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에서 제10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생명체의 철학에서 인간철학으로
지난 몇몇 탐구들에서 우리는 육체적인 영역과 정신적인 영역 사이의 경계선을 넘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정신적인 영역만을 다를 것이므로, 이를 위해서 잠시 몇 단계, 즉 물질대사로부터 시작하여 그 보다 점점 더 높아지는 여러 단계들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모상(模像)>과 <진리>의 현상을 언급한 곳에서 이미 다루 었던 실제성 Wirklichkeit으로부터의 형상의 분리는, 생명체의 주위세계에 대한 관계에서 간접성 Mittelbarkeit이 새롭고 결정적인 높은 단계로 이행해 가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런 간접성의 정도가 점차 높아지는 것은 모든 생명체적 진화의 전체 과정에서 관찰될 수 있다. 물질대사 자체는, 그러므로 이미 식물생명의 물질대사도, 매개된 자기 정체성과 연속성이다(제5장 참조). 동물생명의 수준은 식물 존재의 상대적인 직접성을 벗어나서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었다. 동물 수준에서 나타나는 간접성은 운동, 지각 및 정서(제6-7장 참조)와 같 은 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 세 측면은 모두 간격을 함축하고 있다. 간격을 넘어서 그리고 지각과 노력(애씀)과 행위의 방식에 의해 <세계>는 구성되고, 식물생명이 관계하고 있는 바와 같은 단순한 주위환경의 차원을 넘어선다. 주체는 구체적이고 제 나름대로 폐쇄되어 있는 대상들과 함께 <세계>와 부딪힌다. 반면에 식물들의 주위세계는 식물들에게 인접해 있는 물질과 식물들에게 가해지는 힘으로 구성되어 있다. 식물들이 외부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은 자신의 주위세계와 화학적으로 교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모든 생명체적 현존재의 바탕이다. 그러나 동물생명의 경우에는 이런 영양섭취의 차원이 외부 공간에 존재하는 대상들과 그 생명체가 관계를 맺는 방법으로 우회적으로 일어난다. 동물들은 물질대사 체계 속에서 화학적인 교류를 하기 전에, 이 외부공간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지각하고, 갈망하며, 그들에게 접근하고 외적으로(역학적으로) 작업한다. 그러므로 동물적 단계의 자유는 행위함으로써 변화무쌍하게 적응하는 자유인 데, 이 행위는 성취해야 될 목적과 다르며 또한 이때문에 참과 거짓, 성공과 실패의 양자택일의 운명에 처해 있다. 단순히 생명체적인 차원에서 생명을 보존하는 목적에 도구적으로 봉사하는 역할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더 높은 단계에 속하는 간접성은 생명의 본질적인 변증법의 힘에 의존하여 일련의 자기자신의 관심거리를 구축한다. 이 일련의 관심들은 식물적 기능과 동물적 기능 사이에 존재하는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역전시킨다. 유쾌함과 고통의 느낌들은 동물들이 행동하는 데 대한 내면적인 보상 그리고 징벌과 같은 동물적인 경험을 동반한다. 그리고 유쾌함과 고통의 느낌들 가운데에는 동물들이 행동할 때 느끼는 흥분 자체도 포함되어야 한다. 어쨌든 이러한 유쾌함과 고통의 느낌들은 동물적인 활동이 동물들 자신을 위해 평가하고 목적을 성취하는 능력을 천부적으로 갖고 있음을 말해주는 분명 한 표징이다. 우리가 동물에게서 아직 엿볼 수 없는 점은 지각이 그 자체로서 즐거운 것이고 또한 지각이 경험하기 위하여 경험하는 그런 경험의 상태를 갖는 점이다.
우리는 지각의 영역에서 특히 원거리 감각들이 간접성의 틀에 원헌하는 측면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원거리 감각들 가운데서도 시각은, 생명체와 세계를 분리시켰다가 이차적인 관계에서 다시 통합시 키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제8장 참조), 보이는 대상은 생명체가 외부세계와 직접 생명체적으로 교류하는 것 사이에 등장한다. 생명체가 닿을 수 없을 정도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사물들에 대한 정보는 그러한 교류를 계속 더 앞으로 유도하고, 인도하며 또 통제한다. 동물들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거치는 이 우회로의 구부러짐은 곧 동물생명의 자유이자 위험의 장소이다. 먼 곳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아직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은 대상과 자기자신 사이의 간격 속에서 동물의 감정은 특정한 것을 선택하고, 이를 위하여 원거리에 이르는 운동을 착수한다. 우리가 제8 장에서 보았듯이, 시각 자체는 직관과 심적 자세의 측면에서 동물이 상의 수준으로 고양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동물보다 더 높은 수준의 정신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는 이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다.
인간의 모상화 능력에서는 간접성이 한층 더 높은 등급으로 성취 되며, 생명체와 주위세계 사이의 간격은 한층 더 크다(제9장 참조). 이 새로운 등급은 지각이 이념적으로 확장 ideative Ausdehnung되는 데 자리잡고 있으며, 처음에는 동물적인 정서와 운동능력의 인간적인 형태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비록 나중에는 그렇게 되지만) 이 새로운 간접성은 추상화된 그리고 정신적으로 조작된 형상 Eidos 지각과 현재의 대상 사이에 끼여들면서 생성된다. 이것은 마치 동물적인 간접성의 차원에서 대상에 대한 지각이 생명체의 일차적인 주위세계와의 관계와 생명체 사이에 개입하는 것과 유사하다. 인간은 자신의 연상능력과 언어능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사물을 직접 보지 않아도 된다. 인간은 표상들의 창살 너머로 사물을 본다. 이 표상들은 그가 과거에 사물을 보던 경험으로부터 아직 간직하고 있던 것을 지금의 지각내용이 불러들인 것으로서, 이로 말미암아 현재의 지각내용은 그 표상들의 상징적인 내용과 함께 침잠하고 또한 현재의 지각 쪽에서도 무언가를 첨가한다. 그러나 이 표상들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경험의 간격 속에서 정말로 가장 크게 활약하는 때는 직접적인 지각의 대상이 부재할 때이다. 이때 주체가 장악하고 있는 추상화된 상들은 자기자신 속에서 새로운 간격의 <경험>이 일어날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한다. 말하자면 상징적인 경험이 일어날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 상징적인 경험 속에서 주체는 세계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다. 이 상황에서 상징적인 경험은 세계가 그 주체 앞에 직접 현존하도록 강요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제3의 등급의 간접성 속에, 마치 이곳이 그들의 고향이기나 한 것처럼 거짓의 현상과 진리의 현상이 본질적으로 정착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도 다시금 한 단계 더 나아가는 매개의 문턱이 된다. 대상화의 자유 Freiheit der Objektivation는 주체 앞에 타자의 잠재적인 총체성, 즉 <세계>를 가능적인 이해와 행동의 무한한 영역에 세워 놓는다.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대상화의 자유는 주체에게로 회귀할 수 있고 또한 희귀해야만 하며, 더 나아가 자기 쪽에서도 주체를 어떤 관계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고 또 만들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어떤 관계는 다시금 형상 Eidos을 거쳐서 우회로를 취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형상 Form〉은 외면성의 전체 영역의 형식들과는 종류가 다르다. 왜냐하면 이 형상은 주체 자신의 모든 외면성에 대한 관계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반성의 새로운 차원이 전개된다. 이 반성 속에서 모든 대상화 작용의 주체는 그런 것으로서 자기자신을 현상시키고, 주체 나름대로 하나의 새롭고 언제나 자기자신에 의해서 매개된 종류의 관계를 위한 대상이 되어 준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이며, 사물의 계획 속에 위치하는 나의 자리는 어디이며, 나의 몫은 무엇인 까? 여기에서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주체는 떨어져 나와 어떤 간격 속에 위치하게 되는데, 이 간격 속에서 주체는 모든 사물들을 간직하고, 이 간격으로부터 모든 사물들을 끌어 내어 형상적 지향성 eidetische Intentionalität의 지향작용 속으로 가져 온다. 비록 이렇게 자신을 대상화하는 것이 형상화하는 능력이 발휘 된 것이기는 하지만, 형상화하는 능력이 밖을 향하여 자동적으로 발휘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형상화하는 능력이 밖을 향하여 발휘되는 경우들 가운데 하나는 모상적 현현이다. 황소와 그 황소를 쫓는 사냥꾼의 모습을 그리는 인간은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자기자신의 행동 방식이나 심리적인 상태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충만한 의미에서의 인간 존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경탄하고, 자기를 찾으며, 비교하는 시선의 간격을 통하여 새로운 존재로서의 <나>가 구성된다. 모든 것 가운데서 이것이야말로 간접성과 대상화의 가장 큰 모험이다. 우리는 <모상 Bild〉이라는 단어 를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 존재의 속성에 속하는 모상에 따라서 형태를 만들고, 경험하며 자신의 내면적인 존재와 외적인 행위에 대해 판단한다. 의도적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인간은 인간의 이념 속에서 <산다>. 일치 아니면 갈등 속에서, 고분고분함 또는 반항 속에서, 승인 또는 부정 속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아니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이 말이다. 아무리 인간이 차라리 동물로 있 는 것이 행복하겠다는 식으로 동물의 상태를 갈망하더라도, 인간의 상(像, Bild)은 결코 인간을 떠나지 않는다. 신의 상에 따라 im Bilde Gottes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어떤 한 상과 더불어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 상은 인간들이 사회에서 말을 주고받으면서 의사소통하는 가운데 탐구되고 이야기된다. 그러는 가운데 한 개인은 그 상이 완성된 것을 발견하고 또 자신에게 부과된 것으로서 발견한다. 인간이 다른 인간들로부터 사물을 보는 방법과 사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방법을 배우듯이, 인간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는 방법을 배우고 또한 그가 거기서 보는 것을 기존의 전행에 따라 <상으로 그리고 비교하면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배우는 동안 인간이 <나>를 이야기하는 방법을 배우는 동안에 인간은 또한 기능적으로 자기자신의 정체성을 하나의 특유한 유일성으로서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자신이라는 이 사적인 대상성은 공적인 인간상과 밀접하게 교통하고 있으며, 또한 자기자신이라는 사적인 대상성을 외화시킴으로써 인간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각 각의 자가자신이 모든 역사에 익명적으로 공헌하는 것이다. 공적인 인간상에 완전히 적응하는 가운데 인간 자신은 자기를 보편적인 전형에 통합되어 들어가게 만들 수 있다. 공적인 인간상으로부터 멀어진 경우에 인간 자신은 자신만의 고독 속으로 물러나 있을 수 있다. 아주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인간 자신은 새로운 인간상을 정립할 정도로 강하게 자신을 주장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인간상을 대신하여 새로운 인간상을 부각시킬 수 있다.
자기자신에 대해 반성하는 가운데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은 극한의 형태에 이르게 된다. 이 분열은 동물의 진화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이 분열은 느낌을 가진 생명체, 즉 자기자신도 분열을 겪고 있는 생명체의 핵심으로까지 확산된다. 오로지 자기자신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간격에 의존해서 인간은 자기자신을 <가질> 수 있다. 동물은 자기자신을 가질 수 없지만, 인간은 자기자신을 가질 수 있다. 느낌 Fühlen의 생동적인 관심은 모든 생명이 시도하는 모험과 노력의 바탕에 깔려 있으며, 이 관심은 언제나 자기자신을 다르게 만나는 가운 데 자기자신으로 있음을 즐긴다. 느낌의 생동적인 관심은 여기서 잘못 통과해 온 우회로에 의존하여 참된 대상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본래적인 대상을 발견한 것이다. 생명체가 자신이 성취한 것을 위해 치루어야 하는 대가처럼 이때 치루어야만 하는 대가도 크다. 인간적인 차원의 욕구해소가 동물적인 것과 다른 것처럼 그리고 인간적인 욕구해소는 그 가능성의 범위에 있어서 동물적인 욕구해소를 훨씬 뛰어넘듯이, 인간이 느끼는 고통도 동물이 느끼는 고통을 훨씬 뛰어넘는다. 비록 인간도 동물적인 느낌의 좌표상에 부분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인간만이 직접적인 상황을 넘어서는 척도에 비추어 자기자신을 헤아릴 수 있으며, 이에 따라 행복하거나 불행할 수 있다. 자기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가, 무엇이 될 것인가를 염려 하는 가운데 그리고 자기의 소원과 목적설정과 축복 등에 대해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살펴보는 가운데, 인간은 아니 오직 인간만이 절망 할 수 있다. <절망 Verzweiflung>이라는 말은 인간 자신이 분열되는 맥락을 시사해 준다. 주체의 자기분열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틈이 벌어지는 가운데 주체 자신의 내면성 속으로 자리잡게 되며, 주체 자신을 직접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대상으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항상 새로이 매개되는 관계들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공포스런 증거물로 만든 다. 인간만의 특권인 자살은 인간이 자기자신을 대상화할 수 있는 정도의 극치를 보여준다.
주체가 자기자신과 직면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이 균열 속에 그리고 이 둘을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시켜야만 하는 활동 속에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최상의 행복과 가장 깊이 떨어지는 좌절이 자리잡고 있다. 인간의 외적인 감각들이 제시하는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반성으로 생겨나는 자료들도 여기에서 끊임없이 더 진척되어 마지막에는 하나의 총체적인 모상으로 종합되고 통합되는 작용의 재료 가 되어 준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고 있는 한, 이 일은 멈추지 않는 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을 문제로 삼고 있다.> 종교, 윤리, 형이상학은 바로 존재 전체를 해석하는 지평 속에서 그 질문을 던지고 대답해 보고자 하는 것으로서 결코 완성되지 않은 시도이다. 이러한 가능성의 등장으로 진화는 역사에 의해서 대체되고, 생물학은 인간의 철학에게 자리를 내준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는 인간이 존재 Sein와 만나는 길을 통해서 진행되어야만 한다. 인간과 존재와의 만남들 속에서 인간의 본질이 단지 현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가 그때그때마다 그 만남 속에서 결단할 때에 인간의 본질이 비로소 형성된다. 그러나 존재와 만날 수 있는 능력 자체는 인간의 근원적인 본질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유이며, 자유의 장소는 역사이다. 한편 역사는 오 직 역사를 초월하는 주체의 근본적인 본질에 의해서 가능하다. 역사 적인 만남에서 형성되는 실제성에 대한 상(像. Bild)은 나의 상을 포함하며, 이 상이 진리로 있는 한, 이 상에 따라 인간은 존재한다. 그 러나 인간 속에 내재하고 있는 조건, 즉 역사가 가능할 수 있는 조건, 바로 이 자유 자체는 역사적이 아니고 존재론적이다. 그리고 만약 이 조건이 발견되기만 한다면, 이 조건은 모든 존재론이 창출될 수 있는 증거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적인 사태가 된다.
고대로부터 존재의 상들 속에서는 인간의 <사이 Zwischen>가 강조 되어 왔다. 동물과 천사 사이, 과거와 미래 사이, 완전히 저주받은 상태와 구원 사이 등에서처럼 말이다. 플라톤은 생성을 비존재와 존재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 중간적인 어떤 것은 양쪽 모두에 참여한다. 또한 플라톤은 생성에 내맡겨진 영혼을 이성의 인식 속에 있는 영원한 존재를 향해 열려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영원하고 이성적인 존재로부터 단절된 채, 거대한 힘을 행사하게 된 생성은 나를 현기증 나는 자유의 상황에 내던졌으며, 존재와의 만남을 무(無)와의 만남이 되게 만들었다. 니체를 추종하는 현대의 허무주의는 플라톤 이후의 시대에 존재에 대한 질문을 새로이 던지게 만든다. 존재에 대한 질문은 역사적으로 허무주의적인 경험의 근거들을 추적하였다. 존재에 대한 질문은 여타의 생명세계는 물론 전체 자연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적 자유의 본질을 존재론적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존재에 대한 질문은 인간적 자유의 내적인 초월 속에서 어떤 표징을 발견하는데, 이 표징은 초월과 영원에 대해 형이상학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보고자 하는 시도이다.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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