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
이기상
존재물음을 던지는 인간의 거기-있음(현존재)
인간도 여러 다른 존재하는 것(존재자)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존재(있음) 또는 존재방식은 다른 존재자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은 존재를 이해하며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독특한 존재자이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만드는 가장 독특한 본질적 차원은 바로 이 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통 철학에서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규정해 왔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선입견이 깔려 있는데 다름 아닌 생물학적 전제이다. 인간을 생물의 한 부류, 동물의 한 종으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전제 없이 출발해야 한다는 철학이 왜 생물학의 인간에 대한 정의 를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전제하고 들어가는가? 이 점에 대해 한번이라도 의문을 가진 적이 있는가? 이제라도 우리는 인간의 독특한 본질적 차원과 구조를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인간 그 자체에서 부터 찾아보아야 한다. 119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인간'이란 낱말의 해체의 필요성
종래의 '인간'이라는 낱말에는 무기물, 유기물, 식물, 동물, 그리고 동물 중에 이성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라는 식의 생물학적 위계질서가 전제되어 있고, 철학은 그것을 아무 물음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거기에서는 생명에 관한 논의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인간을 그저 '이성적' 동물로 규정한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이성뿐이라고 확정함으로써 그 이후의 서양철학사에서 이성만을 중시하게 만든다. 170
다른 하나의 전제는 '하느님 모상'이라는 신학적 전제이다. 즉 인간을 하느님의 모습을 본떠 만든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양에서는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이며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만들어진 존재라 규정한다. 그리고 이성에 뭔가 하느님과 통하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봄으로써 정신, 영혼, 주체, 의지, 인격 등 이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하느님과 연관지어서 파악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이성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특징들이다. 2500년 동안 서양철학은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을 규정해 왔다. 171
세계 간의 만남
하이데거가 인간을 거기-있음(현존재)이라 표현했을 때, '거기'란 다음이 아니라 세계다. 그래서 인간의 있음을 '세계-안에-있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거기-있음(현존재)이 그대로 세계-안에-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있음은 나 혼자, 홀로-주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기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그 '거기에'는 나와는 아무 상관없던 섹계이다. 나와 상관없다는 것은 내가 그 세계의 형성에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고, 나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세계 안에 누구의 자식으로 아무런 선택의 여지없이 내던져진 모습으로 탄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의 거기-있음(현존재), 즉 세계-안에-있음이란 이미 만들어져 있는 세계-안에 있음이다. 245
하이데거 시간논의의 출발점
하이데거에 의하면, 전통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은 언제나 존재의 자리에 어떤 한 특정의 존재자를 세워놓았다.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사물이 그렇고, 칸트의 의식이 그렇고, 관념론의 이념이 그렇다. 이렇게 사람들은 존재 그 자체로, 즉 존재론까지 밀고 들어가지 못하고 언제나 존재적인 것의 차원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모든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을 해체하려고 모색한다. 형이상학에 대한 적대감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형이상학을 본래의 기초존재론에서 이제 그 자신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를 시도한다. 294
하이데거의 결정적인 통찰에 의하면, 형이상학의 이탈은 형이상하가이 사유를 '봄'으로, 존재를 지속적인 눈앞의 있음으로, 지속적인 현존으로 생각하며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애당초부터 제기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무차별한 존재의 지평 안에서 인간의 거기-있음(현존재)도 사물 존재와 똑같은 범주를 갖고 규정하려 했다는 데에 있다. 만일 형이상학이 존재를 지속적인 현존으로 생각했다면, 형이상학은 존재를 특정한 시가의 양태인 현재에서부터 생각한 것이 아닌가? 존재의 의미에 대한 결정의 본질이 '시간'인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시간이 존재의 의미에 속하는가? 그리고 이 시간을 형이상학이 사유하지 못하고 망각하였던 것은 아닌가?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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