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한스 요나스, 생명의 원리

생명의 원리_11장 그노시스, 실존주의 그리고 허무주의

백_일홍 2023. 11. 28. 12:58

11장 그노시스, 실존주의 그리고 허무주의

들어가기 전에

나는 여기에서 실험적으로 두 가지 정신적 사조나 입장 또는 체계 들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 둘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서로 멀 리 떨어져 있으며, 언뜻 보기에는 본성상 서로 친화적인 요소가 도무 지 없는 듯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가장 최근의 정신적 사조로서, 개 념적이고 내용이 있으며 현대적이라는 단어의 연대기적 의미보다 더 현저하게 <현대적〉이다. 또 다른 하나는 희미한 옛날의 정신적 사조 로서, 신화적이고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았으며, 당대에서도 예외적 인 것이었지만 우리의 철학적 전통의 존경받을 만한 공동체에서도 결코 허용된 적이 없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으며, 이 공통점이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이것을 유사성과 차이점에 따 라 살펴본다면 결과적으로 두 정신적 사조 모두를 상호적으로 더 잘 파악할 수 있는 그런 공통점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내가 〈상호적>라고 말할 때, 나는 일종의 절차상의 순환성을 고백하고 있다. 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을 나 자신의 경험이 시사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주 오래 전에 그노시스1) 에 대해 탐

1) (역주) <그노시스(클, Gnosis)>는 그리스어로 (인식)을 뜻한다. 신약성서에는 이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이 맥락에서는 대체로 선택받은 자에게만 계시 되는 신적 비의(義)의 인식을 일컬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인식 위에 실 되는 교체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노시스주의자)들은 기원 후 처음 몇 세기 동 안 활동했던 철학자와 신학자들이다. 그들은 신앙 속에 숨겨져 있는 신비들을 학적 사변으로 인식하였다. 기독교를 신봉하면 그노시스주의자들(이를테면 클레멘 하려고 하였다. 그 반면에 비기독교적 그노시스주의자들(바실리네스 Basilides, 발 Clemens von Alexandria, 오리게네스 Origenes)은 오직 기독교 신앙에만 의지 렌티누스 Valentinus 등)은 그노시스를 고대 근동, 특히 페르시아와 시리아의 중 교적 표상, 유대교 신학, 플라톤리 · 스토아적 및 피타고라스적 철학과 전술하여 하나의 신비주의를 만들어 냈다. 거의 모든 그노시스 체계 속에서 공통적으로 드 러나는 요소는 신성(神性)과 물질의 이원론, 이 둘 사이의 빈틈을 연결하려는 다 리(이 다리는 일련의 중간적인 존재에 의해서 연결되어 있다). 이들 중간자들이 높고 낮은 등급을 이루는 형태로 유출 Emanation되어 있다는 믿을 그리고 구원의 길을 통하여 다시 그들의 근원으로 되돌아간다는 믿음들이다. J. Ritter (Hg).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3(Basel/Stuttgart, 1972), 715쪽 이라 참조 그노시스주의의 특색은 인간 본래적인 자기가 이 세상적인 것과는 본질적으 로 무관하다는 반(反)세상적 존재이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은 본래적인 자기와 최상의 존재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인식에 의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 자신으로부터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최상의 존재로부터 보내진 존재에 의해서 모든 것이 계시되고,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그노 시스주의에서 주장하는 <인식)은 세계의 시작과 발생에 관한 비의(秘)이고, 인 간의 초월적 기원 그리고 구원의 비의에 관한 교훈을 담고 있다. 이것은 대규모 의 상징과 신화로 표현되고 있다. 최상의 존재로서의 신은 철저하게 초세계적 존 재이기 때문에, 그 본질상 이 우주의 본질과는 다르며, 이 우주를 창조한 것도 아 니므로 통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 신은 이 우주와 정반대의 존재이다. 이 세상은 신을 알지 못하는 지열한 세력의 업(業)이고, 초원적 신 자신은 숨겨져 있어서, 자연개념으로써는 알 수가 없다. 초자연적인 조명에 의해서만 신은 알려질 수 있 다. 바로 여기에 그노시스주의의 독특한 신화론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신화론 적인 그노시스주의는 <원그노시스주의 Proto-Gnosticism)라고 불리며, 기독교적인 그노시스주의와는 구분된다. 기독교적 그노시스주의는 원그노시스주의의 여러 갈래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것이 <기독교적 그노시스주의>라고 불리는 까닭은 이것의 존재 이해가 자기를 객체화하고 신화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그 소재를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보내심을 받은 자를 그리스 도와 대등한 위치에 두는 점에서도 그런 측면이 드러난다. 신약성서가 성립하면 1 세기 후반에 그노시스주의의 원시 만다교와 마니교가 형성되었다. 그노시스주의적 윤리의 일반 행위 원칙은 무엇보다도 이 세상을 원수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 세 상을 저주하고, 멀리하며, 괴로운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금욕주의로 빠지거 나. 인간적인 절대적 자유로 나아간다.(각주 끝)

구하고 있었을 때, 내가 하이데거 학파 속에서 얻은 관점, 즉 (시각 Optik)이 나 자신으로 하여금 그때까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던 그노시스적 사상의 측면들을 어느 정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도 낯설게 여겨지던 것의 친숙함으로부터 점점 더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내가 그때를 회상하면서 지금 믿는 바로는, 나를 그노시스적인 미로(迷路)로 유혹한 것은 어쨌든 나에게 캄캄하게만 느껴졌던 그 가까움의 매혹적인 힘이었다. 그래서 내가 오랫동안 그 먼 땅에서 머물다가 나의 고향, 즉 내가 몸담고 있던 시대의 철학 의 현장으로 되돌아왔을 때, 내가 거기에서 배운 것이 나의 사유의 출발점이었던 해안(海岸)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는 것을 나는 알 아차렸다. 내가 고대의 허무주의에까지 담론을 확장시킨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현대의 허무주의의 의미를 규정하고 자리매김하는 데 도움 이 되었다. 그것은 원래 현대의 허무주의가 나로 하여금 과거 속에서 그것의 의심스러운 사촌을 발견하게 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역사적인 분석의 수단을 제공했던 실존주의 자체도 역시 동일한 결 말에 휘말렸다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다. 허무주의의 범주들이 실 존주의의 특별한 소재를 위해 유용하게 쓰여졌다는 사실은 나로 하 여금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마치 자로 재서 맞추기나 한 듯이 서로가 꼭 들어맞았다. 어쩌면 그들은 자로 재서 만들어진 것이었을까? 처음에 나는 그 유용성을 순전히 추정된 보편 타당성, 즉 각각의 인간 실존 Existenz)을 분석하는 데 허무주의의 범주들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해 주는 그러한 보편 타당성으로만 간주하였다. 그러다가 나는 바로 그 경우에 허무주의의 범주들이 적용되는 것이 어쩌면 (존재)의 특별한 방식으로 그 범주 들을 제공한 쪽과 거기에 대해 반응한 쪽 모두에 바탕을 두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어렵풋이나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것은 어떤 문이든지 다 열 수 있는 만능열쇠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한 연금술사의 이야기였다. 나는 이 특정한 문 앞에 다가 있다. 나는 그 열쇠로 문을 열려고 시도해 보았다. 그러자 나의 열쇠 는 자물쇠에 꼭 맞았으며, 문은 활짝 열렸다. 그렇게 열쇠는 자신의 위력을 입증하였다. 내가 나중에 만능열쇠에 대한 믿음을 버렸을때. 나는 그 만능열쇠가 어떻게 그 경우에 그렇게 잘 작동했었는지에 대 해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내가 정말 합당한 자물쇠에 합당한 열쇠 를 사용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실존주의와 그노시스와의 관계 에서 그노시스로 하여금 실존주의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접근 통로를 이렇게 뒤집고 나니까. 한쪽 영역에 서 얻은 해답들은, 처음에는 단지 보편적인 진리를 확인해 주는 듯이 보였는데, 다른 쪽 영역에 대한 질문들로 변하였다.

하나의 방법과 하나의 소재가 만남으로써 시작된 것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다음의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인간 실존의 근본 구조 자체 를 설명하고자 하는 실존주의 그리고 이런 까닭에 방법의 원리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실존주의는 그 자체가 특정하게 역사적으로 성장 해 온 인간 실존의 상황에서 나온 철학이다. 비록 다른 측면에서는 아주 다르기 짝이 없지만, 과거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유사 한 상황이 하나의 유사한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실존주의로부터 제기된 질문이 진지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 나 만약 실존주의를 반영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실존주의가 제시하는 많은 통찰들의 타당성을 제한하고 있는 상황이 알려져 있기만 하 다면, 우리는 하나의 적절한 시각을 얻은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해석하는 기능들은 서로 역전되고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 자물쇠는 열쇠가 되고, 열쇠는 자물쇠가 된다. 그노시스 를 <실존주의적으로 읽는 것은 이러한 읽기가 가지고 있는 해석학 적 성과 때문에 사실 정당화될 수 있는데(아니면 정당화될 수 있는 한), 어쨌든 그러한 읽기는 그것의 자연스런 대립물로서 실존주의를 <그노시스적으로〉 읽도록 우리를 불러들인다.

1 인간의 고독: 파스칼에서 니체까지

지금부터 이미 두 세대 전에 니체는 허무주의, 이를테면 <모든 손님들 가운데서 가장 섬뜩한 손님>인 허무주의가 문 앞에 서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 손님이 문 안으로 들어왔고, 그는 이제 더 이상 손님이 아니다. 그리고 철학에 관한 한, 실존주의는 그 손님과 더불어 살고자 노력한다. 그런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위기 속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기의 시작은 이미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 다. 17세기에 현대인의 정신적인 상황이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의 여러 측면들 가운데 하나는 파스칼이 그의 탁월한 말솜씨로 전력을 다하여 처음으로 기술한 인간의 고독이다. 즉 근대 우주론의 물리적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고독이다. <내가 전혀 모르는 공간들의 무한한 거리에 휘말린 채,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공간들,그리고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공간들의 무한한 거리에 휘말린 채, 나는 공포에 떨고 있다. 나를 억누르는 우주적인 공간들과 시간들의 무한성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 양적인 불균형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 그러한 차원들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인 간이 보잘것 없이 사라지는 것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침묵>이다. 그 침묵의 내용은 인간을 마주하고 있는 우주 Universum가 인간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존재한다는 것이며, 우주가 그 속에서 모든 인간사가 전개되어야만 하는 측면에 관한 한 인간적인 일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성의 총합 속에서 오히려 인간의 고독을 더욱 근거지어 준다. 이러한 총합의 일부분이자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인간은 그 광활한 우주의 힘들에 의해서 언제든지 꺾일 수 있는 한 줄기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 광활한 우주 속에서 이미 갈대의 존재는 하나의 특별한 그리고 맹목적인 우연에 불과하다. 어쩌면 우연히 으스러져 없어지는 것만큼이나 맹목적인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로서 인간은 정작 우주의 총합의 일부분도 아니며, 더욱이 우주의 총합에 속하지도 않는다.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간은 오히려 우주의 총합과 전혀 다르고, 또한 우주의 총합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데카르트가 말했듯이 연장되어 있는 존재는 생각하지 않는데, 자연은 물체이자, 질료이자, 외적인 크기를 가지는 연장된 실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연이 생각하는 갈대를 으스러뜨린다면, 자연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은 그가 으스러 지는 동안에도 자신이 으스러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자각하는 존재이다." 세계 속에서 오로지 인간만이 생각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세계의 일부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일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만이 생각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측면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인간의 신체를 통해서 이미 결정되어 있는 자연의 역학적인 전제조건에만 참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 역시 인간의 내면적인 성향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 인간을 모든 자연보다 우월하게 만들어 주는 특성, 즉 인간만이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특성은 정신 Geist이다. 인간의 정신은 존재 Sein 의 총체성 속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더 높은 위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은 인간에게 인간 이외의 모든 현실성으로부터 인간을 결정적으로 구별시켜 주는 간격, 결코 그런 현실성과 직결될 수 없는 어떤 간격을 시사해 준다.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존재의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채, 정작 인간의 의식은 인간을 세계 속에 있는 이방인으로 만들어 버리며, 참된 반성 작용을 통하여 언제나 이 낯설음을 입증해 주곤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내가 코스모스"에 내재하고 있는 로고스와 나의 로고스를 서로 유사한 것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코스모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런 코스모스 전체의 질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자리는 이제 공공연하게 드러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우연인 듯하다. 파스칼은 계속해서 말한다. <나는 내가 거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고 있다. 내가 왜 거기가 아니고 하필이면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왜 그때가 아니고 하필이면 지금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코스모스가 인간의 자연적인 고향, 즉 세계가 코스모스로서 이해되었던 한, <여기>에 대 한 근거는 항상 있었다. 그러나 파스칼은 인간이 그 속에서 길을 잃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로 이 세계에서 낙오된 한적한 구석에 대해서, 인간이 갇혀 있는 이 좁은 지하감옥 - 우주 Universum- 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전체 속에서 인간 현존재 Dasein가 가장 최상의 우연이라는 사태는 인간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가능한 연관체계로서의 인간적인 의미 모두를 박탈해 버린다. 그러나 이 상황에는 고향이 없으며, 길을 잃어 헤메고, 그저 불안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 이상의 무엇인가가 자리잡고 있다. 자연과학 관심은 자연이 목적들에 대해서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는 것도 의미한다. 자연적인 원인들의 체계로부터 목적론이 탈락함과 함께, 그 스스로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목적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연은 인간적으로 가능한 목적들에 대해서 어떤 임의적인 제약을 가하기를 멈추었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우주처럼, 내면적으로 근거 지어진 존재의 위계질서를 갖고 있지 않은 우주는 가치들이 존재론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도록 내버려두고 있다. 한편 인간 자신은 전적으로 의미와 가치를 찾아 헤매도록 자기자신 안으로 되던져져 있다. 의미는 더 이상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다. 가치는 더 이상 객관적인 존재를 직관하는 가운데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치평가의 사태로서 정립되어 있다. 의지의 기능으로서 목적들은 내가 혼자서 만들어 낸 창조물이다. 의지가 객관적 존재를 직관하는 것을 대체한다. 행위작용 Akt의 시간성은 <선(善) 자체>의 영원성을 몰아 낸다. 이것이 니체가 의미했던 유럽의 허무주의가 표면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상황의 단계이다. 이제 인간은 홀로 존재한다.

세계, 하나의 문
아무 말 없고 차가운 수천의 황무지로 통하는 문!
네가 잃어버린 그것을 잃어버린 자는
아무 곳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하리라.

 

니체는 이렇게 ('고독해진 Vereinsamt, 이라는 시에서) 말했으며, <고향이 없는 사람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라는 구절과 함께 이 시를 끝마쳤다. 물론 파스칼의 우주는 아직 신이 창조한 우주였으며, 세상에서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고독한 인간은 여전히 저 세상에 있는 신을 향하여 자신의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신은 본질적으로 감추어져 있는 verborgen 신, 아그노스토스테 오스 agnostos theos"이며, 그가 창조해 놓은 무리들 속에서 우리는 그 신을 알아차릴 수 없다. 창조된 세계는 그들의 창조된 모습을 통해서 창조자의 의지를, 창조된 사물들의 풍요함을 통해서 창조자의 선함을. 사물들의 목적들을 통해서 창조자의 지혜를, 삼라만상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창조자의 완전성을 드러내주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의 크기를 통해서,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측량할 수 없는 세계의 광활함을 통해서만 신의 힘을 드러내주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연장이야말로 또는 양적인 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세계에 남아 있는 본질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세계가 신적인 것을 지시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양적인 속성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그 크기가 지시할 수 있는 것은 힘 Macht이다." 그러나 힘을 표출할 수 없는 세계는, 만약 일단 초월자와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면 그리고 인간이 그 세계와 함께 그리고 인간 자신과 함께 홀로 남겨져 있다고 한다면, 그 세계는 오로지 힘, 즉 지배와 관계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우연성은, 여기 그리고 지금 있다는 인간 존재의 우연성은 파스칼의 경우에는 여전히 신의 의지에 따라 그런 양태를 취하고 있는 우연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정작 자연의 이 구석진 곳으로 내던진 신의 의지는 탐구할 수 없으며, 나의 존재의 <왜>에 대해서는 마치 무신론적인 실존주의에서 그렇듯이 여기에서도 역시 대답될 수 없다. 의지와 힘이라는 술어에 의존해서는 결코 아무것도 설명될 수 없는 감추어져 있는 신은 물러가면서 감추어져 있는 인간 homo absconditus 을 유산으로 남겨 놓았다. 이것은 오로지 의지와 힘의 특성을 통해서, 힘에의 의지를 통해서, 의지를 원한다는 특성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인간의 개념이다. 이러한 힘에의 의지에게는 무관심한 자연마저도 실제적인 대상 이상의 것으로서, 인간이 거기에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준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현대의 실존주의와 이것이 가지고 있는 허무주의적 요소로 이끌어 간 그런 형이상학적 상황의 근저에는 정작 인간의 자연에 대한 표상의 변화가, 우주적인 주위세계에 대한 표상의 변화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실존주의의 본질이 일종의 이원론이라면, 또 실존주의의 본질이 바로 인간을 자기 쪽으로 결속시키고 있는 코스모스의 이념이 상실됨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세계 사이에 발생한 소외라면, 간략하게 말해서 인류학적인 무코스모스주의(무우주론, Akosmismus)라면, 그러한 조건을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이 필연적으로 현대의 자연과학 혼자일 필요는 없다. 그러한 코스모스적 허무주의 (우주적 허무주의, kosmischer Nihilismus)가 어떠한 역사적인 상황 속 에서 출현했건 간에, 그러한 코스모스적 허무주의는 실존주의의 특정 한 특성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실존 주의의 특정한 특성들이 실제로 발전한 정도와 범위는 실존주의적인 입장에 대하여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이 요소와 관계된 것을 입증 해 주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서양의 역사에는 오직 단 한 번의 계기가 있었 다. 말하자면 현대의 학문과 유사한 모든 것과 무관하게 그 조건이 실현되어 있으며, 지각변동적인 사건의 총체적인 격렬함을 뚫고 나온 그런 계기가 단 한 번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과격한 형태들을 취 했던 그노시스 운동이었다. 그노시스 운동의 과격한 형태들은 지리적 으로는 로마 제국에서도 헬레니즘권에 있는 영역과 여기에 인접한 근동지역에서, 시기적으로는 기독교 시대에서도 매우 격동적이었던 처음 300년 동안에 등장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무주의라고 불리 는 것으로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그노시스 운동의 과격한 형태들로부터 무언가 배울 점이 있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 주어진 짧은 지면이 허락하는 한, 그리고 무엇 보다도 현대의 허무주의와 그노시스 운동의 과격한 형태를 비교해 보는 실험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모든 제한 사항도 염두에 두면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지지해 주는 자료를 제시하고자 한다.

2 인간과 세계의 그노시스적 이분화

기독교화된지 처음 1세기 동안의 그리스-로마적 세계와 현대 사이 에서 하나 이상의 측면에서 어떤 평행선이 그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역사적으로 그렇게 긴 시간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둘 사 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우리가 가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 것이 표면상 그렇게 드러나는 것보다 덜 놀라운 일이다. 슈팽글러는 이 두 시대를 그가 제시한 문화순환론적인 의미에서 <동시적〉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좀 지나친 주장으로까지 나아갔다. 거기에 따르면, 우 리는 오늘날 황제 시대의 시초에 살고 있는 셈이다. 슈팽글러가 어떻 게 주장하든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시기적으로 좀더 뒤늦은 고대 후기 spätere Antike가 보여주는 많은 단면들로부터 고전적 고대 klassische Antike에서보다 훨씬 더 많이 우리 자신을 재인식한다면, 이것이 단순한 우연 이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노시스도 이러한 단면들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여기서의 상징체계의 낯설음은 우리 자신을 재인식하는 것을 다소 어렵게 만들며,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을 재인식 한다는 것이 정작 그노시스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충격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고대 후기의 지나치게 장 식이 많은 상상력은 모든 허구를 청산하는 실존주의의 장식 없는 무 미건조함에 잘 들어맞지 않는 듯이 보이는 데다가, 또한 고대 후기의 종교적인 특성은, 니체가 현대의 허무주의를 정의한 바 있듯이, 본질적으로 비종교적, 즉 기독교 시대 이후의 시대에는 너무나도 들어맞 지 않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노시스의 역사적인 현상을 오늘날의 연구와 결부시킬 때 제기될 수 있는 광범위한 문제들을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제 부터 말하고자 하는 그노시스에 대한 시각은 부분적으로는 위의 질 문들에 대답하는 것과 상관없으며, 한편 부분적으로는 거기에 대한 어떤 대답을 이미 전제하고 있으며,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모두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 다. 나의 그노시스에 대한 시각은 내가 다루고자 하는 이 글의 목적 에 필요한 가정이다. 한편 다양한 그노시스 체계들의 유형들은, 그들 의 공통점을 기반으로 하는 추상화 작업을 위하여 무시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강조할 필요가 있는 공통점은 모든 그노시스적인 태도의 바탕에 깔려 있으며 그리고 서로 매우 다르고 또 체계적으로도 정도 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모든 그노시스적인 유형들에게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과격하게 이분법적인 분위기이다. 표출된 이원 론적인 이론들은 격렬하게 느껴진 자기자신과 세계에 대한 경험이라 는 일차적으로 인간적인 바탕 위에 서 있다. 그 이원론은 인간과 세 계 그리고 이와 병행하면서 세계와 신 사이에 성립한다. 이것은 상호 보완적인 크기의 이원론이 아니라, 서로 상반되는 크기의 이원론이다. 이것은 하나의 이원론이다. 왜냐하면 인간과 세계 사이의 이원론은 세계와 신 사이에 성립하는 이원론에서 경험의 차원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며, 전자의 이론적인 근거는 후자로부터 연역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세계와 신의 이원론에 대한 초월적인 이론은 그것의 경 협적 근거로서 인간과 세계의 이분화의 내재적인 체험에서 유래한다 는 식으로 역방향으로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와 같은 삼 각 관계에서 세계와 마주선 인간과 신은 함께 결속하고 있기는 하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신의 이러한 본질적인 결속성은 바로 세계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다. 그노시스주의자에게는 이것이 계시된 지식의 대상이며, 또한 이것은 그노시스적인 종말론"을 결정짓는다. 우리는 이 속에서 그런 형태로 그노시스의 고유한 계시된 진리를 창 출하는 그노시스주의자의 근본경험이 투사된 것을 볼 수 있을지 모 른다. 인간이 몸담고 사는 세계와 인간 사이의 절대적인 틈에 대한 감정은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고 거기에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객관 적인 이론의 형태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감정이다. 그 이론 의 신학적인 측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적인 것이 세계에게 는 낯선 것이며, 신적인 것은 물리적인 우주에서는 자신의 몸을 가지 고 있지 않다. 참된 신은 절대적으로 세속을 초월해 있고, 세상에 의 해서 결코 계시되지도 않고 보여지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참된 신은 인식되지 않는 신이며, 전적으로 타자이며, 세상적인 어떠한 비유에 의해서도 인식되지 않는 신이다. 여기에 상응하면서, 그 이론의 우주 론적인 측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계는 신에 대해 낯설어 하며, 신에 대한 낯설음 그 자체이다. 세계는 신성에 의해 창조된 것 이 아니라, 신성보다 등급이 낮은 원리에 의해 산출된 것으로서, 그 원리의 법칙을 세계는 실행한다. 마지막으로 그 이론의 인류학적인 측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내면적인 자기자신, 즉 프뉴마 Pneumㅡ-<영혼 Seele)을 의미하는 프쉬케 psyche와는 반대로 <영(靈ㅡ는 세계의 일부분이 아니다. 프뉴마는 자연이 산출한 것도 아니고, 자연의 지배를 받는 것도 아니다. 프뉴마는 세계 내에서는 그처럼 초월적이고, 세상의 범주에 의해서는 결코 인식될 수 없다.

마치 프뉴마의 세계 외적인 대립자인 인식되지 않는 신처럼 말이다. 비록 세계의 생성 과정에는 어두운 충동의 거의 무인격적인 필연 성이 많이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세계가 어느 누구 하나의 존재 아니면 여럿의 존재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신화적인 양식에서는 엄연한 사실로 통용된다. 그러나 누가 세계의 창조자이건 간에, 인간은 그에게 어떠한 충성도 바칠 필요가 없으며, 그 창조자의 작품을 향해서 어떠한 경의도 표할 필요가 없다. 그 창 조자의 작품이 비록 수수께끼처럼 인간을 포함하고 있기는 해도 창조자의 의지와 마찬가지로 창조자의 작품도 결코 인간적인 행위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하지 않는다. 세계를 창조한 존재는 신성 Gottheit보다 등급이 훨씬 떨어지는 수준의 힘으로서, 인간조차 도 신성을 닮은 인간의 정신에 의존해서 그 힘을 낮은 등급의 것으 로 내려다볼 수 있다. 세계를 창조한 존재는 참된 신적인 존재로부터 오로지 활성작용 Wirken의 힘만을 받아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를 창조한 존재의 힘은 어떠한 통찰이나 선을 동반하지 않는다. 데미 우르고스는 이처럼 무지와 격정 속에서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러므로 세계는 만들어진 산물이자, 인식의 부정을 구현하고 있다. 세계가 계시하는 것은 밝혀지지 않은, 그래서 사악한 종류의 위력이 다. 이 위력은 의지에서 솟아나와 지배와 강압이 된다. 이 의지의 영 이 없음 Ungeist은 세계의 영 Geist인데, 이 영에게는 이해와 사랑이 낯선 것이다. 우주의 법칙들은 이러한 지배의 법칙이지. 신적인 지혜 의 법칙은 아니다. 그러므로 힘은 코스모스의 중요한 측면이 된다. 그리고 코스모스의 내면적인 본질은 무인식성(無認識性, agnosia)이다. 이를 긍정적으로 보충해 주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참다운 본질이 인식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과 신에 대한 인식이라는 사태이다. 이것은 인간의 상황을 무인식성의 한가운데에서 가능적으로 인식하 는 자의 상황으로서 그리고 어둠의 한가운데에서의 빛의 상황으로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우주 전체의 어두운 광활한 속에서 낯설고 홀로 있는 존재의 심연에 놓여 있다.

이러한 우주 전체는 존경할 만한 그리스적인 코스모스의 가치를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경멸적인 어투의 형용사가 우주 전체와 관련하여 씌어졌다. <이 하찮은 요소들 paupertina haec elementa) (창조 자의 이 작은 세포들 haec cellula creatoris)." 우주 전체는 아직도 코스 모스, 즉 질서이기는 하지만 폭군적인 질서이자 인간과는 상관이 없 는 질서이다. 이런 식으로 우주 전체를 인정하는 것은 공포와 무존경 심이 뒤섞인 감정에서 그리고 전율과 반항에서 비롯되었다. 자연의 결함은 질서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완전한 충족성 Vollständigkeit에 자리잡고 있다. 데미우르고스의 작품은, 그것 이 아무리 밝혀지지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법칙의 제게임은 분명하 받았으며, 인간적인 이성은 인식 작용 속에서 이 세계 이성과 함께 다. 그러나 우주적인 법칙은 한때는 이성이 표현된 것으로서 숭배를 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주적인 법칙은 이제는 인간의 자유를 박 발하는 강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스토아 철학 자들의 우주적인 로고스는 우주의 섭리와 동일한 것이었는데, 이제는 하임아르메네 Heimarmene." 즉 노예화하는 우주적인 숙명에 의해서 대체되었다.

 

이 우주적인 숙명은 행성들에 의해서, 또는 일반적으로 천체 세계 에 의해서, 우주 전체의 냉혹하기 짝이 없는 법칙의 인격화된 대변자 들에 의해서 겉으로 드러난다. 코스모스 개념이 가지고 있는 감정적 내용상의 변천은 한때 가장 신적이었던 가시적인 세계의 일부분을, 즉 천구(天球)를 탈가치화한 것 속에서, 말하자면 다른 어느 곳에서 보다도 더 인상 깊게 상징화하였다. 별들이 자리잡고 있는 하늘은 피 타고라스 이래로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우주 전체의 이성을 가장 순 수하게 구현하고 있는 것이자, 우주의 조화를 보증하는 것으로서 간 주되었는데, 이제는 낯선 힘 그리고 필연성과 함께 이 하늘은 인간의 얼굴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다. 인간과 본질적으로 아무런 상관관계 가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위력 있는 것으로서 별들은 폭군들이 되어 버렸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별들을 무서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보다. 일등하기 때문에 경멸하였다. 플로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직도 가장 천한 인간을 형제의 이름으로 존엄성을 부여하는 그들은 (플로티누스는 그노시스주의자들에 대해서 분노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매우 격렬한 어조로 태양의 이름을, 하늘의 별들을, 정 작 우리와 형제간인 세계 영혼 자제의 별들을 거부한다!)("엔네아래 스, 119, 18). 누가 더 <현대적인가? 플로티누스인가 아니면 그노시 스주의자인가?> <그들은 그들이 친구(天球)의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 다고 믿고 있는 그 으스스한 연극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야만 한다. .......만약 이미 인간이 살아 있는 여타의 존재들보다 우선적으로 가 치 있는 존재라면, 우주 전체 속에서 폭군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주 전체에 질서(Ordnung, kosmos)와 규칙을 주기 위해서라도 별들 은 훨씬 더 가치가 있다>(같은 곳, 13). 우리는 그노시스주의자들이 이 규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들은 바 있다. 이 규칙은 섬 리와는 상관이 없으며, 이 규칙은 인간의 자유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이처럼 신이 없어진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하는 마력화 (魔力化)된 하늘 아래에서 인간은 길 잃은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있다. 하늘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하늘의 위력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인간은, 그러면서도 인간 영혼의 고귀함 때문에 하늘보다 더 우 원한 존재인 인간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이 체계의 일부분으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체계에 갇혀 있는 것으로서 자신을 인식한다.

그리고 파스칼처럼 인간은 놀라움에 사로잡혀 있다. 인간이 이처럼 길을 잃은 상황 속에서 발견하는 인간의 고독한 타자성은 불안의 감 정 속에서 표출된다. 영혼이 이 세계 속에 거처함에 대한 영혼의 대 답으로서의 불안은 그노시스적 문헌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이 다. 그것은 인간의 그러한 상황을 발견한 것에 대한 반응이자, 실제로 스스로도 그러한 발견의 한 요소이다. 불안은 세계의 장 또는 도 취 상태에서 인간의 내면적인 자신이 깨어나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별의 영들 Sterngeister의 위력 또는 코스모스는 물리적인 강 압의 외면적인 힘일 뿐만 아니라, 더구나 인간의 과도한 낯설음과 자 기소외의 내면적인 힘이기도 하다. 인간의 내면적인 자신은 자신을 자각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내면적인 자신이 자기를 실제로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과 인간의 내면적인 자신이 코스모스가 부여해 준 것 을 비임의적으로 [필연적으로] 실행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인식, 즉 그노시스는 인간을 이러한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다. 그 러나 코스모스는 삶과 영(靈)에 대립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인식은 우주 전체에 편입되는 것과 그리고 우주의 법칙 에 동의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그노시스는 스토 아적 지혜와 다르다. 스토아적 지혜는 전체의 의미 있는 필연성을 인 식하고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 자유를 추구하였다. 이와 반대로 그노 시스주의자들의 입장에 따르면, 인간은 내면적인 자기자신을 구원하 기 위하여 코스모스와 인간 사이의 소외를 극단적으로 이끌어 가야 하며, 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인간의 내면적인 자기자신은 자기자신에 이를 수 있다. 세계는 극복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힘의 체계에 불과 한 것으로 등급이 낮아진 세계는 오로지 힘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물론 여기서는 과학기술적인 탁월성 이외의 모든 것을 의미한 다. 세계의 힘은 한편으로는 구원자의 힘, 즉 외부에서 개입해 들어 와 폐쇄된 연관관계를 파괴하는 구원자의 힘을 통해서 극복되고, 다 른 한편으로는 그에 의해서 산출된 인식의 힘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 그 인식은 신비한 도구로서 별들이 인간을 강압하는 것을 제압 하고, 별들의 질서를 통하여 영혼에게 한 갈래 길을 열어준다. 비록 이것이 세계의 인과성에 대한 인간의 현대적인 권력 관계와 비교해 볼 때 너무나도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과 힘과 456의 만남이 자연 전체에 대한 유일하게 잔존하는 관계라는 형식적인 사태에 관한 한 이들 사이에는 하나의 존재론적인 유사성이 자리를 고 있다.

3 부분과 전체에 대한 이론의 몰락

계속 더 나아가기 전에, 우리는 그 옛날 하나의 신적으로 질서지어 진 전체로서의 코스모스의 이념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 에 대해 질문해 보기로 하자. 대혼란을 초래할 정도로 우주를 평가절 하하고 또한 우주의 영을 박탈하는 그 사건에 현대 학문과 유사한 어떤 것이 결코 개입한 적은 없다. 이 점을 우리는 그노시스적 시대 에 우주가 근본적으로 마력화되었다는 사실을 관찰함으로써 잘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정작 이것은 초월적이고 비우주적인 인간 자신의 이념과 함께, 오늘날의 실존주의의 현상과 본래적으로 유사한 점이 있다. 인식과 과학기술이 그 장본인이 아니었다면, 도대체 당시의 집 단들로 하여금 고전적인 코스모스의 경건성, 즉 고대윤리학이 그렇게 강도 높게 자신의 바탕으로 삼고 의존하고 있던 그러한 코스모스의 경건성을 무너뜨리게 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충분한 대답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더욱이 알려져 있 다고 해도 그 대답은 매우 복합적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측면을 지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부분 과 전체에 대한 고대의 이론의 몰락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이에 대한 사회적·정치적인 원인들을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고전적인 존 재론에 따르면, 전체는 부분보다 선행하며 또한 더욱 선하다. 고전적 인 존재론은 전체 때문에 부분들이 존재하고, 전체 속에서 부분들의 근거는 물론 부분들이 존재하는 의미까지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공리(公理, Axiom)처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이 론은 고대 후기에 들어와서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사회적인 기반 을 상실하였다. [고전적 존재론이 염두에 두고 있는 의미에서의] 이 러한 전체를 시사해 주는 생생한 예는 도시국가 Polis였다. 개개의 단 명한 행위는 도시국가라는 모든 개인들보다 상위에 위치하고 포괄적 인 전체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과 기준을 발견하였으며, 또한 자신의 단명함을 전체를 통해서 좀더 지속적인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덕에 합당한 행위는 전체로부터 자신의 규범을 수용하였으며, 더 나 아가 덕에 합당한 행위를 함으로써 시민들은 자기자신을 실현하였다. 덕에 합당한 행위를 하는 가운데, 그 시민은 동시에 삶의 전체를 그 리고 타원하게 성취하였다. 후계자들(Diadochen, 알렉산더 대왕이 죽 은 후에 제국을 분할 통치했던 제1후계자들-옮긴이)의 통치기를 겪 고 마침내는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도시국가 공화국이 정치적 으로 몰락하게 되자, 도시국가의 시민세계는 자신의 구성적인 기능과 정신적인 장소를 잃어버렸다. 새로운 큰 국가들은 그 시민들에게 그 들의 옛날 도시국가가 제공해 준 것과 같은 관계를 마련해 주지 못 했다. 그러나 공리처럼 받아들여졌던 자명한 원리는 도시국가의 구체 적인 유효성의 조건에 대한 요구를 이겨내면서 살아 남았다. 스토아 의 범신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물리신학 Physiko-Theologie 은 도시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좀더 규모가 큰 살아 있는 전체인 코 스모스와 개인의 관계로 대체하였다. 이러한 대체를 통하여 부분과 전체에 대한 고전적인 원리는 비록 이것이 인간의 실천적인 상황을 더 이상 반영하지 못하게 되었어도 이론적으로는 여전히 힘을 행사 하였다. 이제 코스모스는 <신과 인간의 거대한 도시국가>라고 일컬어 졌고, 우주의 시민은 코스모폴리테스(우주시민, cosmopolites)가 되는 것 이 그의 목적이다. 고립화된 개인은 이 목적을 지향해야만 한다. 우 주 전체의 사태는 개인 자신의 사태로 간주되어야만 한다(왜냐하면 458그 개인은 또 다른 어떤 사대를 더 이상 자신의 것으로 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개인은 모든 중간적인 존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우주 의사대와 자기자신을 동일시해야 하며, 그 개인의 내면적인 자기자 신, 즉 자신의 로고스를 전체의 로고스와 조화를 이루게 해야 한다. 이러한 동일화의 실천적인 측면은 전체가 부산에게 부과해 준 역 함을 긍정하고, 우주적인 숙명이 김정해 놓은 위치와 특성에 합당하 게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역할을 한다.) 스토아 윤리학이 그렇게 즐겨 사용하던 비유, 즉 마치 연극 배우들이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해 내는 총체적인 연극에 대한 비유치 립,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상(像, Bild)은 위치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다. 수행해야 할 역할은 성취해야 할 실제적인 과업을 대체한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배우로서의 자신의 행위가 마치 자기자신의 결 정에 따른 것처럼 행위해야 하며, 마치 그런 연기하는 행위가 성공을 거두는 것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처럼 행위해야 한다. 여기서 정 말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 초래하는 실질적인 결과에 상관 하지 않고 오로지 잘 연기하는 것이지 잘못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연극 배우들은 용감하게 연기하는 가운데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도 된다.

연기해야 할 역할에 대한 이야기는 이 역할이 보여주는 능란함 이 면에 깊은 체념을 감추고 있으며, 거대한 연극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 려면 단순히 태도만 변화시키면 된다. 전체는 정말 부분을, 내가 부 분인 그 부분을 염려하고 있는 것일까?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주적인 숙명 kosmisches Schicksal을 섭리와 동일시함으로써 그렇게 주장하였 다. 내가 무엇을 연기하든 간에 <나>라는 부분은 전체를 위해서 정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스토아 철학자들은 코스모스를 도시국가 에 비유함으로써 그렇게 주장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비유는 구 성 작업의 인위성을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도시국가에 타당한 것과 반대로 나의 중요성은 나의 영향력을 박탈한 코스모스에 진주의 볼 때 그렇게 신빙성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코스모스 속에 존재하 는 (나)라는 부분은 일방적으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그 파토스는 영웅적인 것이었다. 이 파토스와 함께 존재 전체 속에 있는 인간의 통합성이 아주 그럴 듯 하게 보이는 본질적인 연관성에 의해서 계속 주장되어 온 그러한 과 토스 말이다. 그리고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그 파토스는 인간 지성을 몇 세기 동안 성공적으로 동원한 결과로 성취된 것이었다. 이 인간 지성과 함께 인간의 존엄성은 도시국가가 몰락한 후에도 긍정적인 도덕성을 보존할 수 있었고, 또한 원래의 정치적인 덕(촌, arete)의 이 상향이 가지고 있는 생명을 주는 힘을 변화한 관계들 속으로 이전시 켜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 제국의 새로운 그리고 원자화된 대중들은 결코 그 고귀한 전동에 참여한 적이 없었는데, 어졌든 이들 은 자신들이 그 속에 수동적으로 내던져져 있다고 발견한 그 상황에 대해 다른 식으로도 반응할 수 있었다. 부분이 전체에 대해 어떤 의 미도 없으며, 전체는 부분들에게 낯설기만 한 그러한 상황에 대해 대 중들은 다른 식으로도 반응할 수 있었다. 그노시스적인 개별자들의 영감은 전체의 척도에 합당하게 그들에게 부과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리고 본래적으로 존재하고, <자기자신답 게> 실존하는 것이었다. 그 개별자가 복종하고 있는 제국의 법이란 외적인 강압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으며,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 전체의 법, 즉 우주적인 숙명도 역시 강압적으로 그에게 주어지는 것 이었다. 우주적인 숙명을 지상에 실현하는 것은 세계국가 Weltstaat였 다. 우주적인 숙명으로서의 전체의 개념은 세계국가의 모든 측면에 구현되어 있었다. 자연 법칙, 정치적 법, 도덕 법칙 등으로서 구현되 어 있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그노시스와 실존주의를 비교할 수 있 는 우리의 도식으로 되돌아간다.

4 고대와 현대의 반법칙주의

법칙(법, Gesetz)의 이념, 즉 노모스 Nomos를 전복시킨 사건은 윤 리적인 결과들을 가져왔고, 이 윤리적 결과들 속에서는 그노시스적인 부코스모스주의의 허무주의적 요소들이 드러남은 물론, 이와 동시에 특정한 현대적 사유와의 유사성이 우주론적인 측면에서 더욱더 공공 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나는 지금 그노시스적인 반법칙주의 Anting mismus, 즉 법칙의 구속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물론 내가 즉시 인정하고 있는 바는, 그노시스와 실존주의가 객관 적인 규범을 부정하기는 하지만 이들이 아주 다른 이론적 수준에서 발 전된 것이라는 사실과, 더 나아가 그노시스적인 반법칙주의는 이것의 현대적인 등가물이 가지고 있는 개념의 내용적 충실성과 역사적인 자각성에 비해서 매우 원시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노시스의 경 우에 청산된 것은 천 년이라는 세월을 겪은 고대 문명의 인륜적 유 산이었으며, 실존주의의 경우에는 인륜법칙 Sittengesetz의 이념의 배 경을 이루었던 2천 년의 기독교적 형이상학이 덧붙여지는 것이다.니체는 허무주의적 상황의 뿌리를 〈신은 죽었다>는 말로 표현하였 으며, 일차적으로는 기독교적인 신의 죽음을 의미하였다. 자신들의 허무주의의 형이상학적 기반을 니체와 비슷하게 표현하고자 한 그노 말하자면 우리에 대해서 신으로 존재하고, 또한 우리의 삶에 방향을 시스주의자들은 <코스모스의 신은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제시해 주던 그런 신으로서의 우주의 신은 죽었다. 이 경우가 총체적 인 혼란으로까지 치단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혼란이 남긴 공백은 비록 밑바닥이 없어질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모 든 것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던 것만은 분명하였다. 니체에게 허 무주의가 의미하는 바는 <최상의 가치들이 탈가치화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상의 가치들이 발가치화되는 근거는 (사물의 피안(彼岸) 또는 사물의 주자 존재 자체가 '신적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도덕 이라는 식으로 감히 간주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 실에 대한 통찰이다. 신의 죽음에 대한 언급과 함께 이 문장은 하 이데거가 <니체의 사유에 있어서 신이라는 이름과 기독교적인 신이 라는 이름은 초감각적인 세계를 전반적으로 지시하는 말이다. 신은 이념과 이상적인 것의 영역을 지칭하는 이름이다)"라고 단정한 바를 지지해 준다. 초감각적인 영역으로부터 오직 <가치들>만이 그들이 가 할 수 있는 제약을 연역해 낼 수 있기 때문에, 이 영역이 사라진다는 것, 즉 <신의 죽음>은 최상의 가치들이 실질적으로 탈가치화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의무를 지고 있는 다른 모든 가치들의 가능성 자체가 말살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한 번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을 우리가 인용하자면, <신은 죽었다'는 말은 초감각적인 세계가 아무런 활성화 하는 힘도 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외설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또한 그노시스적인 입장에도 잘 들어맞 는다. 물론 그노시스가 가지고 있는 극단적인 이원론은 초원의 과업 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시사하고 있다. 세계 밖에 존재하는 신은 초원 을 정작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세계 밖에 존재하는 신 속에서 절대적인 피안은 우주의 둥그런 외피(外)를 관통하면서 외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와는 달리 또는 유대교가 언급하는 세계의 지배자와는 달리, 그노시스의 초월자 는 감각적인 세계와 아무런 긍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그노시 스의 초월자는 감각적인 세계의 본질도 아니고 원인도 아니다. 오히 리 그 초월자는 감각적인 세계에 대한 부정이자 지양이다. 대미우륵 파는 다른 그노시스적인 신은 철저하게 이질적이고, 낯설으며, 인식 되지 않은 신이다. 인간 내면에 있는 것으로서 이 신의 상용물이라고 할 수 있는 프뉴마 Pneuma처럼, 이 신은 존재 ets 자체보다는 무(無 nilil)를 더 많이 간직하고 있다. 프뉴마의 감추어져 있는 본성은 타 자성을 부정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정의할 수 없는 자유 를 부정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에 대해 아무런 규범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초월자는 자신의 활성 화하는 힘을 잃어버린 초월자와 유사하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 간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성과 인간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볼 때, 이 감추어져 있는 신은 허무주의적인 입장을 시사해 주고 있다. 신으로부터 어떠한 법칙도 유래하지 않는다. 자연을 위한 법칙 그리 고 이와 더불어 자연 질서의 일부분으로서의 인간의 행위를 위한 법 척도 유래하지 않는다.

이러한 바탕 위에 그노시스주의자들의 반법칙주의적인 논증은 마 치 사르트르의 논증처럼 아주 단순하게 자리잡고 있다. 사르트르는말하기를, 그 초월자가 침묵하기 때문에 그리고 <세계 속에는 어떤 하는 인간은 자신의 자유에 대한 진리를 요구할 수밖에, 아니 자유를 표적도 없기 때문에〉, 버림받은 그리고 스스로 모든 것을 질이지야 스스로 떠맡는 수밖에는 다른 어떤 아무런 방도가 없다. 인간은 <자 기자신의 기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것이 그에게 허용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절망적인 종류의 자유이며 그리고 이러한 자유가 아무런 지 침이 없는 과업으로서 환호보다는 오히려 불안을 불러일으킨다는 사 실은 별개의 문제이며, 나는 이 문제를 여기서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노시스적인 사유 속에서 우리는 흔히 고대적인 인습과 반법칙주 의적인 논증의 순전히 주관적인 형태와 마주치게 된다. 결코 어떤 것 도 본성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은 아니다. 사물들 자체는 무차별적 으로 아무것에도 연연해 하지 않으며, 단지 인간적인 견해에 따라 행 위는 선하거나 악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영적인 인간은 자기가 간 직하고 있는 인식의 자유 속에서 모든 것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상대주의는 결코 그노시스적인 반법칙주의의 참된 뿌리가 아니 다. 왜냐하면 그 <인간적인 견해>의 마지막 원천, 즉 그것에 의해서 행위들이 선하거나 악한 것으로 간주되는 그런 인간적인 견해의 마 지막 원천은 그노시스적 직관에 따르면 인간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이자 세계의 데미우록이기 때문이다. 플로티누스는 덕론(德論, Tugendlehre)의 결여와 그노시스주의자에게서 엿보이는 세계에 대한 경멸 사이의 연관 관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에피쿠로스보다) 더 대담하기 짝이 없게 그노시스주의자들은 섭리를 주관하는 자와 섬리 자체를 책망하면서, 이 세계의 모든 법칙성과 시간이 시작되던처음부터 인간들 사이에 형성된 덕을 경멸하였다>("연네이넥스 9. 15). 왜냐하면 그노시스주의자에게 이른바 모든 도덕법칙의 최종 근 거는 자연법칙의 최종 근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 의 우주적 결정한 kosmischer Determinismus과 이 우주적 결정본이 인간의 자유에 적용된 것의 내면적 그리고 외면적인 측면으로서 살 호보완적이다. 이 둘은 세계의 주인의 힘의 도구들로서 세계의 주인 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이와 같은 것이 유대교적인 신의 경우에는 한 편으로는 창조자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법칙을 내려주는 자로서 이중 적인 측면에서 드러나듯이 말이다. 물리적인 법칙과 운명이 육신들을 보편적인 체계 속으로 귀속시켜 버리듯이, 그렇게 도덕법칙도 영혼들 을 데미우륵의 통치 아래 귀속시킴으로써 결국은 영혼들을 보편적인 체계 속으로 귀속시켜 버린다. 이러한 도덕법칙의 원리가 <정의)인 한 즉 보상의 정의 Lohngerechtigkeit와 형벌의 정의 Strafgerechtigkeit (특히 후자의 경우)인 한에 있어서, 그 도덕법칙의 원리는 심리적인 것에서도 동일한 억압적 특성을 갖는다. 마치 우주적인 숙명이 물리 적인 것에서 그런 억압적 특성을 갖는 것처럼 말이다. <세계의 창조 자 천사는 '정의로운 과업'을 착수하는데, 그 까닭은 이러한 교실을 통해서 인간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함이다>(시은 마그누스). 주어진 규 범들에 복종하는 자는 자기자신의 권위를 포기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교설의 무질서하고 흔히 방탕스럽기까지 한 결말들을 더 이상 추적할 수 없다. 더욱이 실천적인 결말은 방탕할 수도 있고 또는 금욕적일 수도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무질계를 통 하여 자연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할 수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금욕 을 통하여 자연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기 때문에, 총체적인 자유를 보 존하기 위하여 많은 순간에 모든 것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해치울 수 있는 긍정적인 과업을 창출해 낸다. 이것은 파우스트적인 이념의 씨앗인데, 우리는 그 근원을 실제로 그노시스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는 살이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남용에 의거한 자유 그리고 자연 있다. 어쨌든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여기서는 객관적인 규법 밖에 있 의 왕국을 사용하지 않음에 의거하고 있는 자유는 오로지 동일한 무 코스모스주의가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 것일 뿐이다. 이러한 뿌리 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주관주의의 순전히 회의주의적인 논증을 훨씬 넘어서서, 그노시스주의자가 모든 규범을 거부하는 태도에는 하나의 긍정적인 형이상학적 관심이 활성화되고 있다. 그것은 자기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주장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가 <영혼 psyche)의 사태가 아니라, <영 pneuma)의 사태라 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치 육체가 자연법칙에 의해서 아주 적절하게 결정되어 있듯이, 영혼은 도덕법칙에 의해서 그렇게 아주 적절하게 결정되어 있다. 영혼 자체는 자연질서의 일부분이다. 영혼은 데미우록 또는 행성들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며, 그것이 창조된 까닭은 낯설은 프뉴마, 즉 도저히 정의할 수 없는 존재의 내면 적 핵심을 감싸기 위해서이다. 창조자는 규범적인 법칙 속에서 자기에게 속한 것을 통제한다. 그 본성상 이를테면 감성을 가진 존재이자 오성적인 존재로서 정의될 수 있는 심리적인 인간은 아직도 여전히 자연적인 인간이다. 그리고 이 자연적인 인간의 본질은 인간의 프뉴마적 자기자신을 규정할 수 없다. 마치 실존주의적인 입장에 따르면, 자신을 기투하는 실존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어떠한 본질을 실현시 키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을 하이데거의 논증과 비교해도 좋을 것이다. 『인문주의에 대한 서한이라는 책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 animal rationale이라고 정의하는 고전적인 정의를 비판한다. 말하 자면 고전적인 정의는 동물 atinsal이라는 생물의 류(類, Genus)가 가 지고 있는 특정한 속성 가운데에서 드러나는 어떤 종(種)적 차이에 집착하면서 인간을 동물성 animalibus에 속한 것으로 분류한다는 것이 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하는 것이 인간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라 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나는 하이데거가 동물 amimal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을 그냥 주변적으로만 언급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각각의 정의 가능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거부이다. 이런 식의 인간 본성은 미리 규정되어 있는 본질 아래에서 인간의 존재를 이해하고, 이와 함께 인간을 자연 전체 속에 있는 본 질들의 객관적인 질서의 일부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와 같이 하나 의 초본질적 transessentiell이고, 자유로이 기투하는 실존의 개념 속에 서 나는 이것이 비세상적인 프뉴마의 초영혼적인 transpsychisch 부 정성에 대한 그노시스적인 개념과 비교할 만한 점이 있다고 본다.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규범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직 자연들 의 질서, 이를테면 창조 질서에 속하는 것만이 본성을 가지고 있다. 오직 전체가 있는 곳에만, 법칙이 존재한다. 그노시스주의자들이 평가절하 하는 식으로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이것은 우주 전체에 속하 는 영혼 psyche에 해당한다. 그러나 어떤 질서에도 속하지 않는 프뉴마 티코스"는 법칙을 넘어서서 그 위에 존재하며, 선악의 피안에서, 자신의 <인식>의 힘 속에서 스스로 법칙이 된다.

5 현재가 없는 시간성

그런데 이러한 인식함, 즉 영혼이 아니라 영 Geist에게 고유한 인식 이자 또한 이 영적인 자기자신이 우주적인 노예성에서 탈피할 수 있는 구원을 시사해 주는 이 인식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저 유명한 발렌티누스적 공식은 그노시스의 대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였으며 또한 우리가 무엇이 되었는가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었으며, 우리가 어 디로 던져졌으며, 우리가 어디로 서둘러 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구원되었는지, 무엇이 탄생이며, 무엇이 재탄생인지에 대한 인식이다.> 이 구절을 실제로 해석하려면, 그노시스적인 신화 을 총체적으로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몇 가지 형 식적인 언급만을 하고자 한다.

우선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짝을 짓고 있는 그 용어들이 이원론 적으로 무리지어 있음을 살펴보고 그리고 과거에서 미래로 역전될 수 없는 방향성과 함께 그 용어들 사이에 존재하는 종말론적인 긴장 을 살펴보기로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 표현들이 전적으로 존재의 개념이 아니라 생성과 운동의 개념을 지시한다는 것을 언급할 것이 다. 인식은 역사, 즉 그 속에서 인식 자체가 하나의 위기적인 사건인 그러한 역사로부터 유래한다. 이러한 운동의 개념들 가운데 <무엇 속 으로 내던져져 있음 Hineingeworfensein in etwas)의 개념은 우리에게 본래적으로 친숙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서, <내던져지 있음 Geworfenheit)은 현존재의 근본적인 특성이자 현존재의 자기 경험의 근본적인 특성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적어도 내 가 알고 있는 바로는, 이 〈내던져져 있음)이라는 용어는 원래 그노시 스적인 것이다. 이 용어는 만다적인 문헌 속에서는 고정되어 있다. 삶은 세계 속으로 내던져져 있으며, 빛은 어둠 속으로 내던져져 있고, 영혼은 육체 속에 내던져져 있다. 이 용어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에게 묻지도 않은 채 나에게 엄습해 오는 힘, 즉 내가 만들지도 않았으며 또한 그것의 법칙이 나의 법칙 도 아닌 그런 세계 속에 처해 있어야만 하는 나의 수동성을 표현하 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던짐의 상(像)은 그렇게 시작 하는 존재 Existenz 전체에게는 하나의 역동적인 성질을 부여한다. 우 리의 공식 속에서는, 이 존재는 하나의 목적이나 종말을 향한 <서두 름)의 상과 결부되어 있다. 세계 속으로 내던져져 있으면서 그리고 던저짐 속에 계속 존재하면서 삶은 미래를 향해 자신을 내던진다.

이것은 발렌티누스적인 공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마지막 언급 으로 나를 이끌어 간다. 말하자면 발렌티누스적인 공식의 시간적 규 정들 속에는 현재를 위한 어떤 공간도 없다. 인식이 그 현재의 내용 과 관계하며, 인식의 직관 속에서 앞으로 향한 도약이 유지될 수 있 는 그런 현재를 위한 어떤 공간도 없다. 거기에서 우리가 왔으며, 거 기로 우리가 서둘러 가는 과거와 미래가 있다. 그리고 현재는 오로지 인식 자체의 순간, 즉 종말론적인 현재가 가장 고조되어 있는 위기 속에서 하나의 현재로부터 또 다른 현재로 이행해 가는 전회점일 뿐 이다. 물론 여기에 병행하는 현대적인 사유[실존주의]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비록 시간성 Zeitlichkeit 속으로 던져져 있다 고 하더라도, 그노시스적인 공식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근원은 영원 속에 있으며 또한 우리의 목적도 영원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지평 속에 있는 세계 내적인 허무주의이다. 현 대의 실존주의는 그런 형이상학적인 지평을 갖고 있지 않다.

거기에 병행하는 현대적인 사유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기 위하여, 나는 내가 관찰한 것으로서, 또한 『존재와 시간』을 주의깊게 읽은 독 자라면 누구나 알아차렸음에 틀림없는 그런 측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자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하나의 <기초존재론 Funda- mental-Ontologie)을 특정한 방식에 따라 발전시키고 있다. 그 특정한 방식이란 다름 아닌, 그 속에서 현존재가 실존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영위하는 방식들이며,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존재의 서로 다른 의미들이 구성되는 그런 방식들이다.  이러한 방식들은 하이데거가 <실존범주적인 것 Existentiale)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했던 한 무리의 범주들 속에서 드러난다. 칸트의 범주들과는 달리, 하이데거의 범주 들은 일차적으로 객관성의 구조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시 간의 〈움직여져 있음의 구조들 Bewegtheitsstrukturen)을 표현하고 있다. 내적 시간 속에서 끊임없는 일어남 Ereignis으로써의 자기자신은 행위함으로써 무엇인가를 향해 <시간화한다). 그러므로 실존범주적인 것들 속에서 시간의 세 지평ㅡ과거, 현재, 미래ㅡ이 드러나며, 실존 범주적인 것들 아래에서 그렇게 세 지명으로 나뉘어질 수 있게 된다. 만약 우리가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범주들을 이 세 가지 명칭 아래 배열하고자 시도해 본다면, 우리는 특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튼특이한 사실은 내가 존재와 시간이 출판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전적으로 고전적인 방식대로 범주표를 도표로 그려 보려고 노력 했을 때 내 눈앞에 분명히 드러났다. 내가 발견한 것은 <현재 Gegen wart)라는 명칭 아래 길게 이어지는 행렬은 실제로 공허하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본래적인 실존의 양태들이 문제가 되는 한 말이다. (현 재)는 극단적으로 단축시켜 단언된 말이다. 실제로 실존적인 <현재> 에 대해서 많은 말이 오가고 있기는 하지만, 고유한 권리의 독립적인 차원으로서 말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실존적으로 <본래 적인〉 현재는 <상황>의 현재이며, 이것은 전적으로 미래와 과거를 향 한 관계에 의해서 구성된다. 미래를 향한 기투가 주어진 과거(내던지 져 있음)로 다시 돌아올 때 그리고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만남 속에 서 〈순간)을 산출할 때, 현재는 결단의 빛 속에서 번쩍인다. 지속이 아니라 순간이야말로 <현재>의 시간적인 양태이다.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탈자성 Zeitextase의 산물이자, 이들의 안식이 없는 상호역동성의 기능으로서 현재는 체류할 수 있는 자신의 고유한 차원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인 움직여져 있음 innere Bewegtheits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있으면서, 순전한 <현재>는 잡담 Gerede 과 호기심 Neugier과 새인(世人, das Man)들 속에 푹 빠져 있음으로 im Verfallensein 바로 본래적인 미래와 현재의 상관관계를 상실한 다. 이것은 참된 실존의 긴장을 놓치는 것이며, 일종의 존재의 침잠 상태이다. 실제로 <빠져 있음 Verfallenheit)은 부정적인 개념으로서 실존적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실존적인 것은 시간의 좌표에서 <현 재>를 재현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가 결점이 많은 실존의 한 양 태이자 실존으로부터 유도해 낸 양태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이에 따라 우리가 본래적으로 단인할 수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실존의 모든 본질적인 범주들, 말하자면 실존으로 하여금 본래적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근거지어 주는 범주들은 과거와 현재라는 명칭 아 래 묶여 있는 서로 상관적인 짝들로 연결된다. 현사실성 Faktizität, 존 재해 옴(기재. Gewesenheit), 내던져져 있음. 필연성, 탓 Schuld은 과 거의 실존적 양태들이다. 실존, 자기를 앞질러 있음 Sichvorwegsein, 염려 Sorge, 기투 Entwurf, 결단성 Entschlossenheit,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감은 미래의 실존적 양태들이다. 참된 현존재가 그 속에서 머물 수 있는 현재 따위는 없다. 현존재는 자신의 과거에서 뛰쳐나와 자신 의 미래를 향해 기획투사한다. 현존재는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한계에 자기자신이 직면하고 있음을 본다. 현존재는 허무를 바라보는 이 시 선으로부터 자신의 순수한 현사실성으로 되돌아온다. 현존재는 자기 자신이 이렇게 여기에 지금 던져져 있는 존재로서 그냥 주어져 있다 는 사실로 되돌아오며, 더 나아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또한 죽 음을 재촉하는 결단과 함께 <반복적으로(다시 잡으며, wiederholend)> 앞으로 나아간다. 거기에는 머물러 있을 현재 따위는 없으며, 오로지 과거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 사이의 위기만 있을 뿐이다. 즉 앞으로 떠밀려 나아가면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날카로운 칼날 위에 처 해 있는 극단적인 순간만 있을 뿐이다.

이처럼 숨가쁜 역동성은 당시의 시대정신에게는 엄청난 매력이 있 었다. 참된 내용의 장소로서의 현재가 이렇게 획 지나가는 것 속에는 하나의 수수께끼가 자리잡고 있다. 순전히 형식적인 결단의 영점( 點), 즉 머무르고 싶지 않게 황량한 영점으로 그 장소가 환원되는 것 속에는 하나의 수수께끼가 자리잡고 있다. 어떤 형이상학적 상황이 그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문제는 순간적인 실존범주적 (현재> 이외에도 사물 의 현재도 있다. 사물의 현전은 내가 그들과 더불어 현재에 공존한다 는 것을 그리고 나에게 종류가 다른 어떤 현재도 있다는 사실을 보 장해 주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하이데거에게서 사물들은 일 차적으로 <손 안에 zuhanden〉 있다고 배웠다. 즉 사물들은 사용될 수 있거나 조달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물들은 염려하는 실존의 기획투 사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래서 또한 미래와 과거의 역동성에 개입되 어 있다. 물론 사물들도 역시 순전히 <눈앞에 있는 vorhanden 존재) 로, 무관심한 대상들로 중립화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사물의 이미 <눈앞에 있음 Vorhandenheit)의 양태는 실존적인 측면에서 하이데거 가 빠져 있음 Verfallenheit, 즉 거짓된 현재라고 부른 것에 대응하는 사물 쪽의 대립물이다. 오로지 그저 눈앞에 있는 것 das nur noch Vorhandene, 즉 순전히 자연적인 사물의 거기 Da는 실존적인 상황 그리고 염려하는 태도와의 관계에서 밖으로 떨어져 나와 있으며, 우 리가 그들을 그저 쳐다볼 때 거기에 있다. 그 사물들은 소외되고 박 탈되어 순전히 대상으로 전락된 존재이다. 이것이야말로 여기에서 이 론과 관련을 맺는 자연에 남아 있는 존재의 의미이다. 결점이 있는 존재의 의미이다. 그리고 그 사물들이 그렇게 대상화되어 있는 관계 는 실존의 결점이 있는 양태이며, 이러한 양태는 그들이 염려의 미래성에서 호기심의 향락스런 현재 속으로 전락하는 것에서 그 모습이 드러난다. (나는 여기에서 '존재와 시시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 더 이상(실존주의자)라고 볼 수 없는 후기 하이데거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실존주의가 자연을 탈가치화한 측면은 현대의 자연과학에 의해서 이것이 영적으로 공허하게 된 형태를 분명하게 거울에 비추듯 되비 취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은 그노시스적인 자연 경멸과도 공 통점이 있다. 실존주의처럼 자연을 소홀히 취급한 철학은 결코 없었 다. 실존주의에서 자연은 아무런 존엄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거기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 자연을 바라보는 것, 즉 자연이 그 것인 바 그대로 있는 것, 존재자를 바라보는 것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테오리아, 즉 관조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무런 관계가 없는 눈앞에 있 는 것 das Vorhandene만이 테오리아에게 남아 머물러 있다면, 테오리 아는 그것이 한때 가지고 있던 존엄성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테오리 아는 그 현재도 잃어버린다. 그 현재란 말하자면 관조가 그(현재) 속 에서 직관하는 자를 대상의 현재를 통해서 붙잡고 있는 그런 현재이 다. 테오리아는 플라톤적인 전제 때문에 이러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 었다. 왜냐하면 테오리아가 사물의 형상들 속에서 영원한 대상들, 즉 불변하는 존재의 초월을 통찰하였기 때문이다. 이 불변하는 존재의 초월은 생성을 관통하는 가운데 빛나고 있다. 불변하는 존재는 영원 한 현재이다. 그리고 관조는 시간적인 현재의 짧은 기간들 속에서 영 원한 현재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를 보장해 주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에게 하나 의 고유한 위상을 부여해 주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영원이다. 그리고 영원의 상실은 참된 현재의 상실을 불러일으킨다. 그처럼 영원이 상 실된다는 것은, <이념들과 이상적인 것의 영역>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념들과 이상적인 것의 영역이 사라지는 것을 지칭하면서 하이데거는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의 참된 의미라고 하였 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실재론을 밀쳐내고 유명론이 완전히 승리 한 것이다. 그러므로 허무주의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과 똑같은 원인 이 하이데거의 실존에 대한 표상 속에 함축되어 있는 과격한 시간성 의 근저에도 깔려 있다. 하이데거의 실존에 대한 표상 속에서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위기의 계기에 불과하다. 존재를 직관하는 가운 데 가치들이 발견되는 것(마치 플라톤에게 있어서의 선과 아름다음처럼)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기획투사하는 바에 따라 정립되는 것이 라고 한다면, 실제로 실존은 끊임없는 미래성을 향할 수밖에 없도록 정죄되어 있다. 그 실존의 목적지는 죽음이다. 그리고 결단을 위한 어떤 규칙 nomos도 하나 없이 순전히 형식적인 결단성이 된다는 것은 무(無)에서 시작해서 결국 무로 끝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인용한 바 있는 니체의 말에서 잘 드러나듯이 말이다. (네가 잃어버린 그것 을 잃어버린 자는, 아무 곳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하리라>

6 자연의 무관심

우리의 탐구는 다시 한 번 허무주의적인 상황의 형이상학적인 배 경이 되고 있는 이원론, 즉 인간과 퓌시스 physis의 이원론으로 되돌아 간다. 우리는 그노시스적인 이원론과 실존주의적인 이원론 사이에 존 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노시스적 인간은 하 나의 반신적(反神的)이고, 또한 그래서 반인간적인(反人間的)자연으 로 내던져져 있다. 현대의 인간은 무관심한 자연으로 내던져져 있다. 후자의 경우야말로 비로소 절대적인 공백, 실제로 밑바닥이 없는 심 연을 의미한다. 적대적인 것, 즉 악마적인 것은 그래도 아직 인간동 형적 anthropomorph이며, 그것의 소외성 속에서 친숙한 것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친숙한 것으로서의 대립자는 현존재에게 방향을 제시해 준다. 비록 부정적인 방향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부정적인 방향의 배후에는 부정적인 초월의 제약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부정 적인 제약의 상대편에 있는 질적인 대립자는 세계의 긍정성이다. 이 처럼 서로 대립적인 성질은 현대 학문의 중립적인 본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현대 학문의 중립적인 본성은 어떤 방향성을 제시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현대의 허무주의는 그노시스적인 허무주의보다 훨씬 더 과격하고 절망적이다. 그노시스적인 허무주의가 아무리 세계를 끔직스럽게 여기고, 또한 세계의 법칙에 대항하려고 했어도 현대의 허 무주의만큼 과격하고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자연이 아무런 염려도 하 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절망적인 상황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스스로를 염려하며, 죽음만을 앞에 두고 자신의 유한성 속에서, 홀로 자신의 우연성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객관 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사실 때문에 시달리는 것은 진실로 역사상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차이, 즉 현대의 허무주의의 보다 깊은 심연을 폭로하는 이 차이는 또한 자신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노시스적인 이원론은 자신이 만들어 낸 모든 환상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모순이 없었다. 악마적인 자연의 이념, 거기에 대항해서 자기자신이 승리를 해야 할 악마적인 자연의 이념은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기자신의 존재가 그것에게 무언가를 의미하는 그
런 것[인간]을 자신[자연]의 한가운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직하고 있는 무관심한 자연은 과연 어떤 지경에 있는 것일까? 세계로 내던져져 있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이원론적인 형이상학의 잔재물이며, 형이상학이 없는 입장은 이 이원론적인 형이상학의 잔재물을 사용할 권리가 없다. 던지는 자가 없는 던짐은 도대체 무슨 말이며, 또한 어디로부터라는 장소가 없는 던짐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런 식으로말하기보다 오히려 실존주의자들은 인간ㅡ의식적이고, 염려하며, 느 끼는 자기자신ㅡ이 자연으로부터 산출되어 던져진 것이라고 말했어 했다. 만약 맹목적인 방식으로라면, 보는 존재는 눈먼 존재의 산 물이며, 목적론적인 자연은 비목적론적으로 산출된 것일 텐데 말이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무관심한 자연의 개념 전체, 즉 자연과학이 추상적으로 만들어 낸 이 무관심한 자연의 개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 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동형론이 자연의 개념으로부터 너무나 철저 하게 추방당한 나머지, 인간도 그러한 자연 안의 어떤 우연에 불과한 이상, 인간 자체도 인간동형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게 되 있다. 무관심한 것의 산물로서 인간의 존재도 무관심한 것임에 틀림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신의 소멸성에 직면하는 것은 오로지 거기 에 대한 반응만을 정당화시켜 줄 것이다. <먹고 마시기로 하자, 왜나 하면 내일 우리는 죽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의도 속에 서 어떠한 제약도 배후에 두고 있지 않은 것을 위해서 근심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만약 하이데거의 깊은 통찰이 옳다면, 즉 우리의 유한성을 직시하면서 우리가 실존한다는 사실뿐만 아 니라. 우리가 어떻게 실존해야 하는가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하이데거의 동찰이 옳다고 한다면, 그러한 관심이 세계 안의 어느 곳엔가 있다는 순전한 사태 역시 전체성, 즉 그 사태를 포함하 고 있는 전체성을 특성지음에 틀림없다. 물론 만약 세계가 그러한 사 태를 산출해 놓았다고 한다면 말이다.

인간과 총체적인 존재 사이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 허무주의의 근 저에 깔려 있다. 이렇게 단절된 관계의 논리적인 문제점, 즉 형이상 학이 없는 이원론의 문제점. 다시 말해서 일원론적인 전제를 바탕으 로 하고 있는 이원론의 문제점은 자신의 사태를 실제적인 것으로 만 들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밖의 다른 가능성도 상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고립된 자기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시선은 인간을 심판하 여 고립된 자신으로 향하게 만든다. 고립된 자기자신을 직시하고 있 는 시선은 일원론적인 자연주의, 다시 말해서 인간과 총체적인 존재 사이의 단절과 함께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이념을 제거해 버리는 일 원론적 자연주의와 자기자신을 교체하고 싶어할지 모른다. 이 스칠라 와 저 하룁디스(스칠라의 쌍둥이 자매) 사이에서 현대의 정신은 오 락가락하고 있다. 현대의 정신에게 제3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지, 즉 이원론적인 소외를 피해가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인간의 인간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이원론적인 통찰로부터 충분히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그런 길이 열려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