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식물 페미니즘

매우 퀴어한 자연: 퀴어 생태학, 정원, 그리고 다종적 실천

백_일홍 2024. 7. 13. 15:09

매우 퀴어한 자연: 퀴어 생태학, 정원, 그리고 다종적 실천
A Very Queer Nature: On Queer Ecologies, Gardens, and Flourishing Multispecies Practices


2018. 7.10

케이트 샌딜랜즈 인터뷰


퀴어 생태학은 퀴어성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도전하는 분야로서, 퀴어성과 자연 세계의 교차와 분절에 관해 조사합니다. 케이트 샌딜랜즈 교수는 이 분야를 선도하는 학자입니다. 그녀는 게이, 레즈비언 및 퀴어 정치가 어떻게 환경 문제로부터 배울 수 있는지, 동시에 퀴어 연구가 어떻게 현재 성장하고 있는 환경 인문학에 중요하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지를 탐구해왔습니다. 2010년에 샌딜랜즈는 이 분야를 정의하는 저서인 <퀴어 생태학>을 Bruce Erickson과 함께 편저했습니다. SEI 연구원 Astrida Neimanis는 퀴어 생태학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방식에 대해 샌딜랜즈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Astrida Neimanis: 퀴어 생태학이 연구 분야로서 어떻게 발전했는지요?

케이트 샌딜랜즈: "퀴어 생태학"이라는 개념은 매우 생성적이고, 때로는 놀라운 방식으로 그렇습니다! 이 분야에서 흥미로운 작업을 수행한 학자, 예술가 및 활동가 모두를 말할 수 없지만 가장 흥미로운 방향 중 하나는 생태공동체의 퀴어링한 형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AN: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나요?

CS: 인간은 종종 미래를 "우리 아이들에게 남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상속, 세대, 소유적 개인주의, 그리고 무엇(퀴어 이론가 Lee Edelman이 "생식 미래주의"라고 부른 것)에 관한 흔한 이해의 지지를 받고서, 미래가 의미하는 바를 아주 좁게 해석합니다. 반면 퀴어 생태학은 대안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이 자랄 수 있는 건강한 토양을 남겨주기 위해 현재에 다종적 관계가 번영할 수 있는 토양을 기르는 문제라고 봅니다. 


AN: 이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종을 위한 미래를 지금 당장 육성한다는 생각인가요? 그렇다면 이는 퀴어 생태학적 사고에서 새로운 발전이 아닐까요?

CS:이러한 아이디어는 정확히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꽤 오랫동안 그렇게 말해왔어요! 하지만 그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현장의 퀴어 정치와 공명합니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핵가족 형성이라는 동질 규범적 전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동성결혼은 전통적인 가족 생활과 권력과 친족의 연관된 형태를 따를 경우에만 허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형태가 소비주의, 석유자본주의, 소유주의와 연결되는 경우에만 허용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퀴어 생태학 정치는 보다 관대하고 질감 있는 방식으로 사람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사는 모든 존재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퀴어 생태 정치는 더 넓은 생태 공동체에서 즐거움과 양식을 찾고 발견합니다. 이 생태 공동체에서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사려깊게 갚픔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습니다.  

물론, 퀴어 생태학은 또한 우리가 성별, 욕망, 에로틱한 표현의 다양한 우주와 보다 복잡한 방식으로 공동체 구성원과 경험하는 감정적 연결 형태를 보고(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AN: 최근 이 분야에서 당신의 작업 대부분은 원예gardening에 관한 것입니다. 원예가 어떻게 현대에 적합한 은유이자 실천이 되는 건가요? 


CS:원예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원예는 다종 공동체의 퀴어, 페미니스트 형태를 위한 열망적 가능성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타협된 실천입니다.

정원은 한편에서, 장식용 정원과 식량 생산용 정원 모두 식물의 지속인 식민지적, 세계적 무역에서 초점이 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농업 및 기타 상업적 용도를 위해서뿐 아니라) 개인 전시 및 소유를 위한 이국적인 식물종의 "탐사bioprospecting" 은 유럽의 탐험과 정복, 대서양 노예 무역와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또한 생물학 지식을 체계화하고 관리하려는 의도에서 현대 생명 과학의 발전을 수반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현대 생물정치(Sylvia Wynter가 "Man II"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식물 무역은 물론 이것보다 훨씬 오래전 일이죠. 식물 이동은 여러 제국의 핵심이었습니다.

또 다른 수준에서는 현재 사람들이 번성하기를 원하지 않는 곳(일부에서는 "침습적" 외래종이라고 부름)에서 번성하고 있는 많은 이국적인 종들은 정원에서 탈출한 식물들입니다.  식물이 우리가 그들을 위해 지정한 장소에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식물들은 다른 의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제가 현대의 생물정치(그리고 대문자 인간의 생각)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실, Michael Pollan이 지적했듯이, 우리가 식물 욕망의 세계화를 위한 통로 역할을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가 아니라요. 

훨씬 작은 규모에서 정원은 상호성이 배양되는 장기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특정한 장소에서 식물, 토양, 곤충, 날씨, 동물 간의 변화하는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을 통해 정말 복잡하고 회복력 있는 공동체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AN: 정원사로서의 당신의 경험이 기후 변화와 퀴어 생태 공동체에 대한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CS:나는 특정한 방식으로 기후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집 뒷마당의 식물을 돌보는 사람이기 때문에요. 식물이 잘 살도록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지만, 또한 이 다종 공동체안에서의 내 상황에서 다양한 종이 공존하는 도시라는 더 넓은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AN: 원예가 반드시 당신을 더 나은 시민으로 만들까요? 당신이 지원하고 싶은 생태 공동체는 무엇입니까?

CS : 물론 정원은 언제나 상호 교환과 정원사의 세심한 주의의 장소인 것은 아닙니다. 심하게 교배된 페튜니아의 깔끔하게 심은 곳은(나는 그것을 정원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말해서 통제에 대한 생물공학적 환상 속에서 상호성을 잊어버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잠재력은 항상 거기에 있습니다. 토양안에, 우리와 관계를 맺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식물이 엄청난 사나움 안에. 
 


AN: 당신은 또한 페미니스트 환경 인문학의 핵심 인물이자 멘토였습니다. 원예와 퀴어성과 페미니즘간이 연결에 관해서 어떻게 보시는지요?

CS:아마도 퀴어 또는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원이 이 모든 복잡한 권력과 정치 관계의 와중에서 다종 공동체를 실천(연습)하는 장소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푸코가 정원을 이질공간으로 간주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정원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부분이며, 세계의 전체입니다.” 정원은 예술과 자연, 통제와 저항, 유토피아와 디스토티아, 전체와 부분, 이 모든 것이 지속적이고 즉흥적인 춤을 추는 작은 세계입니다. 이 속에서 훌륭한 정원사가 되기 위해 나는 항상 내가 안무를 주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원글 출처:

https://www.academia.edu/49663781/A_Very_Queer_Nature_On_Queer_Ecologies_Gardens_and_Flourishing_Multispecies_Practi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