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요나스의 생명철학 해설
1 철학사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생명이론들
철학사를 둘러보면, 철학은 자기 시대의 자연과학을 반영하거나 또는 대화하는 가운데, 철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을 살리면서 생명의 문제를 해명하는 데 공헌해 왔다. 우리는 이것을 철학의 긴 역사 속에서 신화와 아직 분리되지 않은 단계의 철학적 사유에서 시작하여,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 기계론과 생명체론(유기체론)의 대립, 철학적 체계이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만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적 사유는" 몸과 영혼을 구별하기보다는 몸과 혼 psyche을 언급하였으며, 생명의 혼으로서의 <프쉬케 psyche>가 몸에 생명력을 주고, 죽음의 혼으로서의 프쉬케는 사후에 지하세계에 내려가 사는 유령으로 간주하였다. 프쉬케는 <바람이 분다> <숨쉬다>라는 동사에서 만들어진 말로서, 인간이 의식을 잃거나 죽을 때 몸에서 빠저나가 사라진다. 고대 그리스의 유물론적 철학자들은 생명의 발생에 대한 종교적 설명을 부정하였으나, 이들의 생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 텔레스의 철학이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 옆으로 밀려난다. 플라톤에 따르면, 동식물의 질료 속에 혼 psyche이 불어넣어짐으로써 생명이 발생한다. 후기 플라톤에서는 데미우르고스라는 신이 우주의 영혼을 모델로 그것보다 더 복잡한 인간 영혼을 창조했고, 인간 영혼이 몸 속에 들어올 때 죽음에 굴복하는 하등기능이 함께 따라 들어온다. 생명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적 생명체론을 주장하였다. 생명현상은 혼(psyche, 형상 Form)이 몸(soma, 질료 Materie)과 결합하였을 때 발생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생명체 soma organikon는 살아 있는 몸이다. 영혼은 질료인 몸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생존하게 한다. 그러므로 생명체는 형상인 영혼이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 telos 을 자신 안에 가지게 된다. 생명체가 운동하고 장소 변화, 질적·양 적 변화를 할 수 있는 까닭은 영혼이 생명체의 원인 aitia이자 원리 arche이기 때문이다. 또한 생명체가 생명적 요소, 즉 영양섭취 · 물질 대사를 하며(식물), 더 나아가 생식기능· 욕망 감정 등의 능력을 가 질 수 있는(동물) 까닭도 그러한 영혼 때문이다. 생명체와 자연과 우주는 저마다 고유한 목적을 실현시키면서 존재 전체의 총체적인 규 칙성과 질서 속에 위치한다. 존재 전체의 총체적인 목적의 마지막 지향점은 부동의 동자이다. 모든 생명체들의 활동은 제 나름대로 부동의 동자를 모방한다. 이를테면 개체는 죽지만 세대번식을 통하여 자신의 종(種)을 영원히 보존함으로써 부동의 동자의 영원성을 모방하고, 인간의 이성 nous 활동은 부동의 동자의 이성을 모방하는 것이다.데카르트는 생명현상을 부수현상설적·기계론적으로 설명하였다. 생명현상은 자연 속에 있는 여러 자동기계들(식물, 동물, 인간의 몸)의 물리적 구조의 결과로서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물리적 사태이다. 데카르트는 물질을 연장된 실체로 보고, 정신 mens을 사유하는 실제로 이원화함으로써, 정신의 세계를 물질로부터 정화시켰다. 또한 무엇보다도 그가 정신을 영혼 anima 그리고 사유 cogitatio와 동일선상에서 보았기 때문에, 인간만이 영혼(느낌. 지각· 사유 갈망까지도 포괄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명이해에 따라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동식물의 영혼을 부정하였다. 동식물과 같은 자동기계는 영혼 없이 살고 있는 기계이다. 자동기계 들의 생명과정과 연결되어 있는 기능들은 이 자동기계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이 배열되어 있는 질서의 힘으로 말미암아 활성화될 수 있고, 이 부분들이 상호협력적으로 작용할 때 활성화된다. 이 자동기계들이 시계와 같은 기계와 다른 점은 환경세계와 관계하고 있는 점 이다. 인간 자동기계의 생명과정도 다른 자동기계와 마찬가지이다. 인간 자동기계의 경우에는 영혼과 몸이 송과선 Zirbeldrüsen이라는 신체기관을 통해서 접촉하기는 하지만, 인과적으로 볼 때 영혼과 육체는 인간이 사는 동안 우연히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영혼은 생명의 원인도 아니고 원리도 아니다. 데카르트의 이런 이론은 우리의 의지가 신체기관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바와 같은 우리의 일상적인 체험에 위배된다. 더 나아가 인간 생명체의 존재이유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형상을 영혼을 통해서 실현시키는 것이지만 여타의 생명체, 즉 자동기계들은 존재이유(목적)가 없다. 다만 이 자동기계의 기능이 가지고 있는 목적은 이미 신이 설계하여 예정해 놓은 대로 기능하는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다윈의 생물학이 제기한 진화론은 생철학 Lebens- philosophie에 영향을 주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생명력>에서도 그것이 잘 드러나지만, 그 이후 생철학의 물결에 휩쓸린 독일의 철학계에서 1883년에서 1930년 사이에 가장 중요한 개념이었던 <Leben(생명, 삶)>은 다원적 생물학의 지평에서 쓰이는 <생명>에서 출발하면서도 사회적 다원주의 Sozialdarwinismus로 발전하여 <문화와 역사를 창조하는 활력(힘)으로서의 삶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의 생명은 사회적 지평,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문화사적. 사회역사적 지평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생명〉을 의미한다.
이후에 나타나는 생명체의 철학(유기체의 철학, Philosophie des Organismus)은 거시적으로는 생철학에서 갈라져 나오는 한 지류에 속한다. 생명현상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생명체를 <살아 있는 것>으로서 설명하는 베르그송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식물적 생명·동물적 생명·인간 생명은 다원이 설명하듯 일직선으로 진화해 온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에너지리에서 자체 속에 내재하는 자발적 성향 때문에 여러 방향으로 다발적인 폭발을 하는 형태로 종(種)의 분화(分化)를 하면서 진화해 온 결과이다. 모든 생명은 물질의 저항을 뚫고 진화하고 비상하려는 이 동적인 정신적 에너지를 갖고 있는데, 이 힘에 의해 생명의 비약이 일어난다. 한스 요나스의 생명철학은 자기 시대의 생명에 대한 논쟁에 참여한 생명체의 철학의 범주에 속한다.
2 생명의 기원에 대한 가설들
자연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사람들은 신화와 종교, 철학적 사변에 의지하여 생명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였다. 고대 인도·바빌로니아·이집트의 신화는 생명이 살아 있지 않은 물질에서 나온다는 자연발생설을 믿었다. 이를테면 구더기와 파리는 진흙에서, 개똥벌레는 불탄 삼나무 껍질의 불티에서, 이는 인간의 땀에서, 개구리·뱀. 쥐· 악어는 나일강의 갯벌에서 자연발생하고, 그 배후에는 신이나 악마의 창조의지가 작용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생명이 죽은 물질에서 발생한다는 이전의 자연발생설을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발생설은 기나긴 중세를 지배하게 되는데, 다만 이때에는 기독교적 신의 창조행위의 결과 자연발생적으로 생명이 발생한다고 여겨졌다. 성서에 따르면, 신이 천지와 그 밖의 다른 생명들을 창조한 다음, 마지막에 이르러 생명이 없는 물질인 흙에 혼(生氣, ruah)을 불어넣자, 그것은 생명을 얻어 사람이 된다. 즉 그것은 살아 있는 영혼(生 nephesh, 창세기 2장 7절)이 된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생명없는 물질이 신의 영혼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증세의 기독교 신학은 성서를 근거로 자연발생실을 정당화하려고 하였을 뿐 자연과학적 관찰과 경험을 배제하였다. 그리고 성서의 생명기원설은 원래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아우구스티누스는 생물의 자연발생이 신의 현현이라고 하였고, 자연발생 때에는 활발하지 않던 물질이 <생명을 주는 영혼>이나 <영혼의 종자>에 의해서 갑자기 생명을 부여받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생명이 없는 물질에 생명을 주는 영혼이 불어넣어짐으로써 생명이 돌연 발생한다. 예를 들면, 인간에게 해로운 기생충 같은 것은 신에 의해서 또는 악마의 계략에 의해서 생겨난다.
중세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발생설은 17세기 후반부터 점점 의심을 받아오다가 (이때에 흙과 공기에 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발견되었다), 19세기 중반에 파스퇴르의 실험, 즉 끓여서 멸균된 국물을 밀폐된 시험관 속에 보관할 때는 생물이 발생하지 않음을 입증함으로써 완전히 무너졌다. 한편 19세기 중반의 다윈의 생물 진화론은 긴 세월에 걸쳐서 구조가 간단한 원시 단세포 생물에서 계속해서 진화해 온 결과, 점점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지는 다양한 새로 운 고등동물의 종(種)들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생명체의 종들이 아무런 목적 telos이 없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의 메커 니즘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에, 생명체의 종들은 우연과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비견고한 것이 되어 버렸다. 이후 자연과학에 서는 판스페르미아설(지구 밖의 우주에서 종자가 날아와 생명이 발생하였다는 설)과 화학진화설(물질의 진화에 의한 생명발생설)이 등장하였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가설들 가운데 오늘날 자연과학의 분야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물질에서 생명 진화하였다는 가설이다. 소련의 생명과학자 오파린(A. Oparin, 1894- 이서 1980)은 약 45-46억 년 전 원시지구가 탄생한 이후 약 10억 년 동안 물질의 〈화학진화〉 과정이 있었고, 약 34-35억 년 전에 원시생명체가 탄생하였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오늘날 화학물리학자 프리고진I. Prigogine도 물질의 요동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해서 물질의 자체촉매 화학반응 autocatalystic chemical reaction에 의해서, 생명이 출현하였으리라는 가설을 제시하면서도." 도대체 왜 그런 진화가 일어났는지 에 대해서는 자연과학계에서도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보고한다. 오늘날 자연과학(생물학, 화학, 물리학)은 대체로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여러 형태의 진화론적 가설들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주의 기원이나 생명의 기원의 많은 부분을 아직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한스 요나스는 물질이 생명을 향해 <자기조직화함 sich selbst orga nisieren〉으로써, 물질에서 생명으로의 이행이 일어났다는 가설을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주론적인 자료들에 따르자면, 물질에서 생명으로 이행하였다는 가설을 부정할 수가 없다.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물질에 내재하고 있는 <의식이 없는 경향성 bewußtlose Tendenz〉이 동기가 되어 무생명에서 생명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 지구상에서 생명이 출현하여 생물진화가 이루어지기 전단계로서, 최초의 <대폭발 big bang)로 우주와 태양계가 형성되고, 이여서 원시지구가 탄생되고, 그 이후 원시지구와 주변의 물질들이 화학 진화를 하는 과정에서 물질은 생명으로 비약하였다.
물질에서 생명으로의 긴 진화론적 연속선상에서 생명으로의 비약을 알리는 분기점을 우리는 명확하게 표시할 수 있을까? 한스 요나스는 그 분기점을 어디에 표시하는가는 생명현상의 증거를 추적하는 자연과학자들의 과제이며, 그 분기점이 어느 지점에 표시되건 간에 중요한 문제는 물질에서 내면성의 차원(Innendimension, 우리가 이론바 <정신적〉이나 〈심리적〉이라고 부르는 차원)을 갖는 생명현상이 출현했다는 사실이며, 바로 이 <사태 자체로 돌아가 zu den Sachenselbst>" 거기서 출발하자고 제안한다. 우리가 이 사태 자체에서 출발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문제가 있다. 원시지구의 원질료 Urmaterie 속에 도대체 어떤 로고스 Logos가 이미 내재해 있기 때문에 진화의 과정은 생명이 출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는가? 아니면 물질이 생명으로 진화한 사건은 그런 로고스를 내포하지 않았던 단순한 우연에 불과한 사건이었는가? 한스 요나스에 따르면, 최초의 대폭발 상황에서의 원질료는 로고스를 갖출 여유가 없었다. 원질료는 우주발생적 로고스 kosmogonischer Logos를 내포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긴 시간 이 지난 이후 물질에서 생명으로 비약하게 된다는 사실 자체로 유추해 볼 때, 여기서는 단순히 자연과학자들이 추측하는 물리적, 외적인 우주진화 이상의 어떤 측면이 개입하고 있다. 즉 원질료는 어떤 계획이 없는 경향성 Tendenz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이 경향성은 많은 기회들이 산재해 있는 조건들 속에서 어느 하나의 기회를 〈우연히〉 포 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계속 앞으로 진척되었던 경향성이다. 한스 요나스는 이 경향성을 우주발생적인 예로스 kosmogonischer Eros라고 부른다. 확률적으로 계산한다면 생명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너무나도 적은 상황이었고, 지구의 원질료는 이런 기회를 포착할 수도 있었고 또 저런 기회를 포착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을 텐데, 하필이면 생명이 출현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포착한 것은 오로지 우주발생적 에로스와 상황(환경)의 우연한 기회의 마주침이었다. 우주발생의 측면에서 로고스와 에로스를 구별하자면, 로고스는 그 속에 발전의 방향과 최종목적telos이 처음부터 완전히 결정되어 내포되어 있는 반면에, 에로스는 처음부터 그런 방향과 최종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에로스는 발전의 원동력이기는 하지만, 발전의 방향은 우연이 개입하는 진화과정의 결과로서 진화하는 동안 비로소 결정된다. 진화론이나 자연과학의 개별이론들은 단순히 물질적·외적인 차원에서의 원질료와 원시 환경 사이의 화학반응을 언급하고 있지만, 우주발생적 에로스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한스 요나스는 그들로부터 철학적으로 거리를 취한다. 원질료에 적용되는 <경향성>, 즉 <우주발생적 에로스>의 개념은 우리에게는 더욱 미묘하고 신비스런 개념으로 여겨진다. 물질이 가지고 있는 물리적인 외적 속성들 Außeneigen- schaften 이외에, 내적인 어떤 속성과 비슷한 이 경향성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어렸든 물질에서 생명으로의 이행이 일어났다는 가설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다시금 제기되는 문제가 있다. 이러한 진화가 일어나기 까마득한 이전에 물질에게 우주발생적 애로스를 부여한 제1원인은 누구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아니 그보다 먼저 모든 것의 시작으로서의 제1원인은 누구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이 문제에 부딪치면 자연과학이 우주자연에서 찾아낸 자료도 침묵하게 된다. 이 문제와 함께 우리는 인식 Wissen에서 믿음 Glaube의 영역으로, 생명현상의 영역에서 형이상학적 사변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한스 요나스는 기꺼이 형이상학적 사변에 의존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우주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간 정신이 자신의 사변의 힘으로 형이상학적 요청을 하는 것도 우주자연적인 증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현상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내면성 속에서 필연적으로 이러한 형이상학적 요청이 일어나고 있다는 현상 자체는 그 자체로서 자명한 사태이다. 물론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채워지는가는 형이상학적 사변의 내용이자 이성적 믿음에 불과하다. 아무튼 한스 요나스는 우주자연의 제1원인이 영적인 존재이며, 사유하고 초시간적인 존재인 신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자연을 창조할 때의 신은 깨어 있고,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영 wacher und akteller Geist이었다.
3 물질과 생명의 차이
생명이 물질에서 나왔다는 진화론적인 가설을 일단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남는 문제는 물질과 생명의 차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물질이고 어디서부터 생명인가? 프리고진의 말처럼, 물질과 생명의 구별은 단순히 우리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하는가? 아니면 체계이론가들의 말처럼 물질과 생명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으며, 단지 생명은 물질보다 훨씬 고도로 복잡하고 신비스러운 세계일 뿐인가? 생명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물질과 정신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스 요나스에 따르면, 사유의 차원에서는 물질과 생명의 차이가 아무리 패러독스로 맴돈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생명현상은 그리고 과거의 생명이 자취로 남겨 놓은 증거는, 현상적으로 이러한 패러독스를 해소시켜 주고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물질 세계에 둘러싸여 정신적인 차원을 갖고 있는 생명체들이 살아 왔고 현재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생명현상이 있다는 사태 자체로 돌아가서, 그 사태 자체로부터 물질과 생명의 차이를 구 별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내면성 차원을 탐구하는 데에는 물질의 외적인 속성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적 방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생명의 자취에 대한 자연과학적 자료 들 ㅡ진화의 흔적과 가설, 지구공학 및 화석 자료ㅡ을 수용하면서도, 더 나아가 사유 수준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고도의 내면성의 차원을 갖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적인 경험이 자신과 다른 생명체의 내면성에 대해서 증거해 주는 자료도 현상학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자연과학적 자료의 한계를 보완해 줄 수 있는 부분이다.
한스 요나스가 이런 방법론을 취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현상학적 방법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은, 그가 인간이 인간 자신의 내면성 속에서 체험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자명한 evident 현상들이라고 간주하며 이것을 일차적으로 기술해 나가고, 더 나아가 자신의 내면성이 증거해 주는 것을 바탕으로 하면서 동물의 내면성 차원을 감정이입의 형태로 유추해 보고 더 나아가 여타의 생명체의 내면성이 드러나는 현상을 기술하고 유추해 볼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생명현상의 영역에 일단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지구상에서 펼쳐지고 있는 생명의 거대한 파노라마는 가장 원시적인(진화가 덜 된) 단계의 생명체에서부터 가장 높은 단계인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진화의 좌표를 보여주고 있다. 이 생명체들은 형태의 복잡성, 물질대사의 수준에 따라 차이를 나타내며, 특히 동물의 경우에는 감각 및 지각의 섬세성.본능의 강도. 운동의 능력·반성력과 의식의 수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와 방식의 수준.진리를 파악하는 수준 등에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생명체의 기능들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앞서 말한 요소들은 지각 Perzeption과 운동성 Motilität에 의해 대변되고 있다. 생명체는 그 일부분이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데도 불구하고, 생명체에게는 그것이 생명체라면 이미 언제나 내면성의 차원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심리물리적 통합체 psycho-physische Einheit이다. 심리물리적 통합체이기 때문에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물질과 정신은 한쪽이 없이는 다른 한쪽도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상호의존적이고, 서로를 자기 쪽으로 통합시키면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심리물리적 통합체는, 다시 말해서 생명체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자기 목적 Selbstzweck을 가지고 있다. <자기목적>이라는 용어는 이 목적(생존보존)이 다른 목적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밖에 없는 자기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일차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의 실존적인 상황을 시사하고 있다. 생명체는 살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의욕하고 애쓴다 zielstreben. 생명체는 자신의 죽음을 요구하는 주위환경의 위험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자기목적, 즉 이러한 경향성을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다.
생명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체는, 사는 동안 만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경향성을 통해 죽음과 대결하고, 죽음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요구하는 주위환경의 위험 속에서 때로는 주위환경에 의존하면서 또 때로는 주위환경과 대결하면서 죽음과 투쟁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의 생존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질대사도 이미 죽음과 투쟁하는 활동이다. 생명체의 살려고 하는 자기목적에서 우리는 모든 생명체가, 무의식적 수준이든 의식적인 수준이든, 동식물의 수준이든 인간의 수준이든,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긍정하는 모습을 본다. 생명체가 살려고 하는 자기목적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이미 언제나 내재하는 경향성이다. 그러나 사는 대가로 결국은 죽어야 하는 것도 생명체의 운명이다.
한스 요나스는 <내면성>을 동물에게만 적용시키지 않고 <살려고 애쓰는> 특성을 가진 모든 생명체에게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하고 있다. 이 내면성의 현상은 어떠한 형태로든 살려고 애쓰는 것은 물론, 쾌감· 고통. 관심· 욕망의 현상과 관련된 감각적 인식적 의지적 능력, 추상적인 가치를 창조해 내는 도덕적 능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이를테면 진화론에서 말하는 단세포 생물)는 물론 모든 생명체의 기본층을 이루는 물질대사나 자극반응들도 단순히 물리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언제나 살려고 애쓰는 특성을 보여주는 내면적인 차원과 통합되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역자는 앞에서 생명의 기원에 대해 언급할 때, 생명이 발생하기 이 전의 원질료가 갖는 어떤 계획이 없는 경향성, 다시 말해서 한스요 나스의 <우주발생적 에로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질 문을 던졌다. 한스 요나스는 <물질은 애초부터 잠자는 정신 schlafen. der Geist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는 물질이 단순히 물질적인 속성 이상의 어떤 속성, 다시 말해서 나중에 생명으로 진화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서 활성화될 수 있는 속성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성이 주어진 상황의 우연한 기회와 마주치면 그런 물질은 내면성을 가진 생명으로 비약한다. 〈역학적인 우연이 주도적으로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도 물질이 그 자체 속에 내포하고 있는 비밀스러운 의지의 계기 ein geheimes Willensmoment in der Pra- dominanz des mechanischen Zufalls〉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물질과 생명을, 현상적인 차원에서는 <내면성이 있느냐 없느냐, 즉 살려는 자기목적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분명하게 구별하는 한스 요 나스가 물질과 생명의 연속선상에서 적어도 물질과 생명을 본질적으로(현상적이 아니라) 분명히 다르다고 할 수 없는 측면 역시 인정하 고 있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물질(무생명)과 생명의 본질을 이원론적으로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으려는 프리고진의 생각이 여기에 매우 근접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물질진화에서 자기조직화하는 특성이나 자발성을 강조하고, 자연도 단순한 기계 장치가 아니라 인간처럼 창조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고진이 말하는 물질의 자발성 창조성·능동성 등의 의인화된 용어가 물질의 <의지의 계기 Willensmoment>를 연상시킨다고 하더라도, 단지 물질의 물리적인 <외적 속성들 Auleneligenschaften)로서의 화학 반응의 질서에 불과하다면, 한스 요나스는 이것이 감추어진 유물론이나 기계론의 한 형태이지 우주발생적 에로스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아무튼 물질과 생명에 모호한 경계선을 설명하고자 할 때, 우리는 프리고진이 말하는 퍼지 논리를 도입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프리고진에 따르면, <예>는 <예>끼리만 모여 있고, <아니오>는 <아니오>끼리만 모여 있을 때, 그 구별이 명백하지만, <예〉와 〈아니오>가 마구 섞여 있을 때는 그 구별이 명백할 수 없다. 여기서는 <예>가 항상 <예>가 아니고 <아니오>도 항상 <아니오〉가 아니다. <예>와 <아니오> 의 경계는 오히려 주관적인 것이다. 약 34-35억 년 전의 물질에서 생명으로 비약하는 진화의 경계선상에 있는 생명체에게도 퍼지 논리를 적용하면, 이것은 물질만이라고도 할 수 없고 또한 동시에 생명이라고도 아직 말할 수 없는, 두 특성이 마구 섞여 있는 단계로 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오늘날 생명체의 개체발생 Ontogenese의 경우에도 적어도 우리에게는 물질과 정신의 경계선을 구별하기 힘든 단계가 얼마든지 있다. 태아의 경우를 보면, 게놈 Genom에 저장되어 있는 물리화학적 정보에 따라 배(조, Keim) 속에 있는 순수하게 물질적인 질서가 서서히 발전하면서 뇌가 형성되고 이 뇌는 어느 순간부터 정신활동을 하게 된다. 뇌의 형성과정에서 과연 어느 시점을 분기점으로 한쪽은 물질의 단계이고, 다른 한쪽은 물질 이상의 어떤 정신 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단계인가? 오늘날의 신경세포학에서도 과연 <왜> 그리고 <어떻게> 신경세포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에서 어느 순간에 조화로운 정신이 탄생하는지는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스 요나스의 말을 요약하면 개체발생의 경우에도 물질적인 차원에서 정신적인 차원으로의 비약은 일어나고 있으며, 이 비약과정에서 물질과 정신의 경계가 모호한 어느 분기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물질과 생명의 차이가 그리고 물질과 정신의 차이가 분명히 경험적으로 그리고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곳에서는, 현상학적으로 볼 때, 생명은 내면성의 차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애쓰는 존재이며, 정신은 일종의 내면성이라는 사실이다. 반면에 물질은 내면성의 차원이 없고, 살려고 애쓰지 않는다.
4 생명의 특성
4-1 생명의 원리로서의 변증법적 자유
한스 요나스를 따라가면서 현상학적으로 기술하자면, 심리물리적 통합체인 생명체는 물질과는 달리 이미 언제나 내면성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내면성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가지 생명의 특성을 포착해 낼 수 있다. 그 어떤 특성들보다도 생명현상을 결정적 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 <자유 Freiheit)의 특성이다. 한스 요나스가 언급하는 <자유>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보다 넓게 사용된 다. (자유)는 정신과 의지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원시적이고 낮은 수준의 아메바 종류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생명체에서 활성화하고 있다. 자유는 물질과는 달리 생명체만이 가지고 있는 존재양태이며 생명의 원리이다.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도, 비록 아주 몽롱하고 어두침침하며 희미한 전자각적(前自覺的)인 수준이기는 하지만, 환경이 가하는 자극에 대해 반응한다. 이것은 그 생명체가 자기의 가능성 영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기존의 한계를 박차고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자유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생명체의 가장 기본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물질대사도, 우리가 이것을 단순한 화학반응의 차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생명체가 자신의 가능성 영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기존의 한계를 박차고 나오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것은 가장 기초적인 자유의 형태이다. 물질대사의 경우에도 이른바 더욱 진화된 생명체는 더 높은 수준의 자유를 보여준다. 그러나 물질대사 이외에도 장소의 이동, 감각의 수준 등 다양한 형태의 자유가 나타나며 그 자유의 수준도 가장 높은 수준인 인간이 실현하는 의지적이고, 자각적인 자유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다양한 자유의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자유의 원리가 물질(비생명)에게는 결여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자유의 원리를 원자들이나 행성들, 태양에게서는 엿볼 수 없다.
여타의 동물의 수준을 넘어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 수준은 인간 정신에서 비롯되는 초월적인 자유 tranzendentale Freiheit 수준이다. 초월적인 자유도 활동하는 영역에 따라 다시 세 가지로 구분된다. 인간 정신이 자신이 원하는 주제를 선택하여 사유해 보는 <사유의 자유 Freiheit des Denkens>, 감각내용을 상상력의 힘으로 마음대로 처리하는 자유, 즉 <상상적 자유 imaginative Freiheit>, 인간의 자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의 차원을 넘어서서 활동하는 <초월하는 자유 transzendierende Freiheit>이다. 그 가운데서도 초월하는 자유 때문에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자신이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실존의 차원에서 본질의 지평을, 감각적인 것에서 초감각적인 것의 지평을, 유한한 시간에서 영원의 지평을, 조건적인 것에서 무조건적인 지평을 열 수 있다. 그러나 초월하는 자유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선을 향해 아니면 악을 향해 초월할 수도 있다. 약을 향해 초월하면서도 선에 헌신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생명체의 자유가 처한 상황이 변증법적인 까닭은 자유가 항상 역설적인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물질적인 세계에서 자신을 구별하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물질적인 세계에 의존하면서 물질대사를 해야 한다. 자유는 생명체의 능력이지만 또한 그 뒷면은 자신의 결핍이다. 세계와 투쟁하는 가운데 생명체는 언제든지 자신의 존재를 박탈당하고 비존재(죽음)로 함몰해 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 물질대사도 이미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의 죽음과의 싸움이다. 자유하면서도 다른 것에 의존하는, 다른 것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이 관계에 의해서 언제든지 파멸될 수 있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고 해서 위험이 덜해지지도 않는 등 자유의 모험은 언제나 불안전하고, 위험에 처해 있으며, 유한하고, 죽음에 깊이 노출되어 있다. 생명체는 이처럼 존재와 비존재, 자신과 세계, 자유와 필연의 양극 사이에서 긴장 관계를 유지하다가 결국 비존재(죽음)에 굴복함으로써 끝난다. 생명이 죽어야 하는 것은 생명에게는 모순이지만 또한 생명의 본질이기도 하다.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
거대한 생명의 운명공동체 안에서 생명체가 처해 있는 상황은 모든 생명이 웅장하게 끊임없이 진화하여 마침내는 최고의 완성에 이르는 진화론적 낙관주의의 상황은 아니다. 끝없이 스스로를 충족시키면서, 언제나 창조적인 새로움의 원리가 적용되는 성공적인 상황도 아니다. 오히려 생명은 끊임없이 죽음과 실패를 물리치면서 순간순간 새로이 삶을 모험하고 실험해야 하는 역동적이고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생명이 죽음과 싸우면서 죽음을 연기하고 있으며, 결국 생명이기 때문에 사는 대가로 죽어야 하는 것은 생명의 야누스적 상황이다.
4-2 자기조직화하는 개방체계
1948년 인공지능학 분야에서 처음으로 체계이론 Systemtheorie이 등장한 이래로, 생물학 분야에서는 폰 베르탈란피 von Bertalanffy가 인공지능학 분야에서는 위너 N. Wiener와 폰 노이만 von Neumann이 생명체를 체계이론적으로 설명하였다. 이 두 체계이론들은 데카르트의 자동기계이론보다 훨씬 더 생명체와 환경세계와의 역동적인 통합성을 강조하고 있다. 폰 베르탈란피는 생명체를 환경을 향해 열려 있는 개방체계로 간주하였다. 이 개방체계는 유동평형 Fließgleichge wicht. 자기조절 · 성장·성장의 한계·재생과 적응의 능력·우회로를 거쳐서 목적을 성취하는 능력 등의 속성도 가지고 있다. 폰 노이만은 살아 있는 생명체를 정보처리기계, 다시 말해서 정보를 입력ㅡ출력하는 체계로 간주하였다. 위너는 생명체제의 가장 본질적 특성을 <자 기조직화 tet organisieren>하는 자생력으로 간주하였다. 생명은 물질보다 훨씬 신비스럽고 복잡한 자기조절 능력을 가진 체계이다.
한스 요나스에 따르면, 인공지능학적 체계이론이 생명이해에 공헌한 점은, 이른바 <피드백> 개념을 정보전달기관과 실행기관 사이의 상호협력작용에 응용한 것이다. 이를테면 동물생명체의 모든 부분기관들의 실행결과에 대한 정보가 감각기관을 통해서 중추신경계에 전달되며, 또한 반대로도 정보가 전달되는데 이것은 특정한 행동의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계속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감각>은 행동결과를 감각기관이 끊임없이 주변에서 중심으로 전달하는 것으로서의 정보에 불과하다. <느낌〉도 전달된 정보를 조절하는 기능에 불과하다. 고전적인 기계론과는 달리, 인공지능학적·기계론적 체계이론은 유동적이고 상황에 즉흥적으로 적응하는 능력과 또한 비록 자동적인 메커니즘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오류를 시정하는 역전의 기능도 설명한다. 실제로 인공지능학자들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행동을 <피드백 제어된 feedbackkontrolliert> 행동으로 정의한다.
체계이론에서 특히 중요한 개념들은 <균형(평형, Gleichgewicht)>과 <조절 Regulierung〉로, 이 둘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조절기능의 역동성에 의하여 생명체가 평형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인공 지능학에서 평형의 의미는 힘들의 물리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특정한 것을 지향하는 태도 Einstellung와 정보의 내용 관계까지도 보정하고 있다. 특정한 것을 지향하는 태도와 정보의 내용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은 그 생명체계의 역동성을 활발하게 하고, 긴장해소는 생명체계의 역동성을 가라앉힌다. 체계의 기능이 이미 예정 조화되어 있는 평형을 드러내는 고전적인 기계론과는 달리, 여기서는 생명체제 자체를 자생적인 조절기능을 통하여 비로소 시시각각으로 평형이 산출된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체계이론은 불변하는 존재 Sein의 개념보다는 생성 Werden의 개념을, 폐쇄되어 있는 예정 조화의 개념보다는 자생적인 평형과 조절의 개념을, 안정성의 개념보다는 유동성의 개념을, 존재의 불변하는 견고한 <구조>의 개념보다는 진화하고 있는 <과정>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생명을 새로운 지평에서 이해하였다. 567
체계이론을 수용하면서 한스 요나스도 생명체를 하나의 체계로 설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체계론적 기계론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생명체계가 생명 자체인 것이 아니라 생명체계는 생명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생명체계가 생명을 정의해 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생명체계적 특성을 현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스 요나스의 방식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계를 정의하자면, 생명체계는 그리고 집단적 생명공동체는 자기조직화하는 체계이다. 생명개체는 그 개체를 이루 는 다양한 부분들이 모여 하나의 통합된 전체를 이루고 있다. 통합된 전체는 부분의 총합 이상이다. 각각의 부ㅅ분들(미시체계)은 그냥 곁에서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분들을 서로 결정지을 수밖에 없는 상호작용을 하는 가운데 하나의 통합된 전체로서의 체계(거시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개별적 생명체계는 자신보다 범위가 더 큰 환경체계에 통합되어 있고, 두 체계는 역시 서로를 결정한다. 생명체는 환경체계와 물질을 주고받는 물질대사를 함으로써, 자신의 부분들을 끝없이 쇄신시키고 생성시켜 간다. 물질대사는 자동차에 연료를 조달하 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면 동물의 경우는 태어나서 유년기·중년기 노년기 등의 각 단계가 모두 연속적으로 합쳐져서 구성 된 것이 동물의 생명인데, 생명은 그러한 각각의 순간들과 단계들 속 에서 산다. 생명의 각각의 순간은 과거에 자신 속에 없던 새로운 부분을 첨가시키면서 진척된다. 경험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섭취와 배설, 잠에서 깨어남과 수면 등)처럼 보이는 상태도 단순한 등가적인 상태의 순환이 아니라,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르게 자신을 쇄신시키고 자기를 창조해 가는 생명의 순간들이다. 그래서 생명은 자신의 전체를 한순간에 모두 소유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거쳐가는 단계들의 연속의 전후와 더불어, 즉 생명의 과정과 더불어 생명의 전체에 도달한다.
생명은 폐쇄되어 있는 체계가 아니라, 개방된 체계이다. 생명체계의 개방성은, 물론 느끼고 보고 행동하는 양태들을 다 포괄하지만, 이미 물질대사를 하는 기본적인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생명체는 한편으로는 생존에 필요한 물질을 얻기 위해서 환경세계라는 외부 조건에 어쩔 수 없이 의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환경세계로부터 자신을 구별시키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보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환경세계를 향해서 자신을 개방함으로써(생명체는 개방된 체계의 형태로 물질대사를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고, 환경세계라는 좀더 큰 체계에 통합된다. 각각의 생명체계들이 자기가 속해 있는 생명공동체에서 시작하여 점점 범위가 넓어지는 보다 큰 체계들을 거쳐 결국 지구라는 생명체계 속에서 복잡한 생명의 그물망을 역동적으로 형성하고 있다. 미시체계의 생존은 직접, 간접적으로 거시체계의 생존과 무관하지 않은 하나의 운명공동체를 형성한다. 개방되어 있는 생명체계는 역동적인 체계이다. 역동적인 활동을 하는 가운데 생명체계는 신비스럽게 유동적 평형과 조절을 산출한다. 이에 대한 예를 소개하자면, 동물의 경우에는 신경계 · 순환계. 소화 계·감각계·뇌 등이 협력하여 그 신체를 가장 적합한 생리적 평형 상태로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사람은 땀을 흘려 체온을 낮추거나, 아니면 몸을 떨어서 몸 속에 축적된 지방분을 연소시킨다거나 아니면 혈관의 혈류량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환경세계의 기온이 영하에서 영상 40℃를 오르내리는 속에서도, 머리와 몸통 부분의 온도를 적절하게 조절한다. 생명체가 시행착오의 통제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목표 를 달성하는 체계를 개발하고, 피드백 통제의 수준을 높여 가면서, 유동적 평형을 산출하는 수준도 높여 가는 것은 생명체에게만 고유한 특이한 속성이다. 살아 남기 위해서 생명체는 시련과 실패도 기회로 삼아 평형을 산출하는 능력을 더욱 쇄신시켜야 한다. 이러한 역동적인 과정은 생명이 지속되는 한 계속된다.
4-3 자연과학적 방법에 대한 성찰
한스 요나스가 생명체에 체계이론을 적용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경고하는 것은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내면적인 차원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스 요나스가 체계 이론의 용어를 빌려와 쓴다고 할지라도, 기계론적 맥락에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인공지능학적 생명체계 이론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는 그 의 반기계론적인 입장이 잘 드러난다. 인공지능학적 체계이론은 동물적 생명체의 경우에 행동의 자유를 조건짓는 운동능력이나 지각능력과 같은 것을 순전히 <피드백 제어된 목적론적 행동>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이 두 능력을 단지 기계론적으로 정보의 흐름을 조절함으로써 평형을 유지하는 것으로서만 설명하고 있을 뿐, <동기에 의해 촉발된 행동 motiviertes Verhalten>으로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한스 요나스에 따르면, 단순한 정보의 피드백 메커니즘만으로는 특정한 목적을 지향하는 행동을 동기지어 줄 motivieren 수가 없다. 여기에는 의지나 관심, 성향이 필요조건으로서 개입해야만 한다. 이런 조건들은 심리적·내면적인 조건들이다. 그런데 생명현상을 이런 심리적. 내면적 조건과 연관지어 기술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정작 <생명>을 물리적인 정보의 피드백 메커니즘으로 위축시키고, 결과적으로 <생명>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그 이론가는 생명을 말하고 있다고 착각 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일단 한스 요나스를 따르면서, 행동의 목적과 관련하여 심리적·내면적 차원이 직접 증거해 주는 것을 포착해 보면, 생명체는 욕구 Bedürfnisse를 가진 존재이자, 자신의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로서 자신을 현상시킨다. 욕구는 한편으로는 <물질대사를 통해 자신을 끝없이 쇄신시켜야 하는 필연성>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현존재를 보존하려는 기본적인 성벽(性癖, Drang)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욕구는 모든 생명 체가 가지고 있는 <살려는 자기목적>이 현상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미 언제나 앞서 언급한 <필연성과 의지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 동물적인 수준에서 살려는 자기목적은 욕망·불안·기타의 정서들 Emotionen로서 현상된다.
인공지능학적 체계이론은 동물의 본성을 지각과 운동이라는 두 요소에만 국한시켜 기계론적인 성과로 실명하는 오류도 범하고 있다. 오히려 지각과 운동과 감정이 함께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그 중에서도 감정은 지각과 운동보다 더 기본적인 능력이며, 전 (前)동물적인 단계의 물질대사 과정에서도 이미 활성화되고 있다. 생명체가 잠시 지각을 멈추거나 운동을 하지 않아도 살 수는 있지만, 물질대사를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며 산다는 것은, 비록 그것 이 아무리 전(前) 자각적 vorbewußt이라고 하더라도, 살려는 기본적인 본능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 기계는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33)
33) 같은 책, 219쪽 이하 참조, 그러므로 생명개체들이 모여 이루는 사회도 인공지 능학적 체계이론이 말하듯 의사소통망에 의해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결핍과 갈망이 활력이 되어 인간과 인간을 결속하고 있다.
생명을 이해하는 데 인공지능학적 체계이론이 사용하는 방법은 자연과학적 방법이다.적어도 한스 요나스가 자연과학적 방법이라고 지적하는 몇 가지 특성은 생명현상의 물리적·외적 측면만을 관찰하는 것과, 물리적 현상에 합당한 인과율과 수학을 적용시킨다는 것이다. 후설 E. Husserl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가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남용이나 한계를 지적하는 입장은 후설 현상학이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비판하는 것과 기본적으로 거의 같은 노선을 취하고 있다. 현상학적으로 한 마디로 말하자면, 정신이 증거해 주는 것을 간과한 채, 정신의 영역에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자연과학적 방법론 자체는 자연과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훌륭한 학문적 도구였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이러한 방법론을 심리물리적 통합체인 생명에 적용할 때의 부작용이다.
한스 요나스의 좀더 구체적인 비판에 따르면 자연과학적 방법을 생명현상, 특히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적용했을 때는 부수현상설과 유물론적 일원론의 유형이 나타난다. 부수현상설은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현상으로부터 정신을 고립시켜 놓고 물리적인 현상들을 중심으로 정신을 설명해 낸다. 그러므로 이런 사유들에서 잘 설명되지 않는 정신적인 현상은 물리적인 현상의 주변에서 부차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밀려난다. 즉 정신은 물질의 부수현상Epi- phanomen으로 취급된다. 다시 말해서 정신은 물질적인 체계(이를테 면 두뇌 Gehim 같은 것도)의 물질적인 과정의 부차적인 놀이 정도로 취급되고, 이 물질적인 체계는 물리적인 인과율에 귀속된다. 물론 부 수현상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물질의 속성에서 그런 부수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성과가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를 추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정신마저도 물질적인 인과율에 따라 설명해 버린다. 한편 유물론적 일원론은 우리의 정신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증거를 간과한 채, 물질을 설명하는 범주를 가지고 정신을 설명한다.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장점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가운데 이것을 정신의 영역에까지 잘못 적용시키면, 결과적으로 여기서는 정신의 이념 자체가 말살되어 물질의 영역에 통합되어 버린다. 유물론적인 생물학이나 20세기 후반에 발달한 인공지능학적 체계이론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정작 생명현상을 결정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의식>이나 <살려는 자기목적>의 특성을 생명현상에 대한 이론에서 말살시켰다.
자연과학에서 사용하는 <인과율>의 개념은 공간성과 연결되어 있다. 말하자면 공간 속에 물리적 대상들이 특정한 관계 속에 배열되어 있고, 이 관계를 거점으로 속도와 가속도가 규정되고, 더 나아가 원인과 결과는 수학적 수치(數值)에 의해서 양적인 관계로 계산된다. 그런 인과율의 개념은 운동이 공간에 개입되어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이 사유틀에서는 내적 다양성의 질서형식 die Ordnungsform der inneren Mannigfaltigkeit인 시간 자체만으로는 인과적인 연속 과정을 구성하는 차원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생명체의 행동 동기도 마치 물리적인 원인처럼 연장되어 있는 연속체 속에서 양적 크기와 속도의 크기로 측정되는 일이 발생한다. 생명체의 정신적 요소들, 즉 생명을 보존하려는 동기, 변증법적 자유, 의지, 정서 등은 모두 이러한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그물망 틈 사이로 탈락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의해서 왜곡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5 생명에 대한 책임
우리는 <왜 생명은 살 가치가 있는가?> 그리고 <왜 인간이 여타의 생명까지도 살려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한스 요나스는 철학적인 대답을 제시 하고 있다. 한스 요나스는 생명이 우연히 물질에서 우주발생적 에로스 때문에 발생하였으며, 생명을 자신의 생존을 보존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죽음과 대결하고 있는 존재로 정의하였다. 그렇다면 우연히 발생하여 본능적으로 살려고 애쓰는 모든 생명은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만약 가치가 있다면, 어떤 까닭에 가치가 있 는 것일까? 인간은 인류와 다른 모든 생명을 보존할 책임이 있는가?
5-1 모든 가치의 근원으로서의 생명의 가치
생명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삶이 죽음보다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한스 요나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모든 생명체가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는 생명의 현상은 생명체가 살려고 애쓴다(생존보존의 자기목적)는 사실이다. 생명체에게는 사는 것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체에게는 삶이 죽음보다 선한 것이다. 살자고 하는 목적을 가진 생명은 그런 목적이 없는 물질보다 무한하게 우월하다. 이 사태 자체는 생명체들 스스로가 우리 눈앞에서 증거해 주고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직관에서 너무나 자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태 자체를 더 이상 달리 증명할 수도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다. 구태여 말한다면 이 자명성 Selbstevidenz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공리"와 같은 것이다. 일단 우리가 이것을 공리로 받아들인다면, 생명체가 자신의 생명에 무관심하지 않고 살려고 애쓴다는 사실 자체는 이차적으로 파생되는 다른 모든 가치와 당위의 근원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만약 <생명의 존 엄성>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주장할 수 있다면, 그 가장 원초적인 근거는 <생명체가 살려고 애쓴다>는 사태 자체일 것이다. 그리고 더 나 아가 〈생명을 사랑하라〉 〈경외하라〉 〈보존하라>는 등의 당위가 정당 화될 수 있다면, 그런 정당화의 근원도 결국 <생명이 살려고 애쓴다> 는 원초적인 생명의 사태일 것이다.
한스 요나스가 여기서 주장하고 있는 바는 모든 생명체가 살려고 애쓴다는 사태 자체가 그 생명체들을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주관적으로 그리고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가에 따라서 그 생명체의 가치를 평가하고 인정하는 것과 관계없이, 생명체들 자체가 생명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객관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어차피 생명이 자연사 속에서 우연히 발생하였기 때문에 생명은 고 유한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모든 생명체가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는 살려고 애쓰는 객관적인 사태 자체를 간과하는 사람일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비록 생명체 속에 내재하고 있는 가치가 없더라도, 창조자 신이 자신의 피조물에게 부여한 가치를 생명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창조하는 신에 대한 신학의 도움이 필요하며, 신적 계시를 인식 할 수 있다는 가지론 Gnosis적 존재론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을 하거나 말거나, 어쨌든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사태 자체는 모든 생명체는 살려고 애쓴다는 객관적인 생명의 가치이다.
한스 요나스가 모든 가치를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근원을 생명의 가치에서 발견한 점은, 오늘날 생태계 위기의 시대에 대두되고 있는 각종 생명윤리 Bioethik의 토대, 즉 우리가 언제나 인정하고 출발해야 할 생명의 가치를 정초해 준다는 사실에 의의가 있다. 또한 윤리학이 발견한 모든 가치들의 근거를 생명의 가치로 환원시킴으로써, 생명의 가치를 중심으로 생태계윤리·과학기술의 윤리·의료윤리·경제윤리·사회윤리 등의 세분화된 윤리학의 영역들이 전일적인 지평에서 통합될 수 있는 기초도 마련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분과 영역들도 궁극적으로는 생명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사실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스 요나스가 언급하는 생명의 객관적인 가치는 인간 종(種)의 유용성을 위한 이기적이고 주관적인(인간 중심 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생명체라면 어느 것이나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들의 독자적인 가치를 찾아주는 사유틀이기 때문에, 적어도 기존의 인간 중심적 윤리의 사유들을 시정하고 있다. 한편 한스 요나스의 입장은 생명을 모든 가치의 근원으로 보는 과거의 윤리적 사유들 가운데 니체적인 생철학이나 사회적 다원주의 Sozialdarwinismus와 같은 사유들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 즉 강자의 힘을 미화시키고 약한 생명의 회생을 정당화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지 않다.
5-2 생명에 대한 책임의 감정과 생명 사태의 긴박성
인간도 다른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인데, 왜 인간만이 예외적으로 모든 생명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가? 한스 요나스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그 까닭은 인간만이 객관적인 생명의 가치를 통찰할 수 있고 거기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주관적인 조건 즉 도덕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40) 생명의 가치는 도덕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의 이성에 호소한다. 판단력으로서의 이성은 도덕감정의 지도를 받는 가운데, 생명의 가치를 따져 본다. 생명 의 가치에 응답하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의지를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심리적 근거는 도덕감정이다. 도덕감정이 이성과 의지를 매개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객관적인 생명의 가치가 이성적으로 통찰되었다고 할지라도 행위로 실천되지 않을 것이다.41)
40)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목적 이외의 목적을 향해 초월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인간을 가능적으로 도덕적인 존재로 만든다. 인간은 선과 악 모두를 향해 열려 있다. H. 요나스 지음, 이진우 옮김, 『책임의 원칙: 기술시대의 생태 학적 윤리』, 179쪽 이하: H. Jonas, Der Gottesbegriff nach Auschwitz, 22쪽.
41) H. 요나스 지음, 이진우 옮김, 『책임의 원칙: 기술시대의 생태학적 윤리 157-162쪽. 윤리이론은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객관적인 측면은 인간에게 구속력을 가지는 <당위>에 대한 요청권의 배후에서 정당화하는 원칙이며, 이것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파악된다. 주관적인 측면은 인간이 의지를 움직여 도덕적 행위로 이어지게 만드는 심리적 근거에 관한 측면으로, 이것은 도덕감정과 관계가 있다. 전통적으로는 이 둘 중 하나가 윤리이론의 중심을 차지하였으나, 사실 이 둘은 상호보완적으로 윤리일반을 통합하고 있다. 한스 요나 스는 전통윤리와는 다르게, 윤리의 객관적인 측면에서는 생명의 존재에서 생명의 살 가치를 정당화하고(이것은 전통윤리가 암암리에 전제했을지라도 결코 겉으로 드러내 강조하지 못했다), 주관적인 측면에 관한 한, 유한하고 일회적인 생명에 대한 지금 여기의 급박한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전통윤리는 책임의 감정을 소홀히 하였다) 42) 같은 책, 185-193쪽. W. E. Müller, Der Begriff der Verantwortung bei Hans Jonas (Frankfurt a, M., 1998), 13쪽 이하.
도덕감정은 단순히 충동으로만 존재하기를 거부하고, 그 이상이 되고자 하는 도덕감정 자세서 내면적 욕구 때문에 자신을 초월할 것을 요구한다. 도덕감정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책임의 감정이 생명보존의 문제에서 더욱 강조되어야 하는가? 전통유리에서 언급하는 감정들 대부분ㅡ유대인의 <신에 대한 경외감>, 플라톤의 <에로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기독교의 <사랑>, 칸트의 <도덕법에 대한 경외감> 등ㅡ은 최고선과 최고의 가치를 지향하는 종류의 감정들이었다. 여기서는 유한한 세계 내에 최고선이 들어오고, 유한한 생명들로 하여금 불멸의 세계로 참여할 것을 유도하고, 불멸에 대한 갈망을 유도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이다. 그러나 생명에 관한 한 문제의 사태는 긴박하다. 생명은 자신의 결핍성 속에서 생존에 대한 위협과 위험 그리고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 유한하고 유일하며 일회적인 삶을 사는 존재이다. 생명 사태의 긴박성은, 앞에서 언급한 영원을 갈망하는 도덕감정들보다도, <여기 이 순간에〉 인간을 〈묶어 두는〉 책임의 감정을 요청한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도덕감정들도 소중하지만, 책임의 감정은 생명의 보존을 위하여 더욱 강렬하게 인간을 구속하기 때문에 그만큼 강조 되는 것이다. 생명을 외면하고자 하는 우리 마음 속의 각종 동기와 의지를 포기하게 만들면서 책임의 감정은 우리에게 생명을 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강요한다. 책임에 의해 구속될수록 인간은 책임에 속하게 되며, 더 이상 자신에게 속하지 않게 된다.
5-3 모든 책임의 원형으로서의 부모의 자식에 대한 책임
인간의 책임을 기다리는 후보자들(책임의 대상들)은, 한스 요나스에 따르면, 일차적으로 인간의 생명과 더 나아가 여타의 모든 생명들이다. 그 대상의 범위는 인간 개인의 생명에서 시작하여 인간 공동체, 여타의 생명공동체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현재의 생명에서 시작하여 미래의 생명까지도 책임의 대상이다. 이들 후보자들은 인간의 악행으로 인한 희생자가 될 수도 있고, 책임에 의해 구제될 수도 있다. 여러 종류의 책임의 유형, 이를테면 타인에 대한 책임.여타의 생명공동체에 대한 책임ㆍ 의사의 책임ㆍ 교육자의 책임 ·정치 가의 책임 등 가운데서도 특히 생명에 대한 책임에 관한 한, 발생학적으로나 유전학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가장 원형이 될 수 있는 책임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책임이다.
왜 부모의 자식에 대한 책임은 모든 책임의 원형인가? 그 까닭은 여기에서 생명간의 결합이 본능적으로 가장 무조건적이고 인격적으로 강렬하게 연결되어 있고, 책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전체성 (책임의 대상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책임지는 속성), 영속성(책임을 영속적으로 수행하는 속성) 및 미래의 지평이 가장 잘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본능적으로 자식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책임지고자 한다. 처음에 신체적 성장을 보살피고, 더 나아가 자식의 교육과 행복 등을 배려한다. 여기서는 자기자식이 다른 자식들보다 얼마나 잘 나고 못 났느냐를 따지지 않고, 또 그가 부모에게 얼마나 유익을 가져다줄 것 인가도 계산하지 않고, 오직 자식의 생존 자체와 자식이 최선의 존재가 되는 것이 부모의 관심이다. 부모는 자식에 대하여 영속적으로 책임을 지고자 한다. 여기에는 휴식이나 중단이 없다. 왜냐하면 보호받 는 생명 자체가 중단 없이 계속되고, 항상 새로운 상황과 요구조건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신의 책임을 영속시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식의 존재의 영속성을 더욱 배려하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을 지속시킨다. 그 결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불연속의 시간을 관통하는 영속성의 사태 속에서 그 종(種)의 유전적·문화적·역사적 전통은 이어져 내려간다. 부모의 책임이 가장 사적인 책임임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책임의 지평을 넘어서는 차원으로 열려 있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부모의 책임은 미래의 지평으로 열려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보호받는 생명 자체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가는 부모의 책임도 미래의 지평으로 열려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책임이 인간과 여타의 생명공동체에 대한 책임의 지평으로 확장될 수 있는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책임의 유형에서 우리는 생명 자체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가장 모범이 되는 책임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책임의 유형을 인간과 다른 생명공동체에까지 확장시키는 것은 우리의 본능이 아닌 최선의 선택일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최선이라고 형이상학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최선의 선택은 때로는 우리의 본래적인 의지를 꺾어야 하는 아주 어려운 선택이다.
기나긴 자연의 역사가 탄생시킨 다양한 생명의 종(種)들은 인간과 함께 하나의 운명공동체를 고향으로 공유하면서 공생하여 왔다. 종들간의 생존권 침입과 종의 이기주의가 넘치는 것이 자연의 한 모습이지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전체적으로는 공생과 균형을 이루어 온 것도 자연의 또 다른 모습이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이 다른 종과 생존 투쟁의 관계에 처하게 된다면(예를 들자면, 전염병균이 확산되는 경우), 종의 이기주의적 차원에서 인간에게는 인간 생존 자체가 당연히 제1관심사가 되어야겠지만, 이것이 다른 생명들의 객관적인 생명의 가치를 부인하는 이유는 될 수 없다. 물론 부모와 자식간의 책임 관계에서와 같은 본능적인 결합은 결여되어 있더라도, 인간만이 다른 생명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고, 그들에게 대해서도 생존권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도덕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도 의도적으로 책임지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오늘날 인간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과학기술 때문에 다른 모든 생명들과의 생존경쟁에서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과학기술이 인간 자신의 생존과 여타의 생명들에게 위협을 가할 수도 있는 상황은 이미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과 여타의 생명들과의 공생관계 내지 유대관계의 보존은 더욱 인간의 책임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 생명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죽어도 좋다는 식으로 항변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총체적이고, 영속적이며, 미래의 지평까지 포함하는 책임의 유형은 여기서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어야 할 것이다.
6 전일적인 지평에서의 생명이해를 향하여
오늘날에는 생명의 신비를 풀기 위하여 생물학, 지구과학, 물리, 생화학, 의학, 생명공학, 유전공학, 인공지능학, 철학, 신학, 종교학 등의 모든 학문이 출현하고 있으므로, 학문간에 서로 대화하고 협력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고 있다. 자연과학은 생명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기초적인 단서를 제공해 줌으로써 철학이 할 수 없는 큰 공헌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학이 사용하는 방법론의 한계 때문에, 자연과학이 제시하는 자료는 생명체의 물질적 현상과 외면성에 대한 단서에 불과하기 때문에, 생명체를 기계론적으로 아니면 물질적 외면성의 차원으로만 왜곡시킬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죽은> 물질처럼 다루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이 개입하여 자연과학과 대화하면서 자연과학적 생명이해를 보완할 수 있는 영역은 자연과학적 방법의 한계를 자각하는 가운데 생명을 물질이 아닌 생명으로서 탐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자연 과학적 방법으로는 잘 설명될 수 없는 생명현상의 내면적인 필요조건, 즉 내면성과 생명의 가치의 측면이다. 역자의 생각에 따르면, 한스 요나스의 철학적 생명이해가 기여하는 점도 바로 자연과학적 자료들을 수용하면서도,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지평의 한계에 머물지 않고, 여기에 철학의 지평을 이끌고 들어와 철학의 방법론으로 생명현 상과 생명의 문제를 보충하는 것이다.
한스 요나스는 생명현상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상학의 한계선상에서 더 나아가 형이상학을 포기하지 않으며 또한 윤리학을 향한 지평까지 열어 놓는다. 역자의 견해에 따르면, <생명>은 자연과학적·철학적·종교적·신화적·사회적 지평 등 여러 지명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그 지평들은 언제나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런 지평들을 상호보완시킬 때 보다 전일적이고 풍요로운 지평에서 생명현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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