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다윈주의의 철학적 측면
1 근대적 자연관에서의 근원의 문제
17세기에 모습을 갖추는, 기계론적 자연의 유형은 맨 처음에는, 생성의 문제에 대해 어떤 고정된 이론도 제시하지 않았던, 완성된 구조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것이 태양계이든 아니면 동물의 신체이든 상 관없이 말이다. 그것의 모습 그대로 발견된 바에 따르면, 그러한 각 각의 구조는 기능적 메커니즘으로서 이해되었다. 이 기능적 메커니즘을 분석함으로써 물질과 운동의 기본 구성요소에서 이 메커니즘의 실질적 기능함이 동일한 견본 Muster에 따라서 설명되어야 했다. 어떻게 이 기능적 메커니즘이 자연의 과거 역사 속에서 산출될 수 있 있을까 하는 문제는, 비록 모든 것을 통틀어 정리해 보는 사변의 대 상이 된 적은 많았으면서도, 아직 학문적 계획의 일부가 되지는 못하였다. 목적론적인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질문을 잠시나마 피해 가는 것은 근대 학문의 유년기를 보호해 주었다. 근대의 학자들은 약 100 년 동안 근원의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믿음을 투사시키지 않았다. 근대 학문이라는 아이로서 강건해졌을 당시만 해도, 18세기의 이신론은 비록 부족한 점이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새로운 학적 우주론을 위한 신학적 틀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범신론자들이 집착하고 있던 생기있고 자기 스스로를 창조하는 우주의 이념에 대항하여 이신론은 거대한 기계, 일단 작동하기 시작하면 자기 스스로 계속 작 동하는 그런 거대한 기계의 이념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 기계는 우선 제작된 다음에 작동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구히 작용하고 있는 창조자는 이제 이신론에 의하여 한 번도 활동한 적이 없는 제작자(<시계만드는 사람>)로 둔갑했다. 그리고 세계를 자신의 영원한 현전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부동의 동자(자기는 움직여지지 않았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는 자) 대신에 이제 다른 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최초의 동자(動者, Beweger)가 나타났다. 최초의 동자는 과거 언젠가 특정한 원동력 질량 Antriebsmenge을 세계에 분산시켰다. 운명의 괴 상한 아이러니를 거쳐서, 세계 밖에 존재하는 창조신과 <최초의> 명확히 규정된 행위로서의 창조에 대한 성서적 표상이 이제 이신론의 단계에 와서 이신론에 결핍되어 있는 것을 위한 바탕을 마련해 주계 된다. 괴테는 <밖에서만 침입해 오는 그 신은 도대체 누구였는가?> 하고 항의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완전히 제작된 기계의 이념은 학적 정신에게는 단지 순간적인 도움밖에는 되지 못했다. 최초의 사물들을 설명해 주는 것은 이제는 시간적으로도 최초의 것이어야 하고, 현재의 상태는 시간적 연속계열에서 가장 나중에 위치하는 것이 불가피 해졌다. 이 시간적 연속계열은 현재의 상태를 최초의 사물과도 연결 시켜 주게 되어 있다. 만약 이것이 절대적으로 원초적이고 primitiv 계획하지 않았던 질료와 운동의 사태들이라면 그리고 만약 현재 상태를 인도하는 연속계열이 그들로부터만 추론된다면, 창조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린다. 93
근원에 대한 질문은 자연에 대한 모든 포괄적인 문제에 대해 인간이 사변하기 시작한 그 무렵부터 이미 언제나 함축되어 있었는데, 기계론적 철학도 이에 관한 한 예외가 아니었다. 기계론적 철학의 원칙 들은 물리적으로 주어진 모든 것과 관련하여 탐구의 노선이 둘로 나누어진다. 그 가운데 두번째 노선은, 첫번째 노선이 무르익어 보호막 역할을 하던 이신론의 지붕으로부터 학문이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 었을 때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첫번째 노선은, 이미 언급했듯이 주어져 있는 물리적 체계를 분석하는 것, 다시 말해서 역학의 보편적인 원칙들로부터 관찰되는 관계 양상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두번째 노선은 선행하는 상태로부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질료가 아직 규정되어 있지 않은 원상태로부터 도대체 어떻게 그런 체계가 발생할 수 있는 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질료의 원상태는 역학 Mechanik의 보편적인 법칙들을 따르고, 또한 계획하는 정신이 개입함이 없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스스로 견고한 체계로, 단순히 인과과정의 필연적인 단계의 하나로서 둔갑해야 한다. 이 두 노선은 한편으로는 뉴턴의 생성하는 질서로서의 행성계 Planetensystem 이론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질서의 근원에 대한 칸트와 라플라스의 성운가설 Nebularhypothese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두 질문에 동일한 원칙들을 적용함으로써 나와야 하는 대답은, 다시 말해서 근원과 거기서 생성되는 현존재들이 단지 하나의 동일한 기체 Substrat의 선행하는 상태 또는 나중의 상태로서 구분되어야 함은, 현대 modern 물리학에서는 본질적인 것이다. 선행하는 현실성은 여기서 비롯되는 나중의 것들과 동일한 종류이다. 이들은 다만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무한한 시간적 연속선상에서 서로 다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모든 주어진 사태가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로 간주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가 생성해 낸 것으로서 그리고 과거의 산물인 미래의 상태를 생성해 내 는 것으로서 말이다. 보편적인 근원들과 그것을 뒤따르는 결과들 사이에서 승인되고 있는 유일한 질적인 차이는 (만약 선행하는 것들이 뒤따르는 것들보다 더 자신을 잘 설명해 준다면, 그래서 이들 선행하는 것들이 어떤 설명의 상대적인 출발점으로 사용되기에 적합하다면) 다음과 같다. 어떤 계획하는 지성이 사물의 시초에 부재하기 때문에, 근원들은 질료의 보다 단순하고 또한 우연한 조건을 따르는 확률적 상태이어야 한다. 이 유일한 차이와 함께 선행하는 시작들과 이를 뒤따르는 것들은 동일한 종류가 된다. 그리고 균형의 결합이 모든 변화의 역학을 제공하므로, 조직체가 도달한 각각의 상대는 상대적인 균형의 기준이 된다. 이 상대적인 균형도 선행하는 질량분포 Massenver teilung의 비견고성에 기인한다. 결국 초월하고 구성하는 형태의 창조 대신에 창조가 무한하게 진행되는 총체적인 연속계열이 등장한 것이 다. 이처럼 새로운 시각의 형이상학적 비밀은 존재를 과격하게 시간 적으로 파악하는 데 놓여 있거나, 아니면 존재를 작용 및 과정과 동일시하는 데 자리잡고 있다. 존재론적 틀 속에 있는 운동에게 부여되는 이 중심적인 위치는 과거의 사변이 산출한 실재를 가장 많이 함축 하는 존재 ens realissimum를 교체함으로써 이러한 변천을 시사해 준다. 이 새로운 의미의 <근원들> 속에서, 창조의 근원이 창조의 결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이념은 완전히 뒤집혀졌다. 과거에 사람들은 전적으로 원인 속에는 결과의 것보다 더 많은 힘뿐만 아니라 보다 더한 완전함도 함축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무엇을 산출하는 것은 이것으로부터 산출되는 것보다 더 많은 <실재성 Realität>을 내포하고 있어야만 한다. 또한 추론된 사물들이 누리고 있는 형상의 정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형상적 본질 Formwesen의 측면에서도 우월해야만 한다. 모든 특성에 있어서 원인은 여기서 산출되는 사물들보다 적어도 <똑같은 만큼>은 소유하고 있어야 하며, <그 보다 적게는 안 되는> 것이다. 96
근대적 neuzeitlich 사유가 도입한 발생적 연역의 방식은 고전적인 사유질서를 거꾸로 세워 버린다. 만약 기초적인 상황들이 그 자체 속에서 모든 다양성과 질서를 산출시킬 수만 있다면 그리고 후자가 전자의 역동성에 의거해서 설명될 수 있다면, 여기서는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원인이 결과에 종속된다. 말하자면 불변하게 고정되어 있는 질량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구조적 표출 Artikulation의 측면에서 말이다. 기능뿐만 아니라 생성의 측면에서도 이제 원초적인 것은 표출된 것 das Artikulierte을 위해, 견고하지 못한 것은 견고한 것을 위해, 무질서한 것은 질서를 위해, 생성됨 Werden은 존재를 위해 봉사 해야 한다.
2 현대적 근원 이념의 생명 영역에의 적용
2-1 기계론적 발생모형에 대한 생명형식들의 저항
모든 존재의 영역 가운데서도 살아 있는 것의 세계는 근원 Ursprung의 이념을 적용시키는 사건에서 가장 오랫동안 견뎌왔고, 19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진화론이 나타나서 생명을 보편적인 관찰의 틀 아래 종속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무엇이 그렇게 어려운 점이었는가? 데카르트에서 동물적인 육체는 기계(<자동기계, Automaten〉)였다. 이 기계는 특정하게 기능하도록 제작되어 있었다. 비록 이 기계 는 자동기계라서 그 기능 속에는 어떤 지성이나 목적을 가진 의도가 게임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런 식으로 기능을 미루어 볼 때 그것의 제작구조는 그 속성상 제작자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만약 새로운 가정에 의거한다면, 제작하는 과업 자체가 질료와 관련되면 생명체의 경우에는 웅장하고 단순한 우주적 구조의 경우와는 달리 이미 가정한 것을 증명하기 위한 학적 분석의 성과가 방해요인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이 제작물이 더 훌륭하게 제작된 것으로 증명될수록,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어떻게 그것의 생성을 계획된 의도가 아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 계획은, 실제로 인간이 제작한 기계보다 자연이 산출한 기계의 제작성이 정작 우월하게 드러나는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인간의 총명함을 훨 씬 뛰어넘어야 한다. 어떤 제작 계획이나 목적론적 조종장치가 없다면, 단순한 우연의 발생에 대립하는 확률성은, 원숭이에 대한 그 유명한 상상실험만큼이나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 상상실험은 원숭이가 망치로 타자기를 제멋대로 영원히 두드려서 세계문학을 완성한다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은 종(種)들이 변하지 않는 다는 것, 그와 더불어 각각의 종들이 각각 따로 발생한다는 것이 가정되는 동안에만 유효하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사실은, 생명체라는 이런 역학적 구조들의 경우에는, 좀더 지속적인 우주적 구조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발생하는 것을 우리가 각각의 개체의 예를 통해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서 개체발생은 구성요소들이 완전한 상(像) 으로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생성은 기계적인 모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왜냐하면 배(조, Keim)에서 고도로 조직된 개체로의 발생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모습 속에서는 마치 성장과 발전을 미리 결정해 놓은 계획이 실현되고 있기나 하듯이 직접 자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전 Entwicklung>의 이념, 종족번식 Fortpflanzung의 사태를 암시하는 발전의 이념은, 정작 그 발생적 범주를 생명의 영역에 적용하려고 시도하는 경우에는 방해요인이 된다. 발생적 범주는 기계론적 원칙에 의거 해서 현실성의 전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듯이 보였는데도 말이다. 실제로 <진화 Evolution>의 개념은 원래 개체발생 현상을 지시하는 것이었지, 종(種, Art)의 발생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와는 반대로,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발전(진화 Evolution)〉의 개념은 종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왜냐하면 종이야말로 직접 부모 개체 들에게 이미 결정되어 있는 계획을 전달하는 것이며, 이 계획은 자식 개체들이 생성되는 모든 구체적인 경우를 통하여 <발전해 나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발전하는 것은 모형 자체가 아니라, 배에서 성숙기로 향하는 모든 세대 속에서 그 모형이 새로이 구현되는 것이다. <진화 하는 것>은 이미 배(胚) 속에 <내포되어 있다>. 배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은 앞선 세대들로부터 유전된다. 인과관계의 측면에서 살펴 보면, 여기서의 생성자는 동일한 형상을 자신 속에 보유함으로써 후손들의 존재뿐만 아니라 형상(또는 형식, Form)도 함께 인도해 준다. 이런 인과유형은 원인과 결과의 기계론적 연결고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형상인 causa formalis의 활성화를 가장 강하게 표현해 주고 있으며, 여기에 덧붙여 작용인 causa efficiens, 또는 실체적 형상의 존재 Existenz까지도 표현해 준다. 이 두 측면은 자연을 설명하는 전체 체계에서 추방당한 것들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그런 것으로서의 발달 dévelopement의 개념은 역학에 맞은편에 서 있었고, 여전히 고전적인 존재론의 이러저러한 형상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근원에 대한 질문이 최종적으로 이제 영구히 자기 스스로를 반복하는 성장계획에까지 이르렀을 때, 일급 수준의 존재론적 과업이 착수되었다. 자연과학적 의미에서 본 이 과업의 성과는 근대적 사유가 가지고 있던 반플라톤적인 운동을 완결시키는 데 기여한 것이다. 자연과학적 우주에서 출현한 이 지구가 영원하지 않음을 전제하는 것은 여전히 (창조론과 다름없이) 개체발생의 연결고리상에서 최초의 대변인을 요청하기는 했지만, 기존에 존재하고 있는 종의 형식들 Artformen의 대변인일 필요는 없었다. 만약 이 종의 형식들이 생명과정에서의 초시간적 결정자들 Determinanten로서가 아니라 시간적 귀결로서 간주되어야 한다면 말이다. 원숭이를 예로 든 확률의 문제는 그렇다면 두 부분으로 갈라질 것이다. 한 부분은 최초의 형상들의 최초 발생 문제이고, 다른 한 부분은 그 최초의 형상들로부터 현존하는 것들이 출현하는 문제이다. 이처럼 문제가 두 부분으로 갈라 지는 사태 속에, 이를 통해 각각의 예에서 눈으로 관찰되는 엄청난 비확률성을 극복하는 가운데 성공의 비결은 내포되어 있었다.
2-2 현대의 발전이론을 통한 저항의 극복
현대적인 의미에서 <발전>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에게 감히 질료 자체만으로도 생명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생성을 언급하는 것이 이전보다 친숙하도록 해주었고, 이와 더불어 자연과학의 유물론적 일원론으로 하여금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딛도록 해주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시기는 개별적 생명체들의 성장과정을 지지하는 원래 의미의 <발전>을 포기했을 때였다. 미리 형성됨 Präformation이나 전개 Entfaltung 의 이념은 무계획적이고 목적지향적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진취적으로 연속된다는 사이비 역학적인 상(像)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연속의 시작은, 배와는 달리 최종결과나 또는 여기에 이르기 위해 연속되는 단계들을 예고해 주지 않는다. 만약 생명형식이 서로에게 이어지고, 비독립적으로가 아닌 형태로 개체가 서로에서 생성된다면, 최초의 충격을 야기시키는 일은, 다시 말해서 학문적으로 볼 때 최초의 생식을 의미하는 일은 생명의 최초의 출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최초 단계에서는 그 생명의 크기와 더불어 이론적인 부담이 비례적으로 조직 Organisation의 극소치, 즉 최초 단계에 해당한다고 추측되는 만큼 줄어든다. 비생명체적인 것 das Anorganische에서 생명체적인 것 das Organische으로 이행하는 첫걸음은 그처럼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후속 결과를 일으키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추측되는 바에 따르면 아주 사소한 것이어서, 우연적 결합의 확률의 부담을 과도하게 떠맡지 않는다. 이후에 계속 이어져 내려가는 번식은 최초의 것의 역동성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론 전체가 학적이 되도록, 후속 과정에 내재되어 있는 역동성은 목적론, 즉 미래의 보다 높은 형식을 지향하 기 위해 미리 형성되어 있는 요소나 경향성과는 무관하다. 그 역동성은, 어떤 의미로든 최초의 형식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어떤 형식인데도 불구하고, 문제의 보다 높은 형식들을 <진화(전개)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이 역동성의 개념에 달려 있다. 이 역동성의 개념은 한편으로는 인과적으로 만족할 만한 것이고, 다른 한편 으로는 원시적인 것이 발전될 것을 예고하는 비밀에 가득찬 내용을 갖고 있지 않다. 활성적 wirksam 인과성은 발전된 것이 산출되는 바를 원시적인 primitiv 것으로부터의 연속선상에서 설명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원시적인 것을 그 모습 그대로 분명하게 원시적으로 내버려 둔다. 그래서 주사위를 던질 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확률적 상황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일단 생명의 최초 그리고 가장 단순한 형식이 있으면, 여기서부터 주사위 통에서 주사위가 던져지는 일이 일어난다. 선택된 주사위들 및 주사위를 던지는 방식이 제한되어 있는 까닭에 우연의 놀이는 훨씬 줄어들었다. 그리고 지금의 <주사위 던짐>은 선행하는 던짐의 총합과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지금의 결과는 자신의 몫을 그 총합에 추가시키는 것이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일단 생명이 한 번 있게 되면, 이것은 진취적으로 다양성의 역학적 놀이를 위한 자신의 고유한 조건들을 결정한다. 그리고 확률성의 상(像)은 실제로 우리가 앞서 언급한 원숭이의 예보다 유리한 조건에 처해 있다. 원숭이는 매순간 새로 시작해야 하며, 또한 자신의 지금 행위가 이전의 성과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102
처음에는 불변하는 류(類, Gattung)들에 대한 이론을 옹호해 주는 강력한 이론처럼 보이던 유전 Vererbung은, 오히려 그 반대로 변화의 길을 통해서 류(類)가 유도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도구가 된다. 종족 보존의 형태로 이어져 내려가면서 돌연변이 Mutation의 결과 이미 보존되어 있는 것에 추가되고는 특정한 계보 속에 축적되며, 약간의 우연을 허용하면서 거대하고 복잡한 유전자형들 Genotypen로 발달해 간다. 유전과정에 돌연변이의 결과가 축적되는 것에 덧붙여서 자연선택 natürliche Auslese의 결과도, 발전의 방향을 결정하는 원칙으로서의 목적론이 제거되고 남은 공백을 채워주는 아주 훌륭한 예이다. 실제로 우연한 변형과 자연선택을 포함하고 있는 다윈의 진화론은 자연에서 목적론을 추방하는 작업을 완성시킨 이론이었다. <목적 Zweck>은 이제 생명의 역사에서조차도 불필요한 것이 되어 버린 채 전적으로 주체성의 영역으로 물러났다. 103
모든 포괄적인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진화론과 유전학 Genetik도 사실적인 지식들과 가설들 그리고 연역들이 모여서 이루어 진 복잡한 연결망이다. 현재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진화 론의 범주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속한다. 종(種)들은 변하고, 들은 조상들의 형질이 변화하는 연속선상에서 성장하며, 이들의 총체는 그들이 공유하는 조상에서 가지를 치고 뻗어 나가는 계보를 형성 한다. 이 계보에서는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보다 선행하고, 이것에서 저것으로의 이행은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마찬가지로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은, 돌연변이의 본질이나 원인이 아니라 돌연 변이의 출현이다. 자연선택은 경쟁사태 및 경쟁자들간의 차이라는 두 전제에서 논리적으로 연역된 것이다. 경쟁 및 경쟁자들의 차이는 그 나름대로 사태들이다. 돌연변이의 우연의 성격은 하나의 가설이다. 이를테면 흔히 빛과 같은 외적인 힘에 의해 일어나는 것은 실험실에서 경험하게 되는 사실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돌연변이를 대표한다거나 또는 모든 돌연변이에 내재되어 있는 역동성이라는 주장은 오컴의 면도날을 사용한 단순한 시도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종류의 다양성이 보다 복잡한 분류학적 질서를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다는 주장은 학적인 가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과도기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주장(또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방법론 상의 요청)이다. 만약 <가설>이라는 말이 적어도 사유의 차원에서 기능하는 모형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의미까지도 포함한다면 말이다. 이 모든 측면들은 철학적 논쟁의 여지가 있는 질문들을 던진다. 우리는 그러한 질문들 가운데 몇 가지를 이름을 거론해 가면서 다루고자 한다.
3 발전관을 통한 생명 개념의 혁명
인간의 기원에 관한 특별한 질문을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진화의 단순한 사실의 발견은 생명에 대한 보편적 개념에서는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다. 동물의 본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이론은 각각의 특정한 기계적 구조 - 생명체의 주어진 유형 - 를 견고한 출발점으로 삼았고, 동물의 생명을 마치 기계의 기능처럼 그 기계적 구조의 기능으로서 이해하였다. 여기서는 구조가 일방적으로 기능을 결정하고 동시에 설명해 준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이론은 그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살아 있는 존재와 관련하여 합리적으로 제기되는 모든 질문들에 대답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진화론은 그 주어진 구조유형 자체를, 특 정한 생명을 실현시킬 수 있는 조건 자체를, 생명이 산출해 내는 것으로 간주한다. 끊임없는 역동적 체계의 결과물이자 잠시 동안 머무는 장소로서 말이다. 이 역동적 체계도 그 자체로서 <생명>으로 일컬 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은 이미 자신의 단순한 수단의 상태, 즉 자신의 구조적인 장치의 상태에서도 이미 언제나 살 수 있는 능력 Lebenkönnen으로서 나타난다. 살 수 있는 능력은, 자신의 수단과 능력을 애초부터 미리 지니고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고유하게 성취하는 것으로서 적어도 자기가 만들어 낸 결과로서의 살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은 생명의 본성과 관련하여 발견될 수 있는 사실들 가운데 가장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발견은 현실로부터 불변하는 본질들 Essenzen을 제거하는 일을 완결 지었다. 이와 더불어 이 발견은 실재론에 대한, 실재론은 자연적인 종(種)들에 대한 표상 속에 자신의 마지막 요새를 구축하였는데 어쨌든 유명론의 최종적 승리를 시사하게 되었다. 현대적 정신의 반플라톤주의가 강력한 것으로 자처하고 있었을 때 이러한 일이 성취된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과업을 더욱이 철학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일류 수준의 업적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우리가 어떤 형태이건 모든 목적론적 목적 추구성의 결핍 상대를 감안한다면, 진화과정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전개과정으로 가득찬 모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무계획적이고, 그 종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생명의 모험성에대한 특이하게 현대적인 표상은, 불변하는 본질이 제거된 자리 곁에 있는 옆부분이며, 학적 진화론에서 야기된 중요한 철학적 성과이다.
3-1 종(種)의 생성과 플라톤주의의 종말
물리적인 연극무대의 전체 공간에서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역사에도 본질 대신에 조건들 Bedingungen이 창조의 원리로서 등장한다. <환경세계 Umwelt>의 모습을 취하면서 이 조건은 생명체의 개념에게는 필연적인 상관자가 되기 때문에, 생명체의 현존을 핵심적으로 유도하는 데에 개입한다. 환경세계의 구성적 기능은 라마르크주의나 다윈주의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생명체는 일차적으로 자기의 존재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간주되고, 생명은 자연의 자율적인 성취라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체와 환경세계가 이루는 상황으로 간주된다.
생명체와 환경세계는 더불어 한 체계를 형성하고, 이것이 이후로 생명의 기본개념을 결정한다. 이에 따르면 생명은 이 양극을 가진 채 계(생명체와 환경세계가 이루는 거시체계-옮긴이)에 속해 있으면서 도, 그 가운데 하나의 극을 중심으로 자기 나름대로 유발되어 또 하나의 체계(거시체계에 속하고 있는 독자적인 미시체계로서의 생명체-옮긴이)를 이루고 있는 태도이다. 그리고 생명체가 살아가는 고유한 방식들, 즉 각각의 주어진 종(種)에게 나타나는 태도의 상대적인 고착성 Festgestelltheit과 종적 특이성은 저마다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균형은 그 양극 사이에서 상황을 만들어 내는 요소들에 의해서 유지 된다. 이는 생명체적 구조 자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체적 구조의 각각의 태도뿐만 아니라, 생명체적 구조도 긴 시간에 걸쳐 펼쳐져 있는 류(類)의 상황 속에서 잠시 동안 유지되는 균형을 이루고 있다. 생명체적 구조는 유적 상황 속에서 이미 앞서 발생한 작용이 생명의 기체 Substrat에게 끼친 영향의 결과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환경 세계의 원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가운데 종의 비고정성 Unfixiertheit 은 우리로서는 감히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생명의 주체가 간직하고 있는 본래적이고 내재적인 결정성을 노출시킨다. 생물적인 상황의 무계획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그리고 환경세계가 생명체를 결정짓는 역할과 함께, 이 역할의 영향은 세대를 이어가면서 계속 축적되는데 어쨌든 창조된, 즉 그런 것으로서의 생명에게 고유하고 불변한 본질은 최소치로 위축되어 버린다. 그러는 동안에 전체 상황의 중요성은 이 전체 상황의 요구와 선택적인 기준과 함께 최대치로 증가해 나간다. 생명의 본래적인 본질성에 내맡겨진 그 최소치는 단순한 자기보존이다. 미립자 Partikel의 태도를 지배하는 관성의 법칙들과 유사하게 말이다. 상황에 내맡겨진 그 최대치는 생명에게 가해지는 모든 영향들의 총합이다. 이 영향들은 순전한 자기보존 Selbsterhaltung(우연한 적응력의 가변성을 매개로 하는)으로부터 상부구조와 중첩되는 태도의 영역을 유인해 내서 생명으로 하여금 어떤 형태이든 미리 짜낸 계획 따위와 상관없이, 즉 생명으로 하여금 자기자신을 그대로 모험에 내맡기게 만든다. 그리고 생명의 창조자일지라도, 만약 창조자가 있다 고 한다면, 앞으로 발생할 결과에 대해서 어떤 예측도 할 수 없도록 만든다. 아메바에게는 사유도, 척추도, 학문도, 마주댈 수 있는 엄지 손가락도 없다. 모든 것은 변화하는 생명상황 Vitalsituation의 거대한 과정 속에서 자기의 시간 - 정작 예측할 수 없는 - 을 차지하도록 내맡겨져 있다. 그러나 가변성 Variabilitat은 본질적으로 비견고성 Instabilitat이나 다름없다. 선행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실체적 형상>이 제거된 자리에서 비견고성은 자기자신을 산출한다. 108
3-2 본질 없는 인간
생명의 형상적 특성이 아무런 본래적 내용을 함축하지 않는 단순한 생명추진력으로 둔갑하는 지점으로 위축된다는 사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시간적으로 선행하면서 잠재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따위가 아닌 가능성을 야기시키는 상황의 지평이 무한히 열려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철학적 인간론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하지 않다. 실제로 19세기의 진화주의는 존재론의 영역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켰으며, 오늘날의 실존주의의 공인받지 못한 선구자(공식적으로 더 많이 인정받은 선구자들과 공동으로)이다. 실존주의는 <무 (無, Nichts)>와 만나는데, 이것은 인간의 이상적 <본성>으로의 귀환을 차단시키는 것, 말하자면 <본질>을 부정하는 데에서 유래한다. 인간의 이상적 본성은 한때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자면 이성(이성적 동 homo animal rationale)으로, 성서의 창조설에 따르자면 신의 상 Bild 으로 드러난다. 창조가 제거되면서 원본과 함께 <상(像)>도 사라진다. 그리고 이성은 다른 여러 가지 수단들, 즉 생존을 건 싸움 속에서 생명체가 도구적 차원에서 성취하는 능력으로 평가되는 수단들 가운 데 하나로 위축된다. 동물이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 가운데에서도 순수하게 형식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어떤 것으로서 이성은 목적을 산출하지 않고 목적에 봉사하게 된다. 이성은 자신이 척도가 아니라, 이성은 자신의 판결권 밖에 있는 다른 척도에 따라 자신을 조절해야 한다. 이 경우에는 만약 인간에게 <이성적인 삶>이 있다면(이성의 단순한 사용과는 달리), 다른 모든 목적들이 비이성적으로 선택되듯이 이 이성적인 삶도 오로지 비이성적으로만 선택될 수 있다. 그래서 이성은 자기자신의 선택에 대한 재판권조차도 갖지 못하고, 단순한 수단의 선택에 대한 재판권만 갖는다. 그러나 수단의 사용으로서의 이성의 사용은 어떤 목적에도 동화될 수 있다. 이처럼 이성의 사용은 비합리적이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존재 Sein>의 상실, 즉 생성의 강물을 초월하고 있는 존재의 상실이 함축하고 있는 허무주의를 의미한다. 니체의 허무주의자와 이를 극복하려는 그의 시도는 우리가 입증할 수 있을 정도로 다원주의의 출현과 연관되어 있다. 만약 인간의 본래적 본질이 진화과정의 과도기성과 변화무쌍함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선택의 여지는 힘에의 의지인 듯하다.
이것은 다원주의가 실존주의의 그 조상이라는 말은아니다. 다만 다원주의가 다른 모든 정신적 요소들과 조화를 이루며 함께 작용하는 가운데, 이 모든 요소들의 종합 속에서 실존주의가 논리적으로 자라 났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미 진화론이 현대 학문의 반플라톤적인 경향 속에서 불변하는 종들을 제거하면서 해낸 중추적인 역할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실재론을 물리치고 유명론이 무한히 성취한 승리 로부터 야기되는 지금까지의 귀결 가운데 실존주의는 가장 과격한 귀결이다.
4 인과적 필연성과 본질적 우연성
4-1 현대적 자연상에 있어서의 필연성과 우발성의 연결
우리가 진화론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과 관련시킬 때, 여기서 우리는 특별히 진화론이 과격한 우발성 Kontingenz과 자연적인 필연성의 연결을 이제 뚜렷이 생명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그 연결은 뉴턴-라플라스적 우주를 이 혁명의 결과로서 보편적으로 구축하였다. 필연성과 우연 Zufall의 연결은 모순처럼 보인다. 현대 자연과학의 틀 안에서 드러나는 우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측면은, 사물의 작용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인과법칙이 생성을 엄격하게 지배하는 것이었고, 이 지배는 각종의 우연을 자연에서 모두 배제시키는 듯이 보였다.
이 지배는 법칙 밖에 있는 우연들의 의미의 경우에도 같은 일을 하였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에서는 인과성의 현대적 틀은 정작 존재의 보편적인 우발성의 원칙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기에 존재하는 필연성은 다양성을 가진 환경에 처해 있는 각각의 개체에게는 외적인 것일 뿐, 생성의 자율적인 법칙으로서 이 개체의 내적 본성에서 비롯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필연성은 이 계획의 포괄적인 여건 속에 저 특수한 개체들과 이들의 운명이 통합되어 있는 그런 초월적인 계 외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필연성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부분들의 상호작용 속에 있는 총합의 필연성이다. 이 부분들은 각자 자신의 양(量, Quantität)을 기부하고, 또 제 나름대로는 자기 주위의 일정량들의 분배를 통하여 결정된다. 비록 모든 것이 이 인과법칙의 상호작용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형성체는 형이상학적으로 우발적이다. 어떤 것도 현실성의 특별한 목적을 충족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현실성 Wirklichkeit은 산술적으로 크기를 계산한 후에 나타나는 다른 어떤 결과를 제쳐놓고 하필이면 이 결과만을 내적으로 선호하는 따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총합의 유형으로서의 외적 필연성은 각각의 특별한 존재의 과격한 우발성에 상응하는 것이다. 만약 최초의 몇몇 조건들이 달랐다면, 태양계는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균형체계로서의 자연의 충만성이 그로 말미암아 고통받지 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필연성 더하기 우발성>을 여기에서 가장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체계의 경우, 원인들 Ursachen끼리의 충만한 만남은 있을지 라도 근거 Grund는 없다.
4-2 생명 영역에의 적용
진화론의 범주에 따르면 동일한 논리가 생명에게도 타당하게 적용된다. 필연성과 우발성의 연결은 우리가 언급한 모든 특징들에서 관찰될 수 있다.
(1) 문제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일찍이 신봉해 온 근원들Ursprunge의 우월성을 더 이상 신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완전성 Vollkommenheit이 자연 자세의 고유한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이른바 <더 높은 등급 구조>가 더 원시적인 구조에서, 즉 전적으로 원시적인 힘들의 작용으로 우연히 생겨날 수 있다. 만약 더 높은 단계를이 그보다 낮은 단계들의 역동성으로부터 생성되면, 단계로서의 이들의 속성은 비록 이들의 사태성Tatsächlichkeit은 필연적일지라도 전적으로 우발적이다. 생명이 자기를 이해하는 데 진화사적 기원 Abstam mung의 이념이 중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2) 또 다른 특징은 전통적으로 가정해 온 것으로서 이미 주어진 구조와 여기에 종속되어 있는 기능의 관계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며, 우리는 여기서 우발성의 특성에 부딪힌다. 생명체적 구조는, 이것은 비록 각각의 주어진 경우에 특정한 기능을 위한 조건이지만 어쨌든, 자기자신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선상에서 생명적 역동성 Vitaldynamik의 기능을 한다. 이 역 동성은 적어도 특정한 구조를 산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생명의 과업과 그런 과업의 진척에 개입하고 있다. (<그것은 ~을 해내 야 한다>는 은유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종(種), 즉 상대적으로 견고하고, 잠시 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구조는 생명의 역사가 만들어 낸 우연한 결과이다. 좋은 창조 속에서의 최종상태도 아니고, 종에게는 그 다음 단계로 이끌어 주는 어떤 이정표도 없다. 역동적인 유동성 Flux이 본질을 대신하여 등장하고, 그런 것으로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모든 것에게 과격한 우발성의 도장을 찍어준다.
(3) 환경세계 개념을 강조하는 경우에 우리는 세번째 특징을 발견하는데, 이것은 <필연성과 우발성>의 지배를 지시하고 있다. 우리는 위에서 진화론에서는 생명체적 구조의 모형이 제 나름대로 생명을 산출하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거기에서 산출되는 형식을 살아 있는 실체의 자율적인 성취로, 그리하여 산출되는 형식으로 말미암아 본래적 가능성들이 실현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언급한 바 있는 물리적 존재론에 상응하면서 설명하고자 하는 우리의 강조점은 진화 속에서 주도적 활동을 하는 것으로서의 외적 조건들을 겨냥하고 있다. 만약 <생명>의 개념이 생명체와 환경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포괄한다면, 우리는 <생명이 류(類)를 산출한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산출되는 유전적 형식 erbliche Formen이 조건들에 대한 <적응>이라는 주장까지도, 만약 이 적응이 제 나름대로의 성취를 함축하고 있다면, 다원적인 개념에 따라 생명의 담지자에게 지나칠 정도로 당연하게 적용된다. 적응은 오히려 역동적인 균형이다. 이 역동적인 균형은 생명체적 비견고성에서 아무런 선택의 여지없이 제공되는 우연의 가능성들과 환경세계의 조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균형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자기 속에 내재하는 속성들과 함께 이번에는 실체가 관계들의 복수적인 체계의 기능으로 밀려나는 현상을 보게 된다. 복수적인 체계의 기능은 물리적인 세계상을 보편적으로 특징짓고, 우리가 언급한 바 있는 필연성과 우발성의 연결로 귀착된다.
4-3 이탈과 선택: <병리학>으로서의 발전
진화적 상황의 두 요소로서의 생명체와 그의 환경세계 사이에 인과성이 분포되어 있는 것과 연관지어 우리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해야만 한다. 다원주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생명 체 쪽에서는 우연한 변형(또는 돌연변이)이 일어나고, 그리고 환경세계 쪽에서는 자연선택 natürliche Auslese이 발생한다. 가변성은 최종적으로는 자연 속의 어떤 것도 전적으로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선택 Auslese은 생명이 끊임없이 존재와 무 사이의 양자택일을 시도해 보도록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두 원인들 각각에게 인과적 몫은 무엇인가? 아무런 목적도 개 입하지 않은 선택의 메커니즘이 이론적으로는 목적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해야만 한다. 선택의 메커니즘은 자기에게 제공된 우연의 재료들 가운데에서 유리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역학적으로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특정한 방향으로 <발전>하기에 유리 한 그런 기준을 따르면서 선택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선택의 메커니즘이 탈락시킴 Ausscheidung의 형태로 <유리(有利)함을 취한다>는 점이다. 선택은 본질적으로 목적론의 부정적인 대체물이다. 선택은 형식들 Formen의 등장이 아니라 사라짐을 설명해 준다. 선택은 산출하지 않고 억압한다. 그러므로 선택은 적합한 재료를 선택한다는 조건 아래에서 방향을 결정짓는 원칙으로서만 목적론을 대체한다. 이것은 형식을 산출한다는 것이 전적으로 전형에서 벗어나는 임의적인 놀이에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전형에서 벗어남은 벗어남 자체로서 이미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일종의 불의의 〈사고들 Unfälle〉이며, 전적으로 외부에서 주어지는 기준에 따라 그렇게 전형에서 벗어나는 것이 과연 기형현상인지 아니면 좀더 개선된 현상인 지가 구별된다. 여과기에 걸러질 것이 강요된 채ㅡ이 이론은 그렇게 생각한다ㅡ우연적인 것은 구성적인 것으로 된다. 그리고 <이성의 간계>의 개입 없이도, 불의의 사고를 거쳐서 발달하고 우연을 거쳐서 상승하는 모순이 야기된다. 무한히 복잡하고 경이에 가득찬 생명체적 <기계들>과 이들의 상승하는 계열이 실제로 우리가 조금 전에 언급 한 그런 전제조건을 근거로 설명된다는 사실을 자연선택의 이론은 앞으로 보여줄 것이다.
사태의 진상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설이 함축하고 있는 바를 보여줄 수는 있다. 형식화 Formbarkeit는 여기서 비견고성이며, 우리에게는 비견고성이 창조의 세계를 기만한다는 수수께끼가 남는다. 왜냐하면 유전자 체계가 유전성의 중계자라면, 견고성 - 충실한 중계의 조건 - 은 그의 본질적인 미덕이다. 돌연변이는 이 견고성을 방해하는 것이며, 중계의 충실성을 망쳐 놓는다. 우리가 추측하건대, 이 방해작용은 외부의 영향에 (예를 들면 빛) 기인한다. 외부의 영향이 견고해지고 있는 유전자 체계의 보호막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고, 그 효과가 체계 자체의 관점에서 볼 때, 기계가 고장나는 것과 같은 상황을 야기시킬 때 말이다. 미래의 생명체의 통제체계상의 기계고장이 여기서 문제가 되기때문에, 이 기계고장은 우리가 본래적인 전형에 미루어 볼 때, 기형현상 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연히도 <유용> 기계고장이 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법칙으로부터 이탈하는 변칙이라는 점에서는 이 기계고장은 <병적>이다. 이와 유사한 기계고장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동일한 유전체계에 거듭 발생한다면, 그런 기형의 추적은 선택이라는 일차적인 체계에서는 근본적으로 새롭고 풍부해진 전형을 산출할 수 있다. 그러나 <풍부해진>은 여전히 본래의 단순합 에 붙어 번성한 무성합이며, 자연선택이 허용된 상황에서 끊임없이 반복하여 중첩되는 형식원칙 Formdisziplin의 침해이다. 이와 더불어 각각의 동물이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도로 발달된 조직은 거대하게 기괴한 것으로, 즉 원래 아메바가 장기적인 병의 역사 속에서 거기까지 이른 그런 기괴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편파적으로 들리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기술한 바는 바로 진화론이 제시하는 상(像)이다. 돌연변이가 (그리고 유전자 변화를 일으키는 여타의 어떤 것도) 변덕이 심한 사고에 불과하다면, 그리고 이 사고의 치명적인 속성 또는 유리한 속성(그리고 치명적인 것이 대체로 그 규칙이다)이 단지 자연선택의 제비뽑기의 결과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서 환경세계의 처방에 따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면(변화가 내적인 생명력을 건드리는 그 곳은 제외하고) 말이다. 오늘날의 유전의 개념상태를 반영해주는 이 모형에 따르면, 실제로 각각의 <더 높은> 형식은 병적인 놀이유형이며, 그 자체로서는 퇴화와 구별할 수 없는 <저급한> 형식들의 놀이유형이다. 그러나 이 놀이유형은 차별적인 생존가치(生存價值,Überlebenswert)를 가진 것으로 드러난다. 다윈주의의 극단적인 결말은 우리로 하여금 정말 기계론적 생물학이 생명의 현상을 적합 하게 이론화하고 있는지를 거칠게 질문하도록 만든다.
4-4 새로운 이원론: 배와 소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 봄으로써 문제를 좀더 분명하게 제기하고자 한다. 다윈주의와 오늘날의 이론의 합리적 핵심인 현대 유전학이 결합함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이원론의 유형이 등장하여 생명을 해석해 온 과거의 모든 이원론들을 물리친다. 이것은 언뜻 생명체와 환경세계의 이원론 - 이 둘은 오히려 상호작용하는 체계를 형성한다 - 처럼 보일런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고 배와 소마 Keim-Soma의 이원론이다. 이 이원론에서 소마(즉 활동하는 생명체 aktueller Organismus) 자체도 <환경세계>의 일부분이다. 말하자면 이 환경세계는 생식질(生殖質, Keimplasma)에게는 직접적인 환경세계이며, 소마는 더 광범위한 환경세계가 생식질의 존재에 미치는 영향들을 중계하는 중계자이다. 그런데 이 영향들에게는, 이들이 소마의 생명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유도되는 한, 오로지 종족보존(즉 배로서의 존속)을 지향하는 배를 허용하거나 아니면 불허하거나 해야하는 양자택일의 형태만이 주어져 있다. 또한 이 영향들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동안 환경세계와 끊임없이 투쟁하는 가운데 겪는 경험이나 성취의 반사 Reflex는 결코 포함하지 않는다. 획득된 형질이 유전되지 않음은 후자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이와 더불어 유물론의 영역 자체에 서 서로 교통할 수 없는 실체들을 둘러싸고 데카르트적 유형의 독특한 파로디가 생겨난다. 바이스만의 생식질의 연속성 이론은 이러한 생물학적 이원론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이론의 경우에 우리는 한편으로는 배의 역사의 맹목적인 자동운동을 본다. 배의 역사는 지하세계의 어둠 속에서 진행되며, 지상세계로부터 어떤 빛도 이곳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소마의 지상 세계를 본다. 소마는 생명의 범주 속에서 세계를 만나고, 자신의 운명의 길을 걷고, 자신의 싸움터에서 싸우고, 자신의 승리와 패배의 직인을 간직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어떤 숨겨져 있는 보호자를 위한 다른 결과들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보호자의 존속이나 탈락으로서의 결과들과 함께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배의 역사에서 변화하는 경우들은, 이들은 돌연변이들 및 연결들로 일어나는데, 소마의 역사에서 변화하는 경우들로부터 전적으로 독립되어 발생한다. 그리고 이때 빛 속에서 진행되는 생명의 전체 드라마로부터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 비록 이들이 [소마의 역사에서 변화하는 경우들이]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구현을 통해서 생명을 결정한다 하더라도 말 이다. 이런 식으로 사태를 보면, 거시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보는 단명한 개체는 영속하는 생식질이 잠시 동안 지속되는 연약한 어린 것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생식질이 계승과 함께 위쪽으로 상승하면서, 생식질에게 영양분을 주고 생식질을 보호할 수 있는 <환경세계> 를 제공해 주기 위해서 말이다(특정한 생식질을 담지하고 있는 단명한 개체는, 그 생식질로 하여금 문제의 개체 내부에 머물다가 다음 세대의 개체에게로 계승될 수 있도록, 그 생식질의 <환경세계>가 되어 준다. 여기서의 <환경세계>라는 용어는 단명한 개체의 몸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옮긴이). 일정한 기간에만 지속되는 담지자들(이들의 쾌락과 고통과 함께)의 모든 복잡성은 그들의 직무수행 기능을 수행하는 것 인데, 이런 일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플라톤적- 아리스토텔레스적 류(類)의 불멸성이 지속적인 존재 자체로서의 생식질의 불멸성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고전적인 공식을 뒤집어서 우리 는 이제 발전한 것이 발전하지 못한 것을 위해, 나무가 씨앗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5 발전이론 속에서의 유물론의 승리와 위기
다원주의 속에서 유물론이 자축(自祝)했던 승리는 어떤 측면에서는 자신의 굴복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다. 다윈주의의 형이상학적 의미는 그것이 시도한 바가 상대적으로 성공ㅡ자연과학이 그것을 성공이라고 평가해 주었음ㅡ을 거둔 데에 자리잡고 있다. 다원주의의 시도는 스스로 가지를 치고 뻗어 나가고 상승하는 생명형식들 Lebensformen 을 산출하면서 진행되는 물질적인 자연의 자동운동을 설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윈주의가 창조된 것과는 다른 창조적 원칙을 위해서 이런 식으로 이원론적인 필연성을 제거했을 때, 그렇게 지배적인 위치에 도달한 일원론은 홀로 남은 질료에게 막중한 과업을 맡겼다. 아무튼 이원론은 이런 과업으로부터 질료를 해방시켜 주었다. 그 과업이란 말하자면, 물리적인 조직화는 물론 더 나아가 <정신>의 근원까지 해명하는 과업이었다. 왜냐하면 정신적인 속성들은 돌연변이의 역학적 놀이 속에서 출현하는 <변덕이 심함>에 속하며, 이 생성이론은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과 육체 Körper의 관계에 대해서 현대 학문의 최초의 철학자들은 (비록 홉스와 가상디 Gassendi는 매우 중요한 예외이지만) 그들의 목적에 부합하는 이원론적인 공식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자연과학이 이 이원론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누린 이후에야 비로소 자연과학은 유물론적인 일원론에 대항하여 이원론을 보편적 진화론으로 교체하였다.
5-1 자연과학에 있어서의 이원론의 장단점
우리는 자연과학이 어떤 이유 때문에 그렇게 작업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우선 자신의 목적에 잘 봉사하는 존재론적 틀로서 이원론의 특정한 형식을 받아들이고, 그러고는 전체의 반쪽만을 가지고 학문적으로 다루고, 마지막에는 나머지 반쪽을 불필요한 것으로 제거하려는 이유에서였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데카르트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원론의 학적 장점은 간단히 말하자면, 자연과학적 지식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수학적 이상향을 가장 잘 그리고 유일하게 봉사한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두 영역은 분명하게 갈라져 있었으며, 비수학적 속성들로부터 정화된 순수하게 연장되어 있는 것(연장된 실체 res extensa)을 탐구하는 일은 자연과학에게 맡겨졌다. 현실 전체가 이처럼 자연과학이 원하는 바의 모습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갈릴레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차 성질들 sekundäre Qualitäten) (이 표현은 로크에게서 유래한다)의 단순한 주체에 대한 그의 이론은 바람직하지 않은 속성들을 물리적 현실로부터 쫓아내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주체들 자체는 현실 속의 객관적 요소들이며, 그리고 바람직하지 않은 속성들을 쫓아내는 작업은 이들을 쫓아낸 다음 모아놓을 장소 자체가 자연과학이 기술하기로 되어 있는 세계의 일부 분이었을 때까지는 불충분한 작업으로 남아 있었다. 이런 어려움으로 미루어 볼 때, 데카르트주의는 완전한 대답인 듯 보였다. 여기에서 한 종류의 실체는 그것의 본질적 속성이 연장인 실체이다. 이런 실체를 인식하는 방법은 본질적으로 측량하고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작업이다. 이런 실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완전히 독립적인 또 다른 종 류의 실체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의 본질적 속성이 의식(사유, cogitatio)인 실체다. 이런 실체를 인식하고 기술하기에 적합한 양태는 훨씬 불분명하게 주어졌고 또한 이에 대한 관심도 매우 미약했다.
문제는 이 실체를 다른 실체로부터 고립시킨 것이었다. 사유하는 실체를 고립시킨 일은 연장되어 있지 않고 측량될 수도 없는 것들로부터 외적인 실재를 완전히 존재론적으로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구별은 수학적 분석을 보편적으로 적용하기 좋도록 하나의 폐쇄되어 있는 영역으로서의 외적 실재를 구성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현대 자연과학에 필수불가결한 기계론적 유물론을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일도 해냈다. 배제되어 있으며, 연장되어 있지 않고 추정될 수 없는 사유의 속성들을, 연장되어 있는 속성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고유영역에 배치하는 형태로 데카르트가 정당화시키고 있으며, 결코 이들의 속성들을 부정하는 형태로 정당화시키지는 않았음을 우리는 강조해야 할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데카르트의 정당화는 이원론적이었지 일원론은 아니었으며, 그리고 나중에 유물론에 의하여 정신적 요소가 포기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자동적으로 그 효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유물론도 결국 혼자 내버려진 채 부조리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적 이원론도 함축하고 있었던 것으로서, 이미 너무나 잘 알려져 있던 이론적인 어려움은 정신의 요소를 포기하는 일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물체세계의 학문으로서 데카르 트적 이원론이 가지고 있는 강점, 말하자면 두 존재의 질서들 사이의 인과적 무관련성은,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였다(<상황주의>는 이것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 결과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양자택일의 두 방향으로 분산된다. 버클리의 관념론과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이 저마다 사유하는 실체의 일원론을 날카롭게 시도하는 동안에, 자연과학에게는 <물질> 쪽을 취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연과학도 이제 자신이 선택한 바를 단지 방법론적인 차원으로 인정하고 싶었고 또 여기에 대해 신앙고백도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자연과학의 대상들 가운데에는 유물론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의심할 수 밖에 없도록 강요하는 것들이 있었다. 이 대상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들, 즉 데카르트의 두 실체가 신비스럽게 만나고 있는 바로 그 교차 점이었다. 비록 데카르트도 단 한 가지 경우, 즉 인간 육체의 경우에 만 그런 <만남>을 인정했지만 말이다.
5-2 데카르트의 동물적 자동기계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가 구상한 동물적 육체에 대한 기계론적 이론의 극단적인 측면을 언급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그 이론을 단지 자신의 이원론의 보호 아래에서만 이끌고 갈 수 있었다. 비록 전적으 로 물질의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데에도 동물적 자동기계의 기능들(태도)은 인간적 관찰자의 눈에는 마치 인간의 내면성과 유사한 내면성을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이게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동물적 자동기계는 실제로 그런 내면성 같은 것을 지니고 있지 않다. 동물의 쾌락과 고통은 모두 인간을 속이는 현상이다. 즉 우리들이 그렇게 착각할 뿐이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이 그런 육체적 태도와 특정한 느낌 사이의 연결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이것을 동물의 경우에 적용시킨 나머지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우리는 동물의 태도를 관찰하면서, 동물이 느낌을 갖고 있다는 잘못된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 잘못된 주장은 동물의 경우에는 근거가 없다. 동물들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물체에 불과하다. 데카르트가 언급하고 있는 그러한 기교의 탁월함이 지닌 장점은 자연 속에서 내면성의 장소를 오직 인간의 경우로만 축소시킨 것이었다. 인간에게서도 그러한 기교의 탁월함이 수수께끼이기는 마찬가지있었지만, 인간은 다른 모든 보편적으로 타당한 다른 모든 규칙들의 예외었고, 살아 있는 자연의 나머지 부분들은 순수하게 기계론적인 분석에 내맡겨졌다. 기계론적 분석이 <물체 Korper>를 보편적으로 정신과의 관계로부터 단절시킨 후에, 그리고 정신이 현상을 설명해야 하는 모든 의무로부터 문제에 대한 학문을 해방시킨 뒤에, 데카르트와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주저함이 없이 생명체를 연장되어 있는 것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예들로 취급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정말 골칫거리인 형이상학적 문제 하나를 희생시킨 대가로 물질의 세계를 정신과 혼합되어 있는 상태로부터 정화시키는 작업이 옹호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정신 또는 내면성의 권리는 정신이 현상과 독립되어 있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에서 자신의 고유한 법칙의 제약을 받는 실체로 있는 가운데 여전히 보존되었다. 비록 정신의 영역이 인간의 의식의 영역으로 위축되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단호한 이원론은 단 한 번의 경우에만 모든 다른 경우의 유물론을 위하여 거리낌없는 양심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인간의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는 인간 이외의 전체 생물학의 영역의 존재들, 즉 형이상 학적으로는 무의미하더라도 어쨌든 수수께끼에서 해방된 존재들을 보장해 주었다(이 장의 부록 참조).
5-3 진화주의에 의한 데카르트적 존재론의 붕괴
아주 쉽게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사실은, 정작 일원론이 이원론과 타협함으로써 이룩할 수 있었던 과업의 성공은 그 과업 자체로 하여금 구원의 은총을 상실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원론이 그에게 한동안 마련해 줄 수 있던 그 구원의 은총을 말이다. 왜냐하면 일원론적인 과업이 이룩한 그 성공은 진화론이 목적한 바였으며, 바로 이 진화가 인간의 특별한 위상을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특별한 위상은 다른 모든 존재들을 데카르트적으로 취급할 수 있는 특별허가증을 발급하였다. 인간을 동물세계에 묶어 버린, 진화적 기원의 연속성은 인간 자신의 정신을 그리고 정신적인 현상 일반을, 존재론적 으로 생소한 원칙이 갑작스럽게 전체 생명의 흐름의 바로 이 지점에 침입한 것으로서 간주하는 것을 그 이후로는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원론의 요새 안에 있는 최후의 작은 보루와 함께 인간의 고립도 그 쪽으로 넘어 갔으며,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명증성 Evidenz은 인간이 속해 있는 곳을 해석하는 일에 다시금 쓰이게 되 있다. 왜냐하면 만약 인간 자신의 정신을 인간 이전의 생명의 역사에 대해 불연속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했다면, 동일한 논리에 따라 정신을 비례적인 정도에 따라서 더 가까운 또는 더 먼 조상의 형태라고 그리고 이와 더불어 동물성의 어떤 단계라고 판결하는 것도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순진한 오성의 명증성은 발달된 이론을 통하여 자신의 권리를 되찾게 되었다. 물론 저항이 있었음에도 그 이론 자체는 오성의 권리를 찾아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진화주의 Evolutionismus는 다른 형이상학적 비판들이 시도 한 것보다 더 과격하게 데카르트의 건축물을 파괴시켰다. 동물의 기원에 대한 이론이 인간의 형이상학적 존엄성에 대해 퍼분 욕설에 대해서 크게 격분하느라고, 우리가 미처 포착하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진화주의의 원칙에 따라 생명의 전체영역에게 생명 존엄성의 일부를 되돌려주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인간이 동물과 친척이라면, 그렇다면 동물도 인간과 친척이며, 더 나아가 동물도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처럼 내면성을 갖고 있는 존재일 것이다. 단 동물 류 가운데서 가장 진화되어 있는 인간은 자신의 내면성을 의식할 수 있는 존재이다. 기독교적인 초월적 신앙과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강요로 영혼이 위축되었던 사건 이후에, <영혼>의 영역은 자신의 속성인 느낌, 노력, 고통, 즐김과 함께 끊임없이 새로운 단계로 진출하는 원리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으로부터 생명의 전체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존재론적으로 요청한 질적 연속률(연속 성), 즉 <지각>의 흐릿함과 명확함의 정도에 따라 연속되는 위계질서를 허용하는 질적 연속률은 진화론을 통하여 생명의학적 계보학을 논리적으로 보충해 주게 되었다. 최상의 것은 최하의 것에서 출발하 여 모든 중간 단계들을 거쳐 도달될 수 있었다. 이 중간 단계들이 과도기적인 것이었든지 아니면 자신의 대변자 속에서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었던 간에 상관없이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 거대한 좌표의 어떤 지점에 우리는 좋은 근거에 의거하여 선을 그은 다음 내면성의 <0(零)>을 표시하여 우리로부터 멀어지는 쪽을 향하게 하고, 새로이 시작하는 〈1〉을 표시하여 우리 쪽을 향하게 만들 수 있을까? 생명의 시초와는 다른 지점에 내면성의 시초가 표시될 수 있을까? 만약 내면성의 개념이 생명의 개념과 동일한 연장을 갖고 있다면, 생명에 대한 순수하게 기계론적, 즉 외면성의 개념에 의존하는 해석은, 불충분한 해석일 것이다. 주관적인 현상들은 수량화될 수 없고, 더 나아가 외적인 <등가물들>에 의해 질서지어질 수 없다. 예를 들면 우리는 갈망함을 태도의 운동인으로 대체하여 물리적인 계기로 만들거나, 자기 보존 본능을 관성력으로 대체할 수 없으며, 그리고 여기에서 얻은 수치(數值)를 사용하여 갈망함이나 자기보존 본능을 측정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크고 작음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치명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느낌의 보편적 수준에 상용하면서) 어떤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는 그것이 드러나는 상이한 여러 경우들에 측정될 수 있는 양적(量的) 크기의 크고 작음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죽음의 공포가 표현되는 행위의 힘은 크고 작은 것으로 측정될 수는 있지만 말이다.
유물론이 큰 승리를 거두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한 사건이 터졌다. 그 승리의 원래 수단이었던 <진화>가 자신의 내적인 귀결에 따라 유물론의 경계선을 넘어서고 또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새로이 제기하 게 된 것이다. 이 존재론적인 질문은 정작 결판이 난 듯이 보이던 바로 그때에 말이다. 모든 현실을 주로 진화론적 박람회장으로 간주하는 데에 관한 한, 그 밖의 다른 어떤 이론들보다도 책임이 있는 진화론은 근본적으로 변증법적인 사건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진화론의 교설이 철학적으로 더 많이 동화될수록, 위의 사실은 점점 더 우리 시야에 잘 들어온다. 전해내려온 존재론을 번복했던 당시의 이론 들에서는 (그들이 지금까지 어떤 성공을 이룩했던 간에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생성 Werden으로서 존재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거의 공리처럼 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이들 이론들은 우주적 진화 현 상 속에서 자신들이 설 수 있는 하나의 가능한 입지점을 위한 열쇠 를 찾았는데, 이는 물론 낡은 양자택일의 피안에서였다.
부록: 생명이론에 있어서 데카르트주의의 의미
데카르트주의적 이원론은 생명의 본성에 대한 사변을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어 갔다. 역학의 원칙에 따르면 연장되어 있는 실체의 구조와 기능의 상응관계는 너무나 쉽게 통찰될 수 있는 것인 데 반해, 구 조 더하기 기능 그리고 여기에 느낌과 경험(사유하는 실체의 존재방식)까지 겹쳐지면 이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해명하는 문제는 난관에 부딪힌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생명의 사태 자체는, 생명의 육체적인 기능을 설명하는 일이 보장되는 듯이 보이는 그 순간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 막다른 골목은 상황주의에서 잘 드러났다. 외부세계와 내면세계를 외적으로 그리고 신적(神的)으로 <동시 진행>시키는 상황주의의 억압적 수단은 자신의 극단적인 인위성, 즉 그렇게 조립식으로 구성된 모든 이론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취약점 안에 갇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이론의 목적을 바로 자신이 내세운 기준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큰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왜냐하면 동물 기계는, 다른 기계와 마찬가지로, <어떻게〉라는 질문의 피안에다가 자기가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기능하는가 하는 질문을 제 나름대 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그렇게 제작해 준 제작자의 의도에 대한 질문을 말이다.” 이 기계의 작동과정이 아무리 각종 내재적 목 적론을 배제한다 할지라도, 그 작동과정은 하나의 목적에 봉사해야만 하고, 이 목적은 어떤 다른 존재가 부여한 목적이어야 한다. 데카르 트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그 목적은 (직접적으로는) 기계 자체일지도 모른다. 데카르트는 생명체적 자동기계의 기능함의 효과 는 자기보존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경우에는 기계가 그런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그 기계가 가지고 있는 기능의 목적일 것이다. 기계 자체 속에 있는 최종목적으로서 아니면 다른 최종목적에 봉사하기 위해서 말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그 기계는 단순한 기계 이상이다. 왜냐하면 단순한 기계는 자신의 존재함을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러나 그 기계가 연장되어 있는 실체의 엄격한 개념에 의해서 단순한 기계 이상의 것이면 안 되므로, 그 기계의 기능 내지 존재는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목적에 봉사해야 한다. 데카르트의 시대에는 자동기 계가 주로 오락에 (노동이 아니라) 봉사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는 신 스스로 아니면 하늘의 관객이 자신의 역학적 능력으로 만들어 놓은 작품을 가지고 즐긴다는 사실 속에서 생명세계의 존재이유 raison d'être를 포착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보다 빈약한 상황이었다. 기계는 단순히 조립적인 복합성으로서 새로운 속성도 산출해 내지 않고, 단 순한 기체 Substrat의 따분한 일면성에 아무것도 추가되는 것이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존재의 스펙트럼은 더 풍성해졌을 터인데 말이다. 왜냐하면 성질(속성, Qualität) 자체는(데 카르트는 그렇게 가르쳤다). 연장되어 있는 것 자체의 원초적인 결정 성을 넘어서는 것이며, 주체가 감성의 차원에서 산출한 것, 즉 양 Quantität이 불완전한 정신 속에서 혼란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 로 생명체는 단순한 기계라서 정신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성질을 자신의 부분으로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순수한 정신은 성질을 자신 의 일부분으로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정신은 감성을, 다시 말해 서 혼란해질 수 있는 우선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 어 정신은 쾌락의 가능성과 함께 착각할 우선권도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지적인 쾌락에 관한 한 지적인 쾌락 자신, 즉 동일한 이유로 인해서 발견의 긴장을 잃어버린 지적인 쾌락 자신도, 다음의 사실을 관찰한다면 저 순수한 정신을 희미하게 만들 것이다. 충분히 위대한 지성들이 몇몇 동일하고 기초적인 (그리고 결국은 보잘 것 없는) 진리 들을 항상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옛날부터 전래되어 온 스토아적이자 기독교적인 이 넘이 잔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이념의 내용은 식물과 동물이 인간 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생명세계의 존재는 이 생명세 계의 부분들 각각의 존재를 위한 필연적인 조건이기 때문에, 이 부분 들(즉 류 Gattungen) 가운데 어떤 유일한 부분 속에 내재해 있는 자
Sloizisittus의 경우에 인간은 이성을 소유함으로써 그 목적을 성취한 기 목적의 속성은 전체 존재를 정당화시켜 줄 것이다. 스토아주의 다. 이성을 소유한다는 사실은 인간을 지상적 존재들의 위계질서와 최상에 위치시킨다. 한편 지상적 존재들의 위계질서도 모든 등급들을 관통하는 자기목적(주 등급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모두 선한 목적들 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목적들 가운데에서도 최선으로서의 목적)을 지 닌다. 기독교의 경우, 인간은 불멸하는 영혼을 소유함으로써 그 목적 을 드러낸다. 불멸하는 영혼은 신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부여한 신의 유일한 형상이다(즉 전체의 중심을 이루는 유일한 것으로서의 목적), 그 리고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은 후자의 입장을 극단적으로 이끌어 갔다. 말하자면,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어떤 종류의 내면성이나 <영혼>이든 상관없이 인간이야말로 그런 것을 소유한 유일한 존재로 간주하였다. 이와 함께 데카르트는 인간이란 존재를 <목적>이라는 말이 의미 있 게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간주하였다. 왜냐하면 오직 인간만 이 목적들을 자신 앞에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물리 적 필연성의 산물인 다른 모든 생명은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 하였다.
인간 중심적인 오만으로 가득차 있었던 이 전통적인 이념은 그러 는 동안에 자신의 의미를 확보할 수 있는 바로 그 곳에서조차도 새 로운 이원론과 상황주의의 틀 안에서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른바 살아 있는 창조세계의 수익자(受益者), 즉 다른 모든 생명체적 메커니즘들을 이용하는 인간은 이제 자신도 정 신과 육체 Körper의 설명할 수 없는 외적인 결합물이 되어 버렸기 때 문이다. 즉 육체가 정신의 내면적 삶이나 현존에게 어떤 중요한 것이 못 되는 그런 결합물이 되어 버렸다(물론 역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그 래서 만약 생명체적 세계의 현존이 인간 육체의 현존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으로 입증된다고 하더라도, 이 인간 육체의 현존이 사유하는 나로서의 <인간)의 현존을 위하여 꼭 필요하다는 것은 입증될 수 없다.” 더 나아가 동물의 세계 내에서도 인간의 신체 Leib의 탁월합 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정신의 기관(器官, Organ)-이 탁월함 때 문에 데카르트는 송과선 이론(松果腺理論, Zirbeldrüsentheorie)이라는 부자연스러운 지적 왜곡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인데, 상황 주의적 허구는 이런 인간 신체의 탁월함까지 말살시켰다. 상황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는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자동기계에 불과하다. 이와 더불어 전체 생명세계의 존재는, 그것의 의미나 목적 뿐만 아니라 근원과 창조적 원칙까지도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마치 무엇 같은 Als-ob>의 거대한 연 극은 사물들의 태도에 관하여 우리가 실질적으로 던질 수 있는 <왜> 라는 질문을 침묵에 잠기게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우리들에게 다음의 사실을 알려준다. 이 이론의 가장 큰 약점과, 부조리성은 이 이론이 생명체적 현실의 주된 그리고 우리 눈에 직접 보이는 특징을 묵살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모든 개체가 현존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충족을 위해서 저마다 노력하는 속성이나, 또는 생명은 스스로 의욕한다는 사실을 묵살해 버렸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새로운 물리학의 개념체계에서 노력(애씀, Streben) 이라는 옛날의 개념을 추방해 버리는 사건과 새로운 의식 이론의 할 리주의적 유심론이 결탁함으로써, 생명의 영역이 사물의 전체 계획 속에서 차지할 수 있는 자리를 박탈해 버렸다. 이런 식의 사고 방식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동기들이 가지고 있는 설득력의 한 척도가 되 어 주었던 것은, 이런 사고 방식 자체가 갖고 있는 모든 인위적 요소 들을 동원해서 우리의 심리물리적 경험이 말해주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소리에 대항해서 자기주장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 리의 심리물리적 경험은 이원론적인 분열이 옳지 않다고 우리에게 의미심장하게도 말해준다.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은 어떻게 의지 작용 이 신체의 일부분을 움직일 수 있을까 하는 수수께끼를 만들어 냈다. 왜냐하면 신체의 일부분은 연장되어 있는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오직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론으로부터 의지 작용이 신체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배웠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의지에 따라> 두 팔을 움직인다는 것을 느낀다. 이 이론이 우리의 원초적인 확신의 타 당성에 위배하고 있던 동안에도, 이 이론은 우리의 원초적인 타당성 에 대해서 해명을 해주어야만 했다.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적 사변의 <강 제성>에 의존하여 해명하였다. 형이상학적 사변의 강제성은 평범한 오성으로 하여금 과거의 시대가 도전했고 또 도전한 만큼 성취해 낸 위대한 발견술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였다. 그 까닭은 그들의 걸작 품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였다. 형이상학적 사변의 강제 성은 자신이 옹호하였던 것의 웅장함에 의존해서 자신의 부분들이 설명되도록 만들었다.” <심리물리적 문제>는, 자연과학적 혁명을 위 해 치른 대가로 발생하였는데, 모든 자연과학적 노력의 배후에서 마 치 유령처럼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성과 직접적인 인식 사이의 괴리 가 지금처럼 큰 적은 없었다.
우리들의 실천적인 경험의 수수께끼 옆에는 동물의 세계를 펼쳐 보여주는 조직의 위계질서의 수수께끼가 놓여 있었다. 후자의 수수께 끼는 자신의 고유한 내면성을 즐기는 위계질서와 더 이상 연결될 수 없었다. 새로운 이론은 물리적 조직의 완전성을 이것에 의해서 가능해진 생명 성질과 연결시키는 수단을 찾는 데에 실패했다.
새로운 이론이 제공하는 유일한 수단은 조직과 관찰될 수 있는 태도 사이의 연결, 즉 생명체적 기능이었다.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원시적 인(즉 가장 단순한 구조에서 가장 기묘한(즉 가장 복잡한 구조에 이 르기까지의 계층적 위계질서가 보여주는 풍부함은 간과될 수 없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미 없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이성적인 영 혼 이외의 영혼의 종류[동물적 영혼과 식물적 영혼]는 인정되지 않 았기 때문에, 동물적 생명체가 보여주는 모든 역학적 완전성은 거대 한 환상이 되었다. 체험하는 생명이라는 더 높은 등급의 유형이 역학 적 능력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선호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외적인 구 조와 기능을 척도로 하는 완전성은 살아 있는 생명을 척도로 하는 모든 정당화를 비웃었다.
공공연한 사실은 두 수수께끼와 관련해서 그 이론은 그것을 단순 한 무관련성의 판단에도 내맡길 수 없었고, 신적인 결합의 끊임없는 기적을 알려주는 절망적인 정보에도 내맡길 수 없었던 사실이다. 데 카르트의 입장을 개선하고자 했던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거창한 시도들은 심리물리적인 문제의 두 측면에 대해서 독창적인 대답을 제시하였다. 그런데도 이 대답들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제시된 문제에 대한 해답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해답들은 문제를 다루는 동기와 문 제를 이분화시키는 일반적인 규정들에 있어서(칸트 이후까지의 모든 사상가들도 여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전히 데카르트를 답습하고 있 었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이 독창성과거에 한 번도 겪 어보지 못한 어려움에 대해 반박하면서 나타난, 전형적으로 허구적인 업적이다은, 우리로 하여금 그 사상가들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 하게 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의심하도록 만든다. 우 리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마치 곡예사가 손 을 등뒤에 묶고 재주를 부리는 것을 보고 우리가 놀라워하는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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