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신은 수학자인가?
물질대사의 의미에 대하여
1 문제 제기
<신의 창조에 대한 내재적 증거에 따르면 우주를 지은 위대한 건축가는 오늘날 순수한 수학자인 듯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영국의 천문학자이자 자연철학자인 제임스 진스 경 Sir James Jeans이 동시대 의 천문학적 통찰들을 종합하면서 언급하였다. 그가 이것을 말했을 때, 아마도 그는 시대와 시대를 거쳐가면서 항상 새로이 올리던 가락을 자신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오늘날>의 관점에서 판단 하자면) 몰랐을 것이다. 그처럼 의미심장하고 오랜 역사가 있는 명제는 한때 철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비록 그 명제가 자연과학자이자 천문학자의 일을 통해 다시금 새로운 이론의 무대에 올랐다고 할지라도, 철학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 명제를 둘러싸고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이 명제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명제는 참인가? 명제의 의미에 대해 묻는 첫번째 질문은 필연적으로 역사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명제를 제시하게 된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전통이 그 명제의 의미 자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수학) (창조) (우주)라는 용어는 그것들이 처음 언급되었을 때에는 무엇을 의미했을까? 그것들은 오늘날 더 이상 무엇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는가? 오늘날에는 그것들이 무엇을 (그리고 이와 함께 명제 전체가) 의미하는가? <오늘날>에는 <더 이상.... 아닌>이 오늘날의 학문이 연구하고자 하는 과제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번째 과제는 사유의 원천을 추적하는 것이다. 즉 이 명제가 그리스에서 최초로 언급되었을 때부터 오늘날의 학문의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사유의 원천을 추적하는 것인데, 더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의 맥락에서 그 명제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이 명제의 진리성에 대해 묻는 두번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명제 자체가 불러들이는 증거, 즉 <창조>의 증거를 주목해야 만 할 것이다. 창조의 증거는 우리들에게 결코 한꺼번에 전체가 주어 지는 일은 없으나, 전체에게 타당한 사실은 그것의 부분에게도 역시 타당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우리는 우주 속에 존재하는 특정한 존재의 종류, 즉 살아 있는 생명체를 중심으로 이 명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진스의 주장은 우주를 지은 위대한 건축가인 그 수학자가 또한 위대하건 보잘 것 없건 간에 아메바의 제작자이기도 한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로 하여금 던지게 만든다. 왜냐하면 아메바는 우주의 일부분이므로 아메바도 창조의 원리의 제약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메바의 왜소성이 아메바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반증이 될 수는 없다. 피조물의 하나인 아메바가 내재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증거는 창조에 대한 보편적인 증거의 일부분이다. 이 경우에 아메바 자신에게 있어서 <내재적인>의 의미는 다른 우주적 형성물의 등급에 해당되는 의미보다 더 충만한 의미를 갖는다. 그 의미는 아메바가 고유하게 느끼는 내면성의 사태를 포함한다. 이것은 아메바로 하여금 존재론적 증거에 관한 한 자신의 크기의 한계를 능히 보충하는 특별한 가치를 갖게 해준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어떤 우주적인 원리가 어느 모로 보나 우주 Kosmos 속에 들어 있는 생명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우주적인 원리는 우주 자체를 위해서도 불충분한 것이다. 또 다른 양자택일적 가능성이 있다면 아마도 생명의 형이상학적 초월일 것인데, 의식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이런 형이상학적 초월을 인정할 수 있겠지만 아메바에게는 인정해 주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이원론이 제시하는 자료가 생명체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물질적 생명 stoffliches Leben은 (우리는 정신이나 의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세계물질 Weltstoff을 설명해야 할 과제 앞에서 하나의 시금석으로서 봉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신에 대한 이해를 교정해 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수학자이다>라는 형이상학적 명제는 특정한 존재론적 입장으로 환원되고, 단순한 사태에 견주어 판가름날 수 있다. 이 명제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별들과 공간으로부터 내려와 우리의 직접적인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경험에 다가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에 충분히 응용될 수 있고 또 이와 더불어 신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사변적인 질문에 응용될 수 있다. 만약 세계가 신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해줄 수 있다면 말이다. 바로 이러한 사유의 내용을 진스의 명제는 세계에서 인식될 수 있는 존재를 <증거>로 요청하는 가운데 함축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그 명제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진스의 믿음에 동참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신이 무엇인가(신이 존재하는가는 말할 나위도 없이와 관련하여 그 증거에 대해 어떤 긍정적인 내용을 가지고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그래도 부정적인 내용을 가진 타당성이 도대체 어떤 것이 신이 아닌가 또는 결코 신이 될 수 없는가와 관련하여 증거가 넘치도록 많은 상황, 즉 이러저러한 내용의 가설을 가지고 창조자의 본질적 특성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증거가 넘치도록 많은 상황 속에서 발견될 수는 있다. 이러한 창조자의 본질적 특성은 우리가 맨 처음에 창조의 증거를 특정한 방식으로 해독하는 가운데 추론해 낸것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드러난 신의 개념을 그 신이 최종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경험에 미루어 검토해 보고자 한다면, 실제로 그러한 해독방식이 검토 대상이 된다. 수학적인 신의 개념이 진지하게 현실과 관련지워질 경우에는 최후의 가능성들을 충분하건 불충분하건 간에 드러내 준다. 이 가능성들은 우리들의 기본적이고, 존재론적이며, 인식론적인 관점 속에 함축되어 있다. 비록 수학적인 신을 현실과 관련짓는 것이 모순으로 환원 reductio ad absurdum시키는 모습으로 끝난다고 할지라도, 이 불가능한 개념은 결국 자기자신을 파멸시키는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동시에 유용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2 자연의 수학에 대한 고대적 의미와 현대적 의미
진스의 발언은 서양의 사변의 역사와 거의 일치할 만큼 유서깊고 명예로운 전승 가운데에서도 뒤늦게 등장하는 것이다. "티마이오스의 데미우르고스에서부터 시작하여 수학적인 <조립가능성 Kompossible> 을 창조하는 라이프니츠의 신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적인 전통이 이어 진다. <우리는 이제 놀랍게도 사물의 근원 속에서 특정한 신적(神的) 수학 또는 형이상학적 역학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수학 속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 양(量)이 규정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신이 계산하고 생각하면 세계가 생성된다.> 그 이전에 이미 즉 근대의 자연과학이 막 시작되려던 무렵에 캐플러는 사물의 수학적 본질을 믿었으며 또한 거기서 비롯되는 세계의 조화를 믿었던 피타고라스에게 깊은 영향을 받고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기에는 너무 위대했는지라 상징적인 기호의 놀이를 시작하였고 자신과 닮은 것을 세계 속에 새겨넣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자연 전체와 우아한 하늘이 기하학에 의해서 상징화되었다>. 케플러는 이와 같은 신적 기하학이 표현된 것을 그가 차례차례로 발견한 행성의 운동법칙에서 포착하였다. 케플러가 행성의 운동법칙을 찾으려고 시도했을 때 그는 이미 기하학의 전제들로부터 근본적으로 영감을 받은 상태였다. 갈릴레이의 학적 신앙고백도 동일한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은 수학의 언어로 씌어 있으며, 그것의 문자는 삼각형들, 원들 및 그 밖의 기하학적 도형들이다.
이 거대한 학적 청사진에서 존재의 개념과 학문의 이상은 서로 상호연결되어 있고, 또 서로를 지원해 준다. 케플러는 양(또는 크기)을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동시에 이런 것이야말로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참된 지식이라고 설명했던 근대의 자연과학자들 가운데 아마도 최초의 학자였을 것이다. 케플러에게 인식이란 측정하는 것이고, 측정된 자료를 비교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측정한단 말인가? 인식이 목표로 삼고 있는 <수학적 자연>은 고전적인 수학적 자연과 아직도 동일한 것인가? 근대적 학문의 시초에 학자들은 피타 고라스-플라톤적으로 세계를 <기하학화>한 것으로 돌아간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어느 정도 새로운 요소, 다시 말해서 자연을 물리적으로 묘사하는 데 있어서의 <대수화 Algebraisierung>와 함께 비로소 점차적으로 등장하던 새로운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고전적인 기하학 자체는 대수학이 기하학에 응용되어 새로운 자연과학의 수학이 되었던 것보다는 정도가 좀 덜하였다. 그 까닭은 새로운 자연과학이 과거의 그리스적인 존재론적 사변의 직관적인 크기와는 더 이상 관련이 없다고 새 시대의 자연과학자들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이 책의 부록 1 참조), 우리는 그들의 이러한 관점을 이정표로 사용하여, <수학적 자연>에 대한 현대적 개념과 고전적 개념의 깊은 차이를 밝혀내고, 더 나아가 진스가 현대물리학의 맥락 속에서 수학적 신성(神 性)을 표상했던 것의 의미를 더 자세하게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도형에 만족하던 과거와 비교해 볼 때, 물리학의 영역에서 대수학의 방법을 부흥시켜 준 것은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이었다. 고정된 공간적인 비례들 대신에 운동은 가장 중요한 측정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매우 혁신적인 학적 태도이다. 현대 학문의 초기에 생성에 대한 분석은 존재에 대한 관찰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였고, 학적 태도에 있어서의 이러한 변화는 해석기하학이 도입된 배후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이후로 물리학의 공식에서 <f>가 했던 역할은 새로운 학적 태도를 표현해 주고 있다. 탐구의 대상이 되는 <형식들>은 더 이상 현존하는 산물들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연의 과정이다. 자연의 과정은 오로지 자신의 고유한 형식, 즉 과정의 연속적인 계열의 법칙에 의거 해서 정의되었으며, 목적(존재하지도 않는)이나 종말 또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어떤 결과에 의해서 정의되지는 않았다. 그리스의 기하학이 불변하는 직관될 수 있는 도형이나 물체의 관계들을 관찰한 반면에, 새로운 대수학은 해석기하학과 적분학의 영역에서 기하학적 형식 자체를 변수들의 기능으로서, 다시 말해서 지속적인 성장의 한 단계로서 제시한 다음에, 여기에서 생성되는 것들의 법칙을 공식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고전적인 직관의 대상이었던 이미 확정되어 있는 형상(형태. Gestalt)들 대신에 이 생성법칙들이 수학적 인식의 참된 대상이 되었다. 확정되어 있던 형상들의 독립적이고 개체적인 위상은 과도기적 경계선의 위상을 위하여 희생되었다.
수학의 영역 안에서 발달된 것들이 물리학에서도 응용되었다. 실제로 다른 <자연>에 대한 문제 제기는 다른 종류의 새로운 수학에 의해서 가능해졌다. 왜냐하면 순수한 수학의 영역에서, 직관적인 대상을 정체적으로 관찰하는 대신에, 기능적인 관찰을 도입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이것이 물리적인 현상을 기술하는 영역에 응용되었을 때는 고전적인 존재론의 실제적인 형상들을 기본 운동들과 힘들로 해소시킴을 의미한다. 물리적인 기본 운동들과 힘들은 물리적 기술방식의 산물로서 간주될 수 있었고, 실험을 통해서 제시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수학적 곡선의 기능적 산물은 물체의 궤도가 만들어 낸 역학적 산물이 되었다. 관찰된 산물, 즉 궤도의 형태는 하나의 완전한 자생적으로 현전하는 요소가 아니라 결과물, 즉 순간들의 연속계열인 데, 이 연속계열을 이루는 각각은 바로 그 순간들의 부분요소들의 총 합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렇게 합산될 수 있는 형태는 자신의 독립적인 고유한 실재성을 가질 수 없다. 예를 들면 행성궤도와 같은 연속 계열이 보여주는 모든 합리적인 특성들은, 만약 이들이 이상적인 전체로서 관찰된다면, 운동하는 원리의 조화를 의도하는 어떤 이성이나 의지로 말미암아 기술되는 것이 아니라 뉴턴이 나중에 그런 운동의 역학에 대해서 보여주었던 바대로 거기에 개입되어 있는 기본 요소들의 단순한 동형성(同形性)이나 지속성을 근거로 기술되는 것이다. 이들은 이를테면 중력이나 관성 Trägheit의 경우에 각각 오로지 하나의 직선적인 운동을, 즉 모든 운동 가운데서 가장 단순하고 최소의 형태를 갖춘 운동을 산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단순한 총합은, 그들의 지속성의 조건만 유일하게 주어진 상황에서 그리고 그런 결과에 대한 어떤 (관심)이 개입하지 않아도, 천체기하학의 가장 합리적인 형식들을 산출해 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궤도가 <수학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규칙에 따른다는 명제에 대하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의미이다. 이것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법칙과 질서의 충족이유이다. 질서의 합리성은 이제 더 이상 그것의 설명 근거 가 아니며, 지성적 intelligibel 형식은 이제 더 이상 존재의 완전성을 시사해 주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존재의 완전성은 좀 정도가 덜한 형식을 선호하는 가운데 현실성을 획득한다. 질서의 합리성은 가장 저급한, 즉 가장 간단한 발생유형으로 되돌아가서 설명된다. 질서의 합리성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표출된 질서로 둔갑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수정만 되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게도, 오히려 질서의 합리성은 자신의 고유한 표출되지 않은, 어떤 의미에서는 둔감한 양stumpfsinnige Quantität을 단순히 보존함으로써 이 질서를 구성한다. 둔감한 양이야말로 근본적으로 현실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총합결과로서 현상되고 있는 <전체성>은 단지 허구적으로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고, 인식론적이든 존재론적이든 간에 통합적인 고유한 타당성을 누리지 못한다. 이것이 고대의 천체수학을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천체역학, 다시 말해서 역학 자체의 한 경우로 둔갑시킨 현대적 분석방법의 의미이다. 피타고라스적인 조화는 무차별적인 힘 등의 평형으로 둔갑하였고, 이 평형은 힘들이 부딪히는 조건에 의해서 계산될 수 있다. <척도>와 <중간>은 이제 더 이상 대립물을 연결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런 대립물들의 피할 수 없는 총합이다.
그리하여 높은 단계나 저급한 단계 더 아니면 덜 합리적인, 형식 이 더한 아니면 덜한 것은 복합적인 것과 단순한 것의 관계로 대체 되었고, 존재를 이해하는 데 통용되던 옛날의 질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전체가 부분들로부터 설명되기 때문에, 이제 이해 가능성은 기본적인, 즉 옛날의 의미로는 가장 이해가 덜 되는 것으로 환원되었다. 옛날의 의미로 가장 이해가 덜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런 기본적인 것들은 오성을 가장 적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연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현대적인 이념의 경우에는 가장 비지성적인 것이 가장 지성적인 것으로 둔갑 하고, 가장 이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 가장 이성적인 것으로 둔갑하게 되었다. 자연질서의 모든 합리성의 근저에는 질료가 활성작용 속 에 있는 양적인 상수(數)라는 단순한 사태만이 자리잡고 있거나, 아니면 관성(慣性)의 법칙에서 최초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동형성 Gleichförmigkeit의 원리가 자리잡고 있다. 물론 이들이 내재적 이성을 증거해 주는 것은 아니다.
3 고전적 창조론과 유대적-기독교적 창조론
공공연한 사실은 <수학적인〉 자연을 언급할 수 있는 이념은 동시에 수학적인 창조자의 이념을 촉발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스가 말하는 <위대한 건축가>는 그가 아무리 <순수한 수학자>로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입장은 학문적 발달의 결과뿐만 아니라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확실한 것으로서 가정해도 될 것이다. 목적론을 억압하고 실체적 형상을 억압하는 것과 같은 사건은 자연탐구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단순한 어떤 특정한 발견이나 어떤한 무리의 발견의 결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간주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오히려 이런 명예로운 개념들의 갑작스런 태도에 대해 경종을 울려주는 방법적 혁명 자체도 하나의 설명에 불과하다. 르네상스 이후의 학문은 자연에 접근 하는 새로운 통로를 발견하기 위하여 실제로 특정한 형이상학적 조건들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창조의 주제를 다루고자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형이상학적 조건들을 특정한 관점에서 조명하기로 한다.
티마이오스의 신은 세상을 완전한 생명체로 창조하였거나 아니면, 영혼이 있고 이성적인, 우리 눈에 보이는 신을 창조하였다. 예지적으로 인식되는 원상(原像)들 intelligible Urbilder을 바라보면서, 그 신은 변화하는 것들을 이 원상들과 유사하게 그리고 되도록 자기자신과 유사하게 창조하였다. 왜냐하면 예지적인 것 das Intelligible과 지성적 인것 das Intelligente은 하나이다. 수동적이거나 규칙이 없는 질료는 변화 속에서 형식과 비례를 보존하기에는 (질료는 이들로 낙인찍혀 있 었는데) 부적합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변화의 운동을 일으키는 힘, 즉 변화를 통하여 아름다운 모사물이 시간 속에서 영원을 모방해야만 하는 그런 힘 자체를 산출하기에도 부적합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운동의 지속적이고 자생적인 원인으로서의 영혼이 필요하였고, 이성적인 운동 즉 법칙성을 보여주는 운동의 원인으로서의 이성이 필요하였다. 영혼의 두 측면들ㅡ영혼이 운동의 원인이자 질서의 원인으로서의 측면들ㅡ은 운동과 질서를 보편적인 자연의 원리로 만든 다. 영혼은 신성(神性)의 정도, 즉 이성성(理性性)의 정도에 따라서 우주를 지배한다. 한 운동이 더 지속적으로 합리적일수록, 이 운동을 야기시키는 영혼의 이성은 더 고급한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천채의 우월한 이성성은 인간을 포함한 지상적인 존재의 이성성에 비유되었다. 그래서 전체 우주가 종교적인 경외심을 일깨워 주었던 것은 그것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전체 우주의 가시적인 아름다움의 근저에 놓여 있는 예지성과 지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창조관을 바로 이를 대신하여 등장한 유대적-기독교적인 창조관과 비교하기도 한다. 창세기에 나오는 바와 같이 창조된 세계는 신이 아니며, 신 대신에 경외되어서도 안 된다. 창조된 세계는 자신의 활동과 질서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자신의 고유한 영혼도 갖고 있지 않다. 창조된 세계는 단순히 창조된 것이고 어떤 의미로 보든지 창조자가 아니다. 유대교의 일신론은 자연신들과 모든 중간 존재들을 제거하고, 신과 세계를 분명하게 분리하였다. 기독교에서 나타나는 천사와 성자들의 위계질서는 신과 세계 사이의 균열을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영혼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자연질서에 따르지 않으면서 초자연적 존재들의 초자연적 성격들과 공통점을 갖는다. 실제로 인간의 영혼은 세계 속에 존재하지만 세계로부터 유래하지 않는 것 가운데서 유일하게 신의 형상에 따라 그리고 신으로부터 창조된 그래서 어떤 점에서는 신성을 가진 존재성이다. 그 반면에 하늘과 땅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다른 모든 무리들은 신의 손이 만든 작품이지 결코 신의 모사물은 아니다. 신과 세계의 근본적인 분리는 정신과 자연의 근본적인 분리 속에서 다시금 되풀이되고 반영된다. 무로부터 창조된 자연은 정신을 결여한 체, 단지 신의 의지를 묵묵히 수행한다. 자연은 신의 의지로 말미암아 그저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해서 정신을 결여하고 있는 또는 <맹목적인) 자연에 대한 표상이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자연은 맹목적임에도 불구하고 법칙적으로 활동한다. 다시 말해서 자연은 오성을 지니고 있지도 않은데, 이해 가능한 질서를 내포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것을 가능하게 해준 조건은 (영혼)이 자연의 텍스트에서 삭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삭제된 정도는 자연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보편적으로 영혼이 운동의 원인으로 등장할 필요가 없었던 한도 내에서였다. 실제로 정신을 결여하고 있는 자연 속의 영혼은 비합리성의 원천이 되고, 법칙이 아니라 무질서 만 부추켰을 것이다. 그런데 초월적인 일원론은, 자연신들과 신적인 힘들을 세계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자연원리들의 체계로부터 영혼을 탈락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일원론은, 모든 자연을 <창조>의 동일한 상태로 환원시킴으로써, 세계 내적인 존재의 위계질서를 평준화하였다. 별들과 먼지, 천상의 자연과 지상의 자연은 신 앞에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마지막으로, 운동이란 것이 창조가 시작되던 때에 있게 된 것으로서, 그리고 그 이 후로도 자기 쪽에서는 더 이상의 자발성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서 창조와 함께 계속 보존되어 온 것으로 일단 이해되었을 때라 면, 이때에는 정신은 물론, 영혼까지 결여되어 있는 자연관도 역시 나타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바의 이 자연은 오성이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살아 있지 않는 데에도 운동할 수 있는 자연이었다.
4 이원론의 수확: 영혼과 정신을 결여하고 있는 자연
현대 학문의 형이상학은 기독교의 초월적 신앙이 자신에게 제공해 주었던 가능성과, 그리고 교회론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사이에 이루어진 중세적인 결탁이 그렇게 오랫동안 억누르고 있던 가능성을 포착하었다. 르네상스의 자연철학-서양의 사상에서 가장 <이교도적인> 간주곡(間奏曲ㅡ은 우주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하나의 범신론적인 정령론과 결합시키고자 했고, 또 그 양식은 참된 의미에서의 고전적인 양식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객관적이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적>인 정신적 풍토 속에 있던 17세기는 유대적-기독교적인 초월주의의 엄격함으로 되돌아가서, 여기에서 자발적이 아니라 엄격하게 법칙의 제약을 받는 자연의 이념을 취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현대 학문의 새로운 형이상학은 오랜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으로부터 영적이고 생명력적인 내용을 비워 버린 이원론의 열매를 수확하였으며, 이 이원론의 과정에 새로운 형이상학이 스스로 만들어 낸 이원론을 마지막 장으로 첨가하였다. 새로운 형이상학의 고전적 형식은 데카르트가 현실을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된 실체로 구분한 것이었다. (자연) 은 그 전체가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이 될 여지가 없이 순전히 연장된 실제, 즉 외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데카르트적 구분은 물리학에서의 수학적 방법이라는 화관(花冠)과 함께 순수하게 역학적이고 양적인 자연세계에 대한 상(像)을 위한 마그나 카르타 Magna Charta를 가져 왔다. 여기에서는 이원론의 성격 그리고 이와 더불어 수학의 위상이 결정적으로 변화하였다. 고전적인 양극을 이루었던 형상과 질료, 농동적인 영혼과 수동적인 질료, <지성적인>과 <감성적인〉 것(불균형을 이루는 이 양극의 두번째 극은 자기 혼자서는 결점이 있는 것으로서 자신의 (존재)의 몸을 위해서 첫번째 극을 필요로 한다)은 새로운 형태의 쌍들로 대체되었다. 즉 주관-객관, 정신-자연, 의식-공간성, 내변성-외부세계가 새로운 쌍들이며, 이 쌍들의 두번째 부분은 독립적인 실재성과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기본적인 실재성을 갖는다. 이제 더 이상 <정신>이라는 초월적이고 규범적인 개념이 아니라, 의식되는 것은 어느 것이든 모두 함축하는 단순히 <자아> 또는 <자신>이라는 개념이 비물질적인 것 das Immaterielle을 대변하는 주요 개념이 되었다. 그리고 이 개념의 상관자는 이제 더 이상 <형상)이 아니라, <비자아 (非自我, Nicht-ich)>가 되었다. 플라톤주의를 포괄적으로 부정하는 가운데, 우선은 데카르트 학파의 합리주의적 파토스에 의해 감추어졌다가, 서양의 정신의 운명이 결정된 것이다. 지성과 예지적인 것 das Intelligible, 그리고 예지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플라톤적으로 결합 되어 있던 것은 해체되고, 이제 <자연>은 <물질>과 동일시되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은 전적으로 자기 충족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질료와 동일시되었다. 이것은 고대의 원자론의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지만, 고대의 원자론과 다른 점은 이것이 고전적인 원자론들에게는 생소한 이원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와 함께 이원론은 이원론의 마지막이자 치명적인 변형을 치루게 되고, 뒤이어 곧 관념론과 유물론이라는 그 둘 모두 성과가 없는 것들로 갈라져 버렸다. 그것이 얼마나 감성적이고 정서적이건 간에 상관없이, 간단히 말해서 비합리적이건 간에 상관없이 의식이나 주관성의 갖가지 종류는 이용어들의 긴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이성과 함께 같은 쪽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갖가지 종류의 공간적 존재와 이와 연 관되어 있는 수학적인 형식, 즉 합리적인 형식과 대조를 이루게 되었 다. <물체 Körper〉라는 의미에서의 <질료 Materie)는 실제로 <정신>보다 합리적인 것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끝에서 시작해서 우리가 이전에 방법을 분석하면서 도달했던 것과 똑같은 결과에 도달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das am wenigsten Verständige, 이 맥락에서는 정신이 아니라 질료-옮긴이)이 가장 잘 그리고 유일하게 이해 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데카르트가 <정신은 신체보다 더 잘 (또는 '더 쉽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 했다고 주장했을지언정, 그의 학문적 방법은 적어도 제시될 수 있는 체계로서의 인식이 문제가 되는 한 그 요청을 거짓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정신의 경우에 정신이 쉽게 인식될 수 있다는 말은 정신이 직접적으로 자기를 직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때 직관 된 것은 인식될 수 있는 것의 전체 영역, 즉 이 영역에만 그 방법이 잘 맞아들어가는 연장되어 있는 것의 영역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의 학문적 주제인 자연이라고 불리는 이 합리적인 대상들의 체계 속에서 정신은 어느 작은 일부분에도 속할 수 없 기 때문에, 이성 ratio 자체가 하나의 합리적인 것이 되어 버리고 오성 verstand이 학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의 전체 질서 속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모순이 발생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 자면, 인식하는 사람 자체가 자신의 대상들, 즉 인식될 수 없는 세계 자체와 함께 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정신뿐만 아니라 영혼 그래서 생명까지도 자연에 대한 인식에는 불필요한 잉여적인 것이 되어 버린 것을 보아 왔다.
영혼이 없는 운동은 애씀(노력함)이 없는 힘을 함축한다. 이런 힘으로부터는 목적이 아닌 형식들이 산출될 뿐이다. <힘>은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견고하게 지속되는 것, 즉 양적으로 불변하는 것으로서 한 순간에서 또 다른 한 순간으로 끝없이 이행되어 가는 것이다. 비록 새로운 학문적 통찰은 단지 견고하게 지속되는 운동만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래도 생명은 자발적이고 목적을 가지고 애쓰는 운동을 의미하기때문에, 또 하나의 모순이 더 발생하기에 이른다. 이 모순에의 의하면, 정신이 결여된 것 das Geist-lose과 생명이 없는 것 das Leb-lose 이 이해될 수 있는 것 자체이며, <죽은 질료>가 모든 이해 가능성의 척도이다. 그런데 생명이 물리적 사태의 총체 속에 있는 사태로서 있 는 한, 생명이 이해되려면 생명이 없는 것의 개념에 의해서만 설명되고, 그런 것의 척도에만 의존될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생명체 이론, 즉 동물적인 자동기계 이론(인간을 예외로 취급한 것은 그가 자신의 이론에 일관적이지 못한 측면이다)은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학문론적 입장 전체에서 나온 피할 수 없는 논리적 귀결이다. 데카르트 의 형이상학적·학문론적 입장 전체는 자신의 역사적 시간을 뛰어넘어 근대 학문의 무대를 준다. 라 메트리의 <인간기계>는 (현대의 행동주의 Behaviorismus에서도 여전히 그렇듯이)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상속받은 것이었는데, 물론 인간의 영적인 반쪽은 삭제한 채로 상속받은 것이었다. 현대의 학문은 본질적으로 연장되어 있는 사용 또는 외적인 현실로 이해되는 자연의 무대에 등장하여 자신의 할 바를 연출하기 위해서 양적으로 측정하는 방법론을 사용하기 때문에, 현대의 학문은 생명체를 정신이 결여된 것 그리고 생명이 없는 것의 개념에 의존해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서 공간과 시간 속에 최소 한의 크기의 체계를 설정하고, 모든 주어진 자연대상을 그런 최소한 의 크기로 분해함으로써 이해하였다.
5 수학자인 신(神)이 생명체를 바라보다
현대적인 맥락에서 수학적 자연의 이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리고 이와 함께 진스(비록 그가 맥락을 잘 알지도 못한 채 발언했지만)가 우주를 지은 건축가는 순수한 수학자라고 주장했던 바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나는 지금까지 노력하였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다. 신은 순수한 수학자인 가? 즉 주어진 학문적 상황 속에서 통용되던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것이 피타고라스적 의미는 아님을 알고 있다) 말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창조를 수학적인 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또한 신이 어떤 대상들은 간파하고 어떤 대상들은 간파하지 못할 것인가 를 밝혀보기로 한다. 그래서 (신의 사유가 사물의 원인이어야 하기 때 문에) 어떤 대상들을 신이 창조할 수 있었으며, 또 어떤 대상들을 창조할 수 없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신적인 수학자의 대상세계가 도대체 어떠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지를 그려보기 위해서, 우리는 라플라스가 묘사한 것과 같은 낡은 장 (像)이 아니라, 수리물리학자였던 에딩턴 Eddington의 저서에 의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견고한 대상이 그 속에서 수학적 요소로 해체되어 버리는 그런 수학적 가치의 그림자 세계 Schat- tenwelt에 대한 그의 자세한 묘사 및 이와 유사하게 존재를 표상하는 학문이 이미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고 전제하고 나는 시작한다. 일단 대화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 구체성과 색조의 면에서 나타나는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대상에 대한 상, 즉 널리 흩어져 있는 현실의 매듭들 사이에 존재하는 양적인 관계를 가지고 우리에게 친숙한 대상들을 교체해 버리는 그런 대상들에 대한 상이 우리들의 감각적 대상들에 대한 상보다 더 <참된〉 것이라고 일단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적인 수학자의 시선(視線)이 살아 있는 물체, 즉 단세포이든 다세포 이든 상관없이 어쨌든 생명체에 우연히 닿아 머문다고 가정하기로 한다. 물리학자들의 신은 무엇을 <볼 것인가>?
물리적인 물체로서의 생명체는 다른 기계들이 모여 이루는 한 조의 연결기계와 같은 일반적인 특성을 보여줄 것이다. 대부분은 빈 공간, 섬과 같이 생긴 중심에 있는 기본실체로부터 발생하는 힘들의 기하학의 이해 몇 겹으로 교차되는 빈 공간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생명체의 내부나 외부에서는 특별한 과정이 관찰될 것이다. 이 과정은 생명체의 현상적 통합성을 일상적인 물체보다 더 의문스럽게 나타내 줄 것이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생명체의 물질적인 정체성을 거의 전부 제거해 버릴 것이다. 나는 생명체가 자신의 주변과 물질을 교환하는 물질대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순간순간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자의 눈에는 이처럼 괴상한 존재의 과정 속에 있는 물질적 부분 들이, 즉 이 물질적 부분들의 총합으로 생명체는 주어진 시점에서 존재하는데 어째든, 단지 한동안만 지속되는 과도기적인 내용들로 드러 난다. 한동안만 지속되는 내용들의 물질적 정체성은 그 생명체의 삶 전체의 정체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생명체는 자신의 공간적인 체계를 통해서, 즉 살아 있는 형식을 통해서 이질적인 물질을 교섭하면서 전체로서의 자기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한다. 물질적으로는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생명체는 정작 물질적으로 동일하게 머 물지 않는 것을 통해서 동일한 자기자신으로서의 자신을 보존한다. 기존의 물질의 총합이 실제로 변하지 않고 머물면 만약 특정한 두 시점을 기점으로 살펴보았을 때, 이 두 시점의 각각의 내용들이 서로 같을 때 그리고 이 두 시점 사이에 있는 각각의 시점들과 이 두 시점이 동일할 때, 이 생명체의 삶은 멈춘 것이다. 이 생명체는 죽어 있다(또는 이 생명체의 생명과정은 당분간 정지되어 있다)."
첫 눈에 언뜻 보면 이것은 우리에게 물리학에서 친숙하게 나타나는 대상들을 상기시킨다. 생명체의 역동적인 전체성의 <정체성>은 이 생명체의 특정한 시점상의 변화하는 부분들과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는 생명체의 역동적인 전체성을 수학적으로 기술해 낼 수 있다. 내가 만약 실수하고 있지 않다면. (물이나 공기와 같이 물질적인 매체 속에서의) 파(波)는 그와 같이 간접적인 질서로 기술될 수 있는 요소로 맨 처음 사용된 대표적인 예였다. 진동하는 통합체들 Einheiten이 연 속적으로 이어지면서 파를 형성하는데, 이 진동하는 통합체들은 그들의 운동을 하나하나 따로 실행하며, 그 각각은 개별적인 파의 연결에 단지 순간적으로 참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장되는 방해요소의 포괄적인 형식으로서 이것은 잘 정의된 통합체와 자신의 고유한 역사와 자신의 고유한 법칙들을 가지며, 바로 이러한 것들이 수학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즉 변화하는 기계 Substrat의 직접적인 정체성을 추상화하는 가운데 수학적 분석이 이루어진다. 현대물리학은 이와 같이 연속적인 과정들이 복합되어 형성하는 전체성의 구조를 광 범위하게 다루고 있으며, 이것을 기술하기 위해서 특별한 수학적 기교를 동원한다. 여기에서 형식 Fomi은 고유한 인지적인 kognitiv 중요 성과 함께 물리적인 공연장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이 초월적인 형식은, 다시 말해서 과정적인 구조 Vorgangs-Sturktur는 결정구조 Kris tallstruktur와는 다르다. 결정체의 구조의 경우에는 형식이 견고하게 보존되는 물질에서 분리될 수 없는 형태로 그 물질에 내재되어 있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우리가 이제부터 다룰 점들을 염두에 두면서 지금 언급해야 할 사실은, 수학적으로 기술된 과정적 구조가 어떤 특별한 실재성 Sonder. realitāt을 갖는 것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특별한 실제상 은 각각의 기본과정들이 참여하여 형성하는 통합적인 실재성 vereinte Realität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을 넘어서며, 또 이 통합적인 실재성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는 그런 특별한 실재성이다. 통합적인 실재성은 특별한 실재성을 가설의 형태로 완전히 설명해 주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방정식의 형태로 표현되는 엄격한 등가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이것은 그런 실재성으로서의 하나의 전체는 결코 새로운 특성을 간직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한한 지능을 소유한 존 재에게는 모든 개별적인 요소들을 단번에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여전히 가장 높은 수준의 인식 형태일 것이다.
우리가 〈생명체>로 알고 있는 종류의 다양성들의 시간적 <형식 연 속성 Form-Kontinuität>도 마치 우리가 앞서 언급한 바의 것과 같은 (단 훨씬 더 복잡하기는 하지만) 것인 듯이 보일지도 모른다. 여기에서도 신적인 수학자의 분석은, 라플라스적인 의미에서의 최초의 계산가의 분석은, 감각이 겹쳐서 나타나는 총합에 의해서도 판단이 흐려 지지 않은 채, 결국 그 과도기적인 요소들(상상해 본 전제를 미루리 볼때 과도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들)을 포착할 것이다. 이 과도기적인 요소들은 자기가 지속하는 동안 이미 복합체의 역학적 구성을 위해 직접적인 정체성을 보여주며, 신적인 분석의 유일한 잔재물 들로 남는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실체의 견고한 통합성들을 미루어 보건대, 생명과정은 하나의 연속계열 Serie로서 또는 연속과정들이 모여 이루는 연속계열조직 Seriengewebe으로서 드러날 것이다. 이 연속 계열은 특정한 결합구성체들에 의해서 야기된 각각의 원인에 의해서 움직이는 실질적인 활동자들이다. 우리가 생명체라고 부르는 그 특별 한, 관찰된 결합구성체는 각각의 정체성의 측면에서도 그리고 각각의 부분들이 기능하는 유형의 측면에서도 어떠한 차이를 드러내지 않으며, 더 나아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일정 기간 어떤 결합구성체를 형성하는 데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다른 모든 결합구성체와 원칙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생명체라고 부르는 결합구성체의 안과 밖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인과성도 작용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연 속계열을 통과하는 작은 부분은 일단 연속계열 속에 등장하여 머물 다가 다시 사라질 때, 자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를 따라 자신의 진로를 진척시킨다. 또 다른 후계자가 나타나서 그 의 자리를 차지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이러한 사태가 반복됨으로써 그 생명체의 형식을 집적시키는 연속성에 계속 덧붙여지지만, 이러한 반복은 각각의 부분과정의 개별성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특정하게 복합체를 이루는 형식과 그리고 상호작용하는 이 형식의 정상적인 체계를 위해서 하나의 특별한 본질성을 가정 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순간적인 구성요소들의 흐름과 대조적으로 변화를 거치면서 형성되는 결합구성체적인 지속을 (이와 더불 어 〈전체〉의 연속성을) 우리가 가정하는 것은 일종의 추상에 불과하다. 이것을 수면에서 일어나는 파도를 예를 들어 묘사하면 다음과 같 다. 엄밀히 말하자면, 움직이는 형식으로서 <파도가 계속 치는 것은 전체 운동 속에서 새로운 통합성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서로 이웃하고 있는 기본요소들 사이에서 이 경우로부터 저 경우로 개별적인 운동이 전달되는 가운 데 결국에는 마치 그렇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바의 전체성의 형식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개별적인 운동이 계속해서 전달되면 그 전체상의 형식도 진척된다. 우리가 이런 시각으로 생명체를 조명한다면 물질대사가 생명체의 기능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체가 변화하는 물질의 기능으로 나타날 것이다. 생명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과정 및 이와 더불어 각각의 순간에 나타나는 것들의 총합은 수학적 역학적인 세계상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보편적인 틀의 의미에서 설 명될 수 있고 또 설명되어야만 할 것이다. 목적론적인 무차별성, 활성화하는 원인, 관성, 상수, 최소한의 크기의 부분들, 연장적인 질량 등과 같은 의미에서 말이다. 신적(神的)인 관찰자에게나 가능한 것으 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상적으로 완전한 분석에 따르면, 생명체적 전체의 마치 그런 듯이 보이는 동일성과 개체성은 모든 물리적 환경세계의 과정들의 연결망의 이차적인 결과물로 해체될 것이다. 이것이 해체되는 정도는 여타의 복합적인 물체들이 일상적으로 보여 주는 정도보다 더 철저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자신에게 관여하는 자율적인 본질성을 보여주는 모든 특성들은 최종적으로는 단순히 현상적인, 즉 허구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6 살아 있는 신체가 보여주는 반증
신적인 수학자가 대상을 보는 시각은 우리들의 시각보다 덜 물체적이고 무미건조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금 여기서 언급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시각이 더 참된 것 일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있을까? 만약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는 견고한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살아 있는 물체라는 사실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인식을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신체가 직접적으로 증거해 주는 것에 의거하여 우리는 육체가 없는 관찰자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수학적인 신의 동질적이고 분석적인 시각은 결정적인 사실ㅡ생명의 사실 자체ㅡ을 포착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생명은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개체성이라고, 즉 나머지 부분을 이루는 모든 세계와 대조를 이루면서, 내면과 외부 사이의 근본적인 경계선을 지닌 채ㅡ 실제로 생명이 외부세계와 물질을 교환하는 바탕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ㅡ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는 개체성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눈에 하나의 전체로 보이는 통합성이 단지 우리의 감각지각의 결과일 뿐이고, 그것이 존재론적인 위상을 갖지 못하고 다만 현상학적인 위상만을 지닌다는 사실이 그 밖의 다른 모든 축적형식 Aggregatform에 대해서는 타당한 주장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유독 <이것〉으로서ㅡ이 돌덩이로서, 이 물방울로서의 ㅡ정체성 Identität은 축적된 것의 상대적인 존속성에 바탕을 두며, 최종적으로는 구성요소들의 직접적인 정체성들에게로 환원될 것이다. 구성요소들이 흩어지면 빌려온 그리고 간접적인 정체성도 사라지겠지만, 기본적인 부분들의 정체성은 여전히 불변하는 것으로 표상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존재에 관한 한 자연은 예외적으로 하나의 존재론적인 경이를 보여주고 있다. 지상적인 조건이 보여주는 세계적 우연은 하나의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 가능성을 나타내 준다. 물질적인 체계들의 가능성, 즉 다양한 것들의 통합성들은 우리가 우리의 종합적 직관에 의거해서 그것들을 그런 대상으로 간주함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부분들을 서로 집결시키는 힘들의 단순한 총합 덕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물질적인 체계들은 물질적인 체계 때문에, 물질적인 체계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지속적으로 물질적인 체계로부터 스스로를 충족시키면서 존재한다. 여기서 생명체의 전체성은 생명체의 활동 과정에 직접 통합되어 있다. 형상은 결과가 아니라, 물질적인 축적의 원인이다. 물질적인 축적과정이 그때마다의 생명의 전체성이다. 통합성은 여기에서 변화하는 복수성을 매개로 자기 스스로를 통합하는 특성을 갖는다. 동일성 Selbigkeit이 유지되는 한, 동일성은 어떤 과정을 거치는 동안 언제나 다른 과정의 흐름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기를 끊임없이 쇄신한다. 이렇게 생명이 자신의 능동적인 존재 통합을 성취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비로소 단순히 현상학적인 개체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개체의 개념을 제시해 준다.
이 존재론적인 개체, 각각의 순간에도 보존되는 자신의 존재, 이 개체의 지속 및 이 개체가 지속되는 동안 자신의 동일성을 보존하는 것 등은 본질적으로 그의 고유한 기능이며, 그의 고유한 관심이며, 그가 지속적으로 성취해 내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보존하는 존재의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생명체가 자신의 물질적인 실체에 대해 관계하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종류Art의 측면에서는 재료들(Materialien,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구성요소- 옮긴이)이 생명체에게 본질적인 것이며, 유독 <이것임 Diesheit〉이라는 특성의 측면에서는 재료들은 우연적인 것이다. 생명체는 순간순간마다 그러한 재료들이 실제로 합쳐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각 순간이 연속되는 과정 속에서의 어느 한 순간적 시점에서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재료들의 총합과 생명체가 전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체는 그것의 형상, 즉 자기자신인 바의 형상과 동일하다. 비록 생명체가 물질적인 재료가 조달되어야 한다는 조건에 종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체는 그러한 물질적인 동일성으로부터 독립적 인 어떤 존재이다. 생명체의 기능적인 정제성은 생명체의 실제적인 정체성과 동일하지 않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생명체적인 형상은 질료에 대해서 결핍적인 자유의 관계에 있다.
7 형상과 질료
우리는 생명체에서 나타나는 자유라는 이 새로운 요소, 특히 형상에 주목하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는 독립적이고 자기 스스로를 실현하는 형상이 생명의 본질적인 특성임을 보았다. 이와 함께 존재의 영역에서는 처음으로 질료와 형상의 차이, 즉 생명이 없는 존재 das Leblose와 연관지어 언급될 때에는 순전히 추상에 불과한 이 차이가 실질적인 차이로 대두되었다. 물론 존재론적인 관계의 측면에서 전적으로 역전되어서 말이다. 형상은 본질이 되고, 질료는 부차적인 속성 Akzidenz이 되었다. 존재론적으로 표현하자면 생명체의 결합구성체 속에서는 질료적인 요소가 실체가 되기를 멈추고(실체는 자신의 고유한 차원에서는 계속 실체로 있지만), 이제는 오히려 기체 Substrat 로 나타난다.
7-1 형상의 독립성과 종속성
형상의 독립성은 분리되어 있는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형상과 질료가 구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모습은 세계의 부정될 수 없는 특성 자체이다. 이런 모습은 물론 형상이 각각의 순간의 물질적인 토대와 만나는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생명체의 각각의 순간은 언제나 질료의 특정한 다양성의 형상이다. 그러나 물질의 영역에서는 따로 떼어서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이 둘을 구별한다거나 또는 형상을 일종의 추상인 반면에, 즉 실체와 관련지어 언급될 수 있는 형상에 대해 부차적인 속성으로서 거론될 수 있는 존재로부터 추상해 낸 것인 반면에, 역으로 생명의 차원에서는 이 둘의 차이가 구체적인 것이며, 각각의 순간의 횡적인 단면에서 실제로 실현되는 균일화야말로 형상의 생명전체를 미루어 볼 때 일종의 추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존재가 거치는 긴 시간적 과정의 어느 한 시점을 횡적으로 자른다는 것 자체가 생명체의 경우에는 이미 하나의 추상이기 때문이다. 형상의 현실성은 순간적인 질료성들 Stofflichkeiten이 연속되는 과정에 내포되어 있고, 순간적인 질료성들의 연속은 형상을 일정 기간 지속시켜 주는데, 오직 이러한 지속성이야말로 형상과 질료가 구체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논리적인 속성이 아니라, 생산적인 실현이다. 질료적인 총체성의 현재 시점-각각의 현시점-이 동일한 총체성을 충만하게 vollständig 보여주고 그리고 이론적인 지표로서 각각의 모든 다른 현시점으로 대체될 수 있는 반면에, 물질적으로 아직 그렇게도 충만한 생명체의 현재적 횡단면 Jetzt-Querschnitt은 본래적인 것 이외, 즉 생명 이외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생명의 형상은 오로지 시간적인 것에서, 그리고 생명의 기능적 전체성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시간성은, 동시적인 공간이 아니라, 생명체의 형상전체성
Fortganzheit의 대책이다. 그리고 이 시간상은 무차별적으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적인 운동을 위한 시간이나 그리고 물질적 상태들의 결과를 위한 시간으로서의 무차별적으로 벌어져 있는 부류 따위는 아니다. 시간성은 생명형식 Lebensform 자체를 드러내 주는 질적인 요소이다. 말하자면 생명형식의 통합성을 기체들의 다양성과 함께 연결시키는 수단이다. 이 연결은 생명이 역동적으로 진척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다.
질료로부터 물질적인 형상 materielle Form을 추상화시켜서 그것을 존재로서 가정하도록 유도하는 일, 다시 말해서 물질적인 형상의 기본적인 비독립성을 간과한 채 추상적인 계기들을 구체적인 요소들로 둔갑시켜 해석하는 일(허다한 철학의 뿌리들에서 엿보이는 존재론적 오해)은 우리에게 혼란을 가져다주기 쉽다. 한편 이와 반대로, 살아 있는 형상 lebende Form과 그것의 물질적인 기체를 일치시킨 다음, 이것을 생명체의 정체성으로 이해하는 것도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자기정체성은 생명이 없는 존재에게는 단순히 논리적 인 속성에 불과하며, 이렇게 논리적인 속성의 차원에서 말하면 동어 반복 현상만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존재의 자기정체성은 존재론적으로 내용이 더욱 풍부하고, 더 나아가 살아 있는 존재가 물질적인 차원에서 기능하는 것에 대비해 보면 자기정체성은 언제나 성취되어 있는 특성을 갖는다.
살아 있는 형상이 자신의 물질적인 구성요소를 단번에 전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생명체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물질적인 구성요소를 주고받는다는 사실ㅡ그러면서도 자기자신으로서 머무른다는 사실ㅡ은 살아 있는 형상의 독자성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살아 있는 형상의 물질적인 구성요소는 특정한 순간 마다의 것이고, 이 순간마다의 것이 바로 살아 있는 존재의 기능이다. 고정된 동일성의 물질적 차원에서 바라보면, 각각의 순간의 구성요소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살아 있는 형상은 단지 물질들이 공간·시간적으로 통과하는 영역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물질들은 시간과 자신의 고유한 법칙에 따르면서 그리고 자신의 한계 속에서 머무르는 물질 들이며, 겉으로 마치 그런 것처럼 드러나는 통합성은 물질들이 통과 하는 과정에서 나타내는 복수성이 보여주는 어떤 한 결합구성체적 상태에 불과하다. 그런데 형상의 역동적인 정체성의 차원에서 보면 살아 있는 형상은 상대성 속에 있는 현실적인 것이다. 살아 있는 형상은 세계질료가 자기를 관통하도록 내버려두는 수동적인 어떤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활동하는 가운데 세계질료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고 또한 밖으로 내보내고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를 형성해 간 다. 생명이 없는 존재의 경우에 형상은 살아 있는 질료의 변화하는, 구성적인 상태, 즉 부차적인 속성 Akzidens에 불과하다. 살아 있는(생명이 있는) 존재의 형상은 능동적이고, 조직하는 형상이다. 여기서는 오히려 물질적으로 변화하는 내용이 바로 그 존재가 정체성을 가지고 머무는 상태들이다. 복수성은 살아 있는 형상의 통합성이 작용하는 범위이다. 그리고 생명형식은 물질이 통과하는 영역이라고 표현하는 것보다, 물질적 구성요소들이 과정적으로 연속되는 사태는 그 형상이 자기자신을 형성시키는 존재의 과정에 나타나는 과도기적 단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질문할 수 있다. 만약 두 입장들이 모두 가능하다면, 동일한 사태를 다른 관점에서 제각기 기술한 어떤 등가적인 내용이라면, 도대체 한 입장이 다른 입장보다 <더 옳다>는 것이 무슨 말 이냐 하고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왜 물리적인 세계상은 그것의 규범이 하나의 입장에 의해서는 충족되는데 다른 입장에 의해서는 저지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질 문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기로 한다.
7-2 정체성의 문제
우리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생명체의 기본적 자유는 생명체의 질료에 대해서 생명체의 형상이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한다는 데 있다. 엄격하게 물질적으로 세계를 기술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생명체의 독립성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거나 현상을 착각하고 있는 데서 기인하는 말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견해가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면, 생명의 출현과 동시에 나타나는 생명체의 독립성에 대한 이야기는 <질료〉의 역사에 있어서 존재론적인 혁명과 같은 것이다. 이 독립성 또는 자유의 발전과 증대는 생명의 발달사가 보여주는 모든 진보의 원리이다. 생명은 자신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더 앞서가는 혁명의 모습을 보여준다. 생명은 자신이 취한 진로에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데, 이것은 자유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다. 최초의 발걸음은 물질대사를 매개로 하여 물질과의 직접적인 동일성 형상이 해방된 사건이었다. 동시에 이 사건은 물질에 해당되는 견고하고 공허한 자기정체성의 유형으로부터, 말하자면 이 유형은 매개되고 기능적인 유형의 정체성을 위해서 채택된 자기정체성의 유형인데 어쨌든. 그런 공허한 자기정체성의 유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정체성의 본질은 무엇일까?
자신의 공간-시간 위상 Raum-Zeit-Stelle과 동일시될 수 있는 질량의 미세 부분들은 아무런 자신의 활동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인 바 대로 존재하며, 직접적으로 자기자신과 동일하고, 자신의 존재의 활동성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자신의 순간의 자기정체성은 공허한 논리적 A=A이다. 자신의 연속되는 과정이나 지속기간은 공허한 머뭄이며, 새롭게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머뭄 Bleiben이나 견고하게 보존되어 있음 Beharren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머름 속에서 미세 부분은 차원들ㅡ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들ㅡ의 연속성 덕분에 계승적으로 <동일하다>. 이 차원들 속에서 <그의 >진행 과정상의 연속계열이 일어난다. 그것은 이것이고 저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지금 여기에 있고, 저것은 지금 저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것으로 머문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그 밖의 다른(나중의) 시간-공간의 어떤 점에 대해 동일한 것으로 이룬다. 왜냐하면 모든 중간 위상들이 하나하나 연속되어 지금의 위상에서 나중의 위상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모든 중간 위상들은 말하자면 하나의 중간 위상에서 그 다음의 위상으로 이어지며, 결코 그들의 연결고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속은 미세 부분의 <진로>를 형성하는데, 만약 이 진로가 불연속적이라면 이를테면 이 진로에 어떤 틈이 있다면, 우리는 동일화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여기에서 우리는 동일성의 개념을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권리 조차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 기본요소들에게 (화이트 헤드가 한 것처럼) 어떤 내면성, 즉 기억과 같은 것을 통해서 실제로 발생하는 것들의 불연속성을 연결시켜 주는 내면성을 부여하는 경우 에는 예외가 될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생명의 영역으로부터 전이된 어떤 것이고, 노골적으로 사변적이다(이 장의 부록 2를 참 조),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기술된 경우에는, 무엇의 〈동일성>은 함축 되어 있는 연속체 속에서의 항상적인 현전에 불과한 것으로 가정된다. 그러므로 물리적 개념들에 따르면 단지 외적인 정체성의 원리밖 에 있을 수 없다. 개체화의 원리들 principia individuationis (시간과 공간) 로부터 이것들의 담지자들에게 부여되는 외적인 정체성이다. 순수하게 물질적인 통합체와 연관되어 있는 정체성의 내적인 원리에 대해 서 우리는 알고 있는 바가 없다.
이와는 반대로 생명체적 정체성 organische Identitat은 전혀 다른 종류의 정체성이다. 어려움을 안고 물질대사를 하면서 생명체의 형상이 지속하는 상황에서는 그리고 자신의 구성요소들이 끊임없이 전환하는 상황에서는, 외적인 정체성 außere Identitat에 상관하는 한 극으로서 고정적으로 머무는 어떤 기체는 개별적인 <노정 Bahn>은 물론 노정들의 한 <묶음>도 가질 수 없다.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각각 의 기체를 넘어서는 집합적인 정체성, 즉 전체의 내면적 정체성 innere Identität은 변화하는 각 단계의 정체성을 넘어서는 어떤 정제성이어야 한다. 그러한 내면적 정체성은 형상의 모험 속에 함축되어 있고, 우리의 관찰에 포착되는 자신의 외적인 형태학적인 증거로부터 비임의적이고 귀납적으로 추론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종류의 귀납인가? 과연 누가 귀납적으로 추론하는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관찰자가 어떻게 물리적인 발견물에 대한 단순한 분석이 말해주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실제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관찰자는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관찰자는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가설로 세운 <순수한 수학자>와는 달리, 관찰자는 준비되어 있어야만 한다. 관찰자는 생명을 근거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생명체적 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경험을 가지고 자기가 문제의 그 <결론을 내리는 일>-이 일은 생명체가 이미 실제로 끊임없이 하고 있는 일이다-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다고 요청해야 한다. 이렇게 요청하는 것이 하나의 장점인데, 이 장점은 인식론의 역사에서는 완강하게 거부되고 중상모략을 당해 왔다. 이 장점은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즉 우리가 신체라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는 장점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인 바의 우리로서 준비되어 있다. 오로지 이런 식으로 가능한 내삽 Interpolation에 의거해서 물질대사적인 연속성의 단순히 형태학적인 (그리고 이런 것으로서 무의미한)사태는 멈추지 않는 활동으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진척되어 있음은 자기자신을 진척시키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경우를 기술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자기 자신>이라는 개념을 소개해야 된다. 이것은 그런 자기자신으로서의 생명과 함께 내면적 정체성이 세계로 들어오고 이로 말미암아 현실성의 남은 부분으로부터의 생명의 자기 고립도 일어나는 데에서 엿 보인다. 동질적으로 상호 관계에 있는 존재자들의 우주 한가운데에서 드러나는 과격한 개체성 그리고 이질성이야말로 생명체의 자기자신성 Selbstheit이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행해 가면서 자신을 산출하고, 항상 새로이 자기를 주장하고,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동질화시키는 물리적인 자기자신성의 힘들에 저항하는 하나의 정체성은 사물의 모두와 근본적으로 긴장 관계에 있다. 위험한 양극화 속에 등장하는 생명은 자기자신이 아닌 것을 취하며, 자신의 내면적 정체성이 외적인 정체성에 의해 경계지어진 채 절대적인 이질성의 특성을 갖는다. 자기자신성을 산출시키는 일은 생명체의 한계들 피안에 있는 모든 것을 생소한 것으로서 그리고 어떻게든 대립적인 것으로서 만들어 버린다. 생명체가 그 속에서 그리고 그것에 대항하면서 자기를 보존해야만 하는 그런 <세계>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생명체가 이처럼 이질성으로서 보편적인 대립자가 되지 않는다면 생명체의 자기자신성은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자신과 세계, 내면과 외면이라는 이 양극성은 형상과 질료를 보완하는 것이다. 이 양극성 속에서 생명체의 자유는 언제든지 모든 모험과 곤란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는 근본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194
8 변증법적인 자유
우리는 자유의 개념 속에 생명을 해석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생성의 비밀에 다가갈 수 있다. 우리가 주추측하는 사실ㅡ 나 개인적으로는 하나의 강한 가설을 설정하고 있다ㅡ은, 생명이 없는 실체에서 생명이 있는 실제로의 이행을 근거지어 주는 원리가 이미 존재의 심연에 있는 경향성 자체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개념은 가장 기초적인 생명구조를 묘사하는 데 에도 아주 유효하다. 20) 그것을 묘사하는 의미에서의 <자유>는 그러한 생명의 존재론적인 기본특성이다. 더 나아가 이미 드러나 있는 사실 이듯이, 자유는 생명이 더 높은 단계들을 향해 진척되어 가는 전 과
각주
20) 사태를 기술하는 차원에서 인과론적으로 원인을 추적해 가면서 타당한 가치를 끌어내는 방식은 매우 만용을 부리는 사변이 하는 일이다. 그것은 논리적인 시 종일관성과 함께 원칙을 더욱더 예리하고 완전하게 현현시키는 모습으로 전개된 다. 우리가 만약 그 과도한 논리적 일관성을 그것이 아직 미발달된 상대로 처음 등장하는 때부터 이미 헤아린다면, 우리는 위에서 말한 사변적인 반용에 빠질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이후로 등장하는 모든 논리적 전개도 마찬가지 사태에 빠질 것이며, 결국 이는 전체 사 태 분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에서 엿보이는 생 산적이고 가시적인 목적추구성은 자신의 출발점에서 미루어 볼 때, 외도했던 목적들과는 순전히 다른 어떤 결과를 산출하는 일을 매우 불확실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론적인 자유의 개념을 가지고 물질에 의존하고 있음을 발 견하게 된다. 물질 속에서는 목적들이 엿보이지 않으나, 목적들은 생명이 멋지게 연출되는 무대 위에서 물질의 비밀스런 잠재성을 폭로시켜 준다. 생명이 증거해 주는 바에 따르면, 생명의 마지막 단어가 아닌, 견고하고 부자유한 자기 정체성 은 생명의 첫번째 증거가 될 필요도 없다. <실제>의 형이상학적 역사는 두 측면 으로 모두 초월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존재를 사변적으 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따르면 물질은 존재의 방식이나 상태로서, 존재 론적인 한 기간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우리는 생명에 대한 업 격하게 현상학적인 해석과 관계하는 것이다. 각주 끝.
정에 걸쳐 활성화되고 있는 원리이며, 적어도 각각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결과이다. 생명은 각 단계마다 저급한 형태의 자유 위에 더 고급한 형태의 자유를 간단한 형태의 자유 위에 더 풍부한 자료를 구축에 가면서, 즉 자유 위에 자유를 구축해 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자유의 개념과 관련된 용어들을 사용하면 우리는 생명의 발전과정 전체를 설득력 있게 해석해 낼 수 있을 것이다(이 해석에 의거해서 나중에 몇 가지 구체적인 실험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철학적 생물학의 과제는 생명체가 높은 단계로 발달해 가는 과정에서 배의 자유가 실현되는 것을 추적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의도하고 있는 목적을 위해서는 몇 가지 점만 언급하면 충분할 것이다. 우리는 물질대사를 통해 이미 결정되는 기본적인 단계를 그 자체 속에 함축 하고 있는 속성들 및 계속되는 작업을 진척시키기 위해 진화하는 속성들의 몇 가지를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속성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들이 생명의 본질에 속한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8-1 자유와 필연성
우리가 어떻게 말하던 간에. 맨 처음으로 말하고 싶은 바는 생명체적 자유의 철저하게 변증법적인 특성이다. 말하자면 생명체적 자유가 균형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상응하는 필연성에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이 필연성은 자유에서 떼어낼 수 없는 고유한 그림자로서 자유를 따라다니고, 그래서 더 높은 정도의 독립성으로 상승해 가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각각의 자유의 단계에서도 역시 이 자유의 더욱 짙어진 그림자로서 다시 등장하는 필연성이다. 이 두 측면은 생명체의 기본적인 양태, 즉 물질대사와 같은 기본적인 양태에서 엿보인다. 물질대사는 한편으로는 생명체적 형상의 능력, 말하자면 자신의 물질을 교환하는 능력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생명체가 물질대사를 해야만 한다는 맥락에서, 물질대사는 생명체에게는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이기도 하다. 생명체적 자유의 〈할 수 있음 Karin>은 <해야만 함Muis)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실행하는 것이 곧 생명체적 자유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형상의 독립성은 분리되어 있는 존재를 의미 하는 것이 아니며, 기체 Substrat와 생명체의 형상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곧 비물질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언급한 바 있 다(세계 실체 속에서의 기능적인 funktionell 자유의 정도와 관련해서 불 때, 비물질성은 모든 정초지어 주는 관계를 표시한 좌표상의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변에 깔린 토대는, 그것이 아무리 치켜올과 갔다고 해도 언제나 그대로 토대로서 머물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형상은, 시간적으로 존재하면서, 저마다 각각 물질적으로 구체적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형상은 자신의 이 일회적인 구체성 속, 즉 그 순간의 특정한 물질적 총합과의 만남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살아 있는 형상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자유>는 자신의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생명체적 형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의 <할 수 있음>은 <해야만 함>으로 된다. 그러므로 생명체의 특징적인 가능성인 물질대사는 물질의 세계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동시에 생명체가 떠맡아야만 하는 부담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도 생명체는, 그가 존재하는 한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일은 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그는 존재하기 위해서 활동해야만 한다. 그리고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그는 활동을 멈출 수 없다. 해야 하는 자유이지 멈출 수 있는 자유는 아닌 것이다.
질료에 대한 형상의 우월성은 동시에 질료를 필요로 하는 운명의 제약을 받고 있다. 질료를 필요로 한다는 특성은 순전한 질료로서의 자족적인 존재[생명이 없는 물리적 존재]에게는 매우 생소한 특성이며, 생명의 힘 Macht과 마찬가지로 아주 특유한 생명의 특성이다. 생명이 보여주는 이러한 힘이 가진 동전의 뒷면은 곧 생명이 질료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결핍성이다. 생명의 자유 자체는 자신의 고유한 필연성이다. 이것은 생명의 뿌리에 그리고 물질대사라는 가장 기본적인 형상 속에 자리잡고 있는 자유의 이율배반이다.
8-2 자기자신과 세계: 결핍성의 초월
위에서 언급한 사실에 뒤이어 우리가 두번째로 관찰한 바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고자 한다. 살아 있는 형상은 물질을 교환하기 위해서 물질을 조달해야 하는데, 살아 있는 형상은 그것을 자신의 외부에 있는 생소한 <세계>에서 발견한다. 이로 말미암아 생명은, 생명의 능력과 결핍성의 충족이라는 특이한 관계 속에서, 세계로 향해 있다. 생명의 욕구(Bedürfnis, 즉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조달하려는 욕구-옮긴이)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 있는 곳을 향해 밖으로 나간다. 생명의 자기 관심은, 자기에게 필요한 새로운 물질을 획득하는 가운데 발동하면서, 외적 현실과 만나는 점에 있어 서는 근본적으로 개방되어 있다. 욕구하는 모습으로 세계에 매어 있으면서, 생명은 세계로 향해 있다. 향해 있는 모습으로 (세계로 개방 되어 있는 모습으로) 생명은 세계와 관계한다. 세계와 관계하는 모습 으로 생명은 세계와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으로 생명은 경험할 능력이 있다. 자신의 존재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조달하는 활동 속에서, 물질을 조달하는 자신의 활동 속에서, 기본적으로 생명은 스스로 끊임없는 만남을 시도한다. 생명은 경험의 가능성을 활성화한다. 경험하면서 생명은 애초부터 그리고 경험의 근 본적인 조건으로서 <세계>를 <가지고 있다>. 결핍에서 단순히 초월하는 활동의 차원에서도 이미 생명은, 자기가 생명력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영역에 대립해서 지니고 있는 자신의 내면적 정체성의 폐쇄성을 허물고 세계라는 지평을 향해 자신을 개방한다. 그러므로 세계를 가짐은 생명의 초월이다. 이 초월 활동 속에서 생명은 필연적으 로 자기자신을 넘어서고 자신의 존재를 하나의 지평 속에서 확장시킨다. 세계를 가짐은 그 경향성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미 생명체적인 결핍성과 함께 생명체에게 주어져 있다. 생명체적 결핍성은 자기 나름대로는 형상을 취하고 있는 물질-자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런 식으로 생명의 사태의 변증법은 존재론적 자유의 근본적인 실증성(형상-물질)으로부터 생물학적인 필연성(물질에 대한 종속성)의 부정성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들을 넘어서서 다시금 이 둘을 좀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시키는 초월의 긍정성으로 나아간다. 초월 속에서 자유는 필연성을 이겨낸다. 또한 초월 속에서 자유는 세계를 가지는 능력 덕분에 필연성을 넘어선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세계를 향하는 생명의 자기 초월은, 감성적인 것 속에서 하나의 세계를 지금 가지는 상황으로 귀착되는데 어쨌든, 생명체의 존재 속에 그런 모습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유와 필연성의 기본적인 이율배반의 더 높고 더 포괄적인 단계들을 약속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우리는 생명에게 고유한 것이자, 또한 보충적인 자유처럼 특이한 속성을 지니는 필연성의 계기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생명이 외부에 있는 물질에 의존하고 있음은 생명의 존재론적 자유의 뒷 면이다. 물질 자체는 그런 뒷면을 갖고 있지 않다. 각각의 물질적인 요소는 자신의 단순한 자기정체성 속에 있고 또한 자신의 존재 속에서 충족적인 상태로 있다. 물질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사실은 물질적인 총체성의 기능일 수 있다. 이 기능은 각각을 우주적인 전체의 부분으로서 결정짓는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요소의 고립성은 과도기적인 추상이다. 그러나 우주적인 결정성 안에서는 물질의 특수한 존재가 자기 충족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이웃과의 모든 상호 작용 속에서 이웃들과 지속적으로 차이를 보이며, 생소한 품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생명의 결핍성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인 구성요소를 넘어서며, 언젠가는 자신이 긴지고 있는 하시면 지닐 수 있는 어떤 가능적인 물질로서 생소한 물질들과 관계하며, 현재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마저도 언젠가는 생소한 것들이 되어 버릴 어떤 것으로서 단지 조건적으로만 소유하고 있다. 더 높은 단계에서 언제나 더 넓은 세계를 자기자신에게 열어가는 모든 생명의 본질적인 자기 초월은 결핍성에서 야기되는 자기 초월 속에 바탕을 두고 있다. 외부 물질에 대한 의존성은 생명의 결핍성이 가능적으로 충족될 수 있는 영역을 시사해주고, 또한 모든 생명의 기본특성으로서의 지향성의 모습을 갖추어 준다.
8-3 내면성의 영역
세번째로 이 초월은 내면성 또는 주체성을 포함하는데, 내면성은 느껴진 자기자신성의 속성에 의거해서, 비록 그 목소리가 아무리 적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지평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 대처한다. 욕구의 충족이나 해소가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내면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내면성을 느낌, 자극감지 그리고 자극퇴치, 애쓰는 성향 또는 생명력 등 어떻게 부르든 간에 상관없이 이것은 일정한 정도의(극도로 미세한 정도까지 포함하여) <알아채고 있음 Gewah rsein> 속에 자신의 현존과 이것의 진척을 추구하는 생명체의 절대적인 관심을 감추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내면성은 <자기 중심적>이다. 그리고 내면성은 동시에 사물의 나머지 부분과 자신 사이에 있는 질적인 틈들을 연결할 때, 자신이 선택하는 관계의 양태를 취한다. 자신의 물리적인 주위에 있는 물질적인 사물들에게 보편적으로 통합되는 대신에, 생명체는 자신의 특유성과 분투성을 가지고 선택하는 관계를 맺는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생명의 자기 초월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부분적으로 반복한다. 그러나 개방되어 있는 지평은 촉발될수 있음과 자발성을 의미하며, 외부로 내던져져 있음은 외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이 감각적 sensitiv이기 때문에 생명은 능동적일 수 있다. 생소한 것에 의해 촉발된 생명체는 이를 통해 자기자신을 느낀다. 자신의 자기자신성은 자기 밖에 있는 타자성에 의해 동 요되고 또 그 타자성에 대항하여 자신을 빛낸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자기자신성은 자신의 개체화를 지키면서 타자성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한다. 그러나 동시에 단순히 내면적인 자기자신만의 동요상태를 넘어서서, 그리고 이 동요상태를 통해서 자기를 촉발시키는 자의 현전을 그는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기를 촉발시키는 자가 보내는 메시지 가 아무리 모호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포착한다. 처음으로 어렴풋이 주관적으로 자극을 감지할 때, 어렴풋한 접촉을 체험할 때, 폐쇄되어 있는 존재는 자신을 조금 열면서 하나의 차원을 열어 놓는다. 이 차원 속에서 사물들은 객관의 양태로 있는 새롭고 다양한 존재를 획득 한다. 이것은 자기를 내보이는 내면성이다. 마치 욕구에 의해서 충동 된 관심이 다른 것을 찾듯이, 초대받지 않은 타자의 현재는 내면성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초대받지 않은 타자의 현재마저도 만남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는 생명체에게는 이미 예견되고 있다. 그리고 행동을 통한 거절 역시 감각지각을 통한 자기소유화(즉 내면화)를 전제로 한다. 자기초월은 존재론적인 궁핍 속에 자신의 근거를 두고 있 어서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자기초월은 밖으로 향한 운동이다. 그러나 밖에서 주어지는 것을 감각하는 수용성, 즉 초월의 수동적인 측면인 이 수용성은 생명으로 하여금 맹목적인 역동성이 되는 대신에 선택적으로 행동하고 <정보를 입수하도록>만한다. 그럼으로써 내면의 정체성은 내면적 정체성이 밖을 향해 개발 되어 있는 가운데 사물들과 대화하는 주제의 극 Subjektpol이 된다 이로 말미암아 생명체적 주체의 개별화로부터 개별화의 정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다시금 우리는 여기서 생명의 모든 존재론적인 특성에 스며들어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생명으로 하여금 어느 모로 보나 물질적 존재의 한 패러독스로서 자신을 연상시키게 만드는 변증법적인 구조에 직면한다.
8-4 시간의 지평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점은 다음과 같다. 생명의 초월이라는 용어와 함께 우리는 생명이 하나의 지평, 아니면 지평들과 자신의 시점에서의 정체성을 넘어서서 관계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물의 현전과 함께 하는 주위세계의 지원이나 동시적인 공간 속에서의 연관성이 확장되어 있는 것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욕구에 의하여 충동된 자기 관심도 역시 시간의 지평을 연다. 이 지평은 외적인 현재성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미리 앞서 있음을 포괄한다. 생명체의 연속성은 각각의 모든 순간마다 바로 그 순간의 결핍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렇게 생명의 얼굴은 앞을 향하여 그리고 밖을 향하고 있다. 바로 거기에 자신의 <여기>가 있듯이, 생명의 <지금>은 <이제 곧>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생명은 자신의 고유한 직접성의 <피안에서> 동시에 양쪽의 지명 속에 위치해 있다. 생명은 자신의 자유의 필연성 탓으로 앞을 내다보기 때문에 곧 밖을 향해 내다볼 수 있다. 그래서 공간적인 현재는 말하자면 시간적으로 미리 앞서 있음을 통해서 조명됨으로 말미암아 밝히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어느 순간에는 충족 또는 실망의 형태로 과거가 되어 버린다. 우리가 물질대사를 하는 존재의 근원본질 Urwesen 속에서 발견한 초월의 요소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충만하게 표출한다. 생명이 그곳을 향하여 끝없이 초월하는 두 지평들은 생명체적 형상 organische Form으로 하여 자신에게 고유한 물질과 과도기적인 관계를 맺도록 만든다. 어떻게든 스스로를 진전시켜 나가야만 할 한 존재에게 앞으로 다가올 단계를 항해 내면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 생물학적인 시간을 구성한다. 자신이 진전해 나가는 데 필요한 물질을 포함하고 있는 비자신
은 함께 현전하고 있는데, 이 함께 현전하고 있는 비자신으로 향한 외적인 준비는 생물학적인 공간을 구성한다. <여기>가 <저기>로 확장되어 가는 것처럼, <지금>은 <미래>로 확장되어 간다. 지금까지 언급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생명체가 진전해 나가는 전 과정을 관통하면서 생명체적 지금의 시점의 초월이 만들어 내는 시간의 내면적 지평 속에서는, 생명체가 노력하는 가운데 미리 미래적인 지평에 있는 것을 선취하는 일이 오히려 기억 속에서 회상되는 과거적인 일이 지속되는 것보다 더 근원적이다. 미래는 과거보다 더 근본적 fundamental이다. 기억의 어떤 특정한 척도는 지속되는 생명의 정체성의 주관적인 형상으로서 모든 생명의 곁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재 등장하고 있는 각각의 지금 속에서 과거를 수용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것으로서의 〈역사성>은 그것이 아무리 짧은 역사성이라고 할지라도 내면적 연속성, 즉 지속의 선결조건이다. 만약 관심이 생명의 내면성의 첫번째 원리라면, 생명의 부딪힘 이전에 자신을 여는 주도적인 시간의 지평이 바로 미래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단순히 외적이고 물리적인 것에 유효한 시간들, 즉 이전과 이후, 선행하는 시점과 뒤따르는 시점과 같은 일직선적인 시간들은 생명체의 영역에 적용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물리적인 것에 적용되는 시간들은 전적으로 이미 있었던 것에 의해서 결정되는 반면에 (적어도 그렇게 검정 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생명은 언제나 앞으로 있을 것, 그리고 지금 곧 앞으로 보내질 어떤 것이다. 생명의 경우에는 과거와 미래의 외연적인 질서가 내포적으로 정반대이다. 이것이 생명의 목적론적이고 목적주의적인 본성의 뿌리이다. <목적성 Zweckhaftigkeit)은 일차적으로는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역동적인 특성이며, 질료에 대해 상대적으로 형상의 정체성 및 자유와 겹쳐 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목적성은 물리적 조직의 구조가 처해 있는 한 사태이다. 이 사태는 생명체의 부분들(<기관 Organe>)이 생명체 전체의 목적에 봉사하는 관계와 생명체의 기능적인 유용성 자체 속에서 언제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기억을 간직하면서 우리가 토론하려고 하는 분석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9 신적인 수학자: 그의 시각에 대한 비판
9.1 연장되어 있는 것에 대한 분석에 의해서는 포착되지 않는 생명
우리가 조금 전 앞에서 묘사한 특성들은 물리적인 대상들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곳에서는 설자리가 없다. 그리고 생명체는 우리가 부정할 수 없듯이 물리적인 대상임에는 틀림없고 또 그래서 외연적인 공간 - 시간적인 범주에 의해서 동일한 형태로 기술될 수밖에 없다. 외적으로 생명체의 조직은 하나의 질서로서 자신을 충만하게 현현시키며, 생명체의 행동태도는 그러한 질서의 지극히 예민한 역학으로서 자신을 현현시킨다. 생명에 대한 물리화학적 분석은, 물리적 질서들의 보편법칙 아래 하나의 특별한 경우로서 충분히 가정되어야만 하는 두 가지 사태가 완전히 분리되기를 의도한다. <분리되기>가 기본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기본적인 것은 <비생명체적 anorganisch>이며, 다시 말해서 생명이 없고 보편적 즉 전체 자연을 통틀어 동일한 종류라는 특성을 갖는다. 그래서 생명을 학문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생명을 생명이 아닌 것과 개념적으로 동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작업이 성공하는 그 순간에 생명은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는데, 그 까닭은 그의 모든 외적인 측면의 현상들이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학적인 작업 자체가 생명의 한 행위일 것이고, 탐구자는 살아 있는 존재일 것이고, 더 나아가 생명의 근원적인 체험에 의존하여 <아직도 어떤 것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을 터인데 말이다. 그러나 수학적인 신은 그렇지 못하다. 만약 우리가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학문이 환원법적인 이상향에 따라, 즉 절대적인 분석법에 따라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전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순수한 지성으로서의 신은 생명체적인, 즉 신체적인 경험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때에 신은 모든 분석자료의 연장되어 있는 다양성을 분석함으 로써 생명을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생명 자체를 전혀 볼 수 없을 것이며, 신의 작업 장소에 있는 빈 공간조차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신은 눈을 눈으로서, 촉수는 촉수로서, 생명체를 생명체로서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서 물질적인 요소들 - 생명체 속에 있는 것과 다른 질서들 속에 들어 있는 물질적인 요소들 - 은 역학적 틀과 역학적 틀의 설명 양태와 기술하는 양태의 모든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입자(粒子)들은 특정한 결합구성체들로 끌 려들어가서, 특정한 형태로 결합되고, 특정한 장소운동을 하고, 다른 에너지 변화를 일으키며, 결국 다시 이 복합체를 떠나 다른 관계의 장으로 이행해 간다. 외적이고 외연적인 시각으로 보면 거기에서는 더 이상 포착될 것이 없다. 더 큰 규모의 복합성을 보여주는 것일지라도 그 밖의 다른 것들과 비교해 볼 때 본질적으로 새로운 특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엔트로피의 규칙에 따르면) 비 확률적인 체계이기는 하지만, 일어날 확률이 없던 것이 일단 실현되 기만 하면 가장 확률적인 것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이다. 그리고 확률적인 것과 비확률적인 것 사이의 모든 차이가 하나의 우주적인 필인성으로 와해되어 버리는 신적인 수학자에게는, 물리적인 틀의 보편적인 개념에 따라서 동일한 형태로 기술하는 자신의 작업이 이상적으로 완전하다고 스스로 자치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그만큼 배타적인 특성을 갖는다. 그러한 기술은 이 대상을 속에 있는 사태들을 기준으로 모든 사태들을 기술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폐쇄성 때 문에 다른 종류의 원리에 의해 그것이 보충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다. 그렇게 신적인 수학자는, 완벽한 자료와 완전한 분석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이상적인 물리학자로서, 그의 기준에 의거하여 물리적인 우주 전체에 있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을 설명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러한 현상을 완전하게 설명해 낼 것이다. 신 적인 수학자는 다른 관점을 필요로 하지도 않을 것이며, 다른 관점을 가질 능력도 없을 것이다. 촘촘하게 짜여 있는 조직체 속에는 아무것도 걸립되어 있지 않을 것이며, 신적인 수학자 스스로도 자신에게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206
그런데도 이것이 진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른바 학문이 <주관적〉이라고 부르기를 즐겨하는 증거에 따라서 알고 있다. 이 증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거 때문에 외적인 현실의 종합과는 무관한 것으로서 배제된다. <주관성>의 현상들은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장을 형성한다. 이 장은 자신의 형이상학적 위상이 어떤 것 인가에 상관없이 자기자신을 넘어서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예를 들면 상호작용 같은 것을 하지 못함) 또한 그래서 자연적인 원인들과 결과들의 체계 속에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아니면 주관성은 이 체계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관계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최상의 경우에도 단지 추론되거나 이차적인 실재성에 대한 권리만을 요청할 수 있다. 이차적인 실재성은 일차적인 실재성에 의해서 발행 될 수 있으며, 자신은 일차적인 실재성을 설명하고 기술하는 데 쓸데없이 남아 도는 어떤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양자택일적 가능성 가운 돼 첫번째 것은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의 유형으로 등장한다. 두번째 것은 <부수현상설 Epiphänomenalismus)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유물론적인 주장이다. 정신과 의식이라는 것은 단지 (부수적인 현상), 즉 자신의 고유한 규칙을 따르는 물체적인 과정에서 나타나는 아무런 힘이 없는 부수적인 현상이다. 이 두 양자택일의 이론들 가운데 유물론적인 것은 쉽게 논박될 수 있다. 왜냐하면 유물관은 사유의 자율성과 함께 사유된 내용의 타당성까지도 부정하고, 이와 함께 자기 스스로 합리적인 사상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유물론은 자신이 내세우는 근거의 힘에 의존할 뿐, 대뇌(大腦)에서 발생하는 사태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은 논증이기 때문이다(7장 부록 참조), 이와 반대로 이원론은 논리적으로는 모순이 없지만, <생명체〉 가 하나의 결정적인 사태로서 제시되는 그런 사태들로 환원된 다음에 검증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제 진스[5장 1절 참조]의 신을 물체와 정신(자아)을 창조한 데카르트적 신의 일종으로 둔갑시켜 보자. 그러면 신의 인식은 물론 두 영역을 포괄하고 있는 가운데, 신의 수학자의 왕국은 첫번째 부분에 관계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한편으로는 연장되어 있는 다양성의 모든 시간·공간을 인식하고 있 는 자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내면성>을 드러내는 모든 것을 인식하고 있는 자, 즉 다른 종류의 인식도 소유하고 있는 자로서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 때의 내면성은 연장되어 있는 다양성의 일부분은 아니면서도 그것을 통해서 친숙해 있는 내면성이다. 그런 신이 때로 자신이 창조한 것을 살펴본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불> 것인가?
9-2 이원론적인 보충의 실패
신은 연장되어 있는 대상이 구성하고 있는 생명 없는 세계 이외에도 개체화된 주관성의 다양한 집단, 즉 불분명함과 명백함의 정도에서 [제각기 차이를 보이는] 다양한 주관성의 집단을 자신의 창조적인 인식 속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각각의 주관성은 저마다의 음영을 갖는 현상적인 (느껴진, 지각된 등) <객관성>을 보여줄 것이다. 이 객관성은 변화하지만, 그때마다 실제로 연장되어 있는 것의 어떤 단면과 일치한다. 이 단면은 주관성이 연장되어 있는 다양성 안에서의 특 정한, 때때로 밀려나는 <관점> 속에서 표상하는 단면이다. 그리고 각 각의 주관성은 변화하는 관점의 한가운데에서, 주관성의 <신체>로서 주관성에 속해 있는 특징을 갖고 있는, 하나의 불변하는 특권의 영역을 보여줄 것이다. 이 현상적인 영역은 어떤 경우에나 실제로 연장되어 있는 사물 속에서 특유한 질서로 배열되어 있는 실제적인 물질적 체계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생명체라고 일컬으며, 살아 있다고 일컫는 체계들은 존재한다(그러나 이 세계들은 생명이 없는 것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의 특유한 물리적 질서의 배열이나 기능 때문에 살아 있다고 부를 수 있거나, 아니면 (우리들에게 선택할 자유가 있다) 우리는 그 체계들이 주관성으로서의 <나의> 영역과 일치하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 부를 수 있다. 주관성으로서의 나의 영역은 그런 식으로, 비록 자신은 비공간
적이지만, 생명체계 속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현상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일치와 보완은 전제가 말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특별한 경우들에서는 지역적으로 동일한 사건인 것에 대하여 두 가지 병행하는 상호보완적인 기술방식을 허용한다. 내면성의 개념들 속에 존재하든지 아니면 외면성의 개념들 속에 존재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물론 어떤 식으로 기술하든 하나의 기술 방식은 다른 기술 방식에 개입할 수 없거나 다른 기술 방식 의 내적 충만성을 위해서 필요한 것도 아니다. 특별히 우리의 경우에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내적으로> 기술하는 데 쓰이는 어떠한 개념도 외적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히 기술하는 데에 필요하거나 유용하 지 않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러한 학적 체계가 비록 이것이 아무리 인위적이라고 할지 라도 사태 자체에 비추어 봐서 타당한 것으로 나타난다면, 우리는 진스의 주장, 즉 순수한 수학자로서 <물질적인 세계를 지은 건축가>라는 유일한 특성을 지닌 신을 인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생명체의 경우에는 이원론적인 학적 체계가 무너져 내린다. 왜냐하면 생명체의 내면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태는 연장된 어떤 무차별적인 부분들(이 부분들은 사실상 현상적인 외적 가장자리의 중심영역으로서 기능하는데) 과 그 내면성이 일치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장되어 있는 이 특정한 부분들 ㅡ생명체들ㅡ이 내면성을 위해. 내면적 정체성을 위해, 개체성을 위해 조직되어 있다는 사태이다. 물론 이것은 스스로 생명체적인 현존재를 즐기는 정신에게 그런 공공연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육체를 가진 주체 körperliches Subjekt에게만 그런 공공 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명의 내면성의 사태는 연장되어 있는 것(이원론의 전제에 따르면 연장되어 있는 것에 불과한 그런 연장되어 있는 것)에게는, 육체를 전혀 갖지 않는 지성 körperloser Intellekt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실험의 조건에 따라서, 생명체의 외적인 진상이 신적인 수학의 전체적인 계산 결과 아무런 나머지가 없 게, 즉 생명체의 외적인 진상에 의존하여 그것을 생명체로서 인식할 수 없는 대가를 치루는 가운데 계산된다면 계산해야 될 과제가 이렇게 완전하게 결말을 맺는 것은 독립적으로 떼어놓은 상태의 공간적인 것을 충족시키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공간 적인 추민을 보여주는 것을 단순히 인상적으로 기술한다는 불충분성 을 말해줄 뿐이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진리를 위해 용서를 구하면서) 눈은 물리적인 사물들과 만남으로써 시각 Sehen에 대한 관계를 가지며, 귀는 청각에 대한 관계를 가지며, 생명체의 기관은 보편적으로 자신이 성취하는 것에 대한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더 보편적으로는 생명체들은 생명에 대한 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에게 단순한 하나의 부가적인 측면이 아니며, 우리의 해석의 재량에 맡겨진 것도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고유한 목적론적인 본성이다. 물리화학적으로 아무리 눈을 완벽하게 분석하고, 눈의 자극과 관련되어 있는 진행과정을 완벽하게 분석할지라도 눈의 구성이나 기능에 대한 분석은 눈을 <시각>과 연관짓지 않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고도로 전문적인 경우에 분명한 사실로 드러나는 것은, 원칙적으로 우리가 생명체들이라고 부르는 물질적인 사물의 전체 집합에게도 역시 타당한 진리로 드러난다. 비록 그것이 물리적으로 기술하려는 목적을 위해서는 쉽게 간과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즉 우리가 더 깊게 생명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때, 다시 말해서 조직의 복잡성과 기능의 세분화가 감소할수록 (그리 고 추측하건대 의식성의 정도도 더욱 감소할수록) 더 쉽게 간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러한 생명체의 목적 추구성과 생명에 대한 충동은 이미 언제나 거기에 존재한다. 생명체의 목적 추구성의 맨 밑바닥 수준의 단계는 이미 식물적인 모든 경향성 속에서도 활성화하고 있다가, 그 다음 단계에서는 어두침침한 반사작용의 차원에서 일하고는 원시적인 의식의 수준으로 일깨워지고, 또 그 다음 단계에서는 저급한 생명체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수준에 이른다. 더 나아가 동물적인 생명체의 모든 충동과 노력 속에서, 쾌락과 불안 속에서, 운동과 감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생명과 함께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의식과 의지와 사유 속에서 반성적인 밝음의 수준에 이른다. 이 모든 것은 <물질>의 본성 속에 있는 목적론적인 측면의 내면적인 요소들이다. 어떻게 같은 세계 속에 있는 이 목적주의가 역학적 인과성(역학적 인과성의 현실 역시 부정될 수 없다) 과 조화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하나의 증거(목적추구성)를 어떤 논리적 명제(작용인을 배제하는 논리적 명제)에게 희생물로 바친다고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명제는 일반화의 방식으로 또 다른 증거에 의해서 추론되는 명제이다. 만약 해결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이 문제는 오직 우리가 그 문제를 심각한 도전을 요구하는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아직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서 취급할 때에만 해결될 수 있다. 어쨌든 생명체의 목적론적 특성과 태도는 우리가 그것을 기술하기 위해서 도입하는 어떤 양자택일적 선택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명체의 목적론적 특성과 태도는, 우리들 각자가 제 나름대로 고유하게 생명체적으로 각성하고 있는 바가 증거해 주는 것에 의거해서 말하자 면, 실체의 내면성이 외적으로 현현된 것이다. 이 말이 함축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목적론의 특성을 보여주지 않는 생명체는 없다. 내면성이 없이는 목적론도 없다. 그리고 생명은 오로지 생명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10 신체적인 인식 주관의 우월성
이것은 생물학자들을 포함하여 우리처럼 죽을 운명을 짊어진 가련한 자들이 오히려 진스가 언급하는 수학적 신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다. 우리는 살아 있고, 우리는 물질적인 사물들을 우리 자신의 체험 속에서 마치 실체의 내면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멍을 들여다보듯이 들여다보고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현실적인 것이 공간 속에 펼쳐져 있는가 그리고 서로 상호적으로 상대방을 결정하는가에 대해 표상할(또는 표상의 가능성을 간직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고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어떤 영향력을 견뎌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표상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추상화하는 어떤 작용을 통하여 우리 역시 수학자와 수리물리학자가 되도록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역시>라 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 자신이 수리물리학자 <이외에 아무것 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순전한 부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체험이 증거해 주는 것은 생명과 연관되어 있는 경험 자체에 통합되어 있는 부분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생명에 참여 하고 있는 우리들의 몫으로 주어져 있다. 인간동형론의 경우들을 회피하기 위하여, 당연히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경험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취급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생물학자나 행동주의자가 이와 같은 우리의 작업에 반대해서 항상 단언하는 것도 취급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생물학자나 행동주의자는 그들 주위에 있는 생명의 존재를 놓칠 것이며, 이와 더불어 그들의 추상화 작업이 겨냥하고 있는 대상 자체도 놓칠 것이다. 그들 역시 순수하게 (그 이외 에는 더 이상 아무런 존재로 아닌) 수학자로서의 창조자의 신적인 빈곤을 그대로 답습할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신적인 수학자는 자신의 절대적이면서도 육체가 없는 körperlos 기하학적 지성을 물체세계의 위상에 쏟아넣을 것이며, 더욱이 생명 현상까지도 모든 공간 시간적인 다양성의 자료들과 그런 자료들을 사용하는 규칙 및 수학적인 가치로 환원시킬 것이다. 그 결과 신적인 수학자는 모든 것을 수학화시키는 상황에서 수학적 자료 이상을 보거나 추측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수학적인 창조자는 모든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예외 적인 경우(통계학적으로 볼 때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는), 즉 물질이 모여서 물질 이상의 차원을 갖는 생명체가 출현하는 현상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분석해 낸 자료에 어떤 의심스러운 점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마저 배제할 것이다. 그러한 순수한 오성은 예를 들면 눈, 시각신경, 뇌에 위치하고 있는 시각 중심부의 복합체가 받아들이는 가장 미세한 구성요소까지, 그리고 빛의 자극에 의해 시각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분석된 정보에 의존한다고 할지라도, 그 순수한 오성은 정작 자기자신이 눈을 통해 보는 지각과정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은 포착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상에서 태어났으며 지상적인> 존재자이자 눈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시각 구조 를 갖고 있는 생명체적 개체가 시각 구조(보는 과정의 물리학이 무엇 이든지간에)를 수단으로 하여 본다는 사실을(단지 그렇게 추론하는 데 에 덧붙여) 알고 있다.
우리는 그 위대한 건축가가 자신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하여 사용 해야만 했던 <재료>가 자신에서 유래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에게 알려져 있지 않고, 그의 계획에 미리 예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불신하기 시작한다. 역학적 발전 과정에서 그들의 기회, 즉 근원적인 실체의 숨겨져 있는 가능성들 가운데 어떤 것을 실현하려는 기회를 포착하는 속성들이 그의 계획에 예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불신하기 시작한다. 우리들 자신이 그러한 실현의 예들이다. 스스로의 경향성을 갖는 다양성의 구성으로 유혹당하고 있는 수학자는 그가 창조한 것을 알지 못한다. 그 수학자의 눈은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한다. 그는 총제적인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한 플라톤적인 데미우르고스라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창조한 자가 자신이 착수 한 일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노시스주의자 Gnostiker의 데미우르고스에 가깝다.
우리의 탐구의 끝은 단지 앞으로 해야 할 너무 많은 과업들의 문턱에 들어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과업들은 적어도 내가 믿는 중 하나는 철학적 생물학이다. 이것이 없다면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철학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에 대한 철학도 불가능할 것이다. 또 다른 과입은 원인 causa을 새롭게 검토하는 작업이다. 이것이 없다면 인간과 자연과 원인이 한지붕 아래 모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의 직접적인 논쟁점이 되는 문제를 나는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믿는다. 창조자는 수학자 진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러한 창조자와는 달라야 하고 마찬가지로 피조물, 즉 존재자들도 수학적 물리학자 진스가 파악하는 존재자들과 달라야 한다는 점을 신의 창조의 내재적인 증거로부터 추론해 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나는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신은 수학자인가?> -말하자면 단지 물질적인 우주 전체에만 질문의 범위를 국한시킨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여전히 신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오로지 수학자인가?-에 대하여 우리들이 최종적으로 제시하는 대답은 분명한 <아니다> 이다.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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