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백_일홍 2023. 7. 30. 14:49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주디스 버틀러

 

주디스 버틀러,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1장 세계에 대한 감각, 셸러와 메를로퐁티

2장. 펜데믹 시대의 권력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대에 상호의존성, 상호 엮임, 그리고 침투성의 신체적 관계들에 대해 어떻게 다시 사유해볼 수 있을까? 그리고 신체의 상호의존성이란 맥락에서 사회적 불평등과 불평등의 의미를 수정할 방법은 있는 것일까? 신체의 상호의존성을 고려하여 평등을 다시 사유하는 것은 어떤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환경 파괴와 제도적 인종차별을 고려할 때, 우리는 사회성과 살 만한 삶에 대한 가능성이라는 감각들이 주요한 정치 개념들을 수정하는 방법에 대해 조명할 수 있을지를 묻게 된다. 81

펜데믹 시대 삶과 노동의 경향들

영국 정부를 비롯한 몇몇 정부는 펜데믹은 끝났다고 선언하거나 모든 예방조치들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들은 스스로 알아서 격리하거나 혹은 자신들의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소위 폐기 가능한 인구를 확립하는 결과를 낳았다. 84

실로 많은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했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를 죽게 하다라도 나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 84

'건실한 경제'가 '인구보건'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이들은 이윤과 부가 결국 인간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는 믿음을 지지하는 이들이다. 어떤 이들은 죽어야만 한다고 여기고 그러한 위험성을 계산하고 있는 이들은 암묵적으로든 노골적으로든 경제를 위해서 결국 인간의 생명이 희생될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87

펜데믹 상황하에서 노동자는 살기 위해 일하러 가지만 바로 그 일이 그 노동자의 죽음을 재촉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폐기 가능성과 대체 가능성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경제의 건실함은 노동자의 건강 보다 더 중요하다. 이로써 자본주의의 오래된 모순은 펜데믹의 상황하에서 새로운 형태로 거듭나고 있다. 88

혹은 수감되어 있는 이들이나 국경에 억류되어 있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은 이동할 권한이 없으며 심지어 다른 이들로부터 떨어질 권한도 갖고 있지 않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일종의 특권이다. 88

조지 플로이드 살해, 흑인의 생명도 귀중하다 운동.
생명을 앗아가는 경찰 폭력이 죽음이 일어나도록 방치하는 의료보험 체계와 함께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폭력을 연결하는 것은 다름 아닌 구조적 인종차별이다. 90

돈이 있는 다른 이들이 집에 머무르며 상점들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도록 흑인과 갈색 피부 인종의 인민들이 서비스업에 종사해야만 한다는 요구는, 근무조건이 위험하더라도 임금을 벌기 위해서는 일해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시스템으로부터 나온다. 이는 노동자가 경제적 결핍과 심각한 질병 중 한쪽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국가기본소득으로 논박되어야 할 것이다. 91

좀 더 심오한 또다른 문제는 주류 공공 담론에서 경제가 매우 빠르게 세계를 대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건실한 경제'는 '인민의 보건' 보다 더 가치있고 긴급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보건을 경제 덕택으로 돌리는 것은 경제를 일종의 인간 신체로서, 어떤 유기체로서, 심지어 인간 생명의 상실을 수반할지라도 그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그 생명과 성장을 유지시켜야 하는 것으로서 여긴다. 92

신체의 건강과 생명을 숫자로, 비유로, 그리고 도표상의 곡선으로 대체한다는 것. 그러나 도표상의 곡선은 살아 있는 신체에 대한 단순한 표상이 아니라, 적어도 이 맥락에서는, 신체를 삭제하는 수단이 된다. ... 만일 곡선이 평평해진다면 그저 그 정도 숫자의 사람들만 사망했기 때문에 환호애야만 하는 것이다. 93

과연 세계를 경제로부터 되찾아오는 것이 가능할까? 사장의 재개를 세계의 구성으로부터 탈구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희망찬 세게의 재구성을 위한 첫걸음일 것이다. 95


생활 세계의 미래들

어디서든 우리는 서로의 손 안에 존재하고 있다. 96

우리의 윤리적 책무는 모호함에 사로잡혀 있다. 여기서 확실해 보이는 것은 바로 우리가 더이상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행동할 수 없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신체로 체연된 자아는 이미 사회적으로 자리매김되어서 주위 환경 및 타자들 안에서 그 자신을 벗어나 영향받고 영향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97

나는 왜 이런 방식으로 셸리와 메를로퐁티를 엮어내고 있는가? 셸리가 비극적인 것을 규정하는 가치 파괴가 진정 지금 우리에게 무언가를 일러주는가?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도록 요청된 세계의 좌표들을 이해하고자 하기에, 비극적인 사건에 의해 심판받고 발가벗겨진 세계라는 개념은 현재 제기해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이 세계는 거주 가능한 곳인가? 만일 그러하다면 과연 누구에게 거주 가능한 곳인가? 그리고 어떤 기준에서 그러한가? 생명의 가치, 지구의 가치 등 가치의 파괴가 세계를 슬픔 속에 잠기게 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접촉을 상실하거나 서로와 가까이서 나누었던 숨결을 거의 기억조차 하지 못하게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누구인가, 아니 거주가 실제로 여전히 가능하다면, 우리가 그렇게 거주하는 세계란 대체 어떤 세계란 말인가? 아마도 주체 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방향 상실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종류의 세계-구축을 할 수 있고, 공기와 흙, 건축물들로 둘러싸인 공간, 좁은 통로들로 이루어진 세계 안에서 또다른 방식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희망의 표식들 혹은 약속을 벼려낼 수 있을지 모른다. 살기 위해 그토록 만은 인간적, 그리고 비인간적 차원들을 요하는 숨을 쉬는 동물이자 접촉하는 동물로서 말이다. 102

메를로 퐁티는 인간 신체는 다른 객체들, 사물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공간에 산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고려하지 않았던 점은 객체들과 사물들이 또한 자연사들을 배태하고 있다는 것으로 아도르노의 문장을 사용하자면, 노동과 소비의 역사, 그리고 시장가치의 매개를 배태하고 있다는 점이다. .... 만일 거주 가능한 세계라는 개념이 환경 독소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에 미치는 영향을 포함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계의 지평의 일부로서의 기후라는 개념을 잃어버리게 된다. 102 

나아가 그러한 참조들 없이 우리는 잘 살아가는 방법, 지구에서 가장 잘 거주하는 방법 혹은 거주 가능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103

그러나 펜데믹하에서 우리는 거리두기와 고립에 의해, 일자리가 없거나 제한적인 일만 할 수 있는 상황에 의해, 그리고 빛과 죽음의 공포에 의해 점철된 이 세계에 살기 원하는지 스스로 묻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가 과연 거주 가능한 세계인지를 묻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다, 우리는 바이러스 감염이 최악으로 급증하던 상황에도 함께하고 공동체를 유지할 방법들을, 그리고 예술을 세계 속으로 내놓는 방법들을, 가상의 수단을 통해 본능적인 연결을 활성화시키는 방법들을, 그리고 본능적인 수단을 통해 가상의 연결을 활성화시키는 방법들을 발견했다. 106

그러나 펜데믹이 진행되는 모든 국면마다 근본적 불평등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누구의 생명이 생명으로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누구의 생명은 그렇지 아니한가? 추상적인 철학적 질문들로 보이는 의문이 사회적 역학적 긴급 상황의, 아니 위기 상황의 중심으로부터 나타나게 되었다. 세계가 거주 가능하기 위해서 세계는 살고자 하는 욕망뿐만 아니라 삶의 조건들을 지탱해야 한다. 

사람의 생명을, 혹은 우리 친구나 가족의 생명을, 혹은 우리가 지구에 함께 거주하고 있는 그 모든 인구들을 그렇세 쉽게 폐기해버리는 세계에 과연 누구 살고 싶어할까? 거주 가능한 세계에 살고 싶어한다는 것은 너무도 쉽게 생명을, 생명체들을, 그리고 서식 및 생활 환경을 폐기해버리는 권력들에 맞서는 투쟁을 시작한다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혼자서는 그 모든 만행들에 저항할 수 없고 오직 협력을 통해서만, 새로운 삶의 환경들을 준비하고 재구성된 욕망의 시공간을 준비하는 지지의 네트워크를 확장함으로써만, 새로운 형태의 공동의 삶과 집단적 가치와 욕망을 실행함으로써만, 저항할 수 있다. 107

또한 삶이 살 만하기 위해서는 그 삶은 체현된 것이어야만 한다. 이 말인즉, 그 삶은 어떤 공간을 거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제반 지원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아울러 그 삶은 살 수 있는 공간, 거처 혹은 주거지가 필요하다. 따라서 주택 공급과 접근 가능한 인프라는 살 만한 삶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간들은 집과 가정에만 제한 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삶의 공간에는 일터, 상점, 거리, 들판, 마을, 대도시, 운송 수단, 보호되는 공유지, 광장이 포함된다. 107

WHO 사무총장, 
'세계'를 척도로 삼는 윤리적 규범을 제시, "우리 중 그 누구도 어떤 이들은 보호받고 다른 이들은 보호받지 못하는 세계를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는 국경과 이윤을 지표화하여 어떤 생명이 다른 생명들보다 더 보호하고 지킬 가치가 있는지를 계산하는 민족주의와 시장 효율성의 종식을 요구했다. 108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 세계들이란, 삶을 지속하고 살고자 하는 열망이 모든 생물들에게 차별없이 동등하게 존중되고 그러한 삶의 조건들을 확보해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109

그러나 상호의존성은 또한 출구이기도 하다. 그것은 전지구적 보건을, 평등한 접근권을, 무료 백신을, 그리고 제약회사들의 이윤 집착을 끝장내는 것을 의미한다 . 상호의존성은 또한 우리의 육체적 환희를 위한, 살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원을 위한, 그리고 급진적 평등과 공동의 살 만한 세계를 구축하고 지탱하는데 헌신하는 연대를 위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111

또한 우리는 펜데민 상황을 이용해 권위주의적 형태의 국가권력을 강화하고, 국경 및 감시 기술 사용을 강화하며, 외국인 혐오를 도모하고, 이성애규범적인 가정 영역을 강화하는 초민족주의적인 반응을 목도하고 있기도 하다. 111

펜데믹은 우리가 서로에게 그리고 지구에 대해 가지는 책무가 무엇인지에 대한 전지구적 감각을 고양하는 동시에 또한 인종적, 경제적 불평등을 부각했고 또 심화했다. 기후 파괴와 펜데믹이라는 혹독한 현실의 결과로 인해 이제 인류의 유한성과 상호의존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기반해 전지구적 차원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있다. 112

세계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감각은 우리 모두의 면혁학적 위기에 의해 강화되었고, 확고하게 경계지어진 독립된 신체들 속에 위치한 고립된 개인이라는 우리 자신에 대한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하나의 신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우리 삶이란 소유관계를 넘어서 그리고 그에 반대해서만 존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는 다른 살아 있는 생명체들, 표면들, 그리고 어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인 공기를 포함하는 여러 요소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이제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113


3장 윤리와 정치로서의 상호 엮임

현상학
'괄호치기'의 실천에 대한 후설 자신의 사상은 샤르트르와 메를로퐁티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세계를 현상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가정들을 일부러 유예하는 방법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했다. 구성된 세계의 구조가 갑지기 의문시되거나 드러나는 역사상의 경험들이 존재한다. 118

왜 현상학인가? 어떤 현상학인가? 

사르트르는 간단하지만 흥미로운 방식으로 살(flesh)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신체에 대한 그의 설명 대부분은 신체를 다른 객체들 중의 한 객체로서 정의하는 경향을 보인다. 신체와 의식 간 구별에 의존했기에 그는 이후 데카르트의 후예로 불렸고, 이는 칭찬의 말이 아니었다. 극히 시몬 드 보부아르를 따랐던 페미니스트들은 더둑더 그렇게 여겼다. 보부아르에게 신체는 객체가 아니라 일종의 상황이다. 그리하여 그는 <<제2의 성>>에서 신체 개념을 소개할 때 사르트르를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메를로 퐁티를 인용한다. 실로 페미니즘 철학에서 체현의 문제는 비판현상학이라는 비교적 새로운 분야에서 폭넓은 연구 분야로 떠올랐다. 121

아이리스 매리언 영, "여자애 처럼 던지는 것" 
신체와 세계를 형성하는 데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행동들이 가진 역할을 페미니즘적 목적을 위해 강조하고 있다. 영의 동시대 많은 다른 페미니스트에게 현상학은 지배와 규율의 구조들에 대해 고민하고 변하시키는 데 있어서 우리 삶의 경험의 구조를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해주었다. 그러한 연구들을 이끄는 목표는 우리 삶의 경험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특정한 사회적, 역사적 구조들로부터 괴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들이 실제로 어떻게 경험되고 아울러 삶의 와중에 어떻게 신체의 수준에서 재생산되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121

사라 아메드, 게일 샐러먼, 리사 건서 등 페미니스트 현상학자들, 그리고 비판현상학자들은 현상학으로부터 상호주관성 속에 체현된 삶을 이해하는 보다 정확한 방법을 끌어내고자 해왔다. 이러한 상호주관성은 신체가 젠더와 인종 형성, 계급, 제도들, 그리고 심지어 감옥의 권력들과 맛물려 있는 것을 포함하는데, 이는 신체의 움직임, 행동, 몸짓, 발화, 고통, 격정, 그리고 저항 등의 다양한 양태들에서 어떻게 권력이 재생산되고 또 겨루는지를 보여준다. 

비판현상학자의 대표 주장, 리사 건서, 
"비판현상학이란 용어로 내가 의미하는 바는 경험에 대한 1인칭적 설명에 뿌리내리고 있되, 1인칭 단수가 상호주관성보다 그리고 사회적 삶의 복잡다단한 구조보다 절대적으로 선행한다는 고전현상학의 주장에는 비판적인 방법론을 말한다"" 123

따라서 셀러가 비판했던 초춸적 주체는 여기서 더욱 강력하게 부정된다. 건서는 현상학과 정치가 어떻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123

".....대규모 수감을 문제시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를 이해하고 '바로잡으려' 노력할 뿐만 아니라 책임과 처벌을 융합하는 것을 정상화하는, 불확정적이지만 또한 구성적이기도 한 구조들을 발견해내야만 한다. 이와 같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 누군가에게는 안전과 번영을 약속하지만 다른 이들은 속박, 통제, 그리고 국가 폭력에 노출시키는 수감 권력의 네트워크와 관련해 우리 스스로를 자리매김해야만 한다." 124

여기서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과정'(자연화)에 대한 현상학적 설명이, 즉 행동과 몸짓들이 정상화되고 당연시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은 책임으로서의 투옥이 그저 생각으로서가 아니라 관습으로서 어떻게 당연시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124

만일 우리가 그러한 연결에 대한 믿음을 유예한다면, 만일 교도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면(탈자연화), 우리는 이러한 버전의 세계가 분석 가능하고 중단 가능한 반복된 행동들을 통해 세워지거나 구성되어온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아울러 이러한 반복적 구조들에 의해 형성된 과정들이 중단되어야 함을 알게 될 것이다. 125

시간에 걸쳐 확립된 것들, 즉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특정한 구성 행위들을 통해 확립된 것들은 현재 사물의 질서가 영원하고 필수적인 것처러 보이게 만든다. 126

사라 아메드, <<퀴어현상학: 지향, 객체들, 타자들>>
이 책은 퀴어성과 성적 지향을 보다 넒은 차원에서 사유하기 위해 현상학의 공간적 지향성을 사용하고 있다. 즉, 우리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또 움직이지 않는가에 대해 논한다. 이 텍스트는 논의의 출발점으로서 체현과 공간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시각을 취하고 있는데, 아메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객체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리고 그 관계에 의해서 공간 속에서 위치를 갖게 되는 것의 의미를 제고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따라서 퀴어 독해의 실천들은 현상학에 대한 비판적 읽기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126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

메를로퐁티에게 있어 인간 생명체는 신체적 존재로서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동시에 세계는 우리 안에, 우리 위에 새겨진 객체들 안에 존재한다. 신체는 객체들 중의 한 객체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127 

그의 시각에 따르면, 우리 삶의 상호주관적인 차원은 일종의 '상호 얽힘'이자 '중첩됨'으로서, 수사학에서 사용하는 교차대구의 표상을 통해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교차대구란 두 개의 별개인 개채들이 점유한 공유의 영역이 다른 모든 면에서 매우 명확하게 서로에게서 분기되는 것을 말한다. 신체가 무언인가 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다른 신체에 대한 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성은 신체를 실체로 여길 때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는, 일종의 존재론적 상태로 여겨져야만 한다. 관계성은 개인 주체를 확립하기도 하고 동시에 해체하기도 한다. 여기 이것은 무엇인가를 혹은 눈군가를 만지는 내 손이다. 그러나 그 접촉은 언제나 나 자신이거나 혹은 다른 종류의 존재와의 접촉이다. 이 말인즉, 그 접촉은 현상학적 의미에서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만지는 것은 언제나 무언가의 접촉이다. 심지어 만져지고 있는 것이 자신일 경우에도 접촉의 대상 지향이 접촉을 규정하며, 심지어 시간을 소급하여 그 손의 현상학적 감각까지도 규정한다. 이러한 공식은 접촉이 가진 지향성과 세계로 구축된 속성 모두를 비판한다. 달리 말하자면, 만질 수 있는 세계는 그 상태이자 그 대상이기도 한다. 128

이 마지막 논의는 윤리에 대해 사유하는 데 중요하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호혜성 개념을 재고하도록 한다. 호혜성은 윤리적 책무와 사회 평등에 관한 이론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져왔다. 만일 신체와 감각의 수준에서 우리의 삶이 서로의 삶에 연루되어 있다고 이해하고 있는 메를로퐁티의 주장을 좀더 확장한다면, 내가 하는 것, 나의 바로 그 행동은 물론 나의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언제나 나 자신의 것이 아닌 어떤 것과의 관계를 통해, 혹은 그 자체로서 보다 능동적인 형태의 '나'에 대한 일종의 타자로서 나 자신과 맺는 관계를 통해 규정된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윤리적 행동은 칸트에게서 기인한 방식대로 온전히 설명될 수 없다. 즉 모든 이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준칙으로서 받아들이는 규칙에 따라서 행동한다거나, 혹은 모순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방식대로 행동하면 다른 이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식의 가설 말이다. ... 무조건적인 호혜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129

네가 나에 대해 행동하고자 하는 대로 나는 너에 대해 행동할 것이다. ... 만일 행하는 것과 행해지는 것이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하는 것과 타자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면 어떠할까? 만일 우리가 '너를 만지는 것이 나를 무너뜨린다"라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행위와 당하는 것 모두에 대해 전하고 있는 것이다. 당하는 것은 단지 단순한 수동성이 아니라 성애적으로 중요한 차원에서 볼 때 그 기원들이 모호한 어떤 행동에 연결되어 있다. 130

만지는 사람은 또한 만져지며 또한 자신을 만진다. 이는 나 자신에 대한 나의 반성적 관계와 행동하고 있는 다른 이에 대한 지향적 관계는 중첩된다는 말이다. 두 운동은 서로 교차한다. 그리고 두 운동이 교차하는 곳 혹은 시간은 성애적 삶에 대한 현상학을 위해서도 중요하며, 그 교차의 장소와 시간은 우리가 공동의 세계라는 말로 의미할 수 있는 것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131

현상학에서 지향적이라는 말이 '의도적' 혹은 '고의의'라는 뜻이 아니라 의식, 태도, 혹은 다른 관계성의 양태들의 일부인 어떤 객체에 연결되는 감각, 그런 객체를 지향하는 감각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131

다른 신체들이 보이는 것, 그리고 들리는 것의 감각의 장, 이러한 장들이 정확히 사람들 사이를 매개하는 제3의 규약이라든가 영역인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감각들에 의해 수반되는 범주들 혹은 장들이다. 다양한 종류의 촉지할 수 있는 생물은 그 범주 안에서 서로 교차하고, 그 범주는 그들의 행동에 의해 암시되며, 그 자체로서 일종의 호혜적인 교차인 것이다. 동일한 표면들을 만지고 있고 근처의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서로를 발견할 때마다 그 관계들은 교차적인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촉감 혹은 유형성의 영역들, 그리고 호흡과 호흡 가능성의 영역들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또한 다르게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우리를 초과하여 접촉과 호흡의 매 순간에 우리를 내포하거나 혹은 아우른다. 그러므로 비록 그것들이 우리 사이의 공동의 일부일지라도 그것들은 또한 기뿐 것일 수도 끔찍한 것일 수도 있는 분할, 고통, 중첩의 현장들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공동은 개별성과 중첩됨 사이의 평행한 구분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32

잘 알다시피 공동의 세계가 우리가 그것을 평등하게 공유하고 있다거나 혹은 우리가 독소나 오염 등에 동일하게 노출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분리 가능성이 없는 차이"(드니스 페레이라 다 실바) 132

메를로퐁티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거리를 전제하는 인식론적 실천에 도전하는 언어를 찾아내고자 했다. 그는 지향성을 주체와 세계 사이의 포용이라고 부른 바 있다. 132

의식은 세계를 그대로 알고자 하는 구조들을 갖추게 되고, 세계는 알려지고자 하는 의식에 스스로를 내어준다. 133

이는 멋진 생각이지만, 만일 그것이 기쁨보다는 고통을 주는 일종의 옭죄기라면 어떠한가? 133

만일 우리가 서로의 안에 빠져 있다면, 혹은 우리의 삶이 접촉과 호흡의 영역에 의존적인 다른 삶들을 내포하고 있다면, 내가 펜데믹하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살 수 있는가라는 윤리적 질문을 제기할 때 나는 개인주의와 민족주의 모두를 넘어서 나 자신의 입장을 재정립해야만 할 것이다. 148

우리의 과제는 단순히 상호의존성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형태의 상호의존성을, 즉 급진적 평등의 이상을 가장 명확하게 체현하는 상호의존성을 찾아내고 만들어내고자 집단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141

우리의 과업은 마치 처음인 것처럼 자기 이익으로도, (인종차별의 알리바이인) 공동체주의로도, 그리고 (국경에서의 폭력과 인종차별의 알리바이인) 국가 정체성으로도 흘러 들어가서 희석되지 않는 호혜적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141

나는 비극적인 것이라 불리는 세계-형성에서 대체 어던 가치가 혹은 어떤 가치들이 파괴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잠시 셀러로 돌아가면서 이 책의 논의를 시작했다. 나는 펜데믹이 부분적으로 나를 셀러로 이끌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이 시대에 현재 일어나고 있거나 혹은 일어날 위험이 있는 것처럼, 펜데믹이 이상으로서의 삶의 평등한 가치가 파괴되는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스러지거나 파괴될 때, 혹은 죽음을 예방할 수 있음에도 생명이 죽도록 내버려둘 때 가치의 파괴가 일어나는데, 여기서 파괴되는 가치는 삶의 가치이다. 즉 모든 생명은 동등하다거나 혹은 평등하게 여겨져야 한다는 주장을 고려할 때에만 타당해지는 가치 말이다. 142

펜데믹은 의료보험에 접근할 수 없거나 너무 비싸서 가입할 수 없는 모든 이들이 질병에 대한 극도의 취약함에 노출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논점은 그러한 집단을 격리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동등한 권력과 소속의 권리를 보유하기 위한 조건들을 창출하고 유지하자는 것이다. 이때 시장가치는 결코 길잡이가 될 수 없다. 147


4장 살아 있는 이들에 대한 애도 가능성

<<비폭력의 힘>>에서 나는 애도 가능한 이들과 애도 가능하지 않은 이들 사이의 구분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작동과 그 의미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폭력의 효과임을 주장한 바 있다. 151

나는 애도가 상실을 인정하고, 상실의 현실을 마음속에 새기며, 나아가 상실의 사건 그 자체를 알고 슬퍼하지 않는 방어 기제를 해체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애도와 우울증> 속 프로이트의 주장을 끌어오고 있다. 152

프로이트는 우울증을 상실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실패한 것으로 설명한다. 152

<<젠더 트러블>>이래 나는 우울증의 분석을 개인의 정신적 문제를 넘어서 특정한 종류의 상실들이 기념될 수 없거나 혹은 그 가치가 인정될 수 없을 때 확고해지는 보다 넒은 차원의 문화적 양상으로서 이해하고자 했다. 153

알렉산더 미처리히와 마르가레테 미처리히의 연구, <<애도할수 없음>>, 이 책은 전후 독일에서 팽배했던 우울증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당시 독일인들은 자신의 상실들, 혹은 사실은 그들 자신의 파괴성을 인정하거나 애도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 명명할 수도 없었던 파괴와 상실의 경험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155

펜데믹하의 오늘날 문화적 현상으로서 다시 등장한 그 우울증과 함께 시장과 미래성에 대한 시장의 특정한 감각에의 정신병증적 광기를 초래했다. 156

최근 몇년간, 나는 전쟁과 인간 삶에 대한 공적인 공격들에 대해 사유하고자 했고, 누구의 삶이 공적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누구의 삶은 그렇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한 바 있다. 156

식량, 거주지, 의료보험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은 또한 자신들의 폐기 가능성을 감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폐기 가능성이라는 감각을 온몸을 통해 느끼며 산다는 것은 우리가 그 어떤 흔척도 남기지 낳고, 그 어떤 인정도 없이 죽어서 지구를 떠나갈 수 있다는 느낌을 말한다. 

펜데믹 급증 이후 어떤 이들은 분명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알면서도 경제는 재개되고, 결국 폐기 가능한 이들의 계급이 식별되고 만들어진다. 이는 실로 시장의 계산 와중에 나타난 파시즘적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형태의 계산이 결국 규범이 되는 위험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 수준에서 그리고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투쟁해야만 하는 합리성이자 권력이다. 158

... 결국 폐제된 미래성의 감각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 나는 애도 가능성이 어떻게 불공평하게 할당되어 있는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불평등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해왔다. ... 내 생각에 비폭력 정치를 위한 투쟁이란 동시에 삶의 평등한 가치를 꾀하는 투쟁이자, 인구를 계속하여 폐기 가능한 것으로, 삶을 보호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삶을 애도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구별해내는 죽음의 정치의 척도들과 치명적인 논리들에 대항하는 것이다. 내 주장의 주요한 부분 두 가지를 개괄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투쟁은 차별적인 애도 가능성에 대한 투쟁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2) 이러한 투쟁은 또한 비폭력 정치의 일환이다. 159

펜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우울증을 겪고 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애도할 수 있을까? ... 애도의 한 방식인 집회와 모임이 고도로 제한되고, 걱정거리가 되거나 중단될 때,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어떤 방식들이 남아 있을까? 160

우리의 책무는 주변에 팽배한 상실의 감각을 애도와 요구로 바꾸어내는 것이다. 엄청난 수준의 상실을 애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의 방향 상실에 대한 전지구적 차원의 구조화의 필요성을 요구하면서 당신이 그 이름을 모르는 이의 상실을, 당신이 그의 언어를 모르는 이의 상실을, 당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먼 거리에 살고 있는 이의 상실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도 하나의 삶이었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망자를 알 필요는 없다. 그 삶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그 삶에 관한 모든 세부사항을 알 필요는 없다. ... 망자의 나이가 어떻든 그 사람의 가치는 이제 다른 이들의 삶 속으로 전이된다. 즉 일종의 합체이자 살아 있는 메아리, 계속 살아가야 할 이들을 변화시키는 활성화된 상처 혹은 흔적이 되는 인정의 한 형태가 되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내가 고통받지 않았던 방식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하여 그의 고통이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유대는 공감, 번역, 반향, 리듬, 그리고 반복으로부터 만들어진다. 마치 애도의 음악성이 그 음향적 힘을 통해 경계를 넘어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낯선 이가 감내하고 있는 상실은 똑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느끼는 개인적인 상실과 공명한다. 막간의 휴식은 연결의 순간이 된다. 비탄에 잠겨 애도하고 있는 낯선 이들은 우리와 서로 모르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집합적 공동체를 창출해낸 것이다.143

삶의 정치는 반동적인 정치가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하여 단순한 생기론으로 환원되지도 않을 것이다. 삶의 정치는 오히려 보다 급진적인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를 비폭력적인 곳으로 만들라는 요구를 지키기 위해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삶의 조건들을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일일 것이다. 이는 아마도 세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한 방법일 것이다.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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