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서지기 쉬운 삶:
상처 주는 세상을 살아가는 법
도트 메이
서문—상처 받음에 대하여
1장. 상처 주는 세상, 부서지기 쉬운 삶
어둠의 여왕이 방문한다|상처 받음과 상처 받지 않음|우리는 무엇을 통해 살아가는가|가치 있는 일, 그렇지 않은 일|실천과 과제|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는가|신체적 고통|몸과 마음의 한계와 장애|고통의 근원|도덕적 갈등과 딜레마|도덕적 운 vs. 의도|통제되지 않는 ‘의도’
2장. 과거의 무게와 미래의 무게
과거가 짐으로 여겨지는 이유|선택한 길과 선택하지 않은 길|불확실한 상황과 더불어 살 수 있을까|죽음의 의미|과거의 무게와 미래의 무게의 역설
3장.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
상처 받지 않는 태도|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평정심을 유지하며 연민하기|이기심을 버리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기뻐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일이 있는 그대로 일어나길 바라라|상처 받지 않고 살아가기 위하여|진정한 쾌락|욕망과 초연함 사이에서|지금 이 순간을 산다는 것|상처 받지 않는 삶이 과연 더 나을까|초연한 태도가 문제가 되는 이유|때론 초연함이 덜 인간적이고, 덜 매력적이다
4장. 세상은 위험하고, 우리는 위태롭다
현재를 있게 한 과거의 긍정|온건한 허무주의|구제의 전략|현재를 긍정하기 위해 과거를 통째로 긍정해야 할까|과거와 현재의 필연성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받아들임
5장. 상처와 고통의 의미
우리는 왜 상처에 취약할 수밖에 없을까|통제할 수 없거나 사소하거나|영적 훈련|고통과 상처 그리고 삶의 의미|관심과 돌봄 그리고 끌림|무조건적 긍정도, 초연한 평온도 아닌|나쁜 일도, 좋은 일도 받아들이다|우리는 세상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버릴 수 있다|세상의 우연성과 조용한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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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고통을 껴안은 채 얻을 수 있는 앎
서문,
상처 받음에 대하여
지난 45년간 나는 이따금 이 책의 주요 문제에 대해 생각해왔다. 본문의 처음 몇 구절로도 확연해질 이유로 인해 나는 삶에 평온을, 말하자면 삶에서 흔들리지 않을 고요한 공간을 제공해주는 방법에 오랫동안 마음이 끌렸다. 불교, 도교, 스토아주의, 어느 정도의 에피쿠로스주의 그리고 최근에는 에크하르트 톨레는 그런 평온함을 약속한다. 4
그렇지만,
나는 끝내 그 약속에 전적으로 납득하지는 못했다.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항상 잘못된 것 같았다. ... 나는 내가 원하는 것 그리고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공인된 교리에서 제시하는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줄 것이 없다는 게 아니다 - 마지막 장에서는 그 시각의 일부 측면을 내 관점에서 통합시키려 한다 - 적어도 그 공인된 형태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을 삶을 그려 보인다는 것이다. 그 교리들은 상처 받지 않는 태도를 권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 교리들을 따르는 많은 이들을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은 상처 받기 쉬운 상태에 있으면서 조금 덜 상처 입기를 바랄 뿐이다.
이 책은 상처 받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아보려는 시도다. 5
1. 상처 주는 세상, 부서지기 쉬운 삶
우리가 왜 고통 받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10
고통의 근원
. 신체적
. 심리적
. 도덕적
근원적 취약함 두 가지
. 과거의 무게
. 죽음
우리는 그런 고통, 취약함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가능한 한 최선의 방식으로 삶을 계속해나가려면 세상에서의 우리 자리와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 그런 그림이 그려지는 데는 적어도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상처 받지 않음(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 수 많은 교리의 공통된 그림. invulnerabilism
. 상처에 취약함이 이런 교의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상처받지 않는 초연함의 통찰력을 인식하고 의지하려 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상처 받지 않음의 모든 관점 또는 적어도 내가 그 관점들의 공식 형태라고 부르는 것에 공통된 중요한 교의는 거부할 것이다.
. 보통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많은 것들로부터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우리는 자신 안에 평화의 장소, 근본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거나 흔들리지 않는 무심함의 공간을 만들 수 있다. - 그리고 많은 이들에 따르면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중심이다. 이 중심을 개발함으로써 우리에게 불행이 들이닥쳐도 궁극적으로 상처 받지 않을 수 있게 된다.
. 감상적인 영화나 농구 경기의 팬과 같이 일시적으로 슬픔과 흥분을 느낄 수는 있지만, 결국 그것이 영화나 경기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 에크하르트 톨레, "지금을 존중하고 받아들일수록 아품, 고통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지게된다"
. 이 시각들의 공통점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로 만드는 중요성에 전념하는 데 있다.
2) 상처 받기 쉬움(상처에 취약함) vulnerabilism
우리가 세상의 약탈에 영향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 그런 중심을 개발할 수 있다거나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 세계와 평화에 도달하는 것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 관점은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의 일부 통찰력, 즉 고통 앞에서 비참해지지 않도록 하는 통찰력을 받아들인다.
. 일부 사람들에게는 상처에 초연하려는 태도가 살아가는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상처 받지 않는 중심을 개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18
도덕적 운 vs. 의도
고통의 또 다른 근원이 있다. 그것은 도덕성에 대한 전반적인 헌신, 즉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에서 나온다.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도덕적 운'의 경우로 말한다. 48
트럭 운전사가 아이를 치어 죽인 사고에서 그의 불운은 도덕적 운의 현상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의 행동에서 중요한 면이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에 달려 있지만 그런데도 그를 그 점에서 도덕적 판단의 대상으로 계속해서 다루는 경우, 이를 도덕적 운이라 부를 수 있다" 49
도덕적 운, 네 종류.
1) 구성적 운, 선천적으로 타인에게 공감을 잘 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도덕적 운이 좋다.
2) 사람이 어떤 종류의 상황에 있는가에 따른 운. 예, 독일 나치 치하에서 자란 사람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기 더 어려워 도덕적 운이 나쁠 것임.
3) 그 사람의 역사와 관련된 운. 본성 보다는 환경의 문제다. 아동기 학대, 받은 교육
4) 특정한 상황, 예. 아이를 차로 쳐 죽인 트력운전자. 50
2. 과거의 무게와 미래의 무게
3. 상처 받지 않은 초연함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첫째, 이 철학적 교리들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고통에 대한 초연함을 제시하는가? 그들이 약속하는 평화와 평정이란 무엇인가?
둘째, 그런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을 우리가 원할 것인가? 이 교리들 중 하나를 수용할 때 고통 받지 않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인지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그 대가를 치를 의향이 있는지 물어야 한다. 99
상처 받지 않는 삶이 과연 더 나을까
이 관점들의 많은 측면을 읽고 생각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얻을 것이 많다는 점은 여전히 확신한다.... 그렇지만 그 관점들이 수용하고 있는 상처 받지 않음의 태도는 내 삶을 인도해줄 철학적 관점으로 삼기에는 세상으로부터 너무 거리를 두는 것 같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덜 평온한 생활을 지지하면서 이 관점들에 공통적인 초연함을 거부하며, 그로 인한 평온함의 상실과 연관된 대가를 기꺼이 치르려 할 것 같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관점들이 권하는 상처 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자신을 보기 원할 수도 없으며, 원하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153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 받는 삶을 기꺼이 승인하려 할 것이다. 그 삶은 초연함의 관점들이 제시하는 교훈은 받아들이지만, 그 관점 자체를 삶의 태도로 지지하는 것은 거부한다.
상처 받지 않음의 시각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상처 받지 않음을 지지하는 시각은 왜 단순히 할 수 있음의 문제가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의 욕망을 넘어서는 문제로 보이는가? 그 점에서 정치적 문제, 죽음, 실패, 상실과 관련한 네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 초연함의 시각은 이 순서에 따라 점점 더 각각의 문제에 대처하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153`
초연한 태도가 문제가 되는 이유
학생들의 질문, "고통을 끝내는 것이 목표라면 어째서 그냥 자살하지 않는가?" 어쨋든 명상이나 자기 변화 같은 번거로움 없이 자실이 고통을 빨리 처리할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그에 대한 답은, 자살은 욕망이나 집착을 극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에 굴복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상처받지 않음의 시각은 우리의 욕망에 굴복하지 말고 그 반대로 우리에 대한 욕망의 지배를 끝내라고 권한다. 154
1) 정치적 문제
우리의 세계는 부정의로 가득 차 있다... 독재정치, 인종차별주의, 압제, 여성혐오, 동성애혐오, 착취, 지배...
상처받지 않음의 교리는 그런 사태에 어떻게 맞서게 하는가?
그 시각들이 정의에 무관심하다고 말한다면 잘못일 것이다. 특히 불교는 보살의 행동을 통해서, 스토아주의는 이성적 행동에 초점을 둠으로써 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계속 관심을 보였다. 155
어떤 면에서 이 사상들은 정의의 과제에 참여하는 것을 더 용이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활에 만족한다면 자신의 삶은 괴롭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조하기 쉬울 것이다. .. 상처 받지 않음의 시각을 지지하는 사람에 따르면, 우리가 자신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더 열려 있게 되므로 정의를 위해 일하기에 더 나은 위치에 있게 된다. 또는 적어도 좋은 기준이 된다.
하지만 첫째, 이 시각들에는 '내면' 지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관심을 우선시하므로 정치적 문제 보다는 개인적 문제로 주의를 이끌기 쉽다. 어떤 사람이 평정심을 유지하려 할 때는 그것이 방해 받지 않도록 자신의 관여를 조정해야 한다. 반면에 정치적 관여는 흔히 스트레스와 갈등의 상황에 처하는 것을 포함하므로 누군가 평온한 상태에 있으려 한다면 정의의 과제를 향하기보다는 그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157
둘재, 정의에 대한 관심은 대개 평온이나 평정의 감각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세상의 상태에 대한 고뇌에서 발생한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보는 부당함에 동요하며 그 부당함을 완화시키거나 그것에 맞설 행동을 하지 않으면 스스로 편안함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평정을 가져다주겠다는 점에서 동기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맞서고 있는 부당함이 극복될 때까지는 어떤 평온도 발견할 수 없고, 발견해서도 안 된다는 의식을 계속 유지함으로서 동기를 부여 받는다.
. 상처 받지 않음의 시각은 인간의 감정과 반응의 영역을 제한한다. 그 사상이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진다면 세상에 생기를 주는, 인간 삶의 다양성이 줄어들 것이다.
. 상처받지 않음의 시각은 부당함에 맞설 동기로서의 고뇌를 버림으로써 핸재의 중요한 정치적 행동의 원천을 제거해버린다. 고뇌는 정치적 행동의 지배적인 원천이므로 그것을 버리는 것은 부당함에 대항하는 정치적 참여 정도를 감소시킬 위험이 있다. 158
2) 죽음의 문제
그 시각은 다양한 이유에서 필멸성이라는 사실에 편안함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전통적인 불교에서는 사람이 열반에 도달할 때까지 다시 태어난다고 하기 때문이다. 158..
그들이 주는 조언에 잘못된 것은 없다. 문제는 그들이 죽음과 특정한 관계를 가지도록 권하면서 죽음에 대해 보일 수 있는, 동등하게 타당한 다른 관계는 배제해버린다는 데 있다.
어떤 사람이 노년에 이르러서도 왕성한 원기로 타오른다면 그에게 죽음은 포용이나 체념이 아니라 거부의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59
우리는 한 사람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관계가 여러 가지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며 무엇이 더 나은지는 그 사람이 살아온 삶에 달려 있을 것이다. ... 죽음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은 삶을 사는 것을 멈춘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나는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의 시각이 죽음과 관련해서 제시하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게 아니라, 그 시각이 거부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누군가는 상처받지 않음의 시각 편에 서서, 빛의 소멸에 분노하는 것은 삶을 강렬하게 살았다는 표시가 아니라,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데 실패했다는 표시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빛의 소멸에 분노하는 것이 ... 공허한 감각일 필요가 없으며 그 대신에 지적인 호기심이나 아직 충족되지 않은 정의에 대한 열정, 다가오는 죽음을 밀쳐내게 만드는, 순전한 자발성으로 가득 채워진 감각이 될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더 살고 싶어하는 욕구는 삶을 잘 살지 못했다는 표시라고 쉽사리 단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필멸에 대한 어떤 지혜가 아니라 강렬함을 갖고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 무능력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161
3) 과제의 '실패' 문제
초연함을 권하는 사상은 과제에 실패햇다고 해서 후회나 회한을 갖지 말라고 한다.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상처받지 않음'의 신조로서 어떤 것이든, 특히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어던 것에 감정을 쏟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 시각이 배제하는 것은 우리의 계획과 행동의 결과로 일어난 일에 대한 모든 집착이다. 161
그러나 실망, 슬픔, 참회 어쩌면 비통함을 갖고 과거를 돌아볼 여지는 전혀 없는 것일까?
독일 장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그가 (히틀러) 암살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것이 비이성적인 일이 되는 것일까? 그가 유린당한 국가를 구하려고 했던 시도의 실패에 감정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암살 계획을 무릅쓰는 데 필요한 깊은 주의와 그런 초연한 태도를 조화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이 그에게 권하는 태도가 그런 것이다. 163
슈타우펜베르크가 실패는 과거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고 실패 자체에 집중한다고 해서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의 시각에 따르면 부절적한 것이 되며 그의 욕망이나 열정의 투입, 현재 대신 과거에 연연해하는 태도를 없애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실망이나 후회는 우리가 관련된 반응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관련되고 싶어하는 반응일 것이다. 165
이 모든 실패는 여러 다른 방식으로 실망, 후회, 일부 경우에는 고뇌를 요구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허용한다. 이런 반응은 그저 이해할 만한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배려를 보여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심지어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의 시각을 지지하는 사람일지라도 어떤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실패에 직면했을 때 취약한 태도가 불가피함을 의미한다. 166
4) 상실(애도)의 문제
아들의 죽음에 대한 아낙사고라스의 반응.
초연한 태도를 지지하려면 우리 바깥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없거나 적어도 영향을 주어서는 안되며, 우리는 그 공격에 면역이 되어 있어야 한다. 배우자, 가까운 친구, 특히 아이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보다 더 큰 폭력은 거의 없다. 그러나 상처 받지 않은 초연함의 시각은 그 상실을 그저 과거에 일어난 일로 인식하라고 충고한다. 과거의 상실이 현재에 영향을 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상처 받지 않음을 지지하는 사람이 볼 때 애도라는 문제에서는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통 불교의 관점에서는 열반에 이르지 못한 사람의 경우 죽음이 존재한다는 점을 부인하므로 죽음을 통한 환생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상실로서 간주하지 않는다. 환생은 대신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변환이다. 그러나 환생과 업의 교리가 없더라도 불교에서는 애도하지 말라고 충고할 것이다. 애도는 사랑하는 사람이 여전히 살아 있기를 갈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갈망으로 남게 되므로 불교 교리에서 사성제를 위반하는 것이 된다. 167
이 관점들이 공통적으로 애도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주는 것과 그 사람의 상실에 동요되지 않는 것을 조화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는 사람들은 우리 삶 속에 스며든다. ...
시간의 존재 - 단순히 현재만의 존재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존재 - 로서 우리는 과거의 우리와 앞으로 되고 싶은 우리를, 그저 개인적 삶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그만큼 중요하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 과거의 내가 어떠했는지는 상당 부분 내가 관심을 쏟는 사람들과 함께했던 것에 기인한다. 그래서 내가 관심을 주는 사람을 잃는 것은 나 자신의 일부,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잃는 것이다. 그러한 상실은 나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일부를 박탈당한 것이다. 169
이는 내가 슬픔으로부터 회복할 수 없다거나 다른 사람과 친밀함을 키워갈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여기에 대체 가능성은 없다. 169
죽은 사람은 특정한 사람 - 내 삶의 일부를 공유한 사람 - 으로서 내 삶에 생명을 불어넣었으므로 그의 상실은 만회될 수 없다. 170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 채 완전히 놓아주는 것이 가능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로 보인다. 그리고 더 깊이 보자면 대다수 사람들의 욕망도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도는 나를 위해서나, 존재했던 그 사람을 위해서나 상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행위로 보인다. 그것은 내게서 빠져나가버린 의미에 대한 우울함의 표시이고, 더 이상 나와 함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향한 경의의 표시다. 171
상처받지 않는 초연함의 시각이 애도의 역할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은, 그것을 삶의 접근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결론,
실패했다는 느낌을 시인하지 않는 것, 죽음에 대한 다른 태도를 평온과 마찬가지로 타당하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 잠재적인 정치적 결점과 결합되어 있는 그 초연한 태도는 그것이 가진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는 삶의 방식을 권하는 듯 하다.
우리가 버리고 싶어하지 않는 취약함을 허용하면서 초연함의 통찰력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떻게 취약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 균형감각을 지닌 채 살 수 있을까?
4. 세상은 위험하고, 우리는 위태롭다
부르주아 교수의 사례.
우리 삶에 대한 필연적인 비관론에 주목하게 한다.
비관론
초연함
, 이 둘은 넘어서 고통과의 관계에 대한 좀 더 균형 있고 매력적인 사고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방법은 받아들임 acceptance이라는 단어로 구체화될 수 있다. 175
'온건한 허무주의'
이 허무주의는 우리가 -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 도덕적으로 타협된 것이라고 알고 있는 삶의 양상을 긍정하도록 강요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대로 그에 맞는 사람이 되려면 대게 도적적으로 큰 결함이 있는 과거를 기반으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176
제이 윌리스, '긍정의 역학'
만일 내 반려자를 아낀다면 나는 그 사람을 만든 조건, 가령 부모, 배경, 특정한 개인사 등을 긍정해야 한다. 그 조건이 달랐다면 내 반려자는 여기에 존재하지도 않았거나 최소한 현재의 그 사람으로, 내가 아끼는 그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 조건을 긍정해야 한다. 177
무조건적인 긍정을 보여준다면, 결국 상황이 다른 식으로 일어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바랄 수는 없다.
내 대학의 교수직 자리, 내가 그 자리를 구한 것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다른 후보자들의 탈락이 일어난 방식에 대해 '유감을 가지지' 않을 것을 필요로 한다. 177
따라서 긍정의 역학은 유감을 가지는 것을 가급적 배제하면서 과거를 승인토록 한다. 178
온건한 허무주의
부르주아 교수, '부르주아의 궁지'
일련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타협으로 우리 중 일부가 다른 사람들을 희생해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처하게 되는 일련의 상황으로서, 우리가 관연하거나 상황을 만들지 않았는데도 일어나고 곤란을 야기한다. 179
학계 철학자가 되는 것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과제, 기본 과제인 점을 고려하면 삶에 의미를 주는 중요한 면이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조건에 기인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부인 전략,
철수 전략,
구제(현재의 조건에 맞서는 투쟁) 전략
윌리스는 이 모두 불충분하다고 본다.
윌리스가 자신의 입장을 '온건한 허무주의'라고 규정 지은 이유를 알 수 있다. 182
구제의 전략
나는 부르주아의 궁지에 대한 윌리스의 관점이 두 가지에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첫째, 구제의 전략에 대한 그의 비판을 잘못된 것 같다. 둘째, 더 깊게는, 한편으로 어린 엄마와 가상의 고갱의 상황과,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의 궁지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이 둘째 문제는 윌리스가 고려하지 않은 규범적 영역으로 이끌게 되는데, 긍정과 대립하는 받아들임의 영역이다. 그리고 그것은 삶에서 곤란한 몇몇 부분에 대해 우리가 온건한 허무주의와는 다른 태도를 갖게 할 수 있다.
첫째, 구제의 전략.
윌리스에 따르면 구제의 전략은 불평등과 박탈에 맞서 싸우기 위해 우리의 특권적 지위를 이용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반대하고 있는 그것(불평등과 박탈), 더 정확히는 반대 측(불평등과 박탈을 통해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것)과 공감하는(동일시하는) 것까지 둘 다를 요구한다.
첫번재와 관련하여 가령 내가 철학 교수로서 임금의 일부와 자유 시간을 써서 노조 설립에 돈을 기부하고 자원봉사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결국 나 자신의 노동 조건의 변화도 수반하리라는 점을 가정해 보자.
관리인들을 위한 무료 대학 강의를 열고 교수진들이 돌아가면서 가르치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나는 특권을 지닌 내 지위를 구제의 전략에 이용했다. 그것이 왜 문제가 되겠는가? 나는 바로 그 많은 특권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특권적 지위를 이용한 것이다. 윌리스가 도달한 허무주의적인 결론은 정당하지 않다. 185
두번째, 나는 대항해 싸우는 대상이나 적어도 반대 측 그 자체와 동일시하고 있는가? 억압을 다루거나 더 광범위하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라면, 그 문제가 해결되거나 그 사안이 처리되고 나면 과제가 없어져버린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것에 대한 대가일 뿐이다. 186
부르주아의 긍지와 관련한 더 깊은 차원의 어려움이 있다. 이것은 구제의 전략이나 어떤 다른 전략으로도 다룰 수 없다. 부르주아의 궁지는 현재의 불평등과 박탈을 기반으로 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부정의를 기반으로 해서도 일어나는데, 그 부정의는 바로잡을 수 없다. 189
가령 현재 살고 있는 나, 많은 사람들 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홀로코스트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홀로코스트를 전적으로 유감스러운 일로만 여길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홀로코스트를 긍정해야 한다.
그런 태도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홗실히 어떤 형태의 허무주의를 구성할 것이다. 190
"그것은 체념이나 다른 극적인 형태의 태도 조정보다는 의미에 대한 불안으로서 현대 세계에서 허무주의의 실질적 특징이다. ... 이 해석에서 의미에 대한 불안은, 무조건적인 긍정의 가치가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깊은 열망이 결국에는 실현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윌리스.
우리는 현재 우리의 상태에 이르게 해준 더 심각한 조건들을 이러저러한 정도로 벌충해주는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결국 끔찍한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라는 점을 부인하면서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유감을 갖지 않는 의미에서 그 상황을 긍정해야 한다. 홀로코스트가 없었다면 나는 여기에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191
이 허무주의는 인간 역사의 더 나은 측면을 긍정하는 것과 양립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나의 존재가 인간 역사 전체에 의존한다면, 그 것은 셰익스피어, 간디, 여성참정권 운동, 르네상스, 야구의 존재에도 의존하는 것일 수 있다. 191
나는 윌리스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내가 보기에 그 관점은 앞 장에서 본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의 다른 면일 뿐이다.
초연한 태도가 우리에게 적어도 감정적으로 과거에 영향을 받지 말라고 한다면, 윌리스는 우리가 과거 앞에서 비침한 상태에 처하도록 요구한다. 초연한 태도를 지지하는 사람도, 윌리스도 과거에 맞서는 것, 감정적으로 많이 괴롭더라도 과거에 대해 미묘한 감정이 있는 태도를 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열려 있는 세 번째 길이 있다. 이 길은 우리의 삶을 문제가 많으면서도 희망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는 것으로, 취약하면서도 부서지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192
1) 내가 홀로코스트 발생의 원인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홀로코스트를 어떤 의미에서 긍정해야 하는가? 나는 나의 삶에 여전히 애착을 느끼면서도, 홀로코스트가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내가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살기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방식으로 죽어야 했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긍정하기 어렵다. 193
나는 홀로코스트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죽었어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입장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집착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195
2) 우리는 삶의 장부의 이면에 있는 (어떤) 것을 명심해야 한다. 생생함이 도덕적 동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생명이 위태로운 사람들 직접 목격했다면, 도움을 주기 위해 희생할 각오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직면하지 않았을 때는 좀처럼 유사한 희생을 할 마음이 들지 않을 채로 내 도움을 비슷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음을 그저 알고만 있을 뿐이다."
저자가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희생자의 신발이 전시된 곳에서, 나는 나치의 손에 끔찍한 운명을 겪은 사람들의 인간성과 취약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이 생생하게 느껴진 그 순간 나는 내 존재와 그들의 삶을 교환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98
그 생각은 냉철히 숙고한 끝에 이루어진 결정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순간에 이루어진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영향을 준 감정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내가 겪은 감정은 더 큰 규모의 도덕적 상황을 모호하게 만드는 순간적인 감정이라기 보다는 그 상황과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는 감정이었다. 내 안에서 비합리적인 감정이 생겨났기보다는 홀로코스트가 실제로 어떤 것이었는지 실질적으로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198
우리는 우리에 앞서 일어난 비참한 역사를 긍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 삶이 기초하고 있는 끔찍한 행위에 대한 타당한 태도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런 행위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받아들임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긍정이라기보다는 받아들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 받아들임 속에서 나는 내 존재와 현재 삶에서의 운 좋은 지위가 수많은 참상을 겪은 역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그러나 내가 그 참상을 개선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을 긍정하거나,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199ㄹ
나는 그 참상을 막을 수 없으므로 그것에 기초한 삶을 긍정하지는 않더라도, 삶을 받아들인다.
이 받아들임은 긍정의 역학과 달리 존재의 바탕이 된 과거에 대한 유감을 허용한다.
그래서 인간의 노력이 빚어낸 가장 최고의 것조차 비극을 기반으로 한다는 인식을 지닌 채 우리는 나아간다.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어떻게 했을 지 왜 자문하는 것일까? 200
일반적인 대답은 이미 지나간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었을 행동에 대해 자문함으로써 미래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 입장이었다면, 나는 .... 했을 덴테" 우리는 이런 가정적인 문제를 숙고함으로써 미래의 상황에 대한 생각으로 그리고 우리의 희망, 우리의 행동으로 나아가게 한다. 201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자기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지를 묻는 것이다. '온건한 허무주의가'의 형태가 아닌, 상처 받지 않음의 대안으로서 우리의 태도를 찾아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 태도는 복잡하게 뒤얽힌 고찰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었다. 201
'받아들임'은 과거에 대한 윌리스의 '온건한 허무주의'나 과거에 대한 어떤 우려도 거부하는 '상처받지 않음'의 시각보다는 과거에 대해 더 미묘한 태도를 필요로 한다. 206
'받아들임'은 허무주의자의 것도,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을 지지하는 사람의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 자신의 삶이 기반하고 있는 비참한 역사를 인식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과거에 대해 취약함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받아들임'의 자세는 우리가 그 비참한 역사를 긍정할 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존재는 난처한 - 긍정도 도피도 아닌 - 것으로 본다. 우리는 위태로운 존재이지만, 반드시 파멸할 운명인 것도 아니다.
'받아들임'의 개념으로 살펴보아야 할 문제는 상처받지 않는 초연함의 것도 허무주의의 것도 아닌, 삶을 단순히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더 큰 특성에서 바라보는 방법이다.
우리 자신의 취약함에서 달아나려 하지 않고 그것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앞에서 비참해지지 않은 채로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살 수 있을까? 207
5. 상처와 고통의 의미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상처받으며 사는 것은 상처 받지 ㅇ낳으며 사는 것의 거울 이미지가 아니다. 상처 받으며 사는 것은 특정한 종류의 과업이나 과제가 아니다. 211
상처 받지 않으며 사는 것은 과제이며, 사실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 받지 않음'은 기본과제다. 왜 그럴까? 사람은 자연적으로 상처받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고통을 넘어설 방법을 생각해내야 한다.
초연한 태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권하는 실천은 고통의 극복에 전념하는 것이다. 명상은 불교도의 실천이다.
다른 한편으로 상처받지 않는 태도의 실천들에는 무엇보다도 현재 순간에 집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불교의 욕망 개념, 스토아주의의 정념 개념, 도교의 언어의 이원성에 대한 관심, 에피쿠로스주의의 필연적이지 않은 욕망, 이 모두는 이미 일어난 일이나 일어날 수도 있었을 일로부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로 시선을 돌리면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212
중심과제로서의 초연함은 취약함과 대조를 이룬다. 취약함은 과제가 아니다. 우리는 상처 받기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상처에 취약하다. 상처에 취약함은 우리의 자여넉 상태다.
그러므로 취약함은 초연함 대신 선택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214
이 차이는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지니다. 상처에 취약한 삶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초연한 태도나 전체로서의 초연함보다도 더 범주화하기 어렵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행복한 가정은 모두 서로 닮아 있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상처받지 않음의 교리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상처 받음의 교리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상처 받음에 중심 주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반적이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처 받기 쉬움은 고통에 취약한 상태로 사는 것을 권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어쨌든 자연적인 건과 관련되므로 취약한 상태를 성취할 과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른 대안적 과제의 전념보다는 과제 - 상처받지 않음의 과제 - 의 거부가 상처에 취약한 삶의 태도를 특징짓는다. 216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상처 받기 쉬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고통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굳이 애쓰지 않는 선택권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런 초연함의 과제가 가진 문제를 고려할 때 삶을 생각하는 분명한 방법을 열어놓는다. 그러나 그 분명한 방법에 대해 말하는 것은 "상처에 취약함은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뻔한 결과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상처 받는 삶이라고 부르는 것의 특징을 밝히려 노력하면서 적어도 두 가지 성찰의 길을 열었다. 첫째, 상처 받는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몇 가지 일반적인 특성은 그런 다양한 삶 전체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상처에 취약함의 특정한 과제가 아니더라도 상처에 취약함이라는 주제가 있으며, 그런 주제를 지닌 일부 삶을 대략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둘째, 초연함과 구별되는 취약함의 예를 들 수 있다. 사실 상처 받지 않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이미 그런 예를 제시했다. 정치적 문제, 죽음, 실패, 애도에 관한 문제는 상처 받는 삶이 상처 받지 않는 삶과 구별되는 점을 보여주는 예다. 217
두 가지를 염두해 두자. 첫째 누구도 초연한 태도로 살아서는 안 된다거나 그 초연한 태도를 과제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할 필요는 없다.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한 태도의 난점은, 많은 사람들이 그 초연한 방식을 따르고 싶어하지 않을 이유를 제공한다. ... 사실 상처에 취약함이 삶의 다양한 방식으로 특징지어진다면, 초연한 태도를 삶의 방식으로 추가하는 것은 그 다양성을 늘려줄 것이다. 218
둘째, 초연함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것의 모든 측면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상처 받지 않는 태도의 몇몇 측면은 취약함의 관점에도 도입될 수 있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많은 것들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 초연함의 시각에서 몇몇 교훈을 얻는다면 그런 문제를 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18
영적 훈련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작은 문제라 부른 것, 즉 중대사가 아니거나 적어도 우리가 인식하기에 중대사가 아닌 문제에 관련된다. 모든 문제가 작은 문제는 아니다. 큰 문제도 있으며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한 태도를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문제가 발생했는 데 평온함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유지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상처에 취약함과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을 구분하는 것이 바로 거기에 있다. 상처받음을 지지하는 사람이 평정심이라는 과제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툭정한 큰 문제에서 그는 평정심을 구하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순간이 아니라 장래에 그가 원하는 것은 '받아들임'의 태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34
고통과 상처 그리고 삶의 의미
우리는 과제라고 부르는 것에 관심을 쏟는다. 과제 중에서도 우리 삶에서 중심적이고 핵심적인 과제에는 크게 신경을 쓴다. 사랑하는 사람의 번영, 전념한 활동의 성공, 삶을 표현하기 위해 추구하는 가치를 갈망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란 그런 것이다.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행동만이 아니라 느끼는 것, 관심의 대상에게 바라는 것에도 존재한다.
게다가 그런 관심과 돌봄은 우리 삶에 의미를 준다. 이런 식으로 관심을 쏟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을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삶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우리가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느끼지 않고, 대신 삶을 외투처럼 느슨하게 걸친 채 게으름피우며 나날을 보낼 것이다. 욕망, 열정, 집착은 삶을 그저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라고 느끼게 한다. 236
간단히 말해서 대부분의 사람에게 돌봄이란, 집착을 포함하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고통으로 상처 받기 쉽다. 236
1) 돌봄과 고통의 연관 관계
2) 돌봄과 의미의 연관 관계를 밝여햐 한다.
어던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돌볼 대 그 관심의 대상이 잘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잘 되지 않을 때 우리는 고통 받는다. 돌봄은 고통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돌봄이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거부할 것 같다. 초연함이 연민을 허용하며 권하기 까지 한다. 타인의 삶을 향상 시키기 위해 자신의 이기적인 집착과 욕망을 버리는 사람이 있는데 대승 불교의 보살 역할이 그러하다. 이것이 관심의 형태라면, 고통 받지 않으면서 관심을 갖는 것, 세상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참여하는 돌봄이 가능하지 않을까? 238
세상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보는 것은 혼란을 수반하며, 이를 연민과 감정 사이의 혼란이라고 부를 수 있다. 상처받지 않는 초연함의 시각은 대개 연민을 권하지만 결코 감정을 권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해야 하지만, 그 행동의 성공과 실패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과제가 성공하는지 실패하는지ㅣ는 중요하지 않으며, 주위 사람들의 삶이 잘될지 안 될지 또는 정당한 사회 질서가 존재할 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의 행동과 감정 사이에는 거리가 있어야 하며, 돌봄에 대해 말하면서 도달하려는 자로 그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하고 잇는 것, 그 대상이나 결과에 집착하게 될 때는 더 이상 초연함의 신념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돌봄'이라고 부느는 것은 사람들이 통제할 수 없는 것, 따라서 고통에 상처 받기 쉽게 하는 것으로서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238
연민을 갖고 생동하되 그 연민이 효과적인지 여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감정적으로 영향 받지 않는 세상에서 행동하는 것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여성의 궈너리를 위한 운동이나 친구의 자살에 맞선 싸움에 참여한 것은 어때야 할까? 그 운동이나 투쟁이 실패해도 평온한 상태로 외면해버려야 하는것일까? (3장 클라우스 폰 슈타우페베르크 논의)
그런 태도는 심리적으로 이상하게 느껴진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태도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실패로부터 슬픔이나 후회 없이 벗어날 수 있다면, 정말로 여성들의 곤경이나 죽은 친구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인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239
관시미을 가지고 돌보는 것은, 관심을 받은 사람이 과제나 대상에 대해 잘 해냈는지를 중요하게 보므로 관심을 쏟은 사람이 고통에 취약하게 만든다.
2) 관심과 돌봄은 어떻게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가? 무엇이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철학자 수전 울프, "주관적 끌림이 객관적 매력을 만나면 의미가 생긴다" 240
울프에 따르면 , 삶이 의미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관여하고 있다고 느껴야 하며, 그것이 이른바 '주관적 끌림'이다.
주관적 끌림으로 충분하지 않다. 주관적 끌림의 근원이 무엇이든 간에 끌림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 즉 "객관적 매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울프가 도달하려고 하는 것은 행복과 도덕성 사이의 전통적인 구별로 한원되지 않는 삶을 보거나 평가하는 방식이다. 그는 이것을 포착하기 위해 의미의 개념에 호소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의미 있는 삶이 주관적 끌림을 포함한다면, 주관적 끌림이 관심과 돌봄의 문제라면, 관심과 돌봄이 중요함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중요함이 우리를 고통에 드러나게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에게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측면은 그들을 고통에 드러나게도 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243
상처 받지 않는 삶에는 이미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특히 그런 삶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 요소인 '주관적 끌림'이다.
여기서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을 지지하는 사람은 주저하면서 물을 수 있다. 왜 주관적 끌림이 관심과 돌봄의 문제라고 가정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이 과제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고통 받을 정도로 취약하지 않으면서 과제에 "사로잡혀 있거나 열광하고 흥미를 보이며 관여하고 있을 수는' 없을까?특히 불교의 타인에 대한 연민(정의의 과제 관련하여). 주관적 끌림을 관심과 돌봄 그리고 고통을 포함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243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주관적 끌림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원할 까? 과제의 결과, 그리고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의 번영이나 그 과제 자체의 존립으로부터 감정적으로 분리된 부류의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할까? 소중한 이의 죽음에도 애도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 되길 원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슬픔(혹은 후회)은 단순히 인식하거나 표명하는 거서이 아니라 겪어내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특정한 역경에서 고통 받을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이 되를 원한하는 것이다. 큰 문제의 경우,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누군인가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는가의 표현이기도 하다. ... 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거 유감이네"라고 말하고 마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245
관심과 돌봄 그리고 끌림
특정한 상황에서 고통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는 것은 문화적 유산이거나 적어도 극복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측면이라고 지적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언급에 이의를 제기할 것 같다. 우리는 우리 존재에서 그런 측면이 없는 삶에 끌리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고통 받을 수 있는 능력은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의미 있는 것은, 우리가 과제에 참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제와 과제를 공유하는 사람들(또는 동물들)이 어떻게 잘 되어 가는지, 좋은 성과를 내는지가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관심과 돌봄을 가지지 않은 채 주관적 끌림만 있는 경우에도, 그 선택지는 과제를 통해 삶에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246
앞에서는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적 끌림을 가질 수 있다는,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을 지지하는 사람의 생각이 옳다고 가정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종류의 주관적 끌림을 원하지 않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가정 자체도 문제 삼을 수 있다. 관심 없이 주관저거 끌림이 가능한지는 명확하지 않다.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을 지지하느 사람은 그 자신과 세상 사이에 있는 감정적 거리를 감추고 있는데, 이는 그가 연민을 갖고 행동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일정한 평온함과 함께, 그 행동의 결과가 그에게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도록 세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채 수행되어야 한다. 그는 그 행동이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오거나 그가 위하는 사람들이 잘되기를 '선호'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선호가 어느 정도까지 이를 수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감정이입할 수 없는데, 이는 욕망이나 열정 같은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250
... 그런 방식으로만 상처받지 않은 초연함의 여러 사상에서 특징적인 연민과 그 시각의 중심에 있는 평온을 모두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거서이 옳다면,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을 지지하는 자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사로잡혀 있거나 열광하고 흥미를 보이며 관여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250
여기에서 설명하는 것은 거의 비인간적인 삶의 방식으로 보일 수 있으며, 과연 정말로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심할 수 있다. 나는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한 태도에 따라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250
왜 누군가는 그 초연함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그리고 분명히 그런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51
사람들이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의 다양한 시각을 수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적어도 공인된 교리에서 제시하는 형태와는 다른 시각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대신에 그들은 사어 받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라 덜 상처 받으며 사는 것이라는, 이 시각의 가치있는 교훈을 활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불교도, 스토아주의자, 도교도, 에피쿠로스주의자 그리고 톨레를 추종하는 이들은 아마도 욕망이나 감정에 전혀 동요하지 않는 태도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며, 대신 욕망이나 감정에 덜 좌우되고, 그들의 욕구가 종속시키는 감정적 롤로코스터에 덜 얽매이길 바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과 같은 태도는 작은 문제와 관련해 환영받는 접근법이 될 것이다. 251
그런데 큰 문제는 어떨까? 완전히 사어 받지 않는 초연함이 거의 불가능하고 더 중요하게는 대부분의 사람이 원하지도 않는 접근법이라면, 쇠약하게 만드는 신체적 부상, 사랑하는 이들에게 일어난 비극적 사건, 도덕적 갈등, 유감스러운 행동 그리고 자신의 예상된 죽음에 직면해서 대처하고 싶어하는 법과 관련해 획득할 만한 것이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는 상처받지 않는 초연함의 길을 택하도록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이 사건들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는 초연함의 가르침과 유사한 태도가 있을까? 252
무조건적 긍정도, 초연한 평온도 아닌
'받아들임'은 우리가 바꿀 수도 없고 긍정할 필요도 없는, 우리를 낳은 과거의 비극적 특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252
받아들임의 예에는 세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우리의 통제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 있다는 인식이다.
둘째,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으며, 특히 유감스러운 방식으로 중요할 수 있다.
셋째,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평온함이나 긍정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 대한 슬픔을 갖고 행동하거나 반응한다. 그것은 우리가 다루거나 규제할 능력을 넘어서는 역사와 사건의 그물에 갇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 우리가 불가분 관련되어 있지만 어느 정도 규제할 수 없는 그물에 갇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이다. (나는 슬픔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체념보다는 덜 정망한 것, 무용함보다 덜 절망적인 것, 후회나 회한보다는 덜 과거 회고적인 것, 비통보다는 덜 치열한 것을 가리키려 했다.)
우리는 세상의 산물이자 행위자로서 세상의 유산에 포함되어 있지만 그 유산은 우리의 의지아 행동의 의도를 넘어선다.
우리가 비극적인 역사의 산물이 되는 경우에는 이 슬픔이 명백해진다. 나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홀로코스트가 필연적이 되는 데는 슬픔 이외의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작은 문제의 경우에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적절할까? 물론 야만적인 과거의 영향보다 작은 문제의 예측 불가능한 영향의 경우, 슬픔이 덜하긴 하지만 여전히 약간의 슬픔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세상에 대해 좋은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고, 위가 거쳐간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되기를 원한다. 결국 세상이 나의 존재에 더 이로울지 여부는 내가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과 상관 없이 예견할 수 없다는 생각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255
나쁜 일도, 좋은 일도 받아들이다
상처받지 않는 초연함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임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우리의 반응이나 잠재적인 반응이 직접적으로 장악하는 것을 늦춘다. 그러나 받아들임을 장악을 늦춰줄뿐이지 없애지는 않는다. 여전히 아픔, 우울에서 오는 고통, 도덕성을 버려야 하는 선택, 운동선수의 경력을 가로막는 부상, 다른 삶이 더 나았을 거라는 인식 또는 죽음의 불가피함이 존재한다.
받아들임은 평온을 제공하지 않는다. 받아들임은 감정이나 욕망을 제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받아들임은 우리로부터 과제에 대한 정서적 몰입을 분리해내지 않으며, 그 거리가 아무리 작아도 우리와 우리에게 일어난 일 사이의 거리를 감추지 않는다. 세상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 오히려 받아들임은 현 상태에 대해 세계와의 관계, 그리고 동시에 세계의 우연성 때문에 우리가 그 관계에서 추구하는 것을 대개 이루지 못한다는 점도 인식하게 한다. 259
상처 받지 않으면서 연민을 보이는 경우와 대조적으로, 받아들임은 여전히 관심을 가지는 존재로 남아 있기로 선택할 때 갖게 되는 선택지다. 그리고 받아들임과 연관되어 완화된 슬픔은 고통과 함께, 우리가 중시하는 그 관심과 돌봄을 위해 치르는 대가다.
그 대가는 삶에 의미를 주는 주관적 끌림의 또 다른 측면이며, 돌봄은 함께 포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고통에 노출되거나, 평온하게 연민을 가지고 고통을 받지않거나, 둘 중 한다. 그리고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존재 - 우리와 관련이 있는 사람과 과제와 관련해 사태의 추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 - 가 되길 원하는 한 그 돌봄에 수반되는 고통에 노출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받아들임을 통해 일부 고통의 영향력을 완화할 수 있지만 그 이상 할 수는 없다. 260
우리는 세상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버릴 수 있다
받아들임이 고통의 장악을 완화하도록 도와주지만 세상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저지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임을 넘어선 경험,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실패나 상실 또는 애도가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까? 262
받아들임에는 한계가 있다. 받아들임은 완전한 평온으로 이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고통을 전혀 완화하지 못한다. 받아들임은 세계가 때때로 깨뜨릴 수 있는 세계와의 휴전일 뿐이다. 266
받아들임은 어떤 형태의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과 양립할 수 없다. 상처받지 않는 초연함의 시각에서는 어떤 위안도 얻을 수 없는 상황, 비극적인 상황이라 부를 만하나 것이 있을 수 없다. 세계와는 긍극적으로 감정적 거리를 두고 있으므로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없으며, 고통에 사로잡히는 것은 불운이라기 보다는 실패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비극은 인간의 가능성으로 인식되지 않으며 끈기 있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266
반대로 '받아들임'은 고통 받지 않게 해주는 것이 아니므로 고통을 견디기 어렵게 하며, 때로는 대처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세상을 바다들이는 것, 세상과 거리 두기를 거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웅리가 아무리 애써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상에 감동 받을 수도 있지만 세상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버릴 수도 있다. 상처 받기 취약한 상태에서 슬픔에 빠질 수 있는 사람은 극한에 이르면 슬픔에 뒤덮여버릴 수도 있다. 267
세상의 우연성과 조용한 슬픔
신조,
작은 문제와 큰 문제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고, 작은 문제로 고통 받는 것을 중당하려 노력하고, 일부 큰 문제의 우연성과 통제 불가능성을 가능한 한 받아들인다.
작은 문제와 관련해 현재에 집중하기와 명상 등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의 실천을 수반할 수 있다. 263
그들이 추구하는 불교나 스토아주의가 상처받지 않는 초연함으로 이어질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여기에서 설명된 '받아들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실제로는 목표가 아닌 것을 목표라고 잘못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그 목표와 내가 여기에서 제시한 대안에 댜애 깊이 생각할 기회가 있다면 그 대안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실천은 그런 선택을 고려하도록 체계화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들은 실재로 원하는 것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264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서 특히 이 마지막 장에서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받아들임'을 수용하고 상처받지 않는 태도를 거부하길 바라는 것이 나 혼자만이 아니길 바란다. 당연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아는 것은 대개, 확실히 항상은 아니지만, 모를 때보다는 원하는 것을 획득하는 데 더 나은 방법이 되므로 우리는 고통 받는 방식,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의 한계, '받아들임'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269
철학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누군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또는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이해하도록 돕는 데 있다. 269
현재 우리는 우리가 갈망하는 것의 맥락으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것을 묻는다.
우리와 고통의 관계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그 갈망은 앞서 논의한 상처 받지 않는 초연함의 시각을 배경의 일부로 가지고 있었다. 철학이 우리가 고통에 대해 생각하는 법에 영향을 준다면, 철학이 제공하는 진실에 대해 묻고 부족한 부분을 확인하면서 그 시각과 비판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각이 불충분한 부분에서 철학은, 단순히 우상을 파괴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너무 불충분한지 않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270
여기에서 제안한 대안인 '받아들임'은 우리가 고통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주지는 못한다. '받아들임'은 우리가 취약함을 넘어서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를 상실감에 빠진 채로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상황의 우연성과 그에 수반되는 조용한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은, 세상 앞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운이 좋다면 우리 삶의 중요한 측면을 규정해주는 큰 문제를 따라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관점을 수용하는 것이다. 항상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운 때문에 무력화된 일부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저 인간성을 초월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불안을 받아들이는 데 있으며, 이 받아들임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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