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조화, 평형 그리고 생성 체계 개념과 이 개념의 생명체에 대한 적용
사람들은 <체계 System>라는 개념을 일차적으로는 사유가 만들어 낸 것과 연관지으며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이론의 특정한 형식을 일컫 는 데 익숙해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론의 결과, 즉 인식된 것의 질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이 전개되는 방식, 즉 인식의 절차상의 질서이다. 이 둘은 서로 겹칠 수도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같은 이상적 학문은 개념의 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공리들에 의해서 구성된 체계이다. 단계를 밟아가면서 진척되어 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람들은 연역법의 체계를 언급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귀납법 Induktion과 변증법 등의 체계를 언급하기도 한다. 이 경우 우리는 방법의 체 계를 의미하고 있는데, 이것이 필연코 한 체계의 방법일 필요는 없다. 방법이 체계적이라는 말은 그 방법이 비방법(非方法, Unmethode)이 아니라 정말로 방법이며, 대상들의 체계적 원리의 부재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한 경우, 즉 수학적 연역이나 헤겔의 변증법의 경우에 방법의 의미는 물론 방법의 체계성이 대상의 체계성 자체에 해당되고, 방법을 따르며, 이것을 절차의 형태로 어떻게든 모방한다는 이념을 내포한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처음에는 대상들의 형식적 본질, 또는 원리들에 대한 인식을, 통찰함을 시사해 준다. 귀납법은 그런 기대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대상 속에 어떤 식으로든 법칙성과 규칙성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 법칙성과 규칙성은 귀납의 성공도에 따라서 특별한 가설들의 형태로 다음 단계에는 연역의 바탕이 되어 줄 수 있다(이에 대한 가장 흔한 예가 예고함 같은 것이다). 그러나 방법의 법칙과 대상 사이의 관계가 전적으로 서로 연결될 수 없는 형식들도 가능하다. 단순히 모아둔 것에 불과한 것도 체계를 가칠 수 있다. 예를 들면 고전학(古錢學, Numismatik) 같은 것이 그렇다. 여기에서 질서는 오로지 사유의 차원에서 분류된 형태로서 존재 한다. 대상 자체는 질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어떤 관련성도 시사하고 있지 않는 곳에서도, 사유 속의 질서로서 대상에 대한 체계적 인식은 가능하다. 구름의 형태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누군가는 그렇게 함으로써 구름이라는 대상에다 체계성을 투사시키고자 의도하는 것은 아 니다. 심지어는 그것의 정의상 규칙이 없는 것도 통계적으로 어떤 규칙으로 체계화될 수 있다. 이를테면 보험회사의 사망통계표는 본질적으로 체계가 없는 것을 체계화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사태에 대한 설명, 즉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 사이의 연관에 대한 통찰이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론적인 것 속에서 실제로 단순한 분류체계 또는 질서체계를 추론체계나 설명체 계로부터 구별해야만 한다. 추론체계나 설명체계는 근거에 의존해서 사물들이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어서 인식을 산출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분류체계나 질서체계는 단지 전체적 인 전망을 보장해 주는 것이며, 이 속에서 원리로부터 다양성을 설명 할 수 있는 준비작업이 정비될 수 있다. 린네 Linné의 식물 체계는 질서체계 또는 순수한 형태학 Morphologie이었으나, 진화론의 틀 안 에서 계보학적인 원리가 도입됨으로써 두번째 종류의 세계로 이행될 수 있었다. 적어도 새로운 방식으로 식물들을 연관시키는 원리가 등장하여 기존의 분류법을 수정할 필요가 발생하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또한 단순한 분류도 원리, 즉 그것들의 공통된 원리가 유사성인 그러한 원리들에 따라서 이루어질 수 있다. 임의적으로 여러 가지 측면에 따라서 유사성이 판가름날 수 있기 때문에, 사태에 대한 특정한 측면을 사용한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며, 그것이 선택의 문제인 한 독단의 문제이다. 운이 좋았든지 아니면 예감이 맞았든지 아무튼 선택은 원인의 질서에 대한 통찰을 선취할 수 있고, 적절한 시점에서 거의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통찰로 이행해 갈 수 있다." 괴테 Goethe의 형태학은 그 예이다. 또 다른 예는 동물을 무척추동물과 척추동물로 분류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진화론에 선행하면서, 진화론의 설명체계 속에서, 단지 분류하는 기술적 측면에서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진화론에 귀속되고 종속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인 것으로서 승인되었다.
질서체계의 가능성은 오로지 인간의 능력과 욕구 속에서 그 근거를 가질지 모르고, 설명체계의 가능성은 자신도 사유의 산물이지만 사유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시사해 줄 뿐만 아니라, 설명이 어떤 속성 의 형태로 묘사해 내야 하는 존재에 대해서도 무엇인가를 시사해 준다. 주어진 것의 분류 가능성 자체도 엄밀히 말하자면 존재 자체의 조건과 결부되어 있다. 예를 들면 단순한 다양성의 존재를 넘어서서 유사성이 충분히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든지 또는 차이점이 끊임없이 관찰된다든지 하는 따위의 존재 자체의 조건들과 결부되어 있다. 이런 점들이 없다면 자신의 대상들을 무리지어 정의를 내려야 하는 통계학 같은 것은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유사성과 비유사성의 원리는 인간이 어떻게 사유하는가에 임의로 내맡겨져 있지만, 근거와 대상의 조건성은, 만약 이것에 존재와 상응하는 요소가 있다면, 인간이 어떻게 사유하는가와 관련지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어떻게 사유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사유는 존재를 적중할 수도 있고 빗나 갈 수도 있으며, 옳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인간이 어떻게 사유하느 냐에 따라 인식의 가능성도 있고 오류의 위험도 있다. 존재 쪽에서 보면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내용의 구속성 Verbindlichkeit. 서로 종속되어 있는 것들의 한 단체나 연관을 형성하며, 이러한 구속성이 존속하고 있는 한 하나의 전체이지, 단순히 모여 있는 복수성만 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론적 체계의 가능성은 사물체계의 현실을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인식의 전체체계의 이념은, 즉 전체에 대한 체계적 지식의 이념은 하나의 체계로서의 전체 현실의 이념을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다른 많은 질문도 있지만 여기서 우리가 하고 싶은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떤 의미에서 존재자는 (그리고 전체세계는 자신의 일부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존재자이다) <체계>가 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오직 비유적으로 동일한 이름은 개념적인 것에도 현실적인 것에도 적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와 개념의 차이를 지워 버리고 또한 유 사성을 동일성으로 몰고가는 존재의 개념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를 제 외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개념과 사태의 차이를, 이와 병행하면서 사 유의 체계와 사물의 체계 사이의 차이를 순진하게 전제하는 지평에 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살아 있는 대 상-개별적 생명체 또는 집단적 생명공동체ㅡ이 체계로서 묘사될 수 있는가 하는 특정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준비작업으로서 앞서 언 급한 우리의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체계)의 의미는 다수를 전제로 하는 <함께 있음 Zusammen>의 개념을 통해 규정된다. 이 다수들은 함께 있음의 관계 속에서 다수로 존재하거나 아니면 함께 있음의 관계 속에서만 다수 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체계는 필연적으로 다양체 Mannigfaltiges이지만, 더 나아가 여기에서의 함께 있음의 의미는 다 양한 것이 자신의 통일성의 작용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 다. 이것은 명제들의 체계나 사물들의 체계에 공통으로 적용된다. 다 만 각각의 체계에서 <작용성>이라는 말이 다른 의미를 지닐 뿐이다. 부분들이 함께 있음은 중립적으로 그냥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 방을 서로 규정함 Bestimmen이며, 정작 이런 상호규정을 통하여 함께 있음이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물의 영역에서는 규 정합이 작용함 Wirken이고, 작용함은 변화시킴이므로, 결국 여기서 변 화를 통한 보존이 존속되는 것이다. 마치 다수성 Vielheit을 통한 통합 성처럼 힘 때문에, 즉 엄밀하게 말해서 물리적 현실 가운데 유일하게 다수로부터 하나가 될 수 있는 힘 때문에 다수성을 통한 통합성이 존속된다. 그러므로 통합성의 존속 Bestehen)의 진상은 어떤 사태가 발생함 Geschehen이다. 우리는 <체계〉라는 주제와 함께 하나와 다수 그리고 변화 속의 불변이라는 고전적인 존재론적 문제의 영역 속에 처하게 된다.
부분들의 차이는 부분들이 모여 이루는 전체를 통해서 해소되지 않는다. 전체도 자신을 이루는 부분들의 차이에 의해서 해소되지 않 는다. 이 둘은 한 체계의 필수적인 측면들이고, 어느 한쪽도 다른 한 쪽의 유리함을 위해서 소멸되어서는 안 된다. 돌덩이들이 쌓여서 이 루는 돌무더기도, 많은 물방울들이 모여 이루는 물웅덩이도 부분들이 이루는 체계는 아니다. 왜냐하면 돌무더기의 경우 다수는 그냥 다수 일 뿐, 무더기로서의 모습이 어떤 연결의 형태로 기술된 것은 아니다. 돌무더기는 통합성이 없는 다수성이다. 그리고 물웅덩이의 형태에서 다수는 단지 낱낱의 물방울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웅덩이도 통합성이 없는 다수성이다. 그러나 물방울의 경우는 이 물방울 하나를 형성하 는 분자들이 규칙이 없이 각각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역동적인 체계 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물방울 형태는 많은 힘들의 반작용으로 말미 암아 이루어지는 평형을 자신만의 어떤 한계성으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방울 속의 평형은 오로지 분자들의 유한한 최대수를 작 용하는 부분들로서 허용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한계 Grenze의 개념은 하나의 무한히 많은 것들의 체계가, 아니 무한성의 체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단순한 것의 체계도 불가능 합을 말해준다. 체계는 절대적으로 단순한 것과 무한히 많은 것 사이 의 어떤 중간적인 것이다. 유한성과 일종의 폐쇄성은 체계에 속한다. 이와 더불어 체계와는 다른 하나의 외부(外部, Außen)도 체계에 속 한다. 만약 우주가 하나의 체계라고 한다면, 이것은 유한한 한도 내 에서만 하나의 체계일 수 있다.
<한계>는 단지 다수가 수적으로나 양적으로 한계지어질 뿐만 아니 라. 동시에 그 수적 한계 속에서 그들 사이의 질서나 특정한 형식에 따라서도 한계지어지고, 더 나아가 힘의 관계나 척도에 따라 한계지 어짐을 의미한다. 한계를 보편적으로 그리고 최소한으로 규정하자면, 산물의 단순한 존재능력이나 결합능력에 의존해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것으로서의 한계는 이미 보존, 항상성, 평형의 개념에서 엿보인다. 부분들이 모여 특정한 수치를 넘어선다면, 힘의 특정한 불 평형성을 넘어선다면, 질서의 특정한 변화를 넘어선다면, 부분들이 형성하는 결합형태는, 이 형태가 물방울이든 행성계이든 상관없이 불 안정해지고, 지속될 수 없게 되거나 아니면 그런 상태로는 아예 존재 의 형태를 취할 수도 없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낱낱의 체계에서도, 체계들이 모여 이루는 복합적인 좀더 큰 체계에서도 그리고 세계의 전체체계에 이르기까지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등장하는 불가능한 것들을 달아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들 가운데서 선택하는 주 현실적인 것을 선택하는 부정적 원리이다. 이 원리에 의거해서 목적 이 없는 자연은 목적이 있는 기술과는 달리, 조화로운 체계들을 생 화를 생성해 냈다. 맹목적인 힘은 그 자체가 가능성(존재능력이라는 성해내고 자기 스스로를 맹목적인 힘으로부터 조화로운 세계의 조 의미에서의 가능성)과 기회(불가능한 것이 될 수도 있는 기회)를 조절 나 기회는 모든 체계가 생성되기 이전의 <최초에는> 규칙 없는 우연 하는 원리들 같은 것과 전혀 상관없는 단순한 변화의 원리이다. 그러 이자 여기에서 좀더 나아가 활동하는 데 있어서의 융통성 같은 것이 없다. 그런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선행하는 기회가 산출해 놓은 모 든 성과들을 발판으로 자신도 이미 각각 그런 모습으로 있는 상황 속에서 <체계>를 이루는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특정한 가능성의 일 부분이 되었다. 이 체계가 하나의 현실을 선택하는 어떤 결정 Ent- scheidung-이 결정도 최초에는 우연한 결정이지만을 의미하는 한, 다시 말해서 이 하나의 현실이 선택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다른 모 든 가능성들은 현실화될 수 없게 되는 선택인 한, 이 체계 자신도 과 거에서 선택되어 나온 결과로서 이제는 미래를 위하여 가능성들과 기회들을 제한한다. 다시 말해서, 미래를 위한 가능성들은 과거에 선 택되어 나온 결과들이 산출해 놓은 조건들을 허용하며, 미래를 위한 기회들은 이제 바야흐로 이 체계가 변화할 때 새로이 주어질 수도 있는 것들이다. 생성되는 것은 앞으로 생성될 것을 위한 법칙이 된다. 무법칙성에서 법칙성으로, 말하자면 법칙적인 속성을 최소치로 내포 하고 있던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법칙적인 속성을 최대치로 내포하고 있는 상태로 이행해 간다. 각각의 새로운 선택이 이루어지는 과정 자 체가 이미 선택적 기회를 되풀이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결합의 조 건들이 점점 더 까다롭게 전체에 의해서 정의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때때로 출현하는 기회들 그리고 선택에 내맡겨진 재료들은 점점 더 특유해진다. 간단히 말하자면, 가능성과 기회는 점점 더 특정한 방향 간직하게 되고, 스스로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려는 영원한 기회의 으로 유도된다. 이는 완성된 체계가 이제는 오직 자신의 가능성만을 시점, 즉 반복의 유일한 형태약사에 시작하는 시점에 도달하기에 사계속된다. 여기서는 목적원의 경우에서처럼 어떤 방향성이 엿보이 는데, 이것은 목적론적 방향성과는 다르며 생성되어 감 Werden)이라 고 일컬어질 수 있을 것이다. 생성은 더 이상 체계의 운동을 스스로 한복하는 것이 아니다. 방향은 점점 가중되는 질서와 필연성, 즉 특 정한 형태와 법칙을 향하고 있다. 방향은 우연과 불확정성 Indeter minitat (<자유>라는 표현을 우리가 회피한다면)이 줄어드는 그리하여 자신의 가능성의 조건이 점점 더 감소되는 유형의 생성을 향하고 있다. 이 방향성이 어떻게 엔트로피의 개념과 관련이 있으며, 또 이 개념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는 여기서 우리가 탐구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근대적 (<고전적〉) 역학의 존재론에서 우리가 빌려온 체계의 존재의미와 체계의 생성에 관한 가설적인 상(像)의 두 측면들은, 우 리가 생명의 사태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과연 체계개념이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앞에 두고 볼 때 매우 중요하다. 그 두 주민들 가운데, 한 주민은 생성에 대한 이해이고, 또 다른 측면은 존재에 대한 이해이다. 이 두 주민은 존재와 생성의 관계로서 오직 함께만 다루어질 수 있다.
공정에 관한 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새로움 을 향한 기회가 너무 많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기회는 마치 불평형 처럼 거기에 존재하고 이런 기회를 사용한다는 것, 즉 새로운 것이 생성된다는 것은 오로지 기존의 불평형이 가지고 있는 역동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물론 이 역동성이 마침내 도달할 평형의 시점에 이 르면 <기회)는 없어진다(또는 단지 평형을 방해하는 <비자연적인〉 방식 으로 존재한다). 말하자면 평형은 역동적인 평형이고 체계는 기능하고 운동하는 체계이지만, 운동은 동일한 상태가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주기적인 운동이고 주기 Periode는 그 체계에 고유한 시간이다. 이는 체계가 생성되었다가 다시 사라지는 곳에, 형성 Bildung과 소멸의 과 정으로서만 역사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지, 체계 자체는 이것이 활 성화되고 있는 한 역사를 갖지 않음을 의미한다. 물론 체계가 없는 경 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조화와 역사성의 측면은 서로를 배제한다. 그 러나 조화는 한 체계의 완전성을 보여주는 척도이다. 그러므로 우리 는 이제 왜 고대의 존재론이 우주를 조화로운 체계로 간주했으며, 우 주의 완전성의 척도에 따라서 단지 동일한 것이 주기적으로 반복되 는 특성을 첨가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동일한 것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우주에 대해서는 역사의 이념이 거론될 수 없다. 체계의 저 급한 부분들은 그것들의 불완전성의 척도에 따라 변화를 겪지만, 이 변화는 질료적인 것의 부패성 Korruptibilität에 대해서 불변하는 것이 치루는 대가이며, 이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하는 동일한 것 속에 존재 하는 단명한 것들의 출현과 소멸인 단순한 상승과 몰락으로서의 변 화인 것이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은 존재에 대한 고대적 이 해를 전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고대적인 존재 이해에 따르면, 하늘은 한 번 존재한다. 그런데 하늘은 어떻게 해서 존재하기 시작할 윤까? 원자론을 제외한 고대 이오니아 학파의 존재에 대한 사연에 따르면, 무질서의 힘으로부터 질서가 출현한다는 것 자체가, 비이성 적인 것에서 이성적인 것이 출연한다는 것이, 합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세계의 영원성에 대한 가설이 그들이 생각했던 바 의 우주의 이념에 필수적으로 보충되었어야 했다. 존재의 존재하는 청서는, 전체체계는 생성된 것이 아니다. 단지 이것의 틀 안에서 불 별하는 전체자연의 소멸할 수 있는 부분들로서의 개별적인 것의 생 칭이 발생한다. 자연과 변화의 불변하는 원리는 동일한 것을 의미한 다. 그러므로 세계의 역사나 자연의 역사도, 자연의 부분들의 역사조 차도, 다시 말해서 변화하는 것의 영역에 속하고 있는 자연적인 사물 의 특별한 종류들의 역사조차도 없다. 있는 것은 개체들의 출현과 소 멸의 고유한 양상들을 그렇게 묘사하는 기술뿐이다. 개체들 자체의 경우에도 활성화되어야 할 존재 Sein는 그 개체들의 생성의 운명과 개념적으로 구별된다. 생성은 존재에게는 필연적인 조건이자 존재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조건이기는 하지만, 존재의 내적 속성은 아니다. 그리고 이 조건의 영원한 근거는 물질이라고 불리는, 냉담한 기체 Substrat의 아직 종결되지 않은 한계성 Begrenzbarkeit이다.
이러한 고대적인 사유를 근대 학문의 존재론은 크고 작은 면에서 근본적으로 번복하였다. 이를 위해서 근대 학문은 수동적인 물질 Stoff 의 개념을 물체 Körper의 개념으로 교체하였다. 물체는 긍정적인 힘 들(예를 들면 운동)의 담지자이고, 이와 함께 현실의 독립적인 실체로 서 스스로 결합구성체들 Konfigurationen을 규정할 근거를 갖고 있다. 이 결합구성체들 속에서는 물체의 총합이 각각 존재이다. 역동적인 <평형>의 경우들은, 즉 우리가 위에서 묘사한 바 있는 <선택>의 방식 으로 그러한 결합구성체의 (근본적으로 등가적인) 배열 속에서 나타 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대체로 체계의 지속적인 질서로서 관찰할 수 있는 역동적인 평형의 경우들은 고대의 조화의 모형과 비교점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단순한 상호작용의 평정도 효과 속에서, 반 근원 속에서가 아니라면, 나타나는 조화로 간주될 수 있다(우리가 위 에서 <조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랬던 것처럼), 비록 역학적인 총 합의 원리가 내재적인 이성의 원리와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고 하더 하도 말이다. 그러나 목적 Ziel의 개념은 순전한 결과의 개념으로 교 체되어야 하고, 생성의 개념은 과정 자체의 개념으로 교체되어야 한 다. 현대의 에너지 개념이 결과적으로 의미하는 바와 또한 현실을 이 해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에너지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에너 지의 진척된 변형으로서의 발생함(어떤 사태가 발생합 Geschehen)이 존 재의 본질적인 측면이 되고, 변화는 존재가 적절하게 표출되는 모습 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체계>의 항상성은 존재의 보다 완전한 현 현(고대의 존재론은 존재와 생성이라는 두 대립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항 상성을 존재의 더 완전한 현현으로 간주했다)이라는 존재론적인 칭호를 상실하고, 과정의 유별난 경우가 된다. 유별난 경우의 역동성은 일반 적인 역동성과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이 유별난 경우는 존재의 역사 의 끝으로서 최종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존재의 역사에 나타나는 하 나의 끝의 단계이다. 만약 그러한 관점이 보편적으로 자연의 현상들 에게 타당하게 적용된다면, 살아 있는 사물들 lebendige Dinge을 설명 하는 데 있어서 역사성에 대한 우리의 표상은 결국 그러한 관점이 야기시키는 문제에 부딪힌다. 즉 체계의 개념은 어느 정도까지 체계 의 본질을 적절하게 함축하고 있는가, 또는 체계의 개념은 어떻게 체 계의 본질을 적절하게 함축하기 위하여 시간의 차원과 연관지어 수 정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언급한 것에 대해서 예를 드는 가운데, 우리의 질 문에 초점을 맞추고 이것을 보다 명확하게 부각시키고자 한다. 하나 의 다양체 Mannigfaltiges로서의 체계가 성립하려면 적어도 두 물체가 있어야 한다. 그 가장 흔한 에 가운데 하나는 상성(變)들이다. 마 찬가지로 전분하도 현대 역학이 제시하는, 불과 소수의 부분으로 구 성되어 있는 태양계 속에서 충분히 분석할 수 있는 자연체계의 전형 을 찾아냈다. 이론에 사용할 목적으로 이 모형이 특히 선호하는 요소 들(그 몇 가지만 거론하자면, 배열질서의 영속성과 명확성, 공간적 고립 을 통한 외부로부터의 폐쇄성, 완전한 내적 확정성, 크기와 운동의 완성 한 예측 가능성) 가운데 우리는 완전한 주기성(週期性. Periodizitat)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주기는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시사하고 있 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과연 우리가 통합성의 개념 속에 요소들의 다양성 Mannigfaltigkeit에 덧붙여 상태의 다양성도 첨가해야만 하는 가. 다시 말해서 공간 속의 다양성에 덧붙여 시간의 다양성도 첨가해 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즉시 제기된다. 만약 서로 연이어지는 상태들 이 전체의 부분들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부분들이 저마다 출현하여 전체에 무엇인가를 덧붙인다면 그리고 이런 식으로 전체를 완성시켜 간다면, 전체는 연속계열의 질적인 다양성을 통하여 연속되는 전체성 을 획득하고, 그런 모습을 취하는 특별한 전체가 된다. 왜냐하면 하 나의 체계를 자신들로부터 산출해 내는 자생적인 요소들의 다양성은 이런 의미로 우리가 이해해야 할 부분들을 갖고 있다. 여기서는 더 많음과 더 적음이 전체적으로 차이를 빚어내고, 각 부분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병행하면서 체계의 모습은 각각 달라진다. 실제로 우리는 생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말할 수 있다. 생명은 순간들이 합쳐 구성된 것이고, 이 순간들 속에서 생명이 살게 된다. 배(胚), 성장기, 꽃, 열매, 유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 등 각 단계에 처할 때마다 생명은 제각기 다르다. 생명의 각각의 단계, 즉 각각의 순간은 과거 생명에게는 없던 어떤 새로운 것을 첨가시켜 준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동일한 것이 변형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새로운 것을 첨가시켜 준다. 경험의 주기(섭취와 배설, 깨어남과 수면 등등)가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조차도 이미 살아온 과거가 배후적인 어떤 것으로서 함께 현전하는 것ㅡ주체의 나이은 그 순간을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고 또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결과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생명은 자신의 전체를 단번에 모두 소유할 수는 없지만, 모든 자신의 상태들의 연속의 전후와 더불어 생명의 전체에 도달한다. 그리고 생명의 정체성은 시간연속계열 Zeitreihe의 부분들과의 등가물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정체성이 그 부분들의 다양성 자체를 통합시켜 주고 있다. 이 모든 사실들은 생명과 연관지어 말해질 수 있는 것이지, 행성계와 같은 종류의 체계의 시간연속계열과 연관지어 말해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행성계와 같은 체계는 자신의 동시적인 요소들을 통해서 완전히 정의된 것으로 표상되기 때문에, 속도분석을 할 경우 자신의 시간연속계열 속을 관통하고 있는 어떤 임의적인 횡단면을 잘라내도 이 횡단면은 전체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횡단면이 저마다 전체를 포함하는 까닭은 모든 횡단면들, 즉 동시성들이 서로 등가적이고 또 각각의 횡단면이 다른 모든 횡단면들의 계열의 대변자로서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분석된 한순간의 결합구성체는 전체 계열을 추론해 내는 데 충분한 것이며, 이 계열 속에서의 각각의 위상을 선택적으로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자연과학의 바탕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변화하는 상태들은 전체의〈부분들>이 아니라, 즉 시간연속계열이 자신의 통합성에 추가로 어떤 것을 첨가시켜 주는 다양성이 아니라, 단지 한 번 주어진 공간적 다양성이 진척된 어떤 표층에 불과하다. 이와 함게 <비역사성 Ungeschichtlichkeit)의 의미가 좀더 정확하게 규정되었다. 이런 식의 체계개념을 생명제에게 적용시킨다면 심각한 이론적 어려움이 초래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완전한 조화에 바탕을 두고 있는 비역사성(완전한 주기성으 로 자신을 표출하는 비역사성)은 행성계 자체를 미루어 보더라도 이미 인간이 사용하는 장기적 척도가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한 것일 수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비회귀적으로 발전하는 속성을 갖기 때문에 있다. 우리가 열역학적인 thermodynamisch" 측면, 즉 그것의 과정이 그 결과 주기성에 모순되는 일회성이 매순간에 개입할 수 있는 열역 학적인 측면을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순전히 역학의 영역에서도 마치 그렇기나 한 듯이 나타나는 반복도 천천히 변화하는 어떤 우회로일 수도 있다(예를 들어 만약 케플러의 타원형 행성궤도 Planetenellipse가 하나의 관찰되지 않는 나선형의 형상을 감추고 있다면), 이렇게 천천히 변화하는 우회로와 같은 경우에는 그것이 항상적인 진척이 마치 평 형을 증명해 주는 듯이 보였던(이와 함께 하나 속에 존재하는 다수의 완전한 결합가능성도 증명해 주는 듯이 보였던) 사실을 오히려 역전시 켜 버린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오히려 최종적으로는 체계의 존재를 능성 Existenzunfähigkeit을 증명해 준다. 이것은 현대의 인식에 따르면 하나의 가능성 이상의 것이고, 체계개념을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사 유의 차원을 열어준다. 고전적 존재론과 변신론 Theodizee에서 라이프니즈가 존재의 이님으로부터 항상적인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그 리고 동시에 항상적인 것의 존속성을 보증하기 위하여 주장한 것은 다시 말해서 조화로운 체계로서의 존재 같은 것은, 실제로 그 진상을 살펴보면 장기간에 걸쳐 펼쳐지는 자기반복의 역사이며, <하나가 다 수 속에> 분열되는 것이 존속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증명해 주는 것이다. 다수 속의 하나는 무차별적으로 동일한 것이 무( Nichts)로 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 이런 흥미로운 사유의 경우에 여 기서는 체계가 시간적으로 주저함이며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앞에 서 언급했던 사실, 즉 단순한 것과 무한히 다양한 것 사이에 중간적 인 것 Mittleres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좀더 비판적인 사실을 하나 더 첨가해야만 되겠는데, 이것은 생성과 소멸 사이에 그리고 존재와 비 존재 사이에 어떤 중간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것이 단순히 중간에 있다는, 즉 무차별적인 의미에서의 중간적인 것이 아니라 비 관적인 의미에서의 중간적인 것을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다. 비판적인 의미에서의 중간적인 것은 중간을 유지하고, 자신의 존 재에 의존하여 몰락을 저지한다. 그러나 중간적인 것이 그런 식으로 자신의 반복적인 기능을 하는 도중에도 또한 몰락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몰락을 통해서만 자기를 보존하는 수단을 획득할 수 있 고, 그래서 <중간 Mitte)은 과정이 진척되는 흐름을 타고 내려가면서 자신을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체계가 보여주는 이런 측면은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을 받고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야 할 생명에게 고유한 어떤 것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 야 할 점은 죽음이 조직의 의미를 보존에 두고 있다는 점과, 죽음이 이미 조직되어 있는 것에 새로운 것을 허용할 때는 오직 소멸의 형 태를 통해서 그렇게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근대의 생명이론 속에서 자기보존이 차지하는 중심적인 위치를 미루어 볼 때, 생명체를 이해 하는 데에 있어서의 체계개념의 적합성이 자기보존 Erhaltung 개념의 적합성만큼이나 유효하고, 동시에 후자와 함께 한계성도 공유한다고 우리는 발할 수 있다. 우리가 이제 최종적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바른 이 두 개념들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 두 개념들은 결국 평형의 개념에 의해서 매개되고 있는데, 평형 Gleichgewicht의 개념은 고대의 조화 Harmonie의 개념을 대체하고 탈마법화시키는 현대적인 개념이다.!
근대에 와서 최초로 체계의 개념을 살아 있는 물체에 적용시킨 사건은 데카르트의 동물적 생명체 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동물적 생명 체는 기계이거나 자연적인 자동기계이고, 그것이 역학적인 기술이 만 들어 낸 기계보다 우수한 점은 오로지 그것의 부분들이 무수히 많고 더 미세하다는 데에 있다. 데카르트는 반사이론(『정념론 Passions de Lane』에서 제시하는)을 가지고 이 자연적인 자동기계를 폐쇄되어 있 는 시계와 구별시켜 주는 특징인 환경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의 반사이론은 <배움〉을 비목적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심지어는 조건반사들(bedingte Reflexe, 즉 외부의 자극에 의하여 역학 적으로 변화된 감지기관과 신체운동 사이의 연결관계들 Sensor-Motor- Verbindungen) 개념까지 미리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 의 이론은 하나의 개별적으로 폐쇄된 그리고 고립될 수 있는 체계로 서의 고전적인 기계론의 모형을 근본적으로 따르고 있다. 과거의 이 론들과 비교해 볼 때, 데카르트 이론의 중요한 측면은 <영혼〉 없이 <사는〉 것을 이 이론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 과정과 연결되어 있는 기능들은 자신의 부분들에게 주어진 배열질서 의 힘으로 말미암아 활성화될 수 있고, 이 부분들의 상호협력작용 속 에서만 활성화될 수 있다. 기능의 전체 효과는 자기보존이며, 체계들 은 이러한 전체 효과를 위하여 구축된 것이다.
물질대사 Stoffwechsel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통찰에 따르면, 물질대 사는 생명체의 전체 복합적 구성을 끊임없이 쇄신하는 (기계가 에너 지를 조달하는 비유를 훨씬 뛰어넘는) 장기적 과정이고, 이 과정은 곧 생명의 과정 Lebensvorgang이다. 물질대사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또 한 살아 있는 물체의 모든 활동에서 나타나는 외부와 내부 사이의 정보의 상황적인 역할과 근본적인 역할에 대한 통찰은 오늘날 데카 르트적 모형을 정교하게 만들어 주었다. 새로운 통찰들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여기에서 한편으로는 폰 베르탈란피"의 생물학적 이론인 <일 려 있는 체계)에 대한 이론과, 다른 한편으로는 위너'의 <인공지능화 적 kybernetisch) 이론과 그의 과학기술의 위기이론을 언급하고자 한 다. 두 이론들은 모두 생명체에 대한 분명한 체계이론"들이다. 그 이 외에도 두 이론들은 데카르트의 자동기계 이론보다 더 많이 생명제와 환경세계의 통합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첫번째 경우의 <개방성 Offenheit>은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사태, 즉 생명제적 재계 organisches System가 자신의 환경세제와 함께 지속적이고 포괄적으로 물질을 교환하는 사대에서 드러난다. 물질을 교환하는 일을 실행 함으로써 생명체적 체계는 실제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역동적인 기능 의 측면에서 자기자신을 동일한 것으로서 보존한다. 여기에서 정의되 어야 할 체계의 특성은 배열질서(구조)가 아니라 역동적인 활동태도 (과정)이며, 이 역동적인 활동태도의 담지자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배열질서가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열려 있는 체계이론은 여기에 대해 서 더 이상 다루고 있지 않다. 어떤 평형상수(이것은 공리로서 수학적 으로 공식화되어 적용되고 있는데)와 연결지어진 개방성의 속성으로부 더 폰 베를달란피가 언급하는 생명체의 또 다른 속성들은 (그 가운데 에서도 드리쉬가 그것을 위해서는 과학 외적인 엔텔레키 개념이 필요하라고 믿었던 그런 종류의 속성을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정의된 다양성의 체계 내재적인 특징으로서 분석적으로 추론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런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예를 들면 자 기조절, 성장과 성장의 한계, 재생, 적용, 우회로를 거쳐서 목적을 성 취할 수 있는 능력 같은 속성들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방법을 복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우리의 맥락 속에서 는 그 모든 유사목적론적 quaisi-teleologisch 현상들을 위해 조절하는 역 동성이 하나의 특별한 평형개념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과 이 평형 개념을 위해서 폰 베르탈란피가 정체적인 평형개념과 구별하기 위하 여 <유동평형(유동적 평형 Fließgleichgewicht)>" 이라는 명칭을 제안했 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평형개념과 조절 Regulierung개념(이 두 개념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까닭은 조절이 역동성에 의존하여 평 형을 지향하기 때문이다)은 함축적으로는 또한 인공지능적 모형을 위 해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인공지능적 모형은 현대의 의사소통 기술과 자동화 기술에서 나온 것이며, 자신의 명칭을 통제 또는 조종 의 개념(퀴베르네테스 kybernetes = 통제자, 조종자)에서 빌려왔다. 이전의 모형이 사용하면 실체와 에너지의 개념을 미루어 볼 때, 이 모정 에서의 <개방성>은 <정보>의 상태를 취하는 개방성을 통해서 보관된 다. 이러한 대학에서 정하는 행동결과를 감각기관이 끝없이 부문에 서 중심으로 전달(통보)하는 것으로서의 지각이다. 이전의 모델을 보 관해 주는 관계는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사태 자체가 그렇게 근거지 여주고 있다. 물질대사(Metabolismus, 또는 물질대사에 의해서 일어나 는 변화)로서의 개방성은 느낌 Fuhlen으로서의 개방성을 요구한다. 우 성질 자체로서의 느낌이 아니라)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리는 여기에서 느낌이라는 말을 전달된 정보를 조절하는 기능(어떤 역으로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은, 기능적인 의미에서의 지각적 세계개방성은 또 다른 개방성을 전제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다른 개 방성이 없이는 그리고 이 다른 개방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행동하고 자 하는 욕구가 없이는 조절하고자 하는 관심, 즉 행동을 따라가면서 조절하려는 관심도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며, 결국 조절을 요구하는 어떤 요인이 없는 조절의 메커니즘은 허황된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체계를 이해하는 데 인공지능학이 공헌한 바는 이른바 <피 드백 feedback> 개념을 정보전달기관과 실행기관의 상호협력작용에 응용한 것이다. 이 두 기관을 연결하는 방식(이를테면 중추신경계)에 의존해서 모든 부분적인 실행결과를 감각기관이 계속해서 전달하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다음 단계의 실행과정으로 연결되어 오류를 피하는 조절기능을 한다. 이런 절차가 그 다음 단계로 계속 연결되면서 결국 행동의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계속된다. 고전적인 메커니즘의 모형이 보여주는 고정된 진행과정과는 달리, 이 모형에서 우리는 유 동적이고 또한 상황에 이른바 즉흥적으로 허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비록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어쨌든 오류를 교정하 는 역전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목적론적 행동의 특유 한 징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인공지능학자들 은 목적론적 행동을 (피드백 통제된 feedbackkontrolliert) 행동으로 정 의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런 식으로 통제된 자동기계는 목적론적인 행동을 할 능력이 있으며, 이와 반대 로 단지 체계의 정도가 보다 심한 복잡성에 의존하는 그리고 이에 병행하면서 인위적인 기계가 실행하는 것을 하는 살아 있는 행동 따 위(데카르트적 모형에서처럼)와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맥락에서 나타나는 비판적인 개념은 물론 목적 개념이며, 이 개념은 폰 베르달란피의 개방된 체계의 목적론에서와 마찬가지로 한 체계의 역동성이 지향하는 평형상태의 개념을 통해서 규정된다. 인공지능학적 모형의 경우에 평형의 의미는 힘들의 물리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특정한 것을 지향하는 <자세 Einstellung〉와 〈정보>의 내용 의 관계로까지 확장된다. 특정한 것을 지향하는 자세와 정보의 내용 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긴장은 체계의 역동성을 활발하게 유지시키 고, 이들 사이의 긴장해소는 체계의 역동성을 고요한 상태로 이끌어 간다. 고전적인 역학이 가지고 있는 폐쇄된 체계 geschlossenes System와는 달리 이러한 종류의 모형의 경우는 체계의 기능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평형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형을 생산하 고 재생해 낸다. 재생이 필요한 까닭은 개방성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면 물질대사의 경우에 무엇이 결핍됨으로 말미암아 자연적으 로 기능에 이상이 오고 그 결과 평형이 깨질 때, 이것은 이미 플라톤이 관찰했던 바의 <충족과 소모>의 상승과 하강으로 이어진다. 여기 에서 등장하는 부류의 주기성은 등가적인 상대의 순환 같은 주거진 이 아니라 존재상과면 무(無)로 기울어지게 하는 주기장이 주기설 추기성 전체가 생성과 소멸 사이에 위치하는 움직이는 bewegt 이며, 기량 보존하는 것은 에서의 사태가 발생한 다. 체계를 보존하는 것은 체계의 기능이 실행하는 성과에 달려 있는 것이지, 단순히 기능을 실행한다고 자동적으로 체계가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평형상태를 재생합으로써 자기자신을 보존하는 과업이 세계 의 기능의 내용이며, 또한 체계의 존재의 의미이다. 체계는 평형상태 를 유지함으로써 환경세계에 의존하는 일을 멈추기도 하면서, 끊임없 이 산출 Herstellung하는 형태로 자신을 보존한다.
이것이 또한 〈생명〉의 의미인가? 생명이 생명체에 의해 정의되는 것인가, 아니면 생명체가 생명에 의해 정의되는 것인가? 더 나아가 생명체의 본질이 생명체의 고유한 다양성의 체계로서 거기에 있는 <조직 Organisation〉인가, 아니면 조직을 통해서 활동하고 동시에 조 직의 조건에 제약을 받고 있는 관심에 봉사하고 있는 생명체적 <기 관 Organ>인가? 체계가 생명의 조건인가, 아니면 체계는 생명 자체인 가? 조건의 역동성이 조건지어진 것의 내용인가? 긴장과 긴장완화는 욕구와 욕구충족과 동일한 것인가? 목적을 성취했을 때 이루어지는 평형은 그 자체가 목적인가? 체계상태의 완전성이 생명의 완전성인 가? 자기보존은 수단인가 아니면 목적인가? 세계개방성 Weltoffenheit 의 양태들 느낌, 바라봄, 무엇을 함은 자기보존을 위한 수단인 가 아니면 자기보존의 목적인가? 조절하는 기관과 기관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 생명의 고유한 본성인가, 아니면 목적 속에서 그 기관을 초월하는 활동이 생명의 고유한 본성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가 생명현상 Lebensphänomen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체계〉라는 용어 가 개념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내용을 분명히 해명한 다음에, 체계개념의 적합성과 한계를 검토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질문들이다. 제 불라는 용어를 설명하는 준비작업에 공헌하려고 우리가 노력한 것이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서론으로서가 아니라 철학적 생명이론의 돌 안에서 언급해 온 것이다.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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