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지각, 인과성 및 목적론
우리는 제1장에서 정령론으로부터의 극단적인 후퇴, 다시 말해서 이원론적인 분열 이후에 남아 있는 세계가 우리에게 이 세계의 부분들을 연결할 수 있는 어떤 설득력 있는 연결점의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활성화하는 것이자 전체로서의 자연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상황 속에서는 신체를 인지적으로 kognitiv 부정하는 것이 복수를 하게 되는데 어쨌든, 우리는 어떻게 이 상황이 인간동형론을 금지한 결과 발생하는 최초의 희생물을 만들어 내는가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 최초의 희생물은 존재론적으로는 자연에서 최종 원인을 제거하는 형태로 표현되고 또한 그 이후 인식론적으로는 흄과 칸트의 인과성 문제에서 탐구대상이었던 활성화하는 원인성 wirkende Ursächlichkeit이 감추어진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우리는 제2장에서 이 사태의 두 측 면을 좀더 자세하게 추적하고자 하는데, 우선 마지막에 언급한 측면 부터 시작할 것이다. 65
1 인과성과 지각
1-1 흄과 칸트의 문제: 문제해결의 불충분성
흄은 〈어떤 일을 야기시킴 Verursachung〉이 감각지각의 내용으로 등장하지 않으며, 우리가 〈지각 Wahrnehmung〉을 단순한 <받아들임>, 다시 말해서 계속 등장하는 감각자료들을 기록하는 〈받아들임〉으로 이해하는 한, 흄의 조사결과를 번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흄의 부정적인 연구결과를 떠맡았을 때 칸트도 감각지각을 그렇게 이해하였다. 그리고 만약 흄과 칸트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한 수동적인 지각이 유일한 양태, 즉 이 속에서 외부세계가 본래적으로〈주어 지는〉그런 양태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오로지 우리의 수용성에 의존하여(이 수용성의 자료들은 행위 속에서 처음으로 해석되어야만 하는데), 우리 자신의 신체적인 활동에 대해서 안다고 여긴다면, 실제로 인과성은 일차적으로 주어진 원래 자료에 첨가되는 정신적인 첨가물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론들의 차이는 이 첨가물의 원천과 종류의 차이일 뿐이다. 흄은 이 정신적인 첨가물을 연상의 습관(주체의 쪽에서는 이것 자체도 수동적이다) 속에서 포착하였고, 칸트는 그것을 오성을 통한 구조화 속에서 (<능동적이기는 하지만, 엄격하게 정신적인 내재 속에서) 포착하였다. 그러나 이 두 긍정적인 이론 가운데 어느 하나도 빈틈, 즉 부정적인 논증의 성과가 열어 놓은 빈틈을 메울 수는 없었다. 인과성이 감성적인 것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흄의 주장을 결코 반박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다시 말해서 용어에 대한 정의를 그대로 따르자면 비이행적(非移行的,nicht-transitivⅳ) 현상들 가운 데 나타나는 어떤 현상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의 표상들-우리 표상들의 관계 속에서는 표상들이 사물들을 제대로 현현하지 못하는 바로 그 역동성이 인정되고 있다! - 사이에서 감독받지 않은 연결들(상호적인 끌어당김들)로부터 유래하는 인과성의 부당한 탄생에 대한 흄의 이야기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표상들의 이러 한 군집형성 이후 Post-hoc-Vergesellschaftung에는, 이것의 효과가 어떤 것이든, 원자론적이고 내적으로 정적인 기록에게 그 특성, 즉 맨 처음 그에게 숨어 있던 그 특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그리고 비록 어느 정도 인정된 심리적 강제성 또는 부추김, 즉 어떻게 이들이 이념의 자동성에서 솟아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실제로 사유를 잘못된 연결로 유도해 가기도 하고 또 어쩌다가 우연히 올바로 이끌어 갈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종류의 연결의 원래적인 상 Urbild은, 그것의 옳고 그른 사용이 거론되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고유한 원천에서 기인하는 것이어야 한다.1) 이러한 조건에서 정신적인 역동성을 물리적인 역동성으로 해석해 내는 것이 적어도 심리학적으로는 설득력이 있다. 말하자면 일차적인 사태는 물리적인 유형의 것을 통해 알려지는 반면에, 정신적인 것은 이차적인 사태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마도 두 사태를 서로 혼동하는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전혀 다른 두 영역에 속하는 것, 자세히 말하자면 상상력이 우리 자신에게 확실하게 설득시켜 주는 것과 사물이 아주 미미하게 증거해주는 것을 구별하고 전자를 후자의 빛에 비추어서 교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적인 인상의 선명도는 이 사태의 경우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웅변술과 논증이 합쳐져서 흔히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점을 제쳐놓는다면, 이는 마치 웅변술이 어떤 논증 속 에서는 아무 역할을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지막으로, 관념들
각주
1) 예를 들어 내가 영화관의 영화 자막에서 주먹이 갑자기 확 어떤 신체를 치고 나 자마자 이 신체가 비틀거리는 것을 볼 때, 나는 이처럼 순전히 형태적인 연속에 불과한 것을 역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까닭은 내가 이전에 이미 <나 자신 의 고유한 신체에서> 육체가 실제로 충돌하는 것을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을 연결시키는 데 작용한다고 하는 <습관의 힘>은, 그것을 자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물리적인 원인들(예를 들면 두뇌의 메커니즘), 다시 말해서 습관의 힘은 아마도 단지 속여야만 하는 것의 현실성 Wirklichkeit을 포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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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선택도 그리 나은 편은 아니다. 칸트의 선택은 심리적인 원천을 <초월적인 transzendental〉 원천으로 교체한다. 왜냐하면 오성은 그 자체가 행함(작용, Aktion)과 영향 Einfluß의 관념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흄에게서 감각지각이 그런 관념들을 가져다주지 않았듯이 말이다(위 57쪽 참조). 오성이 가져다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말하자면 연상작용의 메커니즘이 오직 상상력만을 필요로 한다는 구체적이고 비합리적인 감정을 산출하는 그곳에서 오성은 하나의 <필연적인 규칙>의 형식적인 개념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필연적이고 일반적인 연결의 규칙은 이 규칙이 어디에 관여하는지, 다시 말해서 그 연결 자체를 전제로 한다. 이 연결은 스스로 자신을 가져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규칙이 원래 규정적인 연결의 실제적인 경우들 속에서 그 연결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해야만 하는 그런 연결이다. 규정적인 연결의 실제적인 경우들은 A에서 B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힘이 실천적으로 (즉 두 상관자 가운데 하나인 나 자신에 의해서) 체험되는 장소이다. 개별적인 경험에 전적으로 주어져 있는, 힘을 통한 강제 Nötigung durch Kraft는 규칙의 <필연성> 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규칙의 필연성은 개별적인 경험의 경우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한다>(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선험적 아니면, 모든 경험상 실제로 그렇게 하는). 규칙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줄 뿐이다: (1) 어떤 임의적인 종류의 (이 가운데 하나가 직접적인 경험 속의 본래적인 패러다임인 그런 종류) 꼭 필요한 연결 nö- tigendes Band은 변화가 일어나는 곳, 비록 그것이 행위하거나 지각하는 형태로 경험되지 않는 곳에서 조차도 언제나 활동하고 있다. (2) 모든 변화들의 필연성의 연결 Notwendigkeits-nexus에는 동일한 형식의 척도가 적용되거나, 아니면 모든 개별적인 필연성들(강제들)은 하나의 보편적인 필연성(법칙)의 부분들이다. 그리고 (3) 보편적인 필연성은 새로운 의미에서 그 자체로서 <필연적>이다. 강제의 본성에 따른 필연성이 아니라(하물며 내가 나 자신에게서 체험하는 특별한 종류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의 전체로서의 <본성>의 본성에 따른, 말하자면 그 필연성이 하나의 이해 가능한 통합성이어야 한다면 말이다. 존재의 통합성이든 <경험>의 통합성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 차이점은 분명하다. 그래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 이중 의미성이 이 후 계속되는 칸트의 논증의 여정에 마술을 건다. 내가 온힘을 쏟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몇 배나 힘센 소용돌이치는 물결을 이겨내지 못 해서 휩쓸려가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면, 이때 나는 분명히 다른 의미, 즉 비정언적인 nichtkategorial 의미에서의 <필연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인과성의 보편적으로 타당한 법칙의 정언적인 필연성 kategoriale Notwendigkeit을 말할 때와는 다르다. 두번째 경우에 나는 필연성의 필연성, 즉 구체적인 필연성들 가운데서도 하나의 추상적인 필연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어떤 한 필연성 또는 강제(이행적인 transitiv)가 각각의 경우 속에 내재되어 있고, 이 모든 개별적 강제들이 모두 함께 하나의 동질적인 체계를 이루는 그런 필연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칸트의 논증은 전적 으로 이차적인 질서에 속하는 이러한 (비이행적 nicht-transitiv) 필연성을 다루고 있을 뿐, 우리가 진정으로 경험하는 원인과 결과의 경험 문제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조차도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흄의 전제에 따르면, 칸트가 그런 경험을 부정하는 것은 그의 논증 이전에 이미 선행되고 있다. 흄의 전제, 다시 말해서 중립적인 <관념들 Ideen> 또는 표상들 또는 상(像)들의 연속을 지각이라고 보는 전통적 인(마지막으로는 데카르트적인) 입장에 따르면 말이다. 나는 이같이잘못된 전제가 칸트의 논증의 본래 목적을 위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는 믿지 않는다. 내가 만약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칸트의 목적은 그런 인과성에서 사실성 그리고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경험을 근거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경험 전체에 유효한 인과성의 보편적인 법칙의 타당성을 근거지우려는 것이다. 물론 그의 논증이 그것을 타당하게 성공시키고 있는가의 문제는 검토되어야 할 바이다(그러나 이 것이 여기에서의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다). 대답이야 어떤 식으로 주어 지든 간에, 경험과 연관지어 볼 때 법칙은 일차적인 경험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아무것도 말해주고 있지 않다. 70
흄과 칸트의 입장에서 나타난 공통점으로 돌아가 보자. 상상의 느껴진 강압 Zwang이 문제가 되든 간에 또는 파악된 사유의 필연성이 문제가 되든 간에, 심리적인 규칙이 문제가 되든 간에 또는 합리적인 규칙이 문제가 되든 간에, 이들 모두는 우리가 우리 정신의 자유 영역 밖에서 실제로 사물과 충돌할 수밖에 없도록 우리를 강압하고 있는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두 입장은 모두 내적인 역동성을 외적인 역동성과 교체시키고 있으며, 거짓된 원천을 참된 원천과 교체시키고 있다. 두 입장은 모두 <지각>이 이 사태 속에서 침묵하고 있음을 (지각에게 강압해 오는 인지적인 독점의 고립 속에서도 역시 지각이 그렇게 하듯이), 더 나아가 이와 더불어 힘, 이행성 Transivität 및 사물의 역동적인 연결에 대한 어떠한 직접적인 인식도 존재하지 않음을 가정하고 있다.
1-2 문제의 전환: 어떻게 중립적인 지각이 가능한가?
그런데 실제 문제는 칸트와 흄이 최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실에 정확히 자리잡고 있을 수도 있다. 지각된 것의 인과적인 침묵성 kausale Stummheit der Percepta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놀라움과 설명의 동기로 삼는다면, 재미있게도 흄의 문제가 역전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감각지각 Sinneswahrnehmung이 발생하는 곳에 스스로 관여하고 있는 인과성으로서 알려진 것을 염두에 두고 불때, 실제로 탈인과화된 내용이 자신의 고유한 수수께끼를 감각지각에게 넘겨준다. 이 수수께끼는 좀더 보편적인 흄의 수수께끼를 패러독스로 만들어 간다. 특이한 인과적 연결- 감각의 촉발-이 자신의 고유한 표상적인 억압을 자신이 특이하게 성취한 것으로서 규정하는 패러독스로 말이다. 현현된 지각결과 속에서 그것의 발생이 감추어지는 것, 즉 자신의 고유한 인과적인 특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화이트헤드가 <현전적인 직접성 presentational immediacy〉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본질적인 특성을 형성하고 하나의 객관적인 기능, 즉 그 나름대로 이것도 자기가 획득하는 것을 위해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객관적인 기능을 위한 조건이 되어 준다. 71
여기에서 우리가 제안하는 문제의 전환은 인과적인 인식의 독립적이며 정당한 원천, 즉 이것의 주어짐이 지각에 대한 부정적인 조사결과에 의해 저촉받지 않는 그런 원천을 함축하고 있다. 정당하지 않은 원천을 함축하는 것과는 반대로, 독립적이며 정당한 원천은 지각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지각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충하기 위해서도 요청되어야 한다.
화이트헤드가 지각의 서로 다르면서도 상호보완적인 두 요소들로서 구별한 <인과적 효과성 causal efficacy>과 <현전적인 직접성>은 흄의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항을 지적해 주면서도 그 자체에 대해서 충분한 설명을 해주고 있지 않다(실제로 <직접성>이라는 표현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지적사항을 따르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1) 도대체 어떻게 각각의 감각들이 서로 다른 정도로, 그들의 표상의 산물에 통합되면서 그들의 고유한 인과적 구성의 발자취를 지워버리게 되는지, (2) 왜 인과적 요소의 생략이 실제적인 지각과정의 자기 생산에서 자신의 보편적인 대상에 대한 상으로까지 확장되는지. (3) 왜 세계와 관계하는 데 있어서 그러한 속성을 갖고 객관화하는(대상화하는) 양태들이 필연적으로 인식의 개념을 독점해 왔는지 그리고 왜 이 양태들의 대상적 유형이 현 실성의 개념을 독점해 왔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다시 말해 인식의 원천을 선택하는 데에 고유한 문제들을 일으킨 그런 독점(그 가운데 하나가 <필연적인 연결 notwendige Verknüpfung〉의 문제이다)을 보여 주고자 한다.
(1) 어떻게 감각들은 <탈인과화된> 내용을 산출하는가? 여기에 대한 충분한 대답은 감각의 활동에 대한 발생론적이면서 동시에 현상학적인 분석을 요구한다. 현상학적 분석에만 제한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최종산물의 증거에 몰두한다는 것이며, 그래서 흄의 이론의 마법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는 자세한 분석을 할 만한 곳이 아니므로, 몇 마디로 그의 입장을 보여주고자 한다.
감각이 자극을 받을 때 발동하는 활동의 단위와 반응 단위의 미세함(공간과 시간과 에너지의 척도에 따르면), 다시 말해서 생명체에 대해 상대적으로 향하는 그들의 빈약한 크기의 질서는 그들의 판단기준이 하나의 연속적이고 동질적인 효과(<인상>)에 통합되는 것을 허용한다. 이 효과에서는 각각의 자극이 흡수될 뿐만 아니라, 자극의 특성 자체가 이후로 계속해서 활성화되고 그리고 분리된 상의 특성으로 변형된다. 간단한 성질이 지각되는 곳에서 원재료 Rohmaterial는 많은 활동과 관계한다. 충돌, 방해, 분자적인 판단기준 속에서의 미루 기 등이 그것이다. 그들의 고유한 크기 속에서 이 판단기준을 훨씬 넘지 못하는 생명체들은 그래서 지각하지 못하고, 충돌만을 경험한다. 그들은 현전으로서의 <세계>를 가질 수 없고, 힘들로서의 세계만 가질 것이다. 이와 반대로 몸집이 큰 생명체에게는 힘의 경험이, 만약 이 생명체가 자신의 고유한 크기 질서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 힘의 경험을 갖는다면, 언제나 이미 하나의 진정되어 있는 현전의 연속체, 즉 모든 미세작용의 감각적인 집합의 결과에 옮겨져 있다. 이 미세작용은 계속해서 감각을 자극하지만, 감각을 교정하는 과정에서 역동적인 사건의 성격을 희생해야 한다. 서로 연관되어 있고 노력하지 않는 탈활성화된 내용의 현전으로서 이러한 감각의 교정은 존재의 중립적인 기체 Substrat를 제공한다. 힘의 경험은 어떤 특별한 기회가 오면 이 기체에 추가되고, 힘의 경험은 실제로 특별한 현상으로서 이 기체와 구별된다. 지각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때때로 발생하는 작용에 대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바로는 견고한 존재가 우선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우선성은 실제적이고 발생적 관계들의 역전이고, 나중에는 인과성에 대한 이론적 문제의 뿌리가 된다.73
지각 속에서의 역동적이고 원인적인 관계가 침묵의 상황으로 이어지거나 또는 여전히 말을하는 상황에 이르는 정도, 그리고 발생의 연속이 현전의 동시성으로 번역되는 정도는 그들의 객관화하는 성취도 측면에서 감각을 분류하는 데에 동원될 수 있다(시각의 고귀함에 대한 제8장 참조). 무엇을 본다는 것은 서로 비교 분석하는 데서 시작하여 하나의 감각이 되는데, 이 감각은 역동적인 내용의 완전한 중립화 그리고 지각기능의 대상을 이중 의미적이 아니도록 탈락시키는 일을 한다. 모든 감각지각 속에서는 다양한 정도의 차이를 보이면서 인과적 작용의 자기부정 현상이 발생한다. 지나친 자극이 무리하게 한계선을 넘어 버리고, 인과성이 감각을 넘쳐 버리는 곳에서는 충돌이나 고통의 느낌에 의해서 지각이 짓눌려 버린다. 다시 말해서 지각 은 본래적인 지각이 되기를 멈춘다. 특히 촉각의 경우에는 질적 속성을 파악한 후 압력의 경험으로 이행해 가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힘 을 발산하는 것으로 이행해 가는 것을 분명하게 각각의 단계에서 구별할 수 있다. 또 다른 감각기관을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가까운 곳에서 폭발이 일어날 때 그 폭발 소리의 힘이 이것을 수용하는 감 각기관이 감당할 수 있는 음향의 정도를 넘어서면, 우리는 그냥 특정 한 질적 속성과 세기를 가진 음을 듣는 대신에, 고통을 당하면서 온 힘을 다해 저항해야만 하는 그런 폭력적인 힘이 우리를 엄습하고 있 음을 느끼게 된다. 감각기관의 수용능력을 넘어서는 경우에는, 마치 소음이 우리를 명하게 만들 수 있듯이, 빛도 우리의 눈을 부시게 만 들어서 사물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는 자신을 감 각적으로 현전시키는 대신에, 역동적으로 자신의 증거를 과시하고 자 신의 인과성으로 지각을 압도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후자의 경우에 지각이 하는 일은 자기에게 관련되어 있는 인과성을 자신의 기록내 용에서 약화시켜 없애 버리는 것이며, 또한 지각의 특이한 작업은 바 로 그런 일을 성취해 내는 것이다. 시각의 경우에는 이것이 성취해 내는 일이 전적으로 여기에 관련되어 있는 빛의 역동적 속성들과 상 대적 크기의 등급의 제약을 받는다. 어떤 대상이 마치 활동하지 않고 자기 속에 갇혀 있는 듯이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관찰자의 비활 동성과 자기 속에 갇혀 있음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두 현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활동성의 운동과정이 정화된 결과이다. 표상작용은 무 언가를 잃으면서 얻는 것이며, 잃는다고 해서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 은 아니다. 표상의 산물을 완전히 제거하는 활동성은 추상작용의 한 요소-상(像)의 추상작용-를 감각지각의 내적 구성 속으로 끌어들이고, 이와 더불어 그런 것으로서의 대상인식 속으로 끌어들인다. (2) 감각지각 속에서 일어나는 객관에서 주관으로의 인과성의 억압 은 또한 객관에서 객관으로의 인과성의 억압도 동반한다. 또한, 이론 적 인 영역이 지각을 유비하는 형태로만 형성될 경우에는, 객관에서 주관으로의 인과성의 억압은 <이론적인 영역 안에서의 인과성의 억 압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그것은 행위하는 주체가 증언해 주는 것을 자신의 명증 Evidenz 속에 수용하기를 허용하지 않기때문이다. 피상적으로 보기에는 외화될 수 없는 <내적인> 인식, 즉 인간이 행위하는 자로서 사물들과 실천적으로 교통하는 가운데 간격하고 있는 주관에서 객관으로의 인과성 Subjekt-Objekt-Kausalität 대한 내적인 인식의 증언을 말이다. 행위하는 주체의 증언은, 이 중언 자체가 지각을 통한 객관화의 제약을 받게 되고 또한 증언의 내용이 한 편의 자료물로 변형된 다음, 다시 말하자면 그 증언으로부터
능동적인 속성이 발췌된 다음에야 비로소 이론 속으로 수용되는 것이 허용된다. 자신의 본래적인 형태 속에 있는 이 명증을 거절(이론적인 이상향이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 거절)함으로써, 하나의 비지각적인 원천, 즉 활동하는 나의 고유한 신체가 겪는 힘의 체험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사라져 버렸다. 이 원천은 다름 아닌 관찰된 과정의 연속 속에 있는 역동적 연결부분이 아직 유비를 통해서 제공할 수도 있을 그런 원천이다. 관찰자의 현실성으로부터 단절됨으로써 비로소 대상이 되는 이들은 이로 말미암아 또한 그들끼리의 연결을 해명해 줄 특성을 상실한다. 주체로부터 객관화를 고립시키는 것은 그들도 서로 고립되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특성은 <힘>이다. 이 힘은 <자료 Datum〉가 아니라 <활성작용 Actum〉이다. 그러므로 이 힘은 <보여지는〉 것, 즉 객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면성의 차원에서 그 힘이 분출되는 아니면 무엇을 겪는 형태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활동성을 자료로 만들어 버리는 지각작용을 통해서 이 힘의 특성이 일차적으로 중립화되는 것은 오성에게도 그대로 전수된다. 오성은 그런 지각작용의 바탕 위에서 자신도 객관화를 이루어 낸다. 오성 자체는, 만약 오성에게 힘의 특성이 박탈된 감각대상만을 따로 취급해야 하는 상황이 주어지면, 그 힘을 생산해 낼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성이 가지고 있는 연결 수단을 동원해서 그 힘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대체물을 생산해 낼 수도 없다(이 집에서는 흠이 옳았고, 칸트는 옳지 않았다). 그러나 오성은 주관에서 객관으로의 관계 속에서의 분리가 제공하는 장점ㅡ다시 말해서 이론의 자유라는 장점을 즐기면서도, 객관에서 개관으로의 관계 측면에서는 단점을 떠맡아야 하는 일도 감수해야 한다.
1-3 중립화로 인한 소득과 손실
(3) 인과적 작용성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존재자체의 자기표현 그리고 결국 객관성을 얻기 위한 대가로 치루어지는 것이다. 얻어지는 것의 측면에서 보면 인과성의 차단은 인과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보편적으로 지각과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시각은 인과적 상황에서 뒤로 물러남을 보장한다. 관찰하기 위하여 이처럼 뒤로 물러남은 경험하는 자를 쉬게 만들고, 선택적으로 무엇을 주시할 수 있 도록 하나의 지평을 열어준다. 자신의 경계선상에 머물면서 대상은 힘의 연관이 사라짐으로써 생기는 빈틈의 저편에서 주체의 앞에 선다. 현실성이 직접적으로 충돌해 오는 상황 속에서, 현실성이 그렇게 가깝게 주체에게로 엄습해 오는 상황 속에서 현상들과의 간격이 이루어진다. 작용 대신에 <상(像)>이 관찰되고, 비교되며, 기억 속에 저장되고, 기억되며, 상상 속에서 여러 형태로 변형되고, 임의적으로 다른 상들과 합쳐진다. 엄습해 오는 현실성으로부터 현상이 분리되는 것, 지각이 본래적으로 해내는 일은 존재로부터 본질이 분리되는 상황으로 계속 이어진다. 이러한 분리는 이론이 갖는 더 높은 차원의 자유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시각의 근본적인 자유로서 그리고 상에게 고유한 추상의 요소로서 이들은 개념적인 사유 속에서 계속된다. 그리고 지각으로부터 개념과 이념은 지각이 맨 먼저 산출해 놓은 객관성의 존재론적 표본을 전수받는다. 힘의 동요에서 해방된, 대상의 고요는 이제 좀더 높은 차원에서 이념의 항상성 속에서 그리고 요청에 따라 언제든지 이념을 제공하면서 되돌아오는 일을 한다. 대상의 고요는 최종적으로는 그런 것으로서의 <이론>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추론된다. 인식론의 영역에서는 지각으로부터 추론된 인식론의 양태들이 먼저 지배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이러한 지배는 현실을 알게 되는 데 있어서 다른 양태들을 제거하는 정도로까지 심화되었다. 이러한 지배는 인식의 가능성 자체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면서 존재론의 영역에서는 대상의 표본이 먼저 지배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배타성은 그러는 동안 나름대로의 대가를 치뤄야만 한다.
손실의 측면에서는,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발생하는 같은 종류의 균열과, 이 균열은 이론의 자유를 위한 차원을 제공하는데 어쨌든, 또한 객관과 객관 사이에서 발생하는 균열 속에서 반복되는 균열은 양쪽 측면에서 모두 한 무리의 문제가 발생하는 장소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들은 인식의 역사를 병들게 하였다. 그런 인식의 근본 전제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마찬가지 이유로 이 전제의 범위 내에서는 풀릴 수가 없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객관에서 객관으로의 관계에 관한 한, 흄의 필연적인 연결necessary connection 문제는 하나의 좋은 인식론적인 예이다. <필연적인 연결>은 실제적인 인과성을 대체하기 좋은 대용물이고, 그렇게 제시된 문제에 대한 가짜 해결방안에 대한 비판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관계 Relation의 문제는 이것의 존재론적인 형태로 계속 전통철학 자체 안에 폐쇄되어 있는 능동적 실체 aktive Substanz 의 개념을 둘러싸고 맴돌았다. <능동적 실체란 자기의 존재 Existenz 를 위하여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데카르트)이다. 이것은 역사상 등장하는 기발한 생각이라기보다는, 지각의 진리를 개념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형이 이해하는 <실체〉는 오로 지 외적인 관계만을 허용하고, 정의 Definition에 따라 모든 자기 이행성 Selbst-Transivität을 배제한다. <실체> 속에 갇혀 있는 존재를 해방 시키는 과업이 동시대의 존재론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이다. 더 나아가 체계 속에서 <힙>이 고향을 잃어버리고 있는 상황(그처럼 포로가 되어 있는 측면)은 인간동형론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외부세계에 대한 인식의 경우에 인간동형론을 추방하는 것이 학문의 인식론의 통념상으로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주관과 객관의 관계에 관한 한, 지각하는 객관화의 독자적 권위가 여기서 야기시킨 균열은 부분적으로는 <의식과 외부세계>라는 이원론의 수수께끼에 대해 책임이 있다. 이 수수께끼는 상황주의, 심리물리적 병행주의 및 관념론이 해결하려고 헛되이 애썼던 문제이다. 그들의 노력이 헛된 까닭은 활동하는 중에 있는 나의 자기초월없이, 다시 말해서 내가 세계와 물리적으로 관계하는 상황에서는 그리고 거기서 드러나는 바 나의 존재의 침해 가능성의 경우에는, 정신적인 영역의 폐쇄성은 논리적으로는 반박할 수 없는 것이며, 고립주의는 미친 짓이라기보다는 합리적인 사려로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인과성의 부정이 바로 고립주의로 귀착된다고, 그래서 우리는 결코 인과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아주 간단하게 말해 버릴 수 있다.
이러한 말들은, 고립된 지각의 상황에서 발생하고 거기서 이론의 반성이 시작되는 그런 문제들을 허술하게 묘사하는 것일 뿐이다. 이 모든 문제들은 동물적인 생명의 본래적인 자유, 감각지각생명체적 존재의 일차적인 자유의 침입자 그리고 그들 자신의 특권을 위한 계산, 사유의 보다 높은 자유의 문제를 암시해 주고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흄의 문제로 되돌아가면서, 이제 우리는 흄의 결과, 즉 감각지각의 자료들 가운데에 인과성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로지 지각의 본성과 의미에서 능히 기대되는 점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작업과 함께 그 결과는 동시에 자신이 속한 영역에 갇히게 되고, 이와 더불어 그것의 회의주의적 결말에서 벗어난다. 어떻게 우리가 지각의 인과적 공백으로부터 그럼에도 불구 하고 원인이라는 개념에 도달하는지가 맨 먼저 해명되어야 될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지각이 인과성을 보여주지 <않> 사태가 발생하는지, 다시 말해서 인과성을 감추는 일을 해내는지가 우선 해명되어 야 될 문제이다. 인과성이 우리의 관념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인과성이 지각에 부재하고 있음이 바로 기이한 사실이다. 인과성의 일차적 측면은 규칙적 연결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필연적 연결은 더욱 아니다. 인과성의 일차적 측면은 힘과 작용 Einwirkung이다. 힘과 작용이야말로 본래적인 경험내용이며, 종합하는 기능(이것이 연상 작용이든 오성이든 간에)을 하는 쪽에 있는 경험내용들(즉 지각들) 사이의 내삽(內插)들은 아닌 것이다. 이 경험의 원천 - 흄이 한데 모 아 <동물적 충동 animalischer Nisus)이라는 이름으로 처리하는 이 원천은 실제로 감각지각이 아니라, 행동하면서 애쓰고 있는 우리의 신체이다. 마지막으로 이 원천이 제공하는 증언의 직접적인 범위를 넘어서서 이 원천에서 외삽(外插, Extrapolation) 할 권리는 하나의 문 제이며, 이것은 생명체의 철학이 인간동형론을 범한다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탐구해야 할 문제이다.
2 인간동형론과 목적론
학문적인 믿음이 동반하는 허용과 금지를 둘러보면, 금지사항들 가운데 가장 먼저 목적론의 금지, 즉 최종원인들 Endursachen에 대한 금지가 등장한다. 17세기 초 이래로 학문을 주도해 온 사람들은 특히 이 점을 강조했고, 이것은 학적 태도에 있어서 의문의 여지없이 신뢰 받던 조항이었다. <왜 최종원인은 배제되어야 하는가?> 하는 꽃피우지 못한 질문에 대하여 오늘날까지도 많은 학자들이 만족할 만한 대답이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괴상한 일이다. 그 근거들을 기억해 봄으로써 우리는 당시에 그렇게 당연하게 여겨온 사실의 허구성. 즉 순수하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소유물에 의존하면서 준칙(準則. Maxime)이 획득한 허구성을 제거할 수 있고, 또한 그 근거들로 하여금 자신의 타당성을 굳히고 있는 조건으로 되돌아가도록 만들 수 있 을 것이다.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그 준칙이 자연의 인과적 양태 자체로서의 목적론 또는 내재적인 immanent 목적론과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그 준칙은 자연의 체계를 창조한 어떤 창조자가 그러한 본성으로 자연을 창조하면서 단번에 실행했음직한 종류의 초월적인 transzendent 목적론과 관계하는 것은 아니다. 최초에 전체 질료를 분산시킬 때의 모든 궁극적인 의도는 자신 쪽에서도, 창조 의도를 그런 방식으로 실현시켜야 하는 이 질료의 엄밀하게 역학적인 작용방식과 완전히 일치 할 것이다. 이 궁극적 의도가 알려져 있지 않고 원칙적으로 인식될 수도 없다고, 또한 그래서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는 식으로 설명되는 상황에서는 학적인 세계개념을 둘러싸고 이처럼 궁극적 의도를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불쾌한 일이 아니다. 새로이 부흥하는 학문이 목적론의 측면을 파악하는 시각은, 인간에게 유용한 것이면서도 거칠게 인간 중심적인 형태로 우주를 보았다. 이런 점을 우리가 일단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최상의 기술을 지녔으며 인간이 결교 그의 목적을 파악할 수 없는 신적인 공학자에 대한 표상은 실제로 역학적 세계관의 초기 발달과정의 가장 중요한 단계에서는 환영을 받았다.
2-1 근대 학문의 아프리오리로서의 목적인의 부정
실질적 문제는 자연 속에 있는 그리고 자연 자제 쪽의 작동 양태 Modi operandi로서의 최종원인들과 관련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이를 부정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항하는 큰 싸움의 일부분이 었다. 이 싸움과 함께 현대의 학문의 탄생이 진행되었고, 이런 점에서 이 사건은 <실체적인 형상 substantielle Form)에 대한 공격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최종원인들과 관련하여 공공연한 사실은, 최종원인들을 부정하는 것은 이 문제를 추적하는 탐구의 수단인 방법론적 원칙이었지, 추적하는 탐구의 결과로 얻은 결말은 아니라는 것 이다. 역사적으로 자연 속에 내재하는 최종원인들을 발견하려고 시도하다가 처절하게 실패한 예는 없다. 그런 시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원칙적으로 최종원인들을 자연 속에서 기대할 수 없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자연 속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공리 Axiom 앞에서 아무런 권리주장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냥 최종원인들을 찾아나서는 일은, 근대적 학문의 등장과 함께 갑자기 학문적인 태도로서 적합하지 않으며, 참된 원인들을 찾으려는 시도를 방해하는 것으로 지적되었다. 학적인 태도가 실천되면서 비로소 부정적인 조사결과가 수집되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서 최종원인들 없이 설명하는 성과가 이루어졌고, 최종원인 없이 증명에만 의존하면서 자료가 수집 되었다. 되풀이해서 말하자면, 목적론의 배제는 귀납적인 결과가 아니라, 현대 학문의 <아프리오리한 결정사항 A-priori-Dekret〉이었다. 이 일이 가능할 수 있던 것은, 목적론이 이미 존재의 유형, 즉 자연 과학의 가능한 대상으로서 확정된 존재의 유형에 위배되는 것으로 여겨지고, 이와 더불어 그런 대상들에게 적합한 원인의 개념에 위배된다고 여겨졌을 때였다.
그러나 아무도 <목적인 Zweckursache>이 멀리서 취해 온 개념이라거나, 불확실한 개념이라거나, <비자연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 반대로 인간 정신에게는 기본적인 인간적 경험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더 자연적이 아니거나 더 친숙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사실, 바로 이 사실이야말로 새로운 학문적 태도에서 목적인을 거부 하게 한 것이었다. 바로 우리들의 목적적 설명 finale Erklärung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목적인을 의심스럽게 만든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를 종족의 우상들 idols of the tribe), 즉 인간 본성이 천부적으로 갖고 있는 선입견들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그러면 이미 주어진 것에 다가가면서 인간의 오성은 자기 손에 더 가까이 있는 것으로 향한다. 말하자면 우주의 본성보다는 인간의 본성에 분명히 더 적합한 최종 원인들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철학도 이 원천으로부터 정화되지 못했다." 이처럼 일찍이 그 사실 자체ㅡ최종원인을 위해서 자연이 적합한 손님이 아니라는 사실ㅡ는 이미 기정 사실이고 아무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획기적인 사실은 역사적으로 충분히 기억되면서 주목을 받아온 사실이지만 어쨌든, 지적인 독자들을 위해서 목적론을 악용하는 상황은 최종원인들이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지 우주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 실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한쪽 영역에서 다른 쪽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어떤 결론도 이끌어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금 두 영역 사이의 존재의 근본적 차이를 가정한다. 이것은 현대 학문의 근본 가정이라기보다는 거기에 봉사하고 있는 현대의 형이상학이 신봉하고 있는 근본 가정이다. 베이컨을 따르는 세대 속 에서 데카르트는 이 가정을 체계적 원칙의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연 장되어 있는 실체 res extensa〉라는 이름 아래 외적 사실성은 전적으로 사유의 내면세계와 분리되었고, 더 나아가 수학적 및 역학적 분석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족적인 영역이 건설되었다. <객관 Objekt>의 이념 자체는 이원론적인 정당화를 통해서 변화하였다. 이 과정과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이제 객관을 인식의 지각하는 양태에 적합한 것으로서 인정하는 인식론적인 독단의 풍토였다. 다시 말해서, 주로 시각 Sehen을 모범으로 하는 외적 인식에 적합한 것으로 말이다. 그 결과 <객관성>은 본질적으로 외적 감각자료들을 그들의 연장적인 속성에 따라 탐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생명 과 생명 사이의 대화 또는 신체적으로 애쓰는 가운데서 경험하는 사물의 저항과 사물과의 충돌과 같은, 현실에 관계하는 데 있어서의 그 밖의 다른 양태들은 정확한 학문의 이상향 뒷전으로 물러서고, 같은 축에 끼지도 못하게 되었다. 거리를 취하고 대상화하는 지각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풍토는, 주관과 객관을 서로 다른 두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원론적인 분열과 한데 어울려서, 결국 외부세계를 설명하는 데 내적 경험을 전이시키는 모든 이론을 엄격하게 금지시컸다. 비록 나중에는 유물론적인 심리학에서처럼 역방향으로 경계선을 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엄격한 정도로 금지시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것은 금지사항이었다. 인간동형론은 전적으로 그리고 동물동형론까지도 일반적으로 학적인 배반으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이원론의 판도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철학(즉 자연과학)>을 오염시키는 원천임을 보게 되며, 이원론이 목적적 설명을 반박하는 내용은 그것이 인간동형론적이라는 사실 때문임을 보게 된다.
2-2 인간동형론에 대한 경멸과 이에 따른 인식론적 귀결
목적론에 대한 싸움은 서양의 학문만큼이나 역사가 깊은 인간동형론에 대한 싸움의 한 단계이다. 신화적으로 의인화하는 것을 이오니아 사람들이 거부함과 동시에 시작되는 비판은, 이제 학적인 이원론의 추진력에 의존해서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주의 Finalismus의 매우 섬세한 형태의 오류를 발견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목적론을 비판하는 논증은, 일단 가동된 다음에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러한 논증은 작용인들까지도, 이 작용인을 위해서 최종원인들이 추방당하게 되었는데 어쨌든, 무너뜨렸다. 흄 이후로 힘의 관념과 필연적인 연결의 관념은 사물이 증거해주는 것과는 다른 어떤 생소한 것이 되었고, 저 혼자서 일하는 정신의 내적 인상들로부터 솟아나는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념들을 사물들이 제시하는 증거물에서 읽어낸다는 것은 주관적인 인간의 자기 경험의 속성을 자연 속으로 투사시키는 것과 유사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은 객관적 학문의 주목을 받아야 한다고 설명되었는데도 말이다. 또한 우리가 이런 관념들의 원천에 대한 흄의 특별한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힘과 원인의 개념들은 경험의 유형에서 솟아난다는 사실이 진리로서 남는다. 이 경험의 유형은 (로크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감각의 인상들>에 덧붙여지는 <반성의 인상들>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주체의 인식은 실제로 대상경험 자체에 통합되어 있는 부분 내용으로서 촉발됨이라는 주체 자신의 고유한 내적 방식(이를테면 큰육 긴장과 같이 자신의 신체가 매개되는 지각처럼)을 위하여 그 개념들을 사용한다. 바로 이 <주관적인> 계기 때문에, 이 개념들이 단순한 대상의 영역으로 슬그머니 투입되는 사태가 인간동형론적인 전이라는 일반적인 혹평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학문은 철학이 주도해 나가는 회의주의를 따라갔다. 물리학의 이론은, 현실성을 단순히 측정하는 형태로 제시하는 방법을 통해서는 증명될 수도 없고 또한 인간동형론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힘을 설명하는 개념과 작별하였고, 물리학의 요청사항을 좌표의 공간과 시간의 체계 속에서 위치의 연속을 기록하고 그런 과정들의 양적 규칙성들을 <자연법칙들>로 구성하는 작업으로 제한하였다. 그러므로 설명하는 일은 단지 사태를 기술하는 과업을 위해서 포기되었다. 사태의 기술은, 연장되어 있는 연속체 속에 있는 위치와 위치변경이 양적 가치로 환산되고, 이 양적 가치가 그 요소들 자체를 위해 투입됨으로써, 순수하게 수학적인 유형의 사태 기술이 되어 버렸다. 움직이는 힘을 찾은 과업은 실체적인 형상을 찾은 일과 마찬가지로 포기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서 인과적 설명 Kausalerklärung은 목적적 설명 Finalerk- lärung을 뒤따라 잡동사니로 가득찬 방으로 사라졌다. 실제로 설명의 이념 자체가 인식론에서 일어난 반인간동형론적 운동의 성취와 더불어 사라져 버렸다. 86
그러므로 이러한 반인간동형론적 운동에서는 의미심상한 변증법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자연을 설명할 수 있는 참된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맨먼저 신화적인 인격화가 그리고 나중에는 비인격적 인 unpersönlich 목적론이 제거되었다. 작용인의 개념을 따르는 이 설명은 경멸당하고 있던 정령론의 잔재물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었다. 정령론의 잔재물은 힘과 원인에 대한 표상을 세계에 대한 상(像)안 으로 보편적으로 내삽(內插, Interpolation)해 가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내삽을 통해서 인간적으로 힘들게 애쓰는 경험과 운동경험의 요소들은 관찰된 자연의 사건에서 엿보이는 연결 조직으로서 투사되었다. 정령론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학문은 과거에 자신이 합리적인 설명을 하기 위해서 정령론을 부분적으로 억압하는 수단을 써서 정령론에서 빼앗은 그 바탕을 이제 자신의 발밑에서 제거해 버렸다. 고대의 정령론에서 시작해서 이원론을 거쳐서 후기 이원론적인 유물론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은 자신의 대상을 이해한다는 인식의 관념을 불가지론적 agnostisch으로 포기하는 지점에서 끝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일이 하필이면 그 순간, 즉 이원론이 후퇴하고 나서 하나의 엄격하게 탈생명력화된 유형의 자연을 향한 형이상학적인 강요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순간에 일어난 것이다.
2-3 후기 이원론적인 새로운 문제 제기
목적론의 문제가 갖고 있는 의미를 마지막으로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여러 가지 <인간동형론적> 특성들과 관련하여 어떻게 그 사실, 즉 외부세계의 현실성으로부터 최종원인들을 아프리오리하게 배제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이원론적인 형이상학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자명한가 하는 것이다. 이원론적 형이상학은 그것들을 배제시킬 때 동시에 배제된 것들의 진리를 자기 자신의 고향 땅에 간직하고 있었다. 목적주의는 자신의 정당한 자리를 어느 곳에선 가, 즉 자신의 이념을 추론해 올 수 있는 어떤 곳에, 차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원론적인 분열 속에서는 인간의 본성 또는 생명의 본성은, 이들 본성이야말로 그 정당한 자리를 마련해 주는 본성들인데 어쟀든, 아직 부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다만 연장되어 있는 사물의 본질에서 분리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원론은 생명체적 경험과 관련하여 정당화될 수 없는 이론으로 드러났다. 상황주의와 심리물리적 병행주의는 학문의 새로운 존재론이 자신의 영역에서 폐쇄된 조화를 유지하는 것을 구제하기 위한 절망적인 시도었다. 이것이 실패하자 학적인 유물론은 그 영역을 불편하게 혼자서 독점하였고, 이원론적인 알리바이의 보호를 받지도 못한 채, 과거에 사업의 분화가 유물론에게 해체시켜 주었던 그 과제를 떠맡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원론이 퇴장하고 난 후, 사유하는 실체가 자신의 생명체적 바탕 속에서 스스로 통합되어 있는 자연의 일부분이자 자연의 산물이 되면, 이때 에는 <인간의 본성>에 최종원인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고 한 베이컨의 주장이 효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현대적 일원론의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구성요소인 발전이론 Entwicklungslehre은, <자연>과 <인간>을 대비시키는 모든 논증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경계선의 마지막 흔적을 결국 지워 버리고 만다. 88
그래서 일원론적인 존재론 속에서는 인간동형론에 대한 공격의 정당성이 의문스러운 것이 되고, 원칙적으로 정당성의 여부는 다시금 미해결의 문제로 남는다. 정당성의 여부는 두 일원론적 양자택일 가 능성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은 선택에 부딪히는 듯이 보인다. 물리적 질서의 한 부분, 다시 말해서 인간 속의 목적을 지향하는 내면성의 현전을 그 확장된 현실성의 본성(즉 내면성이 산출한 본성)을 위한 타당한 증거로서 이해하고, 내면성이 자기 자신 속에서 드러내는 것을 보편적인 명중의 일부분으로 가정하는 것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역학적인 질료의 규칙들을 피상적으로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현상의 집단의 중심부까지 확장시키고, <인간의 본성>으로부터(즉 여기에 의존해서 목적론이 <우주의 본성>을 오염시켰던 그 곳) 목적론마저도 추방 시켜 버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 자신을 소외시키고 생명의 자기 경험의 진상을 말살시키는 것을 선택하는 것 이다.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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