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목격자
모든 감각을, (나를 넘어선 모든 것 대신 오로지 내게만 주의를 집중시키는) 사방의 벽을 무너뜨리고 감각을 깨우기에는 빗속에서 서 있는 것만 한 것이 없다.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젖은 세상에서 혼자만 마른 채인 고독을 견딜 수 없었다. 이곳 우림에서, 나는 수동적이고 보호받는 비의 방관자에 머물고 싶지 않다. 폭우의 일부가 되어, 발밑에서 꼼지락거 리는 시커먼 부식토와 함께 푹 젖고 싶다. 북슬북슬한 개잎갈나무처럼 빗속에 서서 껍질속으로 스며드는 물을 느끼고 싶다. 우리를 가르는 장벽을 물이 녹여줬으면 좋겠다. 개잎갈나무가 느끼는 것을 느끼고 개잎갈나무가 아는 것을 알고 싶다.432
객관적 실재로서의 시간은 내게 별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일어나는 일이다. 분과 해가, 우리가 만든 기준이, 하루살이와 개잎갈나무에도 같은 의미일까? 이날 아침 우듬지에 안개를 두른 나무들에게 200살은 청년기다. 강에게는 눈 깜박할 시간이고 바위에게는 아예 아무것도 아니다. 바위와 강, 그리고 바로 이 나무들은 우리가 잘 보살핀다면 다음 200년 동안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저 줄무늬다람쥐와 햇빛 기둥 속에 떠 있는 하루살이 구름은 우리는, 그때면 이미 떠나고 없을 것이다.
과거에, 또한 상상된 미래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순간에서 포착되는 의미다. 세상의 모든 시간을 가졌다면 어디론가 가는 일이 아니라 지금 있는 곳에 그대로 머무르는 일에 그 시간을 쓸 수 있다. 그래 서 나는 기지개를 켜고 눈을 감고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434

맹물은 작고 급한 방울을 만든다. 떠나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한다. 하지만 오리나무 잎에서 나온 물방울은 크고 무겁다. 한참 매달려 있 은 뒤에야 중력에 끌려 떨어진다. 깨달음의 순간에 입가에 미소가 퍼 진다. 물방울의 종류는 물과 식물의 관계에 따라 정말로 달랐다. 타닌이 풍부한 오리나무 물이 물방울의 크기를 증가시킨다면 이끼의 기다란 커튼에서 스며 나오는 물도 타닌을 머금어 눈앞의 물방울처 럼 크고 튼튼해지지 않을까? 내가 숲에서 배운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무작위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은 온갖 의미로 충만하며 온갖 관계로 다채롭다. 437
비에서는 '슈루룩', 솔송나무에서는 '핏핏핏', 단풍나무에서는 '첨병, 마지막으로 오리나무에서는 '퐁' 소리가 난다. 오리나무 물방울은 느린 음악을 연주한다. 고운 빗물이 오리나무 잎의 우툴두툴한 표면을 가로지르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방울은 단풍나무 만큼 크지 않아서 첨벙 떨어지지 않고 '퐁' 하고 물결을 일으키며 동 심원들을 내보낸다. 눈을 감고 비의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인다.
웅덩이 거울의 표면에는 속도와 음색이 제각각인 물방울들의 특징이 아로새겨진다. 물방울 하나하나는 이끼를 만나든, 단풍나무 젓나무 껍질이나 내 머리카락을 만나든 생명과의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듯하다. 우리는 비를 마치 그저 하나의 사물인 것처럼, 마치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그냥 비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끼가, 단풍나무가 우리보다 비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 비라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제각가가 나름의 이야기를 가진 빗방울들만 있을 뿐.
빗소리를 들으면 시간이 사라진다. 사건과 사건의 간격으로 시간을 측정한다면 오리나무의 적하 시간은 단풍나무의 적하 시간과 다르다. 이 숲은 저마다 다른 시간의 무늬로 짜여 있다. 웅덩이 표면이 저마다 다른 비의 무늬로 짜여 있듯. 젓나무 바늘잎은 비의 고주 파음을 내며 떨어지고 가지는 커다란 물방울처럼 '첨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나무는 드물게 들리는 와르르 소리와 함께 쓰러진다. 드문 것은 우리의 시간 척도가 강의 척도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을 마치 그저 하나의 사물인 것처럼, 마치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그냥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라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제각 각 나름의 이야기를 가진 순간들만 있을 뿐. 439
윈디고 발자국

윈디고는 우리 아니시나베 부족의 전설 속 괴물로, 북부 숲의 춥디추운 밤에 들려주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악당이다.
겨울 기근에 대한 상존하는 두려움은 윈디고의 싸늘한 허기와 쩍 벌린 입으로 표현된다. 윈디고의 비명이 실려 오면서 이 괴물의 이야기는 식인 터부를 강화했다. 굶주림과 고립으로 인한 광기가 겨울날 오두막 구성에 도사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역겨운 충동에 굴복하여 뻐다귀를 물어뜯는 윈디고가 되어 평생 해매고 다니는 신세가 될터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윈디고는 결코 영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원토록 욕망의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한다. 그 고통의 본질은 영영 채워지지 않은 허기다.
부족의 집단적 공포와 심원한 가치는 그들이 빚어내는 괴물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우리의 두려움과 실패로부터 탄생한 윈디고는 자신의 생존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우리 내면의 심리를 일컫는 이름이다. 446
윈디고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음의 되먹임 고리를 불어넣으려는 시도였다. 전통적 양육법은 수양을 목표로 삼았으며 탐욕이라는 은밀한 병균에 저항력을 길러주고자 했다. 옛 가르침들은 모든 사람에게 윈디고적 본성이 있으며 - 이 괴물이 이야기 속에서 창조된 것은 이 때문이다 - 우리가 스스로의 탐욕스러운 성격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간파했다. 스튜어트 킹 같은 아니시나베 연장자들이 우리에게 '스스로를 이해하려면 늘 두 얼굴-삶의 밝은 측면과 어두운 측면을 염두에 두라'라고 상기시킨 것은 이 때문이다. 어둠을 직시하고 그 힘을 인정하되 양분을 주지는 말 것. 447
어디에나 있다. 윈디고는 오논다가호의 산업 슬러지(산업폐기물의 일종으로 물속의 부유물이 침전하여 진흙상태로 된 것.옮긴이)를 밟아낸다. 야만적으로 개별한 오리건 코스트레인지의 비탈에서도, 이곳에서는 흙이 강으로 쏟아져 내린다. 탄광이 산꼭대기를 파헤치는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기름 덮인 발자국이 즐비한 멕시코만 해변에서도 윈디고를 볼 수 있다 산업적으로 재배하는 콩밭, 르완다의 다이아몬드 광산. 옷으로 꽉 채운 옷장. 모두 윈디고 발자국이다. 만족을 모르는 소비의 흔적들. 너무 많은 사람이 윈디고에게 물렸다. 상점가를 걷는 윈디고, 여러분의 농장을 주거지로 개발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윈디고,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윈디고.
모두가 공모자다. 우리는 '시장'이 가치의 기준을 정하도록 내버려두었으며 이렇게 재정의된 공공선은 판매자를 부유하게 하고 영혼과 대지를 빈곤하게 하는 방탕한 생활 양식에 의존한다. 450
맨해튼 거리를 걷던 생각이 난다. 호화로운 주택에서 흘러나온 따스한 불빛에 물든 보도에서 한 남자가 저녁거리를 찾아 쓰레기를 뒤지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사유 재산의 강박 때문에 외로운 구석으로 추방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답고 세상에 하나뿐인 삶을 더 많은 돈을 버는 데, 일시적인 위안은 되지만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하는 물건을 더 많이 사들이는 데 쓰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추방까지도 달게 받아들였다. 그것이 윈디고의 방식이다. 우리를 속여 소유가 우리의 허기를 채워줄 거라 믿도록 하는 것, 우리가 정작 갈망하는 것은 속함인데. 450
'2022년 > 향모를 땋으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향모를 땋으며(16)_부수적 피해~윈디고에게 이기다 (4) | 2024.07.25 |
---|---|
향모를 땋으며(15)_성스러운 것과 슈퍼펀드.옥수수 사람, 빛 사람 (0) | 2024.07.25 |
향모를 땋으며(13)_음빌리카리아: 세계의 배꼽 (0) | 2024.07.25 |
향모를 땋으며(12)_캐스케이드 헤드의 불 (0) | 2024.07.25 |
향모를 땋으며(11)_은종소리.둘러앉기 (0) | 2024.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