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페미니즘과 자연: 성차이론과 에코페미니즘의 절합

백_일홍 2023. 8. 6. 14:58

페미니즘과 자연: 성차이론과 
에코페미니즘의 절합

 

황주영

 

 

제10장. 결론


이 논문의 목적은 페미니즘 내부에서 자연을 적절하게 다루는 방식을 탐색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에서 자연은 섹스와 젠더의 관계, 재생산 권리
와 노동, 성적 신체의 정체성과 섹슈얼리티, 여성과 자연의 동일시, 생태 위기의 성별화 혹은 성차화된 구조 등 다양한 쟁점에서 논의된다. 우리는 이 논의들 중 일부를 우선 이원론에 대해 어떤 관점을 취하는지 그리고 이원론을 얼마나 또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따라 평가했다. 또 그와 관련해 각 입장들이 물질, 생명,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을 고찰했다.

 

 1부에서는 섹스/젠더 이원론과 젠더 일원론의 입장들을 살펴봄으로써, 여성을 자연에서 분리시키고 성정체성과 성적 욕망을 설명할 때, 육체 자체가 지닌 고유한 힘이나 성격을 고려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문제들을 드러내었다. 먼저 외관상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는 급진 페미니즘과 사회 구성주의 페미니즘이 실상은 모두 위계적 이원론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이로 인해 급진 페미니즘은 성과 성적 관계를 생물학으로 환원하게 되고, 반대로 사회구성주의 페미니즘은 사회문화적인 것으로 환원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들과 달리 모니크 위티그와 주디스 버틀러는 이원론을 거부한다. 위티그는 섹스가 젠더와 독립적으로 구별되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성을 계급적 측면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위티그의 기획은 성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설명할 수 없으며,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주체성은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남성적 주체 입장과 구별하기 어렵다는 점을 문제로 짚었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일원론의 경우 물질을 물질화와 동일시하고, 물질화를 담론의 차원에서만 분석함으로써, 육체와 물질을 담론의 외부로 구성한다는 점을 밝혔다. 이것은 버틀러가 사회구성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면서 섹스/젠더 이원론을 동요시키고자 했으나, 자신의 목표와 반대로 오히려 이원론을 강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버틀러가 이원론의 핵심이 대립쌍의 항들 사이의 위계에 있다는 것을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버틀러의 젠더 일원론은 인간의 육체의 물질화에 대해서는 설명력을 갖지만, 인간 외의 다른 육체들과 자연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갖는다. 

 

2부는 생태위기의 문제를 전면화하는 에코페미니즘이 이원론을 분석하고 여성과 자연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자연을 개념화하는 방식을 고찰했다. 먼저 에코페미니즘 내부에서 벌어졌던 비거니즘 논쟁을 검토함으로써, 자연 개념을 재고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특히 캐롤 아담스의 ‘존재론적 비거니즘’과 그에 대한 발 플럼우드의 반론을 중심으로 비거니즘 논쟁을 검토했다. 이를 통해 존재론적 비거니즘이 이원론적인 것임을 밝히고, 이것이 일으키는 문제들을 짚어봄으로써, 이원론을 거부하면서 자연이 무엇인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다음으로 에코페미니즘에서 이원론을 분석하는 방식과 그 한계를 살펴보았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이원론이 남성의 여성지배와 인간의 자연지배의 공통적인 구조라고 본다. 특히 발 플럼우드는 이원론을 주인 정체성과 관련하여 분석하고, 이원론을 떠받치는 논리 구조를 해부한다. 플럼우드는 이원론의 핵심이 위계질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짚어낸다. 나아가 주로 본질주의라고 비판받았던 에코페미니즘 이론들의 더 근본적인 문제가 이원론을 전제한 것에 있다는 점을 밝힌다. 그러나 이원론 분석은 지배구조의 비판으로서는 유의미하나, 인간중심적이고 이성중심적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데올로기적인 지배구조로서 이원론을 통해서만 설명하기 때문에, 이원론을 해체한 이후, 여성과 자연, 인간과 자연의 긍정적 연결관계를 주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인간과 자연의 연결관계의 힘을 인간을 포함한 육체와 자연 자체에서 발견하여, 긍정적인 연결관계를 설명할 틀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이런 설명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에코페미니즘 내에서 제시되었던 여러 자연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했다. 그중에서 특히 스테이시 앨러이모의 ‘횡단-육체성’ 개념을 물질과 육체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 중 하나로 이해하고, 그것이 생명체의 생존과 창조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횡단-육체성 개념을 통해, 기존에 본질주의로 이해되어왔던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횡단성의 인식으로 재해석했다. 횡단-육체성 개념은 인간과 자연의 긍정적 연결관계와 자연과 문화의 연속성을 유물론적으로 설명해준다. 

 

하지만 횡단-육체성은 남성의 여성지배와 인간의 자연지배 사이의 내적 관계를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말하자면 성이나 성적 관계가 생태위기의 문제와 어떤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지는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본 논문은 뤼스 이리가레의 성차이론과 자연론이 이런 점에서 에코페미니즘에 자연철학적 근거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3부는 이리가레의 이론을 특히 “경작” 개념을 중심으로 고찰하고, 이리가레의 이론과 횡단-육체성 개념을 종합했을 때, 자연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리가레는 성차를 “존재론적 차이”이자 “관계적 정체성의 차이”로 정의한다. 성차가 존재론적 차이라는 것은 성차가 인간 존재자들이 성적으로 분화되어 존재하도록 하는 일종의 구별의 원리이며, 인간의 존재 조건이라는 의미이다. 성차가 관계적 정체성의 차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기원으로서 어머니의 육체와 맺는 관계가 타자에 대한 관계와 세계에 대해 맺는 관계의 틀을 형성한다는 의미이다. 관계적 정체성의 차이로서 성차개념은 본질주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이리가레의 “경작” 개념이다. 경작은 경작의 대상이 갖는 고유한 잠재력과 경향성을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특수한 실천들을 의미한다. 이리가레에게 있어 육체의 경작은 육체가 지닌 잠재력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도록 길러내는 것이다. 육체를 경작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충동들과 욕망들, 육체적 잠재력들을 문화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작 개념은 육체와 정신, 섹스와 젠더, 자연과 문화 사이의 이원론적 단절을 거부하면서, 육체를 인간의 성장과 되기의 기초로서 재가치화한다. 

 

이리가레에 따르면 자연 역시 경작의 대상이다. 이리가레는 하이데거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연을 성차화된 퓌지스로 재정의한다. 즉 자연은 생성 운동으로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열려 있는 성장과 펼침의 과정이다. 이리가레는 퓌지스로서 자연이 하나의 보편이 아니라 성차화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또한 물질에 고유한 생성의 힘이 있다고 본다. 이렇게 자연과 물질이 지닌 고유한 힘을 발전시키기 위해 자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경작의 의미이다. 여기서 문화는 경작의 결과로서 개념화되고, 자연은 인간에 의해 제작되지 않은 스스로 생성하는 세계로 정의된다. 따라서 이리가레에게 자연을 경작한다는 것은 자연에 대립하거나 자연을 극복하기 위해 문화를 건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본래 지닌 가능성과 잠재력을 인간적 방식으로 완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리가레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문화는 가부장제 문화이며 이는 성차의 무시와 제거에 기초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자연의 비하와 지배가 성차의 부인으로 귀결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연의 경작과 성차의 경작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리가레의 이런 주장은 페미니즘 이론이 생태위기에 개입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경작 개념은 이원론적 틀을 깨트리면서 자연과 문화의 연속성을 설명 해주며, 자연에 대한 존중의 윤리적,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리가레의 이론은 인간중심주의와 이성애중심주의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를 해결하기 위해서, 본 논문은 성차 페미니스트인 엘리자베스 그로스의 생명론과 퀴어 에코페미니스트 패트리스 존스의 욕망 개념을 끌어온다. 

 

이리가레의 인간중심주의는 그로스가 문화를 자연의 돌출한 일부로서 이해하고 인간의 문화적 특성을 동물종으로서 인간의 특성으로 이해하는 것을 통해 일부 수정될 수 있다. 또한 이리가레가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을 동물을 타자로 대우하는 겸허함으로 이해함으로써도 일부 해결될 수 있다. 이리가레의 이성애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리가레가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윤리적 관계의 모델로 삼기 때문에 제기된다. 이성애중심주의는 자연 세계의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된다. 본 논문은 이리가레가 욕망을 차이를 지닌 타자를 향한 끌림으로 정의하는 것과 패트리스 존스가 욕망을 관계 맺고자 하는 힘으로 정의하는 것을 연결시켜 이 문제를 완화시키고자 했다. 성차는 생명의 다양성과 차이의 원리로서 작동하는 한편, 욕망은 다층적이고 무수한 행위자들 사이의 관계와 유대를 촉발하는 힘으로 작동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본 논문은 이리가레의 성차이론과 앨러이모의 횡단-육체성을 결합하여, 자연을 보편적이면서도 동일하지 않게 생성하는 것으로, 그리고 이 생성의 힘과 횡단-육체성을 통해 잠재적으로 무한하면서도 또한 유한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자연의 잠재적 무한함은 자연을 인간중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볼 수 있게 하며, 자연의 유한함은 자연이 지닌 취약성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할 수 있게 한다. 앨러이모의 횡단-육체성은 이러한 자연의 양가적인 측면을 포착하는 개념이며, 이리가레의 경작은 자연의 다양한 육체들이 지닌 횡단-육체을 인간이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이자 실천적 개입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 자연을 개념화할 때 충족되어야 할 요건을 몇 가지 제시한다. 우선 육체와 자연의 힘을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실재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자연 개념이 필요하다. 그 필요은 무엇보다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설명하려면 자연을 의미부여나 담론적 해석과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는 데에 놓여있다. 후변화와 점점 더 자주 발생하는 새로운 감염병의 전지구적 유행, 대규모 멸종 등은 우리가 자연이나 육체를 이해하려고 할 때, 그것이 가진 물질적인 힘과 본성을 다루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간을 특별하고 예외적인 존재로 설정하지 않으면서도, 생태위기에 책임이 있는 집단으로 설명할 수 있는 연속체로서의 자연문화 개념이 필요하다. 한 자연을 낭만화하거나 보편주의적 개념으로 축소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을 보편적 토대로 삼아, 자연과 문화의 관계, 자연에 대한 인간의 소속을 설명할 수 있는 틀이 요청된다. 경작 개념을 중심으로 이해한 리가레의 자연론과 앨러이모의 횡단-육체성 개념을 결합함으로써, 본 논문은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키면서 자연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페미니즘 이론이 성차별과 여성억압의 핵심 구조에 초점을 맞고 그에 직접 관련되는 문제들에 집중하는 것은 페미즘의 목표에 잘 부합한다. 

 

페미니즘이 모든 폭력과 차별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페미니스트의 기본적 태도로 견지한다고 해서, 모든 페미니스트가 모든 사회 문제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이론가가 각 제를 자신의 주제로 삼지 않는 것과 이론의 기반이 되는 개념과 사유의 틀이 구조적으로 다른 정치적, 철학적 쟁점들을 설명할 수 없거나 다른 이론적 발견 및 발명과 불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페미니즘이 성과 육체를 이원론적으로 다룰 때, 그것은 인간중심주의와 종차별주의의 부담을 함께 지게 된다. 육체를 수동적인 것, 백지상태의 표면, 고유의 힘이나 특성을 갖지 않는 것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곧 인간 육체뿐 아니라 인간 외 종들의 육체와 자연 역시 그런 것으로 개념화하는 것이다. 이는 이원론의 핵심적인 작동 원리로서 위계를 의심 없이 수용한다. 이런 경우에 인간 외의 생물종들과 그들이 이루는 동체로서의 자연은 배제된다. 이런 한계는 페미니즘이 정치학이기 때문에 꽤 심각한 결함으로 남게 된다.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는 특수한 주제에 한정된 이론이 아니라, 가부장제 아래서 지워지거나 무시되어 온 종속적 소수자 집단으로서의 여성들의 관점에서 세계 전체를 재해석하는 이론이자 운동이다. 그런 한에서 페미시즘 이론과 실천은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하는 질문에 적절한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여성이라는 정체성 집단이 아니라 페미니스트라는 정치적 주체 입장에서 윤리적, 정치적 전망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성과 성적 차이를 자연과 유리시키고 육체를 탈자연화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기획이 여성억압과 성을 둘러싼 가부장제적, 이성애중심적 지배 담론들의 자연화된 규범의 역사성과 변혁 가능성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들어선 막다른 길이다. 육체와 자연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겪고 관계 맺고 늙으며 죽는 과정을 규제하는 그들 고유의 패턴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반드시 본질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배 담론과 권력 관계가 구성된 것이므로 동요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자연과의 단절을 강화할 필요도 없다. 섹스/젠더, 육체/정신, 자연/문화의 이원론을 극복하거나 해체하려고 젠더-정신-문화에 초점을 맞춘 일원론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도 아니거니와 결과적으로 이원론을 강화함으로써 애초의 기획에 실패한다. 우리는 성, 성적 차이, 성적 관계들을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적절한 방식으로 다루면서 동시에 새로운 생태적 전망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과 사유가 필요하다. 육체로 살아가는 체현된 주체가 겪는 다양한 층위의 경험들을 더욱 풍부하게 설명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관점이 필요하다. 성차의 페미니즘과 에코페미니즘의 통찰들을 연결하고 종합하는 시도는 그러한 관점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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