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향모를 땋으며

향모를 땋으며(15)_성스러운 것과 슈퍼펀드.옥수수 사람, 빛 사람

백_일홍 2024. 7. 25. 15:02

성스러운 것과 슈퍼펀드

Onondaga Lake

 

염류, 온콜라이트, 폐기물은 뿌리 달린 수초의 생장을 저해한다. 호수가 산소를 얻으려면 침수 식물이 광합성으로 산소를 만들어내 야 한다. 식물이 없으면 오논다가호 밑바닥은 산소가 부족해지며, 바닥층이 식물로 일렁이지 않으면 물고기, 개구리, 곤충, 왜가리의 먹이 사슬 전체가 서식처를 찾지 못한다. 뿌리 달린 수초가 지리멸렬한 반면에 부유성 조류는 오논다가호에서 번성한다. 도시 하수에서 수 십 년째 방출된 다량의 질소와 인이 호수에 영양을 공급하여 조류의 생장을 촉진했기 때문이다. 조류는 수면을 덮었다가 죽어서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썩으면서 그나마 물속에 남아 있던 산소를 고갈시키는 탓에 호수에서는 더운 여름날 호안에 쓸려 온 죽은 물고기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살아남는 물고기도 먹을 수는 없다. 462

 

물은 타도다호의 머리카락에 엉긴 뱀처럼 무수한 상처를 입었다. 빗질하여 떼어내기 전에 우선 이 상처들을 하나하나 명명해야 한다. 옛 오논다가 영토는 펜실베이니아 경계선에서 북쪽으로 캐나다에 이른다. 울창한 숲, 드넓은 옥수수밭, 맑은 호수와 강의 모자이크는 수 백년간 원주민을 먹여 살렸다. 현재 시러큐스 지역과 성스러운 오논다가호도 본디 그들의 영토였다. 이 땅에 대한 오논다가족의 권리는 두 주권국인 오논다가 네이션과 미국 정부의 조약으로 보장되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물만큼 책임에 충실하지 못했다.

독립전쟁 당시에 조지 워싱턴이 오는다가족을 절멸시키라고 연방 군대에 명령하자, 수만 명에 이르던 네이션 인구는 1년 만에 몇백 명으로 줄었다. 그 뒤로 조약은 하나도 남김없이 깨졌다. 뉴욕주에서 땅을 불법적으로 빼앗으면서 오논다가 원주민의 영토는 1700헥타르의 보호구역으로 쪼그라들었다. 오늘날 오논다가 네이션 영토는 솔베이 폐기물층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오논다가 문화에 대한 공격도 끊이지 않았다. 부모들은 자녀를 인디언 모집책에게서 숨기려 애썼지만 아이들은 붙들려 칼라일 인디언 학교 같은 기숙 학교로 보내졌다. 위대한 평화의 법을 정한 언어는 금지되었다. 인디언 공동체는 모계 사회로, 남녀가 평등했는데 이곳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그들의 삶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롱하우스 추수 감사 예식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사람들은 땅이 황폐화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고통을 겪었으나 결코 돌봄의 책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땅을 존중하는 예식을 중단하지 않았으며 땅과의 연결을 끊지 않았다. 오논다가 족은 아직도 위대한 법의 수칙을 지키며 살고 있으며, 어머니 대지님에게 받은 선물의 대가로 인간에게는 인간 아닌 사람을 보살피고 땅을 돌봐야 할 책임이 있다고 여전히 믿는다. 하지만 조상의 땅에 대한 소유권이 없었기에 손발이 묶인 신세였다. 그래서 그들은 평화를 이루는 이의 발자국을 이방인이 묻어버리는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보호해야 하는 식물, 동물, 물이 점차 줄었으 나 땅과의 언약은 결코 깨지지 않았다. 호수 위쪽의 샘처럼, 사람들은 하류에서 어떤 운명을 맞이하든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했다. 땅은 사람들에게 감사할 이유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땅에 감사했다. 466

 

하지만 오논다가 네이션의 방법은 달랐다. 그들의 주장은 미국법에 의거한 것이었지만 그 도덕적 힘은 평화와 자연과 미래 세대를 대표하여 행동하라는 위대한 법의 명령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소송 을 '토지 환수 운동'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땅은 소유물이 아니라 선물이요 생명을 지탱하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이다. 타도다호 시드니 Tadodaho Sidney Hill에 따르면 오논다가 네이션은 결코 사람들을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내쫓으려 들지 않았다. 오논다가 사람들은 보금자리를 잃는 고통을 잘 알기에 이웃들에게 이런 고통을 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송은 '토지 권리 행동'으로 명명되었다. 이들의 행동은 인디언 법에 선례가 없는 선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오논다가 국민은 자신과 시간의 여명 이후로 오논다가 네이션의 땅이던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나머지 모든 사람들 사이에 치유를 가져다주고자 한다. 네이션과 그 국민은 땅과의 독특한 영적, 문화적, 역사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는 위대한 평화의 법인 가야나샤고와로 구체화 된다. 이 관계는 소유권, 점유권, 기타 법적 권리를 비롯한 연방 법과 주법의 관심사를 훌쩍 뛰어넘는다. 오논다가 국민은 땅과 하나이며 스스로를 땅의 청지기로 여긴다. 이 땅을 치유하고 보호하고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네이션 지도자들의 의무다. 오는다가 네이션이 자국민을 대표하여 이 행동을 시작하는 것은 화해 과정을 앞당기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이에게 항구적 정의와 평화, 존중을 가져다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다."

오논다가 토지 권리 행동은 이웃을 내쫓거나 카지노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런 조치가 공동체의 삶을 파괴한다고 여겼다. 자신의 보금자리에 대한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것 이었다. 그들의 취지는 땅의 복원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법적 지위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권리가 있어야만 광산이 복구되고 오논다가호가 정화되도록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468

 

법적 분쟁과 기술적 논쟁, 환경 모형의 틈바구니에서 중요한 것은 임무의 성스러운 성격을 놓치지 않는 것, 더없이 세속화된 이 호수가 다시금 물의 일에 걸맞은 모습을 찾도록 하는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이의 정신은 여전히 이 호숫가를 따라 걷고 있다. 법적 행동은 땅에 '대한' 권리뿐 아니라 땅'의' 권리, 땅이 온전하고 건강할 권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목표를 명확하게 정한 것은 씨족 어머니Clan Mother 오드리 셰넌도Mushrey Shenandoah 였다. 카지노도, 돈도, 복수도 안된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 행동으로 추구하는 것은 정의입니다. 그것은 물을 위한 정의이며 서식처를 빼앗긴 네발짐승과 날짐승을 위한 정의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는 단지 자신을 위한 정의가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를 위한 정의입니다."

Audrey Shenandoah


2010년 봄에 연방 법원은 오논다가 네이션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렸다. 소송은 기각되었다. 471

 

솔베이 폐기물층. 공포를 체험하는 장소로 이보다 안성맞춤인 곳이 있을까.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유령의 집이 아니라 그 밑에 깔린 것들이다. 20미터 두께의 산업 폐기물 아래 묻힌 땅에서 독소 가 배어나와 오논다가의 성스러운 물과 50만 명의 보금자리에 흘러 들었다. 그로 인한 죽음은 도끼를 내리치는 것만큼 빠르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에 못지않게 끔찍하다. 살인범의 얼굴은 숨겨져 있지만 이 름은 알려져 있다. 솔베이프로세스사, 얼라이드케미컬앤드다이, 얼라 이드케미컬, 얼라이드시그널, 그리고 지금의 하니웰에 이르기까지.

내게 살인 행위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만든, 호수를 독성 물질로 채워도 괜찮다는 사고방식이다. 그 회사들이 뭐라고 불리든 그 책상들 뒤에 앉아 있는 것은 개인이었다. 그들은 아들을 낚시에 데려가는 아버지였다. 호수를 슬러지로 메우는 결정을 내린 것은 그들이었다. 이 사태를 야기한 것은 얼굴 없는 기업이 아니라 인간이다. 476

철학자 조애너 메이시Joanna Macy는 우리가 환경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현실을 망각한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재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연구하는 심리학자 R. J. 클리프턴R.J Clifton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재난에 대한 자연적 반응을 억압하는 것은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질병의 일부다. 이 반응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데서 위험한 분열이 생긴다. 삶의 토대에 직관적이고 정서적이고 생물학적으로 뿌리 내리지 못하고, 이와 동떨어진 정신적 계산에 몰두 한다. 이런 분열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사멸이 준비되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476


절망은 우리를 마비시킨다. 의욕을 앗아 간다. 우리 자신의 힘과 대지의 힘을 보지 못하게 한다. 환경에 대한 절망은 오논다가호 바닥의 메틸수은 못지않은 독성이 있다. 하지만 땅이 '도와줘요'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절망에 굴복할 수 있겠는가? 복원은 효과적인 절망 해독제다. 복원은 인간을 넘어선 세상과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관계를 다시 맺어 물질적 책임과 영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 수단이 된다. 슬퍼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나쁜 일을 그만두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479

물론 땅의 복원에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는 '땅'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땅이 부동산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때의 복원은 땅이 자급자족 경제의 원천이자 영적 보금자리라고 생각할 때의 복원과 사뭇 다르다. 쳔연자원을 생산하려고 땅을 복원하는 것은 문화적 정체성으로서 땅을 재생하는 것과 같지 않다. 우리는 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480

이들의 의도는 식물을 수질 오염의 공학적 해결책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해결책은 땅이 기계이고 인간이 운전자라는 기계적 자연관의 핵심을 이룬다. 이 환원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틀에서는 공학적 해결책을 추진하는 것이 말이 된다. 하지만 토박이 세계관의 입장에 선다면 어떻게 될까? 생태계는 기계가 아니라 주권적 존재들의 공동체다. 대상이 아니라 주체다. 만일 이 존재들이 운전자라면 어떻게 될까? 484

개미가 구명 주위에 쌓은 뭉글뭉글한 흙은 눈처럼 새하얗다. 개미들은 알갱이 하나하나를 작은 구기에 물고서 아래쪽 폐기물을 실어 올리고 씨앗과 잎 조각들을 땅속으로 실어 내린다.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풀은 씨앗으로 개미를 먹이고 개미는 흙으로 풀을 먹인다. 둘은 서로에게 생명을 전한다. 풀과 개미는 자신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한 생명이 모두의 생명에 의존함을 안다. 잎 하나하나, 뿌리 하나하나를 통해 나무와 베리와 풀은 힘을 합친다. 이윽고 새와 사슴과 벌레도 합류한다. 그렇게 세상이 만들어진다. 486

천천히 켜지는 잡초 군락은 복원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영양소 순환, 생물 다양성, 토양 형성 같은 생태계 서비스를 아주 천천히 만들어내기 시작함으로써 생태계의 구조와 기능을 발전시키고 있다. 물론 자연의 유일한 목표는 생명의 확산이다. 이에 반해 전문 복원생태학자들은 작업을 설계할 때 '표준 생태계' 즉 훼손 이전의 자생적 조건을 추구한다. 488

 

우리는 오논다가 유역을 산업화 이전 상태로 복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땅과 식물, 동물, 그리고 그들 편에 선 사람들은 작은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지만, 구조와 기능, 생태계 서비스를 궁극적으로 복원 하는 것은 대지다. 우리는 바람직한 표준 생태계가 어떤 것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일 수 있지만, 결정은 땅의 몫이다. 우리에게는 결정권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대지 와의 관계다. 자연 자체는 움직이는 표적이다. 급격한 기후 변화의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종의 구성은 달라질 수 있어도 관계는 지속된다. 이것이야말로 복원의 가장 진정한 측면이다. 우리의 작업 중에서 가장 까다롭고 보람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존중과 책임감과 호혜성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 그리고 사랑도.

 

원주민환경네트워크 Indigenous Environmental Network의 1994년 성명이 이를 잘 보여준다.

 

서구 과학과 기술은 현재 규모의 훼손에는 적절하지만 개념적 방법론적 수단으로서는 한계가 있다. 이것은 '머리와 손을 짚고 물구나무선 복원 이기 때문이다. 토착 영성이야말로 머리와 손을 인도하는 '심장'이다.. 문화적 생존은 건강한 땅과, 인간과 땅의 건강하고 미더운 관계에 달려 있다. 건강한 땅을 지켜온 전통적 돌봄의 책임은 복원을 아우르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생태 복원은 문화적·영적 복원 그리고 돌봄 및 세계 재생의 영적 책임과 불가분의 관계다.

우리가 땅의 여러 의미에 대한 이해로부터 자라난 복원 계획을 세울 수 있다면 어떨까? 생명을 먹여 살리는 존재로서의 땅. 정체성으로서의 땅, 식료품점이자 약국으로서의 땅, 우리를 조상과 연결해주 는 매개체로서의 땅, 도덕적 책무로서의 땅, 신성한 존재로서의 땅. 자아로서의 땅. 492


옥수수 사람, 빛 사람

마야의 창조 설화, 

왜 모든 재료 중에서 진흙이나 나무나 빛으로 만든 사람들이 아니라 옥수수로 만든 사람들이 대지를 물려받았을까? 500

서구 세계에 '일발'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과학은 우리로 하여금 염색체의 춤과 이끼의 잎과 머나먼 은하를 보게 해준다. 하지만 과학은 <포폴부>처럼 성스러운 렌즈일까? 과학은 우리가 세상 속의 성스러운 것을 인식하도록 해줄까, 아니면 빛을 굴절시켜 상을 흐릿하게 만들까? 물질적 세계에 초점을 맞추되 영적 세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렌즈는 나무로 만든 사람의 렌즈다. 우리가 옥수수 사람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데이터가 아니라 더 많은 지혜다. 

과학은 앎의 원천이자 저장고가 될 수 있지만, 과학적 세계관은 생태적 공감의 적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렌즈에 대해 생각할 때는 대중의 마음속에서 곧잘 동의어로 통하는 두 개념을 분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과학 행위와 그로 인한 과학적 세계관이다. 과학은 합리적 탐구를 통해 세계를 드러내는 절차다. 진짜 과학을 하는 탐구자는 인간을 넘어선 세계의 신비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경이와 창의성으로 가득한 자연과 비할 데 없이 친밀해질 수 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나 시스템의 생명을 이해하려 애쓰다 보면 겸손해지기 마련이며, 많은 과학자들에게 이것은 깊은 영적 추구다. 

이에 반해 과학적 세계관에서는 환원론적이고 유물론적인 경제적, 정치적 의제를 강화하려고 과학과 기술을 동원하는 문화적 매락에서 과학의 해석이라는 과정이 문화에 의해 이용된다. 내가 말하려는 바는 나무로 만든 사람의 파괴적 렌즈가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적 세계관의 렌즈, 지배와 통제의 환각, 앎과 책임의 분리라는 것이다. 

나는 과학의 '드러냄'에 뿌리 내리고 토박이 세계관에 기반한 이야기의 렌즈를 길잡이로 삼는 세상을 꿈꾼다. 물질과 영혼에 고루 목소리를 부여하는 이야기 말이다. 504

 

과학자들은 다른 종의 삶을 배우는 일에는 유난히 뛰어나다.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는 다른 존재의 삶, 모든 면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삶만큼, 어쩌면 더 흥미로운 삶에 내재한 가치를 전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다른 존재들에게 지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지성은 오로지 자신의 지성뿐이라고 믿는 듯하다. 과학자들에게는 기본 성분이 빠져 있다. 그것은 겸손이다. 신들은 오만함의 실험을 끝낸 뒤에 옥수수 사람에게 겸손함을 주었다. 그리고, 다른 종에게서 배우려면 겸손이 필요하다.

토착적 관점에서 인간은 종민주주의에서 다소 열등한 존재로 치부된다. 우리는 창조 세계의 동생으로 통하며, 동생답게 손위 형제들 에게서 배워야 한다. 식물은 맨 먼저 이곳에 발을 디디고 오랫동안 세상을 파악했다. 그들은 땅의 위와 아래에서 두루 살며 대지를 단단히 붙든다. 식물은 빛과 물을 가지고 식량을 만드는 법을 안다. 그들은 스스로를 먹일 뿐 아니라 나머지 모두의 생명을 지탱하기에 충분한 식량을 만들어낸다. 식물은 공동체의 나머지 구성원을 위한 공급자이며 늘 식량을 내어주는 너그러움의 미덕을 잘 보여준다. 서구 과학자들이 식물을 대상이 아니라 스승으로 보았다면 어땠을까? 그 렌즈로 이야기를 했다면 어땠을까? 505


다른 존재들에게는 인간에게 없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 하늘을 날수도 있고 밤에 볼수도 있고...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날개나 잎은 없을지 몰라도 우리 인간에게는 말이 있다. 언어는 우리의 선물이자 책임이다. 나는 글쓰기야 말로 우리가 생명 세계와 나누는 호혜적 행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말은 옛 이야기를 기억하는 말이요, 새로운 이야기-과학과 정신을 다시 합쳐 우리를 옥수수로 만든 사람으로 길러내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말이다. 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