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존재의 이론에 있어서의 생명과 신체의 문제
1 범생명력론과 죽음의 문제
인간이 존재를 탐구하던 시초에 생명은 어디에나 있었다. 존재는 살아 있는 생명존재나 다름없이 이해되었다. <정령론>은 생명을 그렇게 이해하는 단계에서 가장 널리 퍼져 있던 이론이었고, <물질영혼론>은 이보다 후에 나타나는 개념이다. <영혼>은 현실세계 전체에 가득 넘쳐 있었으며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의 인간들은 <순전히>, 즉 실제로 영혼이 없는 <죽어 있는> 질료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죽어 있는 물질을 가정하는 것이 친숙 하지만 그들 고대인들은 그런 것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오히려 세계가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자연스런 가정이었고, 우선 그들 시야에 보이는 현상들이 이 가정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생명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지상의 연극무대를 지배하고 있으며, 인간의 시야에 직접 들어오는 연극무대의 전면을 채우고 있었다. 이 원초적인 공간에서 인간이 마주치는 것 가운데 분명히 생명이 없는 물질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우리가 오늘날 영혼이 없다고 알고 있는 것도 대부분 그들 고대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생명의 역동성과 내면적으로 얽혀 있는 것으로 본성상 그렇게 생명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흙, 바람, 물들이 생성되고, 소용돌이치며, 생명들을 먹이고, 파멸시키는 데 있어서 이들은 <단순한 물질>의 종류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고대의 범영혼론도 이와 마찬가지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때는 물론 범영혼론이 영혼의 강렬한 욕구에 부합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경험영역에서 추론되고 증명될 수 있는 법칙에 따라 정당화 되고, 생명의 지상적인 고향에 가까운 지평 속에서 실제로 우세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쳐놓은 상황에서 그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인간의 지명이 세계 공간의 먼거리까지 확대된 이래로, 사물 전체에 대한 인간의 표상 속에서 생명이 차지하는 비율은 아주 작아져 버렸고, 이제 아무런 전제없이 <자연>의 개념과 동일시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땅에 두 발을 딛고 서서, 하늘의 원형지붕 안에 들어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고대인들은, 생명이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규칙이 아니라 그저 어떤 예외적인 것이거나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상상할 수 없었다. 그 들의 범생명력론"은, 새로운 각도에서 세계를 보는 눈이 생겨나 이것을 대체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 나름대로 특정한 각도에서 진리를 비취주는 것이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생명이 현존하고 있다는 체험은 고대인들에게는 가장 설득력 있는 체험이었으며, 이 체험이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적이었다.
이러한 세계상에 따르면 오히려 죽음이 인간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수수께끼이다. 죽음은 자연이 인간에게 이해시켜 주고 설명해 주는 사실, 모든 것이 생명이라는 자연적인 사실에 위배되는 것이다. 생명이 모든 사물의 원초적인 상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그만큼 더 인간을 방해하는 비밀로 부각된다. 그래서 죽음의 문제는 아마도 인간의 사유의 역사에서 <죽음>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최초의 문제였을 것이다. 개념적인 수준에서 이론화되기 오래 전에 표현되는 죽음의 문제는 죽음의 문제를 던지는 정신의 각성을 시사해 준다. 죽음 앞에서 당연히 놀라 뒷걸음치게 되는 공포는 <논리적인> 조롱의 형태로 용기를 되찾는다. 범생명력론이 이해하는 소멸성이라는 사태 자체는 죽음을 논리적으로 조롱하였다. 죽음이라는 수수께끼 에 대한 고대인들의 생각은 이런식으로 맴돌았고, 그들은 신화나 숭배나 종교 속에서 그 대답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우선적으로 어떤 설명을 요청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이론적인 상황을 반영해 준다. 인간은 생명의 경이에 대해 기이하게 생각하기 이전에 오히려 죽음에 대해 그리고 죽음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지에 대해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생명이 자연적인 것이고, 규칙이며,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면, 죽음은 이와 반대로 겉으로 현상되는 부정이고, 부자연스런 것이며, 결코 진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어떤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 해명을 요청하는 설명은 오로지 생명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서 생명의 개념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임에 틀 림없다. 죽음은 어떻게든 생명에 동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죽음이 뒷걸음치는 방향으로 아니면 전방으로 제시하는 질문은 과거와 미래를 향한다. 어떻게 그리고 왜 죽음이 세계로, 자신의 본질이 생명성인 세계에 모순되면서 들어왔는가? 총체적인 생명의 연관 속에서 죽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모든 것이 생명이며 또 결국 죽음마저도 생명일 수밖에 없다면 이런 과도기적 과정으로서의 죽음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있는 것일까? 초기의 형이상학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고자 하였으며, 답을 찾지 못해 좌절하거나 아니면 대답하지도 않는 가운데 도무지 알 수 없는 법칙들에 대항하곤 하였다. 죽은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길가메쉬의 죽음에 대한 대답이다. 마치 돌로 만든 도구들이 원인류의 능력을 구현하고 있듯이, 원인류의 죽음에 대한 사유는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부정하는 무덤에 구현되어 있다. 이들 무덤으로부터 형이상학은 신화와 종교의 형태로 진전되었다. 이들은 모든 것이 생명이고 또 모든 것은 죽는다는 근본적인 모순을 풀고자 한다. 이들은 과감하게 도전하고, 사물의 총체성을 구제하기 위해서 죽음을 부정한다.
어떤 문제이건 그것은 근본적으로 포괄적인 통찰과, 이것이 가설이건 믿음이건 상관없이, 여기에 위배되는 개별적인 사태 사이의 충돌이다. 원시적인 범생명력론은 보편적인 통찰이고, 개체적으로 발생하는 죽음은 특수한 사태이다. 죽음이 근본적인 진리를 부정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에 죽음은 이제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의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 이 세계에 얼마나 생소한 것인가를 고백 하는 것이다. 이처럼 보편적으로 생명의 현전을 믿던 시대에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죽음을 부정한다는 것이며, 죽음을 생명의 형태가 변형된 것으로서 간주한다는 것이다. 고대의 장례식 풍습에서 표현되듯이, 죽음 다음에 계속되는 삶을 믿는 것은 죽음을 부정하는 한 양태이다. 죽은 사람 숭배나 불멸에 대한 믿음이나 이런 것들을 내용으로 확산되는 각종 사변들은 죽음과 대결하여 생명을 옹호하려는 이론적 투쟁이다. 이 투쟁은 자신이 옹호하려는 입장 자체에 어긋나게 될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그 입장을 파괴할 수도 있다. 모순을 제거하고, 수수께끼를 푸는 일은 일단 생명 쪽에 유리하게 진행될 수 있 었다. 아니면 그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은 채 남으면서 대답없는 외침이 된다. 아니면 원래의 입장이 포기되고 그 대신 새로운 단계의 사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맨 앞의 두 경우는 원래는 생명이 존재론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증거해 준다. 이것이야말로 역설이다. 인류의 시초에 등장하는 무덤숭배의 의미가 그리고 인간의 사유가 시작되는 무렵에 죽음의 주제가 압도하는 것은, 보편적인 생명의 주제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죽음이라는 강력한 배후를 증거해 준다. 그리고 생명의 지속성은 죽음을 넘어서서 오로지 생명의 지속성으로서 이해될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2 범기계론과 생명의 문제
르네상스와 함께 시작되는 근대적인 사유는 완전히 역전된 이론적 상황에 처한다. 자연적이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죽음이고, 문제가 되는 것은 생명이다. 자연과학들이 현실 전체를 설명하는 곳에서는, 모든 생명적인 것을 벗어 버린 순수한 질료를 기초로 하는 존재론이 지배적이다. 정령론적 사유 단계에서는 발견할 수 없던 것이 이제 어느새 현실 전체를 넘치도록 채우고 다른 어떤 것에는 설자리를 남겨 놓지 않는다. 근대의 우주론의 경우에 광대하게 확장된 우주는 영혼이 없는 질량과, 그 운동과정이 공간에 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정도에 따라서 지속성의 법칙에 의해 진행하는 힘들의 장 Feld이다. 모든 현실을 이루고 있는 이 벌거벗은 물질적 기체(基體, Substrat)는, 물리적인 잔재물에게서 점차 생명적인 특성들을 제거하고, 인간 스스로가 체감하는 살아 있음의 사실을 인간의 세계상 속에 이론적으로 투영시키는 것을 철저하게 회피하던 시기에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이 진척되는 동안 보편적으로 금지되던 인간동형론"이 동물동형론 Zoomorphismus에 대한 금지로까지 확산되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측량 그리고 이와 더불어 수학에 종속되는, 연장되어 있는 것의 순전한 속성들만이 설 수 있는 공간뿐이었다. 이제 이런 순전한 속성 들은 이른바 정밀한 인식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요청하는 것에 잘 들어맞고, 또한 이 요청을 충분히 충족시켜 주게 되었다. 이 순전한 속성들은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서의 순전한 속성들이 어느새 자연의 본질적인 것으로 둔갑한다. 더 나아가 이 본질적인 것이 현실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인식의 개념이 자연의 개념을 규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이 본래적인 의미에서 할 수 있는 것, 즉 모든 것을 설명하는 근거가 되어 버렸음을 뜻 하며, 여기에서 인정받는 존재이유가 모든 것의 존재이유가 되어 버렸음을 뜻한다. 살아 있지 않은 것은 <자연적인 것>이자 사물의 원래 상태이다. 상대적인 양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진리의 측면에서도 비생명 Nicht-Leben은 규칙이고, 생명은 물리적 존재 속 에 있는 수수께끼 같은 예외이다.
그 결과 생명의 존재는 역학적인mechanisch 우주 속에 위치하고, 어떤 설명을 요청하며, 이 설명은 살아 있지 않음의 개념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동질적인 물리적 세계상 속에 잔존하고 있는 예외적인 경우로서 생명은 물리적인 세계상의 제약 아래에서 스스로를 해명해야 한다. 생명은 양적으로는 우주적인 질료의 측량 불가능성 속에 있는 하나의 무(無. Nichts)이고, 질적으로는 질료적 속성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이다. 인식론적으로는 보편적으로 설명 가능한 물리적 자연 속에 있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서, 근대의 이론이 부딪히게 되는 돌과 같은 것이다. 생명이 있다는 사태 자체가, 도대체 어떻게 순전한 물질의 세계에 생명이라는 것이 가능한지가 이제 사유의 과제로 주어진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가 죽음 대신에 생명의 문제를 놓고 이론적으로 씨름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죽음이 자연적인 상태이며,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잘 이해되는 상태임을 입증해 준다. 36
여기에서도 역시 보편적인 통찰과 특수한 사태 사이의 충돌이 문제가 된다. 앞서 범생명력론의 경우에서처럼, 이제는 범기계론이 보편적인 가설로 등장한다. 생명이라는 이 희귀한 경우는, 지구라는 유일하게 예외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에 실현되어 있다. 그러나 생명은 물리적 세계의 기본법칙을 이탈하는 불확실한 개별적 사태이기 때문에, 이 보편법칙에 통합되기 위해서는 생명의 독자성은 박탈당해야만 한다. 생명을 문제로서 간주한다는 것은 이 역학적인 세계, 이 진정한 세계 속에 생소한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죽음의 존재론 Todesontologie의 사유 단계에서 생명을 설명한다는 것은 곧 생명을 부정하고, 생명을 살아 있지 않은 것들의 변형태로 만드는 것이다. 무덤숭배 의식과 죽음 후의 삶에 대한 믿음이 곧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었듯이, 생명체를 기계론적 mechanistisch으로 설명하는 이론도 부정하는 유형의 이론이다.
<인간기계 L'homme machine>는 고대에 물질영혼론 Hylozoismus이 시사했던 것을 근대적 모형으로 상징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존재론적으로 독점적 위치를 누리는 한 영역이 다른 영역을 부정함으로써 다른 영역을 찬탈하는 것이다. 역학적인 일원론이 생명력론적인 일원론을 대체하고, 생명의 법칙을 죽음의 법칙과 교체시킴으로써 자신을 증명하는 규칙을 확보하였다. 이제 이 새로운 일원론에서도 사태를 뒤돌아보는 형태의 질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죽음이 세계에 들어왔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생명이 살아 있지 않은 세계에 들어왔는가이다. 세계 속에서 생명이 거하는 장소는 이제 생명체, 즉 연장되어 있는 실체와는 구별되고 또 골칫덩어리인 예외적인 형태이자 질서인 생명체로 국한된다. 오로지 생명체 속에서 사유하는 실체 res cogitans와 연장되어 있는 실체 res extensa, 즉 <사유하는 존재〉와 〈연장되어 있는 존재)는 서로 만나고 있다. 물론 이때는 이미 두 존재론적인 영역이 서로 분리되었고, 그 가운데서도 연장되어 있는 존재의 영역만이 이른바 <세계>에 속하고, 사유하는 존재의 영역은 세계에 속하지도 못하는 때였다. 그러므로 두 영역이 생명체 속에서 만나는 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그런데 생명체가 물체로서 연장되어 있는 <세계>의 일부분이므로 이것은 여타의 세계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즉 세계의 보편적인 존재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 두 방향으로 힘 을 발하고 있다. 만약 동질성의 경우라면 보편적인 것은 특수한 것. 즉 우선 경험할 수 있는 특수한 것의 상(像, Bild)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거나 아니면 특수한 것이 보편적인 것의 상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세계의 본성이 생명체의 상에 의존하여 설명될 수 있거나 아니면 생명체가 세계의 본성의 상에 의존해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의 보편적인 자연이 무엇인지는 이미 정해 져 있다. 그것은 공간 속에 있는 순전한 질료이다. 생명체가 세계 속 에 있는 <생명>을 대변하므로, 이제 생명과 연관되어 있는 질문은 다 음과 같다. 어떻게 생명체는 이미 그렇게 정의된 존재와 연관되어 있는가. 어떻게 존재의 예외적인 형태와 기능이 그것의 보편적인 법칙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어떻게 생명이 살아 있지 않은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38
생명을 살아 있지 않은 것으로 환원시킨는 것은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복합적인 것을 단순한 것으로 그리고 겉으로 현상되는 예외를 믿고 있는 바의 규칙으로 해소시켜 버리는 것과 다를 바 가 없다. 바로 이것이 근대의 생명학, 즉 생물학이 우리가 방금 언급한 바대로 규정되어 있는 <학문>의 목적을 수행하면서 떠맡은 과제이다. 생물학이 어느 정도까지 이 목적에 가까이 가느냐에 따라서 학문의 성공여부가 판가름난다. 그리고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남 은 문제는 이 학문의 과도기적인, 아직 계속 밀고 나가야 할 한계이다. 과거에는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생명의 상 아래에서 해석하는 반면에, 생명은 겉으로 죽음처럼 드러나는 것 속에도 계속 연장시켜 두어야 했다. 그 당시에는 죽은 사람의 몸이, 죽어 있는 <물질〉이라는 이 원초적인 경우가, 모든 이해할 수 있는 것의 한계였고,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들 가운데 인정할 수 없는 첫번째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살고 느끼며, 죽는 생명체가 그러한 역할을 떠맡고, 물질의 노리개 ludibrium materiae로서 자신을 노출시킨다. 이에 따르자면 오늘날 신체 Körper 상태 가운데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상태가 시체이다. 죽음과 함께 비로소 신체는 수수께끼가 풀린 상태가 된다. 죽음 속에서 신체는 살아 있음이 가지고 있는 알 수 없는 비정상적인 태도에서 해방되어 전체 물체세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물체가 보여주는 명료하고 <친숙한> 상태로 되돌아간다. 전체 물체세계의 보편적인 법칙들은 모든 이해 가능성의 핵심이다. 생명체적인 신체의 한계를 이 핵심으로 가까이 이끌어 가는 것. 즉 이러한 의미에서 생명과 죽음 사이의 경계를 지워 버리는 것. 생명의 상태와 죽음이나 시체 상태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없애 버리는 것이 근대적인 사유가 세계의 실제적인 일부분을 이루고 있는 생명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향이다. 우리의 사유는 존재론적으로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다. 우리가 중립적인 특성을 갖는 순전한 물질의 무차별성(냉담성)을 거론하면서, <죽음>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죽음>은 반정립적인antithetisch 의미를 갖고 있고, 오직 살아 있거나 살아 있을 수 있거나 아니면 살아 있던 어떤 것과 연관지어질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상황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런데 사실상 우주는 한때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들의 눈에는 살아 있는 것이었고, 우주를 살아 있지 않은 것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은 원래의 시각이 갖고 있는 오류를 비판적으로 걸러내는 끝없는 과정의 결과로 구축된(또는 서서히 형성된) 것이었다. 적어도 이와 같이 역사적인 의미에서는 우주에 대한 기계론적인 관념도 하나의 반정립적인 계기를 내포하며, 단순하게 중립적인 것만은 아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걸러내는 작업>을 가동시킨 것은 비판적 오성 이 아니라, 사멸성(死滅性. Sterblichkeit)에 대한 체험 속에 그리고 사멸성에 대한 저항 속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음이 증명될 수 있는 이원론적인 형이상학이었다. 이원론 Dualismus은 우리가 지금까지 비역사적으로 대비시킨 두 극단을 역사적으로 중계하는 연결점이다. 이원론은 사실상 인간의 정신을 이전의 생명력론적 일원론에서 현재의 유물론적 일원론으로, 즉 생명력론적 일원론이 의도하지도 않았던 역설적인 귀결로서의 유물론적 일원론으로 이끌어 가는 운동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한 이론이 자기와는 다른 이론에서 출발하여 이처럼 엄청난 우회로를 거친 다음에 비로소 성립될 수 있었는가를 통찰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40
3 이원론의 역사적 역할
이원론이 나타나서 그토록 오랫동안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한 가지 이상의 측면에서, 인간 정신의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사건에 속한다. 우리의 맥락에서 차지하는 이원론의 중요성은, 이원론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며, 변화가 심한 노정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물리적인 영역으로부터 정신적인 내용을 제거하려고 노력했고, 결국 이원론의 홍수가 끝났을 때, 그러한 모든 수식어를 기이하게 다 벗어 버린 하나의 세계를 텅빈 넓은 공간에 되돌려 놓은 사실이다. 이원론을 발생시키고 전개시켜 준 주제들 가운데 죽음의 주제도 끼여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너는 먼지가 되어야만 한다>고 시체가 산 사람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나, 인생의 덧없음이 썩어 버림을 맞부닥치게 하는 그런 상태의 극한성은 순수하고 살아 있지 않은 <물질)을, 여기에 저항하고자 애쓰는 인간의 시야를 억누르면서, 언제나 반복해서 인간에게 강제로 주입시켰고, 또한 무덤숭배가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하면서도 결코 침묵하게 만들지는 못했던 모순, 즉 범생명론의 모순을 끊임없이 재건시켜야만 했다. 과연 그리고 언제 이 모순이 위기에 처하게 되는가는 특별한 역사적인 상황에 달려 있었다. 이 역사적 상황과 함께 보편적인 <죽음의 주제>들이 언젠가는 <생명의 주제>들을 모두 정복하기 위하여 서로 결탁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일이 시작되고 원숙하지 않던 일원론이 이원론으로 갈라지자, 방해하는 요소를 안고 있는 개개의 초기체험의 특성들은 점진적으로 물리적 세계의 상(象)을 넘어서서 확산될 수 있었다. 죽음이 사실상 외적인 현실을 정복하였던 것이다. 41
신체-무덤 Soma-sema, 즉 <신체는 무덤이다>라는 대답이 죽음의 문제에 대한 최초의 이원론적인 대답으로서 오르페우스 종교에서 나왔다. 여기에서는 생명의 문제도 마찬가지이지만 죽음의 문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요소들, 즉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되었다. 육체는 그 자체로서 <영혼의 무덤>이고 육체의 죽음은 영혼의 부활이다. 생명은 이방인처럼 신체 속에 머문다. 신체 Leib는 본성상 물체 Körper 아니 더 엄밀히 말하자면 시체이다. 신체는 영혼의 자비로 말미암아 비록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가상적으로 살고 scheinlebend 있다. 그리고 진짜 죽음의 상태에서는 영혼이라는 이방인이 떠나가고 이제 신체는, 영혼도 신체를 떠나 영혼이 돌아가야 할 본래의 진리로 돌아가듯이 자신의 본래 진리로 돌아간다. 41
<자기자신 Selbst〉을 서양에서 최초로 발견한 것은 오르페우스 종교였으며, 이것은 인간 속에 내재하는 전적으로 비세상적인 내면성의 관념을 가졌던 기독교와 그노시스(영지, Gnosis)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자기자신의 발견은 실제성 Realitat에 대한 보편적인 상에 특이하게 양극적인 영향을 미쳤다. <영혼이 없는 우주> 관념의 단순한 가능성은 다른 것의 대립물로서 생겨났다. 이 관념이 배척한 것은 인간 영혼에 집중하면서 특히 인간 영혼의 내면적 생명(삶)과 인간 영혼이 자연 속의 어떤 사물과도 질적으로 비유될 수 없다는 불가공약성 Imkommensurabilität을 오로지 강조하는 것이었다. 일단 분리된 두 요소가 더 이상 공통점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치명적으로 갈라서는 시점에까지 이르고, 이로 말미암아 두 요소의 본질은 상대방을 제외시키는 형태로 정의된다. 이것은 저것이 아닌 어떤 것이다. 한편 뒤로 물러서는 영혼이 모든 영적인 의미심장함과 형이상학적인 존엄성을 획득하는 동안, 세계는 이런 식의 요청에서 해방되었다. 세계는 처음에는 우선 결정적으로 악령화(惡靈化, dämonisiert)되었다가, 마지막에는 그것이 이쪽의 가치이건 저쪽의 가치이건 가치의 문제와는 상관없게 되었다. 43
이원론이 가장 절정에 달했던 그노시스 속에서 원래 인간에게만 한정되었던 신체-무덤의 비유 soma-sema-Gleichnis는 물리적인 세계 전체에까지 적용되었다. 세계 전체는 무덤, 영혼이나 정신의 무덤, 즉 생명과는 아무 관계 없는 곳으로 들어온 질적으로 다른 생소한 어떤 것 (영혼이나 정신-옮긴이)의 무덤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체-무덤의 비유가, 무덤이 이제는 텅비게 되었다는 차이를 제외하면, 근본적으 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구체화된 정신적인 실체, 즉 무덤 속에 또는 감옥에 갇혀 있을 수 있는 것이 사라지면서 이제는 오직 무덤의 벽들만 뒤에 남겨 놓았는데, 이 벽들은 그 래도 최대한으로 튼튼하게 지어졌다.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현대적 modern 유물론의 입장이다. 현대적 유물론은 바로 현대적 유물론 쪽으로 달려온 이원론이 뒤에 남겨 놓은 것과 그것의 여전히 조금 남아 있는 잔여물을 상속받았다. 종교적인 독단은 현실이 둘, 즉 자기자신과 세계, 내면적인 존재와 외적인 존재, 정신과 자연으로 갈라지는 것을 오랫동안 저지해 왔는데, 이러한 식의 갈라짐은 후기 이원론적인 postdualistisch 계승자가 설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44
정령론적 일원론이 가진 단면성을 가장 처음 크게 교정한 것은 이원론이다. 이원론의 잔여물로서 남아 있던 유물론적 일원론은 생명의 체험에 대하여 죽음의 체험을 총체적으로 승리시킨 것이었는데, 이 승리도 덜 단면적인 것은 아니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언젠가 시체로부터 야기된 이론적인 충격이 하나의 구성적 원칙으로 탈바꿈하 였다. 그리고 시체에서 얻은 상에 따라 표상된 우주 속에서 각각의 실제 시체는 자신의 수수께끼를 잃어버렸다. 아직 풀리지 않고 남아 있는 생명체라는 잔여물은 점점 더 심각하게 세계 전체의 새로운 규칙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 생명체라는 잔여물은 이원론적인 양자택일의 가능성들과 그와 동시에 이원론이냐 아니면 일원론이나 하는 양자택일의 가능성들과도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물리적인 세계의 법칙성의 기준을 분석하려는 노력은 죽음의 존재론 편에 서서 모순 되는 것들과 끝없이 논쟁하는 것이었다. 이 논쟁의 경우는 논쟁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입장에 대립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고, 나중에 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가 요구한 배타성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존재론이 너무나 논쟁의 여지없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존재론의 권한이 절정에 달해 있는 동안에 모순을 제거하고, 수수께끼를 푸는 길은 죽음의 편에 유리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아니면 그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은 상태 그대로, 귀찮게 남아 있는 이원론적 잔여물로서 남게 되었다. 이 두 경우는 모두 죽음의 우월성을 입증하고 있다. 새로운 존재론(유물론적 일원론)은 고대의 일원론과는 반대되는 일원론이다. 새로운 일원론과 함께 인류는 이원론(고대의 이원본)의 강물을 헤쳐나와 건너편 강변으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이원론(고대의 이원론)의 강물은 인류가 한때 영혼을 교설하던 고대의 일원론을 가지고 뛰어들었던 곳이었다. 45
새로운 일원론(유물론적 일원론)에 의해서 보편적인 생명은 추방당했으며 또한 어떤 초월적인 극 Pol도 더 이상 새로운 일원론을 보완해 주지 않았다. 새로운 일원론이 공공연하게 통용되자 이것의 형이상학적, 이제는 고향이 없는 이것임 Diesheit 속에서 특별하고 유한한 생명은 관찰되었고 또한 새로운 일원론의 척도에 따라 존엄성을 갖 추게 되었다. 특수하고 유한한 생명이 그렇게 오랫동안 다른 척도에 따라서 측정되어 온 이후에 말이다. 생명에게 유일하게 잔존하는 여기 Hier 그리고 지금 Jetzt의 사태는, 시작과 끝이라는 양쪽에 팽팽하게 걸려 있는 가운데 중요성을 획득하게 된다. 과거의 시각들, 즉 정령론적 일원론은 영혼의 보편적 현전을 믿었고, 고대의 이원론은 영혼이 저편에 있다고 믿었다. 이들 모두 생명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간과하였다. 이제는 생명에게 고유한 것과 생명에게 만 속하는 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왜냐하면 정령론적인 몽롱함과 고대의 이원론이 펼쳐져 있는 양극의 범위에서 후퇴하면서 새로운 유물론적 일원론은 자신의 시각을 좁혔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날카로워진 정도는 다름이 아니라 존재 가운데에서 생명이 차지하는 위치가 제한적인 지상의 주위세계 Umwelt 속에 있는 생명체라는 예외적 존재에 국한되어 있는 만큼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이 주위세계의 조건이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은 그 나름대로 생명에게는 생소한 세계 전체와 생명에 대하여 무관심한 물질적 법칙들로 미루어 볼 때 믿기지 않는 우연이다. 죽음의 존재론과 대결하여 각각의 개별적 생명들이 죽음과는 일정한 시간 동안만 다르다는 점을 내걸고 죽음으로부터 생명들을 어떻게든 구제해 내고 무리하게 확보할 수 있었던 뒷이야기, 즉 죽음의 존재론의 배후를 헤아릴 때, 우리는 비로소 현대의 생명이론을 이해할 수 있다. 46
우리가 여기서 약간 언급한 이원론이 걸어온 과정은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두 입장들의 시간적 질서를 시사해 준다. 이원론이 통용되었던 시대는 지금까지의 정신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이원론의 업적은 이원론이 극복된 뒤에도 계속 유효하다. 정신과 물질의 고유영역들을 발견한 것은 고대의 범생명력론을 붕괴시켰는데, 이 발견은 더 나아가 지속적으로 새로운 이론적 상황을 만들어 냈다. 물질이 정신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힘들게 관찰해 냈고, 비록 이 사실에서 관찰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정신도 물질 없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추론해 냈다. 존재론적인 주장의 타당성과 부당성을 떠나서 두 입장의 근본적인 차이가 이제 시야에 들어왔고, 이 차이가 이원론적으로 분리됨과 더불어,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섞일 수 없을 정도로, 저마다의 고유한 방식으로 가장 결정적인 과업을 이루어 냈다. 그 이후에 등장하는 존재에 대한 관찰은, 그 이 전의 것을 단순히 전기 이원론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그 내 적인 본질상 단순히 연대기적이고 후기 이원론적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기 이원론은 물질과 정신의 고유한 특성과 근본적인 측면들을 아직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미성숙하였기 때문에, 전기 이원론과 연관되어 있는 일원론 역시 물질과 정신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여길 정도로 미성숙하였다. 이처럼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보이는 상황을 방해하고 와해시킬 수 있었던 요소는 죽음의 경험과 나중에 발달하는 과학기술뿐이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각성된 후기 이원론이 나타나 앞서 언급한 일원론이 가지고 있던 미성숙은 물론 다른 모든 미성숙까지도 종식시켰다. 이제 후기 이원론적인 존재 관찰은 앞서간 이원론이 남겨 놓은 정신과 물질의 문제를 떠맡는다. 그리고 이 후기 이원론을 무너뜨리는 후기 이원론적 일원론 postdualistischer Monismus이 나타난다면, 이 후기 이원론적 일원론은 존재론적으로 정신과 물질 가운데 어느 한쪽만을 선호하면서 이론적 작업을 수행하는 형태를 취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후기 이원론이 남겨 놓은 형이상학적 유산이 정신과 물질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호하는 것을 인정해 주는 동안에는 그런 식으로 이론적 작업 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후기 이원론적인 일원론들(현 대적 유물론 neuzeitlicher Materialismus과 관념론 Idealismus-옮긴 이)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물질과 정신 가운데 자기가 선호하는 것을 향하여 우호적인 자세를 취한다. 다시 말해 이들 후기 이원론적 일원론들은 양자택일적이고 특수한 본성을 띠고, 자기가 배재한 어느 한 쪽을 불가능한 것으로 밀어붙였다. 47
지금까지의 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후기 이원론적인 상황에서는 하나가 아니라 두 유형의 일원론이 근본적으로 가능하다. 이들은 현대적 유물론과 관념론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 둘은 모두 근본적으로 후기 이원론적 본성을 갖고 있다. 이들은 이원론이 산출해 낸 존재론적 양극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들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양극 가운데 하나를 취하여 자신의 입장을 확보하고, 여기서부터 실재 전체를 설명해 낸다. 이들의 근원 속에는, 비록 이들이 의도 하지는 않았더라도 특수한 일원론들이 자리잡고 있다. 특수한 일원론들이 고대의 통합적 일원론 integraler Monismus과 다른 점은 후자의 경우에는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극이 분리되지 않은 채 서로 근거지어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고대의 통합적 일원론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원론은 임의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원론이 표출시키고 있는 이중성이야말로 존재 자체 속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의 새로운 통합적 일원론, 다시 말해서 철학적 일원론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양극성을 없는 것으로 할 수는 없고, 오히려 그 양극성을 극복하여 존재의 보다 높은 통합성의 차원으로 고양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 통합성의 차원에서 물질과 정신은 존재의 현실성이나 생성의 단계들의 두 측면으로 부각되어야 한다. 통합적 일원론은 애당초 이원론을 발생시켰던 문제들을 떠맡아야 한다. 48
4 이원론의 붕괴의 산물로서의 관념론과 유물론
문제는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실존 Existenz을 느끼는 생명이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 물질세계, 즉 죽음 속에서 생명을 제치고 승리를 거두는 그런 물질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이원론적인 해결이 이론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여겨질 경우에는, 각각의 특수한 일원론들은 즉 유물론과 관념론은 각자 제 나름대로의 단면적인 방식으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비켜간다. 이들이 투입시키는 수단, 즉 이들이 근거로 환원시키는 수단은 일차적인 실재성 Realität과 이차적인 실재성을 구별하는 것이다: 유물론의 경 우에는 실체와 기능(또는 <수반현상 Epiphänomen〉)이 각각 일차적 및 이차적 실재성이며, 관념론의 경우에는 의식과 현상이 각각 일차적 및 이차적 실재성이다. 존재론적인 입장, 다시 말하자면 진지한 일원론으로서 이 두 입장들은 제 나름대로 총체성을 요청하고, 그럼으로써 다른 입장을 배제한다. 그러나 이들의 출발점이 두 경우에 모두 통합적인 진리와의 관계에서 특수하기 때문에 이들은 저마다 특수한 일원론의 내적인 모순을 구현하고 있다. 이 모순은 하나의 요소를 다른 한 요소로 위축시킴으로써 비롯되는 실패작에서 드러난다. 유물론의 경우에는 의식을 설명하는 데 실패하고, 관념론의 경우에는 물자체 Ding an sich를 설명하는 대 실패한다. 49
물론 이 입장들은 그들의 일원론적, 즉 존재론적인 특성을 감출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존재에 대한 총체적인 통찰로서 자신을 표방하는 대신에, 두 조각으로 따로 분리된 현실을 작업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표방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들 입장들은 처음에는 일단 그들이 취급하는 서로 다른 대상을 통하여 구별되며, 이 대상 자체도 서로 다른 방법론을 요청하는 식으로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의식의 현상학과 연장성(延長性, Ausgedehntheit)의 물리학을 동원할 것이고, 각 이론의 방법론은 동일한 필연성에 의거해서 관념론적이거나 아니면 유물론적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존재를 보는 시각 때문에 그들이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 때문에 그들은 존재적으로 구별된다. 여기에서 이 둘의 관계는 양자택일의 관계가 아니라, 마치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처럼 상호보완 관계로 보인다. 즉 그리고 이 둘의 평화로운 공존은 사실상 둘로 분열된, 서로로부터 격리될 수 있는 현실의 영역들이 주제가 되고 있음을 전제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육체와 영혼이 통합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생명의 사태는, 생명체 속에서 그처럼 통합되어 있듯이,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는 작업을 허구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내면성과 외면성이 신체에서 동시에 출현함은 두 가지 인식방식으로 각각 분리되어 있는 대상들에 대한 관점과는 다른 관점에서 그들 인식방식의 관계를 규정할 것을 강요한다. 또한 여러 〈측면들>, 다시 말해서 어떻게 존재 자체 속에서 추상적인 요소들이 구체적으로 함께 관계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허용할 필요가 없는 측면들을 갖고 있는 동일한 대상을 보충적으로 기술하는 것과는 다른 관점에서 대상들을 규정할 것을 강요한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적인 중립성을 가능하게 해야만 하는 그런 기술적인 판단중지 deskriptive epoché는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에서만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제조건이란 이 두 현상영역들이 적어도 현상들을 통하여 그 자체 안에서 폐쇄되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내용을 통하여 초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각자가 홀로 그리고 다른 하나가 없이도 아무 손상 없이 묘사될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살아 있는 신체는, 그 생명체는 물질과 정신이라는 양쪽 방향으로 자기초월을 하며, 이 때문에 방법론적인 판단중지를 쓸모 없게 만든다. 신체는 연장되어 있으며 물리적 관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느끼고 의지하는 어떤 것으로 기술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한쪽이 또 다른 한쪽 영역으로 경
계선을 넘어서지 않으면 그리고 한쪽이 또 다른 한쪽을 미리 판단하지 않는다면 끝까지 어느 한쪽도 결코 기술될 수가 없다. 자유와 더불어 내면적인 것의 고유한 현실 영역으로 경계선을 넘어서지 않고는 물리적이고 외적인 것에 대한 기술은 종결될 수 없다. 연장되어 있는 것의 총체적인 자기법칙성과 자족의 영역으로 경계선을 넘어가지 않고는 생명력이 있는 내적인 것에 대한 기술도 종결될 수 없다. 이 연장되어 있는 것은 후기 이원론(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어 있는 실체의 이원론 - 옮긴이)에서 유래하는 것인데, 이 이원론은 생명이 없는 것과 느낌이 없는 것이 남겨졌을 때, 그것을 떠맡아 자신의 과업을 이룩했던 바로 그 이원론이다. 그러나 신체는 부인할 수 없이 연장되어 있는 것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신체는 보편적으로 연장되어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일 수 있다. 만약 이 경우라면 신체는 생명체와 생명으로서는 이해될 수 없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아니면 신체는 스스로 생성하는 존재자 ein Seiendes sui generis일 수 있다. 만약 이 경우라면 이 신체의 예외적 상태로서의 특성은 이해될 수 없고, 그리고 총체적인 규칙, 즉 무차별적으로 연장되어 있는 것의 순수한 속성을 포착하면서 실체 Substanz를 유물론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문제가 된다. 이와 동일한 상황이 또 다른 측면, 다시 말해서 관념론적 의식 쪽에서도 벌어진다. 이원론은 의식을 비물체적인 것 자체, 다시 말해서 연장되어 있지 않고 그리고 절대적으로 내면적인 것으로 뒤에 남겨 놓았다. 그러나 신체는, 이 연장되어 있는 것은 감각과 의지적 활동의 영역으로서 내면성 자체에 속한다. 그렇다면 신체는 현상되는 모든 연장성의 일부분으로서 의식의 외적인 <이념 (Ideen, cogitationes)>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만약 이 경우라면 신체는 정작 이 의식의 신체로서, 나의 신체로서, 연장되어 있는 나로서 그리고 연장되어 있는 것에 한몫을 차지하고 있는 나의 몫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된다. 아니면 생명과 내면성은 정말로 신체에 펼쳐져 있는 어떤 것이다. 신체는 정말로 <나>이다. 만약 이 경우라면 신체는, 비록 연장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의식 의 한 이념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인 공간성, 즉 세계 속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내적인 공간성의 외적 범위이다. 그와 함께 신체는 의식에 대한 관념론적 해석, 즉 연장되어 있는 세계 전체에 대립하는 대립물로서의 의식에 대한 관념론적인 해석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 한다. 51
그래서 생명체적인 물체 organischer Körper는 이미 알려진 모든 존재론 속에 잠복해 있는 위기들을, 그리고 <학문으로서 등장할 수 있 는 모든 미래의 존재론>의 기준을 시사하게 된다. 죽음의 사태에 직면하여 생명과 비생명의 대립성을 공공연하게 드러내 준 것이 처음에는 신체 Leib였고, 이 대립성이 가져다준 피할 수 없는 압박감이 원시적인 범생명력론을 엄습하여 이것의 존재에 대한 상(像)을 분열시 켰듯이, 이제는 정반대로 그[신체]의 생명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구체적인 통합성-두 실체에 대한 이원론은 이 통합성을 설명하지 못하였다-에서도 마찬가지 사태가 벌어질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동일한 둘의 통합성 Zwei-Einheit, 즉 이원론에서 갈라져 나가는 체계들이 어쩔 수 없이 총체적 존재론들 Total-Ontologien로 확장되어 가기 시작하면 그 체계들 모두에게 암초가 되어 버리는 둘의 통합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사태가 벌어진다. 이 이중적 통합성 Doppeleinheit 자체야말로 그 양자택일적 체계를 취하는 두 이론들을 총체적 존재론들로 둔갑시키고, 이와 더불어 경계선을 넘는 것을 필요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또한 두 이론들로 하여금 단순한 부분영역이나 부분측면의 겉으로 드러나는 중립성 속에서 피난처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장본인이다. 살아 있고 죽을 수 있는, 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도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귀속되어 있는, 느낄 수 있고 느끼는 물체(또는 신체 Körper)는, 그것의 외적인 형태가 생명체와 인과성이고 그것의 내적인 형태가 자기자신이고 목적성인 물체는 존재 론이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의 한 계기이다. 또한 느끼는 물체는 이후로 등장하는 모든 해결책들의 핵심이어야 한다. 이 해결책들은 특수한 추상화를 넘어서서 그들의 통합성 속에 감추어져 있는 근거들에 접근해 가야 한다. 즉 이 해결 책들은 양자택일의 피안에 서서 다른 쪽을 통합시키는 하나의 일원론을 더 높은 차원에서 만들어 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5 <의식>과 <외부세계> 사이에서의 생명의 소멸
그래서 생명의 문제는 존재론의 중심 문제이고, 유물론과 관념론 속에서 전개되는 존재론의 대립되는 현대적인 두 입장들에서도 이어지는 불안한 요소이다. 존재론의 문제가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로 부각된다는 사실이 후기 이원론적인 이론적 상황이다. 이러한 전환은 생명이 자연전체에서 자신의 특수함으로 위축된 결과로, 이런 위축은 아직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있을 때 이원론적인 최초의 여명이 밝아오면서 시작된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전환은 위축의 결과로 나타난 최종적인 산물이다. 생명의 외연을 존재 Sein의 외연과 동일하게 취급한 초기의 일원론이 엄청나게 경계선을 넘어선 것에 미루어 볼 때, 생명 없는 물질이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비판적인 구별이 시작되었고, 이후로는 생명 없는 것의 범위를 생명을 희생시킴으로써 확장시키는 형태로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생명 없는 것이 성공을 거두는 절정의 상황에서 생명 없는 것의 외연은 객관적인 존재 objektives Sein의 외연과 동일시되어 버리기까지 계속되었다. 후기 이원론적인 이론적 상황이 표출된 것으로서의 유물론은 확실히 관념론보다 더 흥미롭고 진지한 유형의 근대적 존재론이다. 왜냐하면 유물론은 자신의 대상 공간 Objektraum 속에 여타의 모든 물체는 물론 살아 있는 물체까지도 실제로 다루고 있으며, 또한 이 살아 있는 물체에게 자신의 원리들을 적용시킴으로써 유물론은 실질적으로 존재론적 실험을 감행하고 결국 실패를 맛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유물론이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유물론은 존재론적 문제를 터뜨려 놓는다. 관념론은 유물론을 비켜갈 수 있었다. 관념론은 언제나 순수한 의식의 관점에서, 이것이 아무리 인위적 인 것이라 할지라도, 신체를 마치 다른 모든 물체처럼 <외적 이념 äußere Idee> 또는 <현상 Phänomen〉으로서 자신의 대상의 지평 안에 수용하고 다루었으며, 결국 고유한 신체성 Eigenleiblichkeit을 부정하 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관념론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략해 버렸다. 바로 이것이 왜 우리가 처음에 유물론을 후기 이원론적 존재론(<죽음의 존재론〉)의 대변자이자, 범생명력론의 전기 이원론적인 존재론의 진짜 대립물로 일컫는 이유이다. 유물론은 르네상스 이래로 우리의 세계를 지배해 온 존재론이고, 이원론의 참된 유산, 다시 말해서 이원론의 잔유물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유물론과 논쟁을 해야만 생산적인 논쟁을 할 수 있는데, 관념론적 관점은 그런 생산적인 논쟁을 놓치고 있다. 54
또한 의식철학의 관념론 자체도 오직 보충현상, 즉 유물론의 부수적인 현상이며,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관념론도 죽음의 존재론의 한 얼굴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얼굴은 여기에서는 오로지 한 단면에서만 드러난다. 마치 유물론이 그렇게 하듯이 세계를 순수하게 pure 연장되어 있는 외면성으로 객관화시킬 때, 비로소 순수의식이 남는다. 순수의식은 연장되어 있는 세계에 한 부분으로 귀속되어 있지 않고, 그런 세계의 차원이나 기능에도 참여하고 있지 않다. 순수의식은 더 이상 활동하지 않으며, 단지 직관만 한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 비신체적인 단순히 직관만 하는 의식인데, 이 의식을 위해서 현실성 Wirklichkeit은 공간적으로는 옆으로 나열되어 있는 점들의 연속이 되고, 시간적으로는 전후 속에 있게 된다. 필연적으로 서로가 그렇게 외적일 수밖에 없는 연장성 Extensivität의 점들은, 마치 이 점 들이 의식에 대해서 외적이었듯이, 외적이기 때문에 오로지 외적인 진행과정의 질서규칙에 종속될 수 있다. 사실상 신체가 없다면, 우리 자신이 이 신체를 가지고 세계의 일부분이 되고, 힘의 본질과 발휘된 효과를 체험하는 그런 신체가 없다면, 우리의 세계에 대한 그저 <수용적>이고 직관적인 지식은 흄적인 유형으로 위축되고 말 것이다. 그 세계는 나에게서 세계로 넘어가는 현실적인 연결점이 없는, 바로 엄격한 의미에서의 외부세계에 불과할 것이다. 말하자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각각 외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또한 서로 아무 관련도 없는 내용들의 연속이 될 것이다. 이런 내용적인 연속의 경우와 관련지어 우리는 어떤 내적 연관성을 예견할 수 없음은 물론 더 나아가 어떤 내적 연관성을 가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최소한의 타당한 근거조차도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인과성은 여기서 일종의 심리적 토대, 즉 밑바닥이 제거되어 버린 그런 심리적 토대 위에 서 있는 허구가 될 것이다. 55
한편 현대물리학도 자신의 유물론적인 전제들로부터 이와 같은 불가지론적인 체념에 도달하였다. 현대물리학의 유물론적인 전제들은, 마치 의식의 이론이 절대적인 내면화의 길을 거쳐서 그랬듯이, 절대적인 외면화의 길을 거쳐서 마침내 인과성의 문제에 관한 한 동일한 회의주의적 입장에 도달하였다. 이 둘은 그런 점에서 다르지 않았고, 동일한 원인을 노출시키고 있다. 순수한 의식은, 이것과 대립해 있는 순수한 질료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순수한 의식은 마치 순수한 질료가 표상에게 생명성을 현전시킬 수 없듯이 생명성 Lebendigkeit을 일으키는 연관을 자신의 표상 속에서 생각해 낼 수가 없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바로 존재의 이원론적인 해부학이 도달하게 된 죽음의 존재론이 갈라지는 점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생명과 관련 해서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과성에 관련해서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피상적으로 보기에는 마치 역학적인 인과성의 영역에 진정한 승리가, 초월론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유물론적인 관점의 진정한 승리가 자리잡고 있기나 한 듯이 보인다. 이 승리를 위하여 생명체적인 목적론을 이해하거나 근거짓는 것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루도록 말이 다. 그러나 사태의 진상은 장기적으로는 통합되어 있는 전체의 어떤 한쪽 부분도 다른 한쪽 부분에서 잃어버리는 것을 결코 얻을 수 없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드디어는 보편적 인과성 역시 확실한 것들, 즉 생명을 제거한 다음에도 학문적인 인식의 형태로 얼마든지 구축 해 낼 수 있다고 믿은 그런 확실한 것들까지도 상실하고 마는 듯이 보인다. 한편으로는 관념론적 인식론의 영역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물론적 물리학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인과성 문제의 운명은 이 두 입 장들이 모두, 존재론적으로 보면, 이원론의 파편적인 잔여물임을 말해주는 증상이며, 더 나아가 각 입장들이 저마다 자신의 회의 속에서 고립되어 있는 결과를 승인해 주는, 말하자면 분열을 통해서 설명할 수 없게 된 그 설명 불가능성을 일관성 있게 승인해 주는 증상이다. 이원론을 상속받으면서 이를테면 두 얼굴을 가진 이 죽음의 존재론을 상속받으면서 <생명>을 제외시키는 가운데 사유하는 실체 res cogitans와 연장되어 있는 실체 res extensa를 인위적으로 격리시키는 사건은 둘 다 한꺼번에는 풀릴 수 없는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56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모순이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생명 없는 것과 생명 있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비로소 생명에게 고유한 것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작업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 작업은 우주 속에 있는 생명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을, 정신이 이른바 자기 쪽으로 끌어온 다음, 정신은 자신의 내면성 속에서, 즉 의식으로서의 내면성 속에서 집중함으로 말미암아, 정작 <정신>에게 유용한 일이 되어 주지 않았던가? 만약 질료가 죽은 것으로서 한쪽에 있다면, 정령론적 생명력의 유산으로서의 의식은 생명의 서류철이나 증류수이어야만 하지 않을까? 그러나 생명은 증류될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은 보잘것 없는 측면들 사이의 어딘가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추상화된 개념들 자체는 살지 않는다. 거듭해서 말하자면, 순수의식의 참모습은 이 의식에 대비되는 순수질료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지 않고, 그래서 죽지도 않는다. 마치 이미 떠나간 영(靈) Geister이 사는 것처럼, 순수의식은 산다. 그리고 순수의식은 세계를 이해하지 못 한다. 순수의식에게는 세계가 죽은 것이고, 또 반대로 세계에게는 순수의식이 죽은 것이다. 이원론적인 두 상반되는 입장들은 그들 각자 가 제 나름대로 집중함으로써 한쪽 측면에서라도 생명의 특성들을 더 가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중간으로부터 격리됨으로써 두 측면을 모두 말살시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런 말살은 복수를 하는데, 말하자면 물질의 운동들과 관련된 외적인 규칙성을 해석해 내는 데에서조차도, 우리가 생명의 수수께끼는 일단 제쳐놓는다고 해도 활성화하는 힘의 인과성을 해명할 수 있는 어떤 본래적인 타당한 근거를 더 이상 직접적으로 밝힐 수 없게 만듦으로써 복수를 한다. 57
6 신체를 존재론적 중심에 위치시킴과 인과성의 문제
여기서 우리는 흄의 회의주의적 입장에 대한 칸트의 대답을 기억 해 보자. 이 대답은 선험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도입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초월철학적 문제해결, 즉 인과성과 그것의 객관적 타당성을 여전히 순수의식에 의존해서만 정당화시키려는 초월철학적 문제해결도, 추상화된 것에서 구체성을 추론해 낼 수는 없다는 진리를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초월철학의 성과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원인성 Ursächlichkeit이 실제로 순수오성의 개념임을 근본적으 로 입증하고, 더 나아가 순수오성의 대상적 타당성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를 입증한 데 있다. 그런데 아직 검토되지 않은 사실이 있다. 순수오성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 즉 세
계와 관계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느끼는 힘의 유희 속에 있는 이 생명만이 힘의 표상과 인과성의 표상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검토하지 않은 것이다. 오성은 오직 근거 Grund와 결말 Folge만을 알 고 있을 뿐, 원인 Ursache과 결과 Wirkung는 모른다. 이것은 힘을 통한 실재성 Realität의 연관이지, 형식을 통한 이상성 Idealität의 연관이 아니다. 신체가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자신의 살아 있는 힘을 체험하는 것은 결과가 발생함과 원인성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추상해낼 수 있는 경험의 바탕이다. 그리고 오성의 형식성과 현실적인 것의 역동성에 의해 매개되고 있는 그런 중립적이고 수용적인 직관이 아니라, 무엇을 향하고 있는 신체적인 운동의 <도식 Schematismus> 이다. 인과성은 그래서 경험의 선험적 바탕이 아니라, 인과성 자체가 일종의 근본경험이다. 이 근본경험은 내가 활동하는 동안 세계질료의 저항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리고 세계와 충돌할 때 내쪽에서도 거기에 저항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총동원하여 애쓰는 노력 속에서 얻어 지는 것이다. 이것은 내 신체를 통하여 그리고 내 신체에서, 내 신체 의 외연적인 외면성과 내포적인 내면성에서 동시에 발생하며, 이 두 고유한 측면이야말로 나 자신이다. 그리고 나의 신체로부터 밖을 향해 나아가면서, 스스로 신체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면서, 나는 신체의 근본경험이 가져다주는 상(像) 속에서 세계에 대한, 힘과 저항, 행동과 수동적으로 물러나 있음, 원인과 결과의 세계에 대한 역동적인 상을 구축해 낸다. 이에 따르면, <인과성은 오성 속에 있는 경험의 형식적인 선험성이 아니라, 나의 고유한 신체적 근본경험으로부터 현실성 전체로 향해 있는 보편적 외삽(外插, Extrapolation)>이다. 인과성은 실제로 나의 살아 있는 초월의 점 Punkt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내면성이 능동적으로 밖으로 초월하고, 그 초월 결과들을 나의 밖에서 계속 활성화시키는 점들 속에 뿌리를 내리 고 있다. 초월의 점은 내포적이면서 외연적인 신체, 즉 내가 동시에 나 자신에게 내포적으로 그리고 세계 한가운데에서 외면적으로 존재 하게 하는 신체이다. 인과성은 일차적으로 실천적인 나와 그런 나의 활동의 산물이지, 이론적인 나와 그런 나의 직관의 산물은 아니다. 실천적인 나의 체험이지, 이론적인 나의 법칙이 아니다(제2장 1절 참조). 59
내 자신의 신체성에서 야기되는 이 보편적인 외삽(外編)이 합리적으로 정당화된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우리가 여기서는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열어 놓아야 할 철학적 비판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존재론적인 문제이지, 인식론적인 문제는 아니다. 여기에서 대두되고 있는,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인간동형론의 문제도 존재론에 속한다. 자연과 연관지어 구현되는 각종의 인간동형론나 동물동형론이 극단적인 형태, 즉 이들 이론들이 특별히 이원론적 그리고 후기 이원론적인 금지를 절대적으로 표방하면서 이렇게 극단적인 형태 로 나타날 때에는 선입견일 수 있다(제2장 2절 참조). 어쩌면 인간은 정말 만물의 척도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이성의 법칙 제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심리물리적인 총체성의 패러다임들 을 통해서 만물의 척도가 된다. 인간의 심리물리적인 총체성은 우리 에게 알려져 있는 구체적인 존재론적인 완전성의 최대치를 이룬다. 이 최대치로부터 존재의 계층들은 존재론적으로 밑으로 내려가서 마지막에는 단순한 기본질료라는 최소치까지 규정될 수 있는 것이지. 이 바닥에서 출발하여 위로 상승해 가는 방식으로 마침내 가장 완전한 것을 구축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본성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무능력 때문에 부딪히는 문제가 있다. 생명이 과연 질료의 질서 속에 있는 하나의 양적인 복잡화인가, 그리고 단지 우리가 복잡화를 가중시키면서 이들의 단순하고 정확한 피규정성을 피상적으로 제거한 결과 얻은 것이 과연 생명의 자유 또는 목적인가 하는 질문은 아직도 대답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아니면 거꾸로, <죽어 있는〉 질료를 우리는 감각작용을 하는 생명의 속성들 가운데 가장 저급한 양태로서, 배(조)의 상태의 가장 최소치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라는 부정적 방식으로 이해해야 되는가 하는 질문도 아직 대답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만약 이 경우라면, 그것의 규정성은 아직 깨어 있지 않고 잠자고 있는 자유일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존재론적으로 정당화시켜 주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살아 있는 신체가 구체적인 원래의 상(原象, Urbild)이고, 그리고 나의 신체인 한에서, 신체의 내면성과 외면성이 통합되어 있는 직접성 속에서 내가 경험하는 동안 유일하게 완전히 주어진 구체적인 것이 바로 나의 살아 있는 신체라는 사실이다. 실제적으로 신체의 구체적인 완전성 Vollständigkeit은, 우리가 오직 외적으로만 경험하는 공간 속의 질료가 하나의 내적 지평을 가질 수 있음을, 그리고 이 때문에 그처럼 질료로 연장되어 있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질료의 전체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유일하게 실제로 주어진 구체성에서 사태를 바라보면, 단순히 연장되어 있음도 단순한 내면성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추상의 산물 불과할 것이다. 60
그러나 현실성의 통합에 대한 이런 형이상적인 질문을 떠나서 그리고 여기서 추론될 수 있는 이론들을 떠나서,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우리의 신체성의 외삼(外插) 권리에 대한 질문을 떠나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존재한다. 신체가 없다면, 신체의 일차적인 자기경험이 없다면, 현실성의 전체에로 향하는 우리들의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외삽(外插)의 출발점이 없다면 우리는 세계 안에 있는 힘과 그 힘의 작용에 대한 표상을 가질 수 없을 것이며, 이와 더불어 모든 사물의 작용 연관에 대한 표상, 다시 말해서 자연의 개념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관념론 속에는 유물론이 충실하게 거울 속의 상처럼 반사되고 있는데, 관념론은 신체를 전적으로 외적인 대상이나 연장되어 있는 현상으로 간주하는 가운데, 다시 말해서 신체를 경험의 원천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으로, 주체 자체의 능동적이자 수동적 현실성이 아니라 주체를 위해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가운데, 관념론은 연속적인 과정의 외적인 질서의 규칙을 넘어서서 사물들의 실재적인 연관을 고유한 본성에 따라 포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놓쳐 버린다. 그 실재적인 연관이 역학적인 상의 형태를 취하든 혹은 목적론적인 인과성의 상의 형태를 취하든 말이다(여기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초월철학적 관점은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인과성을 말하든 간에 흄의 비판, 인과성이 결코 어떤 직관 속에 서도 드러나지 않고, 자료들 data 사이의 연결은 그 자체로 어떤 자료 Datum, 즉 직관의 내용이 아니라고 하는 비판은 옳았다. 힘은 <자료> 가 아니라 인간이 애써서 노력하는 상황에서 현전하는 <활동 Actum> 이다. 애써서 노력하는 것은 직관이 아니며, 종합의 형식은 더더욱 아니다. 사유를 객관화하는 작업은 직관에 의존하고, 그래서 사유는 자신 속에 내포되어 있지 않은 것을 만날 수가 없다.
7 요약
생명을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 그리고 현대의 인식이 현실성의 큰 부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마땅히 치뤄야 한다고 믿은 대가는, 세계마저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듯이 보인다. 목적론적 인과성을 역학적 인과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아무리 이것이 분석적인 기술에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자료들의 연결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볼 때 목적론적 인과성은 역학적 인과성만큼이나 수수께끼 같다.
우리는, 어떤 맥락에서 생명의 문제 그리고 이 문제와 함께 신체의 문제가 존재론의 중심에 (그리고 어느 한도까지는 인식론의 중심에도) 위치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생명은 물질적인 생명, 살아 있는 물체, 간단히 말하자면 생명체적 존재이다. 신체 속에서 존재의 배들은 보호받고 있다. 이원론은 이 배들을 모두 잘라놓았을 뿐 풀지를 못했다. 유물론과 관념론은 각자 자신의 끝에서부터 그 매듭을 없애려고 시도하지만 거기에 매어 있는 채 머문다. 생명의 문제를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주어진 총체적 존재론들 각각을 평가하기 위해서 생명의 문제를 결정적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생명의 고유한 문제를 다루는 데도 매번 존재론 전체를 끌어들인다 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체에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실현된 존재론의 유형들이 속한다. 이들이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서 더 교훈적이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과거의 존재론들이 제시하는 증거들 가운데 <정령론>, 다시 말해서 고대의 생명력론적인 일원론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전(前)개념적으로 존재를 해명한다 할지라도 정령론이 표방하는 존재해명의 원리는 현대적 인식의 입장에서도 진정으로 결말이 나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가 관찰한 바 에 따르면, 우리의 문제가 전개되는 데 가장 결정적인 단계는 이원론이며, 이 이원론은 그 밖에도 인간의 존재분석과 자기분석의 역사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이원론의 장기적인 지배에서 생명의 패러독스에 의해서 제기된 문제는 가장 분명한 두 대립적인 입장을 산출해 냈고, 이들은 서로 화해하지 못한 형태로 남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후기 이원론적 입장들, 즉 이원론의 유산을 향하여 일면성을 가지고 접근해 왔던 후기 이원론적 입장들 가운데 유물론은 생명의 문제와 정면으로 씨름하는 무대가 된다. 이 유물론은 관념론보다 더 결정적으로 생명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는 상황에 처 해진다. 유물론 속에서 사유자는 자기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을 바라 보게 된다. 그러나 그가 사유하는 동안 자기가 사유한 내용이 설 자리를 말살해 버리는 경우에 빠져들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관념론과 비교해 볼 때 질문의 한 측면을 잃어버릴 위험을 덜 안고 있다. 관념론은 사유에 우선성을 두기 때문에 애초부터 사유의 편을 든다.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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