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전환
데이비드 코튼
제4부 위대한 전환
제15장 종교와 과학, 투쟁 구도를 넘어서
거대한 대치
"엄한 아버지"의 종교
그러다 과학혁명에 의한 기계적 세계관이 우세해지면서 1660년 경 부터 유럽의 지배적인 문화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법에서 메커니즘으로의 전환은 지식과 기술의 발달에 놀라운 진전을 불러오게 될 대담한 한 걸음이었다. 어린 아이의 발달 과정에서 물리적인 메커니즘을 깨닫는 것이 성숙한 의식으로 가는 중요한 한 걸음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과학혁명은 저차원 의식의 마법적 환상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에는 영적인 토대가 있다는 개념까지도 거부했고 생명으로부터의 깊은 소외를 불러왔다. 439
진화론 전쟁
진화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20세기 이전의 이야기들에 토대를 두고 있다. 여기에는 만약 창조에 모종의 지적 작용이 관여되어 있다면, 그 지적 존재는 마술 지팡이를 휘두르는 신이나 부품들을 가지고 기계를 만들어내는 엔지니어처럼 자신의 피조물로부터 떨어져서 존재하며 따라서 창조는 외부적 존재에 의한 작용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것은 제국의 의미 이야기의 또 다른 변종이다. 443
신에 대해 떠오르는 이미지를 말해보세요
보그는 청중에게 다음과 같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신에 대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말씀해주시면 제가 당신의 정치 성향을 맞춰 보겠습니다."
서로 다른 주인을 섬기다
보그는 성경에는 신을 묘사할 때 매우 상이한 두 개의 은유가 등장하는데, 신에 대해 서로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며 인간과 신성 사이의 관계도 서로 다르게 암시한다고 설명했다. 이 두 가지 은유는 성경의 전통에 존재하는 두 개의 상반된 목소리에서 나오며 극명하게 상이한 세계관을 반영한다. 하나는 제국의 지배자 관계를 긍정하고 다른 하나 는 지구공동체의 파트너십 관계를 긍정한다.
첫 번째 은유는 왕, 군주, 아버지와 같은 익숙한 인물로 의인화함으로써 먼 거리에 있는 남성 권위자의 이미지, 그리고 신체적으로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신에게 인간은 전통적인 가정에서 아이가 아버지에게 하듯이, 혹은 백성이 왕에게 하듯이, 따지지 않는 충성과 엄격한 복종을 해야 한다. 보그는 이것을 신에 대한 군주적 모델이라고 불렀다.'
이 모델이 근대 사회에서 더 일반적이며, 교회의 문화뿐 아니라 더 폭넓은 사회의 문화도 신에 대한 군주적 모델을 중심에 두고 있다. 신을 이렇게 이해할 경우, 태초에 외부의 초자연적인 존재가 세상을 창조했고 그 존재가 설정한 창조의 질서가 바로 자연 법칙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그 다음의 논쟁은 주로 신이 태초의 창조 시점 이후에도 때때로 자신이 창조한 세상의 전개 과정에 개입하느냐 아니냐에 대해서 벌어진다. 이 모델에서, 인간은 창조의 핵심 작품이며 창조의 목적을 실행하는 존재다.
두 번째 은유는 바람, 숨, 불, 빛, 지혜, 바위 등 인간이 아닌 대상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현자, 애인, 어머니 등 인간적인 이미지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어디에나 편재해 있는 돌봄과 통합적인 영성의 이미지이고 일반적으로 2장에서 설명한 영적 의식의 세계관에 잘 부합하는 이미지다. 보그는 이것을 신에 대한 영적 모델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교 영성 지도자인 매튜 폭스는 저서 『하나의 강, 많은 샘 One River. May Walls」에서 사실상 세계의 모든 영성적 전통이 신을 이와 같은 영적 모델의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군주적 모델과 대조적으로, 영적 모델은 우리와 신의 관계가 성별의 구분이 없는 소속과 친밀성의 관계라고 시사한다. 보편적인 사랑과 공감,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보살핌을 이야기한 예수는 영적 모델의 예언자였고 "사랑을 베푸시고 공감하시는 아버지'처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울 만한 은유와 우화를 사용했다. 하지만 사랑을 배푸시고 공감하시는 아버지는 구약에 나오는 엄하고 노여워하는 제국적인 신과 극명하게 대조적이다. 445
제국의 신
예수를 구세주 그리스도로, 그리고 제국적 교회의 창시자로 보는 개념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3세기나 더 지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삼았을 때 생긴 개념이다. 이 때 이래로 그리스도교는 사랑과 공감을 가르치는 데 삶을 바친 사람의 이름으로 터무니없는 폭력과 억압에 도덕적인 정당화를 제공하면서 계속해서 제국에 복무했다. 446
휴거를 기다리며
수백만 명이 현대 생활이 일으키는 소외에서 절박하게 구원을 찾 고자 하면서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과 적(이라고 그들이 상정한 사람들)에 대한 응징의 약속에 끌리게 되었다. 기계적 메커니즘만으로 돌아 가는 세계를 상정하는 과학의 이야기처럼, 신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 역시 우리가 끊어지지 않는 영적 유대에 의해 창조의 전체(작은 일부가 아니라)와 불가분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심원한 현실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으려 하는, 제국적 의식에 사로잡힌 예언자들이 만든 것이다. 449
역사를 거쳐 대부분의 문화에서, 심원하고 신성한 깨달음과 환희를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러한 순간에 그들은 자아를 잊고 모든 존재에 불가분으로 통합된 영적 에너지와 영적 지성을 경험했다. 예수 외에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저명한 신비가들을 꼽아보면 힐 데가르드 폰 빙앤Hildegard of Bingen(1098-1179),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Francis of Assisi (1181-1226), 토머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1260년경-1327) 등이 있다. 14
신에 대한 영적 모델은 "살아있는 우주"를 시사한다. 이 우주는 생기 있는 떨림의 과정인 창조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을 존재로 현현하면서 진화하고 성장하는 "영원한 영성"이다. 이것은 양자 물리학이 물질 세계를 묘사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15 이렇게 이해하면, 신, 즉 창조의 영성이자 존재의 토대는 모든 사람, 모든 생명체, 모든 바위, 모든 입자, 모든 사고에서, 그러니까 모든 것에서 자신을 발현한다. 그러므로 거의 문자 그대로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에 삶의 모든 면에서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영성과 관계를 맺고 있다. 영성과의 관계를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관계에 충실하거나 이러한 관계를 배신하거나의 선택만 존재한다.
이러한 영적 실재는 특정한 부족이나 특정한 장소에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기에, 또 모든 곳에 존재하며, 현 시점에, 또 영원히 존재한다. 종교마다 서로 다른 은유를 사용하고 야훼, 브라마, 아트만, 알라, 도, 위대한 영혼, 신 등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모두가 동일한 영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51
살아있는 우주에 대한 과학
뉴튼 과학은 우주가 오로지 물질로 구성되어 있고 물질은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소멸해간다고 본다. 하지만 더 최신의 과학은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한 우주를 말해준다. 폭발적으로 분출된 에너지 입자들로 시작되어 점점 더 높은 수준의 복잡성, 잠재력, 가능성을 향해 상향하는 실체일 수 있는 것이다.
한때는 단단한 고체 물질이 유일한 실재라고 여겨졌지만 물리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물질은 대체로 빈 공간이다. 단단한 물체는 아주 작은 에너지 입자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형태가 주어지는 실체다. 난데없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입자들은 지속적인 흐름의 상태로 존재하면서 왔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그렇게 유동적인 상태 속에서도 입자들 사이의 관계는 충분히 일관적이어서, 왔다가 사라지는 입자들이 형성하는 물체는 명백한 형태를 유지한다. 또한 서로 짝이 되는 한쌍의 전자는 아주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딱히 드러나는 소통의 메커니 즘 없이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항성과 항성계 전체가 블랙홀로 사라져 들어가고 새로운 항성과 항성계가 탄생한다. 여기에 작용하는 과정은 어떤 단순한 물리적 메커니즘의 개념으로 묘사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것처럼 보인다.
생물학 분야에서도 최신의 연구들은 생명체를 스스로 방향을 잡아 나가는 자기주도적인 세포들의 시스템으로 묘사한다. 세포들은 지속적으로 상호 소통을 하면서 자신의 물질적 구조를 지속적으로 재구성하지만, 그러면서도 성장과 재생산의 과정에서 형태와 기능의 연속성을 매끄럽게 유지한다. 미리 정해진 작동 방식을 따르는 듯하면서도 놀라운 적응성을 발휘하면서, 또한 목적의식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유전자는 생명체가 계속해서 다음 세대로 충실하게 구조를 재생산할 수 있게 해주는 미리 결정된 정보들을 담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끝없이 생명체가 스스로를 수정하고 조정하는 과정에 관여한다.
펩타이드(아미노산이 결합한 중합체)와 같은 생화학 물질들은 기억을 저장하고 감정을 조절하면서 우리의 의식적 정신과 무의식 정신 사이에, 그리고 정신 기능과 신체 기능 사이에 이뤄지는 복잡한 연결을 매개 한다." 여기에서도 이 과정은 마법은 아니지만 순전히 물리적인 메커니즘보다는 훨씬 신비로우며 기존의 과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아마도 과학이 이것을 이해하려면 의식 적인 지성이 인간에게서만이 아니라 창조의 모든 면에서 작용하고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메커니즘 위주의 과학은 물질의 물리적 발현을 연구하는 데 매우 유용했고 유의미했다. 그리고 오늘날 가장 최신의 과학 연구는 창조의 작동에 대한 인간의 지식이 매우 제한적이던 시절에 쓰여진 고대 경전이 묘사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장대하고 신비로운 창조적 지성의 존재를 가정해야 가장 설명되는 실재에 대해 증거들을 발견하고 있다. 내게는 통합적인 신성한 지성[통합적인 영성]에 대한 이론이 우연적인 변이와 기계적인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는 주류 과학보다 실증 데이터에도 더 잘 부합하고 우리의 경험에도 더 잘 부합하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내가 통합적인 영성의 존재를 입증할 수는 없다. 과학도 그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입증하지 못했듯이 말이다. 몇몇 사려깊은 과학자들은 실재의 측면 중에 과학으로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는 것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나는 오랫동안 나의 스승이었던 스탠포드 대학의 전자공학 교수 윌리스 하먼Willis Harman에게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과학자들이 있긴 하지만, 오늘날 제도화된 표준적인 과학 은 과학 자신이 발견하고 있는 증거들의 더 깊은 함의를 여전히 부인하면서 옛 시절의 개념에 고착되어 있다. 그 개념이 형성되었던 시절에는 과학이 부패한 종교 기득권의 미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노력했고 이는 매우 합당한 노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표준적인 과학은 과학적 관찰에서 나온 "사실들"과 과학의 방법론이 의지하고 있는 "가정들"을 구분하지 못하면서, 통합적인 이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다. 이러한 실패는 모든 시대에 종교적 신비가 들이 창조의 통합적 본질이라고 인식해온 영적 지성의 존재를 부인하는, 과학 스스로가 부과한 도그마의 결과일 것이다. 위대한 종합을 추구하면서 과학과 종교가 함께 협력한다면 과학과 종교 모두에 득이 될 것이다. 454
☆ 15장 정리:
종교와 과학은 우리가 우리 자신, 우리의 도덕률, 그리고 우리 존재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 사용하는 창조 이야기의 두 원천이다. 과학혁명 이래로 종교와 과학은 현대인들에게 유일한 창조 이야기로 등극하기 위해 투쟁을 벌여왔다. 양측 각각에는 자신의 입장과 상대 쪽 입장 사이에 대조되는 면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려는 극단주의자들이 존재한다.
제국의 승자-패자 동학을 되풀이하면서 이 두 기득권의 헤게모니 싸움이 인간의 진리 추구 노력을 지배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개의 부분적인 이야기 중 하나만 선택하거나 믿음을 둘로 분열시킨 채 살아가게 되었다. 우리의 경로가 다시 생명을 향하게 할 수 있으려면, 우리 시대의 상황에 부합하며 인간이 쌓아온 지식과 지혜 전체를 존중하는 새로운 창조 이야기가 필요하다.
다행히 더 깊은 수렴을 향해 도그마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양 쪽 모두에 존재한다. 제도의 경계를 넘어서, 이들은 각자 자신이 속한 제도가 가진 부분적인 이야기에 도전하고 있으며, 인류가 현재까지 축적해온 지식과 지혜 전체를 온전히 포괄하는, 더 완전하고 사실관계에도 더 잘 부합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소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457
제16장 창조의 장대한 여정
자연의 역동적인 춤은 아주 작은 입자부터 오늘날의 가장 거대한 실체나 홀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에서 언제나 의식적이다. 이것이 살아있는 우주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가정이며, 물리학의 어느 가정에 비해서도 낯설지 않을 가정이다. 또한 이것은 내가 접해본 모든 토착 문화와 모든 신비주의 전통에서도 공용되는 가상이다. - 엘리자벳 사토리스lisabet Santouris
생명은 지구에서 분출된 풍성함의 환희이고 태양의 현상이다. 생명은 지구의 대기. 물, 태양을 세포로 바꾸는, 천문학적으로 볼 때 지극히 지역적인 변형이다...생명은 스스로 방향을 잡아나가는 선택의 역량을 갖게 된, 거침 없어진 물질이다.
- 린 마글리스Lynn Margulis, 도리언 세이건Dorion Sagan
창조는 수많은 방식으로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낸다. 고대에는 신비 가들의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했다. 우리 시대에는 물질의 비밀, 생명의 비밀, 진화해가는 우주의 비밀을 탐구하는 과학자들을 통해 이야기한다. 영적 지성의 존재를 부정하는 도그마적 과학관을 벗어버리고 보면, 최근의 과학 지식은 창조, 생명, 그리고 인간 종의 목적에 대해 점점 더 깊은 통찰을 할 수 있는 풍성한 원천을 제공해준다. 461
현대의 창조 이야기
지난 100년간 과학은 인류가 우주와 우주의 모든 경이가 펼쳐지는 창조적 과정을 파악하기 시작하는 데 중대한 공헌을 했다. 창조의 과정에서 펼쳐지는 패턴은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하고 통합적인 영적 지성의 현현임을 시사한다. 그 영적 지성은 자신의 미 실현된 가능성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실현하면서 스스로를 알아가는 장대한 여정에 관여한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는 영적 지성의 이러한 추구에서 나오는 산물이자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이 여정에서의 공동 창조자다. 모든 존재가 그러하다면 모든 생명체도 그러하고, 인간도 그러하다. 464
생명은 선택을 내릴 수 있는 힘이다
신체의 소멸 이후에 그 개인의 영혼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추측만 해볼 수 있지만, 무한한 미래를 향해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생명의 총체를 구성하는 데 개체가 기여하는 바의 측면에서 보면 그 기여가 아무리 작다 해도 각각의 생명은 모두 불멸이다. 우리가 꺾는 꽃 한 송이 한 송이, 우리가 심는 식물 하나 하나, 우리가 소통하는 생각 하나 하나가 펼쳐져가는 창조의 직물에 파장을 일으키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크든 작든, 바이오스피어와 누-스피어 noosphere(인간의 집합적인 의식 또는 인간 정신 활동의 총제를 일컫는 말로, 가톨릭 사제이자 신비가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의 표현이다)에 흔적을 남긴다. 여기에 우리가 갖게 된 "선택의 역량"이라는 선물에 수반되는 거대한 책임이 있다. 우리가 내리는 선택이 남기게 될 흔적은,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시켜가는 창조의 위대한 추구에 인간이 기여하게 되는 바를 고양시킬 수도 있고 위축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중요한 존재다. 우리의 선택이 차이를 만든다. 466
생명은 투쟁이다
그래서 인간의 성숙에 관한 존 프리엘John Friel과 린다. 프리엔Linda Friel의 저서 『어른의 영혼-The Soul of Adulthood』을 읽다가 "우리는 투쟁을 통해서만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문장을 보고 조금 거슬렀다. 처음에는 저자들이 생명에 대해 왜곡된 견해를 가지고 있나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곧 이 이야기를 마굴리스와 세이건이 말한 것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 생명은 물질에 선택의 역량을 부여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물리적 세계에서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 엔트로피의 힘에 맞서서 벌이는 투쟁에서 지속적으로 성공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 말이다. 이 생각은 또 하나의 심오한 진리로 문을 열어주었다. 생명은 생명을 부인하는 엔트로피의 힘에 맞서 선택의 자유를 위해 협업적인 투쟁을 벌여가는 과정이다. 즉 투쟁은 생명의 내재적인 조건이다. 투쟁은 신이 우리에게 내린 저주가 아니다. 신(말하자면) 자신이 벌이고 있는 투쟁이 우리를 통해 발현되는 것이다. 467
다른 말로, 생명은 고전적인 법칙들을 따르지만 그 법칙들을 사용해서 지속적인 교환과 재순환의 과정을 통해 에너지를 긍정적인 흐름으로 유지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열역학적 균형'이라는 소진 상태와 거리가 먼, 긍정적인 잠재력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렇듯, 생명이 "무엇을” 하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아마도 표준적인 과학이 의지나 의도의 가능성을 받아 들이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과학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다.
그래서, 생명이 지적이고 의지적인 행동을 할 역량이 있음을 보여주는 꽤 명백한 증거들을 받아들일 만한 용기와 겸손함을 가진 과학자들은 그들이 관찰한 바의 경이로움을 묘사하기 위해 시적인 표현에 의지했다. 마굴리스와 세이건의 책에서도 그러한 묘사를 볼 수 있다.
열역학적 시스템은 하나의 형태에서 또 하나의 형태로 에너지를 변환하면서 우주에 열을 잃는다. 살아있는 물질은 지속적으로 대 양 빛에 잠김으로써만 일반적인 물질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생명은 해체와 파괴에 직면해 영속적인 죽음 위험을 겪 는다. 생명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생명은 에너지가 부여된 물 질이고 조직화된 물질이며 영예롭고 독특한 역사를 내재하고 있 는 물질이다. 자신의 역사와 불가분인 욕구들을 갖는 물질로서, 생명은 자신을 유지하고 지속해야 한다. 떠있지 않으면 가라앉 는다. 가장 영예로운 생명체도 어쩌면 "일시적으로 식별이 가능 한 씰룩거림" 같은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수백만 년 동안 생명이 무질서로부터 멀어지는 경주를 해오면서, 자기생성적인 [스스로 방향을 잡아나가는] 존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지각을 갖추고, 미래를 지향하고, 자신이 물질을 헤쳐가면서 만드는 섬세한 파도에 해를 끼칠지 모르는 것들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숙고하는 존재가 되었다. 열역학적, 자기생 성적 관점에서 보면, 재생산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행동부터 가장 고상하고 우아한 미학적 감상까지 모두가 공통된 원천에서 나오며 궁극적으로 동일한 목적을 수행한다. 그 목적은 무질서를 향한 보편적 경향과 적대적인 요인들에 직면해서도 생명이 부여되어 있는 물질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469
숲 생태계가 주는 가르침
살아 있는 토양
생물학자들은 지구상에 많게는 3000만 종의 곤충이 있다고 추산한다. 각각은 자신의 생태적 니치를 점유하고 있으며 전체를 위해 저마다 고유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과학자들은 이들이 숲 생태계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서 수행하는 필수적인 역할, 나아가 지구상의 생명에 너무나 필수적인 모든 토양의 건강과 비옥도를 유지하는 데서 수행하는 필수적인 역할을 이제서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하고 있다. 13
이러한 새로운 지식은 생태계가 조화로운 응집을 이루면서 기능하도록 떠받쳐주는 관계들의 복잡성을 말해준다. 각 생명체는 파트너십의 패턴 속에서, 아마도 100년 이상 수천 수만 종을 거치며 벌어질 호혜의 연쇄 속에서, 전체에 기여한다.
생명이 중앙의 통제나 지휘 없이 상호 역량 강화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조직해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증거는 생명의 모든 수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숲 생태계도 그렇고, 우리의 신체도 그렇다. 477
☆ 16장 정리:
여전히 과학은 실재가 우발적 사건과 물리적 메커니즘만으로 완전히 설명 가능하다는 전제에 사로잡혀 있지만, 점점 더 높은 수준의 복잡성과 의식을 발현하며 펼쳐지는 창조의 과정은 자기발견의 장대한 여정에 관여 하는 심원한 지성의 작용을 암시한다. 생명은 물질에 선택의 역량을 줌으로써 이 여정을 가속화한다. 생명은 아래로 잡아끄는 엔트로피의 힘에 맞서 선택의 역량을 유지하기 위해 협업적인 투쟁에 관여하며, 다양하고 상호의존적인 종들의 살아있는 공동체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생명에게 파트너십은 단순한 조직 원리만이 아니다. 파트너십은 생명의 본질 자체다. 480
제17장 지구공동체의 기쁨으로 가는 길
파괴적 성향은 살아지지 못한 생명의 결과다. 생명을 억압하는 사회적, 개인적 여건은 파괴의 열정을 생산한다.
-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나 무언가를 가리키면서 그것을 향해 방향을 잡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충족시켜야 할 의미일 수도 있고 만나게 되는 사람일 수도 있다. 헌신해야 할 대의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스스로를 더 많이 내어줌으로써 자신을 더 많이 잊을수록 인간은 더 많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되고 더 많이 자신을 실현하게 된다.
- 빅터 프랭클Victor Frankd
20세기의 위대한 정신분석가 에리히 프롬과 빅터 프랭클은 나치 독일 시기 파시즘의 공포를 각각 직접 경험했고 전쟁이 끝난 뒤 인간 심리의 어느 면이 인간을 그렇게 파괴적으로 이끌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각자 책으로 출판했다. 이들이 도달한 결론은 같았다. 단순하지만 심원한 그 결론은, 소속되고 연결되고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고자 하는 충동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수단으로 그것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이 꺾이거나 좌절되면 그 충동은 부정적인 수단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483
위대한 전환의 과업에 나서려면 우리 스스로가 부과한 소외와 제국의 억압으로부터 먼저 우리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이가 자신과 공동체 둘 다의 창조적 잠재력을 높이면서 지구공동체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 일은 우리의 정신에서 시작된다. 우리 안에는 생명과 상호강화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충동이 내재되어 있으며 그 충동을 슬픔을 불러오는 방식으로 표현할 것이냐 기쁨을 불러오는 방식으로 표현할 것이냐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 484
연결을 맺도록 되어있는 존재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인지적 지능이 인간 특성의 가장 높은 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더 큰 도전은 정서적, 도덕적 지능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정서적, 도덕적 지능의 발달에는 생애 초기에 주 양육자와 어떤 관계를 경험하느냐가 특히 중요하다. 487
양육적인 육아
한 놀라운 연구에서 "남성이 결혼을 해서 성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배우자와 친밀한 유대를 맺게 되면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낮아지는 것으로 보인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폭력적인 행동과 성적인 방종을 감소시키고 긍정적인 부성父性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 면역계가 강해져서 신체적인 상처에서도 더 빠르게 회복된다는 실증근거도 있다.' 반대로, 친밀한 관계를 박탈당하면 건강이 나빠지고 이른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아동기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성인기의 토대가 된다. 488
제대로 연결을 맺지 못하면
어린 시절의 경험은 성인기에 세상을 대체로 안전하고 긍정적인 곳으로 인식하느냐 적대적이고 소외시키는 곳으로 인식하느냐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한 긍정적인 자아 개념 및 성인답게 오류를 인정하고 공감을 느끼고 다른 이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능력을 잘 발달시켜 갈 수 있는가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즉 2장에서 말한 제국적 의식에서 사회적 의식으로, 다시 그보다 더 고차원의 의식으로 넘어갈 수 있 는가에 영향을 미친다. 지속적으로 두려움과 자기의심을 경험하면 학습 장애, 경직된 믿음 체계, 도덕적 확실성에 대한 주장, 거대함에 대한 지향 등 성숙한 의식으로 가는 것을 가로막는 성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제국적 의식에 갇혀서, 이러한 개인은 자신이 타인에게 끼치는 피해가 얼마나 문제인지나 자신이 취하는 입장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자기 자신에게도 인정하지 못한다.
프랭크는 대통령이 된 성인기의 조지 W. 부시에게서 이러한 징후가 모두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사실 이는 오래 전부터 제국의 지배층에게 공통된 패턴이었으며 인류에게 끔찍한 비용을 유발해왔다. 490
살아지지 못한 생명의 고통
의미 없이 홀로 존재한다는 느낌보다 인간에게 큰 고통은 없을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그것을 "존재론적 진공"이라고 불렀다. 그는 의미에 대한 의지가 좌절되면 "권력 의지라는 대리물을 통해 보상 받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권력 의지인 돈에 대한 의지도 포함된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살아지지 못한 생명의 치명적인 외로움을 깨고 나을 수만 있다면 어떤 형태의 퇴락이건 기꺼이 감수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의미'는 창조적으로 관여하고 기여하는 이타적인 행동을 통해 경험되는 초월감의 부산물이다.
어린 시절에 세계가 자신의 존재에 반응한다는 것을 경험하면 우리는 삶에 점점 더 기쁨을 느끼면서 관여할 수 있는 생리학적, 정신적 역량을 발달시키게 된다. 우리는 삶의 가능성을 탐구하면서 경이로움을 느끼고, 이를 통해 자신과 자신의 더 큰 잠재력을 깨달으며, 창조와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에게 반응하지 않거나 나아가 적대적인 세계를 경험하면 모종의 방식으로 도피를 추구하게 되거나(이것은 절망 때문에 생의 경험으로부터 철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면 제국의 특징적인 패턴인 지배-종속의 병리적 관계로 기울게 될 것이다. 슬픔으로 가득할 도착적인 방식이기는 해도, 어쨌거나 지배-종속의 제국적 패턴은 우리가 더 큰 세계와 관계를 맺게는 해주기 때문이다.
도피적 반응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형태로 나타날 경우 "학습된 무기력'이나 여러 가지 도피성 중독의 형태로 나타난다. "있는 돈을 모조리 써가며 쇼핑하는 물질적 탐닉도 포함해, 게임, 약물, 과식, 충동적인 TV 시청과 같은 현대 사회의 문제들이 그런 사례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이 우리의 고통을 해소해주지는 않는다. 단지 우리의 의식을 더 마비시키고 우리를 생으로부터 소외시킬 뿐이다."
도피는 정치적 무관심, 만성적인 냉소, 혹은 (오늘날 공공과 민간 모두의 대규모 관료제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매사에 불평하며 구시렁거리는 태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내세에 대한 종교적 집착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순교를 갈망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나 휴거를 갈망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그런 사례일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 도피적 반응은 카타토니아나 자살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 보상 메커니즘으로 지배-종속 관계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타인을 지배하고 모욕하고 파괴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권력을 얻고자 하는, 혹은 권력을 가진 사람과 연결되고자 하는 충동이 생긴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세계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으려하는 충동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더없이 잔혹하고 가차없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도 대개는 자신의 폭력이 영웅적인 것이며 심지어는 신성한 목적에 복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례로 체계적인 인종학살과 전쟁으로 악명 높은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는 그의 군대가 폐허로 만들어놓은 나라 사람들의 삶을 자신이 더 낫게 해주고 있는 것이며 전세계의 문화를 향상시키고 있는 것 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폭력 충동을 신성화했다. 그는 자신이 더 높은 권력의 명령을 받아 평화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생각했고, 영속적인 자연의 법칙을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독일에 해를 끼치려는 자들로부터 독일 국민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5
제국적 지배자들은 5000년간 같은 대본을 내내 읊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사디스트적인 잔혹함을 악을 일소해 세계를 정화하는 영웅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지배 충동이 강해질수록 그것이 가져오는 위험도 커진다. 우리는 역사에서 광기 어린 통치자들이 미친 듯한 열정으로 도시, 민족, 문명 전체를 파괴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몹시 기뻐하는 것을 보았다. 이 책의 앞 부분에서 살펴본, 아시리아의 바빌론 파괴나 로마의 카르타고 파괴 사례에서처럼 말이다.
이러한 파괴의 행동이 정서적으로 훼손된 사람이 자기 존재를 입증하고자 하는 절박한 추구를 드러낸다고 해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광기에 휩싸여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권력자의 자리가 아니라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가야 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우리의 목적은 정신병원이나 감옥을 그러한 사람들로 채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모든 사람이 태어났을 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건강한 발달 과정을 거쳐갈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도록 현대 사회를 재구성해 병리의 원천을 제거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와 오래 전의 전통 사회가 일상을 조직하는 방식은 매우 대조적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493
보이지 않는 학습과정
전통 사회와 현대 사회에서 삶의 국면들을 넘어가는 방식은 극명 하게 대조적이다. 이는 가치와 우선순위의 커다란 차이를 반영한다. 전통 사회의 방식은 아이, 가정, 공동체의 진정한 니즈에 대한 내재적인 감각에서 나오는 자가 조직적인 과정의 산물이며, 종종 영적 의식을 달성한 현명한 연장자가 매개한다. 대조적으로, 현대 사회의 방식은 소유자 계급이 내리는 의사결정의 산물이며, 대개 제국적 의식에서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감각에 의해 매개된다. 평범한 사람들은 개인, 가정, 공동체의 모든 수준에서 자신의 선택지가 거대 기업, 거대 정부, 거대 교육 기관, 거대 노조, 거대 미디어, 거대 종교의 제도적 위계에 의해 통제되며 지배층 중 이런 저런 분파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들로만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494
자연이 선생님이다
지구의 생명은 40억 년 동안 파트너십에 의한 조직화의 비법을 터득해왔다. 지구상의 모든 살아있는 시스템에서 이러한 조직화의 특징적인 패턴이 발견되며, 여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재닌 베니 우스, 호매완, 린 마굴리스, 엘리자벳 사토리스와 같은 생물학자들이 살아있는 시스템을 연구해 알아낸 결과들에서, 우리가 만들어내야만 하는 파트너십 사회의 조직 원칙들을 도출해볼 수 있다.
협력적인 자가 조직의 원칙
생명은 세포부터 전지구적인 바이오스피어까지 모든 수준에서 개별적이고 집합적인 필요들의 균형을 유지해주는 상호작용, 자기조절, 적응의 역동적인 춤을 통해 응집을 일구고 유지하는 법을 터득해왔다. 조직화의 모든 수준에서 생명은 선택을 내리는 실체다. 각자가 자신과 전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현 사회의 제국적 문화에 의해 조건화된 나머지, 우리는 생명의 다이나믹에 기여하는 "경쟁"의 패턴을 찾는 데만 초점을 맞추느라 생명이 본질적으로 '협업"적인 실체임을 말해주는 더 깊은 내러티브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생명은 인간 대다수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 즉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터득해왔다.
린 마굴리스와 도리언 세이건에 따르면 생명의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면서 동시에 다른 생명들에도 복무할 수 있는 니치를 찾아낸 종이 궁극적으로 생존하고 번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토리스에 따르면, 생명은 제약 없는 경쟁이 유발하는 부정적인 결과들을 경험함으로써 협력을 배운다. 사토리스에 따르면, "공격적인 경쟁으로 소멸의 위험에 직면하고 그 다음에는 협업적 연대를 구성해 그 위험을 피하는 패턴을 진화에서 반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19 이 관찰은 가차 없는 경쟁이 인간 종만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종도 위험에 처하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오늘날의 인간 사회에 직접적인 시사점을 준다.
장소의 원칙
생명은 각자 자신이 서있는 특정한 물리적 장소의 미생물 환경이 일으키는 지극히 복잡한 세부 조건들에 적응해, 여러 생물들로 구성된 복잡한 생태계를 조직하는 법을 터득해았다. 각각의 종은 자신이 속해 있는 장소의 특정한 생태계에서 진화하고 학습한다. 그 안에서 전체의 잠재력을 최적화하기 위해 자원을 포착하고 공유하고 사용하고 저장하는 생명 공동체의 협업적인 노력에 각자 자신의 기여를 한다. 때로 외래 종이 침입했을 때 발생하곤 하는 재앙적인 결과를 보면, 어떤 생태 공동체라도 그 안에서 상호 협력적인 방식으로 학습하고 연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잘 알 수 있다. 어떤 생태계에 외래종이 침입하는 것은 건강한 신체에 악성 종양이 생기거나 번성하던 지역경제에 월마트가 들 어오는 것과 비슷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마치 우리가 외래종인 것처럼, 마치 우리가 암 세포인 것처럼 지구공동체의 생명 시스템과 관계를 맺어왔다. 우리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더 큰 공동체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무한한 확장을 추구했다. 우리는 모든 성공적인 종이 우리보다 먼저 터득한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즉 지구에서 우리가 서있는 특정한 장소의 미세 환경들에 적응하면서, 살아있는 공동체의 협업적인 구성원으로서 기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투과성 있는 경계의 원칙
생명은 내부 에너지의 흐름을 일관되게 유지하려면 모든 수준에서 투과성 있는 막으로 스스로를 감싸야 한다는 것을 터득했다. 그 막을 통해 물질과 에너지를 환경에서 받아들이고 환경으로 방출하는 한편 약탈자를 막아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세포벽이 깨진다면 세포 내의 물질과 에너지가 즉시 환경의 물질과 에너지에 섞여버리게 되고 그 세포는 죽게 된다. 다세포 생명체도 내부의 에너지와 정보 교환이 응집성을 유 지하려면 피부 등 투과성 있는 보호막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생물 공 동체나 생태계도 대양, 산맥, 기후대 등이 만들어주는 경계를 필요로 한다. 그래야 해당 생태계에 동화되지 않는 침입종을 막을 수 있다. 또한 지구 바이오스피어도 중력을 통해 대기와 오존층을 붙잡아두어서 우주에서 오는 방사선이 내부에 들어오는 것을 조절한다.
응집성을 유지하기 위해 보호막과 경계가 필요하긴 하지만 자기재생을 위해서는 환경과의 잘 관리된 교환 역시 필요하다. 따라서 조직의 모든 수준에서 경계막은 투과성이 있어야 하고 그 경계를 통과해 움직 이는 흐름을 해당 조직이 양방향 모두 관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조직이 주변과의 균형 잡힌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다. 성공적인 생명 조직은 이기적인 이득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온전성과 응집성을 유지하고 이웃과 호혜적이고 균형 잡힌 교환을 해야 할 필요성에서 경계막을 유지한다.
전지구적으로 강력한 저항을 불러온 무역 협정은 기업이 자신의 배타적인 이익은 명백한 보호막을 둘러 보호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사람과 자연의 생명력을 추출해 금전적 이득을 꾀하는 약탈적 기업으로 부터 개인, 가정, 공동체, 국가가 내부적으로 생명 에너지의 흐름을 응집성 있게 유지하기 위해 두르고자 하는 보호막은 해체하려 한다. 이러한 무역 협정은 면역계로부터 암세포를 보호하려 하는 것과 마찬가 지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그렇듯이, 건강한 인간 공동체의 기능은 투과성 있고 관리가능한 경계에 의해 유지된다. 규제 받지 않는 약탈적 기업과 투기 세력의 침입에 가정, 지역, 국가가 보호막 없이 열려있게 되면, 혹은 거꾸로 경계를 굳게 닫아걸어서 외부와 균형 있고 호혜적인 교환을 아예 하지 않게 되면, 생명력은 빠르게 소실되어 버릴 것이다.
풍부함의 원칙
생명은 절약과 공유가 모두를 위한 풍성함을 달성하는 데 핵심이라는 것을 터득했다. 생물 공동체들은 매우 뛰어난 미세 조정을 통해 굉장히 효율적으로 에너지와 유용한 물질을 포착하고 재순환한다. "낭비하지 않으면 부족할 일도 없다"는 말의 살아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누군가의 폐기물은 누군가의 자원이 되고 물질과 에너지는 세포, 조직, 종속 내부에서, 또 그것들 사이에서 협업적인 작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사용, 재순환된다. 그럼으로써 에너지와 유용한 물질이 개별적인 경계와 집단의 경계 밖으로 방출되는 것을 최소화한다.
생명의 풍부함은 에너지와 물질을 공유하고 보호할 수 있는 역량과 공동체 전체의 잠재력을 높이기 위해 정보를 자유롭게 공유하는 역량 둘 다에 달려있다. 경쟁적으로 물질을 포획함으로써 제약 없는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암세포와 침입종의 이데올로기다. 진정한 풍부함은 절약, 호혜성, 나눔에서 나온다.
다양성의 원칙
생명은 다양성이 창조적 잠재력의 본질적인 토대라는 사실을 터득 했다.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부터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듯이, 문화도 다른 문화로부터 고립되어 존재할 수 없다. 생명은 더 많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생명 공동체일수록 위기에 닥쳤을 때의 회복탄력성이 높아지고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창조적 혁신의 잠재력도 더 커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인간 공동체도 연령, 젠더, 문화, 종교, 인종에 대해 더 많은 다양성을 가질수록 회복탄력성이 높아지고 창조적 혁신의 잠재력이 커진다. 하지만 오래도록 온갖 쇼비니즘 때문에 다양성의 이득을 거부해온 우리 인간은 다양성의 이득을 인정하고 육성하고 누리는 법을 아직도 배우지 못했다. 502
지구공동체
제국에서 지구공동체로의 전환에는 두 가지 기본요소가 필요하다. 하나는 우리를 규정하는 가치를 화폐에서 생명으로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배의 관계를 건강한 생명 시스템에 대한 연구들이 말해주는 원칙에 의해 조직된 파트너십 관계로 바꾸는 것이다. 503
☆17장 정리:
뉴튼 물리학은 물질만이 실재라는 전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현대의 양자 물리학은 고체 물질에 대해 매우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 고체 물질은 대체로 빈 공간으로 되어 있고 해당 사물의 형태와 물질성은 계속해서 움직이는 에너지 입자들이 지속적으로 맺는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임이 드러났다. 관계가 실재고 물질은 착각이다.
옛 생물학은 각 생명체는 개별적으로 다른 모든 생명체와 생존을 위한 경쟁을 벌인다고 보았다. 하지만 최신의 생물학은 생명이 협력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생존하는 종은 전체에 복무할 수 있는 자신의 장소를 찾아낸 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생명은 공동체다.
심리학자들은 행복이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달려있다는 고대의 지혜를 여러 연구를 통해 재확인했다. 제국은 슬픔으로 가는 길이고 지구공동체는 기쁨으로 가는 길이다. 관계가 모든 것의 토대다.
인간은 서로와, 또 자연과 연결되고자 하는 강력한 충동을 가지고 있다. 아마 다른 어느 종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물리적, 심리적으로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취약성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분리와 소외의 고통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우리는 연결됨의 감각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려 한다. 사랑하는 대상을 파괴하면서까지 말이다.
지구공동체는 제국의 슬픔과 소외에 대안을 제공한다. 그 대안은 생명의 가치를 금전적 가치보다 앞에 놓고 지배의 조직 원리보다 파트너 십의 조직 원리에 의해 구성되는 삶의 방식이다. 우리의 관계를 더 깊이, 또 더 상호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수록 우리는 더 풍성해지고 더 인간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갈망하는 통합적인 관계와 현대 생활이 일으키는 소외와 분절의 관계 사이의 간극은 우리 앞에 놓인 변화의 과제가 얼마나 장대한지를 말해준다.
하지만 경로를 다시 잡는 것의 핵심은 우아하게도 단순하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집합적인 경로에 지침을 주고 있는 제국의 이야기를 인간 의식의 가장 높은 차원에서 나오는 지혜에 토대를 두고 이제까지 인간이 알아낸 모든 지식과 경험의 총체를 반영하는 지구공동체의 이야기로 대체하는 것이다. 512
제18장 함께 살아 낼 새로운 시대의 이야기들
제국을 뒤에 두고 가려면 번영, 안보, 의미에 대한 제국의 이야기들을 제쳐놓고 지구공동체의 가능성을 말하고 생명을 긍정하는 이야기들을 통해 소통될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협업적인 관계를 자유롭게 실험해볼 수 있는 "새로운 문화적 공간"을 창출하고 있는 수 백만명의 활동 속에 암묵적으로 담겨있다. 새로운 문화의 “조직화 세포'라 부를 만한 이들은 이러한 활동을 통해 더 고차원의 인간 의식을 불러온다. 이제 우리는 이들의 활동에 암묵적으로 담겨있는 이야기들을 명료하고 일관된 내러티브로 표현하는 법을 알아내야 한다. 516
지구공동체의 의미 이야기
인간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 존재의 목적은 무엇인지와 같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지구상 유일한 종이다. 아주 오랫동안 인류는 창조의 이야기들을 통해 그 답을 찾으려 노력해왔다. 대체로 은유적이며 고대로부터 내려온 창조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기원에 대한 공통의 이해를 제공했고 우리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했다.
15장에서 우리는 현대 서구 문화가 불완전한 두 개의 이야기 중에서 잔인한 선택을 강요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하나는 이제 심각하게 시대에 뒤떨어지게 된 뉴튼 물리학이다. 이것은 존재 전체를 우발적 사건과 물질적 인과관계로 환원하고, 의식, 지능, 자유의지를 부정하여, 삶에서 의미를 제거한다. 다른 하나는 서구의 지배적인 종교 이야기로 초월적인 것의 존재를 긍정하긴 하지만 인간의 관찰과 경험이 지구의 여건을 탐구하는 데 합당한 토대라는 것을 부정한다. 또 지구는 우리가 머물다 가는 정거장이며 이 정거장에서 우리는 사악한 세계 속에 존재해야 하는 시간을 견뎌야 한다고 말한다. 내세에서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 외에 현세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 두 가지 이야기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선택의 역량을 부정하는 것이고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특질을 버리는 것이다.
물론 창조 이야기는 실증근거를 바탕으로 해야 하지만 그 실증근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우리 삶에 어떤 시사점을 주는지에 대한 해석은 결국 믿음에 대한 질문들로 이어진다. 진보주의자들은 공개적으로는 물론이고 자기들끼리도 이에 대해 거의 논의하지 않는다. 정작 우리의 과업에 토대가 되는 질문들인데도 말이다. 나는 우리가 우리의 의미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한다. 그런 취지에서, 위대한 전환의 과업에 나서도록 내게 동기를 부여 해주는 의미 이야기를 하나 제시해보고자 한다.
우주(그리고 우주 안의 모든 것)는 불가분으로 상호연결된 전체이며 보편적인 영적 지성[영성]으로부터 나온다. 이 영성이 모든 존재의 토대이며 인간은 이 영성을 많은 이름으로 알고 있다.
영성은 스스로를 발견해가는 장대한 여정에 있다. 이 여정은, 배 워가고 되어가는 영원한 과정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해나 감으로써 자신을 알고자 하는 추구의 여정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신성한 추구의 산물이자 그러한 추구가 지속적으로 필 쳐지는 데 쓰이는 도구다. 창조가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영성의 발현이므로 신과 창조는 동일한 것이다. 이는 우 리가 매순간 신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렇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영성으로부터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물질에 선택의 역량을 불어넣는 "생명'은 창조가 스스로를 발견 해가는 여정의 가능성을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높였다. 생명 은 그 속성상 다른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다양 성이 풍부한 협업적 공동체에서, 그리고 개체와 종이 자신과 전 체 모두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참여하는 동태적인 상호 작용 속에서, 가장 활력을 가질 수 있다. 영토, 식량, 성적 파트너 등을 위한 "경쟁"도 전체의 메커니즘에 기여하지만 "협업과 호혜 성'이라는 더 깊은 패턴과 대위법적인 조화를 이루는 한에서만 그렇다.
개인의 후생과 공동체의 후생은 불가분이다. 전체의 건강은 개개 인의 건강과 온전성에 달려 있고 개인의 건강은 전체의 건강과 온전성에 달려있다. 어느 쪽도 다른 쪽 없이 생존하거나 번성할 수 없다. 생존하고 번성하는 종은, 전체의 필요에도 동시에 복무 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부양하는 법을 터득한 종이다. 각각의 새 로운 종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전체에 복무할 수 있는 자신의 자 리를 찾는 것이다. 인간은 아직 이 과제를 달성하지 못했다.
우리가 아는 한, 인간은 성찰적인 의식과 선택의 역량이 있다는 점에서 창조의 가장 대담한 실험이다. 선택을 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고, 가장 성숙했을 경우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것도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서 선은 창조의 목적에 복무하는 것이 고 악은 창조의 목적에 반하는 것이다. 그렇게 규정된 선과 악의 차이를 더 깊이 이해하고 삶을 선에 복무하는 방식으로 조직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행해야 할 핵심 과 제다.
역사 내내 인간은 증오와 사랑, 탐욕과 너그러움, 가차없는 경 생과 이타적인 협력 모두가 우리 인간의 본성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왔다. 여러 가능성 중에서 선택을 하는 것 또한 우리의 본성이며 그 선택을 현명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 다. 우리는 지구라는 우주선에서 복잡하고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 살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모두 공동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우주선의 생명 유지 시스템은 매우 취약하고 과부하 가 걸린 상태다. 우리 공동의 운명이 평화, 정의, 풍성함으로 귀 결될 것인지, 폭력, 압제, 결핍으로 귀결될 것인지는 우리의 선 택에 달려있다.
인간 종이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궁극의 성취라는 개념은 아직 미성숙한 종의 정신에서 나온 근거 없는 개념이다. 이것은 전체 우주가 지구를, 따라서 인간을 중심으로 돈다는 개념의 연 장선일 뿐이다. 우주에서 오로지 인간만이 의식적인 지능을 발현 한다는 개념은 더더욱 근거 없는 개념이다. 우리는 우주를 탄생 시킨, 그리고 매 순간 재탄생시키는 영성의 발현이지만, 우리가 영성의 관심에서 중심에 놓여있다거나 영성이 우리의 생존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한때 진화적 성취의 최전선에 있었던 많은 종들이 우리가 도착하기 한참 전에 망각 으로 사라졌다.
창조는 인간에게 성찰적 의식의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고유한 기 회를 선물했다. 이 기회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 이고 그 선택의 결과도 우리가 감수해야 한다.
우리의 여정에서 다음 단계는 인간의 긍정적인 잠재력을 온전하 게 계발하도록 지원해주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잠재력을 가장 잘 계발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고 전체를 위해 그것을 적용해 가면서 말이다. 진보적인 그리스도교도는 이것을 지상에 신의 왕 국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왕국은 모든 사람이 서로와 또 살아있는 지구와 역동적이고 창조적이고 균형 잡힌 관계 속에서 생산적이고 충족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창조의 일을 진전시키 는 데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근본적으로 민주적인 사회다.
이 이야기는 종교적 신비가들의 영적 지혜가 말해주는 통찰과 현대 과학이 발견한 지식을 통합해 이끌어낸 것이며, 지구공동체의 번영 이야기와 안보 이야기에 토대가 될 더 깊은 개념들을 제시한다. 여기에 제시된 번영, 안보, 의미 이야기는 관계야말로 모든 것의 토대라는 창조의 통합적인 진실로 수렴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서로와 또 지구와 창조적이고 관여적이고 기쁨이 가득한 관계를 맺을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생기 있고 상호연결된 공동체에서는 번영, 안보, 의미 모두를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서로와 돌보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를 깊이 열망한다. 이 열망은, 더 온전히 인간다워질 수 있는 법과 개인으로서 또 종으로서 우 리의 적절한 자리를 찾아낼 수 있는 법을 배워가는 "삶의 보이지 않는 학습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촉구다. 위대한 전환의 과업에 참여하는 것은 영적인 실천의 한 형태다. 528
가능성의 이야기들을 발견하고 나누기
더불어, 14장에서 일별한 제국의 이야기와 지구공동체의 이야기 모두를 여러분 각자의 경험과 이해에 비추어 숙고해보는 토론 모임을 열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이야기꾼들 모임을 갖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면서 그것을 여러분 자신의 언어로, 또 여러분 자신의 경험에 충실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528
☆18장 정리:
인간은 삶의 상당 부분을 번영, 안보, 의미를 추구하며 보낸다. 이 결정적인 시점에 우리가 번영, 안보, 의미의 지침으로 제국의 이야기를 선택할지 지구공동체의 이야기를 선택할지에 따라 미래 세대가 우리 시대를 거대한 해체의 시기로 기억할지 위대한 전환의 시기로 기억할지가 판가름날 것이다.
현재의 경기장은 전혀 평평하지 않다. 뉴라이트의 반향실은 거대 미 디어의 메가폰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막대하게 증폭하면서 정보 환경을 제국의 이야기로 포화시켜버렸다.
하지만 궁극적인 강점은 지구공동체의 존재로서 살아가고자 하면서 위대한 과업에 나서는 우리들 쪽에 있다. 본질적으로 제국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소외된 결과다. 제국은 개인의 권력과 영예라는 판타지로 우리를 유혹해,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의미를 구하도록 유도한다. 폭력, 지배, 물질의 축적 같은 데서 말이다. 삶으로부터 소외되어서, 우리는 의미가 창조의 지속적인 전개에서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자리를 발견하는 데서 나온다는 진리에 눈을 감는다.
위대한 전환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시 배우는 데서 시작되며, 이것은 삶을 긍정하는 새로운 이야기에 달려있다. 삶을 부인하는 제국의 이야기는 삶을 긍정하는 지구공동체의 이야기와 경쟁할 수 없다. 건강한 아이, 가정, 공동체, 자연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열망에 목소리를 주는 쪽이 지구공동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직접 살아내는 실천과 함께 표현된다.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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