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의 철학_한자경

5장. 공성에 입각한 인간 이해 : 여성과 남성

백_일홍 2018. 11. 22. 10:13

한자경, <일심의 철학_1부.5장>

1.아공.법공의 개체

 

인간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분류인 여성과 남성은 인간 본질인 인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태극의 이치, 리일분수

흔히 남녀의 차별을 설명하기 위해 언급되는 음양의 기는 리 또는 인성자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주: 여성 남성에 따라 그 본질, 성품, 색깔이 다르고 따라서 삶의 지향점이나 방식 자체가 다르다고 본다. 우리는 흔히 그 다름 때문에 여성과 남성이 서로 이끌리며, 그 다름 때문에 여남 간에 조화가 성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음양의 조화. 그 음양의 이치, 천지의 이치에 따라 여성적 삶과 남성적 삶은 그 영역과 방식이 서로 다르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그 서로 다른 둘이 합하여 하나를 이룰 때, 다시 말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룰 때,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간주된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적 인간관이며 남녀관이다.)

 

이 글은 우리의 일상적 인간관 내지 남녀관을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인간 개체는 여성인가 남성인가에 앞서, 그런 현상적 차별성을 넘어서는 인간 자체, 인성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인성이란 어떠한 차별적 본질이나 성품 또는 색깔로 규정될 수 없는, 어떠한 특정 삶의 방식으로도 강제될 수 없는 자유로운 인격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즉 여성이나 남성으로 구별되기 이전의 인간 자체, 인성을 일체의 현상적 규정을 넘어서는 마음의 초월성 및 자유로 해명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인성 개념에 근거해서 음양을 각기 분리된 여성성과 남성성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각 개체 자체가 포괄하는 두 힘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밝혔다. 즉 개체를 형성하는 경계에 있는 중심의 무한소로 모이는 내향력을 음으로, 바깥의 무한대로 퍼지는 외향력을 양으로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어느 개체도 음이거나 양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 내에 음과 양을 동시적으로 지닌다. 결국 음양의 조화란 각 개체 내에서 실현되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의 독립적인 온전한 인격이 완성되는 것이다.

 

흔히 그렇듯이 남녀를 합해 하나가 되어야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은 결국 인간 개체를 온전한 인격이 아닌 반쪽으로 불구화하는 것일 뿐이다. 여성이나 남성을 전체의 부분, 반쪽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로, '일즉 일체'의 일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누군가 반문할 것이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인간, 인성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것은 단지 추상화된 관념 그러기에 어떠한 내용도 담고 있지 않은 단순한 이름 뿐이지 않는가? 규정된 질료, 개체화된 기를 넘어서는 하나의 보편을 추구한다는 것, 그것만큼 고질적인 형이상학적 병이 또 있겠는가?

 

그렇다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인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딸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선생도 아니고 대한민국 시민도 아닌 나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개체화되고 규정된 구체적 내용들을 사상하고 나면 나 자체로서, 인간 자체로서 남겨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공이다. 인간 뿐 아니라 일체 존재가 다 마찬가지이다. 인연에 따라 형성된 상대적 내용들을 다 제외하고 그 자체의 본질, 자성을 구하면 그것은 결국 공이다. "무자성이므로 공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자아란 그 처럼 구체적으로 규정된 성질들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가? 아니면 자아란 바로 그 제한된 현상 너머의 공성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가?

 

여기서는 후자의 관점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논하려고 한다. 그 공에서 나를 찾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식학자, 세친, 인간의 본질인 불성은 바로 그 공 안에 놓여있고 그 공을 통해 드러난다고 보았다. "불성이란 아공 법공을 통해 드러나는 진여이다" 공에서 드러나는 진여가 바로 진여심, 마음이다. 여기서 마음은 제한되고 규정된 것에서 비롯되는 의식, 따라서 제한된 것을 자기 자신이라고 의식하는 경험적 자기의식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은 규정되지 않고 제한되지 않는 것을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의식하는 경험초월적 자기의식이다. 마음은 한계지워지지 않은 무한에서 비롯된 의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자리는 공이다. 마음이란 바로 그 공의 자각, 공의 자기의식이다. 인성이란 결국 불성이고 신성이며, 마음이고 일심이다. 인간 공성의 자각으로서의 이 일심을 바로 그 인간의 본질로 알지 못한다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신도 타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공성 내지 불성의 마음, 초월적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

경험적으로는 여자와 남자의 차이가 크지만 그것이 그 두 인간의 본질적 차이가 아니다. 그의 성염색체 중 Y가 X였다면 그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였을 것이다. 일체가 인연이 화합하여 생성되고 변화하다 소멸하는 것이지, 그 과정 그 어느 하나를 놓고 '이것이 바로 나다. 이것이 바로 나의 본질이다'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아공'이다.

 

그런데 이처럼 개체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나면, 현상적으로 그 개인을 이루는 탈인격적인 요소들과 관계들이 실체화된다. 인간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이라든가 인간의 사유를 지배하는 언어 또는 인간의 행동양식을 규정하는 삶의 형식이나 규칙 나아가 도덕원리들, 한마디로 관계의 법칙들이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본질로 간주된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개체성은 전체와 관계성으로 해체되고 만다. 아공의 자각에 뒤따르는 법집의 출현이다. 자아가 인연생성의 현상이듯이, 그 자아를 형성하는 전체 질서 또는 자아들 간의 관계 역시 인연생성의 것이지 그 자체가 실체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법공이다. 개인주의는 아집의 표현이고 공동체주의는 법집의 표현이다.

 

이들 모두 개인과 전체를 공으로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개인과 전체, 일과 일체가 상호 배타적인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간주된다. 전체를 담고 있는 개체, 일즉 일체의 개체로 이해되면, 개체 너머 전체 관계를 실체화하는 법집은 저절로 와해된다.

 

개체가 전체의 부분인 것이 아니라면, 따라서 개체의 경계가 개체를 전체로부터 분리하여 부분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개체의 경계는 과연 무엇인가?

 

2.개체 경계의 성립 :음양의 재해석

 

개체가 자기 경계를 가진 것이라면, 그 각 개체에 대해 어떻게 일즉 일체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경계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무한과 구분되는 유한이 산출한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가 이미 무한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경계는 내항력과 외향력이 반대방향으로 마주함에서 성립한다. 그런데 내향력이란 그것이 지향하는 공간 없는 한 점으로서의 무한소에서 비롯되는 힘이며, 외향력이란 그것이 지향하는 끝없는 무한으로서의 무한대에서 비롯되는 힘이다. 그러므로 내향력과 외향력 사이에서 성립하는 각 개체의 경계는 그 두 무한의 힘이 형성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체, 즉 일이란 그 양극에 놓인 무한소와 무한대의 현현이다. 내향력과 외향력, 그 두 힘을 산출해내는 무한소와 무한대는 결국 하나의 무한이다. 무한소와 무한대는 결국 하나로 통하기 때문이다.

 

무한을 향한 두 힘, 결국은 하나로 통하는 양 힘이 형성해 놓은 경계가 바로 개체의 경계이다. 그러므로 각 개체는 무한의 자기 현현이며, 무한자가 스스로 자신의 경계를 형성하는 유한화 활동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 각 개체가 표현하는 무한소와 무한대 사이에 일체가 놓여 있으므로, 일은 결국 일체를 포함하여 '일 즉 일체'가 된다.

 

무한소와 무한대 양쪽으로 향한 두 힘 사이에서 성립하는 개체의 경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무한히 이동한다. 경계는 매 순간 새롭게 형성되며, 따라서 머무르는 바 없이 이동해 간다.

 

존재하는 일체의 개체는 무한의 자기 현현, 공의 드러남이다. 모두가 동일한 무한이 형성하는 유동적 경계의 존재이므로 각 개체만의 불변적 자성, 절대적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체의 핵심은 공이다. 공이기에 일체 존재가 그 안에 담길 수 있다.

 

3.개체의 초월적 자유 : 일심

 

일즉일체의 사실 자체 보다 한층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그 일즉 일체의 사실을 의식한다는 사실이다. 그 점에서 우리 인간은 먼지나 이끼나 돌맹이와 구분된다. 인간의 경계에서 작용하는 무한의 힘과 먼지의 경계에서 작용하는 무한의 힘은 동일한 힘이다. 둘다 전체 무한의 현현, 공의 개체화이다.

 

이들의 차이점 하나는 자신 안에서 자신을 있게 하는 그 무한과 공을 의식하지 못하고 다른 하나는 그 무한과 공을 바로 자기 자신의 본래의 모습으로 자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무엇을 통해 설명될 수 없는 마지막 신비이다. 그 신묘한 자각능력을 우리는 '마음'이라고 부른다.

 

마음은 바로 그 마음이 자리한 공의 자기의식, 현상적 개체를 생성하는 무한의 자기의식이다. 자신을 공으로 자각하기에 그 마음은 어느 하나의 경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현상적으로 규정된 개체적 자기 모습에도, 개체들을 규정하는 전체적 법칙에도 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공의 자각, 경계의 넘어섬으로부터 자신이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공을 자각한 그 마음이 바로 자유다. 자유로운 마음, 그것은 모든 경계, 한계를 넘어섰기에 무한의 마음이며, 모든 상대적 분별을 넘어섰기에 절대의 마음이다.

 

이 처럼 공과 자유를 자각한 마음, 하나의 경계에 매임이 없는 무애의 마음을 우리는 일심이라고 한다. 이 일심이 바로 특정 경계에 매여 있는 산심으로서의 우리의 일상적 마음 근저에서 작용하는 본래적 마음이다.

 

바로 이 일심이 표현하는 무한과 절대의 의식, 자유의 의식이 동서를 막론하고 형이상학의 근본정신이 된다. 라이프니츠의 대우주를 반영하는 소우주로서의 모나드, 칸트의 서로 간에 수단으로가 아닌 그 자체를 목적으로 대해야 할 인격, 헤겔의 '나 즉 우리'의 정신. 초월적 자아는 자연이나 물질로 현상화하는 자기 실현력으로서의 정신, 영혼 또는 마음으로 이해된다.

 

불교의 이상은 단지 현상세계의 연기 원리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일체가 연기라는 사실, 그러므로 연기에 의해 규정된 일체의 존재가 공이라는 사실의 깨달음, 그 깨닫는 순간의 해탈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깨닫는 해탈의 주체는 마음이다. 그러한 일심과 일심과의 교통이 곧 사랑이고 자비이며 인(천지에 나아닌 것이 없음을 느끼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4.진정한 하나되기와 잘못된 반쪽되기

 

인간 개체가 곧 전체라는 것, 일즉 일체의 일심이라는 것. 경계지어진 유한 속에서 경계 너머의 무한을 추구한다는 것, 바로 그 초월과 자유에 인간 삶의 가치가 놓여있다는 것을 너무나 자주 망각한다.

 

이를 망각하면 개체는 전체의 한 부분으로 전락한다. 일체 존재가 나 아님이 없다고 느끼는 내감의 인이 상이한 개체 간의 외적 관계를 규정하는 의나 예의 체계로 바뀌어 간 것, 그리고 결국은 그 예에 따라 인간과 사회와 우주를 질서지우는 주희의 성리학 체계로 발전해 간것,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 개체가 자체 내의 전체를 상실하고 단지 전체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는가를 발견하게 된다.

 

현상적으로 주어진 각자의 위치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차별적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예의 체계가 고정화될 수록 개체는 자체 내의 전체를 잃어버리고 파편화된다.

 

예로서 가정과 국가를 지키려한 주희의 성리학은 음양의 이치를 통해 아공은 알았지만 그 힘을 실체화함으로써 법집을 벗어나지 못한다. 양을 하늘로, 음을 땅으로, 양을 남성으로, 음을 여성으로 간주함으로써, 음과 양을 한 개체에서 성립하는 무한의 힘으로 이해하지 않고 각각의 개체를 그 중의 하나의 힘으로 고정화시킨 것이다. 여자 또는 남자로서 존재하는 개체를 각각 반쪽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가는 남녀를 합하여 하나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한 인간을 반쪽으로 만드는 것이다.

 

안사람/바깥사람, 집사람/주인양반이라는 우리의 호칭부터가 그러한 불구적 남녀관을 말해준다. 집안을 자신의 유일한 거주지라 생각하며 집 밖에 나서면 아무 권리도 찾지 못하는 여자들이 많이 있다. 또는 스스로 반쪽이 되어 밖이 되고 자기 아닌 타인을 자신의 나머지 반인 자신의 안으로 삼는 그런 어리석음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집 밖에서는 노동을 통해 돈만 벌어 올 뿐 집에만 들어오면 스스로 의식주를 처리할줄 모르는 불완전한 남자들이 많이 있다. 그렇게 서로가 불구화된 반쪽들이기에 그 반이 없으면 나머지 반이 견디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장님과 다리불구자가 서로가 서로를 꼭 필요로 하듯이, 그 필요성의 의식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주석: 1.일즉일체, 리일분수, 일심사상, 인내천사상, 인간 각자의 절대성, 그 초월과 자유의식의 표현임. 불교나 유가 등 동양사상 일반을 개체성의 자각이 배제된 관계론적 사유만으로 오독하지 말자. 2.여성주의, 여성과 남성에 대해 그 자연적 또는 사회문화적 성차가 무엇인가를 밝히려 하기 이전에 우선 인간, 인성이 과연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인간의 본래 모습인 공에 대한 자각, 그 공의 자각으로서의 일심, 그리고 그 일심으로서의 자유와 평등의 인성을 인간 각자의 부정할 수 없는 핵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인간을 상이한 두 부류인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짓고 시작하는 모든 논의는 한결같이 현재적인 남녀 불평등 구조와 그로 인한 현상적 차별상을 고정화하고 절대화하는 잘못을 피할 길이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여성주의에서 우리가 듣는 말은 무엇인가? 여태까지 사회를 지배하는 힘이 이성과 고로스 중심의 사유였다면 이제는 보다 더 전인적인 감성과 욕망이 인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태까지 개체 중심의 사유, 개인선에 해당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의 원칙'이 지배원리였다면, 이제부터는 보다 관계 중심적 사유, 공동체적 선에의 추구, 타인에 대한 '배려의 정신'이 요구되지 않겠는가? 여태까지의 사유의 특징이 남성적이었다면 이제 그 남성사회에서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던 여성적인 것이 제대로 인정받아야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탈이성과 탈중심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던적 여성주의자들 또는 길리건적 배려의 윤리나 레비나스적 타자성의 윤리를 신봉하는 현대 여성주의자들이 펼치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나마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는 오늘날의 남성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이다.

 

그들은 아직도 자립성과 이성을 남성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배려는 여성적인 것, 즉 여성이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관계의 중심에는 남성 자신이 서 있어야 하고, 그 주위에 서 있는 여성이라는 주변적인 것, 타자적인 것도 더불어 인정해주자는 생각에서이다. 하나의 가치에만 편중하지 말고 둘 다를 포괄하자는 그럴 듯한 소리다.

 

그러나 우리가 극복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여느 한 가치에의 편중함이 아니다. 그 한쪽 가치뿐 아니라 다른 쪽 가치도 중요하지 않은가, 이성 뿐 아니라 감성도, 개체성뿐 아니라 관계성도, 자아뿐 아니라 타자도, 정의뿐 아니라 배려도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절충적 사유 속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인간 유영화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 불구화의 사유이다.)

 

이제 어느 누구도 불구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불구의 필요성을 사랑이라고 미화하지 않는 때가 올 것이다. 하나의 영혼이 다른 영혼 안에서 자기와 다른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닮아가려 하고, 자기와 같은 것을 발견하면 그 하나됨을 즐기게 되는 그런 진정한 의미의 하나됨을 사랑이라고 인식하게 될 것이다.

 

하나와 하나가 만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느껴질 때,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하나됨이다. 하나의 개체마다 무한을 간직했기에, 일 즉 일체이기에 그 공의 의식 속에서, 그 일심 속에서 하나임을 향유할 수 있다.

 

시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 상대의 경계를 접촉하고자 갈구하는 것이다. 서로의 경계를 접촉하고자 함은 바로 그 경계에서 작용하는 하나의 무한을 함께 느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지향하는 바는 서로를 가르는 유한의 경계를 넘어 무한에서의 진정한 하나됨이지, 서로를 반으로 규정짓는 경계를 고수함으로써 끝까지 반으로 남아 그 두 반쪽을 더해 하나를 이루려는 거짓된 하나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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