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원리』의 내용
『생명의 원리』라는 책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바를 한 마디로 요약 해서 말하자면, 생명의 원리는 <자유〉이다. 생명체는 물질과는 달리 이미 언제나 내면성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내면성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가지 생명의 특성을 포착해 낼 수 있다. 그 어느 특성들보다도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 주는 것이 <자유>의 원리이다. 한스 요나스가 언급하는 <자유>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보다 넓게 사용된다. <자유>는 정신과 의지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원시적이고 낮은 수준의 아메바 종류에서 시작하여 모든 생명체에서 활성화되고 있다.
제1장은 〈존재의 이론에 있어서의 생명과 신체의 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한스 요나스는 철학이 시작되기 이전의 존재에 대한 표상에서부터 철학사에 등장하는 여러 형태의 생명에 대한 입장들을 유형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존재를 사유하던 초기를 지배하던 사유의 유형으로서, 모든 것이 살아 있다고 보는 생명론적 일원론(정령론· 물질영혼론· 범영혼론· 범생명력론 등)과 죽어 있는 물질과 살아 있는 생명을 과격하게 분리하는 이원론의 고대적 및 근대적 형태 그리고 이원론의 장기적인 지배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물질과 생명의 패러독스, 생명에 대한 관념론 그리고 유물론의 근대적 및 현대적 형태 등의 특징과 한계를 소개한다.
제2장의 주제는 지각, 인과성 그리고 목적론이다. 한스 요나스는 선의식(주관)과 외부세계(객관)의 관계에 대한 수수께끼를 흄과 칸트의 인과론을 비판하면서 다루고 있다. 이 수수께끼를 각종 관념론이나 상황주의 Okkationalismus 그리고 심리물리적 병행주의 psycho- physischer Parallelismus는 제 나름대로 해명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들은 내면세계의 고립주의에 빠지거나, 흄과 같이 극단적 회의주의에 빠져 버리거나, 병행주의에 빠진다. 그러나 한스 요나스에 따르면, 의식에서 외부세계로 연결되는 인과성의 일차적인 측면은 규칙적 연결이나 필연적 연결이 아니라, 힘 Kraft과 작용 Einwirkung이며, 우리가 외부세계를 힘과 작용으로서 경험하는 원천은 감각지각이 아니라, 살려고 애쓰는 우리의 신체이다. 우리의 신체가 증거하는 명증성에서 출발하여, 동물적인 생명의 감각지각과 자유 등의 문제를 과감하게 탐구하는 것은 생명철학이 인간동형론을 범한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탐구해야 할 문제이다. 근대 자연과학의 기계론적 세계상은 연장되어 있는 외부세계의 현실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은 목적론과 최종원인에 대한 이론들을 추방하였다. 또한 인간 내면세계의 경험을 투사하여 외부세계를 설명하는 모든 이론들(각종 인간동형론 및 동물동형론)을 배제시켰다. 기계론적 세계상이 이들을 배제시킨 이유는, 기계론적 세계상이 <연장되어 있는> 물리적인 외부 세계의 사태를 양적 수학적 가치로 환산하고 기술한 결과, 이러한 사태 기술에 적합하지 않은 대상이나, 인식론적인 입장은 제거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식과 물리적 외부세계라는 두 질서 사이의 인과적 무관련성을 주장하려고 애쓰는 상황주의나 심리물리적 병행주의는 생명체의 내면과 외부세계를 어떻게든 연결시켜 보려는 절망적인 시도에 불과하였다.
제3장은 다원주의의 철학적 측면을 다룬다. 인간중심주의적인 스토아주의의 경우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을 소유한다는 이유 때문에, 존재의 위계질서에서 최상에 위치한다. 기독교의 경우는 인간만이 신의 형상을 닮은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지상의 생명존재들 가운데 최상의 존재이다. 데카르트의 이론도 인간중심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몸과 영혼의 이원론에 따르면, 비록 인간의 몸은 동물적 자동기계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사유하는 실체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순전히 연장되어 있는 물질에 불과한 그 밖의 모든 동물적 자동기계나 식물적 자동기계보다 우월한 존재이다.
데카르트주의는 인간의 몸이라는 자동기계와 동물이라는 자동기계가 보여주는 생명현상을 순전히 물리적인 사태, 즉 물리적인 자동기계의 부수현상으로 간주하며, 인간만이 영혼을 소유하고 있으며, 영혼은 물리적 생명기능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데카르트주의는 영혼은 인간에게조차도 생명의 원리가 아니라고 봄으로써, 영혼을 세 종류(인간의 이성적 영혼, 성장ㆍ 감성 운동의 능력이 있는 동물의 감성적 영혼, 물질대사를 하는 식물적 영혼)로 분류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무너뜨렸다. 데카르트주의는 우리의 일상적인 심리물리적 경험이 자명하게 증거하는 사태들을 묵살해 버렸으며, 생명체가 살려고 애쓰는 자기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묵살해 버렸으며, 우리의 의지작용이 신체의 일부분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만들어 버렸다.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 그리고 칸트 이후까지도 이런 데카르트주의를 수정하려는 일에 매달렸다.
19세기 중반에 출현한 다윈의 진화론은 데카르트주의를 무너뜨렸다. 다윈의 진화론은 생명체가 환경세계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겪게 되는 유전자의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으로 생명의 종의 변화와 진화를 설명한다. 고등동물이나 인간의 출현도 이런 메커니즘에 따르면, 최초로 단세포 생명체인 아메바가 기나긴 진화의 역사 속에서 겪어야 했던 일종의 병리학의 역사에 불과하다. 다원주의는 일종의 기계론적(즉 외면성에 의존하는) 생물학인데, 한스 요나스는 이 이론이 생명현상을 포괄적인 의미에서 잘 포착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다윈의 진화론은 돌연변이에 의한 우연한 종(種)의 변형 이론과 자연도태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자연으로부터 목적론을 추방하였으며, 종의 견고성에 대한 플라톤주의의 믿음을 무너뜨렸다. 과거의 생명이론이 신봉하던 생명이 가지고 있던 불변하는 형상적 특성이 진화론에 의해 아무런 내용을 함축하지 않는 생명의 추진력으로 둔갑해 버린 후 나타날 수 있었던 이론들은 바로 힘에의 의지를 주장하는 니체의 허무주의나 현대의 실존주의이다.
제4장은 조화 · 평형 · 생성의 개념들을 중심으로 고전적인 존재론과 근대 이후의 생명체계 이론을 다루고 있다. 이 장의 쟁점은 <체계 System>의 개념을 생명체에 적용시키는 문제이다. 고대의 존재론은 존재와 생성이라는 두 대립자들 가운데 존재를 좀더 조화로운 폐쇄된 체계로서 그리고 존재의 보다 완전한 현현을 <항상성>으로 이해 하였다. 근대의 생명이론에서 <균형(평형)>의 개념은 고대의 <조화> 의 개념을 대체하였다. 데카르트의 동물 자동기계 이론은 최초로 체계의 개념을 <살아 있는 물체>에 적용시킨 것이다. 생명체계는 행성계와 같은 물리적인 체계와는 다르다. 폰 베르탈란피 von Bertalanffy 의 개방체계이론이나 위너 N. Wiener의 인공지능학적 체계이론도 생명체에 대한 체계이론이다. 폰 베르탈란피는 개방체계이론에서 <유동 평형(유동적 평형 Fließgleichgewicht)>의 개념을 창안하였다. 인공지능학에서도 평형과 조절 Regulierung의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하며, 특히 〈피드백〉의 개념을 사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생명체의 경우에 <피드백 제어된> 행동은 오류를 교정하기 위하여 역전하는 기능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생명체의 목적론적 행동의 특유한 징표이다. 그리고 생명체계가 보여주는 기능은 유동평형을 생산하고 재생해 낸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체계이론은 불변하는 <존재>의 개념보다는 <생성>의 개념을, 폐쇄되어 있는 <예정조화>의 개념보다는 <자생적 평형 Gleichgewicht〉과 〈조절 Regulierung〉의 개념을, <안정성>의 개념보다는 <유동성>의 개념을, 존재의 불변하는 견고한 <구조>의 개념보다는 진화하고 있는 <과정>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생명을 새로운 지평에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한스 요나스는 체계의 개념을 생명체에게 적용시킬 경우의 적합성과 그 한계를 우리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음을 시사하기 위하여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제5장은 오랜 역사를 가진 <신은 수학자이다>라는 명제를 검토하고, 이 명제에 위반되는 것으로서 <물질대사>를 하는 생명체의 특성을 대비시킨다. <우주를 창조한 신은 수학자이다>라는 명제의 의미 속에는 이 명제를 만들어 낸 특정한 시대가 <우주> <우주의 창조> <수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표상이 함축되어 있다. 한스 요나스는 이러한 개념들을 중심으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수학적 본질을 믿었으며 또한 이러한 본질의 근거로 우주의 조화를 믿은 피타고라스, 수학적인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를 말한 플라톤, 수학적인 조립 가능성을 창조하는 라이프니츠의 신, 행성의 운동법칙에서 신적 기하학을 포착한 케플러, 자연은 수학의 언어로 씌인 책이라고 말한 갈릴레이 및 현대의 제임스 진스 경) 그러한 명제를 산출해 낸 시대들이 안고 있던 자연의 수학화. 고전적인 창조론과 유대적-기독교적 창조론, 그리고 정신과 물질(정신이 없는 자연)의 이원론을 정리하면서, <수학자로서의 신>의 다양한 의미를 추적해 본다. 그 다음 단계로서, 한스 요나스는 <우주를 창조한 신은 수학자이다>라는 명제가 과연 참인지 아닌지를 검토하기 위해서, 창조의 증거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주목한다. 그리고 그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이 명제에대해 보여주는 반증들을 생명체의 살아 있는 몸· 물질대사, 생명체가 보여주는 변증법적인 자유·초월·내면성·자기자신성 Selbstheit. 생명체가 자유와 필연성의 양극에 걸쳐 있는 사태. 생물학적 시간과 공간, 목적성 Zweckhaftigkeit 등에서 찾아내 제시한다. 결국 이러한 반증들을 제시함으로써, 한스 요나스는 물질대사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생명과정과 생명체 자체를 수학적 역학적 개념들에 의해 포착하려는 자연과학적·자연주의적인 분석의 부적절함에 대해 경종을 울 린다. <신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오로지 수학자인가?>에 대한 답은 한 마디로 <아니다>이다.
제5장 부록 1은 다음을 주제화하고 있다. <자연을 수학에 적용한다> 는 말은 <자연현상에 수학적 특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학적 특성을 자연의 구조들과 연결시키느냐 아니면 역동성과 관계시키느냐, 자연의 질서형식과 관계시키느냐 아니면 질서형식을 드러내 보여주는 변화의 연속과정에 관계시키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 닐 수 있다. 그리스 자연철학에서의 자연의 수학화는 첫번째 경우이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자율적인 전체성의 형태적 구조에 집착하였고, 이를 모범으로 천문학을 전개하는 형태학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최상의 전체인 <코스모스>는 자신의 총체적인 <형식>을 통하여 최상의 <충만성>과 <자족성>을 보여주며, 이 전체의 다양한 부분들 자신은 비록 등급이 낮기는 하더라도 그러한 전체로서의 코스모스를 모방한다.
제6장은 식물적 생명과 비교하는 가운데, 동물적 생명의 기본 특성을 기술한다. 식물적 생명으로부터 동물적 생명은 세 가지 특성, 즉 운동과 지각과 감정의 능력을 통해서 구별된다. 이리저리 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능력과 먼 곳의 사물을 지각할 수 있는 지각능력은 동물적 생명에게 <공간>을 열어준다.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진 동물적 생명은 이 본능에서 나오는 욕구들이 발동되는 시점에서 이것이 충족되는 시점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감정의 능력은 동물적 생명이 자신(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자신)과 자신의 대상(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간격>의 원리에 의해 발달한다. 한스 요나스는 동물적 생명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기본능력들이 상호작용하는 것과, 특히 운동과 감정 사이의 연결(이를테면 목표물을 추적하는 동물이 가지고 있는 탐욕의 감정, 도주하는 동물이 가 지고 있는 불안의 감정 등)을 기술하면서, 이것이 생명이론의 차원에서 의미하는 바를 포착하고자 한다. 동물적 물질대사의 경우,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생명으로부터 영양분을 취하는 동물은 환경세계 속에서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요소들을 차단하고, 더 나은 노획물을 위해서 환경세계를 더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이러한 필연성은 운동성·지각 감정 등 여타의 능력들이 투입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이들 능력들간의 상호적인 발달을 촉진시킨다. 그러므로 동물적 생명의 진화 과정에서 욕망의 강도,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능력도 진화한다. 동물적 생명은 본질적으로 열정적이고 생존의 어려움을 안고 있는 존재이며, 자신의 사멸성의 한계 안에서 모험으로 내던져져 있는 존재이다. 원거리 지각 및 넓은 운동반경. 욕구와 불안, 욕구충족과 실망, 쾌락과 고통의 예민함에서 엿보이는 동물적 생명이라는 주관과 환경세계(및 그 안에 있는 대상들)라는 객관 사이의 <간격> 속에 그리고 이들 양극 사이의 관계방식 속에 동물적 생명의 자유와 개체성이 들어설 틈이 있다.
제7장은 목적과 목적론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인공지능학을 비판한다. 인공지능학이 기계의 자동조절 메커니즘을 기계론적 역학적 모형과 개념에 의존해서 설명한 공헌은 인정할 수는 있지만, 정신적 현상(고통과 기쁨, 성공과 실패, 성취와 좌절 등)이나, 인간적인 태도, 인간의 사유과정 및 사회문화적 생명의 영역에까지 월권해 들어와서 이들에게 기계론적 역학적 모형과 개념을 적용시키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인공지능학이 사용하는 목적적인 행위. 목적 Zweck, 목표 Ziel · 정보 · 기억· 결단 인식·주도권·가치·사유 등의 개념들은 피상적이거나,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다. 어뢰정과 같이 언뜻 보기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작동하는 듯이 보이는 기계의 부분들, 즉 작용 기관·수용기관· 연결기관·제어기관 등의 부분들은, 사실 역학적인 필연성과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서 움직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작동을 인공지능학자들이 하는 것처럼 <목적적인> 행위라고 부르기보다는, 오히려 <맹목적 blind>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또한 이 들 모든 기관들의 총합, 즉 <전체 메커니즘>으로서의 어뢰정이라는 것도 사실상 우리가 <자기자신>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주체〉이자 어떤 〈목적)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바와 같이 <의지)와 <관심〉과 〈성향)을 가진 <주체>(이를테면 어뢰정의 조종사)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주체는 아니다. 목적적인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목적이 개입해야 하는데, 인공지능학은 목적적인 행위를 목적을 개입시키지 않고 설명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마치 기계론적 유물론적 생물학이 생명체의 생명과정을 <생명〉의 개입 없이 설명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듯이 말이다.
서로 상호작용하는 동물 몸의 감지기관과 작용기관도 언뜻 보기에는 인공지능학적 피드백 모형과 유사한 역학적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둘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동물적 생명은 욕구를 가진 존재이고, 이 욕구는 생명체의 기본적인 충동에서 솟아난다는 사실이다. 모든 종류의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자기를 보존하려는 본능이 있다. 이러한 본능이 동물에게는 배고픔의 고통, 먹이를 잡으려는 열정. 싸움하는 순간의 분노, 도망칠 때의 공포, 사랑 등의 감정으로 표출 된다. 이러한 감정들과 동물의 감지기관 및 운동기관은 상호연결되어 그 동물의 행동을 목적추구적 zielgerichtet으로 만든다. 기계는 감정의 요소를 결여하고 있으며, 동물이 보여주는 바과 같은 목적지향성도 결여하고 있고, 또한 살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기계는 멈출 수 있으나, 죽지 않는 한 생명체는 사는 것을 멈출 수 없다. 학문의 특성상 인공지능학은 이런 요소들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다.
제8장에서 한스 요나스는 구체적으로 지각의 현상학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시각(視覺)이라는 감각이 다른 나머지 감각들보다 특이한 점을 한스 요나스는 모상화(模像化)하는 능력(Bild-leistung, 상을 만 들어 낼 수 있는 능력)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모상은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1) 잡다한 것을 현현시키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동시성 Simultanität, (2) 감각-촉발 Sinnes-Affektion의 인과성의 중립화Neutralisierung (3) 공간적이고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간격 Distanz 이 그것이다. 이러한 특성들이야말로 인간만이 성취해 낼 수 있는 고차적인 정신적 능력을 가능하게 해주는 바탕이다.
시각은 신체의 한 부분이면서, 신체의 운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공간 속에서 세계를 정의된 사유틀에 따라 깊이 있게 질서지어진 것으로서, 또한 우리의 위치로부터 멀리 펼쳐져 있는 어떤 것으로서 볼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운동할 수 있으며, 또한 이전에도 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가만히 있는 경우에도 지속적으로 세계와 물리적인 상호작용을 한다. 몸이 가지고 있는 비시각적인 느낌들이 우리의 눈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운동을 통해 얻은 경험들이 우리에게 축적되어 있지 않다면, 눈의 능력 자체만으로는 공간인식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운동적인 활동성의 자기지각 kinästhetische Selbstwahrnehmung은 운동능력이 있는 생명체에게 운동과정에서 변화하는 공간적인 간격과 시간적인 연속 계열의 구성을 잘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의 눈이 외부의 자극을 순전히 기록하는 것 이상의 어떤 일을 해낸다면, 즉 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각감지 Sinnesempfindung가 시각으로 고양되기 위해서는 운동성이 개입해야만 한다.
제9장에서 한스 요나스는 동물과 인간을 구별해 주는 증거이자 인간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 모상화하는 인간의 능력이라고 보고, 모상(模像)의 특성을 중심으로 인간의 본질을 정당화시키고자 한다. 도대체 무엇이 모상이며, 모상화하는 과정에 어떤 능력과 태도가 투입되는 것일까? 동물들은 생물학적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아무 쓸모 없는 모상 따위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모상을 만들어 내는 존재는 쓸모 없는 것을 만드는 데에 몰두하는 존재이거나, 아니면 생물학적 목적 이외의 목적들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거나, 아니면 도구적으로 사물을 사용하는 방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물학적 목적 이외의 목적들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이다. 한스 요나스는 모상의 속성을 원래 사물과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고, 이 속성을 우리가 <현상학적 모상이론>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게 기술하고 있다. 모상의 속성이 원래 사물에 대한 유사성을 전제로 한다면, 그런 모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는 어떤 능력을 갖고 있을까? 그 능력은 유사성을 개념적인 방식으로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말하자면, 원래 대상을 물리적으로 완전하게 모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대상의 형상 Eidos을 파악하고, 그 형상을 그 대상의 물리적인 측면으로부터 구별해 낼 줄 아는 능력이다. 왜냐하면 모상을 그리는 것은 감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상 속에서 이 대상의 내적인 모상(즉 형상)을 포착하고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들을 재창조(여기에서는 모상화)할 줄 아는 존재는, 곧 새로운 사물들을 창조할 줄 아는 존재이기도 하다. 유사성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은 자유의 능력과도 직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결국 한스 요나스가 이끌어 내는 결론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서 동물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능력은 상상의 형상적 통제 eidetische Kontrolle와 운동성의 형상적 통제 능력이다. 상상의 형상적 통제는 내적으로 설계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이성의 능력을 보완해 준다. 한편 운동성의 형상적 통제는 내적으로 상상되고 계획적으로 투사된 형상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근육의 활동으로 연결된다. 이를테면 무용교본에 따라 실제로 춤동작을 따라해 보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상상과 운동성의 형상적 통제들은 서로 협력하여 특이하게 인간적인 자유의 능력을 가능하게 해준다. 모상화하는 인간 Homo pictor과 제작하는 인간 Homo faber과 지능적인 인간 Homo sapiens의 특성들은 상호의존적이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모상화하는 현현은 언어보다 더 가까이 지각의 세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이는 세계에 대한 진리를 알아내고자하는 인간적인 노력의 가장 기본적인 실천이다. 사물을 그러내는 것은 사물에 대한 지식을 보존하는 것이며, 그 자체가 이미 지식의 기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심미적인 동기나. 주술적인 동기에서 그려진 모상을 제외한다면, 이미 언제나 하나의 모상은 참이거나. 부분적으로 참, 아니면 거짓이기 때문이다.
제9장까지가 생명체에 대한 철학이었다면, 제10장부터는 인간에 대한 철학이 주제가 된다. 전자의 부분에서는 식물적 생명, 동물적 생명과 인간생명을 포함하여 총체적으로 생명의 현상과 본질이 다루어 지면서, 다른 생명들과 구별되는 인간생명의 특성들도 탐구된다. 그리고 인간의 특성 가운데에서도 자신을 대상화할 수 있는 인간의 특성은 이제 자신의 본질을 탐구하는 존재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은 인간으로 사는 한 <나는 나 자신을 문제삼고 있다>는 문제에 도전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종교와 윤리와 형이상학은 존재 전체를 해석하는 지평 속에서 이 문제에 대답하고자 하는 결코 완결되지 않은 시도들이다. 이러한 학문들과 함께 지금까지 생명체에 대하여 탐구하던 철학적 생물학은 인간의 역사를 탐구하는 인간학으로서의 철학에게 자리를 내준다.
제10장에서 한스 요나스는 이론을 실천적으로 사용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이론을 사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에 대해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론이 실천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선한 의도와 선에 대한 의무가 개입한다. 이론을 사용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족적인 이론에 선(善)을 향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결합시킨 후에야 비로소, 즉 그 이론을 자신의 인격으로 내면화시킨 후에야 비로소 실천의 영역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론을 사용하는 목적은 <좋은 삶> 또는 인간의 <행복>이다. 이와 같은 이론과 실천의 고전적인 이상향에 동조하는 한스 요나스에 따르면, 이론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므로, 여기에서는 선한 의도와 책임이 흘러나올 수 없다. 그리고 가치들은 현대의 자연과학적인 방법으로 탐구할 수 있는 학적 대상도 아니다. 가치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인간이며, 인간이야 말로 모든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원천이다. 그러므로 오직 더 높은 인격의 내면화를 전제로 하고 있는 사람만이 이론을 인간의 일상적인 삶을 위해 실천할 자격이 있다. 그런데 17세기 이래로 확립된 기계론적 자연과학의 방법은 현대의 이론의 특성을 고질화하였다. 17세기 기계론적 물리학이 자연을 탐구하는 방법은 분석의 방법이며, 여기서는 자연과 자연의 과정을 수학적 수치와 물리적인 힘의 양의 형태로 분석·종합 재구성하며, 경험에서 얻은 자료를 넘어서서 미래의 사태까지 예측해 내기도 한다. 이러한 분석 방법은 그 본성상 과학기술적이며, 사물들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요소들을 조작하는 operieren 특성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그 내면적 본성상 기술적으로 사용되도록 되어 있다. 이런 기계론적 물리학과 역학이 사용하는 방법이 일반 자연과학은 물론 심리학과 사회학과 같은 학문의 영역에 까지 침투하여 현대 학문의 방법이 되고자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편 현대적 이론의 가설적 특성은 시간적으로 뒤에 제시되는 더 나은 가설에 의해서 번복되는 형태로 역동적으로 무한히 발전해 간다는 진보의 이념에 물들어 있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그러한 역동성과 변화 자체를 맹목적으로 환호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환란의 위협을 목격하건대, 그리고 그 환란이 현대 이론과 과학기술이 상호작용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지금은 우리가 이론을 어떤 목적을 위해서 사용할 것인가를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며, 우리가 그냥 방치하고 있는 인류의 <행복>의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인간의 인식이나 이론은 인간 공동체의 상태를 개선시키는 선(善)한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론을 만들어 내고 실천하는 인간이 인간의 궁핍과 고통에 대해 깊이 염려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제11장은 그노시스주의와 현대의 허무주의와 실존주의를 비교하고 있다. 한스 요나스는 그노시스주의와 실존주의에 깔려 있는 허무주의적 요소, 이들 허무주의에 깔려 있는 인간의 세계에 대한 표상, 무코스모스주의. <내던져져 있음 Geworfenheit>이라는 인간의 상황, 순간적으로 획 지나가 버리는 <현재>라는 시간성, 그노시스주의에서의 우주경멸과 실존주의에서의 자연의 탈가치화, 인간과 자연 physis의 이원론을 중심으로 이들 세 가지 유형의 사상들 사이의 유사성을 언급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는 현대의 허무주의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인간이 과연 어떻게 위기를 극복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던진다.
17세기의 파스칼이 표현하였듯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길을 잃고 고독해 하는 생각하는 갈대로서 존재하는 인간의 상황, 그리고 19세기의 니체가 표현한 대로 신은 죽고 최상의 가치가 탈가치화된 탓에 이제 인간이 혼자 힘으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만 하는 허무주의적 상황이 결국 실존주의의 바탕에 깔려 있는 허무주의적 요소를 발전시켜 줄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 주었다. 그 조건이란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인간의 표상이 변화한 사태인데, 그것은 일종의 <코스모스적 허무주의>이다. 그리고 이러한 코스모스적 허무주의는 이상하게도 긴 시간적 간격을 사이에 두고 있는 과거의 그노시스 운동들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태도에 깔려 있는 과격한 이분법의 분위기, 즉 인간이 몸담고 사는 세계와 인간이 과격하게 이분화되는 분위기와도 상통한다. 그리스적인 코스모스의 가치나 경건성 같은 것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이제는 평가절하된 우주 그러면서도 위력을 지니고 있는 우주에 둘러싸여 있는 그노시스주의적 인간은, 자신의 상황을 우주에 갇혀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인간의 삶에 방향을 제시해 주는 우주의 신은 이 우주 속에는 없다. 우주는 삶과 영에 대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은 이 우주를 부정하고 자신의 내면적인 인식의 힘으로 우주를 초월해 있는 신과 합일하는 데 있다. 우주의 위력은 한편으로는 초월적인 신의 힘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내면에 있는 신적인 요소, 즉 영(靈. pneuma)적인 인식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초월적인 신은 우주의 법칙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며, 우주의 일부분인 인간에게 도덕법칙을 제시해 주는 신도 아니기 때문에, 적어도 인간의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바라볼 때는 <감추어져 있는 신>이다. 결국 이런 신 앞에 있는 세계 내 인간의 상황은 허무주의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노시스주의자들이 우주 속에서 자신들의 영적인 힘을 통해서 스스로에게 법칙을 부여하고, 또한 신성과 합일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사르트르나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에서 나타나듯이 인간에게 아무런 근거를 제시해 주지 않는 세계, 그래서 그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기투하는 인간 실존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노시스주의에서의 <내던져 져 있음>은 《존재와 시간》에 나타나는 <내던져져 있음 Geworfenheit)>이라는 용어와 유사하다. 그노시스주의자들에게서 신성(神聖)을 향해서 서둘러 가고자 하는 <현재>라는 시간의 양태는 <순간>에 가깝고 이것은 《존재와 시간》에서처럼 역동적으로 미래를 향해서 기투하는 실존의 <현재>라는 시간의 양태와 유사하다. 그노시스주의에서의 우주경멸과 실존주의에서의 자연의 탈가치화는 유사하다. 그노시스주의와 현대의 허무주의의 형이상학적 배경에는 인간과 자연 physis의 이원론이 자리잡고 있다. 현대의 허무주의에 젖어 있는 인간이 이러한 이원론이 몰고 오는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오늘날의 철학이 해결해 야 할 과제이다.
제12장은 불멸성과 오늘날의 실존 문제를 다룬다. 한스 요나스는 오늘날의 인간이 불멸성을 생각하지 않는 경향을 살펴보면서, 더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멸성의 이념이 인간의 삶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인간이 불멸성의 이념을 다시 찾을 수는 없는지에 대해서 살펴본다. 왜냐하면 불멸성의 이념이 오늘날의 인간에게 몇 줄기 빛을 던져 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다. 한스 요나스는 칸트가 인간의 인륜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불멸성을 정초하던 것을 상기하면서, 유한한 인간이 유성처럼 지나가는 짧은 순간에 자신의 자유와 책임에 따라 선한 행업(行業)을 이루는 용감한 행위야말로 불멸성의 이념을 찾을 수 있는 통로라고 생각한다. 즉 인간은 이 세상에서의 인륜적인 행업을 통하여 불멸적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불멸성은 행업의 불멸성이다. 그는 더 나아가 <생명책>과 〈초월적 인 모상(模像, Bildnis)>의 상징을 가지고 들어와서 행업의 불멸성을 사변적으로 설명한다. 이른바 이 유한한 세상에서 행한 인간의 행업들이 영원한 초월적인 왕국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영원히 거기에 귀속된다는 유대교의 상징에서 발상을 얻어, 한스 요나스는 오늘날의 우리는 비록 영원의 왕국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이것은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증명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의 행업은 영원히 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결국 우리의 행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과 불멸성으로 뛰어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행업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은 용감한 일일 것이며, 또한 우리의 유한한 삶 자체가 영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을 수 있는 실험일 것이다. 마니교의 문헌에는 <초월적인 모상>,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집단적인 모상>의 상징이 등장한다.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집단적으로 이루는 선한 행업은 언젠가는 불멸적인 세계의 <초월적인 모상>을 총체적으로 완성하고 신적인 존재의 본래적인 전체성을 완성하게 된다. 이러한 상징에 의존해서,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면, 우리는 신이 인간의 손에 우주 전체 과정을 내맡겼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우주 전체 과정을 책임지는 관리 자이며, 이 과정을 잘 관리하느냐 못 하느냐는 전적으로 인간의 행업에 달려있다고 생각해 볼수도 있다. 이러한 상징은 그것이 상징에 불과하지만, 우리에게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우리의 내면성이 경험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즉 우리가 양심의 소리를 들을 때, 최상의 결단을 하는 순간에, 선한 행업을 하는 순간에 그리고 후회와 고통 속에 있을 때 경험하는 사실은, 우리가 영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태 자체이다. 그리고 이 내면성의 사태 자체 야말로 인간 본성의 불멸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유일한 경험적인 표적일지 모르며, 우리는 비판적인 자세에서 이런 표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한스 요나스는 이러한 상징들과 자신의 내면성이 보여주는 증거를 바탕으로, 그리고 자신이 지금까지 전개한 생명체의 철학을 바탕으로 신화적인 가설을 제시한다. 태초에 어떤 알 수 없는 선택에 의해 신은 우연과 모험으로 가득찬 세계의 생성과정에 자신을 내맡기기로 결단하였다. 그리하여 물리적인 우주의 탄생과 진화와 더불어 언젠가 그 속에서 생명이 탄생하였고, 마침내 인간이 탄생하였다. 이제 우주의 운명은 고도의 인식과 자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손에 달려 있게 되었다. 우주 전체의 과정이라는 신적인 과업은 이제 인간의 불확실한 책임의 여부에 따라 그 성패가 판가름나게 되었다. 우리를 위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신 앞에서, 이제는 우리가 그의 형상을 찌그러지게 만들 수도 있고 또한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할 수도 있는 처지에 있다. 비록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지 라도,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는 이러한 가설에서 새로운 윤리이론이 정초될 수 있을 것이다. 생태계가 파멸의 위험에 처해 있고, 핵폭탄과 같은 과학기술의 위험이 언제 인류의 파멸을 초래할지 모르는 오늘날의 급박한 상황에 요청되는 윤리가 정초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윤리의 원천은 우리의 내면성이며 그리고 우리의 내면성이 부여하는 의미 속에 불멸성은 자리잡고 있다.
책을 마치면서 한스 요나스는 생명철학의 한 분과 영역으로서 새로운 윤리학이 포함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책의 전체 주제인 생명철학은 생명체의 철학과 정신의 철학을 포괄한다. 정신의 철학은 인간 정신이 부여하는 의미에 의해 정초될 수 있는 윤리학을 포함할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윤리학은 생명체가 생존하는 한 지속되는 정신의 연속성과 자연이 지속되는 한 지속되는 정신의 연속성과 함께 자연철학의 일부분이 된다. 새로운 윤리학의 원천은 인간을 의무지움으로 불러내는 인간 내면성이겠지만, 새로운 윤리학은 또한 생성되어 가는 자연 전체와 생명 전체를 관찰하고 해석한 결과들을 그 내용으로 삼을 것이다. 적어도 이 윤리학이 인간과 자연의 생존의 위협을 문제삼고 있다면 말이다. 한스 요나스의 『생명의 원리』는 여기에서 끝나지만, 문제의 새로운 윤리학은 그의 책 『책임의 원칙, (1979)에서 계속된다. 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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