 취한다. 첫번째 질문은 이론적인 것으로, 무엇이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가이며, 두 번째 질문은 실제적인 것으로, 우리가 어떻게 그런 지식을 달성할 수 있는가이다. 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인간 정신과 자연, 그리고 그 주체와 객체에 대한 숨겨진 이미지들에 의해 서로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숨겨진 이미지들이, 우리가 지식을 설명하기 위해 가정해야 하는 인간 정신과 자연간의 관계를 지배한다. 그리고 일단 이 관계가 가정되면, 이 관계에 따라 불가피하게 조사가 이루어진다. 주체와 객체간의 조정, 공유, 또는 교류가 없다면 지식은 가능하지 않다. 28
서구 역사상 그런 조정을 나타내는 가장 흔한 은유 중 하나는 성관계였다. 성이 지식의 한 형태이듯이, 지식은 소비의 한 형태이다. 이 둘은 모두 욕망에 의해 추진된다. 환상이나 경험 속에서든지 혹은 언어상의 전의에서든지간에, 성적 결합은 인식행위 중에서 가장 강제적이고 가장 원시적인 예로 남아 있다. 은유에 의해 인식되지 않을 때에도 인식의 경험은 육욕적인 것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렇지만 그 경험이 육욕 속에 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지식이 다른 것과 구별되는 점은 지식이 본질적으로 육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즉, 지식의 야망은 육욕적인 것을 초월한다. 인간 정신은 단순히 물질 속에 내재해 있지 않다. 인간 정신은 물질을 초월한다. 지식에 대한 모든 비전은 따라서 내재론과 초절성간의 변증법과 투쟁해야 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일은 이런 투쟁을 하는 은유의 장이 얼마나 자주 성과 성별의 장인가 하는 점이며, 그래서 나는 그런 은유들이 얼마나 깊이 지식의 전문 분야에 영향을 미쳐 왔는가에 대해 토론할 예정이다. 29
그러나 성이 서구의 문화 전통에서 변함없이 지식의 개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과 성별의 의미는 그렇지 못하다. 각 문화에서 성과 성별의 개념은 그 개념을 자신의 것으로 포용한 사회의 성격전체뿐만 아니라 그 개념들을 발설한 개개인들이 갈망과 두려움까지도 반영한다. 성과 성별의 개념들 속에 있는 차이점들이 지식의 개념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예증하기 위해, 나는 서구 지성사의 세 시기를 선택하여, 과학 이전의 역사와 초기 과학사에 존재했던 세 개의 다른, 자연과의 대안적 관계와 관점을 보여주려 한다. 각각의 관계와 관점은 다른 과학-성별 체계를 예시한다. 이 세 시기는 모두 기밀하게 얽혀 있어서 우리가 물려받은 근대의 유산 속에도 이 시기들의 영향력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지만, 이 세 시기간의 일치하지 않는 점을 인식하는 일은, 우리 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인간 정신과 자연과의 특별한 관계에서 무엇이 문화적으로 특수한가를 인식하는데 주요한 열쇠이다. 29
제1부의 첫 에세이, 즉 제1장은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성의 이메저리를 조사한다. 이 이메저리는 아테네 문화의 성도덕에서 알 수 있듯이 플라톤의 철학 작품에 중요한 하부구조를 제공한다. 이 이메저리를 분석해 보면, 서구의 지성사 전반에 걸쳐 계속해서 반향되었던 플라톤의 인식론 내에서는 성욕이 에로스와 공격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분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플라톤 자신이 사용한 이 구분은 독특했다. 지식을 이론(체험과 구별하여)의 영역에 제한시키고, 자연을 형상(질료와 구별하여)의 영역에 제한시킴으로써, 플라톤은 사랑이 인도하는 지식 그리고 공격성으로부터 격리된 지식으로 가는 길을 표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플라톤과 그의 문화는 모두 공격성이란 단어로 감각적이고 물질적이며 여성적인 성질을 연상한다. 29
그후 2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 프란시스 베이컨은 지식에 도달하는 또 하나의 길을 제공한다. 그러나 베이컨이 갖고 있던 지식에 대한 이상은 이론적이라기보다는 경험적이다. 즉 그가 염두에 두던 지식의 대상은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였지, 추상적인 형상의 세계가 아니었다. 플라톤에게 그랬듯이 베이컨에게도 주된 은유는 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이컨의 은유는 플라톤의 것과 달리 동성애 관계보다는 주로 이성애의 관계, 즉 사실상 플라톤 시대의 전형적인 결혼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이성애의 관계이다. 따라서 베이컨의 결혼에 관한 이메저리는 플라톤이 간신히 피했던 공격성을 담고 있다. 그래도 베이컨의 글에는 중요한 모호성이 남는다. 그의 이메저리는 순수하게 이성애의 사랑도 아니며 전적으로 남성적이지도 않다. 제2장 <베이컨의 과학: 지배와 복종의 기술>은 베이컨의 언어를 분석하여 이 모호성을 탐구한다. 30
제3장은 근대과학의 <탄생>을 둘러싼 일부 논쟁 속에 들어 있는 성과 성별의 언어를 조사한다. 특히 이 장은 영국의 왕립협회가 설립되기 직전 수십년간 있었던 <새 과학>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시각, 개괄해서 말하자면 기계론적 철학과 연금술 철학간의 논쟁에 초점을 맞춘다. 결국 승리를 거둔 기계론적 철학이 초기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남성과 여성의 양극화를 가져왔으며, 이 양극화를 견고히 하는 것을 도왔다고 나는 주장한다. 최종적으로 이 에세이가 강조하는 점은, 성별 이데올로기가 근대과학의 사회적, 정치적, 지적 기원 사이에서 중요한 조정 역할을 한 매개자로 간주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30
제1장
플라톤의 인식론에서의 사랑과 성
당신은 고대의 위대한 스승, 플라톤이나 이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 글에 대해 알 필요가 없으며, 그들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들의 권위의 마술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의 사고 전체, 그 사고가 활동하는 장소인 논리 범주들, 그 사고가 사용하는 언어 양상, 이런 모든 것들이.... 주로 고대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산물인 것이다.
- 곰페르츠, 슈뢰딩거(1954)에서 인용
플라톤은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 성욕의 언어를 솔찍하고 체계적으로 사용한 서구 지성사의 첫 저자였다... 31
플라톤은 그 이전의 그리스 사상가들처럼 인간 정신과 자연이 어떤 공통된 본질에 의해 묶여 있으며, 또한 어떤 본질적인 차이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 정신과 자연의 공통성은 결국 언어적 보증과 다름 아닌 것으로 인정되었다. 로고스라는 단어의 사용은 (인간 정신의 속성과 세상의 속성을 동시에 가리킨다) 이 둘간의 개념적 연결을 반영하고 인정한다.
그리스 사상가들은 자연 속에 있는 인간 정신의 존재를 가리켜, 자연과학을 가능케 하는 자연계의 규칙성이나 질서의 근원으로 간주하였다. 32
그렇지만 자연이 로고스와 완전하게 결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본질적으로 이중성에 갇혀 있다. 자연이 어떤 점에서 이성과 질서의 빛에 복종한다면, 또한 비이성과 무질서의 어두운 힘에도 굴복한다. 비이성의 힘은 그리스 신화와 극에서 자주 지상의 여신이나 복수의 여신으로 구현되었으며, 그들이 진압되었을 때에도 결코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다. 인간 정신은 결코 육욕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하므로, 영혼을 정열의 손와귀와 육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 . 플라톤이 스스로 떠 맡은 임무는 비합리성의 전복적 힘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으며, 인간 정신이 내재론과 타협하면서도 초절성을 달성하도록 만드는 인식 이론을 형성하는 일이다. 그의 해결책은 급진적인 것으로, 인식의 고유 대상을 완전히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자연의 영역 밖에 있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인간의 정신도 유사한 순화작용을 겪는다. 자연이 탈물질화되었듯이 인간 정신도 육체에서 분리된다. 플라톤에게 진리를 순수하고 절대적인 존재의 영역에서만 접근 가능한 것으로, 인간 정신의 시선의 방향을 물질로부터 돌리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들의 영역을 꿰뚫어 그 너머를 바라다보는 법을 배움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오직 그때에만 인간 정신은 자연간의 진정한 만남 내지는 결합이 발생할 수 있다. 33
플라톤의 인식론은 가변성의 물질을 제외시켰고, <비합리적이고, 우발적이고 무질서한 힘>이라고 포기하였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은 계속 남는다. 즉, 죽어 없어질 육체에 심어진 인간 정신이 어떻게 진리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향연>>에서 설명한 플라톤의 대답은 주목할 만하다. 인간 정신은 에로스의 안내를 받을 때 지식을 발견하다. 이 지각의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의 감정을 올바르게 사용하면서 나아가는 사람이... 그 영원한 미를 보기 시작할 때, 그는 자신의 목표에 거의 다다른 것이다. 더 나아가서 <미를, 그 미를 바라볼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바라볼 때 그 사람은 단지 선의 영상만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선을 포착할 수 있다.> 요켠대, 욕망이 사랑을 낳듯이 사랑도 지식을 낳는다. 33
그러나 모든 욕망이 사랑을 낳는 것은 아니며, 모든 사랑이 지식을 낳는 것도 아니다. 에로스는 영혼을 이성과 정열, 숭고와 비열함 두 방향으로 이끈다. 초절성과 내재론 사이의 변증법은 이제 에로스의 영역에서는 이미 기력이 쇠진한 상태이다. 그리고 플라톤이 계속해서 되돌아 오는 곳이 바로 이 영역이다. 34
이성애의 욕망은 플라톤이 볼 때 초월에 기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욕망은 육체적 출산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창조 본능을 가진 사람들은 여성에게 의지하고 이 방향으로 그들의 사랑을 보인다. 그리고 그들은 아이들을 낳으면서 그후에도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축복받은 추억을 손에 넣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신적인 창조 본능을 가진 사람들도 있어서, 이들은 육체적이 아닌 정신적인 자손의 생산을 갈망한다. 이들에게 이런 자손을 창조하며 탄생시키는 일은 정신의 본질이다.> 오직 정신의 욕망만이 - <선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망> 만이 - 존재의 영역 속에서 생산으로 나아간다. 플라톤이 말하는 정신적 출산의 모델은 남자가 남자에게 품는 사랑이다. 34
플라톤이 새로 구상한 남색적 사랑은, 여전히 계급적이지만 지배로부터는 모면하였으며, 성애적이나 계속해서 내적인 불평등을 겪는 지식 형태의 은유를 제공한다. 결국 사랑의 대상이 애인 자신이 아니라 그 애인 속에 있는 사상, 이데아의 <이미지> 이듯이, 인간이 이해하려는 것은 혹은 알려고 하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이 대상들이 나타내는 형상인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 체계 전체에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육신화된 개인은 무시하는 구절이 널리 퍼져 있으며, 특히 사랑에 대한 이론을 설명할 때 그러하다. 플라톤의 철학 체계와 사랑의 이론은 모두 블라스토스의 말처럼 <명백히 관념 중심적>이며, 언제나 개인적인 성질과 특별한 성질을 초월하려고 노력한다. 41
현대의 자연철학자들은 물질적인 자연에 대한 지식의 탐구에 열중하고 있다. 이는 플라톤식 사로 같은 이데아 중심적 사고의 강조를 배제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플라톤 특유의 지적, 감정적 풍경의 구조화의 상당 부분이 이런 새로운 개념 속에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특히, 플라톤은 논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구분하였고, 이것은 현대에 들어와 순수와 응용을 구분할 뿐아니라, 이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론물리학의 영역에 속하는 현대의 물리학자들이 자연법칙을 연구하고 있으며, 물질적 자연이 종속되는 권위와의 친교관계를 탐구한다. 자연은 이처럼 물질적 요소와 이론적 요소로 분리되어 있는데, 전자는 후자에 <복종>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론적 세계의 내부 구조 자체가 플라톤의 위계 질서와 유사한 위계 질서를 반영한다. 즉, 물리학이 모든 다른 법칙을 파생시키는 단 하나의 통일된 자연법칙의 발견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물리적 사계 자체에 관심을 돌림으로써 현대의 과학자는 물질적인 것을 포함시키는 데 반대한 플라톤의 구조를 필연적으로 능가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서 현대의 물리학자는 플라톤이 피하려 했던 공격성의 편을 들게 된다. 현대 물리학자의 연구의 목표는 이제 더이상 플라톤의 형상 즉 정화된 남성 성욕의 농축이 아니라, 물질적인 자연, 즉 여성 성욕의 육회된 틀이다. 따라서 과학의 목표와 방법까지도 변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해의 의미가 달라진다. 남성에게 여성으로 대상이 바뀌는 변화와 일치하여, 이해도 더 이상 친교에 목표를 두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목표를 둔다. 이해의 목적이 자연의 지배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근대과학은 플라톤의 각본을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플라톤의 경고성의 충고에는 주의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각본에 따르면, 물질적 자연과의 교류는 여자와 노예에게나 절절한 지배와 공격을 불러내지 않을 수 없다. 근대과학의 언어는 새로운 이미지들을 불러낼 때조차 그 불가피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 같다. 즉 동성애적인 결합이 이성애적인 정복에 의해 대치된다. 42
현대에 출현한 새로운 이메저리의 근원은 프란시스 베이컨임이 분명하다. 이 사람은 근대과학의 건설자로 그리고 지식과 권력의 동등함을 찬양한 사람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베이컨은 과학에 대해 <사물의 본질적인 성질>과의 숭고한 정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과 자연과의 정숙한 합법적인 결혼>으로 생각한다. 42
이 결혼의 정숙함은 인간 정신과 자연 사이의 경계를 보존시키고, 그 경계의 보존과 함께 배우자들 사이의 차이점을 보장한다. 자연은 법칙에 구속되어 있으나 마음이 비어 있다. 베이컨의 비유에 들어 있는 성숙함은 플라톤의 비유에 들어 있는 성적 억제의 기능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 즉 정숙함은 에로스와 공격성의 분리를 유지시키지만,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과의 관계를 공격성으로부터 보호한다기보다는 에로스로부터 보호한다. 두 비전 중 어디에도 사랑의 협력 관계로 유도된 물질적인 성질(플라톤에게나 베이컨에게나 여성적인 성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자의 경우 여성은 다른 영역으로 추방되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유혹을 받아 정복당했다. 여성은 가장 <은밀한 내실>에서도 보호막이 없는 상태로 노출되고 침입당해 권력을 빼앗겼다. 여성의 비밀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근래에는 분노의 여신들이 정복당했을 뿐 아니라 패배당했다. 베이컨과 플라톤 사이에 여러 차이점이 있지만 가장 인상적인 점은, 대개 이런 차이들은 일단 물질적인 자연에 대한 연구로 주의가 전환되면, 이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그리고 에로틱한 것과 공격적인 것을 구분한 플라톤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베이컨이 플라톤의 세계관으로부터 상속받은 인간 정신과 물질 그리고 남성과 여성간의 위계 질서적인 관계는 플라톤이 배제했던 바로 그 공격성을 포함시킨다. 베이컨은 플라톤의 이론을 거부하지만 여전히 플라톤의 기본범주에 충실하며, 지식에 대한 비전도 플라톤에게서 발생했던 것과 똑같은 애매성을 공유한다. 43
이 논문의 결론에 대신하여, 철학의 연구에서 대안적인 각본이나 다른 성욕 모델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 타당하고 생각된다. 결국 플라톤이 규정한 새로운 형태의 남색적인 사랑에 대한 정의는 그가 이용할 수 있었던 문화 모델의 구속을 받았고, 또한 이 문화 모델이 수용할 수 있는 남성들의 욕망 형태에 부과한 제약의 구속을 받았다. 이런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상호적으로 충만되는 성욕의 예, 즉 공격성을 자동적으로 자극시키거나 지배를 불러내지 않는 성욕의 예를 제공했으리라고 상상될 수 있는 유일한 모델은, 여성들의 동성애 경험에서 나왔거나, 여성들의 이성애 경험에 대한 시각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이런 분석읗 할 때 제기되는 질문은 분명히 이런 것이다. 성욕에 대한 이질적인 개념, 그리고 남성성에 대한 이질적인 개념이 어떻게 플라톤이 우리에게 물려준 지식에 대한 개념과, 인간 정신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개념을 수정할 수 있을까? 43
제 2장
베이컨의 과학: 지배와 복종의 기술
베이컨은 과학을 권력으로 간주함으로써 구원의 길을 찾았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그는 인류 구원의 길이 과학의 바로 그 권력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 권력을 가정하고 행사하는 것이 남성의 도덕적 책임이 되었다. 그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과학을 권력인 동시에 구원으로 보는 비전은 틀림없이 양쪽 면에서 모두 멋진 생각으로 보였을 것이다. 45
역사가 전개되어 감에 따라 베이컨의 비전은 새롭게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그 관심의 성질은 변화되었다. 대중의 신뢰와 낙관주의는 근심으로 바뀌어졌고, 일부분의 과학의 비판자들은 과학적 자극에 내포된 공격성에 대해 새롭게 근심하기 시작했다. 46
나는 베이컨이 실제로는 과학의 옹호자들이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것보다 더 진실된 과학적 자극 정신의 모델을 우리에게 제공하였고, 과학의 비판자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모델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베이컨 모델의 정교성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의 은유 속에 내재해 있는 성의 변증법을 설명하는 일이다. ... 베이컨은 그 다음 세대의 과학자들이 합법적인 성의 지배에 대한 보다 일관성 있는 은유를 발췌할 수 있도록 언어를 제공했다. 46
베이컨의 은유
베이컨의 비전은 무엇이었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통치하고, 지배하고 정복할 수 있도록 이끄는 과학에 대한 비전이었다. 즉 <자연의 지배를 가동시키는> 과학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권력이 하나로 만나는 곳>이 바로 과학이고, 권력에 대한 인간의 선천적인 야심이 건설적이고 숭고한 인간적인 분출구를 발견하는 곳이 과학이다.
인간 야심의 세 가지
. 고향에 대한 자신의 권력을 확장시키려는
. 고향에 대한 권력과 지배력을 인간에 대한 것으로 확장시키려는
. 인류에 대한 권력과 지배를 우주 전체로 확장시키려는
베이컨에게 과학의 목표는 인간이 처음으로 창조된 상타에 갖고 있던... 통치권과 권력으로 인간을 회복시키고 재투자하는 것이었다. 어떤 방법으로, 어떤 근거에서 과학은 그런 권력을 얻을 수 있는가? 그리고 과학이 취해야 할 모습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베이컨은 자신이 자주 사용하는 성의 이메저리를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은유적으로 대답한다. 자연을 묘사할 때 성별에 호소하고 성의 이메저리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흔히 있는 일이다. 베이컨의 성별 사용이 정복과 지배에 대한 그의 개념에 얼마나 깊이 연루되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중요하다. 정보가 지배가 변함없이 <여자>로서의 자연에 대해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거의 우리들의 주의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며, 실제로 경시된 적이 없다. 48
베이컨은 <인간 정신과 자연간에 정숙하고 합법적인 결혼을 성사시키자>라고썼다...<... 합법적인 결혼생활 속에서 당신을 사물과 결합시키는 것입니다.그러면 당신은 이런 결합으로부터 상승하여, 평범한 결혼의 모든 희망과 기도를 너머, 축복받은 부류인 영웅과 슈퍼맨이 되도록 보장받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물이란 단어는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신부는 바로 자연이어야 하며, 이 신부는 과학 정신에 의해 길들여지고, 모양지어지고, 정복되기를 바란다. <나는 실제로 자연과 자연의 자식들을 당신에게 인도하여 자연이 당신에게 봉사하도록 만들고, 그리하여 당신의 노예가 되도록 유도하기 위해 왔다> 48
과학 지식의 훈련과 그 훈련이 유도하는 기계발명은 <단지 자연의 행로를 점잖게 지도할 뿐 아니라, 자연을 정복하고 복종시킬 권력, 그리고 자연의 토대를 흔들 수 있는 권력을 갖는다> 이런 모든 것은 그렇지만 진리에 봉사한다. 자연을 정복하고 복종시킴으로써 그리고 자연을 토대로부터 흔들어 놓음으로써, 우리는 자연을 변형시킨다기보다 자연을 드러내 보인다. 왜냐하면 <사물의 본질은 자연스러운 자유상태에서보다 기술의 고민아래에서 더욱 쉽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대문이다> 49
자연을 지도하고 모양짓고 쫓아다니고 정복하고 복종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사물의 본질>이 드러난다. 바로 이곳이 베이컨 철학의 경험적 측면이 표현된 곳이다. 경험은 행동의 정신을 표현하여, <알아내는 데> 헌신하는, <행하는 > 정신을 표현한다. 과학은 자연의 지시를 따름으로써 통제하지만, 이 지시들은 지배의 필요조건, 요구조차 포함한다. 49
<<시간의 남성적 탄생>>
남성적인 힘찬 과학의 탄생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과학의 수용성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잘못된 선입관>을 인간의 정신에서 말끔히 없애는 데서 발견될 수 있다.... 51
정신에 대한 이런 은유에서 중요한 개념은 수용과 굴복, 즉 <실제 사물에서 나오는 진정한 천연의 빛>을 방해받지 않고 받는 수용성이다. 오직 그때에만 <감각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고, 자연 속에 있는 더 큰 빛을 소등할 수 있다> 굴복의 이메저리는 베이컨이 인간 정신과 자연간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던 남성적 지배의 이메저리와 현저하게 대조적이다.
이 구절은, 진리의 수용과 과학의 개념을 보장하는 데 필수적인 절적한 정신자세를 추구한다. 신의 진리를 수용하기 위해 인간 정신은 순수하고 깨끗해야 하며, 복종적이고 열려 있어야 한다. 오직 이때에만 인간 정신은 남성적인 웅건한 과학을 탄생시킬 수 있다. 인간 정신은 신과의 관계에서 순수하고 수용적이고 복종적이 될 때, 신의 도움을 얻어, 자연과의 관계에서 강력하고 힘이 세고 웅건한 행위자로 변신할 수 있다. 오염으로부터 정화되었을 때 인간 정신은 신에 의해 수태되며, 그 행위 속에서 생식력을 갖게 된다. 즉, 자연과의 결합 속에서 힘이 세지고, 남성 자손을 낳을 수 있다. 51
인간 정신을 여성에서 남성으로 변형시키려는 의도가 이 작품의 구조에서 명확해진다. 첫 부분은 애원자의 목소리로 신에게 바치는 기도이다. 나머지와 본문은 성숙한 과학자의 목소리로 아들, 즉 남성 자손에게 말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의심할 여지없이 여성이며, 행동의 대상이다. 52
우리가 <나는 실제로 자연과 자연의 자식들을 당신에게 인도하여 자연이 당신에게 봉사하도록 만들고, 그리하여 당신의 노예가 되도록 유도하기 위해왔다.>라는 구절을 읽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이 아들에게 유산으로 <나의 유일한 세속적인 희망, 인간이 우주를 지배할 수 있는 통탄할 만큼 좁은 가능성의 한계를 그들에게 약속한 범위까지 확장하려는 희망을 물려준다.>
베이컨이 이제 그의 아들 겸 상속자에게 신과도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음을 주시하라. 52
해석과 결론
과학적 정신의 생산력과 남성성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배후에는, <인간의 정신과 자연간의 결합>이 변증법적인, 양성체적인 성질을 갖고 있음을 암암리에 가정하고 인정하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다. 53
베이컨의 은유의 이중적인 성격은 수용적이면서 동시에 잠재력이 있는 과학적 계획의 이중적 성격을 표현할 뿐 아니라, 어린 시절의 성욕의 편재적 환상을 표현한다. 과학자와 어린 아이가 사내답게 되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천부적인 재능으로써 얻어진다. 이 재능은 과학자가 <영웅들과 슈퍼맨>의 아버지가 될 여지를 만든다. 말하자면 이 재능이 과학자에게 자기 자신을 낳을 능력을 제공한다. 바로 베이컨의 은유와 어린아이의 환상의 이런 측면이 오이디푸스 프로젝트의 은밀한 양성적 성격을 드러낸다. 프로이트는 <자아와 이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54
"... 완전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중적이어서,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이며, 어린아이에게 원래부터 있는 양성성에 기인한다. 한 남자아이는 아버지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가질 뿐 아니라, 어머니에 대해서는 애정에 찬 객체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처럼 행동하며 아버지에게는 애정어린 여성적 태도를 보이고 어머니에게는 그에 따른 적대감과 질투를 보인다. "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하고, 동시에 아버지와도 동일시하려는 충동은, 오이디푸스 소년이 <자기 자신의 아버지가 되고 싶은 희망>을 갖는다고 묘사한 프로이트의 말에서, 체면을 세우는 경제적인 표현을 발견한다. 이 표현의 경제성은 압축에 의해 달성되며, 싹트는 남성적 자만심은 생략에 의해 유지된다. ... 압축과 생략을 통해 이 환상은, 생존해 있으나 숨겨진 소원, 더 이상 수용될 수 없다고간주되던 소원, 즉 여성적 소원을 허용한다. 따라서 자신을 낳은 아버지들의 부류와 동일시함으로써 그 소년은 자신의 자주성을 주장하고 동시에 어머니와의 동일시하려는 이전의 상충적인 소원을 보호한다. 대담하게 자신의 자신의 아버지로 생각함으로써 그는 전능한 자부심을 가지려는 소원을 충족시킨다. 55
모성을 전유하고 부인하려는 이중적인 충동을 압축하는 베이컨의 은유는 어린 소년의 오이디푸스적 야망과 흡사해보인다. 이처럼 베이컨의 은유는 어머니 없이 살아갈 수있는 곁길, 그에 대한 보상, 그리고 방법을 제시한다. 아버지와 동일시는 여성적인 것을 전유함과 동시에 부인할 것을 허용하므로, 전능함을 보장한다. 어린아이와 과학은 이제 남자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55
이런 해석의 맥락에서는베이컨의 성적 공격성이 어느 정도 방어적인 성질을 띠기 시작한다. 이 이메저리에서 가장 즉각적으로 주목하게 되는 점은 주체로서의 여성성을 부인한다는 점인데, 이 점은 자주 과학적 노력의 일반적 특성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이메저리를 보다 면밀하게 조사해 볼 때, 이렇게 표면적으로 여성성을 단순히 부인해 버리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성적 양식과 협력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베이컨이 말하는 과학자의 남성적인 공격적 자세는 베이컨을 포함한 모든 과학자들이 개인적으로 터득했던 사실, 즉 과학 정신은 어떤 수준에서는 양성적인 정신이라는 사실을 부인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강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제는 응당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55
현시대에 들어서 겉으로 드러나는 신의 역할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그래서 과학적 환상은 보다 독자적이 되었다. 베이컨은 과학 정신의 이중적 측면을 분할하여, 이 기능 중의 하나는 인간 정신과 신의 관계 혹은 인간 정신과 성스러운 자연과의 관계의 탓으로 돌렸고 나머지 기능은 자연의 탓으로 돌렸으나, 현대의 과학자는 그러지 못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과학자에게는 오로지 하나의 자연이 있을 뿐이고, 오로지 하나의 인간 정신이 있을 뿐이다. 베이컨이 신을 위해 남겨놓은 생식 기능을 과학자가 떠맡았으므로 과학자의 정신은 이제 단 하나의 실재entitiy, 즉 남근과 자궁 모두를 나타낸다. 그렇지만 베이컨과의 유사성은 여성성을 전유하고 동시에 부인한다는 점에 여전히 생존해 있다. 56
그리고 남성적 번식의 꿈, 자신에게서, 아들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나타나는 꿈 - 그리고 그대 어머니는 없다.
- 엘렌 씩수, <<출구>> 1981
제3장
근대과학의 탄생 시기의 정신과 이성
근대과학이 특정한 사회적, 정치적 컨텍스트로 발전되었고, 또한 그런 컨텍스트를 형성하는 것을 도왔다면, 성별에 대한 특정한 이데올로기와도 협력하여 발전되었고, 또한 그런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것을 도왔다고도 볼 수 있다. 나는, 과학 계획 내에 구체화된 특정한 가치, 목적의 체계가 형성될 때 성별의 은유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점에 주의하지 않고서는 근대과학의 발달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58
이 논문에서 나는, 성과 성별의 언어에 주시하면 과학사의 바로 이 중요한 시기에 대해 새롭게 조명할 수 있으며, 이 역사의 비변칙적으로 보이는 특징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 언어를 분석해 보면 성별 이데올로기가 근대과학의 탄생과 그 탄생을 둘러싼 경제적, 정치적 변화들 사이에서 중요한 매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연구는 인간 정신, 이성, 그리고 남성성을 동일시하는 것이나, 정신과 자연, 이성과 감정,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이분법이나, 그 어느 것도 역사적으로 불변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동일시하는 것이나 이분하는 것이나 모두 그 뿌리는 고대에서 온 것이지만, 17세기에 이 모든 용어들이 두드러지게 양극화되었고, 성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과학에 중요한 결과를 미치게 되었다. 58
이예를 들기 위해 나는 왕립협회가 창립되기 직전에 있었던 지적 논쟁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그 시기의 지성사를 도식적으로 묘사하는 일은 가능하다. 즉 두 개의 경쟁적인 철학, 연금술과 기계론의 용어로 묘사하는 일이 가능하다. 이 두 철학은 개인적인 사색가들의 마음에서조차 자주 서로 겨루었던 <새로운 과학>에 대한 두 가지 버전이었다. 연금술의 전통에서 물질적 자연은 정신으로 충만해진다. 따라서 연금술에 대해 이해하려면, 심장, 손, 정신 공동의 통합된 노력이 필요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기계론 철학자들은 정신으로부터 물질을 분리하고, 심장으로부터 손과 마음을 분리하려고 노력하였다.그렇지만 이 두 전통 사이에 그어진 선은 대략적으로만 그려진 상태이다. 나는 이 논쟁을 둘러싸고 있던 구분들, 그후 여러 해에 걸쳐 보다 날카로워진 구분들을 미리 예고했던 지적, 정치적 분위기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이 논문을 시작하려 한다. 59
새로운 과학에 대한 경쟁적 비전들
17세기 영국의 지적 분위기는 물질적 자연에 대한 경험적 지식, 즉 인간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 같던 지식을 추구하는 데 고조된 관심을 기울이고, 또한 인간의 마음을 쥐고 휘둘렀던 고대 철학자들의 세력에 연합하여 저항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 동요의 중심에는 당대의 연금슬 전통의 대표자들, 즉 르네상스 시대의 연금술사들이 있었다. 16세기의 파라켈수스의 저술들에 의해 고무된 17세기의 연금술사들은 주로 화학적으로 조제된 약의 변형시키는 힘, 특히 치료하는 힘에 관심을 가졌다. 하찮은 금속을 금으로 변화시키려던 그들의 노력이 바로 전형적인 예였다. 그들의 주요 업적과 영향력은 화학과 의학에 있었다. 59
파라켈수스 철학에 대한 관심은 1840년대와 1650년대, 즉 청교도 혁명시기의 영국에서 절정에 달했다. 직접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계몽에 대한 강조는 그 시대의 종교적 정치적 야심과 잘 일치하였다. 연금술 철학의 원리는 옥스퍼드 구룹(왕립협회의 전신)의 회원을 포함한 많은 사상가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지만 특히 정치적, 종교적, 과격론자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 같다 . 그러나 1650년대에는 ... 주요 지식인들이 연금술에 대해 동조하던 과거의 충성을 버리고, 새로 출판된 가생디와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관점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 1660년대 말경, 주도적인 온건파 성직자들이 연금술에 반대하는 강력한 켐페인을 벌였고, 적어도 그들 중 몇 사람은 곧 왕립협회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1660년 이후 저울은 완전히 기울었고, 1670년대 후반부에는 경쟁이 모두 끝났다. 1662년 설립되어 새로운 과학의 제도화를 출범시킨 왕립협회에 대해, 많은 회원들은 베이컨식의 프로그램이 실현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60
연금술의 극적인 관심 고조와 극적인 관심 소멸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두 가지 측면에 주의를 기울였다. 즉 연금술사들의 <반합리주의>와 그들의 급진적인 종교적 이설이 그것들이다. 60
1640년대와 50년대 사이에 반란의 세력들이 터져나오자, 지적인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반동적인 보수주의가 널리 조장되었다. 연금술은 이런 반작용의 과녁이 되었다. 초기 베이컨주의자들의 사회개혁주의도 또 다른 과녁이 되었다. 사회적 교육적 야심이 없는, 보다 환원주의적인 경험과학이 가장 안전한 길인 듯이 보였다. 61
최근에 들어서 역사가들은, 이 기간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지적인 전복과 병행하여 일어난, 그리고 그 전복들과 뒤얽혀 있는, 성욕과 성별의 역할에 대한 개념과 태도상의 미묘하지만 중요한 변화를 밝혀내기 시작하였다. 이 변화는 <새로운 과학>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17세기 담론에서 널리 사용된 성의 언어에 명백하게 반영되어 있다. ... 이 언어를 분석해 보면 프란시스 베이컨과 파라켈수스 추종자들 사이의 결별을 이해하게 되는 데, 이 결별은 혁명 후의 논쟁에서 매우 중요해진다고 나는 주장한다. 62
베이컨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변형시킬 수 잇는 힘과 더불어 과학과 기술이 도래할 것을 예견하였다. 그의 중심적 은유, 즉 권력으로서 과학, 자연에 침투하여 굴복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력한 힘으로서의 과학이라는 은유는 근대과학의 수사학에 침투하게 되는 하나의 이미지를 제공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연금술사도 또한 과학에 대한 비전에서 권력을 추구하였으나, 그들에게 권력은 매우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권력과 과학에 대한 이런 두 개념 사이의 차이는 그들의 비전의 근거가 되는, 대립되는 성의 은유에서 쉽게 볼 수있다. 62
베이컨의 기본적인 은유가 자연을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강요하여, 인간의 노예로 만드는, 인간 정신과 자연 사이의 정숙하고 합법적인 결혼이라면, 이것은 구속을 강조하고 인간 정신과 자연 사이의 분열을 강조하여, 궁극적으로 지배를 강조한 것이다. 반면에 연금술사들의 기본적인 은유는 결합, 즉 인간 정신과 물체의 결합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융합이었다. 베이컨이 사용한 은유의 이상은 남성적인 초인간이었고, 연금술사의 이상은 남성 양성자였다. 그들에게 권력은 <여러 요소들과 공존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었다. 63
연금술을 다루는 텍스트들은, 태양과 달의 관계, 형상과 물질의 관계, 영혼과 질료의 관계, 인간 정신과 자연과의 관계의 기본이 되는 조화의 원리를 나타내는 은유로 그리고 요컨대, 연금술사들의 우주를 보는 관점의 기본이 되는 은유로 결혼을 맹백하고 폭넓게 사용한다. 63
데카르트 철학의 초기의 옹호자, 왕립협회의 특별 회원이었던 헨리 모어, 모어의 태도에 동조하고 연금술사들의 비전에는 반대한 왕립협회의 서기였던 헨리 올덴버그, 왕립협회의 의도가 <남성적 철학을 고양하고.... 그럼으로써 인간 정신이 견고한 진리들에 대한 지식으로 숭고해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66
글랜빌은<의지나 열정이 결정적인 목소리를 낼 때, 진리의 사정은 절망적이다.... 우리들 속에 있는 여자는 에덴 정원에서 시작되었던 것과 똑같은 속임수를 여전히 쓰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이해력을 불행의 어머니만큼 치명적인 이브와 결합된다> 요컨대, 글랜빌은 <애정이 휘어잡고, 여성이 통치할 때> 진리란 결코 얻어질 수 없다고 결론 짓는다. 67
연금술사들은 페미니스트들이 아니었다. 여러모로 그들은 그들 시대의 여자들에 대한 보편적인 경멸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여자의 생산적 힘은 존경, 외경 그리고 시기의 문제로 남아 있었다.실제로 여자의 출산 능력은 신의 축복의 표시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미지>가 남자로 새겨진 것과 똑같이 여자로도 새겨졋다고 생각하였다. 67
따라서 남녀 양성적 결합에 참여하는 일은 신이 갈망한 일이었다. 베이컨은 연금술 관점과 기계론적 관점 사이의 과도기적 인물이었다. 그는 <저절로 작용하는> 지성에 대한 불신과 사회개혁에 대한 관심을 연금술사와 공유하였다. 그러나 성별과 성욕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를 왕립협회의 특별 회원들과 유사한 사람으로 특징짓게 한다. 그의 성별과 성욕에 대한 태도는 과학을 <축복받은 영웅과 슈퍼맨의 부류>, 즉 <자연을 쫓고>, <자연을 정복하여 굴복시킬 수 있고>, <자연을 토대까지 흔들 수 있고>, <자연의 성과 요새를 습격하여 점령할 수 있는> 힘 속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남성적 탄생>이라고 본 그의 비전에 표현되어 있다.
근대과학의 아버지들은 한 가지 측면에서는 연금술을 주장하던 조상과 완전히 결별하였다. 즉, 근대과학의 아버지들은 베이컨식 과학의 가부장적 이메저리는 받아들였으나, 연금술사들이 보다 참여적이고 에로틱한 언어는 거부하였다. 이를 보여주는 증거는 그들이 베이컨식으로 특권이 있는, 생산적인 지식을 표현하는 형용사로 <남성적인>이란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68
<기계론적 철학자들>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승리는 자연과 여자를 신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결정적으로 패배했음을 보여 주며, 따라서 자연과 여자에게 적어도 약간의 존경심을 보장할 수 있었을 과학이 패배했음을 보여 주었다. 68
마술에 대한 논쟁, 이 논쟁은 근대과학 탄생시에 가자 당혹스런 사건 중의 하나에 속하는 논쟁이다. 한편에는 왕립협회의 조셉 글랜빌과 헨리 모어가, 반대편에는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이며 화학, 물리학자인 존 엡스터가 서서 벌인 논쟁으로, 1660년대와 70년대 전반에 걸쳐 새로운 과학에 대한 절절한 정의를 둘러싸고 고조되었던 논쟁의 정점이 되었다.
과학과 마녀들
뉴턴이 신의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중력을 불러낸 것 처럼 그들은(모어와 글랜빌) 악마를 불러낸 것이다. 72
그랜빌에게 이 문제는 단순히 진리 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적당한 지식과 부적당한 지식의 문제였다. 73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초기 근대과학자들의 이데올로기적 참여의 특수한 성격이다. 특히 왕립협회의 초기 특별회원들의 상당수가 표명했던 이데올리기적 참여가 확연하게 <남성적> 과학과관련되어 있었다. 적어도 모어와 글랜빌에게 연금술사들은 종교적, 정치적 급진주의 때문만 아니라, 에로틱한 성의 이메저리에 기피이 젖은 과학에 관여하고 하나님 앞에서 여자들의 상징적인 동등성에 관여하기 때문에 위협적으로 보였다. 73
연금술사들에게 하나님은 물질 세계, 여자, 성욕에 내재해 있었다. 모어와 글랜빌에게 정숙함은 독실함의 조건이었고, 진리는 <모든 신체 내에 숨겨져 있기> 보다는 오히려 내정한 지성의 영역이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연금술사들이 하나님의 표시라고 간주한 많은 것들이 실상은 악마의 표시였다. 연금술사는 사랑의 힘과 성교와 지식간의 유사성을 강조하였고, 이것은 새로운 과학이 열정과 이단으로 말려들도록 위협하였다. 연금술사를 철학적으로 신착적으로 수상쩍게 생각하게 된 원인은 직접적으로 마녀 때문이었다. 17세기 우주론적 관점에서 볼 때 마녀는 바로 억제되지 않은 성욕에서 태어난 사탄의 초대를 상징하였다. 74
1486년, <<마녀의 악행>>
<모든 마법은 탐욕스러운 여자 속에 있는 육체적인 욕망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여자들은 악마와 사귄다.> 2세기 이후, 근대과학이 태어나던 순간에도, 마녀들은 여전히 여성의 성적인 힘의 두려운 위험을 구현하고 있었다.
17세기 영국에서는 마녀에 대한 광기가 극에 달하였고, 그래서 여성의 성욕에 대한 두려움도 극에 달했다. 이 기간의 극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는 당대에 일어났던 사회적, 경제적 격변이 성별과 성욕에 대한 특별히 날카로운 몰입으로 반사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성의 성적 과잉을 사회적 무질서와 분열과 연결시킨다. 74
마법의 실재는 여성들로 대표되는 위험, 즉 이성과 새로운 과학이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던 위험의 위중함을 효과적으로 입증하였다. 마법의 실재는 과학으로부터 여성, 성욕 그리고 연금술사들의 상호관계적인 <불건전한> 연구를 추방시키자는 주장을 강화시켰다. 새로운 기계론적 비전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우의적인 협력조차 배제함으로써 과학자에 대한 묘사에서나 자연에 대한 묘사에서나 남성성에 안전한 지적 영역을 제공하였다. 권력과 지배를 약속함으로써 새로운 기계적 비전은 남자들이 여자와 성욕에게 붙인 위험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을 제공하였다.... 새로 출현하여 우세하게 된 이데올로기 제도 안에서 과학은 순수하게 남성적이고 정숙한 계획이 되었고, 여성적인 성질과 서로 혼합되기 보다 오히려 지배하려고 노력하였다. 과학은 자연과 여자의 탐욕을 동시에 사라지게 할 것을 약속하였고, 실제로 더 빨리 사라지도록 도왔다. 75
변화하는 성별 이데올로기
유럽 전역에서 우세했던 성별에 대한 개념은 2백 년에 걸쳐 조금씩 변화되었고, 그래서 17세기 말경에는 그 이전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남성과 여성의 역할의 복수성이 상당히 감소되었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정의는 초기 산업자본주의가 요구한 직장과 가정의 구분에 잘 들어맞는 방법으로 양극화되고 있다. 여자와 남자의 영역 사이에 새로운 종류의 쐐기를 박았고, 이것은 시간이 흐름에 ㄸ라 모든 계층의 여자, 특히 중류와 상류 계층의 여자가 이용할 수 있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선택의 심각한 축소를 가져왔다. 새로운 이상형의 여자다움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영역 분리로 인해 생긴 중요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만개하는 데에는 그후 1백 50년이 걸렸다. 19세기경 탐욕스런 욕망을 가진 두려운 탐욕녀는 <가정의 천사>로 바뀌게 되었고, 이 정숙하고 성욕이 제거된 무해한 부양가족은 오직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유지하는 기능한 하였다. 여성의 힘을 가정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이전의 공공연한 여성 혐오가 감상적인 배려와 보호성의 염려로 안전하게 대체되었다. 76
왕정복고 이후 성별은 전보다 더 날카롭게ㅔ 구별되었다. 남성과 여성에게 귀착된 본성과 기능이 그들을 분리시켰고, 그래서 여자는 새로운 형태의 의존물로, 남성의 위치는 새로운 권위의 근원으로 강화되었다. 77
17세기 여자의 성적인 탐욕은 상당히 크고,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18세기 초 무렵에는 개정된 성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존경받던 중류 게층의 처녀들은 열정과 욕구를 박탈당했다. 성적인 반응은 결혼한 여자에게만 인정되었고, 그들의 남편에게로만 국한되었다. 결국 빅토리아 시대에는 여성의 정숙함에 대한 강조가 더욱 증가하여, 자본주의적인 중산층의 성장과 함께 이중적인 가치기준이 강화되면서 성적인 감정이 축소된 이상화된 천사와 도시 중심가의 지하에서 성을 거래하는 탐욕스런 가부장제 사이의 친숙하지만 괴상한 결합을 낳게 되었다. 78
과학혁명이 산업자본부의가 요구한 성별의 양극화에 응답하였고, 결정적으로 지지하였다고 나는 주장한다. 남성과 여성,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직장과 가정간의 구분과 동조하여 그리고 그 구분에 응답하여, 근대화학이 정신과 자연, 이성과 감정,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사이의 더 커다란 양극화를 선택하였다. 즉 점진적인 여자의 성욕 제거와 병행하여, 근대과학은 자연에 대해 활기를 없앤, 신성화되지 않는, 보다 기계화된 개념을 제공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학 자체가 능동적인 변화의 행위자가 되었다. 근대과학의 이데올로기는 남자들에게 남성적인 자만심과 남성의 용맹성을 위한 새로운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합리성과 객관성의 개념과 자연을 지배하려는 의지가 과학에 대한 특수한 비전을 지지했다면, 이들은 동시에 남자다움에 대한 새로운 정의의 제도화를 지지하였다. 여성적인 모든 것에 반대하여 정의된 근대과학이 일단 성공을 거두자, 자연과 여자에 대한 두려움이 진정되었다. 전자는 기계와 같은 기질로 환원되었고, 후자는 서열이 없는 미덕으로 환원되어, 엄마의 본질이 길들여지고 정복되었으며, 남성의 권력은 확인되었다. 79
과학이 만약 다른 성별 이데돌로기와 결합하거나 혹은 어떤 성별 이데올로기와도 결별하여 독자적으로 발달하였더라면 지금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해 보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일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특수한 이데올로기에 관여함으로써 과학 발달의 진로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에 대해 조사를 시작할 수 있다.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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