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한스 요나스, 생명의 원리

들어가는 말, 생명철학의 주제에 대하여

백_일홍 2023. 12. 13. 09:53

들어가는 말

생명철학의 주제에 대하여

생명철학은 그 대상이 생명체의 철학과 정신의 철학을 포함한다. 이것은 이미 생명철학의 맨 처음 문장이고, 사실 생명철학을 전개시켜가는 동안 입증해야 할 예비적 가정 Hypothese이다. 생명체적인 것이 이미 그것의 가장 저차적인 형성체 단계에서도 정신적인 것을 형성하고, 또 정신은 그것의 가장 고차원적인 발달단계에서도 생명체의 일부분으로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 내 용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이 주장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때, 첫번째 부분이 아니라 두번째 부분만이 현대적인 사유에 잘 들어맞는다. 두번째 부분이 아니라 첫번째 부분은 고대적 사유에 합당한 것 이다. 이 두 주장이 모두 타당하고 또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은 고대와 현대 사이의 논쟁 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의 피안에서 자신의 입장을 찾으려는 철학이 설정하고 있는 가정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서 펼쳐지고 있는 생명의 거대한 파노라마를 바라보면서, 또한 자기자신을 그 파노라마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철학자는 다음과 같은 대답에(그 대답이 아무리 자연과학의 작업 에 꼭 필요한 가정이라고 할지라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끊임없고 장기간에 걸쳐 있는 과정, 즉 몇 애온"을 통하여 우회적이면서도 시종일관 앞으로 나아가고 그리고 점점 더 교묘하고 질적으로 섬세해 지는 창조들 속에서 자신을 시도해보는 과정이 <맹목적>이었다는 대답이다. 여기서 <맹목적>은 그 과정의 역동성이 서로 아무 상관없는 요소들 사이의 역학적인 치환 mechanische Permutation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 <맹목적>이다. 그 역학적인 치환은 그것의 우연한 결과들을 종의 형식들 Artformen로서 기나긴 과정의 노상에서 보존하 고, 또 그와 함께 다시금 우연히 주체적인 것의 현상들이 출현하는 원인이 되어 준다. 그리고 이 주체적인 현상들은 물리적인 결과들 곁에 단지 수수께끼같고 잉여적인 부수적 산물로 고착되는 현상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물질 Materie이 실제로 그러한 방식으로 그리고 그런 결과를 내면서 자신을 조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상, 우리의 사유는 물질의 권리를 되찾아주어야 하며, 물질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가능성을 물질의 초창기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던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 로 우리는, 물질적 실체가 자신을 활성화하고 생명을 창조해 낼 때 보여주는 어떤 목적추구성 Zielstrebigkeit을 물리적 인과성의 개념에 연결시켰듯이, 이 근원적인 잠재력을 물리적 실체의 개념과도 연관시켜야 할 것이다. 독단적이지 않은 사상가는 생명이 보여주는 증거들을 억누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자연과학에서 전해내려오고 있는 사실성의 모형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모형은 어쩌면 자연과학계 자체 내에서도 낡은 것이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이런 식으로 검토한다고 해서 우리가 곧 아리스토텔레스로 되돌아 간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음은 화이트헤드의 경우가 잘 보여주고 있다).

창조의 역사는 제쳐놓고, 그와 더불어 발달(진화)과정을 탐구하여 찾아낸 자료들조차도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현재 존재하고 있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생명의 다양성, 특히 동물적 생명의 다양성은, <원시적인> 것과 <진화 것들 사이에서 점진적으로 높아지는 단계적 연속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단계의 좌표상에서는 형식의 복잡성, 기능의 세분화, 감각의 섬세성, 본능의 강도, 신체의 부분을 통제하는 수준, 행위의 능력, 의식의 반성력, 진리를 파악하는 수준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체적인 생명 organi- sches Leben들에서 찾아낸 증거물들을 바탕으로 이러한 위계질서를 읽어냈고, 생명의 종들이 발전해 간다는 발전관 Entwickungsgedanken 의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의 저술 『영혼에 대하여 De anima 는 최초의 철학적 생물학 분야의 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한 이론을 우리 시대에 다시 수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상황들은 아리스토텔레스 때의 이론적 상황들과 매우 다르다. 그러나 단계적 위계질서에 대한 생각이라든지, 단계들 사이의 진취적인 보존현상. 즉 더 높은 단계가 그보다 낮은 단계에 의존하고 또 가장 낮은 단계가 그 계열의 가장 높은 단계 속에 함께 보존되어 있다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생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단계적 연속을 두 측면으로 해석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각의 개념들과 행위의 개념들, 즉 <인식>과 <힘 Macht>의 개념들에 따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경험의 범위와 명료성, 세계를 감각적으로 현존시키는 수준의 측면인데, 이 측면은 동물계를 가로질러 존재계 전체를 가장 포 괄적이고 자유롭게 대상화하는 인간에서 그 극치를 이룬다. 다른 한편으로는 첫번째 측면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역시 인간에 그 극치를 이루는 것인데, 이것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와 방식, 즉 행위를 하는 데서 엿보이는 진취적인 자유의 정도에 따른 측면이다. 생명체의 기능들과 연관시켜 본다면, 이 두 측면은 지각과 운동성에 의해서 대변되고 있다. 이 두 측면들 ㅡ지각과 행위, 즉 지각의 다양성과 정확성 그리고 행위의 범위와 힘ㅡ사이의 상호관계와 상호침투성은 동물적 현존재를 감정이입의 방식으로 탐구하는 데서 언제나 주체가 되어 온 것이었다.

이 두 측면의 상승단계는 모두 인간의 사유에서 그 극치를 이루며,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도대체 어느 측면이 다른 어느 측면을 위해 있는가? 관찰이 행위를 위해서 있는가 아니면 행위가 관찰을 위해서 있는가? 이 가운데 하나의 입장을 선택함으로써 생물학은 윤리학으로 넘어간다. 인간의 선에 대한 이론으로서의 윤리학의 역사는 하나 이상의 대답을 알고 있다. 어쨌든 대답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든 간에 세계가 감각적으로 반영되어 상승하는 정도는 위로 갈수록 더 명료하고 인식도 증대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사실은 동물계의 가장 하위에 위치하는 존재가 갖는 가장 어두침침하게 몽롱한 느낌, 즉 생명체의 가장 원초적인 자극에서 부터 벌써 적용되는데, 여기서도 이미 어떤 식으로든 세계와 대상이 이질적인 것으로서 핵심적으로 <체험된다>. 다시 말해 생명체에 의해 서 세계와 대상이 주관적으로 되고 저항된다.

지금까지 (자유)라는 개념이 두 번 언급되었다. 한 번은 지각함 Wahmehmen과 연관지어 또 한 번은 행위함 Handeln과 연관지어서 언급되었다. 사람들은 자유의 개념을 정신과 의지의 영역에서 마주치 기를 기대하지 그 이전 단계의 영역에서는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디에선가 자유의 개념을 마주치기를 원한다면 행위함의 차원에서이지 수용성의 차원에서는 아니다. 그러나 만약 <정신>이 애초부터 생명체적인 것에 깃들어 있다면, 자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주장은 실제로 이미 물질대사 Stoffwechsel라는 모든 생명체적 존재들의 기초를 이루는 기반층이 자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 즉 물질대사 자체가 자유의 가장 최초의 형태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이 주장이 매우 생소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유>라는 말을 이해할 때는 의지함과 선택함과 연관되어 있는 어떤 것인데, 물질대사는 우리 신체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적인 과정의 맹목적인 자동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탐구하는 과제의 일부분은, 가장 원시 세계적인 생명체적 실체의 어두운 자극반응들 Regungen 속에서 최초로 발견되는 자유의 원리가 물리적인 우주에 끝없이 연장되어 있는 강제성 가운 데서 빛을 발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이 자유의 원리는 태양, 행성들, 원자들에서는 관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포괄적인 원리를 요청하는 자유의 개념이라면, 당연히 우리는 이 개념을 자각적으로 정신적인 의미연관에만 결부시켜서는 안 된다. <자유>는 객관적으로 구별될 수 있는 존재양태 Seinsmodus, 다시 말해서 생명체 자체에 해당사항이 있고, 또 비구성원들에게는 결코 해당사항이 없고, <생명체> 집합에 속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만 해당사항이 있는 존재 방식을 지칭하는 개념이어야 한다. <자유>는 우선 단순히 육체적인 요소에까지도 연관될 수 있는 존재론적으로 기술하는 개념이다. 인간의 영역으로부터 자유의 개념이 차용되었는데, 인간의 영역에서 자유의 개념이 갖고 있는 의미와 우리의 맥락에서 언급하는 자유의 개념이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다. 만약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자유의 용어를 차용하거나 이 개념을 광범위하게 확대시켜 사용한다는 것이 경솔한 말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모든 물리적 객관성의 차원에서, 원시적인 수준의 자유의 특성들은 존재론적 기초를 이룬다. 그리고 전(前)단계적으로 희미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은 이보다 높은 수준의 현상들, 즉 <자유>라는 명칭이 직접 적용될 수 있고 또 공공연 히 자유를 실현시키고 있는 높은 수준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의 존재론적 기초를 이룬다. 이것들 가운데 최상급에 속하는 것들도, 자신들 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생명체적인 기본층 속에 감추어져 있는 시초들과 결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유의 원리가 숨김이 없고 기초적인 대상성의 모습으로 최초로 자기를 현상시키는 것은, 존재에게는 그것의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박차고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가능성의 영역은 주관적인 생명의 가장 광범위한 영역에까지 확산되어 있으며, 통틀어 <자유〉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질 수 있다.

이처럼 근본적인 의미로서 <자유>의 개념을 사용한다면, 이 개념은 우리가 <생명 Leben>이라고 부르는 것을 밝혀내는 데 실제로 아리아 드네'의 실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시초를 둘러싸고 있는 비밀은 우리에게 닫혀 있다. 나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가정은 존재의 깊은 곳에서 활동하고 있으면서 자유의 양태를 지향하는 경향성이 바로 동기가 되어 생명이 없는 실체에서 생명이 있는 실체로 이행했다는 것, 즉 물질이 생명을 향해서 최초로 자기조직화했다는 것이다. 이 경향성을 향해서 문제의 이행은 문을 열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가정은 그 위에 자유의 건축이 이루어지고 있는 비생명체 적인 기체(基体, Substrat) 전체에 대한 이해와 마주친다. 우리가 의도하고 있는 탐구를 위해서 우리는 생명의 시초에 대한 이러저러한 어떤 가정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개입하는 그곳에는 이미 <최초의 자극반응들>이 발생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의 영역에 일단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더 이상 가정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자유의 개념은 여기에 처음부터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생명의 기초적인 역동성을 존재론적으로 기술하는 데 있어서도 자유의 개념은 필요할 것 이다. 그리고 자유의 개념은 우리가 생명을 기술하고 해석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전과정에 걸쳐서 하나의 도구 역할을 하면서 우리와 동행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단순한 성공의 역사는 아니다. 자유라는 장점은 동시에 급박하게 결핍해 있는 것을 충족시켜야만 하는 부담을 안고 있으며, 또한 현존재에게는 위험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 다. 왜냐하면 자유라는 장점은 역설적인 사태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실체가 자신을 구별하는 근원적인 작용Urakt을 통하여 자연 전체 속에 있는 사물들의 보편적인 통합성에서 떨어져 나와 세계와 대립하면서 존재하고 또 이와 함께 존재가 소유하고 있는 무차별적인 안전성 속으로 <존재와 비존재(Nichtsein, 이 맥락에서는 생명체의 죽음을 의미함 -옮긴이)>의 긴장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실체는 자신이 존재하는 데 꼭 필요한 물질에 대해서 매우 어려운 독립적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그런 일을 해낸다. 다시 말해 살아 있는 실체는 한동안 자신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물질로부터, 즉 이 물질과 함께 살아 있는 실체는 물리적인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귀속되어 있게 마련인데, 자신을 구별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가운데 그런 일을 해낸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떠도는 생명 체는 오로지 조건부적인 존재이며 언제든지 존재를 박탈당할 수 있 는 상황에 처해 있다. 물질대사가 안고 있는 두 측면, 즉 존재의 능력과 존재의 결핍성과 함께 비존재는 존재 자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제2의 가능성으로서 세계 속에 들어와 있다. 이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 비로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적어도 그 존재가 박탈될 수 있는 위협에 의해서 특징지워지는 존재는 위협적인 상황을 이겨 내야 하고, 이겨내는 존재는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의 현존재이다.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비존재의 가능성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런 절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고, 자신의 한계선을 따라 그어져 있는 한 줄의 선이다. 그러므로 존재 자체는 주어진 상태가 아니라 끝없이 포기된 가능성 이 된 채 언제나 새롭게 자신이 직민해야 하는 대립물, 즉 비존재를 이겨내야 하는 존재이며, 결국에는 이 비존재에 의해서 함몰되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가능성 속에서 유동하고 있는 존재는 철두철미하게 양극성을 갖는다. 그리고 생명은 이 양극성 사이에 자신의 존재를 걸쳐 놓고 있으면서, 이 양극성을 끝없이 기본적인 반정립 속에서 현현시킨 다. 문제의 반정립은 존재와 비존재, 자기자신과 세계, 형상과 질료, 자유와 필연이다. 이 두 극은, 우리가 쉽게 관찰할 수 있듯이 서로 관계하는 형식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에 관계되어 있음이다. 이런 관계는 <초월>, 다시 말해서 그 관계를 유지하는 측면을 <뛰어넘음>을 함축한다. 그런 초월이 실제로 있음을 그리고 그런 초월을 표출하는 양극성이 이미 생명의 근저에 있음을 우리가 성공적으로 증거할 수만 있다면, 이 근저가 아무리 저급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고 전(前)정신적인 형태라고 해도, 우리는 결국 정신이 그러한 생명체적 존재 속에 전초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präfiguriert 는우리의 주장을 참된 것으로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열거한 양극성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양극성은 존재와 비존재의 양극성이다. 이 양극성의 경우에 정체성 Identität은 생명체가 앞으로 진척해 나가려는 최대한의 끊임없는 노력 속에서 쟁취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노력의 종말은 미리 결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언젠가는 비존재가 되어야 할 운명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체가 비존재에 거역하는 반항은 결국 그 속에서 생명체의 자기 자신성 Selbstheit이 거기로 사라지고 또 그 유일한 자기자신성으로 결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굴복으로 끝난다. 생명이 죽는다는 사실은 생명에게는 근본적인 모순이지만, 이 사실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에 속하고 또 죽음이 없는 생명은 있을 수도 없다.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 생명이 근원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에 따르면, 생명은 언제나 죽음으로 역전 될 수 있고, 형상과 질료의 관계는 보장되어 있지 않으며, 이런 관계가 곧 생명의 기반이다. 생명의 현실성, 즉 자신의 역학적인 본성에 언제나 역설적이고 모순적으로 대립하는 생명의 현실성은 근본적으로는 한 걸음 진척되어 있는 위기와 다를 바 없다. 비록 위기를 극복했다고 해도 안전한 것은 아니며, 이것 또한 다음 단계의 위기로서 진척될 뿐이다. 스스로 자신을 떠맡고 있고, 자신의 역량에만 운명을 걸고 있으며,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상황에서도 생명은 외적 조건의 제약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강세에 있는 것은 아니며, 외적 조건에 의해 생명이 파멸될 수도 있다. 생명은 외적인 현실의 유리한 조 건과 불리한 조건에 의존하고 있다. 생명은 자신이 마주쳐서 싸워야 하고 헤치고 나아가야 할 세계에 내던져져 있다. 생명은 세계의 인과성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굴복하고 있다. 생명은 정체성을 유지함으로써 물질과 구별되면서도, 또한 물질을 필요로 한다. 생명은 자유하면서도 또한 의존적이다. 생명은 개체화되어 있으면서도 또한 필연적으로 다른 것과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생명은 관계를 추구하면서도 또한 이 관계에 의해서 파멸될 수도 있다. 이 관계를 맺지 않는다고 해서 생명의 위험이 덜해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생명은 세계의 강함과 냉담함에 의해서 양쪽으로부터 위협받고 있으며, 이 둘 사이의 날카로운 돌출부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다. 중단될 수 없는 생명의 과정 속에서도 방해를 받을 수 있다. 조직되어 있는 각각의 부분 기능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룰 때 오로지 그런 전체로서만 기능할 수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부분적으로 손상될 수 있다. 전체의 중심이 지명적으로 손상될 수도 있다. 생명은 자신의 시간성 속에서 어느 순간에 갑자기 종말을 맞을 수도 했다. 이상에서 기술한 모든 모습처럼 그렇게 생명의 형상은 질료 속에서 자신의 특별한 존재를 이끌어 간다. 역설적이고 손상되기 쉬우며, 불안하고, 위험에 처해 있으며, 유한하고, 죽음에 깊이 노출 어 있다. 죽음에 대한 불안에 잔득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생명이 존재를 향하여 시도하는 과감한 모험은, 생명체가 되어 가는 과정에서 실체Substanz가 실현하는 자유의 근원적인 과감성을 눈부신 빛 앞에드러내 준다.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치뤄야 하는 불안이라는 엄청난 대가 그리고 개체가 더 높은 단계로 발달해 가는 것과 평행선을 이루며 더욱 상승하는 불안이라는 엄청난 대가는, 그렇게 과감한 모험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결코 잠재우지 못한다. 마치 생명의 여명기(진화과정에서 생명체가 탄생하는 시기-옮긴이)에 형상을 시도하는 실체처럼 호기심에 차서, 인간이 던지는 이런 질문 속에서 오직 생명의 근원적인 수수께끼 자체가 수백만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언어로 말해 지고 있는 것이다.

생명철학은 우리가 지금까지 기술한 대상들을 주제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생명철학은 생명의 객관적 형식으로서의 생명체를 다루면서도, 인간이 생명을 반성해 보면서 해석해 내는 것까지도 다루어 야 한다. 생명에 대한 이 같은 해석 자체도 생명의 자취에 대한 자료에 속한다. 생명에 대한 반성이 진전될수록 생명의 자취에 대한 자료도 더욱 많아진다. 그러므로 필자가 여기에 모아놓은 탐구들은 한편으로는 자연적인 능력의 단계, 즉 생명체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세계의 요구에 맞부딪치는 자연적인 능력의 단계들을 다루고 있다. 이 클태면 물질대사, 감각, 운동, 정서, 지각, 상상력, 정신과 같은 자연 적인 능력의 단계들이 그들이다. 그것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역사 속에서 생명과 인간 자신의 본성에 합당하게 이론화하고자 시도할 때 나타난 표상들 가운데 많은 것을 다루고 있다. 후자 의 주제는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주제로 나아가고 마지막에는 형이상학적인 주제에까지 이르게 된다. 필자의 분석은 그러한 탐구 대상들을 두루 검토해 가지만, 거기에 대해서 어떤 완결된 이론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비록 필자가 완결된 이론을 목표로 삼고 갖가지 노력을 해왔고 또 그런 목표로 각각의 부분 연구들을 수행해 왔어도 말이다. 이러한 목표로 씌어졌고 또한 1950년 이후로는 부분적으로 개별 적으로 출판된 여러 연구논문들은, 적어도 필자가 믿고 있는 바로는, 어떤 일관성 있는 입장을 표현하고 있으며 생명체와 생명에 대한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철학의 다양한 단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아직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필자가 시도한 주제나 다시 고쳐 쓴 개별 연구논문들을 허술한 형식으로나마 이렇게 책으로 엮음으로써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동시에 어쩌면 이 길을 통하여 결국 그 목표에 도달하게 해줄지도 모르는 몇 걸음을 굳게 내딛고자 하였다.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