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주체와 객체의 내부 세게
근대에 들어서기 전까지의 자연철학사는, 근대과학과는 대조적으로, 흔히 투사의 역사로 묘사되어 왔다. 원시적인 마술로부터 점성술과 연금술에 이르기까지 자연현상을 설명하려는 초기의 시도는 객관성이 없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인간의 희망, 욕구, 그리고 두려움을 자연계에 부과했다는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83
이런 묘사는 근대와 더불어 새로운 형태의 인식이 탄생했음으르 시사한다. 남자들이 자율적인 우주, 즉 <의도나 목적이 없고, 운명에 따르지도 않는, 순전히 기계적이거나 인과적으로 작용하는> 우주를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자기 분리가 생겨난 것이다. 83
근대과학의 이데올로기가 부인할 수 없는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그 나름대로의 투사를 담고 있다는 것이 본 책의 명제이다. 즉, 무관심, 자율, 소외가 투사되어 있다. 나는 단순히 완전히 객관적인 과학의 꿈은 이론상으로 실현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꿈속에는 그 꿈이 거부하는 것, 즉 자기 이미지가 반영된 흔적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객관주의의 환상은 자신의 이미지를 자율적이고 객관화된 것으로 되반영한다. 여러 다른 객체들로 구성된 외부 세계로부터 분리되고 동시에 그들 자신의 주관성으로부터도 분리되어 자신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개개의 객체들에 대한 이미지를 반영한다. 그리고 바로 이 몰개인성에 대한 투사, 즉 욕망, 희망, 신념의 영향을 피했다는 주장이 - 이 주장은 실체의 성취감보다도 더 크다 - 남자의 특별한 자만심과 용맹성을 구성하고 동시에 남자만의 독특한 주관성을 나타낸다. 84
제2부에 있는 논문들은 그 주관성에 대한 조사에 관심을 집중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아와 타인, 주체와 객체, 그리고 우리 시대의 특징인 남성과 여성에 대한 특별한 개념의 발달을 조장하는 내적 역학의 탐구에 몰두한다. 84
첫 논문인 <성별과 과학>에서는 과학과 남성성의 결합의 기초가 되는 감정적 하부구조를 탐구하려는 나의 최초의 시도가 담겨있다. 85
이 논문에 설정된 첫 임무는 문화적으로 우세해진 객관성과 남성성 사이의 연상작용을 이해하는 일이다. 나는 그 연상작용이 어떻게 인식적, 감정적, 성적 발달의 복잡한 망조직을 반영하고 또 거기에 기여하는지를 입증한다. 나는 객관성은 심리적 자율의 인식적 대응물이므로, 인간관계의 영역에 뿌리박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객관성의 능력은 자아와 성별에 대해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발달한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일단 양극화되었으므로 객관성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인간의 목표는 객관주의, 즉 남성의 목표로 해석되며, 반면에 주관성은 주관주의, 즉 여성의 특권으로 해석된다. 85
제5장과 6장은 첫 논문에서 해결되지 않은 중심적인 의문인 객관성, 권력, 지배 사이의 관계를 주제로 택한다. 나는, 객관성이 인간관계에서 획득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듯이, 인간이 아닌 타자들의 지배도 인간관계에 뿌리를 둔 기획이라고 주장한다. 과학의 두 가지 목표인 지식과 권력이 어떻게 객관화와 지배로 해석되었는지를 보기 위해 우리들은 이 목표들을 함께 묶는 심리역학적 뿌리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주요한 심리적 개념은 4장과 동일하게 자율이다. 나는 자율의 원자론적이고 정적인 개념이 우선적으로 다른 인간들을,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추상적이거나 인간이 아닌 타자들을 통제할 필요성과 지배할 욕망을 어떻게 더욱 악화시켰는지를 이해하려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심리적 자율의 부침에 대해 탐구한다. 86
세 편의 논문에서 나의 주장은 정신분석학적이다. 객체관계 이론에 의존한다. 객체관계이론은 타고난 충동과 타인과의 실제 관계, 그리고 이 두 가지 견지에서 본 성격발달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하면서, 우리의 최초의 경험 즉 대개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가족관계에 의해 결정된 경험이, 어떻게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 그리고 그 세계에 대한 우리의 소재감을 형성하는 것을 돕는지를 우리에게 이해시킨다. 86
객체관계 이론도 정신분석학 이론의 남성 중심적 편견을 피하지는 못하였다. 이 이론은 여자의 경험을 완전하게 통합하지 못하고 또한 여자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하지도 못하므로 심리발달 이론을 손상시키고 있다. 특히 어머니-아이 관계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아-타자관계의 발달과 연관된 이론의 이름으로 객체관계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 이론의 분석 시도의 구체적인 실패를 나타내며, 어머니를 주체로 인지하지 못하는 실패를 반영한다. 이 기본적인 결함은 이 이론이 발달상의 목표로 자율에 심취해 있고, 이에 대응하여 타자와의 관계를 무시한다는 점에 반영되어 있다. 이 결점은, 자율은 무관계의 대가를 치러야만 구입될 수 있다는, 모든 정신분석 이론에게 공통되는 무언의 함의의 기초가 된다. <객체>는 다른 주체로 재정의되어야 하며, 자율은 타자와의 관계에의해 위협받기보다는 향상되는 역동적인 조건으로 다시 생각되어야 한다. 제5장 <역동적인 자율: 주체로서의 객체>는 처음부터 이 점에서 출발한다. 87
4장
성별과 과학
역사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남성성과 객관성 사이의 연상작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성성과 과학적인 것 사이의 연상작용인데, 이 연상작용은 학구적인 비평가들이 심각하게 다루고 싶어하지 않는 논제이다. 왜 그러한가? 페미니스트들이 아닌 학술계가 이 주제에 대해 실제로 침묵한다는 사실은, 남성성과 과학적 사고간의 연상작용이 심각하게 연구될 수 없거나 연구돼서는 안 되는 신화의 지위를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과학 인구가 현재까지도 압도적으로 남성 인구라는 사실은 과학적 사고에 남성성을 귀속시킨 원인이라기 보다 결과이다. 현실이 우리의 믿음에 의해 형성되는 방법은 다양하고 또한 명확하게 설명될 필요가 있지만, 우선적으로 토론해야 할 것은 현실보다 믿음이다. 91
최근에 들어서 근대과학의 기술적 남용에 대한 많은 관심이 생겨났고, 많은 토론에서 자연을 지배하려는 야심에 내재된 과학 프로그램의 왜곡을 바난하였다. 그러나 자연을 지배하려는 야심이 어떻게 과학에 내재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이런 왜곡은 순수과학과 명백하게 구별된다고 여겨지는 과학기술이나 응용과학때문에 생겨났다. 순수과학이 경우 자연 지배의 야심은 순수 지식을 얻으려는 야심으로, 즉 통제의 환상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지식을 얻으려는 야심으로 간주된다. 사실 자연의 지배는 과학기술의 보다 중요한 특질임에도 불구하고 순수과학과 응용과학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기란 불가능하다. 남성성과 정복에 함축된 의미들이 과학이 이용되는 용도에만 영향을 미치고, 과학의 구조는 손상시키지 않은 채로 남겨놓는다고 가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93
과학은 자신이 이용되는 방법에서 뿐만 아니라 자신이 제공하는 현실에 대한 묘사에도, 그리고 과학자와 그 묘사와의 관계에도 성별화의 흔척을 남긴다. 이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서 남성성을 과학적 사고의 본질 탓으로 돌리는 주장에 내포된 함의에 대해 보다 완전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 93
과학 이데올로기는 세계를 두 부분, 즉 인식 주체(인간 정신)와 인식 가능한 사물(자연)으로 나눈 후에, 더 나아가서 이 둘간의 매우 특수한 관계에 대해 규정한다. 과학 이데올로기는 이들의 결합, 즉 지식으로 이끄는 결합을 달성시킬 수 있는 상호작용을 규정한다. 정신과 자연의 성별을 이미 지정했을 뿐 아니라,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를 남성적이라고 특정지우면서, 인식 주체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활동조차도 성별화된다. 인식 주체와 이미 인식된 사물간에 지정된 관계는 거리와 분리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철저하게 분리된 주체와 객체관의 곤계여서, 이를테면 전혀 세속적인 관계가 아니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자연이 객체화된 것이다. 베이컨의 <정숙하고 합법적인 결혼>은 느낌보다는 이성을 통해, <직접적인 감각경험>보다는 <관찰>을 통해 달성된다. 상호교제의 방법은 주체에 대한 감정적, 육체적 불가침을 보장하도록 규정된다. 따라서 지식의 형태를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으로 분리하는 것은 세계를 주체와 객체로 분리하는 것과 일치한다. 과학적 정신은 인식되어야 하는 사물, 즉 자연과 분리되어야 하며, 과학 정신의 자율성, 그리고 이에 따른 객채의 상호적인 자율성은 과학 정신의 인식 방법을 그런 이분법이 위협받는 인식방법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보장한다. 이 과정에서 과학적 정신과 그 지식의 접근 방법을 남성적이라고 특징지우는 것은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남성은 흔히 그렇듯이 자율, 분리, 거리를 함축한다. 또한 주체와 객체간의 어떤 혼합도 철저하게 거부할 것을 함축한다. 그리고 오늘날 이 주체와 객체는 끊임없이 남성과 여성으로 동일시된다. 94
형이상학, 인식 양식, 성의 은유가 복잡하게 섞여 있는 구조를 가진 이 신념 체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만약 우리가, 과학적인 것과 남성성 사이의 연상작용이 단순히 <진실>이라는 입장을 거부한다면 즉 이 연상작용이 남성의 두뇌와 여성의 두뇌 사이의 생물학적 차이를 반영한다는 입장을 거부한다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그 연상작용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설명해야 하는가? 성차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단순한 생물학적 요인에 환원되는 범위를 훨씬 초과해버렸음을 매우 분명하다. 이런 생각들은 일단 알려지면 자생력을 갖게 되는데, 이 자생력은 강력한 문화적 심리적 힘에 의해 지속된다. ...따라서 남성성과 과학적인 것 사이의 연상작용을 설명하는 일은 허약한 생물학적 환원주의로 돌아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성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우리의 인식 경험과 연결시키는 감정의 하부구조를 이해하는 일이다. 94
이 문제의 본질상, 우리는 이 신화의 기원과 지구력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하면서 과학적 사고 능력이 발달하는 과정을 조사하고, 그 과저어이 감정적이고 성적인 발달과 어떻게 뒤얽혀 있는가를 조사해야 한다. 내가 택한 길은 정신분석자들과 인지심리학자들이 이미 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이었으며, 내가 제기한 특별한 문제들이 만든 길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95
객관성의 발달
이런 토론의 기초가 되는 결정적인 통찰력은, 프로이트와 피아제 두 사람 덕분에 우리가 갖게 된 통찰력으로, 객관성의 능력, 즉 객체와 주체를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의 가능성은 틀림없이 타고난 것이지만, 그 능력 자체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통찰이다. 오히려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능력은 어린아이의 자아감이 형성되는 길고 고통스런 과정 속에 뒤엉켜 있는 일부분으로 습득되었다. 이 능력은, 가장 깊은 뜻으로는 어린아이가 자아를 비자아와 구별하고, <나>를 <내가 아닌 것>과 구별하는 능력의 한 기능이다. 이런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어린 시절에 일어나는 발달의 주요 업적이다. 95
어린아이는 괘락과 고통, 만족감과 실망의 축적된 경험의 이해를 통해서 서서히 자아와 타자, 이미지와 지각된 것,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게 된다. 자아를 환경과 구별하는 능력의 증가는 그 어린아이가 관련될 수 있는 외부 현실을 처음에는 마술처럼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객관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든다. 어린아이는 객관적인 사고와 지각의 능력을 얻게 된다. 96
이런 발달의 배경에는 강력한 감정적 갈등이 내포되어 있다. 유아가 자신의 경험의 모체로 만드는 주된 객체는 감정적 객체인 어머니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분리된 존재로 출현함에 따라 그 어린아이는 자신의 분리된 존재를 고통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근심이 생겨나고, 갈망이 탄생한다. 어린아이는 의존과 필요 그리고 원시적 형태의 사랑을 발견한다. 자아와 어머니 사이의 경계로부터 그 구분을 해체하고 싶은 갈망, 원래의 단일 상탤를 재건하고 싶은 충동이 발생한다. 동시에, 자율에 대한 기쁨이 커가는 것을 느끼게 되며, 자율 자체가 이전 상태의 유혹에 의해 위협당한다고 느끼게 된다. 감정적 한계 결정의 과정은 상충하는 충돌들, 욕구들, 두려움에 의해 추진되고 억제되어 발잘적으로 진행된다.
이와 유사한 인식의 한계 결저오가정이 이런 갈등들의 배경에 대비하여 협상되어야 한다. 객체들이 분리된 정체성을 습득할 때, 상당 시간 동안 이들은 마술같은 유대로 자아에 결속된다. 자아를 세계로부터 풀어주고, 사고를 사물로부터 풀어주는 일은 이들을 연결시켜 주던 마술적인 결속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이 일은 이 결속을 지속시키는, 때로는 어린아이의 전지전능함, 때로는 어머니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이 두 사람 모두 한계르를 가지고 있으며 분리되어 있음을 배울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하면서 어린아이는 자아가 지배하는 인접한 세계의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자기와 독립적인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 이동한다. 96
자아와 타자 모두가 독립된 실재라는 것을 깨닫는 일은 과학과 사랑 모두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그렇지만 어느 쪽을 위해서나 충분한 전제조건은 아니다. 지나치게 날카롭게 정의된 자율, 지나치게 엄격하게 정의된 현실은 삶에 가장 완전하고 풍요로운 깊이를 주는 감정적 경험과 창조적 경험을 포용할 수 없다. 자율과 현실이 사랑과 놀이의 부침을 허용하려면, 자율에 대해서는 보다 역동적으로, 그리고 현실에 대해서는 보다 융통성 있게 생각해야 한다. 감정적 성장은 자신이 분리되어 있음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감정적 성장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와의 감정적, 인식적 결합상태에서 벗어난 어린아이는, 자신과 주위 환경이 모두 분리되어 있고 서로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참고 견딜 만큼 충분히 자신과 주위 환경의 영속적인 현실에 대해 신뢰하게 된다. 자아감을 소위 어머니와 반대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아감과 타자에 대한 감각은 그 둘 중 어느 하나를 상실할 위험 없이 그들 사이의 경계를 순간적으로 허영할 정도록 충분히 안정적이 된다. 인간은 자아와 타자 양자 모두가 매우 자율적인 것으로서 지속적으로 생존한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이런 인식을 하고 그리고 자신이 이 세계에 홀로 있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격리감을 뛰어넘어 또 다른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람에 다다를 수 있다. 인간이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 속에 애매성을 재도입하는 마지막 단계는 어려운 단계이다. 이 다나계는 과거읭 갈등과 더 오래된 갈등으고부터 나온 깊은 근심과 두려움을 불러낸다.97
우리 자신을 열어놓을 수 없다면, 예술의 세계는 우리에게 배제된다. 꿈과 현실, 내부와 외부, 주체와 객체간의 대화를 배제한다면 사랑도 예술도 살아남을 수 없다. 98
위니컷은 창조성, 사랑, 그리고 놀이가 <나>의 내적인 정신적 공간과 <내가 아닌> 외적, 사회적 공간 사이의 <잠재적인 공간>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 이런 잠재적인 공간을 인내할 수 없는 무능력은 자아와 타자 사이를 정확하게 묘사하지 못하는 보충적인 실패가 그러하듯이, 확실하게 정신적인 고통으로 이끈다. 98
자아와 타자간의 부정확하고 과도한 선긋기는 자율에 대한 지속적인 근심의 방어로 간주될 수 있다. 99
그러므로 감정의 성숙은 환상과 결별되지 않으며, 환상에 좌우되지도 않는 현실감을 내포한다. 감정의 성숙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면에 애매성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허용하는 충분히 안전한 자율감을 요구한다. 99
우리들 대부분은 자율성을 인식의 발달을 위한 적절한 이상으로 간주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즉 인식의 성숙은 객관적 현실이 주관성으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되었다고 지각하고 규정하는 입장과 자주 동일시된다. 이런 입장을 인식의 성숙을 위한 모델로 인정하고 싶은 우리의 성향은 물론 고전과학으로부터 상속받은 객관성에 대한 정의, 다시 말하자면 객체의 묘사로부터 주관이 완전하게 제거될 수 있고 또한 제거되어야 한다는 전제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정의의 영향을 받았다. 현대에 일어난 철학과 물리학 양면에서의 진보는 이 정의가 인식론적으로 부정확하다고 증명하였다. 이 두 학문의 진보는 우리에게 고전적인 이분법을 뛰어넘어 현실에 대한 보다 역동적인 개념과 이 개념을 지지할 보다 복잡한 인식론까지 바라볼 것을 요구하였다. 99
객관성에 대한 시대에 뒤떨어진 이분법적인 개념에 집착하는 일은, 사랑과 창조성의 능력을 방해하는 정확히 똑같은 종류의 자율성에 대한 근심의 방어로 간주될 수 있다. 100
성별의 발달
이 모든 것이 성별과 무슨 관계인가? 지금까지 제시한 발달 묘사의 맥락에서 성별 주체성과 성별 동일시 과정의 발달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100
남성과 여성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결정짓는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결정자는 부모에 대한 우리의 지각 그리고 부모와의 경험에서 나온다. 우리들 대부분에서 자아와 타자간을 구분토록 만드는 감정적 컨텍스트를 제공하는 사람이 어머니라는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사실 때문에 성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어쩔 수 없이 기울게 된다. 가장 최초의 가장 강압적인 융합의 경험이 어머니 - 아이의 관계에 기원을 두고 있는 한, 구분과 분리는 <어머니>를 <어머니가 아닌 것>으로 부인하는 경험인 반면, 융합의 경험은 불가피하게 <어머니>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다. 자아를 타자로부터 탈출시키면서, 최초의 매우 원시적인 주체로 시작된 어머니가 효율적이고 감정적인 부인과정에 의해 첫번째 객체로 나타난다. 원형적 여성이며, 또한 영원히 원형적인 여성으로 남는 그 여성과읭 결합은 그 첫번째 결속관계를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여러 과정들(인식과정과 감정적 과정 모두)을 채색시킨다. 이에 따라 어머니로부터의 분리과정에 뿌리박고 있는 여러 기원들이 구분과 객관화의 과정들을 채색시킨다. 이 과정들이 이른바 <어머니가 아닌 것>을 나타낸다. <어머니>와 대립되고 <어머니>를 부인하는 하나의 표현이 되는 하나의 과정에 의해, 어머니는 객체가 되고 어린아이는 주체가 된다. 101
어린아이는 아직은 매우 연약한 자아분리의 근시뫄 두려움으로부터 그리고 재흡수의 두려움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우선적으로 아버지 쪽을 향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개별화와 차별, 즉 객관적 현실 자체를 상징하게 되고, 그 현실 내에 있기 때문에 <현실> 세계를 실제로 나타낼 수 있다. 101
남성에게나 여성에게나 모두 똑같이, 우리의 최초의 경험은 우리들에게 객관화의 감정적, 인식적 입장으로 남성성을 연상하고, 반면에 주체와 객체간의 희미한 경계로 여성성을 연상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102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문이 생겨난다. 이런 초기의 연상은 어떻게 되는가? 이런 연상을 낳는 양상은 거의 보편적이나 이런 양상을 지속시키는 조건은 보편적이지 않다. 구체적인 문화적 힘이 가장 두드러지게 끼어드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주체-객체의 분할을 초월하는, 이후의 성인의 경험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문화에서, 예를 들면, 예술, 사랑, 종교 등에서, 이런 경험이 <여성의> 경험이라기보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경험이라고 확인된다면, 이런 초기의 동일시는 반대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주체와 객체간의 철저한 이분법을 전제로 한 과학에 일차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고, 모든 다른 경험에게는 이차적인 <여성의> 지위를 주는 문화에서는, 초기의 동일시는 거의 반드시 지속된다. 하나의 모험으로서, 지적 영역으로서 그리고 세계관으로서의 과학의 성별화는 과학 이전의 초기 시대에 이루어진 연상을 반영하고 동시에 영속시킨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주관성으로부터의 거리에 의해 진리를 측정하는 객관주의적 인식론에 대한 집착은, 이런 정의에 의해 진리 자체가 성별화되었음이 밣여질 때 재조사되어야 한다. 102
내가 이제까지 해온 토론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본질적인 혹은 실제의 차이라기보다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의미에 대한 믿음 체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102
나는 지금까지, 남자들은 성질상 보다 객관적이어서 과학적인 일에 더 합당하다거나, 과학은 가장 극단적인 객관주의적 인식론의 특징을 가질 때조차 본질적으로 남성적이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내가 토론하고자 하는 점은 왜 우리가 그런 주장이 사실이라고 믿는가 하는 그 이유들이다. 103
비록 남녀 어린아이 모두 동등하게 자아와 타자를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본질적으로 똑같은 자율의 필요성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남자아이들이 자기들의 성 정체성을 여성적이라고 경험되고 규정된 것과 정반대되는 것에 두는 한, 그들의 성별 정체성의 발달이 분리의 과정을 강화시키기 쉽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남자아이들은 <어머니로부터 이중적 분리>를 겪어야 한다. 첫번째 분리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분리이고, 두번째 것은 남성적 성별 정체성을 고정시키기 위한 분리이다. 이 과정에 더 강한 자극이 부가되는데, 이 자극은 어린 소년에게 개인적으로, 문화적으로 독립과 자율을 암시하는 정형적인 남성성을 확립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외부 압력에 의해 부가된다. 103
이런 과정의 결과로 남자아이들은 과도하게 구분하는 경향을 가질 수 있고, 여자아이들은 불충분하게 구분하는 경향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은 타당한 것 같다. 즉 남자아이들은 사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성인 남자로 성장하고, 여자아이들은 과학으로부터 물러서는 성인 여자가 된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정말로 설명하고자 하는 바는 성별의 발달과, 객관성과 남성성을 동등시하는 믿음 체계와, 과학적이라고 규정된 것과 남성적이라고 규정된 것을 동시에 그리고 공동으로 고양시키는 문화적 가치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망조직이라는 사실이다. 이 망조직은 대단히 큰 조직이어서 성별 정체성의 습득을 포함한 어느 부분에서도 왜곡을 영속화시키고 악화시킨다. 105
베이컨이 말한 <정숙하고 합법적인 결혼>의 이미지는, 안전하고 <객관화된> 거리에 놓인 신부와의 결혼생활에서 자율과 지배를 누릴 수 있는 한, 과학자에게 들어맞는 이미지이다. 107
결론
과학의 성별화가 내포하는 사회적 함의,
과학적인 것과 객관성을 남성성과 연결시키는 일이 남기는 부수적 결과들.
과학에 대한 우리의 특징화는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라는 편견에 의해 채색되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남성과 여성에 대한 우리의 평가도 과학의 특권에의해 영향받았다. 상호적으로 강화시키는 순환과정이 확립되어 과학적이라고 불리는것은 남성적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선호로부터 여분의 특별한 정당성을 인정받고, 역으로 여성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과학에 부여된 특별한 사회적, 지적 가치 그리고 모범적인 과학이 모든 지적인 노력에 제공하는 특별한 사회적 지적 가지로 부터 배제됨으로써 더욱더 펑가절하된다. 이런 순환성은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작용할 뿐 아니라 과학과 어린 아이 모두의 발달과정이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내면화하는 방식으로 강화된다. 107
<객관적>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부당한 구속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리라. 어떻게 그런 해방이 발생할 수 있을까? 변화된 양상의 부모노릇이 결정적으로 중요할 수 있다. 다른 발달들도 마찬가지로 중요할 수 있다. 과학과 성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지속시키는 사회 기풍ethos 또한 전통적으로 가정되어 온 과학이 중립성을 재조사하려는 현재의 압력 덕분에, 과학적 조사의 경계와 한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로 인해, 그리고 특히 과학 자체 내에 있는 여러 사건 때문에 변화될 것이다. 과학 내에서나 밖에서나 과거의 신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할 필요성이 밀려오고 있다. 과학 내에서 발생했던 최근의 발달 중 특히 중요한 점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현실에 대한 복제한듯한 묘사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움직임은 양자역학에 의해 고무되었고 심지어는 부득이하게 된 것 같다. 이 묘사에서 객체 현실은 정신분석으로부터 나오는 자율에 대한 보다 유동적인 개념과 유사한 역동적인 성격을 습득한다. 보어는 베이컨이 사용한 이미지보다 상당히 행복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베이컨은 자신의 문장으로 남근의 상징을 선택하였고, 그 문장 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제명을 본다. 대조적인 것은 상호 보안적이다. 108
제5장
역동적 자율: 주체로서의 객체
플라톤과 베이컨은 근대과학의 선구자로 가장 잘 인용되는 철학가이지만, 그러나 이 두 철학자 사이에는 시대상의 차이보다 더 위중한 분수령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이 두 철학가는 사랑과 권력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같은 척도로비교될 수 없음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플라톤의 인식 주체는 탐구를 할 때 순수한 에로스의 안내를 받아 사물의 본질적 특징에 <접근하고 결합하려고> 추구하는 반면, 베이컨의 과학자에게 지식은 권력과 동등한 것으로 모든 사물을 지배하려 한다. 지식에 대한 이 두 비전은 모두 정숙한 성욕이라는 이미지들의 뒷받침을 받지만, 그러나 이 두 이미지 사이의 차이는 현저하다. 플라톤에게 정숙은 육체와 영혼의 구분을 함축하고, 정신 기능과 지식의 객체들간의 유사한 것들끼리의 성애적 순결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이와 반대로 베이컨의 <정숙하고 합법적인 결혼>은 - 이제는 남성적인 정신과 여성적인 자연 사이의 결혼인데 - 권력과 지배의 은유로서 인식 주체의 완전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고안된 듯이 보인다. 111
그러나 베이컨의 결혼의 은유가 근대과학을 가부장적 전통 안에 위치시키므로 당연히 지배를 함축하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가정하는 데서 멈춘다면, 과학과 가부장제도 양면에서 지배라는 보다 미묘한 역학을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베이컨의 비저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정숙한 혼인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놓치는 것이다. 이 결혼은 성관계를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한계 내에 보존하므로 정숙하다. 궁극적 결합이라는 플라톤의 비전과 달리, 그리고 연금술사들의 <신비스러운 결혼>과 달리, 베이컨의 비전은 영원히 분리된 채로 남아 있는 결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 분리 안에는 통제와 권력의 필수적인 함의가 어느 정도까지 들어 있는가? 아니면 <객관성은 남성의 지배를 위한 기호 언어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되엇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다르게 될 수는 없는가? 112
어떻게 해서 자연과 정긴은 과학적 담화 안에서 그렇게 자주 융합되며, 객관성은 또한 어떻게 해서 그렇게 냉혹하게 통제와 정복이 되는가? 112
나는 그 대답이, 과학의 인식적 주장들이 기원사 ㅇ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실상은 감정적 하부구조에서 자라난 것이라는 사실에 뿌리박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자는 스스로를 이상화하는 완전히 냉정한 관찰자가 아니라, 객관성을 얻으려는 야망 때문에 다양한 주관적 의미들을 전달하는 감정적 존재이다. 그의 객체 세계는 과거 때문에 어린 시절의 <객관적>(즉 주관적) 세계를 계속 반영한다. 객관성과 정복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율, 능력, 정복의 의미를 보다 깊게 탐구할 필요가 있다. 112
4장에서 나는, 자아, 성별, 그리고 현실에 대한 어린아이의 감각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율, 남성성, 객관성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였다. 그 논쟁에서 빠진 제4의 개념이 있는데, 이 개념은 권력의 개념으로, 어린아이의 행동감각의 발달에 해당된다. 이 첨가된 중요 요소는 자율, 남성성, 객관성의 삼각구조 관계를 통하여 객관성과 정복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는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113
자율은 타인으로부터의 급진적인 독립을 암시하고, 또한 객체로부터 주체의 환원적 분리를 함축하는 객관성의 해석, 다시 말하면 내가 <객관주의>라고 이름 붙인 해석에 근접하게 묘사된다. 객관성의 범위의 이 끝이 바로 모든 여성성의 흔적들을 부정하는 남성성의 개념과 관련된 부분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나는 자율에 대한 이와 똑같은 해석이, 다른 사람을 누르는 권력으로서 권력 개념, 즉 정복으로 정의되는 권력과 관련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스트들이 인식해 왔던 정복과 객관성 사이의 연결관계는 과학의 목적에 내재되었거나 지식과 권력 사이의 동일시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권력과 객관성 모두에 배정된 특수한 의미들에 내재되어 있다. 즉, 이 연결관계는 모든 측면의 심리적(감정적일 뿐 아니라 인식적인) 발달에서 근대 서구 문화가 야기한 특수한 편견들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 논문의 목적은 이런 편견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 모든 네 개의 어휘들의 의미 변화와 일치하는 발달적 규범들의 변화를 홍보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모적이다. 113
우선 자율이란 단어에 우리 문화의 편견이 얼마나 많이 실려 있는가를 알아보아야만 한다. 사실 자율을 타인으로부터의 분리와 독립으로 혼돈하려는 경향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논쟁 전반에서 나는 자율이라는 용어를 외부의 통제 아래에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의지 아래에서 행동할 수 있는 심리 감각을 언급하는 데 사용한다. 113
사실 자율은 감정적으로 중립적인 경험이 결코 아니다. 자율이 능력의 경험을 주축으로 하는 한, 자율적인 존재로서의 자아감각은 쾌락의 심오한 원천이다. 그러나 능력의 만족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효과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양산한 감정적 충족은, 우리가 감정적으로 속박되어 있는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 근본적으로 촉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어떤 환경에서 능력은 강화된 자아감각을 증진시키며, 세계와 관계하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강화된 감각을 촉진시키는가? 어떤 환경에서 능력과 지배는 소외, 거부된 관계, 방어적 분리에 이용되도록 촉구되는가? 어떤 환경에서 능력과 지배는 두려움과 공포에 대항하는 방어물로 추구되는가? 114
객관성을 지배와 혼돈하는 사고양식.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자율의 범위와 두 끝에 위치한 자율이 의미이 차이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두 대조적인 개념들, 하나는 정적이고 다른 하나는 역동적인 이 개념들에 대해, 정도에서 뿐만 아니라 종류에서도 다르다고 이해해야 한다. 이 두 개념으로 구분한 것은 명백히 도식적이다. 실제적으로는 심리, 사회적 선택들의 복잡한 분포(조직망)인 것을 두 개의 양극으로 축소시킨 것일 뿐이다.115
자율의 의미들
자율의 역동적 개념은 자아와 타자 사이이 <잠재공간>을 인정한다. 이 <잠재공간>은 위니컷이 서술하듯이 모든 감정이입의 경험이 필요한 <나>와 <내가 아닌 것> 사이이 경계들의 일시적 윱ㄹㄹ 허용하는 <경험의 중립 지역>으로, 이 경험은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의 창조적 도약을 허용한다. 자율이 역동적 개념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성쇠를 사랑과 지식 모두의 필수조건으로 인정한다.
역동적 자율은 자아감각에 대해 타자들과 분리되며 동시에 연관된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타자 감각을 타인들의 독립적인 관심과 느낌을 인정할 정도로 충분히, 다시 말하면 이들을 다른 주체들로 인정할 정도로 충분히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주체라고 생각한다. 역동적 자율은, 만족스럽다고 느낄 만한 방식으로 타자들과 자신의 환경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경험인 능력의 경험에서 발달할 뿐 아니라, 본질적으 유아와 어머니(혹은 다른 주양육자)의 관계에서 있는 느낌의 상호성과 연속성의 경험에서 발달한다. 이 이상은, 대부분의 우리에게는 오직 가끔 실현되는 것으로, 주체와 객체 사이의 구분을 실제로 결정지울 수 있다는 사실을 혼란과 위협이 원천으로가기보다는 자원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한다. 특히 역동적 자율은 상대방을 보다 분명하게 지각(그리고 보다 성숙한 사랑)하기 위하여 이 불확정성을 사용하도록 허락한다. 따라서 역동적 자율은, 우리가 여전히 독립적인 고결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친밀관계를 느끼는, 상호작용하는 대인관계의 행위자의 세계에서 행동의 의미를 야기한다. 행동은, 자신가 타인 사이의 차이에 대한 정확한 (혹은 사실적인) 인식에 기초를 두는 한에서만 효과적이다. 그러나 그래도 역시 세상에 대해 행동하는 것은 다소 자신과 유사한 타인에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대해 행동하기보다는 세상 안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런 행동이 바람직한 목적을 향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이 행동이 변화를 일이키려는 욕망에 의해 실제로 야기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단순히 한 개인 자신의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욕구에 의해서 이 목적들이 바람직한 가 아닌가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에 이런 우연성이 생존할 수 있을 때, 자기 이익의 추구와 이타주의 사이의 구분이 그 선명함을 잃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구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차이가 갈등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 내의 갈등과 개인 상호간의 갈등은 모두 모든 인간 존재의 필수 불가별한 측면이다. 그리고 아이와 달리 갈등은 필연적으로 통제의 문제를 일츠키는데, 이 통제는 효과적인 행동의 필요조건들에 의해 야기된 여러 종류의 통제에 덧붙여진다. 갈등은 위험을 느꼈을 때 일어나는 반응으로 자신 혹은 타인을 통제할 필요를 촉지니킨다. 여기서 자기 통제는 재적(혹은 내면화된) 위협에 대한 반응인 반면, 타인의 통제는 외적 (혹은 외면화된) 위협에 반응하는 한 방식이다. 우리가 자아와 타자간의 차이에 관해 얼마나 명확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정도에 따라, 위협의 원천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능력, 그리고 타자를 통제하려는 시도로서 자기 통제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을 (혹은 그 역을) 피하는 능력이 결정된다. 반면, 자아와 타자에 계속성을 유지시키면, 서로 투쟁하는 타인을 통제하거나 혹은 억제하려는 욕구로부터 타인을 다치게 하거나 파괴시키려는 욕망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려는 경향을 저지하는 방해물을 제공받을 수 있다. 이런 계속성은 타자의 개인적 특성에 대한 지속적인 상기자로, 개인 상호간의 갈등에 대한 비폭력적인 해결의 추구를 조장할 수 있으며, 야기된 공격적 감정들을 금지하거나 해소시킬 수 있다.
여기서 설명되는 이상은 절묘한 균형잡기를 요구한다. 이 이상은 한쪽에있는 동화와 경계 상실의 두려움이, 다른 한쪽에 있는 외로움과 분리의 두려움과 균형을 이룰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 이상은 또한 인간의 대조적인 욕망인 친밀한 관계에 대한 욕망과 독립에 대한 욕망의 양립을 전제한다. 이것은 낯선 이상이 아니다. ...초도로우와 길리건의 저서에서 놀랄 만큼 뛰어나게 설명된다. 그러나 이 이상은 평범한 것이 아니다. 심리학 문헌에서는 두려움과 욕망이라는 이 두 짝은 화해할 수 없으며, 그 세력을 비교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훨씬 더 평범한 가정으로 전제한다. "심리분석할 전통에서 현재 일하는 연구가들은....자아의 발달을 타자들의 모체로부터 자아를 분리시키는 과정, 즉 (완전한 성인이 되는) 과정으로 간주하려는 추세이다. 자아발달은 개개인이 타자들로부터 연속적으로 분리되는 중요한 관계를 성취하는 일련의 고통스러운 (위기들)의 결과로 달성된다." 프로이트 자신도 사랑과 타자와의 결합에 대한 욕망을 개인 발전과 문화 모두의 적대자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문명과 불안>>에서 프로이트는 "사랑은 문화의 이익에 반대된다"라고 썼다. 프로이트의 놀랄 만한 비관주의적 인생관에서 쾌락과 현실은 반대되는 원리로 출현한다. 결합하려는 충동은 너무나 강압적이어서, 일생 동안 이 충동에 저항애햐 한다. 이 충동은 독립하려는 열망을 상당히 능가하므로, 자율은 - 이런 관점에서는 이기심 역시 - 강압 아래에서만, 필연성의 강압 아래에서만 발전할 것이다.
만약 이런 설명이 옳다면, 자아와 타자 사이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발달에 관한 이상은 실제로는 심리학적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이렇다 할지라도 거의 모든 심리학 이론가들이 자아와 타자 사이를 명확하게 분하려는 시도가 발달의 실패, 즉 적어도 "어느 정도 너무 진행된 발달"을 대변한다고 동의하는데, 이 발달은 순수한 자존심과 다른 사람을 사랑할 능력뿐 아니라 성장과 지각을 금지하낟. 이렇기 때문에 이 발달의 실패는 소외된 자아의 상태, 관계가 부인된 상태, 자기 방어적인 분리상태, 궁극적으로는 "삶의 사실들과 단절된" 상태를 유도한다. 그러므로 자율은 자유롭고 족쇄가 풀린 자제, 타인과 자신의 환경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친숙한 정의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독립과 자제는 이런 개인들에게 끊임없는 감시와 통제르 ㄹ요구하며 그리고 실제로 이요구는 그 자체가 이런 심리학적 입장이 "굴복(내적 충동 혹은 외적 압박에)에 대해 느끼는 만연된 두려움과 근심, 즉 자신의 자율에 대한 지속적인 근심을 얼마나 반영하는지 그 정도를 나타내는 표시이다. 118
부단한 감시와 통제는 사실 그 자신의 목적들과 상반되는 자율의 개념에 대한 폭로적인 표시들이다. 이 감시와 통제는 타인과 자신의 차이에 대한 믿음을 반영하기보다는 획실성에 대한 저항이며(거부하기도 한다), 자신의 의지의 힘보다는 타인의 의지에 대한 저항을 반영하며, 또한 자존심의 이미보다는 자아의 영속성에 대한 불확실성을 반영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에고의 경계들의 안전성을 반영하기보다는 취약성을 반영한다. 이것은 의존, 자기 통제의 상실 그리고 자아의 상실에 대한 특별한 두려움을 나타낸다. 통제(자아 혹은 타자의)는 이런 공포들을 경감시키는 방식으로 야기된다. 갈등감이 우리의 심리 세계를 공략하는 한, 통제는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반응인 듯하다. 그러나 통제는 주로 방어적인 반응이며, 따라서 그 효과는 기껏해야 일시적이다. 이런 이유로 데이빗 사피로는 이 태도(내가 정적인 자율이라 기술했던 극단적인 형태)를 순수한 자유이라기 보다는 "의사" 자율성이라고 기술한다. 사리포는 "경직성이 아니라 유연성이 적극적인 자주 독립을 반영한다. 더 나아가 경직성이 아닐 유연성이 세계에 대한 완전히 객관적인 태도를 반영한다". 119
너무 넓은 붓으로 심리적 풍경을 채색하려고 시도하면, 경직되었거나 의사적인 자율에 대한 갈망 그리고 자아에 대한 과도하게 구분된 정의를 향한 열망만을 공통적으로 지닌 여러 종류의 성격들 사이에서 보다 세분화된 구분들을 반드시 놓치게 된다. 이 시도는 명백한 실패와 외양상의 성공을 구분하지 못한다. 타자를 통제하려는 사람들은 자아와 타자 사이의 명백한 혼돈을 드러내며, 이런 사람들에게 이 시도는 그런 차이를 명백하게 하고 견고하게 만드는 듯이 보인다. 더 나아가 이 시도는, 사랑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삶을 살아가는 많은 개인들과 "굴복"에 대한 심한 공포가 강박적인 강압신경증 혹은 편집증까지 초래하는 개인들 사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이 시도는 통제가 규제하고 억제하는 의미를 지닌 개인들과, 정복과 파괴라는 보다 분명히 강압적인 의미를 지닌 개인들 사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현재 목적을 위해 우리가 가장 직접적인 주의를 기울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마지막 구분이다. 119
만약 통제가 갈등에 대한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반응인 듯이 보인다면, 즉 악조건 아래에서 자율을 보존하거나 육성하려는 시도로 보인다면, 정복은 명백하게 불평등한경쟁자들의 세계에서 갈등에 대한 한 반응이다. 정복은 이미 설립된 위계 질서에서, 다시 말하자면 점령의 대안을 복종으로 지각하는 세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한 방법이다. 물론 이 반응이 이런 세계를 창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여기서 간과돼서는 안 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통제로부터 정복으로의 이동은 자율을 얻으려는 투쟁인, 자아를 타자와 구분하려는 투쟁의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 이동은 외부 권위와 자율의 심리학적 동화, 즉 제시카 벤저민이 "자유자본주의 시대에 아주 적합한" 것으로 기술한 동화 혹은 융합에서 결정적으로 유래한다는 사실이다. 동화 다음에 일어나느 발달관계는 다음 장에서 논의하겠자만, 인간 심리학에서의 자율과 권위의 현상학은 이 통제와 정복 사이의 관계를 조명하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이 현상학을 검토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120
정복
타인을 지배함으로써 통제를 성취하려는 시도는 우리 모두에게 친숙한 전략적 행동이지만, 그러나 이 시도는 새디스트적인 성격에서 가장 극단적이고 순수한 형태를 띤다. 사실, 에리히 프롬은 "살아 있는 존재를 절대적이고 무한하게 통제하려는 열정"이 새디즘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프롬은, 열정의 주된 기능은 "무능함의 경험을 전지전능함의 경험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 열정은 힘에 대한 존경과 약함에 대한 결명을 반영하는데, 이런 특성이 바로 새디스트적인 개인이 권위주의적 성격과 공유하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새디즘은 약함과 취약함에 대한 극단적인 경멸을 나타내는 특수한 표현이다. 120
새디스트적인 개인들의 자존심에 필수적인 것은, 자신의 우세한 힘을 증명할 수 있는 관계에 있는 타인들의 존재이다. 위계 질서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 존경하는 사람들과의 근접성, 경멸하는 사람들과의 거리감이 바로 그들의 자존심의 척도다. 새디스트는 보다 널리 친숙한, 권력과 존경의 등식에, 열등하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에 대한 특별히 응징하는 태도를 덧붙인다. 사피로는, "경직된 사람들에게는 이들이 수치스러워하고, 방어적으로 부인하며, 그러므로 증오하는 것을 여성과 (연약한) 남성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구현한다"고 지적한다. 이 경직된 사람은 이들의 혐오를 받으며, 때때로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심지어 강박관념적으로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만약 이 경직된 사람이 또한 실제적인 권력이나 권위를 갖는 위치에 있다면, 이들을 처벌하고 싶은 충동을 가질 수도 있다... 이 처벌은... 그 본질적 특성을 반영한다. 즉, "징벌"로 (약함)을 처벌하고, 열등함을 부끄러워아하게 하며 그 열등함이 치욕과 격하로 자신을 깨닫게 만들고, 그리고 "누가 주인인가를 보여주는" 그 본질적 특성을 반영한다."
희생자에게 가하는 이런 행동의 효과는, "공격자와 동일시하려는" 희생자의 궁극적인 능력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 진 베이커 밀러는 바로 여기서 중요한 "일시적 불평등"과 "영원한 불평등" 사이의 구분을 이끌어 냈다. 아들과 신병에게 가해지는 이런 징벌적 행동은, 다른(미래의) 열등자들과의 관게에서 같은 입장의 재창조를 조장할 가능성이 크거나 아니면 조장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영원한 불평등의 관계에 던져진 여성들과 타인에게 가해지는 이런 징벌적 행동은 희생자의 상호적 입장의 발달인, 매저키스트의 발달을 촉진하기가 쉽다. 이 두 경우에 이런 행동은 스스로 재생산된다. 이런 행동은 우월성과 열등성에 대한 편견은 영속화하고, 권력 위게 진서 안에서 위치와 자존심과의 등식을 영속화한다. 121
새디즘은 성욕에 대한 친밀한 의존인, 권력의 성애화에서 탄생된 의존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검토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성적인 새디스트(혹은 매저키스트)에게 공격은 단순히 성적 흥분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성적 흥분의 바로 본질이다. 타자의 비하는 에로티시즘의 우너천인데, 그 이유는 타자의 비하가 "공격자와 동일하게 되려는" 욕구, 즉 "우세한 힘 있는 자"와 용합되고 하나가 되려는 욕망을 만족시키고, 혐오스럽고 공포감을 주는 약한 자와 자신의 차이를 확신시켜 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에 타자의 의지를 종속시키는 것은 동시에 새디스트의 힘과 그의 남근적인 고결성의 증명이다. 이것은 우세한 자들과의 유사성을 강화시키고, 그리고 약한 사람들과의 거리를 증명한다. 이제 성욕은 특별한 의미를 띤다. "성욕은 상호성이 아니라 지배를, 사랑이 수반되는 성행위가 아니라 단순한 성행위"를, 자아의 경계상실이 아니라 자아의 긍정이 된다.121
자율과 성별
자율, 통제, 정복은, 혼자서는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는 연속체 위에 위치한다. 남성과 여성 모두는 자아, 자율, 친밀관계의 의미와 투쟁하며, 사랑, 갈등, 힘의 차이들의 압박 아래서 자아의 고결성을 유지해야 하는 필요성과 투쟁한다. 그리고 자아의 고결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남성과 여성 모두는, 자아와 타자의 통제를 자신들의 에고 경계를 보강하고 그리고 동시에 자신들의 자존심을 보강하는 수단으로 간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이 자신들의 자율의 문제에 특히 전념하는 경향이 있으며, 여성보다 훨씬 더 정복과 지배의 추구를 통하여 그 자율을 지지하려고 노력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우리 문화의 지족적인 사실이다. 이 사실은 남성들이 힘에 대해 가지는 더 큰 접근성을 반영할 뿐 아니라, 남성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우리의 정의까지 보다 심오하게 반영한다. 이 사실은 남성의 심리사회적 구성에 대한 반영이다. 123
자율과 남성성 사이의 최초의 그리고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연결관계에 대해서는 앞의 논문에서 기술하였다. 그 논문이 쓰여진 이후, 어머니의 보호의 맥락 안에서의 성별 발달의 역학을 다른 학자들, 특히 낸시 초도로우가 훨씬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초도로우는 이 논쟁에 분리-개별화 과정의 이중성격에 대한 강조를 첨가했는데, 이 분리-개별화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아를 타자와 다르게 인식할 뿐 아닐 궁극적으로 타자를 자신과 같은 주체로 인식하게 된다. 이런 이중성은 어머니와 어린아이의 상호적 행동의 상호성에서 탄생한다. 이 상호적 행동(어머니들과 어린아이들의 행동에 대한 최근의 관찰로 인해 충분히 많은 기록들이 모였다)을 주고받음으로써 어머니로서의 인식은 계속성과 아치 모두를 조장하낟. 어머니(혹은 주양육자)가 어린아이의 증가하는 자율에 대해 느끼는 쾌락은, 그 자율의 발달에 주요한 구성요소이다. 이 쾌락은 "구분과 분리가 아니라 타자와 관련되는 독특한 방식인 차별화"를 촉진하는 데 매우 결정적으로 이용된다. 123
타자의 자율에 기뻐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가, 자아감각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타자와의 차별화 속에서 정의되었다는 증거이다. 이 가능성은 한편으로는 공동생활에 대한 대안을 전제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외에 대한 대안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런 자아감각은, 자신이 가능하게 만드는 어머니로서의 인식의 풍부한 변증법적 과정으로 인해 분리와 차이를 과도하게 강조하거나 혹은 매우 미소하게 강조함으로써 위험해질 수 있다.여기서 우리가 사용한 언어로 표현하여 남성과 여성을 양극적인 대립으로, 즉 한 극은 차이를 전제로 하고 다른극은 유사성을 전제로 하는 대립으로 문홪거인 정의를 내린다면, 이는 남성과 여성 모두의 역동적 자율의 발다라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이 정의는 한편으로는 계속성의 상실을 초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차별화의 상실을 초래하며, 이 상실들은 모두 동등하게 상호 주관성의 인식에 해롭다. 이런 성의 구분은 어머니의 재생산에, 즉 양육하는 데 남성보다 더 적합한 여성의 (여성보다는 수단적이 ㄴ삶에 보다 적합한 남성의) 창조에 매우 기능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성의 구분은, 여성에서의 자율의 발달을 금지함으로써, 자신들의 미발달된 자아감각 때문에 어린아이의 증가하는 자율을 상실이나 거부로 느끼게 되고, 그래서 어머니가 되는 관계의 이중적인 잠재성을 모두 인식할 수 없는 어머니들을 생산하는 데 이용된다. 어머니들은, 자신들이 의지하도록 사회화된 계속성을 위해서, 그리고 남은 삶 동안 거부되는 계속성을 위해서 어린아이들에게 의지하므로, 어린아이들에게 필요한 역동적 독립성을 조성할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성별의 양극화는 양육의 기형을 낳고, 양육의 기형은 차례로 자신의 기형의 조건들을 조장한다. 124
이 사실로 인해 나는 페미니스트 문헌에서조차 가끔 빠지는, 심리학적 발달에 대한 나으이 초기 설명에서 빠졌던 중요한 점에 주으를 기울이게 된다. 나는 발달과정이 필연적으로 자가촉매 작용적이고 순환적 특질을 갖고 있다는 중요한 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어머니들도(아버지들 역시) 과거에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어머니의(혹은 아버지의) 역할을 고정된 사항으로 간주하는 심리학적 발달에 대한 어떤 분석에도 결점은 있다. 심리사회적 발달은 횡적인 인과 결과로 생각될 수 없으며, 대신 구성적 요소들이 원인과 결과 양면으로 작용하는 복잡하게 상호작용적인 역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25
그리고 또한, 비록 어머니-아이 관계(특히 발달이 발생하는 문화적 맥락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관계)에 주로 초점을 맞추는 분석을 통해 우리가 자율의 발달과정에서 나타나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사이의 몇몇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분석은 자율과 권력을 동화시킬 때 나타나는 성별의 불균형을 이해시키는 데는 충분하다. 그런데 자율과 권력을 동화시키는 현상은 그 자체가 부모의 생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분이다. 자율, 권력, 성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 우리는, 권위 역시 심리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발달중에 있는 어린아이와 권위와의 대면을 설명하는 이전의 논쟁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이 탐구를 위해 우리는 초기 발달의 추이에 대해 보다 깊이 제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의 아버지가 어린아이의 성별과 자율의 통합과정에서 했던 역할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125
부모의 권위
성인의 권위와의 대면, 특히 강압적인 부모 역할과의 대면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에게 의지의 테스트가 될 수 있다. 에릭슨은 항문기가 자율발달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지적하였으며,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용변 훈련이 어린아이의 자율에 특히 방해되기 수운 경쟁의 장이라고 지적했다. 사실 전통적인 심리분석 이론은 이 발달단계의 문제들이 새디스트적 성격의 발달에 책임있다고 주장하낟. 그러나 어른의 권위으이 약용, 그리고 이에 따르는 어린아이의 증가하는 자아의식에 미치는 손해는 유아기 이후 어느 때나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악용들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에게 통제에 대한 과도한 편견을 조장할 수 있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조장하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다른 점은, 이런 편견이현저하게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들은, 부모의 권위와 어린아이의 대면에 의해 주로 결정되며, 오이디푸스 시기 이전의 갈등을 오이디푸스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라고 알려진 것에 의해 주로 결정된다. 126
전통적인 심리분석 이론에서는 어머니와 어린아이의 한쌍의 관계에 아버지가 개입하는 것은 차별화에 필수적이라고 간주된다. 어머니에 대한 대립물로서 아버지의 개입은 특히 남자아이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의 개입은 "외부 세계의 일부분에 위험하게 의지하도록, 즉 그가 선택한 애정의 대상물에 위험하게 의지하도록" 만드는 사랑에 대항하여 남자아이를 보호한다. 아버지의 개입은 또한 어머니의 무시무시한 힘에 대항하여 남자아이를 보호한다. 남자아이가 열명할 수 있는 힘의 대아넉 이미지를 도입함으로써,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머니와 어린아이 한쌍간의 긴장에 대한 매우 특별한 종류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그리고 사랑의 유혹물과 어머니의 힘이 강압 양면에서 나오는 자율에 대한 위협을 해결해주는 특수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126
우리의 견지에서 볼대 이 해결책은 자율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다. 자율은 이제 상호적 인식, 쾌락, 존경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 부모의(합법적인) 힘과의 동화에 기초를 둔다. 차별과 연결관계의 변증법적 결합만이 깨진 것은 아니다. 아들에게는 어머니의 친밀성이라는 유혹물 대신에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통해 모성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미래의 전망이 제시된다. 그의 남성적 정체성은 남성을 "여성적인 아닌 것"으로 위험하게 정의내리는 것에 더이상 의지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초도로우와 벤저민이 설명하듯이 "여성"은 이제 "남성 아닌 것"으로 정의된다. 126
그러나 초도로우와 벤저민이 적절하게 강조하지 못한 점은 아버지의 개입의 중요성이 아버지의 권위뿐 아니라 어머니의 권위의 탈합법성과 이에 따르 모성의 기형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이 권위는 단순히 아들에게 부가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적극적으로 환영받고 추구되기까지 한다. 사실, 페미니스트들이 가끔 관찰하듯이 아버지의 힘의 매력은 (아들과 딸 모두에게) 문화가 어머니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정도에 직접적으로 비례하여 증가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 과정에서 수동적 방관자가 아니다. 어머니들은 때때로 자신들의 딜레마를 악화시키는 방식으로 평가절하에 반응한다. 어머니들은, 아버지들이 행위자일 뿐 아니라 희생자인 것처럼, 희생자이며 행위자이다. 특히 강압적인 어머니는 단순히 우리 문화의 유해한 희화가 아니며, 혹은 단순히 어린아이 자신의 두려움들의 투사도 아니다. 강압적인 어머니의 역할은 많은 어머니들이 무의식적으로 그들 자신이 느낀 무력함에 대한 반발로 추정되는 역할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아버지의 권위가 그 권위에 대한 대중적인 (그리고 가족적인) 합법화와 그리고 상상된 어머니의 힘뿐 아니라 실제의 어머니의 힘에 대한 경험 모두에서 매력을 끌어낸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권위와 어머니의 힘 사이의 분기는 문화속에서 기호화되고 가족 안에서 재생산되며, 그리고 어린아이의 상상 안에서 정밀하게 다듬어져 어린아이의 성별 정체성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잔향된다. 이 분기는 아버지와 아들 뿐아니라 어머니와 딸에 의해 구성된 - 그리고 이들을 구성하는 - 사회제도 전체의 산물이며 또한 결정적 요소이다. 어머니가 더욱 강압적일수록 아버지의 권위의 개입은 보다 매력적이다. 아버지가 더욱 권윚거일 수록 자유과 사랑 (특히 여성의 사라오가 여성에 대한 사랑) 사이에 끼어든 균열, 혹은 아마도 보다 자세하게 자율과 의존 사이에 끼어든 균열은 더욱더 커진다. 자율과 의존의 대립이 크면 클수록 남성와 여성 사이의 간극은 보다 넓어진진다. 자율의 이런 "정적인" 정의로, 권력 자체가 다시 정의된다. 이제부터 힘의 정당성은 남근 안에 위치한다. 어머니의 힘은 우선 탈합법법화에 의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거부에 의해 중립화된다. 127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다시 읽기는, 이런 균열로 인해 어머니가 정당한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 인식되는 가능성이 배제되는 방법들을 명확하게 밝힌다. 개인적인 무의식과 문화적인 무의식 속에서 어머니는 전지전능함과 동시에 무능함이라는 두 가지 상상으로 혼란된 형상이다. 우리 중에 실제의 어머니, 어머니의 실제의 힘 그리고 어머니의 힘의 실제의 한계를 알게 된 사람은 거의 없다. 대신에 어머니는 압도적이거나 초라한 유령으로 번갈아서 생존한다. 아버지와는 동일시하고 어머니와는 불니함으로써 남자아이는 어머니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남자아이는 정복을 통하여 어머니의 전지전능함을 무능함으로 변형시키는 법을 배운다. 128
그러나 여자아이에게 아버지의 개입은 아주 다른 함의를 띤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남성성의 새로운 의미를 배우는 것처럼 딸은 여성성의 새로운 의미를 배운다. 딸은 정복의 뒷면으로 복종을 배우며, 여성적 유혹의 기술로 복종을 배운다. 딸은 대리적으로 아버지의 권위를 공유하는 방법과 어머니의 숨은 힘을 찬탈하고 동시에 확장하는 방법을 사랑에서 찾는다. 즉 딸은 어머니의 유령을 내면화하면서 이와 동시에 어머니의 유령의 애매모호함을 보유한다. 128
정복과 복종은 쌍둥이와 같은 기획으로, 이들은 모두 실제의 차이를 대체하며 역동적 자율을 대신한다. 지배와 복종의 순수한 결과도 이상스럽게 같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모두에게, 또한 우리 대부분의 어른들에게도 어머니의 신화적 힘은 지속된다. 128
아버지의 힘의 성애화와 이에 따른 어머니의 힘의 평가절하는 딸과 아들 모두에게 어머니 안에서 구체화된 위험들에 대항하여 보호를 약속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 두 경우에 보호는 모두 단지 심리적인 효과만을 제한하여 왔다. 이 보호는 진실한 차이와 자아에 대한 믿음을 조장하는 대신에 소년에게는 정복을, 소녀에게는 복종을 추구하도록 촉진시킴으로써 자아와 타자 사이의 차이에 대한 지속적인 근심을 유지시킨다. 이 보호는 또한 아들과 딸에게 미래에 아버지와 어머니로 전환되리라는 유산을 남긴 채, 남성과 여성 사이의 기존의 가시적인 차이를 악화시킨다. 자신의 권력의 본질과 한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혼동하는 채로 있는 어머니에게 사랑은 그 자체가 오염된다. 일종의 권력을 주장하려는 시도에서 어머니들은 사랑을 소유와 강압으로 혼돈할 수 있다. 이러 혼돈은 사실상 보편적이며, 그리고 이 혼돈은 때때로 양방식으로 작용하여 우리 모두로 하여금 사려 깊고 민감한 보호행동을 강압으로 잘못 해석하도록 만들며, 또한 가끔 강요를 사랑의 증거로 잘못 해석하도로고 만든다. 한층 더 나아가 어머니 역시 같은 문화의 구성원이므로 어머니의 실제적인 행동은, 어머니의힘과 사랑에 대한 자신의 혼돈 속에서, 그리고 우선적으로 자율과, 궁극적으로는 권력과 지배에 대한 자신의 방어적인 선입견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강화시킬 수 있고 가끔 강화시킨다. 129
결론
거의 확실히 인간의 본성은 ㅣ와 같아서 자율과 친밀함, 분리와 연관관계, 공격과 사랑 사이의 긴장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긴장은 대립과 다르며, 그리고 이 분석의 목적은, 우리 자신이 심리사회적 경험이 - 무엇보다도 여성과 남성의 구분이 - 자율과 친밀함, 분리와 연관관계, 권력과 사랑 사이의 이분화를 초래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나는 발달 이론을 언급하였는데, 이 발달 이론은 무엇이 계속해서 문화저거 이상에 관해 서술하며 또한 - 오늘날의 "자기 도취적" 문화에서조차 - 실제로 체험된 인간 경험의 거대한 부분이었는가를 설명한다. 그러나 정신분석 이론은 아무리 서술적이라 할지라고 규범적이다. 이 이론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실제적으로 행동하는 방식에 광범위한 결과를 가져왔던 부모 역할의 모델을 함축한다. 이 의미에서 정신분석 이론 그 자체는 사랑으로 여성적 "무능함"을 연상시키고, 자율로 남성적 "힘"을 연상시키도록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하는 심리사회적 역학에서 일역을 담당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깊게 뿌리박힌 비관주의적 견해 즉 어머니의영향에 대한 그의 급진적인 불신 그리고 이에 따른 "ㅗ이디푸스적 사회화"에 대한 이상화는 그의 시대의 심리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 효과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130
객체관계 이론 과학자와 페미니스트의 다시 읽기가 제안한 개정은, 우리가 현상학을 사회적 맥락 안에 위치시키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 개정만으로 현상학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그러나 수용된 규범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됨으로써 간접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우선, 이 개정은 다른 종류의 경험인, 전통적인 정신분석 이론에 의해 숨겨졌지만 그러나 점차로 오늘날의 심리학적 관찰자들에게 보이게 된 종류의 경험에 대한 인식과 인정을 용이하게 한다. ....00의 연구는 어머니와 유아의 상호적 행동들이 어떻게 사랑, 주의, 그리고 반응을 통해 자율의 발달을 지지하는가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런 업적들은 어머니의 작업을 합법화하는 데 도움이 되며, 그리고 (적어도 함의상) 아버지에게 보다 민감하고 보다 애정에 넘치는 역할을 제시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 업적들은, 공격, 권력, 지배의 성욕화를 재생산하는 남성적 사회화와 여성적 사회화의 양식들에 대한 대안의 여지를 만들면서, 사회적 가치들의 균형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즉, 이 업적들은 아버지의 권위에 뿌리박혀 있을 뿐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에 깊이 뿌리박힌 합법성이라는 개념을 지지한다. 그 결과 권력은 주로 갈등의 견지에서라기보다는 상호적 관심과 복지의 견지에서 재정의될 수 있다.
지배와 새롭게 구별되는 권력에 대한 이런 재개념은 개인적 영역과 공공의 영역 모두에서 인간관계의 급진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가장 직접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은 과학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대한 힘의 개념의 함의들이다. 이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하여 나는 먼저 자연을 정복하려는 야망과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연결시키는 심리적 역학을 설명하였고, 그리고 나서 과학에 대한 특별한 연관성을 기술하였다. 따라서 다음 장에서 나는 이 논문에서 논했던 감정적 역학에 대응하는 인식적 대응물에 대한 검토를 중점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130
제6장 역동적 객관성 : 사랑, 권력, 지식
"평범한 사람이 과학적 과정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도달하는 것은 사랑에 빠질 때 이예요....당신이 사물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죠. 때때로 난로와 사랑에 빠지거나 혹은 나무와 사랑에 빠지죠. 그리고 나는 진실로 이것이 평범한 사람이 순수한 과학적 경험에 도달하는 가장 가까운 길이라 생각해요"
_ 굿필드
베이컨이 너무나 명백하게 인식했듯이, 지식은 확실히 우리에게 권력을 가져다 준다. 지식은 또한 우리에게 이해라는, 세상에서 여러 연관관계들을 발견하는 독특하게 인간적인 방식을 제공한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지식과 성욕의 유사함이 출현하는 듯하다. 사람마다 성욕을 다르게 이해하듯이 지식 역시 그러하다. 한 동료가 최근에 나에게 전해 준 다음과 같은 대화를 고려해 보라. 내 동료는 수업에서 "창세기"를 읽은 후, 지식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성욕적 의미와 인식론적 의미로 동시에 사용된 이유에 관해 생각해 보라고 학생들에게 요구했다. 젊은 한 학생이 "그것은 명백합니다! 이 두 가지 의미는 모두 권력에 관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젊은 여성인 다른 학생이 "오, 아닙니다.이 두 가지 의미는 모두 접촉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응수했다. 132
이 두 사람의 답이 모두 옳다고 말할 수 있었던 학생은 그 수업에 없었다. 우리 대부분은 심리사회적으로 사랑과 힘을 화해할 수 없는 대안들로 간주하며, 동수에 말하는 방법을 모른다. 바로 앞 논문에서 나는 권력과 지배가 유사한 이유는 남성과 여성의 감정적 발달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인 사랑과 권력의 대립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본 논문에서는 이와 똑같은 분열에 관한 인식적 표현을 탐구하고자 한다. 사랑과 지식의 대립, 부언하자면 서구인의 형성에 기여한 만큼 근대과학의 발달에 줌심적인 기여를 한, 분열에 관한 인식적 표현에 대해 탐구하고자 한다. 나는 지식과 권력의 등식을 불길한 존재로 만들고 동시에 객관성이 지배로 오염되도록 한 것이 바로 이 대립이며, 또한 이 대립은 사랑과 권력 사이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선택을 강강요한다고 주장한다. 객관성과 지배 사이의 관계는 감정적으로 구성된다. 이 관계는 한 과학자의 객체들의 세계와, 그 과학자가 어린아이였을 때 그 어린아이의 "객체의"(보다 더 나은 주체의) 세계 사이의 계속성에서 출현한다. 132
앞 논문에서서처럼 이 분석의 주요 개념은 심리적 자율이다. 그러나 이전의 토론이 감정적 범주만을 주로 다룬 반면, 본 논문은 감정적 경험과 인식적 경험 사이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우리는 어린아이의 (그리고 어른의) 자아감각의 발다로가 현실감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는 우리가 객관성에 부여한 의미가 자율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어떻게 반영하고 그리고 이 이해에 의해 부분적으로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목적을 위해 앞에서 내가 논했던 자율의 두 개념과 유사하게 "역동적 객관성'과 "정적 객관성"이이라는 객관성의 두 개념을 소개하는 것이 유용하다. 이 두 종류의 객관성이 과학이 실천 안에서 (비록 과학의 이데올로기 안에서는 아니지만) 하는 역할들은 차례로 역동적 자자율과 정적 자율이 심리학적 발달에에서 하는 역할과 유사하하다고 간주할 수 있다. 132
나는 객관성을, 자신의 주변 세계에 대한 최대한으로 믿을 만하고 따라서 최대한으로 확실한 이해의 추구로 정의내린다. 이런 추구는, 이것이 이해의 원천으로 정신과 자연 사이의 공통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한에서 역동적이다. 역동적 객관성은 한 가지 형태의 지식을 목적으로 하는데, 이 형태의 지식은 우리 주변의 세계에 독립적인 고결성을 부여하되, 그 세계와 우리의 관련성을 지각하고, 실제로 이 관련성에 의지하는 방식으로 독립적인 고결성을 부여하는 지식이다. 이 점에서 역동적 객관성은 감정이입과 유사한데, 이 감정이입은 타자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보다 풍부하게 하기 위해 감정과 경험의 공통성을 분명하게 끌어들이는 타인들에 대한 지식 형태이다. 이와 반대로 나는 정적인 객관성을, 어떤 한 사람을 타인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객체로부터 주체를 분리시키는 일로 시작하는 지식의 추구라고 부른다. 정적 객관성과 역동적 객관성은 모두 같은 야망을 갖고 있는 듯이 보인, 추구의 특성에 따라 세워지는 출발 전제들이 결정적ㅇ로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피하제는 미소하게 다른 어휘를 사용하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133
"객관성은, 자아가 일상적인 사고에 끼어드는 셀수 없이 많은 침입을 너무나 완벽하게 실현하고, 감각의 환상, 언어의 환상, 관점의 환상, 가치의 환상 등의 결과를 낳는 셀수 없이 많은 환상을 너무나 완벽하게 실현하여, 모든 판단의 예비단계가 그 침입하는 자아를 배제하려는 노력이 될 정도일 때 존재한다. 반대로 사실주의는 자아의 존재를 무시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관점을 즉각적으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사실주의는 인간 중심의 환상, 궁극성, 즉 과학사에 충만한 모든 그런 환상들이다. 사고가 자아를 의식하게 되지 않는 한, 사고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다시 말하자면 실재와 외관 사이의 영원한 혼돈들의 제물이다." 133
그러므로 역동적 객관성은 보다 효과적인 객관성을 위하여 주관적인 경험(피아제는 이것을 자아감각이라 부른다)을 이용하는 지식의 추구이다. 계속성을 전제로 한 역동적 객관성은 자아와 타자 사이의 차이를 보다 깊고 보다 명확한 친근관계의 기회로 인식한다. 타자로부터 자아를 분리시키려는 투쟁은 잠재적으로 자아와 타자 모두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의 원천이다. ... 이 목적을 위하여 과학자는 인간 세계에 대한 이상적 관심과 유사한 자연 세계에 대한 한 가지 형태의 관심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사랑의 형태이다. 사랑과 감정이입의 능력과 유사한 이런 관심에 대한 능력은 차이와 계속성 모두를 수용할 만큼 충분히 인전한 자아감각을 요구한다. 이 능력은 역동적 자율의 발달을 전제한다. 134
어니트스 스캑텔은, 이 관심은 (혹은 "세계적인 개방성"은) 인간의 거대한 대뇌작용 때문에 다른 동물들에서보다 인간에게서 더 고도로 발달된다고 주장한다. 이 관심은 어린아이가 활동 자체에서, 즉 이 세상에 대한 그 혹은 그녀의 자발적인 탐구에서 경험하는 심오한 쾌락의 기초이다. 스캑텔은 프로이트와 대조적으로, 이런 "활동-정서"의 목적이 연관관계의 "해체"라기보다는 인간 환경과 자연 환경과의 관계의 설정이라고 간주한다. 134
밖으로 향하고, 세계로 향하는, 생득적이며 원시적이기까지 한 충동을 스캑텔이 가정하였으므로, 즉 "태내회귀"로 향하는 이와 똑같이 원시적인 충동에서 파생되지도 않았고 관련성과 갈등하지도 않는 충동을 가정하였으므로, 스캑텔은 중요한 한 구분을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관심의 대상으로 설정될 수 있는 "단일성"의 감정과, 자아와 현실이 아직 분리된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 초기 유아상태로 후퇴하는 것으로 프로이트가 인식했던 "대양적 감정"을 구분한다. 이런 일체감은 "자궁으로 회귀하려는 소망에 의해 퇴행적 방식으로 확립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타자와 세계와의 애정어린 관계에 의해 보다 높은 수준의 발달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확립될 수 있다"고 스캑텔은 썼다. 135
세계에 대한 이런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발달된 지각저거인 도구들은, 스캑텔의 소위 "타자 중심의" 지각, 혹은 타자에 중심을 두는 지각의 일부이다. 이 도구들은 "가능한 한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경험될 수 있도록 대상에 지각자의 모든 지각 기능과 경험적 기능을 완전하게 초점 맞추기"를 요구하는데, 이 초점 맞추기는 차례로 "지각자의 모든 자기 중심적 사고와 열망의 일시적인 소멸, 자아와 자존심에 대한 모든 열중의 일시적 소멸, 그리고 대상으로의 완전한 방향 전환을 전제한다... 타자 중심적 지각의 단일성은 자아의 손실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고양된 활기로 이끈다" 스캑텔은 이런 지각에 필수적인 정신상태를 설명하기 위하여 릴케를 인용한다. "대상이 당신에게 말하게 하기 위해서 다신은 특정 기간 동안 그 대상을 존재하는 단 하나의 존재로 생각하여야 하며, 당신의 헌신적이고 배타적인 사랑 덕분에 우주의 중심에 자신이 위치함을 발견하는 단 하나의 현상으로 간주해야 한다" 135
스캑텔에게 타자 중심적인 지각은 타자들을 "완전하고 유일한 존재로 인정하기를 원하는" 사랑에 봉사하는 지각이다. 이것은 객체들을 "인간이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세계의 일부분"으로 인정한다. 또한 다름 차례로, 욕구나 이기주의(자기 중심적 지각)가 지배하는 지각과 대조적으로, 타자 중심적 지각은 객체의 당당한 권리대로 객체에 대해 보다 완전하고, 보다 "포괄적인" 이해를 하도록 허용한다. 스캑텔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왜 사랑이 증오보다 많은 것을 보는가하는 이유이다. 증오는 공격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지각하는 데 기민할 수 있지만, 그러나 비록 이런 기민함이 인상적인 통찰력들을 낳는다 할지라도.... 이들은 항상 타자의 일부분에만 관심을 가지며, 그리고 공격의 주안점들로 이용될 그런 부분들에 대해 (편파적)이다. 그러나 증오는 전체적인 모습의 객체를 볼 수 없다." 135
세계에 대한 이런 강렬한 흥미, 우리 앞의 객체에 대한 이런 완전한 몰두는 특히 어린아이에게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의 추구를 위해 이런 종류의 관심을 사용하는 능력은 흥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이 능력은 자아와 타자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의 개발을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스캑텔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능력은 욕구와 그느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관심의 사용을 허락하려는 우리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우리의 능력과 타자의 능력에 대한 충분한 믿음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비록 어린아이 쪽에 환경에 대한 생득적인 자율적 흥미가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프로이트로부터 강력하게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캑텔은 타자 중심적 지각의 도구들의 발달에 대해 설명할 때 전통적인 정신분석 이론(그리고 객체관계 이론)과 합류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객관성의 추구는 이중적인 요구를 한다. 우선 세계에 대한 어린아이의 생득적 관심이 잔존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과, 두번째로는 객체들을 우리 자신의 욕구, 욕망, 그리고 개인적 관점들과 분리되고 구별되는 것으로 초점을 맞추는 능력을 개발할 것을 요구한다. 타자중심적 지각은, 내가 역동적 객관성이라 부는 것과 유사하며, 타자 중심적인 관심과 "초점적 관점"의 도구들의 결합에서 출현한다. 역으로, 타자 중심적 지각의 실패는 생득적 관점의 금지나, 어린아이의 증가하는 자율의식을 반영하는 지각적, 인식적 도구들의 부적절한 발달의 결과로 생길 수 있으며 혹은 이 둘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상호작용하면 세계 자체에 대한 관심이 타락하여 개인적 욕구와 근심에 이용된다. 136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주요한 것은 바로 이 최종적 발달단계의 전환, 즉 타자중심주의에서 "이차적 자기 중심성"(보다 일반적으로 도구주의라 불린다)으로의 전환이다. 비록 스캑텔이 "인간은 이 이차적 자기 중심성을 지각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라고 인식하지만,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이 관점은 인간의 현실관을 방해하고, 자기 중심적인 폐쇄된 세계 속에 정체되어 있도록 이끈다"라고 말한다. 이 문제는 객체들이 "지각자의 어떤 특정 필요에 어떻게 이용될 것인가, 혹은 객체들이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그 지각자에 의해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전망에 의해 객체에 대한 지각"이 한정되느냐 아니냐에 대한 것이다. 즉 객체들에 대한 지각이 "이용되는 객체"에 대한 지각에 한정되는가의 여부이다. 대부분의 우리에게 과학은 객체 중심적 관심의 가장 명백한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스캑텔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시인과 예술가들이 타자 중심적 지각의 보다 친밀한 모델들을 제공한다. 137
이 이유는 간단하다. 과학과 예술이 모두 창조성에 대해 비록 똑같지는 않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유사한 요구를 한다고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스캑텔은 과학적 객체들이 일차적으로 더 자주 "이용되는 객체"로 지각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경우에 과학자는 객체를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의 가설로 주시하고, 그리고 자신의 연구 목적을 마음에 두고 객체를 주시하며, 그럼으로서 한 가설을 확증하거나 논박하기 위해서 객체를 "사용하지만", 그러나 객체를 자체의 완전함을 지닌 그런 존재로 대면하지는 않는다. 또한 근대의 자연과학은 예측을 주요목적으로 삼는데, 예를 들자면 어떤 예기된 사건들이 일어난 그런 방ㅇ식으로 객체들을 조성하려는 주요 목적을 가진다. 이것은 그 객체를 이렇게 조정하거나 제어하기에 적절하도록 만드는 측면들만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객체는 이용되는 객체가 된다.... 어떤 현상이나 객체를 어떤 체계, 예견, 혹은 가설에 적합하게 만들려는...."과학자들의" 시도에서, 우리는 객체 그 자체의 순수하고 완전한 존재에 대해서는 그 과학자들이 전혀 보지 못하고 있음을 자주 관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각은, 불운한 희생자들을 만든 프로크루스테스처럼 과학자가 자신의 목적들을 위해서 사용할 수 없는 객체의 측면들을 절달하는 강압적 폭력행위가 거의 될 수 있다."
스캘텔은 일반적으로 객관주의의 친숙한 부수물인 객체와의 관계에 대해 기술한다. 객체로부터 주체를 분리시키는 일은 "자신과 타인 사이의 친밀관계의 경험적 현실"을 거부하는 것인데, 이 실현은 역동적 객관성의 본질이며, 스캑텔의 용어로 하자면 객체를 당당한 권리대로 인식하는 데 필수적인 관계이다. 자아와 타자의 상호적 행동의 극단적인 형태 즉 병리학적으로 분류된 형태들을 자세히 바라봄으로써, 자율의 여러 변화와 정상적 행동 내의 자율의 인시걱 대응물 사이의 보다 진전되고 보다 특수한 관계들을 이끌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 이 점을 위해 나느 사피로의 초기 작품인 <<신경질환의 양식들>>뿐 아니라 <<자율과 경직된 성격>>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후기 작품에서 사피로는 강박신경증적 심리와 망상적 심리의 인식적 대응물들을 설명했다. 좀더 완벽을 기하기 위해 나는 새디즘의 인식적 대응물에 대해 몇 가지 더 참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138
강박신경증의 주관심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제어이다. 사피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의 심리상태에서 자기 지신는 의지의 선택과 신중하고 고의적인 행동이라는 저아억 의미로부터 왜곡되어 그의 모든 행동의 자의식적인 지시가 되며, 마치 방관자에 의한 것처럼 그 자신 그리고...(자신의) 희망들과 감정들에게 행해지는 계속된 고집스러운 압력과 지시의 행사가 된다." 이런 가혹한 체제 아래에서 관심은 나머지 행동과 마찬가지로 같은 종류의 통제에 종속되며, 너무나 강렬하고 예리하게 한정적인 일종의 표적에 초점을 맞추게 되어, 객체에 대한 지엽적인 비전, 일시적인 인상, 직감, 총체적인 감정을 배제시킨다. 그 결과는 신념의 상실이다. 진리는 경험되기보다는 추론되며, 판판단과 결정의 기초는 감정보다는 규칙 안에서 추구된다. 강박신경증자는 "(그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래야만 해), 혹은 (그것이 적합해)와 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적합하지 않은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경직되거나 원리주의적 강압신경증자는 단순히 예외적인 것을 무시한다. 그는 자신의 사고 노선을 편협하게 따르며 정도에서 벗어난 그릇된 길로 곧장 간다."
망상적 환자의 인식양식은 비록 몇몇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아주 다르다. 자기기제어의 상실에 대한 근심이라기보다 타자에 의해 제어받는 두려움에 근거하여, 부언하자면 자기 자신의 달갑지 않은 충동보다 타자에게 굴복하는 두려움에 근거하여, 망상적 환자의 관심은 경직되지만 그러나 편협하게 초점이 맞추어지지는 않는다. 그 혹혹은 그녀의 적적합하지 않는 것을 무시하기보다는 그 혹혹은 그녀는 모든 가능한 단서에 조심해야만 한다. 어떤 것도 면밀한 음미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적합해야만 한다. 망상적 환자의 망상은 논리리의 부족이 아아니니라 비현실감을 겪는다. 사실 망상적 환자의 망상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모든 실마리들을 단 하나의 해석에 접합다호독 만드는 노력에서 유래한다. 이 논리가 일단 성취되면, 대안적 해석의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는다. 파편들은 그들의 적합성이라는 페쇄성에 의해 갇히게 된다. 그 결과는 너무나 설득력이 있어서 그 해석 이외에는 "어떤 것도" 상상될 수 없다. 몇 가지 면면에서 망상증은 본질적으로 꼼꼼한 과학자와 유사하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과학자들은 그들의 해석이 모든 세부사항을 설명할 수 없음을, 즉 논리와 사실주의 사이에 어떤 타협이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있음을 인식식한다. 139
망상증과 과학적지각 사이의 이차적이고 아마도 보다 중요하기까지한 구분은 해석에 대한 주관적 힘들의 영향에서 발견될 수 있다. 망상증 환자에게 해석은 주로 주관적 필요, 특히 자신의 자율을 위협하는 스며드는 위협감에 대항아혀 방어할 필요에 의해 결정된다. 강박신경증적인 양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직원리는 경계인데 - 망상증 환자에게는 극단적인 휘협에 대항하는 경계, 강박신경증 환자에게는 내적 위협에 대항하는 경계 - 두 가지 경우에서 모두 경계는 깨지기 쉬울 정도로 비대해진 자율감인, "너무 약해서 이런 놀랄 만하게 경직되고 과장된 형태로만 유지될 수 있는 자율감"을 지지하는 데 사용된다. 두 가지 경우에서 모두 이런 경계의 사실 그 자체가 - 이 사실이 몇몇 형태의 지각을 예민하게 만들어 많은 종류의 과학 연구에 매우 유용할 수 있을지라도 - 감수성, 상호성 혹은 단순히 완화된 정신상태를 요구하는 모든 감정적 경험들과 인식적 경험들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출현하는 객체들의 세계는 여러 측면에서 이상할 정도로 정확하게 정의될 수 있는 세계이지만, 그러나 이 세계는 그 매개변수들이 주로 관찰자의 필요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이다. 139
지배를 전제로 하는 객체관계에서 유래하는 인식적 초점을 위해서도 위와 유사한 주장을 할 수 있다. 새디스트적인 성격에서, 타자와의 관계는 주로 힘이라는 척도에 의해 결정된다. 자신의 의지의 강함은 타자의 복종에 의해 측정된다. 이에 상응하게 이해와 능력은 일상적으로 보질적 가치의 목표들로 이들이 지배 혹은 정복을 조장하는 데 이용되는 한에서만 줄 가치를 갖게 된다. 지각 그 자체가 정복할 필요에 이용된다. 지각은 취약성, 약점들, 공격받기 쉬운 성질을 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40
그러나 정복하기 위해 지각을 인식적으로 사용했다는 증거나 혹은 보다 일반적으로 방어적인 목적이나 공격적인 목적을 위해 지각으 ㄹ인식적으로 사용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새디즘의 병리학까지 들춰볼 필요는 없다. 이런 증거는 아주 많은 정상적 개인들이 새롭고 미지의 것들과의 만남에 대해 기술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제시될 뿐 아니라, 이들이 새롭고 미지의 것들에 접근하는 방식에 의해 제시되기도 한다. 특히 나는 과학의 일상적 수사학 안에 표현된 공격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나는 단지, 과학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는 객체의 측면들을 절단한다"는 스캑텔이 서술한공격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들과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음을 반영하는 그런 종류의 억압을 의미한다. 예를 들자면, 생물학자 페인터터는 대학원 학생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면서 즐거움을 누린다. "연구는 사슴사냥과 매우 흡사하지 사냥감을 만나기 위해서는 절적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어야만 하고, 물론 장전전된 총을 갖고 그 총의 사용법을 알아야만 하다네"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연의 "요새의 성을 돌격하려는" 노력을 한다는 점에서 과학은 전쟁터처럼 보일 수도 있다. 때때로 이런 이메저리는, 전사나 사냥꾼의 관습적 이메저리조차 능가하면서 아주 극단적이 된다. 예를 들자면, 한 과작자가 자신의 추구를 기술하는 다음과 같은 언어에 주목해보라. "나는 잔인한 관찰자가 자연을 수중에 넣어, 땀이 전신에서 솟아나오고 그리곤 괄약근이 너덜너덜하게 될 때까지 그 자연을 쥐어어짜는 것으 ㄹ보기 위해, 이 세세하고 끈질긴 탐구를 통해 다른 정신의 작업의 뒤를 따르고 싶었다." 많은 과학자들에게 문제들은 "공격받받아야만 하고" "정복해야 하며," "매질당당해야"하는 것들이다. 만약 보다 치밀한 방법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폭력" 즉 "강압적인" 접근 방법에 의지한다. 문제들이 단순히 "해결될 수 있는" 보다 부드러운 담론에서조차, 문제들은 해결되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 기본가정이다. 이 과정은 그 분야에서 장애들을 말끔히 제거하느 ㄴ과정으로 인식된다.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목적이 새로운 문문제들 새로운 시작들, 새로운 이해를 밝히는 것이라는 상호 보보충적 생각 역시 존재할 수 있으나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경우는 훨씬 적다. 141
이런 방식으로 말하는 과학자가 만약 소수있다 하다러도, 새디스트적이거나 망상증적이거나 강압신경증적인 성격으로 기술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병리학에서 심각한 형태로 명시되어 있는 자율에 관한 이와 같같은 많은 관심들이 보다 부드러운 형태로 전인간 개체군 속에 실제로 편재한다. 만약 이 관심들이 특히 과학자들 사이에서 현저하다면, 그 이유는 객관주의적 이데옹로기주의자가 기술하듯이 과학이 이런 관심들을 환영하는 성역이기 때문이다. 연구대상으로부터 냉정하고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스스로를 선전하는 과학은, 이런 약속이 감정적 안락함함을 제공하는 개인들을 위해선택된다. 이와 유사하게 나는 권력과 자연에 대한 정복을 약속하는 과학은, 권력과 통제가 주관심인 개인들을 위해 서너택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지식의 추구를 절대적인 과정으로 지각하는 과학은 자자연 환경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고 스스로 느끼는 경햐의 사람들을 위해 선택된다. 과학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이 세 가지 구성원들 사이이의 관계는 지적인 유대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호소하는 감정적 필요의 유대관계 속에 있다. 141
그러므로 나는, 과학적 담화 안에 표현된 특별한 종류의 공격성이 우리가 연구하는 대상들에 대해 느낀 연관성의 부재만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어린아이들이 (그리고 몇몇 어른들이) 자신들의 자아의식을 감정적 세계의 보다 즉각적인 객체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보장하려고 시도할 때 경험하는 주관적 감정들도 반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많은 과학자들이 전체로서의 자연이나 혹은 그들이 연구하는 특별한 대상들과 함께 연류되어 있다고 느끼는 경쟁은, 다른 인간들들과 함께 연류되어 있다고 그들 자신이 느끼는 경쟁을 반영한다. 이와 유사하게 자연을 정복해양 할 욕구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려는 욕구의 투사이다. 이 욕구는 능력의 위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능에 대한 근심에서 나온다. 이런 정복이 가져오는 권력의 느낌은 자신의 의지에 타타자를 복종시킴으로써 나올 수 있는 권력의 감감각과 유사한 것만이 아니다. 이 느낌은 바로 그와 똑깥은 느낌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그렇게 많은 과학자들이 공유하는 자연을 정복하려는 꿈은, 전형적인 이들이 아버지의 권위와 동일시함으로써 실현하기를 희망하는 힘을 반향한다. 그러나 이런 꿈은 바로 본질상 자기 한계적이다. 이 꿈으로 인해 아들은 실제제의 어머니를 결코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됨으로써 이 꿈들은 마찬가지로 "실제의 " 자연을 알려는 과학자의 노력을 방해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142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과학의 실천은 사실상 과학의 이데올로기적 처방과는 아주 다르다. 과학자들은 자신의 주제들에 대한 접근 방법과 연구 양식들에서 매우 다르다. 이 차이들은 그들이 자연과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다른 방식들을 반영한다. 과학자 개개인은, 자율에게 할당될 수 있는 넓은 범위의 의미와 병행하여 객관성의 추구에도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제공한다. 사실 이런 차이들들은 과학적 기획의 활력에 필수적이다. 또한 이런 차이들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이 책의 근본명제가 형성된다. 실제의 과학은 자신의 지배적인 수사학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바다는 과학의 실천을 구성하하는 양식과 접근 방식의 복수성에 의해 보다 충실하게 기술된다. 142
몇몇 과학자드르이 경쟁, 전쟁, 정복연습 등과 같이 현저하게 적대적인 어휘로 자신으 노력을 주시하는 반면, 다른 과학자들은 주로 성애적 활동으로 자신의 노력을 주시시한다. 예를 들자면, 마이클 폴래니는 거리감 대신에 "우리의 육체를 (객체를) 포함할 수 있을 정도로 확장할 - 그 결과로 우리는 그 객체 안에 머무를 수 있다"고 필요를 강조한다. 현대의 다른 한 과학자는 과학 연구의 실천을 위해서 "가장 최고의 유추는 항상 사랑이다"라고 제안한다. 발견의 보상은 "우리가 다른 사람 혹은 한 주주체에 중추적인 것을 건드렸고, 그리고 우리가 조용하고감사하다고 느끼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자에게는 꿰뚫을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는 이해의 층에 침입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과학자에게 이해는 냉랭한 거리감의 산물이 아니다.오히려 그그녀는 다름과 같이 말한다. "만약 정말로 종양을 이해하기 원한다면, 종양에 걸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연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어 대답이 나오도록 고통을 주는" 은유를 열정적으로 거부한다. "나느 그 유추가 끔끔찍하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강간과 같아요. 반면에 과학에서... 그것은 강간과 성관계 사이의 차이와 같아요" "우리는 모두 자연의 일부분이에요.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인간을 개관화하려 한다면 - 당신 자신을 이르는 말인데 - 비록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당당신은 여전히 심문의 희생자예요" 143
이런 다른 예들도 많다. 이 예들은 르네상스ㅡ 시대의연금술사로부터 계속해서 근대과학의 전통의 일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부차적 주제들이 우세한 수사학에 의해 들리지 않게 되었던 것처럼, 역사를 통해 단지 작은 소리로만 주장했다. 단순한 선택의 역학을 통해 이 수사학은 서구 과학이 택한 특별한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향력을 끼쳤다. 이 장에서 나는 정복, 강압, 지배의 수사학이 특특별한 감정적 - 그리고 인식적 - 양식으로 향하려는 과학적 공동체를 위해 선택되는 데 이용된다는 사실을 주장해 왔다. 다음 장에서 나는 그 공동체에 의해 내면화된 똑같은 수사학이 이번에는 연구, 방법법론들, 그리고 이론들의 어울리는 과학적 양식을 위해 선택되는 부차적인 선태과정을 논한다. 반복되는 놀랄 만한 계속성이 과학자들이 연구구하는 방식,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대상들에 대해 가정하하는 관계, 그리고 그들이 선호하는 이로넉 방향 등에서 보여질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데올로기는 특수한 양식들, 방법론들, 그리고 이론들이 "좋은" 과학으로 정당화되되되는 과정에서 주로 스스로를 느껴지도록 만든다. 어떤 이론과 방법은, 과학자들이 경쟁하는 방법론과 이론의 유보자들 사이에서 집합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에 의해 "가장 잘 " 선택된다. 이런 선택의 평가기준은 복잡하다. 필연적으로 이 문제는 어떤 이론이 가장 완전한 설명과 가장 최고의 예언을 제공하는가 뿐만 아니라, 어떤 이론이 구체화될 수 없는 "미학적" 평가가기준의 그 호스트를 가장 잘 만족시키는가에 대한 문제이며, 어떤 이론이 우리의 내재된 이데올로기적, 감정적 기대들과 가장 자 ㄹ조화하는가를 포함하는 문제제이다. 만약 성애적 주제들이 과학사에서 파붇혀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면, 이들은 비록 결코 강압적이지는 않지만 과학자들과 과학 모두의 발달에서 결정적으로 형성되어 온 강압의 수사학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파파파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144
다른 규범들, 즉 정적인 객관성보다다는 역동적 객관성의 이상에 입각한 한 담론이 과학에 갖는 함의들에 대한 보다 명백한 묘사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비록 이데올로기 안에서는 아니지만 과학의 실천 안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는 이런 (일반적으로 병합되지 않은) 전전통을 검토할 필요가 있고, 또한 이 전통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적대적인 견지에서보다는 성애적인 견지에서 자신들의 재료와의 관계를 보아왔던 개인들이 생산한 과학(양식과 내묭 모두에서)에 특별히 면밀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바바라 맥클린톡이 제공한 모델로 돌아가 - 아마도 현대의 과학에서 역동적 객관성에 대한 가장 탁월한 예증일 것이다 - 그녀의 비전과 과학의 실천을 돋보이게 만드는 주요 요소들으 규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이다.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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